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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12:13-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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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880 |
2008.10.5
어떤 사람이 예수님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받을 수 있도록 간섭해달라고 요구했습니다. 형이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한 것 같습니다. 그는 자기 몫을 따로 받아서 독립하고 싶었을 겁니다. 이런 문제로 서로 입장이 나뉘는 경우에 불만이 있는 사람이 라비에게 송사를 낼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랍비 칭호를 얻기도 했으니까 이 사람이 예수님에게 도움을 청한 건 이상한 게 아닙니다. 예수님은 그의 요구를 일언지하에 거절합니다. 그뿐만 아니라 예수님은 이런 재산 분할 사건을 탐욕의 문제로 평가했습니다. 15절에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탐욕에도 빠져들지 않도록 조심하여라. 사람이 제아무리 부요하다 하더라도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 주시는 못한다.”
이어서 예수님은 탐욕의 본질이 무엇인지, 그리고 그 결과가 무엇인지에 대해서 그 유명한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를 통해서 말씀하셨습니다. 어떤 부자가 농사를 지었는데 예상외의 큰 소출을 얻었습니다. 그 곡식을 쌓아둘 곳이 없을 정도였습니다. 그야말로 대박이 터진 겁니다. 이 사람은 속으로 이렇게 생각했습니다. 기존의 곡식 창고를 허물고 크게 지어서 모든 곡식과 재산을 넣어 두어야겠다고 말입니다. 그리고 흡족한 기분으로 제 영혼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영혼아, 많은 재산을 쌓아 두었으니 너는 이제 몇 년 동안 걱정할 것 없다. 그러니 실컷 쉬고 먹고 마시며 즐겨라.”(19절) 노후 준비를 완벽하게 갖춘 셈입니다. 이제는 식도락과 여행과 취미 생활로 여생을 보낼 생각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 부자를 어리석다고 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그렇게 달콤하고 환상적인 미래를 꿈꾸고 있는 그 부자의 영혼을 바로 그날 밤에 하나님이 거둬갈 수 있다는 사실을 그가 전혀 눈치 채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비유의 결론을 이렇게 내리셨습니다. 자기를 위해서는 재산을 모으면서도 하나님에게 인색한 사람은 바로 이런 어리석은 부자와 같은 운명에 처할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 본문에는 두 이야기가 겹쳐 있습니다. 하나는 유산 분할 건으로 인해서 형제 사이에 소송이 벌어진 실제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인생을 오직 먹고 즐기는 것으로 설계한 부자의 어리석음에 대한 비유 이야기입니다. 두 이야기에서 예수님이 내린 결론은 똑같습니다. 재산(소유)에 자신의 운명을 거는 사람은 결국 생명을 보장받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자기를 위해서 재물을 쌓는 일에 치중하느라 하나님에게 인색한 사람이 되지 말라고 말입니다.
이런 대답을 우리는 익히 잘 알고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런 말씀을 대할 때마다 마음 한구석이 불편할지 모릅니다. 두 가지 이유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이 말씀이 원칙적으로 옳기는 하지만 현실적으로 따르기는 힘들다는 것입니다. 둘째, 혹시 내가 바로 오늘 당장 죽을지도 모를 이 어리석은 부자가 아닐까 하는 걱정 때문입니다. 이런 불편한 기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사람들은 자기가 오늘 말씀에 나온 인물들과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신앙이 없는 사람이고 나는 신앙이 있는 사람이라고, 그들은 물질적인 사람들이지만 나는 하나님 중심적인 사람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은 노골적으로 재물을 밝히는 사람들이지만 나는 어쩔 수 없이 소극적으로만 그렇게 살아갈 뿐이라고 말입니다.
그런 선입관 없이 오늘 말씀을 꼼꼼히 읽어보세요. 그들과 우리에게 과연 다른 게 있는지를 살펴보십시오. 자기 몫의 유산을 챙겨야겠다는 동생의 요구는 자연스러운 것입니다. 아버지의 유산을 독차지하겠다는 그의 형이 정말 나쁜 사람인지도 모릅니다. 이 사람은 남의 것을 빼앗으려고 한 게 아니라 자기의 권리를 주장한 것뿐입니다. 그건 율법으로도 합법적인 것이었습니다. 자기가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요구하지 못하면 오히려 바보 소리를 듣겠지요.
많은 소출을 얻은 부자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는 도둑질을 한 것이 아니라 정상적으로 농사를 지은 것입니다. 지금 갖고 있는 창고로는 채울 길이 없어서 큰 창고를 지을 계획을 짰습니다. 사업을 잘해서 돈을 많이 벌은 사람이 주식이나 펀드에 기금을 맡긴 것과 비슷합니다. 성공한 CEO라고 해서 매스컴에서 조용히 내버려두지 않을 겁니다. 신앙적으로 본다고 하더라도 하나님의 축복으로 그런 부를 얻었다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두 인물에게는 별 잘못이 없습니다. 오늘 세상의 가치관으로 본다면 그들은 오히려 인정받아야 할 사람들일지 모릅니다. 이들은 다른 이가 아니라 바로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자신들입니다. 나쁜 짓 하지 않고 최소한 양심적으로 평범하게 살아가는 우리의 모습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이들의 태도를 근본적으로 부정하셨습니다. 탐욕 운운하시면서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거나, 오늘 밤 영혼을 불러갈지 모른다고 경고하셨습니다. 도대체 누가 이런 경고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말인가요? 주님은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요구를 하시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인들이 주님의 말씀에 직면해서 경험하게 되는 심리적인 불안, 또는 주님이 너무 심한 걸 요구한다는 불평이기도 합니다.
이런 심리적인 불안이 반복되면 실제 신앙생활에서 두 가지 극단으로 나타납니다. 하나는 신앙의 타성에 젖어버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오늘 본문과 같은 주님의 말씀을 너무 물질에 치우쳐서 세속적으로 살지 말라는 가르침이겠지 하고, 일종의 종교적 교양 정도로 간주합니다. 다른 하나는 극심한 죄책감에 사로잡히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은 늘 하나님의 징벌만을 생각합니다. 자신도 어리석은 부자처럼 오늘밤에 죽지나 않을는지, 사업이 망하지나 않을는지 하는 걱정이 태산입니다. 그래서 헌금을 많이 드려서 그런 불행을 면해야겠다고 다짐하면서 힘에 넘칠 정도로 헌금을 드립니다. 오늘 본문을 그런 방식으로 선포하는 설교자들도 꽤나 많습니다. 이 양쪽의 신앙은 모두 오늘 본문에 대한 오해에서 발생한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
이런 오해를 피하려면 우선 말씀을 오늘 우리의 삶에 근거해서 읽어야 합니다. 우리의 삶에서 물질적 요소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본문이 묘사하고 있듯이 자기 몫의 유산을 물려받겠다는 생각이나 재산을 저장하기 위해서 창고를 늘리겠다는 욕구는 우리가 부정할 수 없는 삶의 토대들입니다. 오늘 비정규직이 자신들의 정당한 몫을 받겠다고 투쟁하는 것이나 외국인 노동자들이 내국인과 동일한 노동 권리를 요구하는 것도 부정할 수도 없습니다. 이런 요구들을 모두 비기독교적인 것으로 몰아붙인다면 우리는 세상을 등지고 수도원에 들어가서 살아야 할지 모릅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에서 어리석은 부자를 예로 들면서 주신 주님의 말씀은 우리의 현실과 완전히 동떨어진 비현실적인 가르침일까요? 아닙니다. 성서는 비현실인 게 아니라 새로운 현실, 심층적 현실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성서는 표면적인 생명 현상에 머물지 않고 그 생명의 심층을 말합니다. 어떤 고유한 생명의 깊이를 말합니다. 그것이 전제되지 않으면 “그의 재산이 생명을 보장해주지 못한다.”거나 어리석은 부자의 영혼을 거둬간다는 주님의 말씀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도대체 본문이 전제하고 있는 그 생명의 깊이라는 게 무엇일까요? 이를 직접 말하기 전에 먼저 세상이 추구하는 생명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를 말해야겠습니다. 생명 아닌 것들을 확인하면 결국 생명이 무엇인지 저절로 알 수 있겠지요.
본문의 어리석은 부자가 추구하는 것이 생명 아닌 것들이었습니다. 그 비유에 등장하는 단어들을 보십시오. 부자, 많은 소출, 큰 창고, 곡식, 재산, 수년 동안 걱정 없음, 실컷 쉬고, 먹고 마시고 즐김이 그런 것들입니다. 그는 이런 방식으로 자신의 생명을 확인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것들을 중심에 놓는 삶이 어떤지를 진지하게, 그리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십시오. 우선 이런 것들로 우리가 참된 만족을 얻을 수 있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50평짜리 호화주택을 마련하겠다는 평생소원이 이뤄졌다고 합시다. 만족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 샘터교회 가족들이 일년 사이에 한 5백 명쯤으로 늘었다고 합시다. 기독교 신문에 나겠지요. 우리가 거기서 만족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처음에는 호기심으로 뭔가 생명에 들어간 것처럼 느끼겠지만 조금만 지나면 그런 것들은 아주 가벼운 일상으로 떨어져버리고 맙니다.
우리가 이런 것에 만족할 수 없다는 사실 못지않게 더 심각한 문제는 이런 조건들이 별로 탄탄하지 못하다는 사실입니다. 돈은 두말할 것도 없고, 우리의 젊음도 역시 뜨거운 여름철이 지나고 금세 가을이 오고 겨울이 오듯이 쉽게 지나갑니다. 우리의 생명을 확인해줄 것으로 믿었던 것들의 토대가 탄탄하지 않다면 결국 그것들은 거짓 생명입니다. 세상은 그런 거짓 생명에 아름다운 무늬를 입히고 세련되게 포장해서 우리에게 소유하도록 유혹합니다.
위의 설교를 세상살이는 헛되고 헛되니 하나님을 잘 믿으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오해하는 겁니다. 비록 쏜살같이 흘러가는 인생이라고 하더라도 이 세상에서의 삶은 중요합니다. 기독교 신앙은 결코 허무주의로 빠져들 수 없습니다. 아무리 세상살이가 고되다 하더라도 목숨을 끊는 일은 기독교 신앙에서 불가능합니다. 지난 목요일에 최진실 씨가 자살했습니다. 교회에 다닌 분이더군요. 새벽기도회도 아이들을 데리고 종종 나왔다고 합니다. 장례도 기독교식으로 치렀습니다. 아주 당찬 이미지로 각인되었던 그분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을 정확하게 모르는 상태에서 자살사건을 제삼자가 이러쿵저러쿵 판단할 수는 없습니다. 다만 저는 그 어떤 상황에서도 기독교 신앙은 삶을 스스로 파괴하지 않는다는, 그렇게 할 수 없다는 원칙을 말씀드리려는 것입니다.
무슨 말씀인가요? 비록 헛된 것처럼 보일 정도로 순식간에 지나는 우리의 생명이지만 그것을 우리가 마음대로 처리하지 못하는 이유는 생명의 주인이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기 때문입니다. 성서는 이 사실을 누누이 강조합니다.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이 한 가지 사실에 집중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이런 말에 실감이 나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내 생명은 내가 주인이라고 생각할 겁니다. 내가 밥을 먹고 사니까 내가 주인이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5분만 멈추면 죽을 수밖에 없는 숨을 생각해보세요. 지구의 공기를 여러분이 만들어서 숨을 쉬고 있나요? 지구에 탄소가 없으면 모든 생명체가 사라질 수밖에 없습니다. 이는 곧 우리가 생명의 토대를 우리 내부에 갖고 있지 않다는 말입니다. 외부에 전적으로 의존해 있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피조물이라고 합니다. 생명은 우리가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아니라 오직 창조자 하나님의 선물일 뿐입니다.
하나님에게 부요한 자
저는 위에서 생명이 아닌 것들이 무엇인지, 생명의 주인이 누구인지에 대해서 말씀드렸습니다. 어리석은 부자의 문제는 생명 아닌 것들에 모든 관심을 기울인 반면에 생명의 주인에 대해서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런 방식의 삶은 결국 생명을 잃을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사실은 여러분이 저의 설교를 듣기 전에 본문을 읽으면서 이미 이해하고 있던 내용일 겁니다. 이 말씀을 이런 정도로 받아들인 채 살아가도 좋습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여전히 중요한 질문이 남아 있습니다. 생명의 주인이신 하나님에게 관심을 기울인다는 것이 무엇일까요? 자신을 위해서 재물을 모은 일이 아니라 하나님에게 부요한 삶이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이 질문은 오늘 우리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하는 문제와 더불어서 근본적으로 생명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어리석은 부자를 다시 보십시오. 그는 노후 걱정 없을 정도로 모든 걸 갖췄으니 행복하게 사는 것만 남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쁜 사람은 아니었습니다. 어떻게 보면 양심적이기도 하고, 도덕적이기도 하고, 성실한 사람이었을지 모릅니다. 그래서 인생 성공한 사람이었습니다. 문제는 그가 자기 안에 갇혀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자기에게만 집중했습니다. 성서는 이것을 바로 죄라고 말합니다. 남에게 해를 입히는 것만이 아니라 자기에게 집중하는 것 말입니다. 죄는 사람을 하나님과 단절시킵니다. 그것은 곧 생명과의 단절입니다.
하나님에게 부요하다는 것은 자기 집중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자기 초월입니다. 일단 그렇게만 되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하게 됩니다. 그렇게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창조는 우리가 피하려야 피할 수 없을 정도로 엄청나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자리는 바로 자기 자신입니다. 자기에게 몰입해버리면 마치 눈가리개로 두 눈을 가린 사람처럼 아무 것도 볼 수 없습니다. 거꾸로 자기로부터 벗어나기만 하면 하나님의 은총이 햇살처럼 내리비추는 걸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자기를 부인하라고, 각자 자기 십자가를 지고 당신을 따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여러분이 아무리 노력해도 자기집중에서 벗어나기는 쉽지 않을 겁니다. 저도 그게 잘 안 됩니다. 그것은 인간의 숙명입니다. 우리가 죽지 않는 한 여기서 벗어날 수는 없습니다. 이게 바로 인간의 실존적 부조리입니다. 참된 생명을 얻으려면 죄, 즉 자기집중에서 자유로워야 하는데, 죽지 않으면 여기서 벗어날 수 없으니까요. 생명을 얻기 위해서 죽어야 한다는 이상한 논리가 성립됩니다. 우리가 도저히 피해갈 수 없는 이런 부조리를 알고 있으신가요? 그걸 실제로 전체 실존으로 받아들이고 있으신가요?
그걸 아는 분들은 그 대답까지 알고 있겠지요. 죽는 길밖에 없습니다. 아직은 살아 있으니 실제로 죽을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다른 길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이 그것입니다. 우리는 그와 더불어 죽었습니다. 이렇게 죽은 경험이 있는 사람은 점점 자기집중에서 벗어날 것입니다. 십자가와 부활생명으로 완전히 휩싸여서 자신도 예상하지 못하는 생명의 현실을, 그 깊이를, 그 생명의 신비를 경험하게 될 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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