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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계를 넘어서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278 추천 수 0 2010.03.30 08: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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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4:5-15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9738 

emoticon 2008.6.22.

예수님 당시에 경건한 유대인들은 유대 지역에서 갈릴리 지역으로 여행할 때 사마리아 땅에 발을 딛기 싫어서 요단강 우편으로 우회하는 일이 많았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 사람 사이에 아주 지독한 지역감정이 자리하고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민족이 아니라, 모두 아브라함을 같은 조상으로 하고 있는 사람들이 이렇게 서로를 싫어한다는 이상하지만 거기에는 그럴만한 역사적 사정이 있습니다.
그 역사적 사정이라는 게 힘없는 민족이 겪게 되는 그런 일들이었습니다. 우리나라도 그렇지만 힘이 없었던 이스라엘 민족은 주변의 여러 제국들의 침략을 자주 받았습니다. 아시리아, 바벨론, 페르시아, 로마 등이 그런 제국들입니다. 제국은 이스라엘을 정복하고 제국과의 동화 정책을 펼쳤습니다. 자기나라 사람들을 정복지에 이주시키거나 정복한 나라 사람들을 자기 나라에 데리고 가기도 했습니다. 그 와중에 사마리아 지역의 사람들은 그런 이방 제국의 압력에 굴복해서 이스라엘의 순수성을 잃었지만, 유대 지역의 사람들은 유지했습니다. 그 뒤로 유대 지역의 사람들은 사마리아를 무시하기 시작했고, 따라서 사마리아 사람들도 유대인들을 멀리하기 시작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들은 주전 4세기 말에 그리심 산에 그들만의 성전을 세웠으며, 모세오경만을 성서로 받아들였습니다. 아브라함이 이삭을 바친 곳이나 멜기세덱을 만난 곳도 그리심 산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렇게 서로 반목을 거치다가 주전 111년 예루살렘의 제사장 요한 히르카누스가 사마리아 성전을 파괴함으로써 양쪽의 적대감은 절정에 달했습니다.
유대인의 거룩한 문서인 집회서 50:25,2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증오하는 민족이 둘 있는데, 세 번째 것은 민족이라 할 수도 없다. 세이르의 주민들과 블레셋인들, 그리고 세겜에 사는 어리석은(신을 믿지 않는) 자들(사마리아 사람들)이다.” 랍비 엘리저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마리아 사람의 빵을 먹는 사람은 돼지고기를 먹는 사람과 같다.” 아주 모욕적인 언사들입니다. 또 다음과 같은 원칙도 굳어져 있었습니다. “유대 사람과 사마리아 사람은 항아리를 함께 사용하지 않는다.” 결국 사마리아 사람과 유대 사람은 한 공동체를 이룰 수 없다는 뜻입니다. 서로 앙숙처럼 지냈기 때문에 유대의 경건한 사람이 사마리아 땅에 들어간다는 것은 상상하기 어려웠습니다.  

물을 좀 달라
예수님은 그 당시의 분위기에 아랑곳하지 않고 사마리아 지방의 시카르(수가) 동네에 들어가셨습니다. 유대의 예루살렘에 오셨다가 다시 북쪽 갈릴리로 올라가시는 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먼 길을 가시느라 피곤하셨습니다. 수가의 우물가에 앉으셨습니다. 수가 동네의 우물은 마을 한 가운데가 아니라 한적한 외곽지에 있었습니다. 그 장면을 상상해보십시오. 오전 내도록 걷다가 지친 나그네는 우물가에 앉아서 쉬면서 목을 축이고 싶어 했습니다. 그런데 두레박이 없으니 어찌할 도리가 없습니다. 물을 길러 나오는 동네 사람이 있으면 좋겠지만, 공교롭게도 그 시간이 정오에 가까웠다고 합니다. 뜨거운 태양빛이 바로 머리 위에서 내리쪼이는 그 시간에 물을 길러 나오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런데 예상외의 일이 일어났습니다. 한 사마리아 여자가 물을 길러 나왔다고 합니다. 그 지역이 사마리아 지역이기 때문에 사마리아 여자라는 사실을 굳이 밝히 않아도 됐겠지만 요한복음 기자는 그 사실을 강조하기 위해서 그렇게 밝히는 것 같습니다. 우물가로 조심조심 걸어오는 여자의 심정이 어땠을지는 우리가 얼마든지 예상할 수 있습니다. 이 여자가 정오에 물을 길러 나왔다는 것은 그가 동네 사람 만나는 걸 꺼림칙하게 생각했다는 뜻입니다. 그는 멀리서 웬 낯선 사람이 우물가에서 쉬고 있는 모습을 보았겠지요.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사람이 있다는 게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그나마 수가 동네 사람이 아닌 게 다행이었습니다. 우물가에 가까이 와서 힐끔 곁눈질로 쳐다보니 사마리아 사람들을 무시하는 유대 사람이며, 더구나 남자였습니다. 빨리 물 항아리에 물이나 채워서 집에 가야겠다고 서두는 바로 그 순간에 이 유대 남자가 자기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물을 좀 주시오.”
지나가는 나그네가 우물가에서 한 아낙네에게 물 한 모금 주시오, 하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닙니다. 우리의 옛 그림에도 이런 장면은 자주 나옵니다. 지혜로운 여자들은 물위에 한두 장의 나뭇잎을 띠우기도 합니다. 목이 갈한 나그네가 물을 천천히 마시게 하기 위한 조치이지요. 그러나 오늘 본문의 장면은 이렇게 자연스럽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물을 달라는 사람이 바로 유대 남자이기 때문입니다. 이 여자의 입장에서는 정말 당혹스런 일이었습니다. 속으로는 기가 막혔지만, 그래서 한 마디라도 대꾸를 하지 않을 수 없었겠지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당신은 유대인이고 저는 사마리아 여자인데 어떻게 저더러 물을 달라고 하십니까?”(9a절) 요한복음 기자는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서로 상종하는 일이 없었다고 보충해서 설명했습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이상한가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설명입니다.
이 뒤로 사마리아 여자와 유대 남자인 예수님과의 대화가 진행됩니다. 이 대화의 주제는 물입니다. 왜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 하느냐, 우리는 서로 미워하는 사이가 아니냐, 하고 까칠하게 따지고 드는 사마리아 여자에게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느님께서 주시는 선물이 무엇인지, 또 너에게 물을 청하는 내가 누구인지 알았더라면 오히려 네가 나에게 청했을 것이다. 그러면 내가 너에게 샘솟는 물을 주었을 것이다.”(10절) 사마리아 여자는 뒤로 물러서지 않습니다. 두레박도 없는 분이 어떻게 물을 주겠다는 거냐, 이 우물을 우리에게 유산으로 내려준 야곱보다 당신이 더 위대하단 말이냐, 하고 따졌습니다. 이미 여러분은 이 두 사람의 대화에서 나오는 물이 서로 다른 의미라는 사실을 눈치 채셨을 겁니다. 사마리아 여자는 실제의 물을 말하지만, 예수님은 영적인 물을 말합니다. 급기야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14절) 그러나 사마리아 여자는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선생님, 그 물을 저에게 좀 주십시오. 그러면 다시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을 길으러 여기까지 나오지 않아도 되겠습니다.”(15절)
이 사마리아 여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않는 물에 대한 예수님의 말씀을 정확하게 알아듣지 못했습니다. 그에게는 지금 당장 물 길러 나오지 않는 게 급선무였습니다. 그는 매일 물을 길러 나올 때마다 죽을 지경이었습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하면서 산다는 게 얼마나 불편하겠습니까? 매일 땡볕을 무릅쓰고 정오만 골라서 우물가로 나오지만 이따금 동네 사람을 만날 때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늘 조바심을 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목마르지도 않고 물 길러 나오지 않게 해주십시오, 하고 간청했습니다.

그분은 그리스도다
사마리아 여자가 예수님과 그의 말씀을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그에게 현재 가장 시급한 문제는 바로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보지 않고도 물을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사마리아 여자가 그런 한계가 있다 하더라도 더 중요한 것은 그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영적 깨우침을 받았다는 사실입니다. 오늘 본문 뒤에 이어지는 이야기를 보면 이 여자는 물동이를 내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예수님을 전했다고 합니다.(28,29절) 사람들 만나기를 극도로 꺼리던 여자가 사람들에게 “그분이 그리스도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고 전했다는 건 참으로 놀라운 변화입니다. 이 여자를 통해서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39-42절)
전체 이야기의 흐름을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보십시오. 예수님이 수가 동네의 우물가에서 휴식을 취하던 시간은 정오입니다. 아주 한적한 시간입니다. 사람들은 모두 집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고, 예수님의 제자들은 무언가 먹을거리를 구입하기 위해서 동네로 들어갔습니다. 바로 그때 한 여자가 물을 길러 왔다가 예수님과 대화를 했습니다. 그녀는 동네로 들어가서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알렸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으며, 그들은 예수님을 받아들였습니다. 극적인 반전이 일어났습니다. 처음에는 예수님 한 분, 다음에는 사마리아 여자, 그리고 이어서 수많은 사람들이 몰려왔습니다. 유대 남자가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니 무슨 말이냐, 하고 따지던 이 여자는 예수님을 그리스도일지 모른다고 생각하게 되었으며, 그의 말을 들은 많은 사마리아 사람들이 유대인이었던 예수님을 믿게 되었습니다. 유대인과 사마리아인 사이의 적대감이 모두 허물어졌습니다.
사마리아 여자 이야기와 비교해서 볼 때 3장에 나오는 니고데모 이야기는 다릅니다. 그는 바리새파 사람이었으며, 유대인들의 지도자 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남의 눈을 피해 물을 길러온 사마리아 여자와는 달리 아주 고상한 방식으로 예수님에게 접근했습니다. “선생님, 우리는 선생님을 하느님께서 보내신 분으로 알고 있습니다. 하느님께서 함께 계시지 않고서야 누가 선생님처럼 그런 기적들을 행할 수 있겠습니까?”(요 3:2) 예수님은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말씀하셨지만, 이 사람은 거듭나는 게 무슨 뜻인지 몰랐습니다. 사마리아 여자가 영원한 생수를 마시는 물로만 생각했듯이 니고데모는 거듭난다는 말을 어머니 뱃속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오는 것으로 생각했습니다. 영적인 차원을 모르기는 사마리아 여자나 니고데모나 마찬가지였습니다. 모르는 것은 똑같지만 그 사태의 심각성은 니고데모가 더 큽니다. 왜냐하면 니고데모는 전문적인 종교인이지만 사마리아 여자는 유대인들이 볼 때 비종교인이나 마찬가지였으니까요. 니고데모의 문제가 더 심각하다는 것은 그가 단지 종교 전문가라는 사실만이 아니라 그가 결국 아무런 깨우침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에 놓여 있습니다. 이에 반해서 사마리아 여자는 앞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단계에 까지 이르게 됩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니고데모와 사마리아 여자를 일부러 비교했는지는 단정적으로 말할 수 없지만, 그런 차이가 있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이런 대목에서 우리는 조금 불안합니다. 우리는 자칭 하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늘 진리를 추구한다고 주장합니다. 그런데 우리는 니고데모처럼 근본적인 것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모르는 사람들은 아닐는지요. 반면에 세상 사람들은 유대인들이 무시하던 사마리아 여자처럼 오히려 진리를 깨우칠 수 있는 가능성이 더 높은 건 아닐는지요. 설마 그럴려구, 하고 생각하지 마세요. 우리가 깨어있지 않는다면 순식간에 니고데모처럼 종교 전문가이지만 참된 깨우침이 없는 사람으로 떨어질 가능성은 늘 열려 있습니다.

바리새파와 사마리아의 경계를 넘어서  
그렇다고 해서 니고데모를 무조건 이상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지금 니고데모라는 사람을 깎아내리고 사마리아 여자를 추켜세우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는 그 당시의 종교관과 세계관을 거스르는 것입니다. 니고데모가 속해 있는 바리새파는 유대를 대표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전통만을 진리로 생각했습니다. 그런 전통에 따르면 사마리아 사람들은 무시당해야 할 사람들에 불과했습니다. 유대와 사마리아는 완전히 단절된 세계였습니다. 이쪽에서 저쪽으로, 저쪽에서 이쪽으로 넘어올 수가 없었습니다. 아무도 그 경계를 허물 수도 없었고, 허물 노력도 하지 않았습니다.
오늘 요한복음 기자가 말하려는 핵심은 바로 이것입니다. 유대와 사마리아의 경계가 허물어졌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은 유대인들만의 그리스도가 아니라 사마리아인들의 그리스도도 된다고 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런 민족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선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온 인류의 참된 그리스도라고 말입니다.
지금 우리에게 누가 사마리아 사람들인가요? 우리는 누구를 무시하고 있을까요? 무시한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하더라도 경계선이 자리하고 있는 대상은 누구인가요?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는 타종교인들이 일종의 사마리아 사람들일지 모르겠군요. 서울의 명동이나 번화가는 “예수천당, 불신지옥”이라는 팻말을 들고 다니는 분들이 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도 마이크로 찬송가를 불러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보고 싶어 하지 않는, 듣고 싶어 하지 않는 사람들 앞에서 그렇게 시위를 한다는 것은 그들이 무언가 자기들만의 경계선을 갖고 산다는 뜻이겠지요.
한민족은 지금 휴전선이라는 경계선을 두고 살아갑니다. 남쪽은 북쪽을 신뢰하지 않고, 북쪽은 남쪽을 신뢰하지 않습니다. 분명히 북쪽 공산당은 나쁘지 않느냐, 그런데 왜 양쪽 모두에게 잘못이 있는 것처럼 말하냐, 하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북쪽 체제는 많은 부분에서 불량합니다. 저는 지금 어느 체제가 상대적으로 우월하냐 하는 것을 말씀드리는 게 아닙니다. 사람들 사이에, 국가 사이에, 종교 사이에 놓여 있는 경계선을 말하는 겁니다. 예수님 당시에 바리새인들도 사마리아인들을 야만인 취급을 했습니다. 여러분, 여기서 생각을 깊이 있게 해야 합니다. 오늘 본문은 유대인들의 경계선 밖에 있던 사마리아인들에게도 예수님이 구원자라는 사실을 증언하고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북한 주민들에게도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미 답은 주어졌습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자신이 쌓아놓은 마음의 경계를 허물어야합니다. 그런 경계와 장벽이 이 사회 속에, 우리 개개인에게 얼마나 심각하게 작용하고 있는지는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사마리아인과 유대인의 경계를 예수님이 허물었듯이 우리는 우리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 우리 스스로 쳐놓은 울타리를 거둬야 합니다. 우리의 주님은 경계 안의 우리만이 아니라 경계 밖에 있는 모두의 그리스도이십니다. 우리는 바로 그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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