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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영광과 아기 예수

누가복음 정용섭 목사............... 조회 수 1183 추천 수 0 2010.05.18 23:39: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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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눅2:8-20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40052 

emoticon 2008년 12월25일

누가가 전하는 두 삽화

 

아주 오래전 초기 기독교 공동체들 사이에서 전해져오던 한 이야기를 오늘 우리는 누가복음 2장8절에서 20절까지의 말씀으로 전해 들었습니다. 예수님이 탄생하던 그 즈음의 이야기입니다. 이것을 누군가가 직접 보고 기록하지는 않았겠지요. 아마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이해하고 그렇게 고백한 이후로, 그렇게 고백한 사람들 사이에 전해져 내려오던 이야기였을 겁니다. 그러나 이 이야기는 요즘 어린아이들이 산타클로스 할아버지를 기다리는 것과 같은 전설이나 허망한 이야기가 아니라 그 당시 기독교 공동체에 절실했던 신앙의 내용을 이렇게 담아 표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전해져 내려온 이야기는 여러분들이 주일학교를 다녔다면 어릴 때부터 잘 전해들은 감동적인, 또는 어떻게 보면 낭만적이기도 한 이야기입니다.

 

목자들은 그 당시 민중들이죠. 고관대작이 아니라 몸으로 먹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다른 사람들이 따뜻한 보금자리에서 잠을 청할 때 양들과 같이 들판에서 양을 지키며 밤 별빛을 바라보고 살았습니다. 그렇게 시간을 보낸 사람들입니다. 어느 순간에 그들은 어떤 이상한 경험을 했다고 합니다. 오늘 본문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 이야기는 다음과 같습니다.

 

그들이 주의 사자를 보았다고 합니다. 그리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는 것을 경험했다고 합니다. 주의 사자는 무엇이고, 주의 영광은 무엇일까요? 이것은 똑같은 이야기를 다르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들을 우리는 지금 우리 삶의 경험에 그대로 재현할 수는 없습니다. 불립문자라고 하는 말이 있듯이 어떤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사건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말을 사용해야 하기 때문에 지금 이렇게 주의 사자, 주의 영광이라고 간접적으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어쨌든지 목자들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구체화할 수 없는, 결정적인 어떤 것을 경험했습니다. 소리가 나는데, 천사가 이렇게 일렀다고 합니다. 앞에서는 주의 사자라고 했고, 주의 영광이라고 했다가, 다시 천사라고 이야기를 했어요, 다 통하는 신앙적인 상징, 혹 메타포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 천사가 이렇게 그들에게 말했습니다. 무서워하지 마라, 좋은 소식을 내가 너희에게 전한다. 다윗의 동네에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다. 계속 이어집니다. 너희가 가서 보게 되면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인데, 이것이 바로 표적이다. 증거다 하는 것입니다.

 

이 천사들의 메시지,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말에 귀를 기울이십시오. 아마 이 이야기를 이렇게 전해주고 있는 초기 기독교 공동체, 우리는 그들이 누구인지 모르는데, 그들이 관심을 갖고 있었던 것은 바로 이것이겠지요. 그리스도가 나셨다는 것, 구원자가 나셨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어떻게 말이 될까요? 인간의 삶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성취될 수가 없습니다. 여러 가지 면에서 그렇습니다. 우리의 어떤 내면적인 실존으로 본다면 죄성이라는 것이, 이거는 좀 다르게 표현하면 자기집착, 자기연민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것을 죽을 때까지 떼 낼 수가 없습니다. 우리는 계속해서 무언가를 내면에 채우려고 부단히 노력하고, 그러나 어떤 것으로 채워지지 못하는 그런 삶을 여러분과 제가 지금 살고 있습니다. 구원은 우리에게서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그러한 모든 인간의 삶을 구원할 그리스도가 태어나셨다고 천사를 통해서 이 목자들이 전해 들었다고 합니다. 이게 뭘까요? 어떤 경험을 했을까요? 제가 앞서 주의 영광과 주의 천사가 무얼까 하고 질문했습니다. 이것은 루돌프 오토의 책을 빌려서 말한다면, 누미노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오늘 천사는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어요. 거룩한 두려움을 아는 사람만이 공연한 두려움을 벗어날 수 있습니다. 이런 점에서 두려움은 양면성이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을 통해서 우리 인간이 만들어내는 쓸데없는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어떠한 삶의 신비, 어떤 생명의 깊이, 이런 것들이 바로 이 성탄과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습니다.

 

여러분, 우리들은 목자들이 경험한 것과 같은 똑같은 것은 아니라고 하더라도 거룩한 두려움의 충격에, 자기의 자아를 비롯한 모든 게 사라지는 것과 같은 경험을 하시나요? 그것이 신앙의 뿌리이고, 핵심이고, 모든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긍정적인 차원에서 우리의 신앙적 초월이 가능합니다. 이럴 때만이 우리의 삶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은 허무와 좌절, 그 어떤 것으로도 세월 수 없는 허무와 절망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습니다. 오늘 이 목자들은 들판에서 그런 것을 경험했습니다.

 

천사로부터 이야기가 계속됩니다. 가서 보면, 그리스도가 나신 곳에 가서 보면, 강보에 싸인,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볼 것이라고 말입니다. 마리아, 요셉이 거기에 있었습니다. 그들이 그곳에 가서 그것을 확인했습니다.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말입니다. 여러분, 두 가지 그림이 여러분 머리에 그려지지요? 하나는 우리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목자들의 궁극적 생명 경험, 즉 이것이 거룩한 두려움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언어로 어떻게 묘할 수 없는, 마치 이사야가 성전에서 스랍들의 찬양을 경험한 것과 같은, 혹은 모세가 불붙은 가시떨기에서 자존하는 하나님을 경험하는 것과 같은 그런 것인데, 그런 그림이 한편에 있고, 다른 하나는 아주 구체적인 그림입니다. 강보에 싸인, 그리고 구유에 누인 아기에요. 그 옆에는 마리아와 요셉이 있습니다. 이 두 그림이 어떻게 연결되나요?

 

구유는, 여러분, 우리의 가장 구체적인 삶의 현장입니다. 그리고 가장 낮은 자리입니다. 이 구유에 이미 십자가가 은폐의 방식으로 담겨 있습니다. 하나님이 가장 낮은 자리, 그리고 가장 무기력한 자리에서 사람이 생산해낼 수 없는 참된 구원을 일으키셨다고 하는 뜻입니다. 오늘 저는 구유에 누인 아기, 즉 두 가지 그림에서 두 번째 그림을 칼 바르트의 신학묵상을 잠시 읽는 것으로 조금 보충해보려고 합니다. 신학의 대가 바르트가 이 구유를 어떻게 해석했는지, 그의 글을, 여러분, 주보 뒤편에 제가 올려놓았습니다. 주보 가지고 계신 분은 보시고, 없는 분들은 귀로 들으십시오. 다음과 같습니다.

구유(바르트의 신학묵상)

 

구주가 여관에서 방을 구하지 못했다고 해서 다른 곳에서, 전혀 다른 곳에서도 태어날 수 없었다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그 전혀 다른 곳은 곧 구유입니다. 구유는 바로 마구간이나 옥외 건초창고에 있습니다. 이곳은 사람들이 머물고 싶어 하는 아름다운 장소가 분명히 아닙니다. 그런 아름다운 곳은 분위기가 좋고 편안하고 쾌적하고, 더 나아가 우리의 인간적 품위에 어울리기 때문에 사람들이 즐겨 찾습니다. 그러나 구유는 그런 곳이 결코 “아닙니다.” 구유에 비해서 쪽방은 오히려 호화로운 편이라고 할 있을 정도입니다. 이 구유는 지난날 수많은 화가들이 그린 그림에 나옵니다. 그런 그림에는 황소와 당나귀가 아주 가까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아가신 곳이나 태어나신 곳이나 정말 똑같이 어두운 곳이었습니다. 동물들이 있는 마구간의 구유에서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 하늘이 어두운 땅에 나타났으며, 하나님이 우리와 완전히 하나가 되기 위해서 인간이 되셨습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그 예수님의 동료와 이웃과, 친구와 형제들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바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관에 자리가 없어서 부모와 아기가 다른 곳에 잠자리를 마련했다는 건 천만다행입니다. 바로 그곳에서 이런 일이 일어났으니까요.

 

이제 구주가 우리에게, 우리의 삶에, 바로 완전히 다른 한 곳에 머물기 위해서 들어 오셨다는 건 천만다행입니다. 바로 이곳은 구주가 단지 문을 두드리며 방이 있는가 하고 묻다가 밖에 머물러 있을 수밖에 없었던 곳이 아니라 일단 들어오신 곳입니다. 구주는 이미 우리 안에 은밀하게 들어오셔서 우리가 구주를 깨닫고 구주의 함께 하심을 기뻐하는 걸 기다리십니다. 우리의 인생에서 이런 장소는 과연 무엇일까요? 여러분의 삶과 행동 중에서 고상하고 아름답고, 또는 정의로운 대목만을 머리에 그리지 마십시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런 부분에서만 구주를 느끼고 받아들이려고 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구주가 우리에게 들어오시는 곳은 베들레헴의 마구간과 같은 곳입니다. 그곳은 결코 아름다운 게 아니라 오히려 더럽게 보일 것입니다. 따뜻하고 다정스러운 게 아니라 섬뜩해 보입니다. 그곳은 인간적인 품위보다는 정반대로 동물의 본성이 가까이 있는 곳입니다. 보십시오. 우리의 교만한 여관이나 겸손한 여관은, 그리고 그 안에서 머물고 있는 우리는 우리 인생의 표면적인 모습일 뿐입니다. 그 내면에는 어떤 깊이, 어떤 근원이 숨어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어떤 심연이 숨어있습니다. 우리 사람들은, 그 어떤 예외도 없이 우리 모두는 바로 그런 부분에서는 거지처럼 가난할 뿐입니다. 흡사 ‘돌아온 탕자’와 같으며, 탄식하는 피조물과 같습니다. 죽을 수밖에 없는 자들이며, 근본에 대해서는 아무 것도 아는 게 없는 자들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들어오셨습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분은 우리의 모든 삶 안으로 들어오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삶의 이처럼 어두운 곳에, 구유에, 마구간에 들어오셨다는 건 천만다행입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우리는 그분을 필요로 합니다. 바로 그런 곳에서 그분은 우리를, 우리 모든 각각의 사람들을 필요로 합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그분과 함께 할 수 있는 권리가 있습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가 그분을 보고, 알아보고, 믿고, 사랑하기를 기다리십니다. 그곳에서 그분은 우리에게 인사를 건네십니다. 그곳에서는 우리가 그에게 다시 인사드리고 반갑게 환영하는 것 말고는 더 이상의 요구가 없습니다. 우리의 어두운 곳에 황소와 나귀가 아주 가깝게 있다는 사실을 그렇게 부끄러워하지 맙시다! 바로 그런 곳에 구주는 우리 모두에게 아주 단단히 연결되어 있습니다. 바로 이런 어두운 곳에 그분은 우리와 함께, 우리 옆에 계시며, 또한 우리는 그분과 함께, 그분 옆에 있습니다. (K. Barth, 그루노프 편, Brevier)

보라

 

이 구유에 누인 그분이 바로 그리스도다, 이렇게 목자들이 천사들의 전해주는 말을 들었습니다. 거룩한 경험을 한 목자들이 실제로 베들레헴에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았습니다. 그것이 표적이었습니다. 여러분, 목자들을 향한 천사들의 말을 다시 한 번 기억하십시오, 가서 보라. 그리고 그들이 가서 보았습니다. 여러분, 구원은 우리가 일으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것을 볼 뿐입니다. 보십시오. 그분이 어떻게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셨는지를 보십시오. 이것이 바로 구약성서 전체 메시지의 핵심이기도 합니다. 자신들의 생각을 뛰어넘어서 일으키시는 하나님의 구원을 보라. 예언자들이 항상 이런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홍해 안에 그 당시 가장 막강했던 파라오의 기마병들을 수장 시켰던 그 하나님의 권능을 보라! 이렇게 소리치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자신을 너무 신뢰합니다. 자기 자신을 인정하는 거야 좋겠지만 지나치게 사랑합니다. 사랑이 아니라 오히려 집착에 가까울지 모릅니다. 자신이 행하는 행위들, 자신의 업적들에 우리는 눈이 멀어 있는지 모릅니다. 이것은 일반 사람들만이 아니라 저를 포함한 목사들에게 똑같이 해당되는 이야기입니다. 교회가 부흥하는 것으로 자신의 능력을 확인하고, 거기에 온 영혼을 걸어두고 삽니다. 얼마나 불쌍한 일인지 모릅니다. 여러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이미 바르트의 묵상집에 나와 있듯이, 보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기에게만 눈이 머물러 있으면 하나님이 행하신 일이 보이지 않습니다. 목자들이 무슨 위대한 일을 했나요? 그냥 들려오는 소리만 들었고, 가서 보라고 해서 가서 보았고, 단순하게 말씀에 따라서 살았습니다.

 

오늘 마지막 부분에 이 목자들은 구유에 누인 아기 예수를 보았습니다. 그들이 경험했던 영광이, 즉 초월적인 영광이 아주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 체현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본 것입니다. 그것은 성육신이었는데요. 이 얼마나 놀라운 생명의 환희였겠어요. 여러분들의 일상 속에 이런 경험이 얼마나 일어나는지 모르겠습니다. 이런 경험이 없으면 우리의 영성은 참으로 초라한 것이 되고 맙니다. 목자들은 구체적인 구유 속에서 하나님의 구원이 시작되었다는 것을 보았고요, 22절 후반절에 보니까, 모든 것으로 인해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여러분, 2008년 성탄절입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얼마나 바쁘게 사셨겠습니까? 힘든 일도 많았겠지요. 네, 우리가 몸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열심히, 때에 따라서는 경쟁해야하기도 하고, 아파하기도 하구요, 이런저런 삶의 홍수 속에 우리가 떠밀려갈 때도 많습니다. 성탄절 이 아침을 맞아서 다시 한 번 정신 차리십시오. 우리가 무엇을 보고 있는지, 우리가 무슨 소리를 듣고 있는지, 우리가 어떻게 하늘의 영광이 사람들에게 참된 기쁨이 된다고 하는, 평화가 된다고 하는 그 사실을 우리의 삶에서 확인하고 그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지를 말입니다.

 

오늘 이 목자들의 마지막 태도를 보십시오. 이것은 초기 기독교인들에게 전해 내려온 하나의 전승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기독교의 본질을 말합니다. 무언가요? 영광을 돌리고 찬송을 했다는 거에요. 어떻게 우리의 일상 자체가 하나님에게 예배가 될까요? 우리의 숨 쉬는 것마저 어떻게 우리의 찬송이 될까요? 이런 것이 없다면 우리의 영성은, 우리의 영혼은 아무리 교회에 오래 다녀도 점점 메말라갑니다. 생각 없이 평생 살면 나이가 들수록 노욕에 사로잡히는 것처럼 우리 신앙도 그런 영적 성찰이 없으면 연륜이 깊어질수록 완고하게 되고, 더 강하게 율법에 묶여버릴 겁니다.

 

2008년 성탄절에 저는 여러분과 함께 이 초기 기독교들에게 전해 내려온 이 목자들의 이야기를 통해서 우리에게 정말 전하려고 했던 그 메시지에 귀를 기울였으면 합니다. 우리의 삶이, 우리의 일상이, 우리의 인간관계가, 그리고 우리의 모든 직업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이 하나님에게 참된 영광, 즉 생명의 신비로 들어가는 통로, 그래서 찬송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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