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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야의 ‘소리’를 넘어

요한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764 추천 수 0 2010.05.18 23:33: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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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요1:19-28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40027 

emoticon 2008.12.14

복음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예수님과 가장 깊은 연관이 있는 인물을 고르라고 한다면 세례 요한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로 그는 예수님의 삶에 깊숙이 들어와 있습니다. 누가복음의 보도에 따르면 요한은 출생부터 예수님과 연관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예수님보다 먼저 선포하기 시작했고, 예수님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선의의 경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헤롯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지적했다가 감옥에 갇혔고, 결국 헤로디아의 음모에 의해 참수형을 당했습니다. 감옥에 있을 때 제자들을 예수님에게 보내서 당신은 바로 메시아인가, 하고 묻기도 했습니다.(마 11:2 이하, 눅 7:18 이하) 그 당시 사람들은 예수님이 바로 세례 요한의 환생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요한과 예수님의 관계는 불가분리였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에게도 세례 요한은 지나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공관복음을 비롯해서 요한복음에 이르기까지 네 복음서가 예수님의 초기 공생애를 서술하면서 요한을 거론하고 있습니다. 그들의 관심은 세례 요한이 누구냐, 하는 거였습니다. 그것은 물론 유대인 모두의 관심이기도 했습니다.

 

오늘 설교 본문은 그 질문으로부터 시작합니다. 유대인들이 대표자를 요한에게 보내서 이렇게 질문했습니다. “당신은 누구요?” 요한의 가족 관계에 대한 질문이 아닙니다. 요한의 영적인 정체성에 대한 질문입니다. 이 질문의 핵심은 당신이 바로 그리스도인가, 하는 겁니다. 그 당시 유대인들은 메시아, 바로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요한은 끊어서 대답합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아니오.” 질문이 이어집니다. 엘리야냐? 요한은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렇다면 선지자냐, 하고 묻습니다. 요한은 선지자도 아니라고 대답합니다. 그러자 다시 묻습니다. “너는 네게 대하여 무엇이라 하느냐?” 질문을 슬슬 피해가지 말고 똑 부러지게 대답하라는 요구입니다. 요한은 이사야 40:3절을 인용해서 이렇게 대답합니다. “나는 선지자 이사야의 말과 같이 주의 길을 곧게 하라고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라.”(요 1:23)

광야의 소리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라는 이 진술이 별 것 아니라거나, 또는 당연한 거라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겠지만, 실제로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이 진술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매우 심각한 내용입니다. 여기에는 초기 기독교가 어떻게 신앙적 위기를 넘어서 고유한 영적 세계를 형성했는지에 대한 치열한 투쟁의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그 이유를 알려면 예수님과 세례 요한의 관계를 좀더 심도 있게 따라가야 합니다.

 

세례 요한을 향한 유대인들의 관심이 어느 정도였는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요한은 당시의 거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를 여자가 낳은 자 중에서 그를 가장 큰 자라고 하셨으며, 그를 마지막 때 올 엘리야로 말씀하기도 했습니다.(마 11:11,13) 그 당시 많은 민중들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기 위해서 광야로 몰려나갔습니다. 민중들만이 아니라 내로라하는 종교, 정치 지도자들도 모두 그에게 세례를 받았습니다. 그 상황을 마가복음 기자는 이렇게 전합니다. “온 유대 지방과 예루살렘 사람이 다 나아가 자기 죄를 자복하고 요단강에서 그에게 세례를 받더라.”(막 1:5) 당시 그 지역의 분봉왕이었던 헤롯과 아내인 헤로디아가 세례 요한을 크게 두려워할 정도였습니다. 예수님이 그에게 세례를 받았다는 것도 아마 분명한 역사적 사실일 겁니다. 이런 일들이 예수님의 제자와 추종자들에게는 이해가 안 되는 대목이었습니다. 도대체 죄 없는 메시아인 예수님이 왜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느냐, 하고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부활, 승천 후에도 두고두고 이 문제를 진지하게 고민하면서 논의를 거쳤겠지요.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 후반부는 바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바리새인들이 보낸 사람들이 요한에게 다시 따지고 들었습니다. 공적인 자격도 없는 사람이 왜 세례를 베푸느냐고 말입니다. 요한은 이에 대해서 직접적인 대답을 하지 않습니다. 대신 이렇게 에둘러 대답합니다. “나는 물로 세례를 베풀거니와 너희 가운데 너희가 알지 못하는 한 사람이 섰으니 곧 내 뒤에 오시는 그이라. 나는 그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하지 못하겠노라.”(요 1:26,27) 요한의 세례는 물의 차원입니다. 본문에는 생략되었지만 물과 대립되는 개념은 성령입니다. 요한은 물로 세례를 주지만 예수님은 성령으로 세례를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예수님이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은 사건에 대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세례 요한의 정체를 두 가지로 규정합니다. 하나는 광야에서 외치는 소리이며, 다른 하나는 물의 세례입니다. 소리는 주인공이 아닙니다. 그는 광야에 길을 내라고 소리를 낼뿐입니다.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 닦은 광야의 길은 주님을 위한 것입니다. 길을 가야할 주님은 바로 예수님입니다. 소리와 주님과는 비교의 대상이 아닙니다. 물의 세례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은 물이고, 성령은 성령입니다. 물은 사물이고, 성령은 생명입니다. 물의 세례는 광야의 소리가 베풀 수 있는 종교 행위이지만, 성령의 세례는 광야의 길을 가야 할 주님이 전능으로 베푸는 생명과 구원 행위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별로 의미가 없다고 말하면 곤란합니다. 그 소리가 없으면 역사 변화와 진보는 불가능합니다. 세례 요한이 인용한 이사야 40:3,4절 말씀의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외치는 자의 소리여 이르되 너희는 광야에서 여호와의 길을 예비하라. 사막에서 우리 하나님의 대로를 평탄하게 하라. 골짜기마다 돋우어지며 산마다, 언덕마다 낮아지며 고르지 아니한 곳이 평탄하게 되며 험한 곳이 평지가 될 것이요.” 대로를 내려면 낮은 곳은 메우고, 높은 곳은 깎아 내거나 터널을 뚫어야 합니다. 평탄과 평지가 되어야 합니다. 이런 길을 내라고 외친 세례 요한의 사역은 어느 시대에도 없어서는 안 될 소중한 외침입니다.

 

세례 요한은 삶의 구체적인 변화를 요구했습니다. 옷 두 벌 있는 사람은 옷 없는 사람에게 나눠주고, 먹을 것도 그렇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세리나 군인들은 법 집행을 정당하게 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요한의 메시지는 정의로운 사회 건설이었습니다. 그것이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더구나 요한은 아주 경건하게 살았습니다. 요단 광야에서 낙타털옷을 걸치고 메뚜기와 석청을 먹으며 노숙을 하면서 강력한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개인적인 도덕성으로 무장한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그 당시 예루살렘 사회를 크게 흔들었습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는 예언자들의 전통과 맥을 같이 합니다. 하나님의 정의를 강물처럼 흘러가게 하는 일이었습니다.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언덕은 낮아져야 합니다. 사회적으로 높은 곳에 있는 사람은 내려와야 하고, 낮은 곳에 있는 사람은 올라와야 합니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말씀드릴까요? 부자는 재산을 내려놓아야 하고, 가난한 사람은 물질적인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빈부의 격차가 실제적으로 줄어들어야 합니다. 광야의 소리는 바로 그것을 말합니다.

 

이 문제를 폭력적으로라도 해결해야 한다고 생각한 이들이 바로 마르크시즘을 신봉한 현실 사회주의자들, 즉 공산주의자들입니다. 그들의 실험은 현대 역사에서 실패했습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그들의 생각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닙니다. 빈부의 극심한 차이를 줄이고 인간으로 하여금 노동으로부터 소외당하지 않게 해야 한다는 주장은 역시 옳습니다. 이것은 사회과학적인 접근 이전에 성서적인 가르침에 따른 것입니다. 낮은 골짜기는 돋우어지고, 높은 언덕은 낮아져야 한다는 게 바로 이사야 예언자의 가르침이며, 그것을 인용한 세례 요한의 메시지이기도 합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광야의 소리를 아예 잊어버렸습니다. 사회적인 불평등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거꾸로 가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예수님을 믿어야 출세하고 돈을 많이 벌 수 있다고 부추기는 이들도 많습니다. 선교를 위해서 사회의 고지를 점령해야 한다고 외치기도 합니다. 물론 구제와 봉사 활동을 하지 않는 건 아닙니다. 그러나 그런 것은 많은 경우에 단지 동정심에 불과합니다. 사회적으로 낮은 사람들이 최소한 인간다운 삶을 유지할 수 있도록 제도적 안전장치를 마련하는 일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습니다. 정부가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준다고 해도, 이것은 결국 복지 예산의 축소로 이어질 수밖에 없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습니다. 이건 합법이냐 아니냐 하는 차원을 넘어서 하나님의 정의에 마음을 두는가 아니냐 하는 문제입니다. 광야에 평탄한 길을 내라는 외침을 잊어버린 한국교회에 주님이 오실 수 있을까요?

광야의 ‘소리’를 넘어

 

이 귀중한 광야의 소리는 바로 여기까지만 필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는 주님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소리는 생명 자체는 아닙니다. 본문이 말하려는 핵심도 바로 그것입니다. “당신은 그리스도냐?” 하는 질문을 받고 세례 요한은 “아니다.”고 대답했습니다. 그는 엘리야도 아니고 선지자도 아니라고 했습니다. 그는 주님의 길을 곧게 하라고 단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였습니다. 그 소리는 사람들에게 물로 세례를 베풀 뿐입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은 도덕주의자들이나 혁명가들과 구별됩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전혀 새로운 차원에서 경험했습니다. 그 경험은 그 무엇으로도 상대화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예수에게서 일어난 구원 사건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 세상의 진보와 발전으로 이루어지는 생명이 아니라 창조의 하나님이 전적으로 새롭게 개입해서만 일어난 생명이었습니다. 그런 경험을 한 초기 기독교인들에게는 세례 요한이 아무리 뛰어난 설교자요, 예언자요, 영성가라고 하더라도 결코 그리스도일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단지 메시아의 길을 곧게 내라고 외치는 소리였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이름으로 도덕성과 역사혁명을 부르짖은 이들이 없지 않습니다. 이들은 세례 요한의 메시지에 크게 공감합니다. 물의 세례를 강조합니다. 그들은 끊임없이 세상의 실제적인 변혁을 위해서 투쟁합니다. 초기 기독교에서도 이런 요청은 강력했습니다. 어느 지역의 사람들은 세례 요한의 세례만 알고 있을 정도였습니다. 이런 요청은 비교적 역사의식이 있는 사람들에게 호소력이 있습니다.

 

한완상 전 부총리께서 새길교회에서 행한 설교를 묶은 책 <예수 없는 예수 교회>라는 책을 내셨다고 합니다. 제가 청년 시절에 그분의 책을 읽고 감동을 받은 적이 많습니다. 이번에 나온 설교 묶음 집에서 그는 한국교회가 역사적 예수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기 때문에 많은 문제를 일으킨다고 지적했습니다. 매스컴의 보도를 따르면 출간 기념 기자회견에서 그는 “한국교회가 주기도문과 산상수훈과 같은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은 없고 사도신경처럼 교리로 박제화 된 신앙고백만 하고 있다.”면서 “이런 신앙고백으로는 예수를 따라 살 수 없다.”고 지적했습니다. 교리 안에 묶여 있는 그리스도보다는 역사적 예수의 삶과 가르침을 따라야 한다는 주장입니다.

 

제가 보기에 한완상 전 부총리는 기독교 교리를 오해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국교회의 많은 문제는 기독교 교리의 잘못 때문이 아니라 그 교리에 대한 미숙한 이해때문입니다. 교리화된 그리스도로부터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자는 주장은 너무나 단순하고 경솔한, 그래서 오히려 기독교 신앙을 왜곡시킬 위험성마저 있습니다. 민중들과 함께 고난을 짊어지셨다는 역사적 예수로 돌아가자는 말은 결국 세례 요한의 메시지로 돌아가자는 말과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보면 한국의 보수주의자들이나 진보주의자들이나 양자가 모두 기독교 신앙의 중심을 오해하고 있다는 사실이 비슷합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세례 요한의 메시지가 아무리 설득력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의 삶이 아무리 본받을만하더라도 그는 주님이 아니라 그의 길을 내라고 외치는 소리일 뿐입니다.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세례 요한은 예수님과 비교될 수 없는 인물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신발끈을 풀기도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세례 요한의 도덕성과 혁명으로 격하시키는 일은 정당한 게 아닙니다. 우리는 세례 요한을 믿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믿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는 우주의 역사에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유일하게 일어난 구원 사건에 영혼을 건 채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오해는 없으리라고 봅니다. 이미 앞에서 강조했듯이 세례 요한의 과업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교회는 이런 예언자적 영성을 올곧게 유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하나님 나라 자체는 아닙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그것뿐이라고 한다면 우리는 절망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바울이 말한 것처럼 우리의 삶이 이생뿐이라고 한다면 아무런 생각 없이 자신의 욕망이 시키는 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그만인 것과 비슷합니다.  

 

여기에 또 하나의 중요한 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런 역사적 혁명이 참된 혁명이 되지 못한다는 사실입니다. 피조물인 인간에게서는 그것이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역사의 진보를 위해서 투쟁하지만, 그것으로 우리는 얻을 게 별로 많지 않습니다. 궁극적으로는 하나도 없습니다. 역사 허무주의를 편드는 게 아닙니다. 구원이 사람에게서가 아니라 주님에게서 온다는 사실에 우리의 영혼을 고정시켜야 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분은 광야에서 외친 세례 요한이 아니라 그 길을 가야 할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에게 일어난 하나님의 고유한 구원 사건입니다.

 

세례 요한은 주님의 길을 내기 위해서 광야에서 외친 소리입니다. 그 소리가 오늘 교회에서도 살아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구원은 그 소리 너머에서 옵니다. 그 구원은 2천 년 전에 오셨고, 앞으로 세상의 종말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하나님의 생명 사건입니다.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를 들으며, 그 소리를 함께 외치되, 그것 너머에서 오는 주님의 구원에 여러분의 영혼을 온전히 기울이며 대림절 셋째 주간을 살아가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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