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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28:18-2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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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
본문/ 마11:28, 요15:4, 마28:18-20
예수께서 우리에게 주시는 말씀의 큰 물줄기는 세 갈래로 흘러내리고 있다고 생각 합니다. 첫째는 나에게 오라!는 부름입니다. 둘째는 내 안에 거하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가라!는 명령입니다. 이를 교회 공동체의 표현으로 한다면 모이는 교회, 성숙하는 교회, 흩어지는 교회라고 이름 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1. 오라! < 모이는 교회 >
예수님은 끊임 없이 오라고 부르십니다.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요6:35). 명절 끝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가라사대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요7:37). 어린 아이들을 용납하고 내게 오는 것을 금하지 말라 (마19:14). 오라고 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듣는 자가 복됩니다.
그 음성을 듣고 나아온 자들은 < 위대한 산상수훈 >을 받기도 하고, 문둥병자로 나아온 자는 깨끗함을 선물로 받았고, 그 영혼이 속에서 클클하고 답답하던 자는 예수께 나아와 그 속에서 생수가 터져나오는 구원의 생명을 얻었습니다. 오늘도 우리 예수님은 오라고 하십니다. 자녀 문제로 고뇌하는 이 세상의 모든 아버지와 어머니를 오라고 부르십니다. 일용할 양식 때문에 고통 받는 가난한 사람들도 오라고 하십니다. 인생의 의미를 물으며 방황하고 뒤척이는 젊은이도 오라고 하십니다. 예수께는 진리가 있습니다. 예수께는 능력이 있습니다. 예수께는 생명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간절히 오라고 부르고 계십니다.
오라!고 하는 이 명제는 교회론적으로 말하면 교회는 우선 < 모이는 교회 >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 합니다. 교회의 원래 말인 ekklesia 가 뜻하는 바와 같이 교회는 < 부름 받은 사람들의 모임 >입니다. 뭉치면 살고 헤어지면 죽는다는 말은 진실입니다. 장작불이 주는 교훈을 보십시오. 장작불은 흩으면 꺼지고 모이면 활활 타오릅니다. 우리 주님은 우선 오라고 하십니다. 이 말씀에 순종 하십시오.
2. 거하라! < 성숙하는 교회 >
예수님은 오라!고 하신 후 그 말씀에 순종 하여 온 사람들을 그냥 가만히 옆에 앉아 구경하라고 하신 것이 아닙니다. 왔으면 이제 < 내 안에 거하라! >고 하셨습니다. 나는 포도나무요 나에게 온 너희는 이제 나에게 붙은 포도나무의 가지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께 붙어서 그 생명력과 능력과 진리를 공급 받고 사는 것이 바로 < 내 안에 거하라 > 는 말씀입니다.
강원도 문막과 원주 사이 반계리에는 천연기념물 167호 800년 묵은 은행나무가 있습니다. 열댓명이 둘러서야 한번 안아 볼 수 있는 커다란 나무입니다. 그 은행나무 끝에 붙어있는 은행잎은 뿌리로부터 한 4-50m는 떨어져 있습니다. 그런데 그 끝에 있는 은행잎도 파랗게 반짝이고 있습니다. 예수님 안에 거한다는 것은 바로 그런 것입니다. 예수님의 보혈의 능력이 끊임 없이 내 속에 흘러서 내 영혼이 싱싱하고 반짝반짝 빛나는 것이 바로 예수 안에 거한다는 것을 뜻합니다.
< 내 안에 거하라 >는 이 명제는 교회론적으로 말하면 모이는 교회는 성숙하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요한계시록에 보이는 것처럼 모여서 노닥거리는 교회가 있습니다. 모여서 싸우는 교회가 있습니다. 모여서 힘 자랑하는 교회가 있습니다. < 내 안에 거하라 >는 말씀은 모여서 말씀과 기도와 찬양에 전무하여 에수님으로부터 오는 능력을 덧입는 교회로 성숙하라는 것입니다.
3. 가라! < 흩어지는 교회 >
예수님은 우리를 오라고 부르시고, 그 분 안에서 충만한 능력을 주시는 것으로 끝났다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한 가지가 남았습니다. 그 한 가지는 예수께 나와 그 보혈의 능력으로 죄 사함 받고, 그 분 안에서 성숙하고 자라나서 병을 고치고, 귀신을 쫒아내는 권세와 말씀의 능력을 받아 저 세상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는 그의 < 역사의 연구 A Study of History > 11장 인퇴와 복귀에서 희랍 철학과 에수의 결정적 차이를 논하였습니다. 토인비는 < 희랍 철학자들은 깊은 철학과 명상을 통하여 지극한 지혜의 산에 도달 하기를 추구하였고 그 지고의 산에 도달하여 거기에 집을 짓고 살았다. 그리고 그들의 생명력은 거기서부터 마르기 시작하여 몰락의 길을 걸어갔다. 변화산의 베드로 역시 희랍 철학자들과 다름 없었다. 그는 종교적으로 지고의 경지인 그 변화산에 집을 짓고 살기를 원하였다. 그러나 예수는 “ 산 아래로 내려 가자! ” 고 하였다. 바로 이 점이 희랍 철학자들과 예수의 결정적 차이점 >이라고 하였습니다. 산 아래,바로 우리들 삶의 한가운데로 내려 오신 예수님은 귀신 들려 고통 받는 소년과 그 아이 때문에 고뇌하는 그 아이의 아버지를 만나시고 그들에게 새로운 생명을 곧 구원을 주셨습니다. 예수님은 지고의 경지에 머무르지 않고 삶의 현장으로 가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마지막 명령 저 위대한 마28의 대위임명령 < 가서 제자 삼으라! >. 그것이 예수님의 뜻이며 그것이 예수님의 사랑입니다. 그 명령이 없었던들 내가 어떻게 구원 받았으리요! 그 명령에 목숨 걸고 순종한 예수님의 제자들이 없었던들 나 어찌 이 진리를 알았으리요! 그러므로 오라! 거하라!의 마지막은 가라! 입니다.이 세가지 흐름은 따로 따로 떨어져있는 그 무슨 단계가 아니라 상호 유기적으로 얼크러지고 설크러져 우리 신앙인의 존재 속에 도도히 굽이치는 신앙적 흐름입니다.
< 가라! >는 이 명제는 교회론적으로 말하면 < 흩어지는 교회 >라고 할 것입니다. 모이기를 힘쓰는 교회로서 응집력을 가지고, 예수께서 주신 권세와 능력을 들고, 흩어져서 각자의 삶의 현장에서 그리고 주님께서 <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 하실 때, 구원 받은 은혜에 대한 감사와 나 같은 것을 인정해 주시고 불러주시는 그 사랑에 감격하여 <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눈물 뿌려 응답하는 교회를 의미합니다. 하여, 어제의 나 처럼 방황하는 사람들, 어제의 나 처럼 절망하고 있는 사람들, 어제의 나 처럼 병들어 고통 당하는 사람들, 그리고 어제의 나 처럼 도무지 삶의 의미를 찾지 못하고 시름시름 조금씩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침 해가 힘있게 빛나듯 살아날 수 있도록, 그 모든 고통으로 부터 자유 할 수 있도록, 예수님의 마음을 품고 그들을 향하여 흩어져 달려가는 교회여야 한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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