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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13:24-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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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758 |
2008.7.13.
마태복음 13장은 ‘비유의 장’이라는 이름이 붙을 정도도 여러 편의 비유를 다루고 있습니다. 1-9절에는 ‘씨 뿌리는 사람’의 비유가, 24-30절에는 ‘가라지’의 비유가, 31-32절에는 ‘겨자씨’의 비유가 나오고, 33절에는 ‘누룩’의 비유가, 44-51절에는 각각 ‘보물’, ‘진주’, ‘그물’의 비유가 나옵니다. 전체가 일곱 개이며, 그 사이에 비유에 대한 해설까지 나옵니다. 앞의 세 개는 농사와 연관되고, 네 번째 누룩의 비유는 가정일과 연관되며, 보물과 진주는 장사, 그리고 그물은 고기잡이와 연관됩니다. 마태복음 13장의 비유는 인간의 삶을 총망라한 것입니다. 비유는 어떤 진리를 알기 쉽게 전하기 위해서 그것과 비슷한 것을 비교하는 가르침인데, 예수님의 이 비유는 바로 하나님 나라를 가리키고 있습니다. 복음서에는 하나님 나라와 하늘나라가 교차적으로 사용됩니다. 동의어라고 할 수 있지요. 고대인들은 하나님이 하늘에 계시다고 생각해서 두 용어를 똑같이 사용했습니다. 오늘 하나님 나라가, 또는 하늘나라가 무엇인지 알고 싶으신 분들은 이 비유 이야기를 잘 들으십시오.
오늘 설교의 본문인 마 13:24-30절은 위에서 지적한 대로 소위 ‘가라지의 비유’로 일컬어지는데, 전체적으로 보면 이것도 역시 하늘나라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24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나라는 어떤 사람이 밭에 좋은 씨를 뿌린 것에 비길 수 있다.” 개역개정과 루터 번역은 이 공동번역과 조금 다릅니다. “천국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같으니”라고 했습니다. 두 번역의 뉘앙스가 약간 다릅니다. 공동번역은 하나님 나라가 씨를 뿌린 행위로 보고, 뒤의 번역은 좋은 씨를 뿌린 사람으로 봅니다. 크게 보면 비슷하지만 엄밀하게 보면 차이가 있습니다. 저는 개정개역과 루터 번역이 원본에 더 가깝다고 봅니다. 그 이유는 설교가 진행되면서 저절로 드러날 겁니다. 성서 본문이 말하려는 게 무엇인지 찾아봅시다.
농부는 누군가?
예수님의 이 비유는 아주 단순하고 확실합니다. 하늘나라는, 또는 천국은 좋은 씨를 자기 밭에 뿌린 사람과 비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게 도대체 말이 될까요? 하늘나라는 잘 먹고 잘 산다거나, 영원히 사는 곳이라고 해야 옳은 게 아닐까요? 요한계시록을 보면 하늘나라는 보석으로 만들어진 집에서 아무런 배고픔도 없이 행복하게 사는 곳으로 묘사되어 있습니다. 부자와 거지 나사로라는 예수님의 비유도 역시 부자가 죽은 다음에 간 곳을 뜨거운 불구덩이로, 거지 나사로가 간 곳을 아브라함의 품이라고 묘사합니다. 이런 설명에 따르면 하늘나라는 인간이 죽어서 가는 행복한 장소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이와 조금 다른 표현도 있습니다. 예수님은 공생애를 시작하면서 “회개하라, 하나님 나라가 가까이 임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하나님 나라는 죽은 다음에 가는 행복한 장소와는 다릅니다. 신학자들이 쓰는 용어로 바꿔 말하면 하나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입니다. 하나님의 평화와 정의와 사랑이 일어나는 사건입니다. 그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는 사실을 선포하신 예수님은 이런 하나님의 통치에 근거해서 사람들의 죄를 용서하고, 병을 고치고, 종교적 억압으로부터 해방시키셨습니다. 율법과 예루살렘 성전의 조직을 절대화한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의 그런 가르침과 행위를 용납하지 못했고, 결국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당시 유대교는 하나님 나라를 거절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자부하고 있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이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을 배척했다는 게 참으로 이상한 일입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생각이 다르면 그렇게 대립할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나님 나라를 어떻게 생각하나요?
오늘 말씀에 따르면 하늘나라는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사람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좋은 씨를 뿌리는 사람은 농부입니다. 농부가 하늘나라 자체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요. 하늘나라는 이런 농부와 비길 수 있다는 뜻입니다. 하늘나라는 우리가 어떤 것을 비유하는 방식으로만 조금씩 알아갈 뿐이지 단정적으로 무엇이다 하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실증의 방식이 아니라 비유의 방식으로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무슨 말인가요? 오늘 우리에게 주시는 비유의 이 말씀은 아주 단순한 것 같지만 그 실체를 따라가기는 어렵습니다. 잘 들어보세요. 우리가 하늘나라를 실증의 방식이 아니라 비유로만 말하는 이유는 그 나라가 곧 하나님 자체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곧 하나님의 통치이고, 그것은 곧 하나님 자체입니다. 우리가 아직 하나님을 직면하지 못했다면 결국 하늘나라도 직면하지 못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자신을 계시하는 것만큼만 우리는 겨우 따라갈 뿐입니다. 그래서 본문은 하늘나라를 어떤 농부와 비교한 것입니다. 그게 가장 가까운 설명이라는 겁니다.
여기서 농부는 구체적으로 누구인가요? 이 비유의 해명인 마 13:36-43절에 따르면 농부는 바로 ‘사람의 아들’인 예수님입니다. 밭은 세상이고, 좋은 씨는 하늘나라의 자녀이며, 가라지는 악한 자의 자녀라고 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마태복음을 비롯한 모든 복음서 기자들과 초기 기독교 공동체의 가장 기본적인 신앙고백입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예수님을 바로 하나님 나라로 인식하고 그렇게 믿었습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것이 지난 2천년 기독교 신앙의 토대였으며, 지금도 역시 그렇습니다. 여러분은 이런 대답을 잘 알고 있겠지만, 왜 그런 대답이 나왔는지를 설명하기는 힘들겠지요. 우리가 삼각형 내각의 합은 180도라는 공식은 알고 있지만 그런 공식에 이르는 과정을 잘 모르듯이 말입니다.
하늘나라와 예수 그리스도가 무슨 근거로 하나인지를 생각해보세요.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하늘나라에서 함께 영원한 복락을 누린다는 말은 가능하지만, 그 하늘나라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말은 어딘가 자연스럽지 않아 보입니다. 저는 앞에서 하나님 나라가 곧 하나님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하나님 나라는 어떤 장소가 아니라 하나님의 통치이며, 하나님의 존재방식이라고 말입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는 말은 예수님이 하나님이라는 뜻입니다. 조금 복잡하게 들리지요? 그래도 그런 방식이 아니면 우리는 성서의 세계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하늘나라를 다시 생각해야 합니다. 혹시 이렇게 생각하지는 않으셨나요? 하늘나라에 가면 가장 높고 가장 좋은 자리에 하나님이 앉아 계시고, 그 오른 쪽에 예수님이 자리하고 있으며, 우리는 각자 믿음의 능력에 따라서 여러 집에 흩어져서 천년만년 살게 될 거라고 말입니다. 이 세상에서 이루어지는 삶의 형식들을 벗어나지 못하는 한 이처럼 최고의 복지가 실현된 세상을 천국으로 생각하기가 쉽습니다. 그런 생각이 아무 절실하다 하더라도 그것은 고대인들의 세계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입니다. 마치 어머니를 좋아하는 어린 아들이 자기는 커서 어머니와 결혼해서 살겠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말입니다.
마태복음 공동체가 하늘나라를 예수님과 하나라고 생각했다는 것은 그들이 예수님을 하나님과 하나로 믿었다는 의미입니다. 이걸 다른 말로 하면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 보이는 인간예수에게 성육신했다는 뜻입니다. 하늘이 땅으로 내려온 것이지요. 이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며, 메시야이고, 세상을 완성할 심판자이며, 하나님과 동일한 권위를 갖고 계신 분이십니다. 초기 기독교는 예수님에게서 하나님의 계시가 완전히 실현되었다고 보았습니다. 그 증거는 물론 부활입니다. 죽은 자로부터의 부활입니다. 부활은 단순히 다시 살아난다는 의미라기보다는 궁극적인 생명으로의 변화를 가리킵니다. 그 생명은 곧 하나님 나라이기도 합니다. 그렇다면 결국 부활의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라는 말이 됩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기 힘들겠지요. 그것에 대한 명백한 증거를 대라고 요구할 겁니다. 우리는 이런 요구를 피할 수는 없습니다. 이 요구에 대한 대답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이 주시겠으나, 먼저 믿은 우리에게도 그것을 전달할 책임이 있습니다. 오늘 본문인 마태복음을 비롯해서 모든 성서는 바로 그런 책임에서 나오는 대답입니다. 그리고 2천년 기독교 신학도 역시 그런 대답들입니다. 오늘도 우리는 그런 대답을 찾아가야 합니다. 대답을 찾는 과정은 한 번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종말까지 계속됩니다. 이런 점에서 항상 깨어있어서, 기도하라는 바울의 가르침은 옳습니다. 영적으로 긴장하지 않으면 우리는 무엇이 질문인지도 모르고 대답을 찾을 생각도 못합니다. 근본적으로는 하나님의 계시에 응답할 수도 없습니다. 말하자면 우리가 진리에 무감각하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추수 때까지
마태복음 공동체도 “예수가 하늘나라인 증거를 대라.”는 이런 문제 제기에서 자유롭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살아 있던 초기 기독교라고 해서 아무도 이의를 달 수 없는 확정적인 대답을 갖고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그게 본문에 어떻게 드러나는지 보십시오.
농부가 좋은 씨를 제 밭에 뿌린 뒤에 밤에 원수가 와서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합니다. 밀이 자라서 이삭이 패자 가라지도 함께 자랐습니다.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이를 본 종들이 주인에게 와서 이르기를, 좋은 씨만 뿌렸는데 가라지가 어디서 왔는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그걸 뽑아버릴까요, 하고 물었습니다. 가라지를 뽑아야만 밀이 건강하게 잘 자랄 테니, 종들의 질문은 당연한 겁니다. 그런데 주인은 가라지를 그냥 두라고 일렀습니다. 그 이유는 밀보다 뿌리가 강한 가라지를 뽑다가 밀까지 뽑을 염려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고 언제까지 가라지를 놓아둘 수는 없는 일입니다. 주인은 추수 때까지만 놓아두라고 했습니다. 추수 때 가리지는 먼저 뽑아 단으로 묶어 불에 태워버리고, 그 다음에 밀을 곳간에 모아들이겠다고 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비유의 진행과정을 읽으면서 무엇을 생각하셨나요? 농부의 지혜인가요, 농부의 인내심이가요? 아니면 마지막 심판인가요? 다음과 같은 해석이 일반적입니다. 우리는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이 농부의 말에서 신약성서 시대의 다른 종파들의 세계관과 기독교의 세계관이 구별되는 한 측면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당시 대표적인 유대교 종파에는 바리새인, 열심당, 에세네파가 있었습니다. 그들은 모두 이 세상을 선과 악의 이원론적 대립으로 보았습니다. 바리새인은 율법을 철저히 지킴으로써 율법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을 무시했습니다. 그들에게는 늘 의와 불의가 투쟁하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열심당은 로마의 권력에 빌붙은 사람들과 로마 권력을 향해서 무력투쟁을 불사했습니다. 에세네파는 이 세상을 완전히 타락한 것으로 보고 쿰란 지역으로 도피해서 자기들끼리 소종파 운동을 전개했습니다. 약간씩 다르지만 그들 모두 가라지를 당장 뽑아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입니다. 이들에 반해서 예수님과 그 공동체는 사람들의 직접적인 심판보다는 하나님이 심판하실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살아야 한다고 가르쳤다고 볼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서 추수 때까지 가라지를 그냥 내버려두라는 것이 바로 이것을 의미한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해석을 근본적으로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 본문은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을 가리킨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은 바로 예수에 대한 믿음과 연관됩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마태공동체는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 나라라고 믿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그걸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예수님이 바로 하나님의 나라라고 한다면 그가 살아있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져야 했는데, 실제로는 그렇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이 오기 전이나, 그분이 활동할 때나, 그가 떠난 뒤에나 세상은 별로 달라진 게 없습니다. 이 세상은 밀만이 아니라 늘 가라지도 자라고 있습니다. 이런 상태에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라고 주장할 수 있을까요?
이런 질문은 마태공동체만이 아니라 오늘 우리에게도 해당됩니다. 예수님이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시고, 부활 승리를 하셨지만, 이 세상은 여전히 악이 득세합니다. 누가 구체적으로 행한 악만이 아니라 천재지변을 통해서 벌어지는 악도 많습니다. 인간의 생명을 파괴하는 것을 악이라고 한다면 천재지변도 악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 문제가 너무 거창하다면 여러분 개인의 실존을 들여다보세요. 여러분이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원받았다고 생각하겠지만 구원과 거리가 먼 일들이 여러분에게 계속해서 일어날 겁니다. 이런 문제를 극단적으로 해결해보려는 사람들이 구원파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로 구원을 받았다면 실제로 모든 악으로부터 벗어났다고 그들은 주장합니다. 그들의 종교적 열정은 인정하겠지만, 참으로 유치한 주장이라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그들은 단지 심리적으로 구원받았다는 자기 확신 안에 숨어 버린 것입니다. 그런 방식으로는 자기 정체성을 분명하게 인식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예수의 구원 사건이 갖는 우주론적 깊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습니다. 밀과 가라지가 함께 자랄 수밖에 없다는 오늘 본문에도 어긋나는 생각이지요.
여러분, 예수님을 손오공처럼 신출귀몰하는 초능력자로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이 세상에 나타나는 그런 현상들은 단지 인간적인 호기심을 만족시키는 것에 불과합니다. 하나님 나라인 예수님이 이 세상에 하나님 나라와 대립되는 가라지를 내버려두는 것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가라지를 모두 싹쓸이 해야만 그분이 하나님의 아들,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이 증명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추수 때에 증명됩니다. 모든 생명이 완성되는 종말에 예수님이 하나님 나라라는 사실이 드러납니다. 종말까지 기다리는 게 너무 힘들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그 시간은 속히 옵니다. 그 추수 때를 기다릴 줄 아는 사람은 이 세상과 자기 자신 안의 가라지로 인해서 절망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추수 때의 영광에 그의 영혼을 집중시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하나님 나라입니다. 그분은 여러분이 전혀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 세상의 생명을 완성하십니다. 여러분이 그분과 연결되어 있으면 종말에 영광스러운 하나님 나라에 참여하게 될 것입니다. 이런 신앙으로 가라지가 많은 세상을 견디십시오. 그분이 도우실 겁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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