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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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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김성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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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문》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
-20세기 한국의 씨알의 소리 그리고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
함석헌(1901-1989)은 세계사에서는 그 존재가 잘 알려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러나 한국 안에서는 그의 생애를 일컬어 "한국의 간디", "종교적 다원주의의 선구자","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등으로 묘사해 왔다. 이러한 그의 별명이 암시하는 것처럼 그는 때로는 종교사상가였고, 때로는 구도자였고, 때로는 인권 운동가였고, 또 때로는 역사, 정치, 종교, 사회문제 등을 주제로 다방면의 글을 쓰는 이였다. 그러나 예상외로 그는 한번도 공식적으로 "종교학자","언론인", "역사가" 혹은 "정치가"의 세속적 위치를 가질 수가 없었다. 분류적으로 그는 퀘이커 교도이며 기독교사상가였다. 그러나 그의 생각과 삶의 방식은 세계와 한반도의 역사적 변이에 따라 끊임없이 포괄적으로 변해왔다. 그러므로 그를 다 성취한 사람으로 표현하기보다는 항시 추구하는 사람으로 표현하는 것이 적절한 듯 하다.
함석헌의 삶과 생각을 연구하기 위해 나는 두 가지 방법론을 사용했다. 첫째로 그가 남긴 방대한 저서를 1차 자료로서 철저히 꼼꼼히 분석했다. 이것은 {함석헌전집} 20권 (한길사판)과 그가 한국내와 그리고 미국과 영국 퀘이커들에게 쓴 여러 종류의 글도 포함한다. 둘째로 나는 그가 영향을 주고받은 다양한 사람들과 특히 국내의 학계, 언론계, 정치계, 종교계와 더불어 그의 친인척들과도 폭넓은 개별면담을 가졌다. 이 논문에 수록된 자료들은 그러한 공식과 비공식 면담을 통해서 수집된 자료들이다. 이밖에도 여러 사람들이 함석헌에 관하여 쓰거나 제작한 세미나 테잎, 잡지, 신문, 논문 등도 참고자료로 추가했다.
이 논문은 세계에서 처음 연구된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박사논문임을 밝힌다. 비록 국내 대학에서 5편의 석사논문과 영국의 에섹스 대학교에서 1편의 석사논문이 (본인에 의해서) 연구된 바 있지만 그 논문들은 부분적이고 어떤 특정범위 내에서 함석헌의 삶과 생각을 다루는데 그쳤다.
이 논문은 함석헌의 격동의 인생여정과 그의 사상변화를 총괄적으로 전개했다. 20세기 한국의 자유민주주의 운동의 기수로서의 그의 역할과 혁신적인 그의 종교적 포용관을 분석했다. 그는 개인의 영(靈)적 완성의 추구와 사회정의를 위한 투쟁을 상호연관된 것으로 보았다. 이상주의자로서 그는 인간의 가치를 도덕의 가치로 보았다. 더불어 그는 절대자 혹은 신을 우주 위의 초월적 존재 뿐 아니라 각개인의 양심 속과 자연의 어느 곳에나 내재해 있는 존재로 보았다. 이런 시각에서 이 논문은 함석헌을 동양과 서양 그리고 역사의 패자와 승자 사이에 매개자로서의 역할을 분석하고, 어떻게 그가 그 시대의 역사적 도전에 대응하고 그의 생각을 정립해 나갔는지 평가할 것이다.
내 용
테이블: 함석헌의 생애 연표
머릿말
1. 역사가의 시각으로
2. 논문의 구성
3. 논문연구의 접근방법
첫번째 마당: 20세기 한국사의 배경
이 마당의 목적
1.1. 조선왕조의 유산: 유교와 권위주의
1.2. 제국주의와 공산주의
1.3. 부패한 기독교 정권과 무능한 정부
1.4. 군부독재와 민주주의
1.5. 요약
두번째 마당: 함석헌의 청소년기 (1901-1923)
이 마당의 목적
2.1. 평안북도에서의 "젠틀(gentle)"한 어린시절 (1901-1919)
2.2. 삼일운동에 기독청년으로 (1919-1921)
2.3. 오산학교에서 (1921-1923)
세번째 마당: 식민지 지식인으로 (1923-1945)
이 마당의 목적
3.1. 일본에서의 생활 (1923-1928)
3.2. 역사교사 그리고 {성서조선} (1928-1938)
3.3. "민족주의자", "동양적(東洋的)", 농사꾼 (1938-1945)
"감방대학"
우찌무라로부터의 탈출
제국주의 아래서 평화주의자
네번째 마당: "해방된" 조국에서
이 마당의 목적
4.1. 해방 그리고 문교부장으로 (1945-1947)
4.2. "해방된" 남한에서 "광야의 소리"로 (1947-1961)
남한의 사회-정치적 상황
남한의 함석헌
"이단자"
"실패자"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
"죄인"이 되어
다섯번째 마당: 군부정권 아래서 (1961-1989)
이 마당의 목적
5.1. 군사정변과 퀘이커리즘 (1961-1970)
나그네 함석헌
"전환점"
5.2. 씨 의 소리와 "죽을때까지 이걸음으로" (1970-1989)
"강(强)을 약(弱)으로 제(制)함"
자유를 위한 행진
민족과 가정 사이에서
여섯번째 마당: 함석헌이 남긴 것
이 마당의 목적
6.1. 김동길과 안병무
김동길과 그 삶의 가락
안병무와 민중신학
6.2. 한국의 민주주의
기독교의 사회-정치적 면의 회복자
함석헌 민주화운동의 그 성서적 연관성
6.3. 함석헌의 서구 기독교와 동양사상의 융합
한국인의 종교적 전통과 특성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접근방법
서구 기독교의 동양적 해석
종교적 다원주의
역사적 그리고 사회-문화적 종교
휴머니스트 함석헌
마치는 말: 함석헌 - 신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후기
참고문헌 및 자료
머리말
1. 역사가의 시각으로
함석헌은 20세기 한국의 가장 도발적인 기독교 사상가이자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였다. 상징적으로 함석헌(1901-1989)은 그의 생애의 시작을 20세기의 시작과 같이 한다. 20세기는 한국역사를 통해서 가장 급격한 사회-정치적 변동을 가져온 시기이다. 20세기 한국사는 정치적 긴장과 사회적 불안이 연속된 시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불안정 시대의 다변적인 도전에 함석헌은 그의 삶전체로 응전했다.
한국의 보수적 기독교계에선 함석헌을 전통에 매이지 않는 자유 분방한 종교 사상가로 본 듯하다. 그럼에도 한국의 지성사에서 그는 눈여겨 볼만한 인물중의 하나다. 특히 그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인권운동은 과소평가 돼서는 안될 것이다. 그럼 함석헌을 우리는 가장 뛰어났던 민주화운동의 지도자의 한사람으로 자리매김을 해야 할 것인가? 아니면 인권 운동가의 한사람으로 그 역사적 위치를 정할 것인가? 그것도 아니면 급진적 기독교 사상가로 자리매김을 할 것인가? 그의 사상의 폭과 활동범위는 측정하기 어려울 정도로 참 넓고 다양했었다. 그래서 어떤 한국인은 그를 일컬어 "종교사상가" 또는 "한국의 양심"이라 한 반면, 또 다른 이들은 그를 "독설가", "선동가" 혹은 "종교적 이단자" 라고도 불렀다. 함석헌이 누구였는가의 질문에 그는 "이런 사람이다" 라고 딱잘라 말하기에는 어려운 점이 있다. 심지어 오늘의 젊은 세대들 중엔 그의 이름 석자가 전혀 생소하다는 친구들도 바닷가의 조약돌처럼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그보다 "유명한" 후진들에게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비록 그의 종교적 사상과 올바른 정치를 위한 제언들은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엔 별로 현실에 성공적으로 적용돼 본 적이 없지만, 그의 사상은 그의 후진들 중 좀더 실제적인 사회 개혁가나, 학자, 언론인 심지어 정치인들에겐 깊은 영향을 주었다. 그들의 이름을 들어 보면 다음과 같다: 김동길, 안병무, 장준하, 한완상, 김찬국, 송건호, 이태영, 계훈제, 김대중 등이다.
그러면 함석헌은 어떤 사람이었을까? 어떤 한국인들의 눈엔 그는 성경과 동양철학을 독특하고 자유롭게 풀이해 주는 박식한 '강사' 혹은 다산의 '작가'로 보였다. 또 어떤 이들에게 그는 불의한 정치권력에 저항하는 '싸우는 평화주의자'로도 보였다. 분명히 그의 종교관은 진보적 개방적이었고 그런 그의 모습은 '무소속 종교인'으로 보일 때도 있었다.
내가 함석헌의 삶과 생각을 학문적으로 분석하고 연구하기 시작 했을 때 나는 막대한 심적부담을 느꼈다. 왜냐하면 나는 내가 그가 말하지 않고 글쓰지 않은 그의 내적신념까지도 유추해서 다룰 수밖에 없는 불가피한 상황에 처해 있음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간디의 생애를 놓고 이야기한 네루(Jawaharlal Neru:1889-1964)의 표현이 맞을 것이다: "아무도 간디의 생애와 사상에 관해 쓸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그 글을 쓰는 사람 자신이 간디만큼 위대하진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러면 나는 함석헌에 대해서 쓰지 말아야 할 것인가? 그럴 수는 없었다. 내가 못났으면 못난대로 나는 그의 삶과 생각에 대해서 '냉정'하고 '공정'하게 쓰기로 했다. 추남이기에 미녀를 그리워하고 유한하고 약한 인간이기에 무한하고 강한 절대자를 그리워하는 것 아닐까 ---
20세기의 한반도는 격렬한 정치적 격변과 사회적 불안 상태의 연속이었다. 금세기의 한국인들은 엄청난 사회-정치적 변화를 단시간 안에 체험해야했다. 한국인들에게 외부로부터 가해진 목조르기와 내부로부터 발생한 혼란과 몸부림은 다음과 같이 열거될 수 있을 것이다: 일제강압시대 (1910-45), 한국전쟁 (1950-53), 4월 혁명과 제 1 공화국 붕괴(1960), 군사정변과 군부독재 (1961-87). 일제의 가혹한 식민정책은 한국인들의 정신적 정체성을 파괴하는데 아주 '효율적'으로 적용됐다. 일제가 식민지 한국을 탄압한 예는 대영제국이 그 식민지를 탄압한 경우와는 그 잔학성이 하늘과 땅 차이다. 일제는 한국인의 언어 말살은 물론 한국인의 문화적 뿌리를 송두리째 뽑고자 창씨개명, 한국사 왜곡 작업등을 단행했다. 영국인 정치학자 데이빗 손더스도 다음과 같이 논증한다:
"대영제국의 인도식민통치에 대한 간디의 시민 불복종운동은 1940-1년의 제 2차 세계 대전 중엔 잠잠한 편이었다. 인도 민족지도자들은 버마에 주둔해있는 일본이 대영제국을 대신해서 인도를 점령통치할 가능성을 원치 않았기 때문에 노골적으로 영국으로부터의 독립운동을 전면 중지했다."1
1945년 이후부터 미국은 남한을 냉전시대 소련의 세력확장을 저지하기 위한 극동지역의 '완충기' 정도로 여겼다. 첫 주한미군 사령관 하지 (John R.Hodge: 1893-1963)가 남한에 처음 도착 했을때 발표한 성명서에 보면 그는 한국인을 "일본인과 비슷한 혈통의 고양이" 정도로 생각하며 정복당한 적(conquered enemies)으로 취급할 것이라고 밝혔다.2 실제로 미군정은 한국인들을 동료라고 생각하기보다는 정복당한 적으로 다루었다. 이런 면에서 미군정은 남한에 '해방자'라기 보다는 `정복자'로서 들어왔다.3 더우기 미군정 요원과 친일파 한국인은 해방 후에도 친밀한 사이를 유지하며 남한사회 전반의 주도권을 장악해갔다. 함석헌이 한국역사를 일컬어 "등뼈가 부러진 역사" 라고 표현 한 것은 이러한 한반도의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문화적인 영향을 살펴보면 유교는 14세기이래 오늘날까지 압도적으로 한국인의 의식구조를 좌우해 왔다. 그밖에도 샤머니즘, 불교, 도교, 기독교 등도 현재 한국인의 의식에 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러므로 14세기이래 한국인의 의식구조가 별로 변하지 않았다는 시각이나, 심원하게 변했다는 관점이나 둘 다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장이라 할 수 있다. 문제는 어떤 색안경으로 한국 문화사를 보느냐에 달려있다. 그러나 여기서 특별한 주의를 요하는 것은 19세기 이래로 한국인들은 서구기독교를 열광적으로 받아 들였다는 사실이다. 그럼 서구기독교는 유교적 한국인들의 의식구조를 얼마나 탈유교적으로 바꾸어 놓았을까?
내자신의 주일학교 교사로서의 경험(1979-81)과 기독교 잡지 편집자로서의 경험(1985-87)에 비추어 볼 때 한국교회와 한국기독교의 기본적인 성격은 전통적인 한국유교와 별로 다른 점이 없다. 다른 말로 대부분의 한국 기독교인은 유교의 권위주의적이고 계급주의적인 가치개념과 체제를 그대로 한국교회에 접목 시켰다는 점이다. 많은 교회 지도자나 소위 성직자라는 이들은 그 교회 교인들에게 가부장적 태도를 취하고 그 자신의 권위에 복종과 충성할 것을 요구함으로서 평신도들을 동등한 동료라기보다는 종속적인 하급자로 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서구 선교사의 시각엔 한국의 가족 및 가계(家系)중심주의의 유교가 교회 및 교단 중심주의의 기독교로 대치되는 듯한 인상을 준다. 일례로 같은 지역의 같은 교단의 교회끼리도 회원확보를 위해선 격렬한 경쟁자로 변한다.4 한국의 많은 교회 지도자들은 사회나 정치의 부정불의의 문제점에 대해선 냉담한 반면 그 교회 교단의 문제에 대해서는 그 관심이 필요 이상으로 가열돼 있는 듯하다. 그런 면에서 과연 한국의 기독교인은 집단적 이기주의의 성향이나 강한 자기중심적 시야만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자문이 필요하다고 본다.
함석헌의 한 개인의 생애와 사상은 20세기의 한국인이 정치, 사회, 문화, 종교적 혼돈의 소용돌이를 경험하면서도 불구하고 그 와중에 어떻게 내적인 영(靈)의 세계를 꿋꿋하게 추구해 나갔는가 하는 것을 반영해준다. 다변적인 시대의 고민에 응답하기 위해서 때로 그는 시인, 역사가, 언론인의 모습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또 때로 그는 교육가, 사회 운동가, 다산(多産)의 작가 심지어는 민주주의를 위한 재야 인권운동의 지도자로서의 자신을 발견 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외적 혼란 중에서도 내적으로 그는 동양의 도교, 유교, 불교, 힌두교, 무교회 운동뿐 아니라 서구의 전통적인 기독교, 퀘이커리즘, 과학주의, 합리주의 등과도 사상적으로 친숙해 지려고 노력했다.
만약 함석헌이 혼미한 20세기의 한반도에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그는 그저 "조용한 정원사"가 되었을 것이라고 술회한 적도 있다. 그가 난초 가꾸기를 끔찍이도 좋아한 것을 보면 그리 놀랄만한 술회도 아니라 생각한다. 고요함과 평화스러움은 그의 삶의 최고의 가치였는지도 모른다. 그 자신이 이야기했듯이 "그저 조용히 집에 홀로 앉아 꽃만 기를 수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5 그러나 불의와 부조리가 사회전반에 부패한 정치권력을 업고 판칠 때, 그래서 개인이 조용히 평화롭게 일상적인 삶을 살고자하는 소망을 박탈당할 수밖에 없을 때, 한 개인은 선택의 여지없이 그 사회의 "범법자"가 될 수밖에 없다. 분명한 것은 함석헌은 위대한 "민족의 메시아"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그는 오히려 평범하고 조용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한반도의 난세의 풍파가 그를 민족지도자의 위치로 밀어 버렸던 것이다.
불행하게도 아니 어쩌면 다행스럽게도, 함석헌은 급박한 사회와 사상의 대변동의 시대에 태어났다. 그러므로 그는 바람 앞의 등불과 같은 조국의 운명을 놓고 깊이 생각하고 고뇌해야 했다. 또한 "최대 다수의 최대의 행복"을 위해서만 아니라, 사회에서 눌리고 억압된 소수의 권익을 위해서 그 자신의 자유를 희생당해야 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그는 아홉 번이나 "감방대학"의 경험을 했다. 그의 잦은 투옥과 연금은 일제식민지 하에서 뿐 아니라 북한의 소련군정 하에서도 계속됐고 심지어 "해방된" 조국에서조차 같은 동포인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정권에 의해 계속 되었다. 그뿐 아니라 격동의 세월을 살면서 함석헌은 그의 부모의 운명까지 지켜보지 못하게 된다. 그의 부친은 그가 일제에 의하여 옥살이를 할때 그도 모르는 사이에 운명했고, 그가 소련군의 총부리를 피해서 북한에서 월남한 이래 그의 모친의 생사는 전혀 알 길이 없게 된다.
함석헌은 조국의 자유와 인간애를 지키기 위해 그것을 가로막는 불의에 대항해서 그의 전 삶으로 저항해야 했다. 그는 그자신의 삶을 이렇게 요약한다: "마치 소년이 자기가 원하는 방향으로 공을 차듯이 이날 껏 나는 '하나님의 발길에 채어오는 사람' 입니다. 내 삶은 하나님에 의해서 인도되고 몰아진 삶입니다."6 다시 말하면 함석헌의 생애는 그의 조국에 대한 사랑과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한 정열에 의해 어쩔 수 없이 끌려온 삶이라는 고백이 아닐까. 인간이 역사의 산물인한 한 인간의 생애와 사상은 그가 처한 사회-정치적 상황과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확신한다.
위에 지적한 요점을 염두에 두면서 이 논문은 나의 함석헌 개인의 삶에 대한 평가만이 아니라 그의 삶과의 연관성 속에서 나의 종교관(근본적으로는 기독교를 중심으로)과 한국사관을 반영한다. 전반적으로 이 논문은 크게 3가지 주제를 다룰 것이다: 첫째로 함석헌이 살면서 고민한 그 시대의 역사적 배경 (1901-89); 둘째로 함석헌의 전 생애를 통하여 특별히 그가 영향받은 인물과 사상, 그리고 그런 과정 속에서 어떻게 그가 그의 사상적 독창성을 창조해 나갔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셋째로 함석헌이 현대 동서의 종교와 철학을 위하여 어떤 사상적, 문헌적 공헌을 남겼는가를 진단 할 것이다. 이럼으로써 국내외 학계에서의 함석헌 연구에 관한 의욕을 불러 일으켰으면 한다. 함석헌이 타계한지 10년이 가까워오도록 그에 대한 박사논문이 한편도 발표되지 않은 것에 대한 본인의 '위기의식'도 이 논문을 발표 하게된 동기중의 하나이다.
이 논문은 또한 한국 현대사와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사이의 밀접한 상호 관련성도 평가 할 것이다. 한국 현대사는 일제식민사관에 의해 왜곡된 면이 있을 뿐 아니라 좌우익 '냉전논리'와 30년 가까운 군부독재 정권에 의해 굴절된 부분도 많다. 반면에 민족사관에 의해선 "반만년 역사 위에 찬란하다 우리문화"로 과장되게 찬양 된 면도 있다. 과연 한국사가 찬란한 역사일까? 대답은 독자들에게 맡긴다. 어쨌든 한국 현대사는 "뜨거운 감자" 처럼 다루기 곤란한 주제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한반도에 "정녕 무슨 일이 일어났었나?"를 재평가, 재검토하려고 노력하는 일은 중요한 일이라 확신한다. 역사가 카(E.H.Carr)가 그의 저서 {역사란 무엇인가?}에 역사적 재검토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처럼 "역사란 현재와 과거 사이의 끝나지 않는 대화"이기 때문이다.7
이 논문은 또한 함석헌에 관한 역사적 문헌을 더해주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의 사상이 종교적 다원주의를 위해 공헌한 점을 드러내기 위해서 쓰여졌다. 나는 이 논문이 국제관계, 세계평화, 한반도, 동아시아, 기독교 보편 구제설(인류는 결국 전부 구제 받는다는 설)의 발달과정, 퀘이커의 기독교에 대한 해석, 한 인간 함석헌의 영적(靈的)발달 과정에 흥미를 갖고있는 사람들을 위해 공헌되기를 소망한다. 이 논문은 또한 한반도에서 특정한 시기에 일어났던 일이 어떻게 세계인들의 일반적 삶의 상황과도 상호 연결돼 있는가를 증언한다. 한국에 관한 문외한을 위해서 개략적인 한국의 역사, 정치, 문화, 종교에 관한 정보도 삽입했음을 밝힌다. 전체적인 함석헌의 삶을 평가하기 위해서 나는 그의 공헌뿐 아니라 그의 한계도 동시에 보여줄 것이다.
2. 논문의 구성
함석헌의 사상은 인도주의적인 면과 더불어 상식적인 혹은 실용주의적인 면을 결합했다. 그는 실용적인 감각이 없는 종교는 맹목적이고 광신적인 믿음의 한 형태로 여겼다. 그러므로 비록 종교의 세계는 '실용'이상의 세계이지만, 그는 종교가 실용적인 면을 무시해서는 안 된다고 확신했다. 이런 면을 고려해서 나는 역사가의 관점에서 함석헌의 삶과 인물비평 그리고 그의 다면체적인 사상을 고찰할 것이다.
첫번째 마당에서는, 함석헌이 살았던 시대의 역사-철학적 배경 특히 조선조의 신유교(성리학)의 이념적 성격을 개관할 것이다. 이와 함께 구한말부터 (1850년 이후) 제 6공화국 (1988) 초기까지의 정치-사회적 환경을 검토 할 것이다. 인간의 사고는 환경의 산물이냐 아니면 인간의 생각이 환경을 창조하느냐의 논점은 아직도 논쟁의 여지가 있다. 아마도 그것은 상호보완적일 것이다. 그래서 한사람의 인생행로를 이해하기 위해선 그가 살던 사회 환경도 뚜렷하게 인식하는 일이 중요하다고 믿는다.
두번째 마당에서는, 함석헌의 북한에서의 어린 시절을 소개한다. 그의 가족 상황과 더불어 청소년 함석헌이 누구로부터 어떤 영향을 받고 성장했는지를 보여준다.
세번째 마당에서는, 성인기의 함석헌의 삶을 탐구 할 것이다. 그것은 일본제국주의가 그 전성기를 누릴 때 함석헌의 일본 유학생시절과 모교 오산학교의 역사교사시절, 그리고 동아시아의 사상가로서 어떻게 그가 일제하에서 "범죄인"이 될 수밖에 없었는가를 보여줄 것이다. 특별히 이 마당에서는 함석헌의 독특한 철학적 성취와 공헌, 즉 "세계사 속에서 한국과 한국인의 정체성 재발견", 을 엄밀하게 관찰한다. 일제는 그 식민정책을 통해 한국말과 한국문화를 탄압하고 일본 중심적인 사관을 한국사에 강요하므로서 한국인의 주체의식과 정체성을 말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정책에 대항해서 함석헌은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전력을 다했다. 이것은 함석헌에게 있어서 한국의 미래운명과 깊이 관련된 것이었다.
기독교 사상가로서 함석헌은 한국사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무작정 감추고 싶지만은 않았다. 오히려 그는 고난의 한국사를 인정했고 한국사의 위치를 세계사의 '하수도'로 정의했다. 그의 저서 {뜻으로 본 한국역사}를 통해 함석헌은 한국사를 마치 인류를 위한 "수난의 여왕"처럼 서사적으로 표현했다. 그는 또한 한국의 고난을 그는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수의 고난과 동등시했다. 한국사의 성서적 해석을 통해서 그는 절망속에 침체해 있는 한국인들에게 미래를 향한 희망과 비전을 제시해 주고자 노력했다. 이러한 그의 시도는 한국인들이 일제의 폭압통치하에서도 그 정체성을 잃지 않고 세계사속에서 스스로의 역할을 깨닫게 해주는데 있었다. 한국사를 통해서 어떤 이도 세계사 속에서 한국사의 위치를 함석헌처럼 독특하게 파악한 사람은 없다. 그러므로 그의 사상과 생애자체를 20세기 한반도에 있어서 중요한 한국인의 정체성 중의 한부분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네번째 마당에서는, 해방직후 북한 공산정권 아래서의 함석헌과 남한의 자유당정권 아래서의 그의 삶과 생각의 변화를 전망한다. 이시기에 함석헌은 그의 생애에 처음으로 같은 동포의 손에 의해서, 북한에서는 물론이고 남한에서조차 투옥생활을 경험했다.
다섯번째 마당에서는, 함석헌 인생의 마지막 시기를 다룰 것이다. 이시기에 그는 두번의 군사정변을 맨몸으로 체험하고 사상적으로는 서구 퀘이커리즘 그리고 동양의 노장(老莊)사상과 더욱 친숙하게 된다. 함석헌사상의 주요특질은 노장사상 그리고 퀘이커리즘과 많은 공통점이 있는 듯하다. 역사를 통하여 노장사상은 중국에서 그리고 퀘이키리즘은 영국에서 둘다 "이단자" 취급을 받은적이 있음을 명심하라. 한국사에 있어서도 도가사상은 유가(儒家)에 의해서 박해받았다. 전통적으로 유교는 통치이념과 학자의 종교였던 반면 도교는 상민들에 의해서 받아들여졌으며, 이러한 상민의 종교 도교는 유교 지도층에 의해서 "이단" 취급을 받았다.8 특히 신유교 성리학이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받아들여지면서 유가에서는 공식적으로 도교를 이교(異敎)로 낙인찍었다.9 이러한 탄압에도 불구하고 노장사상이 늙은이들, 가난한 사람들, 억눌린 사람들, 반란자들, 비밀결사회등 탄압받는 이들에게 "피난처" 역할을 해주고 저항력을 공급해준 것은 주목할 만하다.10 퀘이커들의 경우를 살펴보면 17세기 영국에서 그들은 비국교도(영국 국교인 성공회에 가입하지 않은 사람)들 중 가장 극심한 고난을 받았다.11 1662년에는 퀘이커법령(The Quaker Act)도 공포되었는데 이 법령은 특별히 퀘이커들의 제도적 박해를 권장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법안이었다.12
여섯째 마당에서는, 과연 함석헌이 한국과 세계를 위해 남긴 것이 있다면 그것은 무엇일까를 살펴본다. 특별히 민중신학, 남한의 민주화 과정, 그리고 한국인에게 있어서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의 관계를 그의 사상과 결부시켜서 탐구해 본다. 정치인이 아닌 하나의 씨 로서의 함석헌이 그의 인권운동을 통해 한반도의 민주주의를 위해 기여한 점도 재조명 할 것이다. 또한 어떻게 그가 동양철학과 서구기독교를 재해석하여 불의의 정권이 난무하는 시대에 영적(靈的)으로 현실에 적용해 나갔는지 검토해 볼 것이다. 함석헌은 동서사상의 내관적(內觀的) 수렴을 통해 한국인의 정체성을 재창조함과 동시에 동양과 서양간의 내재적인 갈등을 해소해 나간다.
마지막장은, 한국 현대사 속에서 함석헌의 그 사상적 위치를 자리매김하고 그가 신의 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어떤 생각으로 어떤 삶을 추구했나를 검증한다.13
3. 논문연구의 접근방법
함석헌은 동시대의 대부분의 고답적이고 고지식한 식자들과는 다르게 이해하기 쉬운 표현의 말과 글로 대중 앞에 자신의 생각을 내놓았다. 이런 면에서 그는 대중의 처지와 입장을 대변하는 목소리 즉 씨 의 소리였다.
그의 삶의 규모와 스타일이 검소하고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심지어 보잘것없는 수준이었기에 서민들은 그로부터 큰 괴리감을 느끼지 않았다. 그래서 그와 면식이라도 있는 사람들은 그런 그를 '민족중흥의 영웅'이라고 느끼기보다는 그저 '동네 할아버지'나 '시골풍나는 노인네'처럼 그들 중의 한사람으로 보았다. 그러므로 비록 함석헌자신은 그를 항상 민족이나 국가의 지도자가 되기에는 "리더쉽이 없는 부족한 사람"으로 여겼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후배나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국가가 위기상황에 처했을 때마다 그를 인권운동의 지도자 혹은 민족의 지도자가 되도록 '떠밀었다'. 때로는 그가 "글쎄요" 하면서 이러한 '떠밈'을 거부 하기도 했다. 그는 때로 씨 이 하나님이고 하나님이 씨 이라고 역설을 하며, "믿을 것은 씨 밖에 없다"고 강조를 하지만 실제로는 그는 이런 씨 을 전적으로 믿지도 않았고 또 그 씨 의 손에 자신을 전적으로 내맡기지도 않았다.14 함석헌의 추종자들은 또한 그의 외적인 수줍어함과 내적인 불호령 같은 용기가 독특하게 교착된 것에 당황했었고, 이런 그의 모습은 한때 그를 마치 "모순의 사람"처럼 보이게도 했다. 함석헌은 지혜로운 사람이나 용기있는 사람으로 태어났던 것 같지는 않다. 그러나 그의 전 생애를 회고해 보면 그는 확실히 끊임없는 배움을 통해서 현명한 사람이 되도록 힘썼고, 맹자의 말처럼 그의 내적힘을 존심양성하여 용기 있는 사람이 되도록 노력했다. 그는 부지런히 자기수양을 게을리 하지 않았고 그의 지식과 잠재력을 정교하게 정련해 나갔다.
비록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의 무조건적 평화주의에 매혹되었지만 그는 절대적 평화주의자는 아니었다. 그는 때로 자기방어의 윤리를 순진한 절대 평화주의 보다 더욱 중요한 가치로 믿었다.15 평화주의자들도 그의 가족이나 그가 속한 민족이 불의의 세력에 의해 공격받았을 때, 그 가족이나 민족을 방어하고 보호해야할 의무가 있지 않을까. 아마도 함석헌은 사회정의없이 평화스런 사회는 이룰 수 없다고 믿었기에 융통성있는 평화주의자였던 것 같다. 예수의 경우도 유사하지 않았을까. 그가 별다른 대안이 없었을 때 그는 완력을 통해서 고리대금업자들을 성전으로부터 내쫓아버렸다. 물론 예수는 폭력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나 악에 대항해서 선택의 여지가 없었을 땐 그런 예수조차 완력을 쓰기도 했다.
함석헌은 몇몇 그의 추종자가 생각하는 것처럼 언제나 솔직하게 거리낌없이 말하는 사람만도 아니었다. 그가 민족의 자유와 민주화운동을 위해 활동하다가 형사나 경찰들에게 "죄인"으로 체포 구금 되었을 때, 그는 항의나 불평으로 그들에 대항하기보다는 오히려 침묵을 지킨 경우가 많다. 형사나 경찰이 그의 "범죄행위"에 대한 물적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을 때는 심지어 함석헌은 그가 한 행위를 잡아떼거나 부인하기도 했다.16 이런 면을 고려하면 그는 순진한 사람이라기보다는 실용주의적인 사고방식을 가진 이였고, 동시에 이런 자기행위를 부인하는 그의 모습은 그도 두려움을 느끼는 약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우리에게 재삼 상기시켜 준다.
70년대를 통해서 함석헌은 서구의 뉴스 매체에 "한국의 간디"로 알려지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범국민적인 인권운동을 조직하고 동원하는데 간디만큼 적극적이었던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오히려 '소극적'으로 인권운동에 참가한 인상이고 때로는 언론의 자유를 위해 힘쓰는 자신의 모습을 발견하기도 한다. 함석헌이 그의 삶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을 그의 적극적인 결의보다는 "하나님의 발길에 채여서"라고 표현 한 것은 이런 맥락 속에서 이해 될 수 있지 않을까. 그럼 함석헌은 왜 그렇게 '소극적'으로 민주화를 위해 일했을까? 겁이 많은 사람이어서 그랬을까? 그의 겸손함과 수줍음 때문이었으리라. 함석헌은 자신을 민족의 지도자가 되기엔 부적합한 사람으로 여겼기 때문에, 수많은 인권운동을 그런 '부적합한' 자신이 이끌 수 있으리라고는 결코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함석헌의 말과 글이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대열의 선봉에 지도자로 강력히 밀어세웠던 것이다. 결국 한 인간이 겸손하다는 의미는 그가 독재자가 아닌 진정한 지도자로서의 자격을 갖추었다는 것이 아닐까?
그의 미묘하고 이해하기 어려운 과묵적인 성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대부분의 한국인들에게뿐 아니라, 서구의 민권운동가들에게 "이상적 평화주의자" 심지어는 "한국의 양심"으로 불리기도 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의 민주주의를 위한 몸부림에 있어서 이상주의적이기보다는 오히려 현실주의적인 경우가 많았다. 예를 들면 함석헌이 경찰이나 군부에 의해서 심문조사를 받을 때 그들의 불공평한 대우에 대해서 좀처럼 저항하지 않았고, 또한 그런 이들의 인간으로서의 인격을 결코 신뢰하지도 않았다. 어떤 경우엔 함석헌은 그의 정치관이 그를 심문조사하는 이들과 결코 일치될 수 없다고 확신하기도 했다.17 냉혹하고 무자비한 현실로부터 생존하기 위해서 아마도 함석헌은 "뱀같이 지혜로우라"는 예수의 교훈을 너무도 잘 이해했던 듯 싶다. 이러한 함석헌의 독특하게 애매모호한 성격은 오히려 그의 신비함을 더해준다. 또한 함석헌의 추종자들은 그의 확실치 않은 "글쎄요"의 처세에 끊임없이 끌리고 매혹되는 듯하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은 오늘을 사는 한국인들 뿐아니라 세계인들에게 큰 중요성과 의미가 있다.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도덕 혹은 영의 가치로서 정의함으로서 20세기에 횡행하는 물질경제만능주의의 풍조에 대항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존엄성을 증진하는 방편으로 인권과 언론의 자유 그리고 민주주의 신장을 위해서 온몸으로 일했다. 20세기의 세계가 특별히 물질경제만능주의 위주로 흘러가는 점을 고려할 때, 도덕의 가치로 인간의 가치를 평가해야 된다는 함석헌의 주장은 '인간성의 회복'을 희망하는 현대인에게 의미심장한 경종이 된다.
더욱이 함석헌은 서로 다른 각 종교들간에 서로 관대하게 포용해 줄 것을 강조했다. 한국인이 불교, 유교, 도교, 샤마니즘 그리고 기독교의 가르침을 혼합수용해가며 오늘을 살아가는 점을 생각해 볼 때, 함석헌의 종교적 관용성의 강조는 한반도의 사회문화적 풍토에 아주 적절하다 할 수 있다.
함석헌의 말과 글의 스타일이 비체계적이고 역설적인 면이 많았기에 이 논문을 연구하는데 있어서 본인이 상당한 곤혹을 치뤘음을 또한 고백한다. 노자의 글처럼 함석헌의 글은 논리적, 이론적, 학문적, 방법론적이라기보다는 검증되지 않은 직관적, 통찰적이다. 함석헌의 전 생애가 서사적이었던 것처럼 그의 글도 서사시적, 비탄적, 감탄적, 호소적이었다고 요약할 수 있다. 함석헌은 학자나 이론가가 아니었다. 그는 사상가 혹은 행동하는 사상가로 표현될 수 있을 것이다. 함석헌이 독서를 많이한 사람 이라는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의 사상이 연구실이나 과학적 실험을 통해서 형성된 것은 아니다. 그의 생각은 삶의 실존적 현장, 역사적 사건들과 그 자신이 몸소 피땀 흘려 뒹굴어 가면서 창조됐고 다져졌다.
함석헌은 동아시아의 모순역설의 사람, 혜안의 사람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런 '골치 아픈 사람'의 생각을 서구대학의 연구실과 도서관에서 학문적으로 그리고 '논리적'으로 분석해야했다. "어떻게 한 인간의 통찰력을 합리적으로 이론화, 학문화 할 수 있을까?" 이것이 지난 8년간의 영국유학생활을 통해서 끊임없이 나 자신에게 물어온 질문이다. 점차적으로 나는 한 결론에 이르렀다. 그것은 "모든 것이 단어나 논리로 정의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라는 것이었다. 인류의 진화론과 창조론도 논리로만 설명될 수는 없지 않을까. 오히려 그것은 직관적이어야 하리라. 그래도 나는 함석헌의 삶과 생각을 학문적으로 논리적으로 정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몰아졌다. 그래서 때로는 "이 논문을 끝마치는 것은 불가능한 일" 이라고 느꼈다.
위에서도 언급했듯이, 함석헌의 종교철학관과 인물 비평을 하기 위해서 나는 두 가지 주요자료를 사용했다. 첫째로 일차자료로서 {함석헌전집} 1권부터 20권을 몇 번에 걸쳐 철저히 독파했고, 그가 쓴 다양한 여러 종류의 글도 수없이 읽었다. 두번째로는, 함석헌의 추종자, 친인척을 포함해서 그로부터 많은 영향을 주고받은 학자, 재야인권운동가, 정치지도자, 종교지도자, 언론인, 사회개혁가등과 광범위하게 단독면담을 실시했다. 이 논문에 정리된 자료들은 그러한 공식적 혹은 비공식적 면담을 통해서 모아진 정보들이다. 이밖에도 함석헌에 대해 발표됐던 세미나 테이프, 잡지, 신문, 기사, 논문 등도 보충자료로 사용했다. 함석헌의 말과 글의 영어번역은 본인이 직접 했음을 또한 밝힌다.
두 번째 마당 : 함석헌의 청소년기 (1901-1923)
이 마당에서는 함석헌의 어린 시절과 청소년기(1901-1923)를 검토할 것이다. 이 시기는 평안북도에서의 그의 청소년시절과 1919년 3.1 운동중의 그의 활동, 그리고 오산학교에서 기독청년으로 그가 어떤 삶의 행로를 걸었는가를 말한다. 이 시기를 거쳐서 함석헌은 직접 혹은 문헌을 통해서 당대의 뛰어난 많은 인물들과 접할 귀한 기회를 가진다. 그들 중엔 한국의 애국지도자, 국내외의 종교사상가 및 민족운동가 등이 있다. 특별히 함석헌이 그의 사상의 선배들로부터 구체적으로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 그리고 그가 받은 영향을 통해서 어떻게 그 시대의 고민과 위기에 대응하고 극복해 나갔는지를 분석할 것이다.
2.1.평안북도에서의 “젠틀(gentle)”한 어린시절(1901-1919)
함석헌은 1901년 황해바다가 가까운 서북지방끝 평안북도 용천군 부라면 원성동, 일명 사자섬이라는 곳에서 태어났다. 부라면은 아주 조그마한 마을로 세계의 큰 사건과는 별 상관이 없는듯, 몇 백년간을 이렇다할 큰변화없이 흘러왔다. 그의 가족 중에서 함석헌은 장남으로 위로 누님 한 분과 아래로 남동생 하나, 여동생 셋이 있었다.
함석헌의 부친 함형택은 명망있는 한의사로 많은 환자들이 평안도 뿐아니라 서울, 만주는 물론 심지어 일본으로부터까지 환자들이 줄을 이었다. 비록 함석헌의 가족이 살던 마을은 가난한 곳이었지만 그 가족의 생활수준은 같은 마을사람들과 비교해서 볼 때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1920년대 말에 함석헌의 부친이 그 마을에 장로교회와 학교를 설립하고 장로가 되었다는 것을 고려할 때, 생활수준이 그래도 시골에서는 중상층 정도는 되지 않았을까 짐작된다. 함석헌은 예술에 대한 그의 감각과 합리적 사고력은 아버지로부터 물려 받았고 어머니로부터는 평등사상과 열린 마음을 받았다고 술회한다.
함석헌이 네명의 누이들과 함께 성장했다는 것은 생각컨대 그가 여성의 특질인 '부드러운 섬세한 힘'의 묘미에 익숙했고, 또한 자연스럽게 그 힘을 흡수할 수 있는 계기가 되지 않았을까. 그것은 어쩌면 그가 나중에 부드러움의 철학인 노장사상의 장점을 파악하는데 있어서도 도움이 되었을지 모른다. 어린 시절을 통해서 함석헌은 내성적인 겁많고 부끄럼 많이 타는 아이였고 그 또래의 사내아이들과 싸움이나 다툼을 해본 일이 별로 없었다.
그 당시 한반도는 외세 앞에 나라의 존망이 바람 앞의 등불과 같았고 정치, 사회, 경제형편 또한 붕괴직전 이었다. 19세기말에 이르러 조선왕조의 경제는 빈곤의 극치에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세계무대에서 "은둔자의 왕국"으로 낙후되어 있었다. 그러므로 한반도의 천만인구는 중국과 일본을 제외한 전세계로부터 거의 분리된 상태에 있었다. 전통적인 종교인 유교, 불교, 샤마니즘은 침체에 있던 씨 들에게 활력을 불어넣거나 새로운 방향제시를 해주지 못했고 오히려 엄격한 의식(儀式)이나 정체된 계율만을 제공해 주었다.
함석헌은 이런 암담하고 어두운 정치-사회적 시대환경 속에서 자라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뛰놀던 시골마을 사자섬이나 크게는 북한지역전체는 한반도의 수도인 서울에 비해 평화롭고 조용한 편이었고, 외부로부터의 정치적 영향으로부터도 상대적으로 자유스러운 편이었다. 함석헌이 4살 되던 해인 1905년 조선왕조는 실제적으로 그 주권을 일본에 의해 박탈당하고, 함석헌이 9살이 되던 1910년 한반도는 완전히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다. 1910년 이후에 한반도에 오직 하나의 조직만이 근근이 외국(특히 서방세계)과의 연결관계도 가지면서 그 명맥을 유지하게 되는데 그것은 개신교교회였다.
개신교의 한반도 선교는 1884년을 기점으로 하는데 그때는 미국 장로교선교사가 한반도의 선교화 사명을 갖고 "조용한 아침의 나라"에 도착하던 때다. 선교사들은 종종 한국인들의 눈엔 서구의 계몽주의자로 보였고 가난과 억압에 찌든 씨 들은 교회의 보호아래서 순간적이나마 자기들의 고통이 경감되는듯한 경험도 했다. 그때부터 기독교 특별히 개신교는 한반도의 정치와 교육현대화 운동에 큰 영향을 발휘하게 됐다. 많은 씨 들은 오직 교회의 한글 성경교육을 통해서 비로서 한글을 읽고 쓸 줄 알게 되었다.
급진적인 기독교인들이나 사회참여가 활발한 기독교인들이 때로는 일본식민정권에게 두통거리가 되기도 하고 사회불안을 야기시키기도 하지만, 일본은 이런 기독교인들을 선뜻 쉽사리 탄압할 수만은 없었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미국 선교사들과 견고한 유대관계로 결속돼 있었기 때문에, 일본은 이런 기독교인들을 잘못 건드림으로서 미국과의 관계를 나쁘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러므로 한국인에게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어느 정도 일본으로부터의 간섭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것이었고, 일본식 교육대신 미국식 교육을 교회조직을 통해서나마 받을 수 있다는 장점을 주었다.
어떤 한국인들은 교회의 교육이나 사회복지 프로그램을 위해 일함으로서 일본정권의 간섭으로부터 어느 정도의 자주권을 행사하는 특전도 누릴 수 있었다. 그러므로 교회와 일본식민지정권과의 격렬한 갈등관계는 불가피했고 동시에 한국 민족주의자들은 서구적 교육을 간절히 열망했다. 서양선교사들에 의해 세워진 많은 기독교계 사립학교들은 한국교육의 현대화를 위해 결정적 공헌을 했다. 1883년부터 1909년 사이에 한반도에는 (만주 간도에 문화회관을 포함) 29개의 사립교육기관이 세워졌다. 이러한 사립학교들은 서양선교사들에 의하여 설립되었거나, 아니면 그들로부터 직접 영향받은 한국 민족지도자들에 의해 세워졌다.
사회적 지위나 출신성분에 관계없이 누구에게나 기독교계 사립학교의 입학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양반의 자손들은 이런 사립학교에 별 매력을 느끼지 않았다. 함석헌이 양반의 자손이 아니었다는 것은 이런 면에서 행운이었다고나 할까. 1906년 그는 기독교계 사립학교에 입학한다.
비록 함석헌이 가난한 동네에서 성장했지만 그의 가족이나 친척들은 그래도 그 마을에서는 지적으로 계몽된 편이었고, 경제적 형편도 상대적으로 유복한 편이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그의 어린시절을 "잘 사는 편"이었다고 회상한 것도 놀랄 일은 아닌 것 같다. 청소년시절을 통해서 함석헌은 그의 숙부인 함일형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다. 함일형은 열렬한 기독교지성인이었고 왕성한 활동가였다. 마을에 어떤 문제가 생겼을 때나 농민들이 불만이 있을 때 많은 경우에 함일형은 그들을 위해서 대변인 역할을 했다. 그러므로 종종 그는 관가에 끌려가 매질을 당하기도 했다.
대부분의 그의 동시대인들과는 달리 함일형은 계몽되고 생각이 깊은 사람이었던 것 같다.
일찌기 그는 그의 장남 함석규를 서울에 있는 배제학당으로 보낸 바있는데, 이곳은 청년 이승만이 한때 공부하던 곳이기도 하다. 함석규는 함석헌의 동네에 첫 장로교 목사가 되는데 그 마을에 새 종교인 기독교교회를 세우고 증진시키는 역할을 한다. 함일형의 둘째 아들인 함석은은 일찌기 동경유학을 갔고 귀국해선 민족지도자로서 한국의 독립운동에 그의 전 정열을 바쳤다. 함석헌은 친척인 함일형, 함석규, 함석은과 같은 마을에 살면서 그들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는데 특별히 기독교의 교훈, 애국심, 독립운동, 국제정세등에 관해 배우게 된다. 기독교의 영향이 어린 함석헌에게 얼마나 크게 작용했나를 살펴보자면, 한번은 그가 일요일날 교회예배를 불가피하게 결석하고 그에 대한 두려움, 걱정, 죄책감, 불안이 여러 해를 두고 없어지지 않았다고 상기한다.
한편 1909년, "백만 영혼을 그리스도에게"라는 기치아래 복음주의적인 전도운동이 성공적으로 시작됨으로 많은 한국인을 기독교로 귀의시켰다. 다음해인 1910년에 이르러 한국인의 1%는 이미 개신교인이 되기 시작했는데 일본의 개신교회는 더욱 긴 역사에도 불구하고 이 숫자에 미치지 못한다. 이러므로 한국의 기독교인들 교회안에서의 일뿐 아니라 민족전체의 일에 대해서도 지도력을 발휘하게 된다. 일례로 1912년의 "105인 사건"을 통해서 124명의 한국민족지도자가 일본총독 데라우찌 마사타깨 (1852-1919)의 살해혐의로 체포되는데, 이중에 남강 이승훈 (1864-1930)을 포함한 98명이 개신교인 이었다는 것은 개신교의 사회-정치적 영향이 얼마나 컸나를 반증한다. 일본식민정권 또한 한국 개신교인을 식민정책을 저해하고 위협하는 가장 위험한 단체로 인식했다. 일본이 국제적인 여론과 비판을 의식했기 때문에 서양선교사들에게 함부로 할 수 없었고, 동시에 선교사들은 종종 한국인의 입장을 솔직히 국제사회에 대변해 주었고, 이런 상관관계를 통해 개신교는 한국민족주의운동의 선봉에 나설 수 있었다.
교회는 독립운동을 위해 노력하는 한국의 지식인들에게 자유정신을 심어주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한국의 종교적 지도자 뿐아니라 사회개혁가 교육가등을 배출했고 이들은 한국의 현대화를 위한 새로운 추진세력이 되었다. 20세기 초에 한국의 기독교는 단순히 종교적 믿음으로만 한국인들에게 받아들여진 것이 아니고, 사회-정치적 계몽운동, 훌륭한 문화의 본보기, 민족발전의 상징 등으로 받아들여졌다. 이 당시의 교회는 실제로 낙관주의의 상징이었고 상심에 젖은 한국인들에게 희망을 주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식자들은 한국인들이 기독교로 귀의하는 것에 비판적 태도를 취했는데, 그들의 시각엔 한국이 같은 동양권인 일본의 영향권에 속하는 것이 서양권의 영향에 드는 것보다 바람직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함일형은 반일 민족주의자로서 기독교를 독립정신과 자유의식을 고무하고 격려하는 원천으로 보았다.
물론 서구사상은 기독교를 통해 한반도에 급속히 확산되었다. 특별히 개신교는 사회정의의 의미와 함께 식민지 한국인들에게 서구의 민주주의가 어떤 것인지를 소개해 주었다. 한편 함일형은 그의 동네에 서양 스타일의 장로교 사립학교를 설립했다. 함석헌은 전통적인 유교식 학교인 서당에 들어가지 않고 대신에 함일형이 창설한 신식 기독교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대부분의 동시대인들과는 대조적으로 어린시절부터 새종교인 기독교와 민주주의사상의 영향을 받게 된다. 이것이 함석헌이 그 자신을 "타고난 민주주의자"라고 부르는 근본적 이유이다.
함일형이 그 조카 함석헌에게 불어넣던 애정은 또한 각별했다. 함일형은 함석헌의 아버지 함형택 대신 함석헌이 태어났을 때 '함석헌'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동시에 함석헌은 그 어린시절에 숙부 함일형의 살아있는 애국심과 열성적 기독교신앙에 깊은 영향을 받는다. 어린 함석헌은 함일형이 세운 기독교 초등학교를 다니면서 기독교와 애국심을 융합하는 법을 배우게 된다.
민족애와 기독교신앙이 넘쳐흐르는 함일형은 3.1 독립운동후에 일본경찰에 의해 수감된다. 함석헌은 이러한 숙부 함일형을 "내게 맨 처음으로 정신적 스승이 된 이" 라고 기억한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함일형을 통해서 기독교와 민족애를 조화롭게 융합할 수 있는 능력을 비로소 갖추게 되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리라.
한편 양반중심사회에서 소외된 많은 씨 들은 "모든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동등하다"고 평등을 부르짖는 새 종교인 개신교에 매력을 느끼게 된다. 양반계층은 그 당시 경제력은 물론 사회-정치력도 독점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개신교는 비양반계 지식층, 사회의 밑바닥 사람들 그리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인기가 있었다.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양반중심의 사회아래서 많은 어려움과 착취를 당했기 때문이다. 특별히 함석헌의 고향이 평안도였다는 것은 주목할만한데, 그곳은 상업활동이 활발한 지역으로 유교와 양반의 영향이 서울에 비해 아주 약했다.
평양에는 개신교인들이 집중돼있었고 반면에 양반의 숫자는 아주 적었다. 1938년에 이르러 한반도에서 약75%의 개신교인은 평양에 집중돼 있었고 그 숫자는 60만명 정도였다. 2차대전 종전직전인 1945년까지는 약80%의 개신교인은 평양에 집중해 있었다. 이로서 평양시는 아시아에서 최대다수의 개신교인이 거주하는 지역이 되게 된다.
일제하에서 평안도에 개신교인이 많았다는 것은 그곳에 독립운동활동이 활발했다는 것과도 부분적으로는 상관관계가 있다. 유교의 세력과 영향이 남한과 비교해서 약했다는 것도 개신교 교회가 평안도에 왕성하게 존재했다는 것과 관계가 있다. 유교의 영향권이 약했다는 것은 그들이 사회의 현상유지나 기득권 지키기에 별로 관심이 없었다는 것을 반증하는데, 이는 대부분의 평안도 사람들이 가진 것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말한다.
조선왕조를 통해서 이북지방은 이남의 서울이나 충청도의 양반계층으로부터 많은 차별 대우을 받아왔다. 1811년의 홍경래(1780-1812)의 난은 이남, 특히 서울의 양반층이 이북의 지식층을 어떻게 차별정책으로 대했나를 반영하는 일례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왜 어떻게 개신교가 이남보다 그의 고향인 이북평안도에 더 인기가 있었는지 회상한다.
"나는 이상하게도 첨부터 활발한 새 교육을 받으며 자랄 수가 있었습니다. 그 이유는 기독교 때문인데, 내가 났던 평안도에 기독교가 막 들어왔습니다. 본래 평안도는 한국의 '이방 갈릴리'여서 여러 백 년 두고 '상놈'이라 차별대우를 받아왔습니다. 이상하게도 버림을 받고 천대받아온 곳인데 그 중에서도 내가 났던 마을은 더 심했습니다. 그야말로 '스불론, 납달리' 같아서 '바닷가 감탕물 먹는 놈들'이라 해서 머리도 못 들고 살았습니다. 그런데 그 불행이 도리어 복이 됐습니다. 밑바닥이니 만큼 그 심한 정치적 혼란의 망국 시기에 있어서도 거기는 탐낼 것이 없는 곳이니 평화가 있었습니다. 가난하고 업신여김을 받았으니 만큼 새로워지는 데는 앞장을 섰습니다. 이 '죽음의 그늘진 땅에 앉은 사람들'속에 일찍부터 '큰 빛'이 들어왔습니다.”
분명히 개신교는 유교중심의 정치-사회질서체제로부터 탈피할 수 있는 사상적 대체물이 될 수 있었다. 게다가 개신교가 급속하게 확산됨과 더불어 사회개혁성향이 강한 진보적 민족주의자들을 교회의 영향권 안으로 흡수하게 된다.
이 시기의 개신교 특히 장로교의 성향은 엄격하고 청교도적이었는데 함석헌은 이러한 장로교의 교육 스타일을 그 당시에 꼭 필요했던 것으로 본다: "그 교회는 장로파였으므로 거의 청교도적인 엄격한 신조의 교육을 받았습니다. 나는 그것을 지금도 고맙게 생각합니다. 사실 그 썩어진 망국 시기에 있어서 그러한 기독교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아니었더라면 사회적 양심은 완전히 파멸되고 말았을 것입니다." 함석헌은 이 시기에 단순한 기독청년 이었다.
더욱이 서양선교사들은 각분야에 걸쳐 현대과학과 의학기술 등을 가져옴으로서 한국의 고립정책으로 생긴 여러 분야의 과학기술적 공백을 채워주었다. 새로운 과학과 기술에 관한 지식은 한국이 장차 독립을 쟁취하고 현대화 과정를 밟기에 절실하게 필요한 것들이었다. 선교사들 또한 한국인의 민족주의운동에 대해서 동정적이었다. 선교사들이 기독교 교육분야에 많이 관여했기에, 젊고 지성적인 한국의 미래 민족지도자들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는데 그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도산 안창호 (1878-1938), 뛰어난 웅변가. 이동휘 (1873-1935), 1920년에 한국의 최초의 공산당인 고려공산당을 창설. 남강 이승훈 (1864-1930), 함석헌의 스승이며 오산학교를 설립함.
이 시기에 비록 선교사들은 한국교회의 '정치적 중립성'을 선포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식민지정권은 한국교회를 반일운동의 주요 본거지로 여겼다.
일제식민정권과 한국 개신교인이 갈등의 와중에 있을 무렵인 1916년, 함석헌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관립 평양고보에 입학했다. 평양고보는 일제에 의해 세워진 관립학교이며 일류학교로 명성이 높았다. 청소년 함석헌은 비록 신동은 아니었지만 충실하게 노력하는 지성적인 젊은이었던 것 같다.
평양고보 졸업자들은 자신들이 일본식민지정권에 대해 고분고분하기만 하면, 일본인 밑에서 초급관료 노릇을 하며 그래도 일제하에서는 상대적으로 평탄한 삶과 대우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대부분의 식민지 한국인들과 비교해서 평양고보 졸업자들이 상대적으로 장래를 '편안하게' 보장받을 수 있었기에, 그들은 일제하에서도 되도록이면 사회-정치적 현상유지 상태를 선호하는 편이었다. 그들에겐 일제하에서 식민정권을 위한 관료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더 현실적이고 실질적인 꿈이었던 것 같다. 청년 함석헌도 한때는 이 부류의 젊은층들과 별다른바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이 평양고보를 입학했을 때 그의 꿈은 아버지 뒤를 이어 의사가 되는 것이었고, 의사라는 직업은 그래도 일제하에서는 어느 정도 편안한 삶을 보장받을 수 있는 길이었다. 함석헌의 아버지 또한 그 아들이 의사가 되기를 바랬고 그것은 식민지 상황아래서도 자주권을 좀 행사할 수 있는 괜찮은 직업이었다. 평양고보를 다니면서 함석헌은 그의 순수함과 깨끗했던 신앙심이 서서히 쇠퇴해 가는 것을 느낀 것 같다. 평양고보의 교육과 그 환경을 통해서 함석헌은 그의 어릴 적 경건함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고 고백한다.
함석헌이 평양고보에서 한창 '빛나는 장래를 위해' 학문에 전념하고 있을 때 그는 부모의 중매로 황득순(1902-1978)이란 여성과 결혼을 하게 된다. 1917년 당시 한반도의 거의 모든 신랑들처럼 함석헌은 결혼 전에 그의 신부될 사람의 성격이나 외모등에 관해 거의 모르는 상태에서 결혼식을 치룬다. 그리고 1917년 당시의 대부분의 신부들처럼 함석헌의 아내는 문맹자였다. 물론 그 시절의 결혼은 당사자들의 의사보다는 그 양가부모의 주선으로 결혼이 성사됐다. 함석헌은 그가 열심히 학업에 전념하고 있을 10대의 나이에 결혼하고 싶은 마음은 별로 없었던 듯하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의 표현처럼 "순종 온순파"의 청소년으로 부모의 간절한 염원에 불복종하고 싶지도 않았다. "행복한 신혼의 단꿈"에서 함석헌은 아마도 평탄대로의 편안한 미래를 꿈꾸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3.1 운동과 함께 거친 인생의 여정이 그 앞에 다가오고 있었다.
2.2. 삼일운동에 기독청년으로(1919-1921)
1919년의 3.1 운동은 젊은 함석헌의 삶에 가장 중요한 결정적 전환점이었다. 함석헌 그 자신이 회상했듯이 만약에 3.1 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그는 그저 "의사가 됐던지 그렇지 않으면 다른 무슨 공부를 하여 일본 사람 밑에 있어 그 심부름을 하는 한편" 그보다 못한 "동포를 짜먹는 구차한 지식노예가 되고 말았을 것"이다.
함석헌은 18살의 젊은 나이로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했다. 함일형의 둘째아들이며 함석헌의 사촌형이던 함석은은 순탄할 수도 있었던 함석헌의 삶을 격동의 삶으로 바꾸어 놓는다. 함석은은 열성적 개신교인 학교 선생으로 평양지역 3.1 운동 준비조직위원회의 총책임자였다. 이 당시에 오직 개신교만이 전국적으로 활성적인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다. 1910년 일제의 한반도 강점이래 모든 정치-사회 조직은 강제해체 되거나 일본의 손아귀아래 들어갔다. 한국인의 상업분야는 걸음마 단계를 넘지 못했고 그러므로 전국적으로 조직된 노동계층도 전무했다. 유일하게 전국적 조직망을 갖추고 있는 기관은 종교적 성격뿐이었다. 실제적으로 개신교회의 전조직망과 시설은 성공적 3.1운동을 위해 총동원되었다.
함석은은 평안도 지역 3.1 운동 준비위원회 위원장으로 그 사촌동생인 함석헌에게 운동의 기초작업을 위해 도움을 구한다. 함석은은 일찌기 함석헌에게 국제정세와 당시 미국대통령 우드로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에 대해서도 가르쳐 준 바있었다. 언제인지는 분명치 않으나 1919년 3.1 운동 후 함석은은 일본경찰의 수사를 피해 만주로 망명을 가서 그곳에서 독립운동단체인 대한청년단을 조직하고, 한국의 독립운동을 활성화시킬 목적으로 민족주의적인 잡지를 발간했다. 1920년 5월 그는 일본군에 총탄에 맞아 부상을 당한다. 그후 만주에서 그는 일본군에 의해 체포되고 서울 서대문형무소에 3년간 수감되었다. 그의 독립운동가로서의 모범적인 훌륭한 본보기로서 함석은은 1963년 사후에 건국훈장 국민장을 수여 받았다. 함석은이 언제 어떻게 운명했는지에 대해선 자료로서 알 길이 없으나 아마도 6.25 동란 중 사망한 것으로 짐작된다.
함석은의 지도아래서 함석헌은 직접적으로 3.1운동의 준비과정에 관여하게 된다. 평양지역의 3.1운동을 준비하면서 함석헌은 자신이 직접 만든 목판으로 태극기를 만들어 찍어내고 또한 독립선언서의 사본을 만들어 다른 많은 동포들에게 나누어 준다. 3.1.운동날 당시 함석헌은 다른 기독청년들과 함께 열렬히 만세운동에 참가한다. 이른 새벽부터 밤늦게 까지 함석헌은 자신이 직접 만든 태극기를 흔들며 평양시내를 행진했다. 감격에 부풀어오른 청년 함석헌은 일본경찰과 맨몸으로 충돌하면서도 온힘을 다해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그는 심지어 평양경찰서 앞에서 자신이 손수 만든 태극기와 독립선언서 사본을 길을 메운 동포들에게 나누어주기도 했다. 훗날 함석헌은 3.1운동당시의 자신을 회상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독립선언서를 전날 밤중에 숭실학교 지하실에 가서 받아들던 때의 감격! 그날 평양경찰서 앞에 그것을 뿌리던 생각, 그리고 돌아 와서는 시가행진에 참가했는데, 내 60이 되어오는 평생에 그날처럼 맘껏 뛰고 맘껏 부르짖고 상쾌한 때는 없었다. 목이 다 타마르도록 "대한 독립 만세"를 부르고 팔목을 비트는 일본 순사를 뿌리치고 총에 칼 꽂아가지고 행진해 오는 일본 군인과 마주 행진을 해 대들었다가 발길로 채여 태연히 짓밟히고 일어서고, 평소에 처녀 같던 나에게서 어디서 그 용기가 나왔는지 나도 모른다."
1919년 당시의 한반도의 학생 수는 133,557 명이었고 그중 약 10%인 11,333 명이 3.1운동에 직접 참가했는데 청년 함석헌도 그 중의 하나였다. 3.1 운동이 끝난 직후 일제는 강압적으로 한반도의 모든 학교를 몇 주 동안 폐교조치 했다. 715개의 주택, 47개의 교회 그리고 2개의 기독교계학교들은 일본헌병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다. 일제는 한국 개신교인을 분명한 3.1운동의 "주동자"로 간주했다. 일제하에서의 한국개신교인의 사회참여는 3.1운동으로 그 절정을 이루었다 할 수 있다.
일본경찰의 통계에 따르면 3.1운동참가로 검거된 한국인들의 종교적 구성을 보면 3,373명이 기독교인 2,283명이 천도교인 346명은 유교인 229명은 불교인이었다. 33인의 민족지도자중 남강 이승훈을 포함 16명은 기독교인, 의암 손병희를 포함 15명은 천도교인, 그리고 만해 한용운을 포함 2명은 불교인이었다. 일본경찰에 의해 구금된 한국인들 중에서 21.89%가 개신교인으로 (장로교인 15.91%, 감리교인 4.83%) 다른 종교인들과 비교해 가장 높은 비율을 차지한다.
3.1운동이 가장 격렬하게 대규모로 일어났던 곳은 평양이었다. 평안도가 서울로부터 차별받던 지역으로 반일감정이 강했고 개신교를 중심으로 한 새 교육의 중심지였던 것을 고려한다면 그리 놀랄 일도 아닐 것이다. 평양의 새로운 지식층들은 일반적으로 서울의 지식층보다는 더 진보적이었고 혁신적이었다. 결과적으로 평양의 씨 들이 3.1 운동을 통해서 가장 극심한 박해를 받았다. 평양지역의 개신교 목회자 5명중 4명은 체포 후 기소되었고 나머지 1명도 연금된 후 모진 고문을 받은 후에야 석방되었다. 일제는 3.1 운동이 근본적으로 기독교인에 의해 주도 확산되었다고 간주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산발적 반란성격의 3.1 운동을 비폭력 저항운동으로 이끌어 간 것도 기독교인이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에 대한 일제의 적개심은 가혹했다.
많은 경우에 교회는 일본헌병의 손에 의해 불태워졌고, 특별히 수원의 제암리교회에선 여자, 어린이 그리고 노약자를 포함한 교인들을 교회 안에 가두고 불살라 학살했다. 서양선교사들이 처음으로 이러한 일본의 잔악성을 그들의 모국 선교기관에 알렸고 서양의 선교기관들은 그들의 정부에 일제의 잔인성을 비판해줄 것을 탄원했다. 그러므로 대부분 아시아 다른 나라의 개신교와는 달리 한국교회는 초창기부터 서구제국주의의 앞잡이로 한반도에 들어오기보다는 한국민족주의 운동형성에 중추적 역할을 해왔다.
앞에서 지적했듯이 19세기 후반에 개신교가 처음 한반도에 소개되었을 때 개신교의 신앙은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증진시키는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개신교에 대한 핍박이 가혹해짐에 따라 한국교회에 문제점이 발생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3.1운동의 대외적 실패와 관련이 있다. 전국적으로 벌어진 3.1 운동 뒤에 일제는 소위 "문화정치"로 서서히 식민지 한국인들의 목을 조르기 시작한다. 이에 상응하여 어떤 부류의 한국기독교인 민족지도자들은 일제의 통치전략에 적극적 타협과 협조를 통해서 친일파로 둔갑하기도 한다.
3.1 운동 뒤 개신교는 진보적 인물을 중심으로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파와 보수적 인사를 중심으로 순전히 종교적인 일에만 집중하자는 파로 양극화되었다. 1920년대에 들어선 보수적인 개신교파들이 한국교회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비기독교계 민족지도자들도 좌우익 두 파로 양극화되었다. 많은 보수적인 기독교 지도자들은 일제의 팽창주의 정책을 옹호하기도 했는데, 그들은 그래야만 한국교회가 일제의 핍박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정당화했다. 그때부터 진보적 독립운동가들은 해외로 망명을 가거나 지하로 잠적해서 교육운동에 힘쓴다.
한편 3.1 운동의 직접적인 체험을 통해서 청년 함석헌은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참여의식에 눈을 뜨게 되었다. 동시에 그는 명문이라는 관립 평양고보의 교육가치에 큰 회의감을 갖게된다. 일제가 식민지 초기부터 관립학교의 식민사관교육을 통해 한국인의 민족주의를 말살하고 그들의 위치를 강화하려고 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함석헌이 관립학교의 교육가치에 회의를 느끼게 된 것이 그리 놀랄 일은 아니리라.
더구나 3.1운동 후에 평양고보를 포함한 관립학교로 복학하고자하는 학생은 일본인선생에게 사죄를 하기로 돼있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가 참여한 3.1운동에 대해서 사죄하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었다. 위에서 지적했듯이 관립 평양고보는 식민지초기에 한인들을 일본식민정권의 하수인으로 만들려는 의도 하에 일제에 의해 설립됐고, 이학교의 졸업자들은 자신들이 식민정권에 복종하고 타협하는 한 비교적 편안한 장래를 보장받을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평양고보로 복학할 것을 거부하고 결국 그의 고향 사자섬으로 돌아왔다. 3.1운동을 통한 직접적인 역사현장에서의 산 경험이 그의 나머지 생애와 사상을 형성하고 강화하는데 결정적 전환점이 되기 시작했다. 실로 3.1운동을 통해서 함석헌은 처음으로 자신의 삶에 대해서 깊은 자아의식을 갖게 되었다. 40년이 지난 후에도 함석헌은 3.1운동이 그의 삶의 행로에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쳤다고 술회한다:
"나는 삼일운동 없으면 오늘은 없다. 그것은 내 일생에 큰 돌아서는 점이 됐다. 만일 삼일운동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나는 입학할 때의 생각 그대로 관립평양고등보통학교를 졸업했을 것이요. 그랬다면 의학을 했을 것이요, 의사가 됐다면 나도 지금쯤은 큼직한 병원이나 경영했을는지 모르고 잘하면 나도 누구들처럼 국회의원에 출마도 했을는지 모르고 누구보다 못지 않은 자유당 중요 간부쯤도 됐을는지도 모른다."
실제로 많은 관립학교출신들이 일제하에서 일본식민정권의 꼭두각시 노릇 한 것을 되새겨 본다면 함석헌의 술회가 결코 과장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함석헌이 3.1운동을 통해서 한반도가 일제의 발아래서 식민지로 신음하고 있다는 깊은 자각과 강한 애국심을 느꼈다는 점이다.
일제의 기상이 동아시아에서 하늘로 치솟고 있는 상황에서 반일청년 함석헌은 앞길은 불확실하고 어두울 수밖에 없었다. 무작정 고향으로 돌아온 함석헌은 그의 장래를 향해 뚜렷한 계획이나 생각을 가질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우울과 실망 그리고 엄습하는 불안 속에서 세월을 흘려 보냈다. 이런 함석헌의 불안의 세월은 1921년까지 2년간 지속되었다. 이 당시 다른 많은 한국인들도 3.1운동의 외형적인 실패로 인해 실의가운데 빠져있었다. 우울과 내적방황 가운데에서도 함석헌은 부지런히 교회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경직되고 공허한 교회예배는 고뇌에 찬 함석헌에게 내적평화나 위로를 전혀 줄 수 없었다.
1919년 이후에 점점 더 많은 기독교인들과 선교사들은 정치적 불간섭주의 노선을 택했다. 그들은 가급적 일제의 정책에 대항하기보다는 순응하고 협조하기를 원했다. 그러므로 한국교회는 탈정치화의 방향으로 흐르기 시작했다. 결국 좌익계의 민족지도자들은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을 서구제국주의와 자본주의의 꼭두각시라고 비판했다. 좌익의 시각에선 기독교인 민족주의자들이 일제의 통치에 대해 너무 굴종적이고 온건적이므로서 한국인의 일본통치에 대한 독립정신을 방해하는 것으로 보았다. 이것은 또한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과학적 세계관이 결핍된 것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일본식민지정권의 분열정책은 결론적으로 성공적이었다. 일제는 한편으로는 우익계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지지하는 듯하면서 좌익계나 좌경화조짐은 단호없이 처단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민족진영의 좌우익분열은 불가피했다.
함석헌은 그의 어린 시절부터 1919년 3.1운동 전까지의 자신을 그저 "장로교회 안에서의 단순한 기독교인"으로 표현했다. 그러나 3.1운동 후에 한국교회의 일제에 대한 애매모호한 태도변화를 경험하면서 그는 그가 속한 한국장로교회를 향해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의 교회에 대한 내적 의구심이 더해갈수록 그의 내적 고민도 깊어가고 악화되어갔다.
3.1운동후 한국교회에 대해 실망과 의구심을 심하게 느낀 한국인은 함석헌만이 아니었다. 그들 중 눈여겨볼만한 몇몇 민족지도자들은 무력한 한국기독교에 대한 대안으로 좀더 강한 사회주의나 심지어 공산주의 노선을 택했다. 1920년에 한국최초의 좌익정당이던 고려공산당을 창당한 이동휘 (1873-1935)나 나중에 좌익계 근로인민당을 설립한 여운형(1885-1947)은 둘 다 한때 열렬한 기독교인으로 평양신학교에서 공부했었고 전도사일까지 했었다. 그러나 1919년 후 이들은 둘 다 보수적인 한국교회에 대해 강한 혐오감을 느끼게 되었다. 한국교회측에선 좌익계 지식층의 비판을 포용하기보다는 강한 반공 반사회주의 노선을 통해 철저히 이들을 배척했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기독교와 한국의 장래를 걱정하는 가운데 복잡한 내적 갈등을 느낀다: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한데 든 것은 첨에는 좋은 듯했으나 나중에 그 폐단이 차차 나타났습니다. 독립의 희망이 있을 때 그것은 놀라운 형세로 올라갔지만 일본의 통치가 아주 어쩔 수 없는 것으로 굳어지면서 겉으로 보기에 어느 정도 부드러운 문화정책을 쓰게 되자 지난날의 지사라던 사람들이 많이 변절 타협을 하게 됐습니다. 그러는 반면 종교는 점점 현실에서 멀어져 오는 세상주의로 굳어지기 시작했습니다. 다른 젊은이도 많이 그랬지만 나는 그것이 싫어서 교회에 차차 가기가 싫었고 점점 비판적이 되어갔습니다."
함석헌은 가속되는 한국교회의 사회적 책임감과 정치적 문제감각의 결핍에 대해 염려하기 시작했다. 1921년 함석헌이 한참 내적고민으로 인해 괴로움을 겪고있을 무렵 그는 그의 사촌형인 함석규목사를 만나기 위해 서울로 내려왔다. 함석규목사는 어린 사촌동생 함석헌에게 여러가지 도움말을 주며 오산학교에 가서 한번 공부해보라고 권했다. 관립평양고보와 비교에서 물질적인 면에서는 형편없이 뒤져있던 사립오산학교는 그 당시 한국민족주의 운동의 지성소로 알려져 있었다.
만약 인간이란 존재가 환경의 산물이라면 분명히 함석헌의 주변환경은 그의 사고와 후에 그의 생애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크게 보면 함석헌은 그가 자라 나온 시대환경 즉 기독교와 민주주의라는 역사적 흐름의 산물이다.
옳고자하는 결단력이 없이는 한 인생은 그 온화함의 덕목을 갖출 수 없다고 믿는다. 함석헌은 그의 어린시절의 본성이 온순한 (gentle) 아이였었다고 고백한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온순함 속에서도 그는 그의 뜨거운 저항정신을 연마해 나갔다. 끓어오르는 용기와 저항정신이 없이 어떻게 한 인생이 유연함과 옳고자하는 자세를 꿋꿋이 유지할 수 있을까? 1921년 봄 그의 따뜻한 마음과 뜨거운 용기를 한 몸에 담고 함석헌은 그가 자라온 시골 동네를 떠나기로 결심했다. 그의 발길은 이제 한국민족주의 운동의 메카로 알려진 오산학교로 향했다.
2.3. 오산학교에서(1921-1923)
1921년 한국교회의 경직화및 교조화에 2년여에 걸쳐 회의감을 느껴오던 함석헌은 마침내 평안북도 정주에 있는 기독교계 사립 오산학교에 입학했다. 그 당시 오산학교는 재정적으로나 물질적으로는 아주 열악해서 그저 아사상태를 간신히 모면할 정도에 불과했다. 몇 백명의 학생들을 위해 오산학교에는 의자나 책상하나 없었고 학생들은 다 무너져가는 초가집 천장 밑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평양고보와 비교해서 오산학교는 실로 빈곤에 허덕였고 학교의 규모도 아주 보잘것 없었다. 더우기 평양과는 달리 오산(五山) 이라는 표현처럼, 오산학교는 다섯 개의 산으로 둘러싸인 시골벽촌에 자리잡고 있었기 대문에 물질적 생활조건도 아주 형편없는 지경이었다. 함석헌이 오산에 도착하자마자 또 목격하게된 것 중의 하나는, 오산학교의 학생과 선생들이 독립운동에 깊이 관여한 관계로 학교건물의 대부분이 일경에 의해서 방화되고 파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이런 악조건 속에서도 불구하고 오산학교의 진취적 분위기는 미래를 위해 청년 함석헌이 그의 이상과 꿈을 가꾸어 나가는데 큰영향을 미쳤다. 함석헌은 오산학교의 교육이념을 이렇게 요약한다: "오산학교는 그때 민족운동, 문화운동, 신앙운동의 산 불도가니였습니다. 그때 그 교육은 민족주의, 인도주의, 기독교 신앙이 한데 녹아든 정신교육이었습니다."
오산학교는 기독교 민족주의자이자 기업가인 남강 이승훈에 의해서 창설된 이래로 항상 사회개혁과 독립운동활동에 주도해 왔다. 그러므로 3.1운동 당시 오산학교의 많은 학생들과 선생들은 일제에 의해 체포나 구금되었고 학교건물은 일경에 의해 불태워졌다. 그러나 이런 외적인 빈곤함과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오산학교의 학생과 선생들은 절망하지 않았고 오히려 진취적 기상과 낙관주의를 잃지 않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평양고보의 경우와 정반대였는데 평고는 그 물량적인 면에서는 오산보다 풍족했으나, 학생과 선생들의 사기는 높지 않았고 엄격한 규율로 그 질서가 유지되었다. 비로소 오산에서 함석헌의 의사가 되고자하는 꿈은 서서히 사라져 갔고 그생애에 처음으로 청년 함석헌은 "조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라는 질문을 그 스스로에게 던지게 되었다. 함석헌은 조국이 일제의 손아귀 아래서 바람앞의 등불과 같이 휘청 거리는 것에 염려를 품기 시작했다.
함석헌이 오산학교에 도착했을 당시 학교의 교장은 저명한 기독교인 민족지도자이던 고당 조만식(1882-c.1950)이 맡고 있었다. 함석헌은 오산에서 그의 초기 청년기의 두해를 보내게 되는데 이 곳에서 그는 개혁된 기독교 정신과 다이나믹한 애국심을 섭취하게 된다.
3.1운동 이래로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인이 과학적 세계관의 인식이 부족하다고 강하게 느끼고 있었다. 그러므로 오산에 있는 동안 청년 함석헌은 과학적이고 보편적 사고와 친숙하도록 노력을 하는데, 그러면서 그는 많은 서구 사상가의 글을 읽게 되는데 그것은 주로 웰즈(H.G.Wells: 1866-1946)의 {세계사}(The History of the World, 1920), 카알라일(Thomas Carlyle: 1795-1881)의 {의상 철학}(Sartor Resartus), 폭스(George Fox: 1624-1691)의 {일지}(Journal) 그리고 쉘리 (Percy B. Shelley: 1792-1822)의 {시 모음}(Collected Poems)등 이었다.
웰즈의 {세계사}가 함석헌에 남긴 영향은 현저하다. 웰즈는 과학에 대해 낭만적 개념을 갖고 있었고 그것은 웰즈의 역사관에 영감(靈感)을 제공해 주는 원천이었다. 웰즈는 국제연맹의 이념을 확고하게 믿었고 세계평화를 위해 열성적으로 일했다. 웰즈의 저서는 감수성이 민감한 청년 함석헌에게 평화주의의 필요성, 세계주의에 입각한 역사관및 종교관형성에 근본적 영향을 심어 주었다. 또한 웰즈의 {세계사}에 대한 감동 때문에 함석헌은 역사, 진화론, 과학주의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러한 웰즈로 부터의 강한 영향 때문에 훗날 함석헌은 역사라는 학문을 좀더 진지하게 공부하게 되었고 자신이 '역사가'가 되기로 결심한다.
카알라일은 그의 {의상철학}을 통해 사물의 본질적인 것과 외양적인 것과의 차이를 대조적으로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다. 카알라일은 사회제반기관, 종교조직 혹은 행정제도등을 인간이 입고있는 옷처럼 여겼다. 이러한 옷은 영(靈)적인 힘의 상징의 표현으로서 도움이 될 수 있을지 모르지만 본질적인 것이 아니기 때문에, 쉴새없이 인간이 새옷으로 바꿔 입어야 하듯이 계속해서 새롭게 변해야 한다고 카알라일은 주장했다. 교회 또한 비록 초기에는 인류의 영원한 신앙심의 열망을 보여 주었지만, 카알라일의 이해로는 이제는 그 용도가 끝나서 버려야할 때가 왔다. 그러나 교회제도 저변에 흐르는 그 신성한 정신은 활발히 인식 되어야 하고 어떤 상황 가운데에서도 보존되어야 한다. 카알라일에게 있어서 현상이나 외양 뒤에 가리워진 본질적인 것을 찾아내는 일은 삶의 딜레마에 대한 근본적인 대답의 추구이었다. 함석헌은 카알라일의 글을 통해서 진리와 제도에 관한 관계에 대해 가장 중요한 단서를 배웠던 것 같다. 그것은 아마도 인간은 제정된 제도의 간섭없이도 인식적으로 현상계의 바닥에 있는 실체를 발견할 수 있다는 것이었으리라.
폭스의 {일지}(The Journal of George Fox)가 처음 출판된 것은 1694년으로 이책은 퀘이커(Quaker)신앙의 가장 중요한 철학적인 면이 무엇인지를 보여준다. 폭스는 초창기 퀘이커운동의 지도자였고 그의 사상은 종교 친우회(The Religious Society of Friends) 설립에 근본적 영향을 가져 왔다. 그의 {일지}를 통해 폭스는 모든 사람은 개별적으로 목회자의 중재없이 하느님과 직접 교통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단언했다. 모든 인간 안에는 여러용어로 표현될 수 있는 속생명, 속의 빛, 내적 그리스도, 하느님의 씨앗, 만인에게 내재해 있는 하느님의 신성 등이 있고 이것은 직접 하느님의 영(靈) 혹은 영감(靈感)과 교통할 수 있다. 이 속의 빛의 신앙은 {신약성경} [요한복음] 에 그 뿌리를 두고 있는 것으로 그 구절을 예로 들면 다음과 같다: "생명이 그리스도 안에 있었고 그리고 그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었다." "세상에 와서 모든 사람을 비추는 참빛이 있었다." "나는 세상의 빛이다. 나를 따르는 사람은 어두움에 다니지 않고 생명의 빛을 받을 것이다."
폭스는 그의 글을 통해서 인간은 각자가 지니고 있는 속의 빛을 깨달아야 되고 또 그것을 키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속의 빛을 통해서 비로소 인간은 영적인 생활을 증진시킬 수 있다고 믿었다. 모든 인간이 속의 빛을 가지고 있으므로 폭스는 개인 각자가 침묵예배를 통해서 하느님의 일하심과 신성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각 개인에게 있는 속의 빛이 신앙의 근원이고 하느님과 연결될 수 있는 통로이다. 속의 빛으로 방향 전환을 함으로서 모든 사람은 스스로가 절대진리를 자립적으로 인식할 수 있고 그러므로 선악 또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다. 폭스는 또한 그의 시대의 기성 제도교회(영국 성공회)를 비판하면서 참종교는 교회의 법규나 교리적으로 신성시화된 종교적 의식과는 별상관이 없다고 했다. 그러므로 폭스는 목사나 신부같은 제사장이나 사제 혹은 교리에 입각한 외면적인 성례전이 없이도 각 인간들이 하느님과 직접적으로 교통할 수 있다고 단호하게 주장했다.
한편 폭스의 {일지}를 통해서 청년 함석헌이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에 대해선 기록된 자료가 없다. 단지 훗날 함석헌의 종교적 편력이 개혁적 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한다면, 아마 폭스가 주장한 속의 빛의 개념이 청년 함석헌의 마음에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고 생각되며, 동시에 함석헌이 기성교회의 권위에 대해 질문을 던질 수 있도록 격려했을 가능성이 크다고 짐작된다.
쉘리 (Percy B. Shelley) 역시 그의 삶이나 생각에 있어서 전적으로 과격한 비국교도였다. 영국의 명문 이튼 사립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를 다니던 쉘리는 그곳의 엄격하고 '비인간적인' 교육제도에 큰 회의와 반발을 느끼게 되었다. 전제적이고 '횡포적인' 이튼과 옥스포드의 교육 경험을 통해서 쉘리는 그의 전 삶을 불의와 억압에 대항해서 투쟁하기로 결단했다.
그후 옥스포드에서 추방된 쉘리는 아일랜드의 더블린에서 억눌리고 가난에 허덕이는 씨 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서 일했다. 그의 저서 {맵 여왕}(Queen Mab)을 통해 쉘리는 제도화된 종교를 비판했고 법전화된 도덕을 사회악의 뿌리로 보았다. 쉘리는 그 시대의 고정관념을 깨도록 힘썼으며 그의 시 또한 지속적으로 진리를 추구해가는 과정을 묘사했다. 그의 다양한 시들은 또한 생기발랄한 그의 직관과 신앙이 현학적 혹은 정주(定柱)성의 종교교리적으로 화석화되는 것을 거부하는 단호한 그의 결의를 보여준다. 쉘리의 시는 또한 비범하고 폭넓은 그의 표현의 양식을 보여주는데 그것은 그의 차분한 정열, 경건함, 영웅적 존엄성, 표현할 수 없는 세계에 대한 갈망 그리고 계시적이고 예언적인 결론등이다.
쉘리의 활기에 넘친 시는 일제 식민지 정권 아래에서도 청년 함석헌에게 그의 조국에 장래에 대한 희망과 낙관적 마음을 심어 주었다. 특별히 함석헌은 쉘리의 시 {서풍에 부치는 노래}(Ode to the West Wind)중 마지막 줄에 강렬히 매혹되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예언의 나팔소리! 오호 서풍이여, 겨울이 만일 온다면, 봄이 또한 멀지 않았으리요?" 훗날 함석헌은 쉘리의 영향으로 {서풍의 노래}라는 제목의 책을 출판하기도 했고 {겨울이 만일 온다면}이란 제목으로 쉘리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수필을 발표하기도 했다.
오산학교에서의 왕성한 독서 이외에도 함석헌은 그의 다가오는 장래에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미치는 두 스승을 만나는데 그들은 남강 이승훈(1864-1930)과 다석 유영모(1890-1981)였다. 남강은 함석헌에게 한국 독립의 중요성을 가르쳤고 다석은 노장공맹(老莊孔孟)을 비롯한 다양한 동양의 고전 철학을 가르쳐 주었는데 그것은 젊은 함석헌의 인식변화와 세계관확립에 두드러진 영향을 남겼다.
남강은 어려서 고아로 자랐다. 그리고 11살 때부터는 공장에서 여러가지의 잡일을 배웠다. 그의 부지런한 열성과 끈질긴 인내심을 바탕으로 한 자수성가를 통해 남강은 스스로를 말단 공장 노동자의 신분으로부터, 일제하에서는 상대적으로 규모가 큰, 무역회사를 운영하는 뛰어난 사업가의 신분으로 끌어올리게 되었다. 러일전쟁 후 남강은 유교(儒敎)를 공부하기 위해 전통 서당에 다니게 되지만 지적으로 만족을 느끼지 못했다. 1907년 남강은 우연히 젊은 도산 안창호의 설교를 듣게 되었는데 도산을 통해 남강은 기독교와 신교육, 애국심 앙양, 게으름 및 나태함 탈피 등의 중요성에 관한 깨달음을 얻게 되었다. 남강은 도산의 설교에 큰 감동을 받았고 이 일은 남강이 사업가에서 교육가로 변신하는데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미국 선교학자 알란(Allan D.Clark)이 지적했듯이 남강은 처음에 사회개혁에 관심을 갖게 되었고 그 다음에 기독교로 전향했다. 국운이 풍전등화(風前燈火)와 같다는 상황을 깨달은 남강은 교육이 한민족이 생존을 위한 급선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1908년 남강은 그의 민족애와 기독교적 이상을 실현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기독교학교인 오산고등학교를 창설했다. 그리고 그의 사업이익금으로 오산학교의 재정과 운영을 충당해 나갔다. 그후 그의 생애의 마지막 날까지 남강은 그의 전 재산과 정열을 오산학교와 한민족의 독립을 위해 헌신했다.
그 결과 1911년 일제에 의해 조작된 소위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남강은 4년 2개월의 감옥살이를 치루게 되었다. 감옥 안에서 남강은 수없이 성경을 읽게 되었고 기독교에 깊이 심취하게 되었다. 1915년 석방되자 그는 곧 장로교 목사로 안수를 받았다. 1919년 3.1운동당시에 남강은 한국개신교 대표로 활약하기도 했고 그 일로 인해 재차 감옥에 수감되어 일본헌병의 손에 의해 수많은 고문과 고난을 겪었다. 남강은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 그의 제자 함석헌에게 영감을 제공해 주었다. 함석헌은 남강에 대한 그의 끓어오르는 존경심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남강은 과연 조선에서 등촉이었다. 나는 이때껏 저만큼 광휘있게, 저만큼 뜨겁게, 저만큼 기운차게, 저만큼 참되게 산 이를 보지 못하였다."
또다른 함석헌의 스승은 다석 유영모였다. 다석은 성경과 동양철학에 해박한 지식이 있었고 1921년 9월에 그는 오산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다석은 함석헌에게 노장사상, 불교, 주역 및 여러 동양고전철학을 가르쳤다. 더불어 다석은 성경을 그의 독특한 동양적 시각으로 재해석했고 후에 함석헌의 동양적 성경해석은 이때 다석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 다석의 강의를 들으며 청년 함석헌은 자신의 인생의 목적이나 의미를 찾고자 깊이 생각하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다석이 비로소 자신을 "생각하는 사람"으로 만들었다고 회상하기도 했다.
남강으로부터 배운 애국정신이나 다석으로부터 배운 동양철학은 함석헌이 자신의 생각을 내적으로 숙성 발전시키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이때로부터 함석헌은 종종 "진리가 무엇일까?"라고 수없이 자문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많은 한국인들이 맹목적으로 질문없이 기성교회의 교리를 받아들이는 것에 만족할 수가 없었다. 대신에 함석헌은 자신에게 더 적합한 어떤 진리를 탐구하고자 힘썼다. 그러나 그가 찾고자하는 '진리'를 함석헌은 그가 속해있던 장로교회 속에서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는 중에도 그는 독서를 통해서 더많은 지식을 쌓고자 노력했고 그 지식을 스스로의 힘으로 소화시키고자 노력했다. 오산학교에서 학업에 열중하는 한편 함석헌은 더많은 시간을 "인생이란 무엇일까?"하고 자문자답하며 생각하는 일에 보냈다. 그 결과 오산학교에 머무르는 동안 함석헌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사항을 그 삶의 기본적 가치 및 생활신조로 요약하기에 이르는데 그것은 아래와 같다:
"생각을 많이 한 후 나는 내 인생에 이 세 가지는 결코 버릴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첫째는 나는 한국인으로서 내 민족의 전통을 포기할 수 없습니다. 둘째 나는 하느님을 믿으며 신앙없이는 살 수 없습니다. 세째 과학을 공부한 이래 특히 웰즈의 {세계사개론}을 주의깊게 읽은 후 나는 그의 세계주의 사고와 인류를 위한 과학의 역할에 크게 영향을 받았습니다."
한편 이 무렵 3.1 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했었던 한국 지성인들 중에서 새로운 사회사상과 정치사상에 관심을 가진 그룹들이 등장하기 시작했다. 유럽과 미국의 정치인들은 자기들끼리는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의 구호를 주장함에도 불구하고, 실제로는 한국이 3.1 운동을 통해 민족의 독립을 힘쓰며 탄압받고 있었을 때 전혀 냉담한 태도를 보였다. 물론 개인적인 차원에서는 몇몇 서양 선교사들이 한국인의 독립운동에 동정심을 갖고 도덕적 지원을 했었다. 3.1운동 후 일본은 한국인들에게 표면적으로는 더 관용적인 듯한 태도를 취했다. 그 결과 한국지성인 그룹들은 제한된 범위에서나마 사회, 문화 때로는 정치적인 주제들을 놓고 토론할 수 있는 분위기도 형성 할 수 있었다.
1922년에 이르러 일제는 조선사 교과서 편찬위원회를 만들었다. 이 위원회는 한국인은 자주심이나 독립심이 결핍된 민족이라 논쟁했고 조선은 언제나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에 불과한 나라였다고 주장했다. 또한 한국사와 문화는 중국과 일본에 비교해 항상 역행하고 후퇴하는 문화라고 여겼다. 일제는 세계의 여론을 자신들의 유리한 방향으로 돌리고자 한국사를 조작했고 한국민족은 자율능력이 없으므로 일본민족의 `보호와 지도'가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이러므로서 일제는 한국에 대한 자신들의 식민정책을 정당화 하고자 했다.
함석헌이 어려서부터 열렬한 민족주의의 영향을 받아오면서 성장해 왔던 것을 고려할 때, 한국인의 주체의식을 파괴하려는 일제의 소위 학술적 논쟁이나 일본 교과서 편찬위원회의 조작은 청년 함석헌에게 경악심을 심어 주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한국인들은 일제의 압박 밑에서 신음했다. 그러나 그 일제의 핍박에 효과적으로 저항할만한 힘을 가지고 있지 못했고 일제의 식민정권으로부터 독립할 조직력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이런 면에서 왜 함석헌이 압박당하고 있는 자의 입장에서 한국역사를 쓰기로 결심했는지 그 입장을 어느 정도 이해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러므로서 함석헌은 아마도 절망의 수렁 속에 침체해 있는 한국민족에게 어떤 희망을 심어 주고자 했으리라. 이로부터 약 10년 후인 1930년대 초반 함석헌은 마침내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다.
조그만 시골벽촌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은 민족애와 기독교정신을 호흡하며 그의 생각과 지식을 다듬어 나갔고, 이것은 그에게 진보적 기풍을 제공해 주었다. 이 정신을 바탕으로 함석헌은 식민지로 전락한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일할 힘을 축적해 나갔다. 여하튼 22살의 청년 함석헌이 유학을 가고자 오산학교를 떠날 때쯤엔 그의 학업도 그 시대로선 상당히 진척된 편이었다. 광야 오산에서 함석헌은 미래를 위해 잘 훈련돼 있었고 홀로 서기위해 잘 준비 돼있었다. 1923년 봄날, 남강 이승훈의 중재와 오산학교의 재정적 후원으로 함석헌은 오산에서 일본 동경으로의 유학준비를 갖추었다. 그 당시 식민지하의 대다수의 한국인으로선 세계의 최신 사상과 지식을 거의 동경을 통해서야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므로 동경은 한국 유학생들의 목적지로 선호되는 편이었다. 특히 동경은 한국 본토보다는 한국인들에게 어느 정도의 자유가 주어졌고 지리적으로도 미국이나 유럽보다 가까웠고 비용도 상대적으로 저렴했기에 한국 유학생들에게 잘 알려져 있던 곳이었다.
세번째 마당 : 식민지 지식인 함석헌 (1923-1945)
이 마당에서는 일제 식민지 아래서 함석헌의 삶(19232-1945)을 고찰할 것이다. 특별히 동경사범의 학생으로서, 무교회주의의 추종자로서, 오산학교의 역사교사로서, 한국사 저술가로서 그리고 한국이 일제의 손아귀로부터 해방되기까지 농사꾼으로서의 그의 전반적 삶을 검토 할 것이다. 이 기간을 통해 함석헌은 4번이 넘게 감옥문을 들락날락 했다. 그가 어두컴컴한 감방 안에 있을 때 그의 아버지는 운명했고 그의 가정과 가족은 빛더미에 올라서 빈곤에 허덕이게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동시에 이 시기는, 또한 함석헌에게 조그만 감옥의 천장 밑에서 '큰 배움(大學)'의 시기였다. 함석헌은 감방 안에서 인생이 무엇인가를 생각했고 동양의 고전서적을 탐독해 나갔다. 어두운 감옥 안에서 그는 불교와 도가에 관한 책을 읽었다. 그러므로 그 자신이 회상했듯이 그의 내적 힘과 혼의 양육을 위해 그에게 "감옥은 인생의 대학"이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외적인 고통에도 불구하고 미래를 위해 그는 희망과 낙관론을 잃지 않았다. 확실히 그는 "내일은 새로운 날!"이란 것을 알았기에 그의 내적 힘을 지킬 수 있었으리라.
3.1. 일본에서의 생활 (1923-1928)
1923년 4월 함석헌은 일본에 도착했다. 동경에 도착한 그는 방을 구하러 다니던 중 일본인들이 얼마나 한국인들을 차별하고 부당하게 대우하는지 직접 체험할 수 있었다. 비록 일제는 겉으로는 "일본과 조선은 하나다"라는 구호를 내 세웠지만, 실제적으로 한국인을 향한 일본인의 정책은 철저한 차별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함석헌이 한국인이었기에 동경에서 거주할 방을 하나 구하는 것도 이런 면에서 하늘의 별따기였다. 일본인 집주인들이 함석헌이 한국인인 것을 알았을 때 그들은 단호하게 세 주기를 거절했다. 방을 하나 구하려는 치열한 투쟁 속에 함석헌은 주권 없는 민족의 서러움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절실하게 실감했다.
1923년 4월은 일본에서 큰 사회적 변동기 중의 한시기였다. 제 1차 세계대전 후 세계경제의 침체는 일본경제와 사회에도 큰 어려움을 동반 해왔다. 때를 맞추어 일본의 노동자 계급과 소작인들의 조직 또한 증가하기 시작했다. 소작지 관련 분쟁건은 1917년엔 85건에 불과 했지만 1919년엔 326건으로 증가했고 1923년에 이르러 2,000건으로 급상승했다. 1920년대는 또한 일본의 중소은행들이 급격하게 감소하기 시작했는데 1921년에 2,041개의 은행이 1929년에는 절반도 안되는 1,008개로 급격하게 줄어들었다. 1910년대와 비교해 1920년대는 다양한 문헌과 잡지들이 쏟아져 나왔다. 이러한 서적들은 현대적인 감각을 갖춘 여러 종류의 정기 혹은 부정기 간행물로 가격도 저렴해 보통 1엔 (yen) 정도로 보통 일본인들도 별 부담없이 구입할 수 있었다. 중산층 지식인들과 노동자 계급 지도자들 중에선 한때 자유주의 이념을 지지했으나 곧 이러한 흐름은 사회주의 이념으로 대치되어 갔다.
1922년 무렵 일본에는 약 3,000면 정도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다. 한국 유학생들 중엔 1921년 흑도회, 1923년 북성회를 포함, 다양한 종류의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 모임을 창설한 그룹이 있었고 이들은 좌익 사상에 많이 심취해 있었다. 특히 1919년 비폭력 무저항 원칙의 3.1 운동이 구미로부터 별로 지지를 못받고, 상해 임시정부 또한 별 정치적 영향력을 못미치자, 이에 대응해 재일 한국 유학생들은 조국의 독립을 위해 좀더 과격하고 급진적인 노선을 택하기 시작했다. 특히 한국 유학생들은 1920년대 일본사회의 자유주의와 사회주의 물결의 확산으로부터 강렬하게 감동을 받았다. 함석헌이 이런 일본사회의 자유주의 물결의 전성기인 1920년대, 한국 유학생으로 동경에서 공부할 수 있게 된 것은 그의 젊고 왕성한 지적발달을 위해선 큰 행운 중의 하나라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1923년 9월1일, 동경대지진이 발생하는데 이로 인해 동경의 3분의 2와 요꼬하마의 거의 전부가 파괴되었다. 그리고 이것은 이미 쇠약해 있던 일본의 사회경제적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게 되었다. 동경대지진으로 인해 약 40만의 사람이 실종 되었거나 생명을 잃었고 200만명 이상은 주택을 잃었다. 지진으로 인한 통신시설의 두절은 사람들을 공포 속으로 몰아 넣었고 이러한 두려움은 조절할 수 없을 정도로 급격하게 확산되었다. 언덕 꼭대기나 도시근교의 거주인들만 상대적으로 피해를 덜 입었을 뿐이었다. 이 지진은 또한 홍수와 콜레라의 발생을 초래했다. 결국 계엄령이 선포되었다. 수십만명의 피난민들은 무너진 집을 버려둔 채 교외로 식량과 은신처를 찾아 헤매고 다녔다.
그러나 동경대진재는 또한 일본의 경찰과 극우세력에게 좌경진보세력을 일망타진할 구실을 마련해 주었다. 대지진 후 일본정부는 사회주의 세력의 동요와 반란을 우려해 그들의 주의를 분산시키고자 하는 목적으로, 재일 한국인들이 대정부 반란음모를 계획하고 있다고 허위소문을 퍼뜨렸다. 그로인해 재일 한국인 5천명 이상이 일본인 폭도의 손에 의해 무참히 학살되었다. 이 혼란과 불안의 시기에 함석헌은 그 생애에 처음으로 감옥생활의 경험을 하게 되었다. 일본 경찰들은 "무죄한 조선인을 보호한다"는 이름으로 함석헌을 다른 한국인들과 함께 비좁은 감옥 안에 수감시켰다. 비록 함석헌은 오직 하룻밤을 닭장같은 감옥 안에서 지냈지만, 그는 그곳에서 인간본성과 종교 및 도덕의 본질에 대해 깊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한편 조선인 대학살 사건 이후 재일 한국인들은 일제에 대항해 과격한 노선을 취하게 되었다. 재일교포들의 노동운동도 각종 조합활동을 통해 확산되어 나갔다. 1923년 11월에는 한국인 사회주의자 그룹의 주도하에 조선인 노동자 총련맹 (조총련)이 일본에 처음으로 창설되었다. 그리고 조총련의 회원 가입자는 급격하게 증가해갔다.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은 항상 서로 긴밀하고 가까운 관계를 유지해왔는데 그들 중 몇몇 그룹은 혁명적인 모임을 형성해 나갔다. 그중 가장 주목되었던 사회주의 학생회 모임은 조선학생 자활회였다. 이 모임에서 발행하는 잡지 {동우}는 한국인 학생들과 노동자들의 해방은 계급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하다고 부르짖었다. 사회주의의 영향을 받은 한국인 학생들은 개인의 자유를 주장했고, 어떤 종류의 정치권력이건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것을 전적으로 거부했고, 필요한 경우는 폭력의 필요성을 주창했다. 1923년 이에 영향을 받은 한국인 학생 무정부주의자 박열(1902-1974)은 일본왕 암살을 시도했다. 박열은 1919년 일본에 온이래 즉시 무정부주의자 운동에 가담했다. 그러나 박열과는 다르게 함석헌은 사회주의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도 않았고 불같은 격한 성미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재일 한국인 유학생들 중엔 막스주의자들도 있었는데 그들은 한국이 일본으로부터 주권과 독립을 되찾는 일은 일본제국주의의 자본주의적 요소를 제거함으로서만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이들은 노동자 계급을 중심으로 반일투쟁을 조직하고 전개해 나갔다.
식민정책 초기부터, 우익 일본제국주의 정권은 한국인의 민족의식을 무력으로 속박해서 뿌리뽑고자 발악을 했다. 이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일제는 한국인들이 한국역사나 지리를 공부하지 못하도록 금지함은 물론 그 관련 자료를 압수해 갔으며, 한국 민족주의와 관련된 책자나 잡지를 간행하지 못하도록 금했다. 이 정책은 한국인들이 자기들의 현재와 과거사에 무지함으로서 무조건적으로 일제식민정권의 통치방침에 복종하도록 만들기에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면서 일제는 한국사를 왜곡, 변조해 나갔고 한국인 민족성에 대해선 게으르고 당파성이 강하기 때문에 스스로 자치할 능력이 없는 민족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계몽된 일본인'들이 '몽매한 조선인'들을 지도해 나가야 된다고 역설했다.
한편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의사가 되고자 하던 꿈을 일찍 포기한 함석헌은, 한때 미술과 예술에 대해 많은 관심과 흥미를 키워 나갔다. 특별히 3.1 운동이 별 실효를 못거두고 끝난 후, 함석헌이 고향에서 2년간을 '낭비'하고 있었을 무렵, 그는 다양한 독서를 통해 미술과 예술에 관한 지식을 넓혀 나갔다. 그 당시 함석헌은 항상 스케치북을 가지고 다니며 틈나는대로 그림 연습을 했다. 그의 미술과 예술에 대한 강렬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조국의 운명이 존망의 지경에 처한 것을 볼 때, '전문적'으로 미술을 공부한다는 것에 대해 어떤 죄책감을 느꼈다. 일제하에서 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로 처한 상황 아래서 미술을 공부한다는 것은 함석헌에게는 일종의 사치처럼 여겨졌다. 마침내 함석헌은 그의 미술에 대한 욕구에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렸다: "하고 싶은 개인의 취미대로 하란다면 아마 미술로 갔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 딴의 생각으로 우리나라 형편에 그게 급한 것 아니라는 것이었다." 이런 갈등 끝에 조국의 장래를 위해 함석헌은 더욱 '다급한' 과목을 공부하고 싶었고, 그래서 그는 미술보다는 역사와 교육을 공부할 것을 선택했다.
따라서 1924년 역사교육을 공부하기 위해 함석헌은 동경사범에 입학했다. 그때부터 1928년까지, 함석헌은 역사뿐만 아니라 교육학과 물리학까지 깊은 흥미를 갖고 공부했다. 1924년은 한편 일본사회가 불안정한 형편에 있었다. 그 당시 동경사범엔 약 50명 정도의 한국 유학생들이 있었고, 그들 중 대부분의 한국 유학생들은 직간접으로 공산주의와 무정부주의 사상의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비공산주의계 기독학생으로서 급진적인 좌익계 학생 그룹으로부터 질시를 받고 있는 형편이었다. 함석헌이 어려서부터 열렬한 기독교적 환경에서 자라난 것을 고려할 때, 그는 조국을 일제의 손아귀에서 구원할 근본적 매체로서 기독교적 종교윤리를 받아들여야 할 것이냐 혹은 사회주의나 무정부주의적 정치이념을 선택해야 할 것이냐로, 그의 마음은 심하게 둘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치적 과격주의의 어떤 면들은 그가 전적으로 찬동할 수 없었다. 일례로 함석헌은 무정부주의자들이 주장하는 테러주의에 찬성할 수 없었고 또한 공산주의자들이 옹호하는 무신론주의에 동의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그의 내적 갈등과 번민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나는 번민하기 시작했습니다. 기독교를 가지고 정말 우리 민족을 건질 수 있느냐고. 정치란 것이 이런 것일진대, 지식인-상류사회란 것이 이런 것일진대, 그 악당을 물리치는 것은 종교 도덕으론 도저히 될 수 없는 것이 분명했습니다. 나라를 해방시키려면 혁명밖에는 길이 없고 혁명을 한다면 사회주의 혁명 이외에 길이 없는 것으로 보였습니다. 민족주의 진영이 썩어져가는 것을 보면 혁명은 어림도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내 신앙을 버리고 도덕이니 인도주의 하는 것은 전혀 무시해버리는 사회주의에 들어갈 수는 차마 없었습니다. 나는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했습니다 ---- 나는 오래 고민했습니다."
이런 고민에 싸인 함석헌을 보고 그의 한 동급생은 그가 사회주의운동에 가담 할 것을 적극 설득, 권고하기도 했다. 이것은 함석헌에게 더 절박한 고뇌와 깊은 고민을 심어 주었다. 함석헌이 이런 내적 격변에 처해 있었을 때, 그는 그의 오산학교 동창생이던 김교신(1901-1945)을 만나게 되었다. 김교신은 1919년에 동경유학을 왔다. 그후 1920년 11월부터 1927년 한국으로 귀국하기까지 김교신은 우찌무라 간조(1861-1930)가 이끄는 성경공부 모임에 정기적으로 참석했다. 김교신은 함석헌에게 우찌무라의 성경공부모임과 일본 무교회 운동모임을 소개해 주었다.
마침내 1924년 함석헌은 우찌무라를 만나게 되었다. 우찌무라는 일본의 기독교 사상가이자 비평가였다. 우찌무라는 일본 근현대의 지식인들과 작가들의 사상형성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1868년 명치유신 후 일본이 서구에 대해 개방정책을 취하고 근대화 운동을 추진할 그 당시, 우찌무라는 가장 유명한 일본의 성서해석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젊어서 우찌무라는 언론인으로 일하면서 기독교의 평화주의 입장에서 한때 러일전쟁을 비판하고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면서 그는 기독교인들이 무조건적으로 자기들이 속한 국가에 충성해야만 할 것인가의 의문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또한 그 당시 대부분의 일인들과는 달리, 일본왕을 '살아 있는 신'으로 여기지 않았기 때문에 일왕의 칙령과 초상화 앞에 경배하는 것을 거부하기도 했다. 그래서 한때 우찌무라는 일본정부로 부터 '반역자'의 낙인이 찍히기도 했다.
우찌무라의 글은 일본이 갑자기 현대화의 길로 들어서는 것에 대해 여러 면의 그의 염려를 반영했다. 기독교의 가르침과 더불어 우찌무라는 또한 '일본정신'을 강조했다. 우찌무라는 기도와 성서공부를 통해서만 인간이 하나님에게 통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다고 선언했다. 우찌무라에 의하면, 일본인은 철저한 성서연구를 통해서 일본에게 필요하고 일본의 전통에 적합한 기독교를 발견할 수 있다.
그의 후기 글은 특별히 성서를 통한 기독교의 무교회운동 문화를 일본인들에게 소개했다.
우찌무라와 그의 추종자들은 타인들로부터 "무교회 주의자들"이라고 불렸는데 우찌무라 스스로는 "무교회 원칙에 입각한 기독교도"라고 자신의 모임을 정의했다. 우찌무라는 교회란 건물이나 제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그는 어떤 특정 교단이나 교회에 속하기를 거부하면서 성서의 믿음대로 헌신된 삶을 살기를 시도했다. 그는 체제순응적이고 안전위주인 일본의 기성교회 그룹으로부터 떨어져 나가려고 노력했고, 반면에 기독교의 형제애에 바탕한 공동체를 이루고자 했다.
함석헌은 기독교의 십자가를 강조한 우찌무라와 무교회 운동 사상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함석헌은 우찌무라가 무조건적으로 성서의 진리를 받아들이기보다는, 진지한 노력으로 성서를 대하고 스스로의 힘으로 공부하는 것이 인상 깊었다. 우찌무라를 통해서 함석헌은 성경을 보는 새로운 안목을 갖게 되었다. 그후 함석헌은 우찌무라로부터 직접 세례를 받게 되었고, 그리고 우찌무라와 그의 퀘이커 친구인 니또베 이나조와 더불어 일본에 있는 퀘이커모임에 출석하게 되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때 퀘이커모임을 통해서 별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우찌무라는 그의 조국인 일본과 그의 종교인 기독교와의 관계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나는 2개의 J를 사랑한다. 하나는 예수(Jesus)이고 다른 하나는 일본(Japan)이다." 이것은 우찌무라의 종교적 신앙과 그의 민족애가 어떻게 얼마만큼 그 자신에게 중요하고 의미를 갖는지 함축적으로 설명한 것이다. 함석헌은 우찌무라로부터 종교적 신앙과 민족애를 함께 접합시키는 방법을 배웠던 것 같다. 그러므로 훗날 1928년, 함석헌이 유학을 끝내고 귀국했을 때 그는 그의 동경 유학시절 무교회모임 친구들과 함께 자신들의 종교와 애국심을 강조한 잡지 {성서조선} 을 발간하게 된다. 함석헌은 우찌무라의 성경공부 모임을 정규적으로 출석하면서 종교와 민족과의 상관 관계를 염려했던 그의 내적갈등이 점차적으로 사라져 가는 것을 느꼈다. 그러면서 함석헌은 기독교인 애국자로서 그의 나머지 생애를 살아갈 것을 다짐했다. 나중에 함석헌은 동경유학시절 그가 우찌무라로부터 얼마나 큰 영향을 받았는지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나는 이따금은 우리가 일본에게 36년간 종살이를 했더라도, 적어도 내게는, 우찌무라 하나만을 가지고도 바꾸고도 남음이 있다고 생각하기도 합니다."
우찌무라의 무교회운동은 표면적 형식주의와 교회만의 경건함을 부인했고, 예수의 십자가를 통한 대속신앙을 강조했다. 이것은 각 개인이 중간의 목회자나 교회의 예식이 없이도 성서의 진리를 발견할 수 있다는 사상이고, 그러므로 세례식이나 성찬식도 그저 한 의미에 불과 하다는 지론이다. 무교회운동은 교회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제도적인 기성 교회에 속하지 않고는 구원이 없다는 교리화된 고정관념을 부인하는 것이다.
함석헌은 우찌무라가 주도하는 성경공부모임을 출석해감에 따라, 사회주의 사상과 기독교신앙을 놓고 갈등하던 그의 오랜 내적인 번민이 차차 사라져 가기 시작했고, 그러면서 함석헌은 "참 기독교인"으로서 살아 갈 것을 결심했다. 함석헌은 그의 내적 확신과 감동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나는 지금도 그날의 인상을 잊지 못하며, 신앙이란 이런 것이다, 성경이란 이렇게 읽을 것이다 하는 확신이 생겼습니다." 함석헌이 우찌무라를 만나기 전에는, 함석헌은 사회속에서의 기독교회의 역할에 대해 어떤 불확실성을 느꼈었다. 화석화된 교회의 예배형식은 함석헌에게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혼란하고 복잡한 사회-정치적 상황가운데서도, 그의 기독교적 신앙심을 차분하게 정립하고자 내적 투쟁 중에 있었다. 20대 초반의 청년으로서, 함석헌은 그자신에게 더 근본적이고 긴급한 어떤 절대적인 신앙심을 추구하고 있었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가 찾고있는 그 절대적이고 궁극적인 어떤 것을 기성교회를 통해서는 발견 할 수가 없었다.
우찌무라와의 성경공부를 통해서, 함석헌은 기독교가 그의 삶과 하나로 어우러져 가는 것을 실감했다.
결국, 우찌무라의 가르침에 힘입어, 함석헌은 그의 종교적 신앙심이 그의 조국을 향한 애국심과 결코 유리된 것이 아니라는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그러므로서 함석헌은 그 삶의 방향을 제시해줄 정신적 혹은 사상적인 안내자로서 사회주의 이념보다는 기독교적 신앙을 선택했다. 그 결과로서 1925년부터 함석헌은 성경을 원문대로 읽어보겠다는 의도의 하나로서 김교신, 송두용, 정상훈, 유석동, 양인성등과 같이 희랍어를 공부하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동경사범에서 역사를 공부하면서, 우찌무라와 함께 성경을 연구하는데 그의 시간과 정열을 다 바쳤다.
3.2. 역사교사 그리고 『성서조선』(1928-1938)
1928년 봄, 동경사범에서의 유학생활을 끝내고, 함석헌은 그의 모교인 오산학교에서 그의 나머지 생애를 가르치는데 전념하고자 귀국했다. 귀국함과 동시에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역사, 일반윤리, 교육등의 과목을 강의했다. 그의 강의를 준비하면서 함석헌은 타고르(Rabindranath Tagore: 1861-1941)와 간디(Mohandas Gandhi: 1869-1948)의 책들을 깊은 관심과 흥미를 갖고 읽었다.
동시에 함석헌은 또한 김교신과 더불어 계간지 {성서조선} 잡지의 편집및 정기 기고를 했다. 1928년부터 1930년대까지 함석헌은 {성서조선}에 [구약성경]의 예언자들의 삶에 관한 글들을 연재해 나갔다. {성서조선}은 함석헌의 오랜 친구인 김교신이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1927년 7월에 창간한 잡지였다. 김교신은 함석헌보다 약 1년 먼저 귀국했고, 그후 오산학교에서 지리학과 자연사를 강의하며 틈틈이 {성서조선}을 출판해 왔다. 우찌무라가 예수와 일본을 동시에 중요시했듯이 김교신은 성서와 조선을 동시에 중요시했다. 김교신이 지도력과 효율적인 능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성서조선} 편집자 중의 한사람이며 김교신과 함석헌의 친구인 송두용은 김교신의 인물평을 다음과 같이했다: "김교신은 무엇으로 보나 우리 여섯 중에 지도자격 이었고 모든 면에서 뛰어난 친구였다." 함석헌과 그의 여섯 친구들은 기독교, 역사, 사회, 민족주의 등에 관한 주제로 {성서조선}지에 정규적으로 집필을 했다. 특별히 함석헌은 이 시기에 그의 기독교적 역사관을 담은 명저, [기독교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를 {성서조선}에 연재투고 하기 시작했다. 더우기 일본에서 귀국하자마자 김교신은 우찌무라-스타일 무교회 운동모임을 만들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오산학교에서 가르치는 동안 그의 여섯 친구들과 더불어 헌신된 무교회 기독교인으로 활약했다. 그들은 동경에서 우찌무라가 이끌었던 스타일의 성경공부모임을 오산에 만들었고 이 공부모임은 점차적으로 다른 한국인들에게도 인기를 끌어갔다.
또한 급기야는 {성서조선}은 몇 백명의 독자까지 확보하게 되었다. 이런 면에서 우찌무라의 기독교관은 초기 함석헌의 사상형성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 그리고 무교회운동은 그 후 10년간 함석헌 기독교 신앙관의 중심점역할을 했다.
1920년대 후반기 이래, 사회주의적 시각에 입각한 역사관이 한국사학계에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 역사관은 경제 발전단계로 한 사회발전의 수준을 측정했고, 이런 역사관을 주장하는 학자들은 막스의 유물론적 사관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은 막스의 유물론적 역사관에 동감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자신이 {성서조선}에 [--- 조선역사]를 연재한 바 있고 오산학교의 역사교사이며 동시에 민족주의자였기에, 일본경찰로부터 요주의 인물로 감시와 주목을 받고 있었다. 결국 함석헌은 일본경찰에 의해 막스주의자의 누명을 쓰고 체포되었다. 그러나 수감된 함석헌은 자신이 공산주의자로 체포된 이유를 이해할 수 없었다. 나중에야 함석헌은 자신의 집에 머물렀던 오산학교 후배 두 사람이 공산주의 독서회 회원이었던 것을 알았고, 그로 인해 자신이 체포되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함석헌을 수감한 일본경찰은 그가 공산주의자라는 혐의를 증명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증거 불충분으로 함석헌은 '공산주의자'의 혐의를 벗고 일주일만에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경찰은 {성서조선}에 실릴 함석헌의 글을 계속적으로 삭제 검열했고, 나아가 {성서조선}자체도 간헐적, 반복적으로 폐간조치를 받았다.
1931년 일본이 만주를 침략함에 따라 한반도 전역은 일제의 전면전쟁을 위한 군사기지로 변해갔다. 일본은 우익 파시즘국가로 변해갔고 반면에 한국의 민족주의자들 중엔, 효율적 항일운동의 차원에서, 좌경화되거나 공산주의 운동 노선에 가담하는 이들이 많이 생겼다. 실제로 많은 한국의 지성인이나 민족주의자들 중엔 좌익사상에 심취한 그룹이 많이 있었고, 최소한 막시즘의 이론정도는 알고있었다. 공산주의는 어떤 면에서 일제의 자본주의적 수탈정책에 유일한 대안을 제시해 주는 듯도 했다. 그 결과 1930년대의 항일운동과 민족운동은 한국의 좌익계 세력이 주도권을 이끌어 나갔다. 이런 면에서 일제는 함석헌의 민족주의자로서의 활동도 공산주의 운동과 동일시하기까지 했다. 또한 이 시기의 한국의 좌경세력이나 공산주의자들은 반일운동의 차원에서 한때 민족주의진영과 공조체제를 취하기도 했다. 일본경찰 또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과 공산주의자들을 다 반일세력으로 무조건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나중에 중국 국민당과 공산당이 국공합작에서 분열로 결말을 맺은 것처럼, 한국의 민족주의진영과 공산주의진영 역시 반목, 분열되기 시작했다.
한국의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이 반목과 분열의 길을 걷고 있을 때, 함석헌은 그의 독자적 시각으로 한국사를 기술하기 시작했다. 각 나라는 스스로의 역사를 찬란하게 미화시키는 경향이 있고 기존 한국사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었다. 함석헌이 본격적으로 한국사를 기술하기 전에, 그 자신도 한국사를 "찬란한 역사"로 보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함석헌이 한국사를 본격적으로 연구하기 시작했을 때, 그는 한국사가 영광된 역사라기보다는 인간 고뇌와 시련의 연속으로 점철된 부끄러운 역사라고 느꼈다.
그리고 함석헌은 이러한 스스로의 '발견'에 큰 충격을 받았다. 한반도가 그 역사를 통해 내란과 외세의 침략을 포함해 100회 이상의 전쟁을 치루었고, 50회 이상을 외세의 발 앞에 무력하게 무릎 꿇었던 것을 돌이켜 볼 때 함석헌의 충격을 수긍할만하다. 더우기 일제하에서 혼란과 격동의 세월을 함석헌이 직접 체험하며 살아갔던 것을 고려할 때, 그는 부끄러운 한국사의 의미를 생각하고 또 다시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한반도를 식민지화함에 있어서 일제는 갖가지 방법으로 한국인의 주체의식과 정체성을 말살시켜 뿌리뽑아 버리고자 시도했다. 일본제국주의의 한반도 교묘하고 가혹한 식민정책에 의해 한국인은 그 정체성의 붕괴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식민지화된 민족으로서 한국인의 자기정체성 발견은 사상적으로 중요한 급선무중의 하나였다. 함석헌은 한국인의 정체성이 상실되어 가는 것에 염려를 느꼈고, 그 잃어가는 정체성을 어떻게 회복해야 할 것인가에 안간힘을 기울였다. 함석헌은 몰락해가는 한국인의 정체성을 되살리는 일이 한국인의 미래의 존망과 끊을 수 없는 상관관계에 있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그가 오산학교에서 한국사를 가르치기 시작하면서 함석헌은 피할 수 없는 큰 딜레마를 직면하게 되었다:
"나는 조그만 시골학교에서 한국역사를 가르치게 되었습니다. 내가 실제로 교실에서 가르치기 시작했을 때, 나는 한국사를 있는 그대로 학생들에게 가르치기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4천년의 한국역사는 굴욕과 좌절 그리고 실패의 연속이었습니다 ---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한국사를 정면으로 응시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랬을 때 그것은 마치 버림받은 길거리의 거지 처녀아이처럼 내 눈앞에 나타났습니다. 그 넝마를 입은 처녀아이는 동네 건달들로부터 능욕을 당하고, 쫓겨다니고, 숨어다니다가, 결국에는 길거리 바닥에 지쳐 쓰러져서 힘없이 울고 있었습니다."
제국주의 열강들 등살 밑에서 일제의 식민지화된 민족으로서 겨우 풍전등화와 같은 삶을 연명해가고 있는 조국의 모습은, 함석헌의 눈에는 버림받은 길거리의 거지 처녀아이처럼 비쳤으리라. 이 시기의 한국인의 운명은 강한 외세의 군사적 물질적 힘 앞에 여지없이 농락당하고 있었던 것이다. 함석헌은 직접 러일전쟁의 결과를 보고 자랐고, 청일전쟁이 끝난 후에 태어났다. 한국은 러시아, 중국, 일본처럼 강력한 군사력도 갖추지 못했고 물적자원도 빈약했다.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큰 나라 러시아, 가장 인구 많은 나라 중국, 가장 비싼 나라 일본에 둘러싸이고 눌려서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지는"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런 입장에서 함석헌은 한국사가 일제의 식민사관에 의해 열등하게 왜곡 돼있는 상황이나, 반면에 민족사관에 의해 지나치게 찬양되어 있는 형편을 직면하고, 그 자신이 왜 역사교사가 되었던가 하고 '후회'하기 까지 했다. 그러나 세상일은 새옹지마(塞翁之馬)라 모든 일은 전화위복(轉禍爲福)이 될 수 있으리라! 마치 생물계의 진화의 원리처럼, 궁지에 몰린 존재나 어려움에 처한 인간은 그 상황에서 벗어나고 어려움을 해결 하고자 깊은 생각을 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함석헌 역시 어려움에 몰린 한국인의 역사적 정체성 상실의 위기를 극복하고자, 세계사에 있어서 한국사의 의미를 다시 음미하고 숙고하기 시작했다:
"나는 이 거지 처녀를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조용히 나는 그녀에게 접근했습니다. 그녀의 젖은 눈물을 닦아주고, 더러운 먼지를 털어주며, 그녀의 상처를 치료했습니다. 그리고는 그녀가 더듬거리며 얘기하는 중얼거림을 들었습니다. 나는 점차 한 형상을 내 눈앞에 떠올렸습니다. 그 형상은 희미하게 그녀의 뒤에 서 있었습니다. 그것은 한국의 수난의 역사, 고난의 여왕이었습니다."
이것은 은유적으로 함석헌이 그의 한국사관을 보여 준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그는 한국사의 세계사적 의미를 새로운 시각으로 조명하기 시작했다. 합리적인 기독교 사상가로서, 함석헌은 한국사의 부끄러운 면, 굴욕적인 면을 감추고 싶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한국사의 위치를 세계사의 '하수도'격 위치라고 선포하며, 구약성경의 눈뽑히고 사슬에 묶인 굴욕적인 위치의 삼손과 비교했다:
"우리 역사가 그런 역사다. 한 사람의 다윗도 예레미야도 난 일이 없고, 단테도 밀턴도 난 일이 없다. 그 좋은 자연에 워즈워드 못 낳고, 그 도발적인 역사에 타고르가 못 났다. 이 사람들은 오직 눈 뽑히고, 머리 깎이고, 사슬지고, 맷돌을 가는 삼손이었다."
아마도 함석헌의 한국사에 관한 위의 처절한 비유는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시대에 형편없는 한국사의 위치를 세계사의 위치에 고려했을 때, 함석헌은 그 어떤 공포의 전율마저 느꼈던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역사를 통해서 한국은 그의 이웃나라인 중국이나 일본보다 세계사에 덜 알려져왔고, 덜 부각돼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가로서 함석헌은 기가 꺾여온 한국사의 모습을 바라보며 수 차례 반복해서 스스로에게 질문했을 것이다: "내가 어떻게 이런 한국사를 가르칠 수 있을까? 어떡하나? 길이 없나? --- 이 문제를 나 홀로 해결해야 하나?" 그럼 이런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함석헌은 비관주의자였을까? 아니면 그는 민족적 열등의식에 젖어있는 패배주의자였을까?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한국의 역사는 고난의 역사라고 선언했다. 그리고 그는 한국인의 고난을 성경에 나타나는 예수의 고난과 나란히 비교했다. 구약성경에 등장하는 예언자 이사야는 이스라엘 민족을 위해 도래할 메시아, 해방자의 고난을 이렇게 선포했다: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나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 그는 사람들에게 멸시와 천대를 받고 슬픔과 고통을 당하는 사람이 되었으나 사람들이 그를 외면하고 우리도 그를 귀하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우리의 질병을 지고 우리를 대신하여 슬픔을 당하였으나 우리는 그가 하나님의 형벌을 받아 고난을 당하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가 우리의 죄 때문에 찔림을 당하고 상처를 입었으니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되었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고침을 받았다."
이러한 [이사야서]를 읽음으로서, 함석헌은 일제의 가혹한 박해 아래서도 조국의 미래를 위해 희망을 잃지 않을 수 있었고, 그의 마음은 오히려 뜨겁게 부풀어올랐다. 나아가 함석헌은 한국인의 고난의 역사에 대해 다음과 같이 중요한 의미 부여를 했다: "고난이란 말은 기독교에서 나왔습니다. 성경의 입장에 서서 마치 예수라고 하는 하나의 개인이 인격으로 나타낸 것을 역사에서 하나의 민족에다가 적용해 보자는 것입니다."
이런 그의 결의를 바탕으로 1933년 2월부터 1935년 12월까지, 함석헌의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는 {성서조선}에 연재되었다. 그러나 함석헌이 [---조선역사]를 썼을 때, 그는 도서관에서 역사자료 한번 제대로 참고할 형편도 못 되었다. 그러므로 빈약한 자료들을 앞에 놓고 함석헌은 깊이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그는 한국사를 놓고, 과장과 찬양으로 넘친 민족사학가들의 문헌과, 왜곡과 날조로 얼룩진 식민사학가들의 논쟁에서, 냉철하게 중립적이고 공정한 입장을 유지하고자 힘썼다. 이런 갈등과 고민을 통해서 쓰여진 그의 [---조선역사]는 직관적인 함석헌의 통찰력을 보여주기는 하지만 역사학자가 쓴 연구서적으로 볼 수는 없다. 다시 말해 함석헌의 [--- 조선역사]는 그의 내적 혜안과 영적 체험을 바탕으로 조용한 도서실이나 연구실이 아닌 소용돌이치는 삶의 현장 속에서 만들어진 글이라는 것이다. 실로 함석헌을 우리는 기존적인 의미의 역사가로 정의 할 수는 없다. 그는 한국사를 과학적인 분석가의 머리로 쓴 것이 아니라, 시인의 열정과 가슴으로 썼던 것이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 자신도 그의 역사책을 역사 연구서라고 표현하지 않고, 그의 기도와 믿음의 행동이었다고 표현했다.
이 시기에, 나는 함석헌의 관점이 대단히 기독교 중심적이었다고 본다. 왜냐하면 그의 주장을 통해 그는 오직 기독교만이 유일한 종교라고 선포하기 때문이다. 이 시기의 함석헌은 순진한 어린아이와 같은 심정으로 성경과 기독교에만 절대적인 가치를 두었다. 그러므로 무엇보다도 함석헌은 "성서적 입장에서 본"이라는 점을 강조했다. 그의 {---조선역사} 서문을 살펴보면 이 시기에 그의 생각이 얼마나 성경중심적이었나를 볼 수 있다:
"{성서적 입장에서 본}이라는 제목의 귀절이 일반 사람에게는 걸림이 될 듯하니 빼면 어떤가 하는 의견이 잠깐 나왔으나 그것은 사슴에게서 뿔을 자르는 것 같아 그대로 두기로 하였다. 이 글이 이 글된 까닭은 성경에 있다. 쓴사람의 생각으로는 성경적 입장에서도 역사를 쓸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자리에서만 역사를 쓸 수 있다. 똑바른 말로는 역사철학은 성경 밖에는 없기 때문이다. 서양에도 없고 동양에도 없다. 역사는 시간을 인격으로 보는 이 성경의 자리에서만 될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기독교를 향한 함석헌의 정열과 헌신을 살펴볼수 있다. 이 시기의 함석헌은 세계인류의 역사철학을 오직 성경의 관점에서만 이해 할 수 있었다.
한편 {성서조선}의 발행수는 3 백부 정도 밖에 안되었지만, 함석헌의 글을 포함한 다른 내용의 글들은 가혹한 일본경찰의 검열과 삭제를 받았고, 종종 {성서 조선} 자체도 폐간과 복간의 수난을 거듭했다.
함석헌은 {성서조선}의 기고를 통해, 세계역사에 있어서 약자나 혹은 소위 "패자"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했다. 함석헌의 논지에 따르면 세계 인류의 역사는 거의 대부분이 소위 "승자" 혹은 "강자"의 입장에서만 씌어졌고, 그래서 그 "강자"의 입장를 항상 정당화하고 변호하려는 것이 세계사다 라는 것이다. 반면에 약자나 소위 "패자"의 역사는 강자에 의해 무시되고 말살되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약자의 역사는 점차 잊혀졌으며, 강자의 발에 짖밟혀 왔던 것이다. 그래서 함석헌은 약자나 소위 "패자"도 역사에 큰 공헌을 해왔건만, 그들의 공헌을 발견하기가 어렵게 돼있다는 것이다. 그의 {---조선역사}를 통해 함석헌은 역설적인 논리를 통해 어떻게 약자나 소위 "패자"도 세계사에 공헌해왔고, 왜 중요한지를 논증하고자 했다. 이러므로서 함석헌은 일제식민지하에 억눌려 있는 한국인들이, 일제의 잔혹한 세뇌공작에도 불구하고 한국인으로서의 민족적 자부심과 긍지를 잃지 않도록 격려하고자 했다.
함석헌은 한국인이 역사를 통해서 고난을 받은 것은 단순히 한국이 군사적으로 열등하기 때문이어서가 아니라, 성서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강조했다. 성경속의 예수가 "고난의 아들" 이었던 것처럼, 한국이 세계에서의 역할은 "수난의 여왕"이었다고 함석헌은 정의했다. 함석헌은 세계에서의 한국인의 정체성과 사명을 다음과 같이 선포했다:
“우리 사명은 여기 있다. 이 불의의 짐을 원망도 않고 회피도 않고 용감하게 진실하게 지는 데 있다. 그것을 짐으로써 우리 자신을 건지고 또 세계를 건진다. 불의의 결과는 그것을 지는 자 없이는 결코 없어지지 않는다. 인간을 위하여, 또 하나님을 위하여 이것을 져야한다 ---세계의 불의의 결과는 우리가 져야한다, 우리가 그것을 져서 정화하기를 실패할 때 아무도 그것을 대신할 수 없다. 그러므로 세계의 불의의 짐을 지는 것은 우리의 사명이다. 영국이나 미국은 그 짐을 질 수 없다. 그들은 너무 잘났고 너무 높은 위치에 처해 있기 때문이다.
한국역사에 대한 그의 독특한 해석을 통해, 함석헌은 일제의 식민통치에 억눌려 있는 한국인들뿐만 이니라, 전 세계의 약자와 씨 에게 그들의 사명과 비전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었다. 그러므로서 기존의 역사관에서 무시되고 격하되었던 '패자'나 씨 의 수난의 대하여 그 정체성과 역할에 역사적 의미 부여를 해주었다. 빛이 밝을수록 그림자가 어둡다는 표현처럼, 한국역사의 굴욕적인 면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역설의 논리로서 한국사의 어두운 면을 통해 그 밝은 면을 부각시켰다. 그러므로서 함석헌은 일제하의 한국인들이 그 비참한 식민지 상황 가운데에서도 불구하고, 세계사에 귀중하고 가치있는 공헌을 해 왔다는 것을 깨닫기를 희망했던 것이다. 이런 새로운 역사관을 통해, 함석헌은 한국인들의 패배주의나 맹목적 숙명론의 고정관념을 타파하고자 힘썼다. 식민지화된 민족이 가혹한 외적인 조건에도 불구하고, 그 민족의 정체성을 잃지 않고 보존하는 일은, 민족의 사활 그리고 미래의 주체적 정신과 직결 되어있기 때문에 그 중요성이 결코 과소평가 되어서는 안된다.
함석헌은 인간역사에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의 원칙이 사라지고, 도덕에 기초한 건강한 사회가 등장할 것을 예견했다. 이런 함석헌에게 있어서, 역사는 단순히 서류화된 사실의 모임에 불과한 것이 아니었다. 그는 역사나 인간사에 있어서 도덕성의 유무를 가장 중요한 판단의 가치로 보았고, 이를 바탕으로 인류는 그 과거사는 물론, 현재와 미래에 대해서도 도덕적 책임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함석헌은 인간을 또한 역사적 존재로 보았기 때문에, 그에게 역사와 인간은 서로 떼어놓고 생각할 수 없는 관계였다. 그러므로 그는 역사의식 없는 인간의 삶이나 혹은 인간의 가치가 부여되지 않은 역사는 무익하다고 보았다. 이런 면을 염두에 두고 함석헌은 인류의 역사에 있어서, 단지 문화나 기술의 진보보다는 도덕의 진보가 더욱 중요한 가치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인류의 진화나 발전은 도덕과 영적 향상이 항상 선행되어야 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지론이다. 중국의 현인 공자(孔子)가 도덕적인 사회와 도덕적인 인간의 삶을 강조했던 것을 고려해볼 때, 함석헌의 역사관이 유교의 도덕적인 면과 서로 관련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한국사 신론}의 저자로 알려진 국사학자 이기백은 한때 오산학교에서 함석헌으로부터 역사를 배운 적이 있다. 그는 그의 젊은 시절의 역사관에 함석헌이 어떤 영향을 주었는가를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함석헌 선생님의 저서 {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부터 나는 큰 감동을 받았다. 함선생님의 글은 단재 신채호 선생님의 글과 더불어, 젊은 시절 나의 한국사를 보는 역사관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함선생님은 역사를 도덕의 진보라고 강조하셨다." 신채호(1880-1936)는 한민족이 다른 민족의 간섭으로 벗어나서 그 민족의 고유한 정체성을 인식하고 선언하는 것을 민족주의 인식의 가장 중요한 초기 단계라고 지적했다. 함석헌이 강조한 인류역사의 진보를 위해서는, 단지 문화의 발달뿐 아니라 도덕성의 향상과 인간미의 진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지적은, 젊은 시절 사학도 이기백에게 지울 수 없는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한편 1937년에 들어 일본은 만주를 침략함으로서 중일전쟁을 일으켰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국인들을 소위 "충성된 황국신민"으로 만들려는 목적아래 여러가지 삼엄한 정책을 실시해 나갔다. 일제는 한국인들이 소위 일본적 "민족정신 총동원 운동" 에 협조하도록 강요했으며 이를 위해 여러가지 제도와 계획을 세워 나갔다. 그 계획의 일환으로 일제는 각 마을과 동네마다 소위 '민족적 구역' 설정했고, 이는 직접적으로 일본경찰의 철저한 감시 하에 놓여 있게 되었다. 게다가 일제는 한국적인 색채가 나는 문화행사는 종류를 막론하고 무조건 금지 시켰다. 그 결과로, 그 동안 존재 해왔던 한국인들의 각종 정치, 사회, 문화적 단체들은 강제적으로 철거 및 폐쇄되었다.
일본군의 사기를 올린다는 목적으로 일제는 또한 위안부 혹은 정신대라는 이름으로 많은 한국의 젊은 여성을 징집했다. 제일 처음 정신대는 일제에 의해 1932년 상해에 설립되었다. 한국인 위안부들은 1945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날 때까지 일본군의 전선에서 성적노예가 될 것을 강요당했다. 10만여명 이상의 한국의 젊은 여성들이 정신대로 강제 징집되었다.
1938년에 이르러 일제는 한국인의 민족의식과 문화를 송두리째 뿌리뽑고자, 일본의 역사와 언어가 일본인은 물론 한국인의 국사이고 언어라고 공표하였다. 이에 따라 일제는 한국인이 한국어를 사용하거나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을 위험시하였다. 한반도의 모든 학교나 교육기관에서 한국어나 한국사를 가르치는 일이 전면적으로 금지되었다. 한국인 교사나 학생들이 교실이나 공적모임에서 한국말을 하는 것도 허용되지 않았다. 교회의 설교조차 오직 일본어 사용이 허락되었다. 더우기 한국인들은 어떤 종류의 공적인 모임에서 이건 소위 [황국식민칙서]를 암송하거나 낭독해야 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의 생명을 대일본제국의 천왕과 그 영광을 위해 기꺼이 바칠 것을 맹세합니다."
또한 1938년에 일제는 한국교인들에게 신사참배를 강요하기 시작했다. 일본 신도주의(神道主義)의 특성 중에 하나는 신(가미 - かみ), 인간, 자연전체가 같은 조상 아래서 태어났다는 것이고 그러므로 같은 친족이라는것이다. 그에 따라서 일본인들은 일본왕을 '살아있는 신'으로 여겼다. 그리고 이러한 일본인들의 관념을 한국의 기독교인들도 받아들일 것을 강요하였다. 특별히 한국의 젊은이들에게 신도의식과 일왕에 대한 충성심을 고양시키기 위해, YMCA와 YWCA를 해산시켰고, 그 대신 여러가지 대체기구를 창설 했는데 그것은 다음과 같다: 조선청년 연합회, 지방청년 학우회, 탁아소 연합회 등이다.
한국인들은 신사참배를 철저히 강요당했다. 한국교인들을 회유하기 위한 한 방법으로 일제는 신사참배는 '종교적'의식이라기 보다 '애국적'의식 이기에 모든 한국인들은 이에 따라야 한다고 지시했다. 그리고 한때 한국의 교인들은 일제가 주창한 '애국적 의미로서의 신사참배'를 받아 들였고, 신사참배 행위를 애국적 행동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의 저의는 은연중 한국인들의 민족의식과 감정을 신사참배를 통해 근절 시키자는데 있었다. 그러므로 신사참배를 거부했던 20여개의 기독교계 한국인 학교는 폐쇄조치를 당했다. 1945년까지, 총 200여개의 한국교회는 문을 닫을 수 밖에 없었고, 70명의 목회자와 약 2천명의 교인은 투옥되었다. 이 들은 감옥에서 심한 고문을 받았고 50명의 목회자는 모진 고문끝에 순교했다.
1938년 2월에는 소위 '군 특별 의용군 법령'이 선포되었고, 모든 한국학생들은 군사훈련을 받아야 했고 그후 일제에 의해 전방으로 강제징집 되었다. 1945년까지 약 3십 6만명의 한국인들이 일본군대에 끌려갔다. 이들 중 대부분이 '일본제국주의의 영광'을 위해 전방에서 목숨을 잃었다.
1938년 일제는 함석헌을 포함한 오산학교 선생들에게 일본말로된 일본역사 교과서를 한국말과 한국역사 대신 교실에서 가르칠 것을 강요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 지시를 따를 수가 없었다. 마침내, 함석헌은 일본 경찰에 의해 '범법자'로 몰릴 지경에 이르렀고, 그는 어쩔 수 없이 그가 사랑하던 오산학교의 교사직을 사임해야 했다.
1938년 봄, 눈물을 흘리며 함석헌은 영원히 오산학교의 교정을 떠나야 했다. 이것이 함석헌의 생애에 최초이자 마지막으로 그가 세속적인 의미의 정규적 직장생활을 한 경우였다. 그후부터 그의 생애의 마지막까지, 함석헌은 한번도 정규적인 직장을 다시 가질 수 없었고 고정적인 수입도 가질 수 없었다. 1938년 한 해에만 약 12만 7천명의 한국인들이 체포 구금되었고, 함석헌을 포함한 많은 반일성향의 교사들이 강제로 혹은 어쩔 수 없이 사임당했다. 오산학교로부터의 사임은 함석헌에게 한때의 실망과 가계의 재정적 어려움을 가중시켰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그의 어려움을 극복하고 한국의 미래를 위한 희망을 잃지 않았던 것 같다. 마치 링컨(Abraham Lincoln: 1809-65)과도 같이 함석헌은 "실망과도 친숙했고 그로 인한 분함도 잘 조절할 수 있었다."
3.3.“민족주의자”,“동양적(東洋的)”, 농사꾼(1938-1945)
“감방대학”
날이 갈수록 일제의 한국교인들에 대한 정책은 그 억압과 탄압이 점점 심해져 갔다. 결국 한국교회의 전국 교단은 완전 제거되었고, 한국교인들은 일제가 만들어 놓은 교원이란 단체에 합병 될 것을 강요받았다.
1940년 2월, 일제는 '창씨개명'을 선포했다. 함석헌은 일본식 이름의 사용을 거부했고, 이로 인해 그와 그 가족의 고난과 어려움은 점점 가중되었다. 약 20%의 한국인들은 창씨개명의 선포에도 불구하고 일본식 이름을 채택하지 않았다. 이에 일본경찰은 창씨개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한국인의 자손들이 학교에 다니지 못하도록 금지 시켰으며, 동시에 이런 한국인들은 일본경찰의 특별감시를 받았다. 그 당시 함석헌이 고등교육을 받은 소수 한국인들 중의 한사람이었던 것을 염두에 두고, 그가 창씨개명을 하고 일본경찰의 정책에 적극협조 했더라면, 세속적 의미에서 그와 그의 가족들은 보다 나은 특별대우와 윤택한 생활을 일본정부로부터 보장받았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강건너 불보듯이 뻔한 그의 세속적인 이득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일제와 타협하지 않고 비협조노선을 택했다.
한편 한국인들의 언론활동에 대하여 일제는 서서히 고삐를 조르기 시작했다. 일제의 언론검열이 강화됨에 따라, 점점 더많은 한국인 언론인들과 작가들은 고난을 받았다. 마침내 1940년 8월에 이르러, 잔존해있던 두 민족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폐간조치를 당했다. 동시에 한국인들은 오직 일본인이 만들어 놓은 일본말로 된 신문과 잡지를 잃도록 강요되었다.
1941년 12월 여세를 몰아 일제는 진주만을 공습했다. 태평양전쟁 중 일제는 소위 '민족총동원령'의 정책을 채택했고, 이 정책은 한국인들의 이미 피폐해있던 생활고를 더욱 가중시켰다. 또한 대부분의 서양선교사들도 이때를 같이하여 한반도 전역에서 축출당했다. 이 단계에 이르러, 한국교인들은 문화적으로 뿐 아니라 정치적으로 일제의 첫 박해의 표적물이 되었다.
개신교의 서양 선교사가 처음 중국이나 일본에 들어왔을 때, 그들은 서구 제국주의의 포함(砲艦)외교 (약소국에 대한 무력 외교)와 상업자본주의의 착취세력을 등에 업고 들어왔다. 그러나 한국에 경우에는, 행운이거나 필연이거나 간에, 그 시대적 상황과 환경이 중국과 일본의 경우와 전혀 달랐다. 비록 조선왕조는 1883년 미국, 영국, 독일, 1884년 러시아, 1886년 프랑스, 1889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과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포함 외교나 상업적 약탈의 피해가 중국이나 일본에 비교해 아주 미미하고 극소한 정도에 불과했다. 그러므로 개신교가 '은둔자의 왕국'인 한반도에 들어왔을 때 상대적으로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한국인들은 서구 제국주의나 서양종교인 기독교의 도래보다는 오히려 일본이 공격적으로 제국주의화 돼가는 것에 더 큰 염려를 느끼고 있었다.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는 다르게, 한국을 식민지화하기 시작한 세력은 서구제국주의나 서양 선교사라기보다는 더욱 잔인하고 가혹한 일본제국주의였다. 이런 역사적인 면을 고려해볼 때, 개신교가 한반도에 들어오게 된 사회 정치적 상황이 근본적으로 중국이나 일본의 경우와 달랐다.
오산학교에서 추방당한 함석헌은 한동안 정주에서 농사를 짓기 시작했다. 또한 과수원 경작하면서 함석헌은 그와 그 가족의 생계를 이루어 나갔다. 곧 함석헌은 일요공부모임을 창설했고, 그 공부모임을 통해 함석헌은 그의 오산학교 시절의 제자들을 가르치고 계몽해가기 시작했다.
1940년 3월, 함석헌의 후배인 김두혁(1903-1993)은 그가 경영하던 평양근교에 있던 송산농사학원의 경영 및 관리를 함석헌에게 부탁했다. 결국 함석헌은 김두혁의 요청을 받아들여 송산으로 이전했다. 농사학원을 인계 받은 함석헌은 교육, 경영, 관리, 농사일등 모든 일을 도맡아 했다. 농사학원은 약 5천평(만 5천 평방미터) 정도의 규모였고 13명정도의 학생들이 함석헌으로부터 여러가지 교육과 지도를 받았다. 이들 중의 한 학생이었던 최진삼은 훗날 함석헌의 사위가 되기도 한다. 매일 아침시간에 함석헌은 학생들에게 성경, 역사, 한국어등을 가르쳤고, 오후에는 모두 밖에 나가 일을 하며 농사를 지었다. 이 시기에 함석헌은 세 가지 분야에 특히 그의 노력을 기울였는데, 첫째는 교육, 둘째는 기독교 신앙, 세 번째는 농사일이었다. 학생들의 수가 13명 정도의 소수에 불과 했기에, 일본경찰도 처음에는 이 농사학원의 문제에 별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결국 1940년 8월 함석헌은 그의 "공산주의적 및 민족주의적 성향"으로 일본 헌병에 의해 체포되었고 1년간 옥고를 치루게 된다. 함석헌이 수감되자 송산농사학원은 곧 폐교되었고, 결과적으로 그가 농사학원을 인계 받은 후 약 다섯달 밖에 운영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함석헌이 갑자기 수감된 소식을 들은 그의 부친 함형택은 큰 충격을 받은 것 같다. 함석헌이 수감된 후 석 달 만인 1940년 11월 함형택은 운명했다. 함석헌은 1년 후 감옥에서 석방되고 나서야 그의 부친이 돌아가신 것을 알았고, 또한 자신의 가족이 얼마나 심한 생활고를 겪고 있는지 접할 수 있었다. 함석헌의 모친과 아내 그리고 일곱명의 자녀들은 빚더미에 쌓여서 겨우 생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심한 빈곤과 그에 따른 가족의 비참한 생활고를 목격한 함석헌은, 스스로에게 과연 자신이 택한 길이 가족의 편안한 삶을 위해 잘한 일인지 자문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생활고의 어려움에 처했던 다른 세계의 민족지도자들에게도 한때 제기되었던 자문이었으리라: "과연 민족의 복지와 안녕이 한 가정의 복지와 안녕에 항상 우선해야만 하는가?" 이제 함석헌은 일제에 의해 폐교 조치된 송산농사학원으로 돌아갈 수도 없었다. 마치 그 앞의 모든 것은 먼지와 재로만 변한 듯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빚더미에 오른 가족을 구하고자 함석헌은 그의 부친이 물려놓은 땅을 경작하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그의 표현대로 아예 시골 농사꾼이 된 셈이었다. 이때부터 그는 양복대신 또한 한복을 입기 시작했다. 이제 더 큰 고난이 함석헌과 식민지 한국인들 앞에 기다리고 있었다.
1942년 일제는 뛰어난 한글학회 학자 30여명이 민족의식을 고취했다는 죄목으로 그 전원을 체포 및 검거했다. 이 학자들은 모진 고문을 받았고 그들 중에 학자 이연재와 한정은은 고문의 후유증으로 옥사했다. 많은 한국인들은 또한 치안 방해 및 동란 교사의 죄목으로 유죄선고를 받고 수감되었다. 특별히 409명의 한국학생들은 소위 "사상범"이란 죄명으로 체포되었다. 1940년과 1944년 사이에 함석헌과 김교신을 포함해 5,600여명의 한국인들이 "사상범"으로 옥고를 치루었다.
1942년 3월 {성서조선}은 158호를 마지막으로 폐간 조치를 당했다. 두 달 후인 1942년 5월엔, 함석헌과 김교신을 포함해 {성서조선}을 발행하던 열 한 명의 동료들이 다시 일본경찰에 체포 구금되었다. 함석헌과 그 동료들은 서울에 있는 서대문 형무소로 호송되었고 거기서 다시 1년간 옥고를 치루었다. 일제의 법에 의해 함석헌은 이제 '범법자'가 된 것이다. 그가 어떤 범죄행위를 해서 범법자가 되었다기보다는, 그가 믿고 있는 신념이나 의식이 일제가 원하는 것과 달랐기 때문이다. 몇 백 명의 {성서조선}의 독자들도 총 검거 되어서 구속되었다. 이 시기의 그의 수감 경험을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그 당시의 일본제국주의자들은 한국인종을 지상으로부터 완전히 뿌리 뽑아 버리기 위해 가장 가혹한 수단을 취했습니다. 1943년에 그들은 {성서조선}의 전 독자들을 체포했습니다. 우리 편집자들에겐 위험한 사상을 유포하고 다닌다는 혐의를 씌워서 잡지 자체를 폐간시켜 버렸습니다. 그리고 우리들은 1년간 옥고를 치루어야 했습니다."
전화위복이라는 속담처럼 함석헌은 자신에게 주어진 화를 통해서 그의 내적 힘을 가꾸는 좋은 기회로 삼았고, 좁은 감옥의 천장 밑에서 많은 독서를 함으로서 그의 지식의 폭을 넓히려고 힘썼다. 특별히 러스킨 (John Ruskin: 1819-1900)과 톨스토이 (Leo Tolstoy: 1828-1910)의 저서를 감동 깊게 읽으며 그는 감옥을 '인생의 대학'처럼 여겼다. 러스킨은 그의 독실한 성경 공부를 통해서 산업혁명이 한창이던 19세기 영국 사회에 비전과 희망을 제시해 주는 사회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수행했다. 함석헌 역시 일본제국주의가 난무하던 1940년대 식민지 한국인들에겐 비전과 희망을 제시해 주고, 일제의 부당한 식민정책에 대해선 사회 비평가로서의 역할을 수행 하고자 노력했던 것 같다. 그러나 러스킨이 옥스포드 대학교의 순수 예술학과 교수를 지내면서, 미술에 심취하고 예술을 통해 진리를 발견 하고자 온 정열을 바쳤던 반면, 함석헌은 그의 미술에 대한 관심이 상당히 깊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술에만 전적으로 심취 할 수 있는 '사치와 특권'을 누릴 수가 없었다. 일제하에서 사회 정치적으로 열악한 조국의 긴박한 상황이 함석헌에게 그런 마음의 여유를 허락하지 않은 것 같다.
러스킨은 1860년에 출판한 그의 저서 {이 마지막 온 자에게까지도} (Unto This Last)를 통해 고용주가 그 고용인에 대한 책임성을 강조했고, 이런 러스킨의 사상은 후에 영국 노동당의 창당 이념에 절대적 영향을 미쳤다. 함석헌이 공산주의의 유물론적사관이나 자본주의적 상업주의 생리에 공감을 느끼지 않을 것을 고려할 때, 그 또한 러스킨의 사회-경제관에 많은 공감을 얻은 것으로 여겨진다. 함석헌이 자본주의적 사회체계나 세계관에 대해서 왜 회의를 품을 수밖에 없었는가에 대해서는 이 논문의 뒷부분에서 더 언급할 것이다.
톨스토이는 인도주의적 신앙에 대한 그의 믿음을 그가 저술한 방대한 저서를 통해 제정 러시아 사회에 보급시키고자 했다. 아울러 톨스토이는 인간이 만들어 놓은 제도, 이를테면 정부나 교회조직의 권위를 지지하기를 거부했다. 함석헌이 교회나 국가조직에 대해 회의적 관점을 갖고 있던 것도 톨스토이의 인도주의를 바탕으로 한 무정부주의적 사상에 공감을 느낀 것이기 때문으로 짐작된다. 또한 톨스토이가 {부활} 이나 {전쟁과 평화}등의 저서를 통해 인간의 도덕적 가치와 문제에 관심을 집중한 것처럼, 함석헌도 인간의 가치를 도덕의 가치로 보았고, 인간이란 존재를 무엇보다도 도덕적 존재로 파악했다. 톨스토이는 물질위주적인 사회가 인간의 자연적이고 순수한 본성에 해를 끼치지 않을까 염려했고, 동시에 자연인으로서의 투박한 인간상과 야박한 사회의 오염된 부산물로서의 닳고닳은 인간상의 불일치성을 놓고 갈등을 느꼈다. 톨스토이의 자연적인 인간론은 노자가 표현한 "다듬지 않은 나무"로서의 자연적인 인간론과 많은 일치점이 있는 듯하다.
노자에 따르면, 다듬지 않은 자연적 소박함을 통해 인간은 참된 자아, 진실된 자신의 모습을 성취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소위 문명이나 세련된 사회라는 것은 인간을 약아빠지고 지나치게 기교적인 한낱 부속품으로 전락시킬 수가 있고, 결국 이것은 타고난 인간의 고유한 전인성(全人成)과 손상되지 않은 순진한 본성을 빼앗아 갈 수 있다는 것이 노자의 자연과 인간에 대한 사상이다. 톨스토이가 첫 유럽인으로서 노자의 '무위'사상의 영향을 받았다는 것을 고려할 때 함석헌이 톨스토이의 인간관이나 자연관에 많은 사상적 공감을 느끼게 된 것이 결코 놀랄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두침침한 감옥 안에서, 함석헌은 또한 반야경(般若經), 법화경(法華經), 무량수경(無量壽經), 금강경(金剛經)등 의 다양한 불교서적을 읽었다. 함석헌이 이 시기에 불경에 대한 그의 입장을 기록해놓은 것이 없기 때문에 그가 다양한 불교서적의 독서를 통해서 불교에 대해 어떤 관점을 가졌는가를 아는 것은 어렵다. 그러나 그로부터 10여 년 후인 1954년, 함석헌이 기독교의 속죄론에 의문을 제기 했을 때, 그의 사상에 불교의 영향이 반영 돼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때 함석헌의 속죄론에 관한 글을 살펴보자:
"속죄란 말의 신학상 용어는 영어로 하면 atonement 인데 그 말이 이 뜻을 잘 표시합니다. atonement 란 at-one-ment 즉 '하나 됨'이란 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동일 인격의 자각입니다. 예수와 내가 딴 사람이 아니요, 인생과 우주가 서로 딴 것이 아님을 실감하게 되는 자리입니다."
1970년에 함석헌이 쓴 글을 보면 그의 속죄론에 대한 불교적 영향이 더욱 확실하다: "대속이 되려면 예수와 내가 딴 인격이 아니란 체험엘 들어가고야 됩니다." {불경} 역시 부처와 중생간의 하나됨, 중생 안에 항상 내재해 있는 불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모든 중생은 태초부터 불성을 그 안에 지니고 있다. 마치 태양이 구름을 제치고 나타나는 것처럼, 혹은 마치 거울을 문질렀을 때 그것이 본래의 밝음과 깨끗함을 회복하는 것처럼..."
{불경}을 보면 함석헌이 기독교 속죄론 혹은 대속론의 교리를 재해석하는데 있어서 불교적 영향이 많이 반영되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불교의 법상학파(Fa-hsiang School)에 따르면, 순수하고 깨끗한 생각은 불순하고 더럽혀진 생각을 보다 높은 진리의 상태로 이끌고 그 상태에서는 주체와 객체의 구별이 없이 모든 것이 하나로 융합 되어있다고 한다 . 불교의 가르침은 인간 마음의 양면 (깨끗한 마음과 더럽혀진 마음)을 가르치지만, 그러나 마음 그 자체는 둘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그 마음의 활동 상태에 따라 두 가지로 분류될 뿐이다: "깨끗한 마음은 우리 본성으로부터 나오는 깨끗한 마음이다. 그리고 우리 본성은 어떤 점으로나 전혀 부처님의 본성과 다르지 않다."
{도덕경}과 {장자}를 읽으면서 함석헌은 또한 도가(道家)의 평화주의 사상에 많은 감명을 받았다. '감방대학'에서의 폭넓은 독서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나 불교나 도교를 포함한 모든 종교는 그 근본에서는 하나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산의 정상을 올라간 등산객은 정상에 오르는 길이 한길만이 아니라는 것을 볼 수 있지 않을까.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총체적이고 포괄적 인식은 훗날 그가 서구의 기독교와 동양철학을 사상적으로 융합하는데 근본적 원리가 되었던 것 같다.
네 번째 마당: "해방된" 조국에서 (1945-1961)
이 마당에서는 제2차 세계대전후, 1945년 부터 1961년까지의 함석헌의 삶을 살펴 볼 것이다. 2차대전 직후 남한과 북한은 각각 미군정과 소련군정하에 놓이게 된다. 동서냉전의 정점(頂点)인 6.25전쟁을 거쳐 이승만과 장면의 제1공화국과 제2공화국은 흥망성쇠를 겪는다. 해방이 왔을 때 함석헌은 평양근교에서 농사를 짓고 있었다. 해방이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해방된 조국"에서 함석헌은 소련군정에 의해서 다시 옥고를 치루는 자신을 발견한다. 결국 자유를 찾아 함석헌은 월남의 길을 택하지만, 자유스러워할 남한에서조차 그는 또다시 감옥행을 경험하게 된다.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위해 혼혈을 바친 함석헌이 일본경찰이나 소련군인의 손에 의해서 뿐 아니라, 같은 동포인 '자유당'의 손에 의해 옥고를 치루게 되는 것이다. 참예언자는 결코 그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것일까?
4.1. 해방 그리고 문교부장으로(1945-1947)
2차 세계대전중 한국은 일제에 의해 억압당한 나라중의 하나였다. 그러나 종전후 미국과 소련의 갈등이 고조화 되고 냉전이 심화되어감에 따라 한반도에는 인위적 장벽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연합국에 의해서 한국 민족은 둘로 갈라졌다. 남한은 미군정의 손안에 들어갔고, 북한은 소련의 영향권아래 흡수되었다. 1945년 한국사회는 보수와 진보세력, 좌익과 우익, 전통세대와 혁신세대등의 충돌로 혼란의 도가니 안에 있었다. 미국식 자본주의 체제를 중심으로한 남한과 소련식 공산주의 제도를 위주로한 북한사이의 정치-군사적 갈등은 깊어만 갔다. 더구나 일제가 이론적으로는 한반도에서 퇴각했건만, 실제로는 남한의 지주와 보수층은 여전히 일본과 친일파의 영향권아래 놓여 있었다는 것이 남북한의 갈등을 더욱 악화 시켰다. 그런 상태 아래서 대다수 한국인들의 미래는 불투명했다.
북한이 일제의 손아귀에서 해방되었을 때, 북한땅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그룹은 기독교계 민족주의자들이었고, 이들 중 가장 영향력 있는 민족 지도자는 고당 조만식이었다. 그러나 이 상황은 소련의 붉은 군대가 평양에 입성하자마자 돌변하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소련의 후원과 지지를 받은 공산주의 세력이 기독교 세력을 제치고 무력으로 북한사회의 전반적 주도권을 장악했다. 소련군대는 1945년 8월 12일 블라디보스톡을 거쳐 이미 일본이 패망하기 직전부터 북한땅에 발을 들여놓았다. 45년 8월 24일 소련군대는 이미 평양에 들어왔고 즉시 군정을 위한 사령부를 설립했다. 이때부터, 북한의 기독교인은 소련군대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서 숙청의 표적이 되어갔다.
1945년 한반도의 기독교인은 전 한국인의 2%에 불과했지만, 특별히 북한의 경우, 기독교인들은 어느 그룹보다도 가장 활발한 조직망과 활동력을 갖추고 있었다. 주목할 만한 것은 평양의 기독교인들이 미국을 중심으로한 서구 선교사들과 일제시대부터 오랜 친분과 연결을 유지해 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평양의 기독교인들은 미국식 민주주의의 형태로 남북한이 하나 되기를 기원했다. 반면, 소련의 영향을 받은 북한의 공산세력은 한반도가 소련의 영향아래 공산주의체제로 통일되기를 희망했다. 일반적으로 이 당시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반일세력 이었을 뿐 아니라 동시에 반공세력이었다. 그러므로 조만식과 함석헌을 포함한 많은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1940년 말에 이르러 소련의 지지를 받은 공산주의 세력에 의해 북한에서 철저히 숙청 혹은 제거되었다.
소련군대는 일제시대 기간 중 소련에 피난해 있던 김일성을 포함한 3만명의 한국인들을 데리고 북한에 들어왔다. 미국이 제안한 38도선 안건은 소련과 북한의 좌익측에서도 환영했다. 소련군대와 공산주의의 총칼 앞에 북한의 기독교인과 우익세력은 발 붙일 곳을 잃어갔다. 북한의 우익세력은 38이남의 미군정으로부터 지지 받을 입장이 못 되었고 북한자체내에 지지기반도 빈약했다. 반면에 막강한 소련군대의 지지를 받은 북한 공산당은 손쉽게 반대세력을 제거해가며 조직력과 통치기반을 강화해 나갔다.
해방이 왔을 때, 함석헌은 직업상으로는 '전문 농사꾼'에 불과했지만, 그의 항일운동에 대한 명성은 일제시대부터 북한에서는 잘 알려진 편이었고, 북한의 씨 들은 그런 그의 리더십을 기대했다. 함석헌에게는 그런 씨 들의 기대감이 전혀 뜻밖이었다: "해방이 갑자기 왔을때 나는 씨 들이 나를 그들의 지도자로 내 세우려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씨 들은 나를 가르키며 자랑스레 말했습니다, '감옥에 가는 것이 저이의 직업이야', 그리고 나는 이러한 씨 들을 이끌도록 선택된 것입니다." 일제시대를 통해 4번에 걸친 그의 '감방대학 경력'과 창씨개명을 끝까지 거부한 그의 고집이 북한의 씨 들에게 강한 인상을 준 것같다.
일제시대를 통해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이 열성적인 민족주의자로서의 성향이 강했던 것을 고려하면, 북한의 씨 들이 기독교 지식인인 함석헌에게 어떤 기대감을 가졌다는 것이 그리 뜻밖의 일만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함석헌을 포함한 기독교인들이 비기독교인인 대다수의 한국인들보다 '현대적인 교육' 혹은 서구적인 스타일의 교육을 받을 기회가 더 많았다는 것이 주목할만한 사실중의 하나다. 특히 기독교계 지식인 조만식은 한국인의 사회 및 정치문화 향상을 위한 선구자였다. 또한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의 세속적 배경이나 가문은 상류층이라기보다는 중하층 출신이 많았음에도, 그들은 교육, 문화, 사회운동의 지도자역할을 담당해왔다.
이러한 기독교인들의 뿌리깊은 영향을 염두에 둔 소련군대는 조직적 탄압, 회유, 혹은 폭력을 통해서 기독교 지도자의 영향력을 약화시킴과 동시에 공산당의 입지를 강화 시켰다. 본격적인 기독교인들과 공산주의자들의 충돌은 시작되었다. 조만식이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중심으로 창설한 조선민주당은 즉시 공산당으로부터 위협을 받았다. 동시에 소련군대는 친일파를 철저히 축출했고, 북한전역을 하루아침에 소련식 인민위원회 행정체제로 변혁했다. 결과적으로 전 북한의 사회-정치적 조직은 소련군대의 행정체제하에 개편되거나 폐쇄되었다.
북한전역의 신속한 공산화를 목표로, 초창기의 소련군정은 기독교 민족주의자들을 그들의 행정체제로 흡수해 이용하자는 전략을 세웠다. 특별히 일제시대 기간 중 독립운동에 헌신한 조만식이나 함석헌 등을 임용함으로서 일반 북한시민들로부터 지지를 확보하자는 것이 소련군정의 계산이었다. 결국 조만식은 소련군정이 만들어 놓은 임시 인민위원회의 고문으로 추대되었고 함석헌은 평안북도 지역의 문교부장으로 임명되었다.
함석헌은 그의 "종교적 중립성"때문에 인민 위원회가 그를 문교부장으로 임명했다고 생각했다. 함석헌은 그 자신을 "정치에는 적절하지 않은 사람"으로 생각했고, 그래서 처음에는 이러한 인민위원회의 권유를 거절했다. 그리고 함석헌은 공적인 자리에 앉거나 위치를 갖는것은 자신의 성격과 맞지않을 것으로 여겼다. 그러나 그의 거절의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주변인척들과 인민위원회에서는 계속 그에게 문교부장의 위치를 받아들일 것을 종용했다. 결국 함석헌은 "정치적으로 혼란의 시기에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는 것이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마지못해 문교부장의 직책을 수락했다. 그러나 그후 곧 축하식에 참석하게된 함석헌은 "벌써 모든 것이 짜여진" 상황을 깨닫고 그가 공적인 자리를 수락한 것을 후회하기 시작했다.
한편 소련군정은 조만식과 함석헌을 위주로 한 기독교 민족주의자 세력이 그들의 정책에 협조하지 않는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 민족진영으로부터 협조를 기대할 수 없게된 소련군정은 노골적인 공포정치와 무력을 통해서 그들의 북한 공산화 정책에 박차를 가했다. 동시에 소련군대는 총칼로 한국인들의 재산을 몰수했으며, 평양시내에서 약탈과 강간을 자행했다. 해방된 지 한달반 안에, 조만식에 협조한 상당수의 민족주의자들은 거의 모두 소련군정의 지지를 받은 북한 공산당에 의해 목숨을 잃었다.
정치적 살육이 자행되는 와중인 1945년 10월 14일, 소련군정은 러시아 붉은군대 소속의 김일성소령을 "민족의 영웅"으로 평양시민 앞에 소개했다. 즉시 김일성은 4530명의 당원으로 구성된 북한공산당의 서기장직에 임명되었다. 소련군대의 힘을 뒤에 업은 김일성은 공산당의 세력을 북한전역으로 확산시켜 나갔다. 독재적인 공산당의 정책은 민족진영으로부터 거센 반발을 받았고, 결국 민족진영과 공산진영은 무력충돌을 겪었다. 급기야 1945년 11월 23일 사태는 심각해져갔다. 무자비한 공산당의 정책에 반기를 든 학생들이 신의주에서 반대 데모를 벌였다. 약 5천명의 학생과 민간인들은 반공구호를 외치며 거리로 나섰다. 데모행진을 하는 군중을 향해 소련군대와 공산주의자들은 사격으로 응했고, 현장에서 23명의 민족진영 학생들이 즉사했고, 27명은 중상, 그리고 80여명은 소련군대와 공산주의자들에게 체포되었다.
신의주학생의거에 대한 소련군대의 잔악한 진압에 분노한 청년학생들과, 공장노동자들은 무기를 들고 공산당에 맞섰다. 그러나 막강한 소련군대와 공산주의자의 총칼 앞에 천여명 이상의 학생과 노동자들이 목숨을 잃었다. 김일성은 사태를 수습하고 공산진영과 민주진영의 갈등을 해소하고자 신의주를 방문했다. 그러나 민주진영과의 화해와 협상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김일성은 강경책을 채택하기로 결정했다. 따라서 1945년 11월부터 1946년 3월 사이에 민주진영은 소련군대와 공산진영에 의해 대대적인 숙청을 당했다. 이러한 소련군대와 공산당의 억압정책에 맞서 학생들과 시민들이 간헐적인 데모나 반란을 일으키지만, 수백명이 또다시 목숨을 잃는 사태를 초래하고 소련군정은 계엄령을 선포했다.
신의주학생의거 당시 함석헌은 문교부장이었다. 비록 함석헌 자신이 학생의거의 직접적인 주동자나 배후조종자는 아니었지만, 그 자신이 공산당원이 아니었고 민주진영의 기독교인이었기에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눈에 가시같은 존재로 여겨졌던 것 같다. 공산주의자들의 시각엔 기독교인이란 곧 미국선교사들과 가까운, 친미파를 의미했다. 결국 함석헌은 신의주학생의거에 책임자로서 체포되었고, 체포즉시 현장에서 몰매를 맞았다. 의식을 회복한 함석헌은 소련군대의 지휘아래 감방의 철장 안에 갇혀 있는 자신을 발견했다. 소련군대는 함석헌의 집과 재산도 압수했다. 그러므로서 함석헌의 노모와, 아내 그리고 일곱명의 자녀들은 빈곤상태에 처하게 되었다. 이제부터 함석헌과 그의 가족은 삶이라기보다는 생존을 위해 투쟁해야할 상황에 처해졌다.
그의 외적인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감옥 안에서 함석헌은 그의 내적인 마음의 평정를 찾고자 노력했다. 그는 그 자신에게 물었을 것이다: "조국이 해방이 되었는데 나는 왜 아직도 감옥에 있나? 조국의 운명은 어떻게 될 것인가?" 혼란한 마음을 차분하게 안정시키기 위해서 함석헌은 어두컴컴한 감옥 안에서 시를 쓰기 시작했다. 교도관의 감시의 눈을 피하기 위해 그는 직설적인 글보다는 은유적이고 간접적으로 시로서 그의 괴로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러므로서,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함석헌은 불가피하게 '시인'이 된 셈이다.
이때 함석헌이 교도관의 눈을 피해가며 쓴 시들은 1953년 {수평선 너머}라는 제목으로 출판되었다. 당시 그가 쓴 시를 한편 참고함으로써 그의 종교관을 살펴볼 수 있을 것이다. [산]이라는 시를 통해 그는 절대자 하느님의 존재를 흔들리지 않는 확고한 부동의 존재로 파악한 것 같다:
산
나는 그대를 나무랐소이다
물어도 대답도 않는다 나무랐소이다.
그대겐 묵묵히 서 있음이 도리어 대답인 걸
나는 모르고 나무랐소이다
나는 그대를 비웃었소이다
끄들어도 꼼짝도 못한다 비웃었소이다
그대겐 죽은 듯이 앉았음이 도리어 표정인 걸
나는 모르고 비웃었소이다.
나는 그대를 의심했소이다
무릎에 올라가도 안아도 안 준다 의심했소이다
그대겐 내버려둠이 도리어 감춰줌인 걸
나는 모르고 의심했소이다
크신 그대
높으신 그대
무거운 그대
은근한 그대
나를 그대처럼 만드소서!
그대와 마주앉게 하소서!
그대 속에 눕게 하소서
그대 위에 서게 하소서!
묵묵하고 초연한 하늘과 산을 우러러보고, 함석헌은 복잡다난한 인간사의 문제로부터 초월해 있는 절대자를 보았던 것 같다. 하느님은 선인에게나 악인에게나 모두 빛과 비를 공평히 내려 주시니, 함석헌은 이러한 절대자의 본성을 중립적이고 편견이 없는 존재로 파악한 것처럼 보인다.
한편 1945년 12월 17일, 김일성은 북한 공산당의 수령의 자리에 취임했고, 그로부터 두달 후에는 북한 인민위원회의 의장이 되었다. 김일성은 공산정권에 비협조적이고 설득이 불가능하다고 본 조만식과 함석헌등 민주진영 인사들을 인민위원회직으로부터 대거 추방해버렸다. 1946년 1월에 이르러 민주진영은 완전히 공산당의 총칼에 의해 와해되어 버렸고, 조만식을 제외한 조선민주당의 거의 모든 임원들은 월남했다. 그로부터 두달 후인 1946년 3월 13일 함흥에서 공산정권에 반대한 학생데모가 벌어졌다. 그러나 이 데모는 즉석에서 출동한 소련군대와 공산군의 무력에 의해 무참히 진압당했다. 이때부터 소련군대의 힘을 뒤에 업은 김일성은 본격적인 북한공산화의 작업에 들어갔다.
1946년 초 소련군정은 벌써 한국인 2만 여명과 함께 북한지역에 전투경찰대를 편성했고, 1946년 8월에 이르러는 공식적으로 북한군대를 창설했다. 군경을 확보했음에도 불구하고, 소련군대와 공산당은 민주진영쪽으로부터의 반란을 염려했다. 민주진영의 반발과 불만을 사전에 탐지해서 그들의 반란을 미리 예방하자는 의도아래, 공산당은 같은 민주진영인사들을 첩자로 이용했다. 함석헌이 두달형을 살고 석방되자 소련군대는 그에게 공산당을 위한 정탐군이 되도록 강력히 종용했다. 함석헌이 아무런 정보도 제공해 주지 않자 소련군정은 1946년 12월 24일 또다시 그를 감옥에 집어넣었다. 한달 후인 1947년 1월 함석헌을 석방시키며 소련군정은 계속해서 그에게 공산당을 위한 정탐군 노릇을 하라고 강요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그 자신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서 그의 친구나 동료들을 배신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감옥에서 다시 풀려나자마자 함석헌은 월남할 것을 결심했다. 1947년 2월 26일, 함석헌은 그의 노모와 가족들을 뒤로하고 언제 다시 돌아올지도 모른 채 그의 고향을 떠났다. 약 1년 후인 1948년, 함석헌은 나중에 월남한 그의 아내와 다섯 자녀들과 남한에서 재회했다. 그러나 그의 노모, 장남과 장녀는 월남에 실패했다. 그때부터 그의 인생의 마지막 날까지 함석헌은 그의 노모, 장남 그리고 장녀를 영원히 다시 보지 못했다. 남한 오류동에서 함석헌과 그의 월남한 가족은 근근히 농사로 생계를 이어 나갔다.
1947년은 북한의 기독교인에게는 비극의 해였다. 평양신학교 교장 김인준과 저명한 북한 교회 지도자 이정심(1901-1947)은 소련군인에 의해 모진 고문을 받고 둘 다 감옥 안에서 순교했다. 함석헌이 월남하지 못했더라면 그도 소련군의 손에 의해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평양에는 한때 100여개 이상의 교회가 있었고, 아시아에서 가장 크고 활발한 개신교 선교사들이 집결해 있었던 곳이기도 하다. 그러나 소련군대의 점령하에 평양의 기독교인들은 순교하거나 월남할 수밖에 없었다. 남아있던 북한의 기독교인들은 공산당의 세뇌의 대상으로 복종하든지 아니면 조만식처럼 죽음의 길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북한의 소련군정과 공산정권하에서 어려움을 참다 못한 많은 북한사람들은 월남의 길을 택했다. 1945년부터 1947년까지 남북한의 정치 사회적 혼란은 많은 한국인들에게 월남하거나 월북할 기회를 마련해 주었다. 1945년부터 1948년 사이 김일성은 소련군대의 힘을 등에 업고 북한 공산당의 서기장과 동시에 북조선 인민 공화국의 수령이 되었다. 스탈린이 소련 공산당 서기장과 동시에 국가수령이 되는데에 17년이 걸렸던 것을 고려하면 얼마나 소련군대가 북한에서 강력하게 김일성을 지지하고 후원했는가를 짐작할 수 있다. 1948년 9월, 마침내 북조선 인민 공화국이 정식으로 설립되었다.
4.2.“해방된” 남한에서 “광야의 소리”로(1947-1961)
남한의 사회 - 정치적 상황
1947년 3월 17일 새벽 함석헌은 마침내 남한땅에 도착했다. 함석헌이 남한에 왔을 때 그는 남한의 사회, 정치적 상황에 대해서 상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지는 못했던 것 같다. 그는 남한은 그저 "자유대한" 이려니 하고 생각했는 지도 모른다. 1947년의 남한의 사회-정치적 상황 또한 혼란의 도가니였다. 미군정과 남한 민족진영과의 사이도 원만치 않았다.
2차대전직후의 남한은 북한보다 훨씬 보수적인 사회였고 남한의 수구세력은 민주주의와 자유화에는 별관심이 없이 자기들의 현상유지와 기득권 지키기에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1945년 남한은 여전히 준봉건사회였고, 조선시대이래 한반도의 영향력있는 지주들은 거의 남한에 집결돼 있었다. 남한은 수도인 서울은 조선시대를 통해 보수화된 유교의 중심지였을 뿐 아니라, 당파싸움과 군력추구의 각축장이었다. 일제시대를 통해 일본식민지 정권과 가깝게 지내던 지주들 중엔 해방 후에도 친일파행세를 하며 일본과 가까이 지내려고 하는 세력이 팽배했다. 남한의 지주들이 일본 식민지 정권에 대해 특별한 애착을 가졌다고는 볼 수 없지만, 어떤 면에서 일제시대를 통해 그들은 일본식민지 정권의 힘을 빌어 자기들의 영향력을 넓힐 수 있었거나 최소한 친일행각을 통해서 자신들의 기득권 유지와 개인적 이득을 차릴 수 있었다.
북한의 소련군정과 비교해서, 남한의 미군정은 남한을 임시로라도 통치할 최소한의 준비도 갖추지 않았다. 1945년 하지장군을 비롯한 미군정은 남한에 들어오기 전, 한국의 역사, 언어, 문화등 한국문제에 대해 전혀 사전지식이 없었다. 미군정 요원 중 한국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는 것이 또한 주목할 만한 사실이다. 이것은 전후 미군정이 일본이나 독일을 통치할 때와의 경우와 아주 상반된다.
1945년 9월 8일 미군은 인천항에 도착했다. 한국인들은 미군을 환영하기 위해 꽃을 들고 앞으로 나갔다. 일본군은 한국인 환영단들에게 사격을 가했으며 5명의 한국인이 그자리에서 즉사했고 9명은 중상을 입었다. 하지장군은 비무장한 민간인 한국인 환영단을 무단 사격한 일본군인들을 칭찬했고 일본장교를 즉석해서 진급시켰다. 동시에 한국인 환영단들은 그자리에서 총과 칼을 앞세운 일본군인들에 의해 쫓겨났고, 하지는 한국인들은 제외시키고 일본인들과만 환영행사를 가졌다. 인천항에 상륙한 하지는 미국 뉴욕 타임즈 기자와 회견을 갖고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한국인들과 일본인들 사이에 조그만 사고가 있었습니다. 일본군이 한국인 환영단에 사격을 가했습니다. 본인은 한국인들에게 미군의 상륙을 방해하지 말고 멀리 떨어져 있으라고 지시했습니다."
하지는 곧이어 전 일본 행정부는 계속해서 남한에 주둔하며 한국인들의 질서유지를 책임질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 성명서를 들은 한국인들은 하지와 미군정을 비판하기 시작했고 동시에 반미 감정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하지는 한국인들에게 "진정하라"고 거듭 지시를 내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지의 미군정은 몇몇 친일파 한국인들만 빼놓고, 대다수의 한국인들로부터 금방 고립되어갔다. 마침내 트루만 대통령은 남한의 반미감정 확산을 두려워한 나머지 하지장군에게 일본인들을 조속한 시일 내에 해임시키고 한국인들로 대체시키라고 지시했다.
미군정은 이러한 불길하고 엉성한 상황 속에서 남한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친일파들과 지주를 중심으로한 소수의 극우세력들만 미군정과 아주 가깝게 밀착 되어있었다. 이러므로서 1945년부터 1948년까지 3년 동안 미군정은 대다수의 한국인들에게 별로 신뢰 할만한 인상을 남기지 못했다. 미국은 한국을 냉전시대의 소련의 팽창을 막기 위한 완충지대 정도로 여겼고, 그러므로 미국과 일본 그리고 미군정요원과 친일파 한국인은 같은 이해관계를 바탕으로 결속했다. 대다수 한국인들의 의사를 통째로 도외시한 미군정의 통치방법은 완전 실패작이었다.
친일파 한인과 미군정요원은 소련과 북한을 대항해 맹목적인 반공이념으로 뭉쳐 있었다. 심지어 친일파 한인 중에도 미군정의 친일파를 향한 '관대한' 정책이 그 정도가 지나쳤다고 본 이가 있었다. 미군장교인 리머 아고(Reamer Argo)는 일제시대 한인 순사이었던 이형군에게 남한의 경찰창립을 위해 적극적으로 일해 달라고 수차에 걸쳐 부탁했다. 이형군의 대답이 걸작이었다. "일본제국주의를 위해 순사 노릇을 했던 본인이 어떻게 해방된 한국의 경찰로서 일할 수 있겠습니까. 안됩니다." 아고는 일축해서 대답했다: "당신과 같이 일제시대에 경험있던 사람이 참가하지 않는다면 누가 참가하겠소?"
1946년 미군정사령관 하지는 또 다른 친일파 경찰요원 이었던 김석원에게 이렇게 말했다: "남한의 경찰이 잘돼갑니다. 남한의 경찰은 또한 남한의 군대가 될 것입니다. 당신이 일본군대에서 일하던 경험을 살려서 남한의 군 창건을 위해 일해 주시오"
1948년 8월15일 이승만을 초대 대통령으로 남한만의 단독국가인 대한민국이 창립되었다. 같은해 가을, 이승만은 중국 국민당 장개석의 지지를 받고있는 김구세력을 견제하고, 9월에 창립된 북조선 인민 공화국에 대항한다는 목적으로, 역시 김석원에게 남한 군대의 총사령관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공산주의 이론과 사상을 접해본 경험이 없는 이승만은 반공을 위해서라면 친일파 임용은 물론 어떤 댓가라도 치룰 각오가 되어있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이승만은 심지어 그의 의견과 주장에 반대하는 사람들을 '빨갱이'로 몰았다. 미국의 입장처럼 소련을 견제한다는 목적아래 이승만은 많은 친일파 경찰요원들을 군과 경찰의 요직에 임명했다. 결과적으로 제1공화국을 통해 남한의 군과 경찰뿐 아니라 행정부서 및 정부각처의 주요직은 친일파들로 득세했다.
1940년대 후반에 이르러, 남한 사회는 혼란과 소동의 위태로운 판국에 처해 있었다. 해방후 좌우익 세력에 의한 테러와 암살행위가 끊이지 않았다. 한민당의 송진우(1890-1945)와 장덕수(1895-1947), 근로인민당의 여운형(1885-1947), 한국독립당의 김구(1876-1949)등은 모두 1945년부터 1949년 사이에 암살 당했다. 그러나 안두희를 포함한 정치 암살범들은 이승만에 의해서 몇 달 후에 사면되었고 심지어 진급포상 등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비록 이승만은 윌슨(Woodrow Wilson: 1856-1924; 미국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 제 28대 대통령)의 제자였고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미국의 자유와 민주주의 상징인 프린스턴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사람이었지만, 그의 통치 방식은 중세의 유럽 전제군주와 별로 다르지 않았다. 그의 목적을 위해서 이승만은 폭력은 물론 온갖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국회의원 총선거가 있던 1948년, 이승만이 동원한 정치깡패에 의해 147명의 정치 운동원들이 맞아 죽었고, 600명 이상이 중상을 입었다. 남한의 시민들은 이승만이 동원한 깡패경찰과 정치깡패의 테러 아래서 공포와 분노에 떨었다. 정치적 반대자를 가차없이 제거해 버린다는 점에서 이승만은 김일성과 별로 다른 바가 없었다. 1948년 9월과 1949년 5월 사이에, 이승만은 자신의 정책에 비판적인 남한의 주요 신문사 여덟개를 폐쇄시켰다. 1948년 11월 이승만 정권은 국가 보안법을 제정하므로서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남한 시민들의 기대를 묵살시켰다. 서울신문의 언론인 하경덕 (1897-1951: 한국인으로서는 처음으로 미국 하바드 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받았음)을 포함해 많은 언론인들과 편집자들은 국가 보안법에 의해서 해직, 구금되거나 체포되었다. 1949년 한 해만해도 118,621명이 (국회의원 16명을 포함) 국가 보안법에 의해 체포되었다.
남한의 함석헌
자유와 민주주의를 기대하고 월남한 함석헌은 이승만의 폭력정치를 목격하고 큰 실망에 빠졌다. 그러나 함석헌은 실의에만 머무르지 않았다. 곧 그는 남한 사회의 저하된 사기를 부양하기 위해 서울대학교 학생들과 연희전문 학생들을 대상으로 성경공부 모임을 설립했다. 1948년부터는 남한의 전체 씨 을 위해 서울 YMCA와 충정장로교회를 비롯해, 부산, 마산, 원주등 주요 도시를 다니며 정기적으로 일요종교강의 모임을 열었다.
남한의 정치-사회적 부패와 혼란상황으로부터 실망을 느끼고, 사회문제에 무관심하고 냉담한 보수적 교회로부터 염증을 느낀 씨 들은 함석헌의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했다. 공개강의를 통해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적 역할을 강조했고, 동시에 이러한 그의 시각을 글로서 발표하기도 했다. 비록 함석헌은 그 자신을 기독교인으로 고백했지만, 그의 기독교에 대한 이해가 보수계열의 한국교회 지도자들이 이해했던 '기독교'와 같았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함석헌은 기독교를 본질적인 것과 현상적인 것으로 구분했던 듯하다. 본질적으로 예수는 사마리아인도 그의 이웃으로 보았고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역설했다. 그러나 현상적인 면을 중요시하는 유대인의 입장에서 사마리아인은 그들의 적이었고 이단자였다. 함석헌에게 기독교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계명은 십계명보다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사랑의 계명이었다. 그러므로 교리와 조직의 막강함을 자랑하는 현상적인 면으로서의 기독교에 대해 함석헌은 동의할 수 없었고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다.
함석헌의 종교에 대한 이해는 제도화 된 것으로서의 종교가 아니라 삶으로 체현되는 종교였다. 함석헌은 공개 석상에 자신의 종교관을 선포했지만, 종교적 이해 관계에 얽힌 당파심이 없었고 모든 주요종교를 평등하고 포괄적으로 포용하고 이해하려고 힘썼다. 그는 열린 마음으로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진리도 받아들였다. 그는 곧잘 이렇게 표현했다: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성경만 볼 것이 아니라 노자, 공자, 불경도 봐야 합니다." 그는 다양한 종교의 진리를 통해서 전체 진리의 세계를 파악하려고 노력했다. 그런 함석헌에게 종교적 관용성은 아주 중요했다.
한편 그의 갖가지 공개강연과 글을 통해서, 함석헌은 그의 시각에 동의하는 많은 사상적 동조자들과 접할 수 있었고, 어느새 그는 "함석헌 선생님"으로 남한 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특별히 남한의 지식인들과 대학생들 사회에 그의 이름이 알려지기 시작했다. 김동길, 안병무, 김용준 등은 이 당시 대학생으로서 함석헌을 만났고, 그후 계속해서 함석헌의 사상적 영향권 안에 들기 시작했다.
이 당시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도 노장사상을 포함한 여러가지 동양고전철학을 공개강연을 통해 가르치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자신의 공개강연 외에 또한 유영모의 강연에 배우는 학생으로서 참석했다. 비록 유영모는 오산학교시절인 1921년 이래로 함석헌의 스승이었지만, 남한 사회에 유영모의 이름석자는 함석헌 만큼 알려지지 않았다. 유영모는 사회-정치적문제의 참여 사상가라기보다는 은둔적이고 묵상적인 사상가였다. 유영모는 일제시대로부터 김일성, 이승만 정권을 거쳐, 사회-정치 문제에 직접 관여하거나 언급하는 경우가 극히 드물었다. 유영모는 기독교인이었지만 어느 교회교단에도 속하지 않았고 독학으로 성경과 동양고전을 공부했다. 남한 사회의 지식인들과 학생들도 유영모에 대해서 그의 제자 함석헌 만큼도 몰랐다. 유영모의 이름은 단지 함석헌을 존경하거나 따라 다니는 소수의 그룹에 의해서 "함석헌의 스승 유영모" 정도로만 알려진 형편이었다.
한편 미군정과 소련군정은 한반도의 남북한에 각각 3년정도 머무른 후 이승만과 김일성에게 정권을 양도하고 철수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이승만정권과 김일성정권 사이의 적개심은 증대해갔고, 좌우익의 이념논쟁도 악화 되어갔다.
남북한의 긴장이 고조될 무렵인 1950년 1월 12일, 미국무장관 에치슨(Dean Acheson)은 워싱톤에서의 기자회견을 통해 한반도는 미국 극동지역 방위선에서 제외되었다고 발표했다. 이 발표에 김일성과 스탈린은 크게 고조되었고, 결국 소련으로부터 탱크를 공급받은 김일성은 1950년 6월25일 남침을 개시했다. 3년간에 걸친 소위 한국전쟁은 내란이라기보다는 냉전시대의 미국, 소련, 중공의 국제사회 주도권쟁탈을 위한 대리 전쟁이었다. 한국전쟁을 통해 또한 일본과 서유럽의 경제는 크게 발전되었다.
1951년 3월에 이르러 남북한의 군대는 38도선 부근에서 정체되었고, 1953년 7월 이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전쟁은 휴전에 들어갔다. 전후 이승만은 반공을 국가의 시책으로 만들며 독재자가 되어갔고, 김일성은 반미와 반일을 내세우며 전제군주화 되어갔다. 전쟁 중이던 1951년 11월, 이승만은 그의 권력을 강화시키기 위해 자유당을 창립했다. 그의 권력을 이용하여 1952년 5월, 이승만은 야당 국회의원 14명을 구금하고, 계엄령을 선포하며 자신의 취향에 맞게 헌법을 개정했다.
함석헌은 6.25 전쟁 중에도 전쟁 중 남한의 수도인 부산에서 주간성경공부모임을 주최했다. 1951년 8월 6일부터 11일까지 함석헌은 "고난의 극복"과 "예수의 생애"란 주제로 광주에서 공개강연을 실시했다. 이러한 여러 모임을 통해 함석헌은 전쟁의 비극과 재난에 지치고 피로한 씨 들을 격려하고 위로했다. 특별히 성경공개강연을 통한 이러한 함석헌의 노력은 전후 한국 YMCA재건 운동에 근본적 밑받침이 되었다.
함석헌은 성경공개강연을 통해 씨 들의 영적 사기를 부양시키는 한편, 그 자신은 인도 힌두교의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를 독학으로 틈틈히 연구했다. 그 연구의 결실로 6.25전쟁후 함석헌은 {바가바드 기타} 영어판을 한국어로 번역해서 출판하기까지 했다. 함석헌은 {바가바드 기타}를 번역하면서 다른 주요 종교경전을 주석으로서 폭넓게 사용하였다. 그가 {바가바드 기타]를 위해 부가한 주해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성경}, {도덕경}, {장자}, {열자}, {논어}, {중용}, {왕양명}, {대학}, {맹자}, {역경}, {법구경}, {코란}, Journal of George Fox 등이다.
“이단자”
이승만은 정동감리교회의 장로로서 그 나름대로는 열성적인 기독교인이었다. 부통령 이기붕을 포함한 자유당의 고위 간부들도 거의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이러한 소위 기독교인 지도자들은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 사이에 차별정책을 적용했다. 이승만 자신조차도 비기독교인들은 제쳐두고 기독교인들에게만 특혜를 베풀었다. 예를 들면 이승만은 신학생들에게만 군복무를 면제 시켜주었다. 또한 많은 한국교회 지도자들도 이승만 정권의 부패와 독재에도 불구하고 기독교인들에게 특권을 제공해주는 자유당을 열렬히 지지했다. 이러한 기독교 지도자의 눈엔 자유당의 불의와 부정부패가 전혀 문제로 보이지 않았던 것 같다.
이승만은 또한 한국교회 조직으로부터 그의 정권강화를 위한 협조와 지지를 기대했고, 자유당을 위해 많은 재정적 후원도 받았다. 한국교회도 자유당과 친밀하고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했고, 맹목적으로 이승만의 정책을 지지했다. 함석헌은 이러한 한국교회의 성향에 대해 {사상계}를 통해 가차없이 비판과 질책을 퍼부었다: "종교는 믿는 자만의 종교가 아니다. 시대 전체, 사회 전체의 종교이다. 종교로써 구원 얻는 것은 신자가 아니요 그 전체요, 종교로써 망하는 것도 교회가 아니요, 그 전체다."
이승만의 통치방식은 민주주의와는 아주 거리가 멀었다. 자유당은 씨 을 위한 정당이 아니라 이승만을 위한 정당이었다. 이승만이 정권을 유지해가는 동안 대부분의 한국교회는 가장 친정부적인 조직체로서, 자유당의 하인 노릇을 서슴없이 해왔다. 결국 한국교회는 자유당과 가장 강력한 정치적 동맹관계를 맺었다. "기독교인 대통령 하에서 전국민의 기독교인화"라는 순진한 꿈에 젖어 한국교회는 이승만의 독재도 상관하지 않고, 부패한 자유당을 힘껏 지지하고 후원했다. 그래서 많은 경우에 비기독교인 들은 한국교회를 이승만정권 혹은 자유당과 동일한 집단으로 보았다. 많은 교인들은 기회주의자적인 태도로 이승만정권에 무조건 복종했다. 이승만 정권을 내놓고 비판하는 기독교인은 극소수였거나 아주 드물었고, 함석헌은 그 중에 한사람으로써 그의 직설적인 말과 글은 양심적 지식인들과 대학생들로부터 뜨거운 지지를 받았다.
특별히 6.25 전쟁을 통해서 함석헌은 이승만의 권력남용을 보았고, 자유당을 뒤에 업은 기독교인들의 비기독교인에 대한 편파적인 태도를 체험했다. 특별히 미군 구호품을 분배하는데도 자유당 간부들이 기독교인들을 우선적으로 선별해서 분배하는 것을 목격하고 함석헌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사회가 처한 어려움이나 문제에는 냉담하고, 교회일에만 매달려 지내는 복음주의적이고 '근본주의'적인 성향을 강하게 풍기는 한국교회에 대해 심한 거부감과 비판의식을 갖게되었다. 동시에 복음주의적이거나 소위 근본주의적인 기독교인들도 함석헌을 이단시하거나 멀리하기 시작했다. 마침내, 1953년 7월4일, 함석헌은 그의 시 "대선언"을 발표함으로써 한국교회에 대해 기꺼이 '이단자'가 될 것을 선언했다. "대선언"은 함석헌이 기독교를 포함한 어떤 종교 종파에도 속하지 않을 것이라는 그의 종교적 입장을 공식적으로 밝힌 것이다. 그 내용의 일부를 보자:
"내 기독교에 이단자가 되리라. 참에야 어디 딴 끝 있으리오.
그것은 교회주의의 안경에 비치는 허깨비뿐이니라....
기독교는 위대하다. 그러나 참은 보다 더 위대하다.
참을 위해 교회에 죽으리라. 교회당 탑 밑에 내 뼈다귀는 혹 있으리라.
그러나 내 영은 결단코 거기 갇힐 수 없느니라."
함석헌은 인간이 제도화된 기성교회의 간섭이 없이도, 진리를 각자의 직관만으로도 터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교회주의나 교회제도에서만 자기만족을 느끼는 교인들은 함석헌의 "대선언"을 통한 종교적 시각을 이해할 수도 없었고 관용할 수도 없었다.
6.25동란을 통해, 4백만이 사망했고, 남한에만 3백7십만의 인구가 집을 잃었으며, 십만의 아이들이 고아가 되었다. 전쟁기간 중 약 50만의 인구가 더 월남 할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난 후, 김일성은 북한을 세계에서 유래가 없을 정도로 가장 폐쇄적이고 전제적인 국가로 만들어갔다. 남북한의 대부분의 씨 들은 오늘날까지 서로 전화나 서신연락 조차 주고받을 수가 없다. 6.25전 남북간의 긴장관계는 미국과 소련에 의해서 주어진 것에 반해, 전후의 긴장국면과 남북한의 적대감은 더욱 깊어지고 악화되었다.
6.25는 비록 남한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북한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한다는 목적으로 진행되었지만, 전후 남한 사회는 역설적으로 인권이나 자유민주주의 가치보다 반공, 안보, 복종, 계엄령 등의 가치를 더욱 강조해 나갔다. 이런 상황하에서 자유민주주의의 정신을 추구하는 함석헌의 삶은 이승만과 자유당정권 아래서 계속해서 고난을 받았다. 6.25가 끝난 후 함석헌과 그의 가족은 여러 씨 들의 도움으로 서울로 돌아왔다. 비록 어려움이 연속된 삶이었지만, 함석헌과 그의 가족들은 최태사를 비롯한 여러 씨 들로부터 숙식도움을 받으며 그런대로 삶을 연명해 나갔다.
이승만의 정권 유지 방법중의 하나는 국가보안법을 그의 무기로 이용하는 것이었다. 국가보안법의 동란 교사죄 항목의 정의를 아주 불분명하게 하므로써 이승만은 자신의 의견에 반대하는 반체제인사를 탄압하는 도구로 보안법을 악용했다. 1960년 대통령 선거가 열리기 8개월전인 1959년, 이승만은 보안법을 이용해 그의 정적을 제거했다. 진보당 당수이자 전농림부장관 이었던 조봉암(1898-1959)이 대통령선거 후보자로서의 인기가 급상승하자, 이승만은 조봉암을 국가 보안법 위반자로 몰아 사형에 처했다.
이승만이 3선개헌을 통해 그의 대통령직을 다시 연장하려고 했을 때, 대부분의 교회 지도자들은 이승만후보를 위한 선거 위원회를 조직해 전국적인 캠페인을 통해 그를 열렬하게 지지했다. 이승만을 위한 캠페인에 협조하지 않거나 참여하지 않은 기독교인들은 이승만지지파에 의해 '이단자'로 몰리기도 했다. 그런 면에서 함석헌은 '이단자'였다. 한국 기독교사 입장에서 제1공화국시대는 정치-종교적 주도권을 장악한 '기독교정권' 이승만일당과 '이단자' 함석헌과의 끊임없는 충돌과 갈등의 시대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한편 이승만과 자유당으로부터 최대한의 편애와 이득을 얻기 위해 한국교회는 서로간에 추잡한 싸움을 벌였다. 그러므로써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전반에 부끄럽고 수치스런 오점을 남겼다. 이승만정권하에서 또한 전국적인 규모의 기형적인 부흥회 운동이 산발적으로 일어났다. 1950년대에는, 기독교적 성분을 혼합한 250여개의 소위 "새종교"가 번창했다. 이중 특히 주목할만한 것으로는 기형적인 부흥회운동을 제외하고서도, 박대선의 천도관운동, 기복신앙을 중심으로한 기도원운동, 그리고 문선명이 주도하는 통일교운동 등이었다. 함석헌은 기독교인 대통령 이승만아래서 한국사회와 교회의 기형적인 변화를 가까이 관찰하므로써 그 자신의 기독교관과 교회관을 강화시키고 발전시켰다. 이 시기의 함석헌의 사고가 왜 기독교 중심주의로부터 탈기독교적, 탈교회적으로 변화되어갔는가 하는 질문을 염두에 두면서 같은 시기의 천도관, 통일교, 기도원, 부흥회운동 등의 성격을 살펴보자.
천도관운동은 1955년 박대선(1915-1992)에 의해 시작되었다. 1950년대와 60년대를 거쳐서 천도관운동은 급속하게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이것은 기독교의 기도에 의한 소위 신앙치료법을 종래의 의료치료법 보다 더욱 강조하면서 시작되었다. 1960년대 후반까지 천도관운동의 확산된 여세는 한국기존교회를 초과하거나 심지어 대체해 갈듯이 보였다. 그러나 1970년대에 접어들어, 박대선과 그의 가족들이 여러가지 도덕적 스캔달을 뿌리면서 그 교세는 급격하게 감소 되어갔다. 특별히 교회헌금의 횡령과, 오용 그리고 신앙촌 노동자들에 대한 부당한 대우 등이 그 주요 쟁점이었다.
통일교의 역사는 1940년대 초반 문선명(1920- )의 고향인 북한에서부터 시작되지만, 공식적으로 사회에 뿌리를 내린 것은 1954년 서울에서였다. 1940년대 북한에서 문선명은 이스라엘교회라 불리우던 그 자신의 종파를 세웠다. 김일성이 주도권을 장악해 가던 1948년과 1949년, 그 정치-사회적 소용돌이 중에 문선명은 간통과 간음죄로 각각 수감되었다. 1950년 6.25전쟁 중 그는 유엔군에 의해 석방되었고 그후 서울로 월남했다. 1955년 남한에서 문선명은 공금회령과 성추문사건으로 수감되었다. 1970년대 초반 그는 통일교본부를 서울에서 미국으로 옮기면서, 반공을 중요한 교리중의 하나로 강조했다. 1983년 문선명은 탈세혐의로 청문회를 거쳐 미국에서도 수감되었다.
기형적인 기도원운동들 중엔 소위 '병고치는 은사'를 강조하는 경우가 많았다. 큰 기도원의 경우는 종합병원처럼 병의 종류의 따라 '전문적'으로 다루는 '전문 기도자'도 있었다. 기도원측에선 기도원에 치료차 온 환자들로부터 많은 액수의 헌금을 기대 했다. 그럼으로써 기도원의 규모는 점점 커져갔다.
부흥회운동은 기도원 운동과 어떤 면에서 좀 유사성이 있다. 본래 부흥회운동은 복음적인 설교를 통해 한국 기독교를 부흥 시키자는데 그 목적이 있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기도원 운동처럼 '병고치는 은사'를 강조하는 방향으로 그 성격과 목적이 변질되어갔다. 부흥회의 분위기는 최면술적인 방법으로 환자의 몸에 손을 얹거나, 심할 경우엔 환자의 몸을 세게 반복적으로 구타하는데, 이런 행위는 전통적인 한국무당의 행위와 많은 유사성이 있다.
기독교정권인 자유당 밑에서, 천도관, 통일교, 기도원, 부흥회운동 등의 기형적인 확산을 목격한 함석헌은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예수의 근본정신의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재강조했다: "예수께서 약속하신 성령은 그 성격이 윤리적인 데 있지 결코 마술적인 능력에 있지 않다."
이승만이 그의 정치적 권력을 남용할 무렵, 자유당에 비판적인 성향을 가진 언론인들은 극심한 탄압을 받았다. 1955년 3월 17일 소위 "각하 모독죄"로 동아일보사는 몇 달간 폐간 조치를 당했다. 같은 해 9월 대구매일 신문사는 정치깡패들의 폭력에 의해 참혹한 피해를 당했다. 1959년 4월 30일 자유당의 정책에 비판적인 어조를 띠었던 경향신문도 폐간 조치를 당했다.
한편, 기독교인 대통령 이승만 아래서, 1950년대 한국교회 수와 신자의 수는 눈에 띄게 증가했다. 함석헌은 한국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선 기독교인의 도움과 협조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믿었다. 그러나 동시에, 1950년대의 한국교회 증가운동을 그는 종교적 부흥운동으로 보기보다는, 분파적 집단주의의 한 현상으로 보았다. 그러므로써, 한국 불교와 유교의 역사적 일례를 통하여, 질적인 향상과는 무관하게 양적인 증가에만 치중하는 한국 기독교인들에게 그는 따끔한 경고의 글을 썼다:
"교회당 탑이 삼대같이 자꾸만 일어서는 것은 반드시 좋은 현상이 아니다. 그것은 궁핍에 우는 농민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의 가슴속에 양심의 수준을 높여주어야 정말 종교인데 이 교회는 그와는 반대다 . 교회당 탑이 하나 일어설 때 민중의 양심에는 어두운 그림자가 한 치 깊어간다. 그렇기에 '예수 믿으시오' 하면 '예수도 돈있어야 믿겠습니다' 한다. 이것은 악한 자의 말일까? 하나님의 음성 아닐까? 석조전을 지을수록 거지는 도망하게 생기지 않았나? ... 예수가 오늘 오신다면 그 성당, 예배당을 보고 '이 성전을 헐라!' 하지 않을까? 본래 어느 종교나 전당을 짓는 것은 그 역사의 마지막 계단이다 ... 내부에 생명이 있어 솟는 때에 종교는 성전의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신라말에 절이 성하여 불교가 망했고, 고려시대에 송도 안에 절이 수백을 셌는데 그후 불교도 나라도 망했고, 이조때 서원을 골짜기마다, 향교를 고을마다 지었는데 유교와 나라가 또 같이 망했다... 그럼 교회당이 늘어가면 망할 것은 누구인가?"
한국교회의 양적인 증가는 계속 했고, 함석헌은 그럴수록 종교의 조직화된 힘과 제도화된 권위를 거부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조직화된 힘이나 권력은 잠재적인 폭력의 근원이었다. 그는 일제시대를 통해서 뿐 아니라, 북한 소련군정 하에서의 직접적인 경험을 통해, 조직화된 힘과 권력이 얼마나 폭력을 남용하는가를 똑똑히 지켜보았다. 더구나, 이러한 조직적인 권력의 폭력은 소위 '자유대한'에서 조차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정권 등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한국인이 체험한 숨막히고 경직된 정치와 역사적 환경 속에서, 함석헌은 노장사상이 그의 건강한 영적생활을 위해 어떠한 공헌을 해 왔는지를 밝혔다:
"이 몇 십년의 더러운 정치 속에서도 내가 살아올 수 있는 것은 날마다 노자-장자와 대화를 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내가 만일, '썩 잘함은 물과같다. 물은 모든 것에 좋게 잘 해주면서도 다투지 않고 누구나 싫어하는 (낮은) 곳에 있으려 한다. 그러므로 거의 도에 가깝다' (上善若水 水善利萬物而不爭 處衆人之所惡 故幾干道. {도덕경} 8장) 하는 노자의 말을 듣지 못했던들 씨 을 잊어버리고 낙심을 했을지도 모르고, 아침 저녁으로 장자를 따라 무용(無用)의 대수(大樹)를 아무도 없는 동리나 넓은 광야(無何有之鄕 廣漠之野)에 심어놓고 그 옆에 한가히 서성이며 그 밑에 거닐며 누워 잘 줄을 몰랐던들({장자}, [逍遙遊]), 이 약육강식과 물량 퇴폐의 독한 공기 속에서 벌써 질식이 되어 죽었을지도 모른다."
이래서 함석헌은 공자의 교조적인 철학보다는 노장의 초월적인 사상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노장사상의 본질은 현실 초월적인 경향과 정치권력의 간섭으로부터 각 개인의 자유스러운 삶을 추구하는데 있다. 반면 유학에 있어서는, "공부하는 것과 동시에 정부의 관리직을 차지하는 것은 유교의 군자가 반드시 취해야 할 두 가지 덕목이다." 함석헌은 노장사상과의 관계에서 유교의 교조적인 면과, 예수와의 관계에서 신약성경에 등장하는 율법학자이며 교조주의자인 바리새인과의 관계를 이렇게 비교했다: "예수가 바리새적인 길[율법적인 길]로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을 알았던 것같이 노자, 장자도 유교의 가르침으로 춘추전국시대가 건져질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한편, 천도관, 통일교, 기형적인 부흥회 및 기도원 운동 등의 급격한 확산과, 자유당의 정치적 부패가 극에 오르는 것을 목격한 함석헌은, 1955년 한국교회 및 사회비평을 목적으로 {말씀}이란 잡지를 창간했다. {말씀}지를 통해 함석헌은 한국사회의 종교문제와 정치문제에 대한 그의 생각을 기탄없이 털어놓았다. 함석헌이 씨 의 자유의식과 사회정의의 감각을 일깨우고자 기술한 내용을 한번 살펴보자:
"자유하지 못하는 사람은 복종할 수 없다. 자유를 알기 전에 한 복종은 짐승의 길듦이지 인격의 순종이 아니다 ... 그렇다, 원수를 사랑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자유하는 인격만이 할 수 있다. 노예에게는 도덕이 없다. 자아를 가지지 못한 물건이 어떻게 누구를 사랑할 수 있겠느냐?"
{말씀}지를 통해서 함석헌은 기독교에 있어서 자유의 가치와 공의의 가치를 강조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자유와 정의의식 없는 사랑이나 복종은 비굴함과 위선에 불과했다. 자유당정권하에서 '사랑과 복종'을 강조하던 한국교회의 입장에 대해 함석헌은 '자유와 정의'의 가치를 강조함으로 맞섰다.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함석헌에게 종교의 문제와 정치의 문제는 떨어져서 생각할 수 없는 관계였다. 아마도 그래서 함석헌은 '한국의 간디'로 알려지기 시작했으리라.
“실패자”
함석헌은 오랫동안 간디를 존경해 왔었다. 그가 청소년 시절 오산학교에 학생으로 있을 때 간디가 주간하던 잡지 {젊은 인도}(Young India)를 정기적으로 읽기도 했다. 1948년 간디가 힌두교 과격파의 손에 의해서 암살 당한 후, 더욱 간디의 글을 열심히 읽었고, 급기야 1958년에 이르러는 간디공부모임을 창간하기도 했다. 그후 1964년에는 영어판 {간디 자서전}을 한국말로 번역했고, 1981년에는 한국인 퀘이커 진영상과 함께 간디의 일기 {날마다 한 생각}을 번역했다. 함석헌은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정신에 매료 되었다. 간디는 정치적 문제를 종교적 방법을 동원해서 해결하려고 했는데, 함석헌은 이러한 간디의 방법을 한국현실에 적용시키고자 하였다. 그러므로, 1970년 함석헌이 월간지 {씨 의 소리}를 창간 했을 때나, 박정희-전두환의 군사독재하에서 민주화 운동과 인권운동을 위해 활동할 때, 간디가 그랬던 것처럼, 함석헌은 그를 따르는 씨 들에게 항상 비폭력원칙을 주창했다. 그 결과로, 과격한 재야 인권운동가 중에는 함석헌의 비폭력 방침을 "너무 온건한 방법"이라고 비판하기도 했다.
간디의 비폭력운동의 철학적 뿌리는 힌두교에서 왔다. 반면에 함석헌의 비폭력철학의 근원은 노자의 평화사상, 퀘이커의 평화주의에서 비롯되었다. 1969년 함석헌은 간디에 대한 존경심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간디는 현대 역사에 있어서 하나의 조명탄입니다. 캄캄한 밤에 적전상륙을 하려는 군대가 강한 빛의 조명탄을 쏘아올리고 공중에서 타는 그 빛의 비쳐줌을 이용하여 공격목표를 확인하여 대적을 부수고 방향을 가려 행진을 할 수 있듯이 20세기의 인류는 자기네 속에서 간디라는 하나의 위대한 혼을 쏘아올리고, 지금 그 타서 비치고 있는 빛 속에서 새 시대의 길을 더듬고 있습니다. 그는 분명히 인류가 인류 속에서 쏘아올린 혼이었습니다. 그가 있기 위해서는 인도 5천 년의 종교문명과 유럽 5백 년의 과학발달과 아시아-아프리카의 짓눌려 고민하는 20억 넘는 유색인종이 필요했습니다. 그러나 모든 위대하고 아름다운 혼이 그랬듯이, 그도 고통과 시련 없이는 되어 나올 수 없었습니다. 그는 폭발하는 혼이었습니다. 누르면 누를수록 더 일어섰습니다. 그는 비겁을 가장 큰 죄로 알았습니다. 뺏으면 뺏을수록 커졌습니다. 그는 사랑을 모든 선의 근본으로 여겼습니다. 민족주의가 박해하면 민족을 초월해 인도주의에 오르고 인종차별의 업신여김을 당하면, 모든 종교를 초월해 우주에 섰습니다. 크다 크다 못해 다시 더 용납될 수가 없이 됐을 때 그는 폭발하는 조명탄이 되어 공중에서 타올라, 그 빛속에 내 편과 대적을 다 비치게 됐습니다."
위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함석헌의 간디에 대한 뜨거운 정열을 볼 수 있다. 함석헌은 간디가 사회의 불의에 대해 비폭력을 통한 평화적인 방법으로 저항했기에 그런 간디를 존경했다.
간디가 아슈람 공동체를 이루면서 한 때 생활했던 것처럼, 함석헌도 비슷한 공동체 살림을 부러워했다. 그러던 중 천안에서 이발업을 하던 씨 정만수가 함석헌에게 땅을 기증했다. 1957년 3월, 마침내 함석헌은 신학생 홍명순과 함께 천안에 씨 농장이라는 이름의 공동체를 창설했다.
버스를 타고 천안으로 내려가던 중, 함석헌은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 간디가 톨스토이농장을 창설해 후진들을 가르치며 인쇄기를 손수 돌려 {인디언 오피니언}을 발행해, 대영제국으로부터 인도의 독립을 위해 힘쓰던 것을 상기했다. 함석헌은 씨 농장을 통해서 그의 이상인 종교, 교육, 농사를 삼위일체로 묶어서 물질만능주의의 세태를 극복 하고자 다짐했다. 그의 글을 직접 대해보자:
"믿음과 교육과 농사를 하나로 껴붙이어 돈 아니고 사는 세상을 만들어봤으면 하는 꿈은 언제나 놓지 못하고 가지고 온다. 일제시대엔 그걸로 싸우려 해봤고 오늘은 또 그걸로 오늘의 대적과 싸우련다. 오산을 그만둔 것도 그 때문, 송산을 간 것도 그 때문, 인생대학 이후 용천서 농사를 시작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씨알농장에서의 함석헌의 생활은 아주 검소했고 단순했다. 함석헌과 씨 농장의 일꾼들은 매일아침 새벽 여섯시에 일어났다. 매일아침 함석헌과 농장의 일꾼들은 30분 정도 침묵명상의 시간을 가졌고, 그후 함석헌이 1시간 정도 성경공부를 인도했다. 아침 식사 후에 그들은 농사일을 했고, 쌀, 사과, 고구마, 포도, 배, 토끼, 닭 등을 키웠다. 씨 농장에서 나온 생산물을 외부시장에 판매하므로써, 한동안 씨 농장은 자급자족 할 수 있었다. 함석헌은 씨 농장에 일주일에 3-4일간 머물고, 나머지 3-4일은 외부 전국각지로 공개강연을 다녔다. 강의를 하는 것 외에도, 그는 {사상계}를 포함한 여러 잡지나 신문에 글을 썼다. 이 당시 함석헌의 아내와 자녀들은 서울에 거주하고 있었다.
일년에 2번, 농사일이 바쁘지 않은 겨울이나 아주 무더운 여름철에 함석헌은 김동길, 안병무 등을 농장으로 초청해 그들과 함께 "씨 농장 수련회"를 개최하기도 했다. 청년들이나 대학생들이 전국에서 수련회에 참석하기 위해 농장으로 모여들었고, 참석자의 수는 70-80명 정도를 육박했다. 특별히 씨 농장 일꾼중의 하나인 홍명순(1932-1992)은 함석헌의 평화주의에 영향받아, 한국 최초의 '양심적 병역 거부자'가 되었다. 홍명순은 그의 양심적 병역거부 결정에 함석헌이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이렇게 진술했다: "함선생님은 늘 말씀하셨습니다: '6.25전쟁을 치루고 나서도 나는 한명의 목사도 전쟁의 잔인함을 비판하는 것을 들어보지 못했다.' 이런 선생님의 말씀을 들었을 때 나는 징병에 응하기보다는 평화의 길을 택해야겠다고 다짐했습니다." 결국 홍명순은 그의 양심적 병역거부로 1년 4개월의 옥고를 치루었다.
함석헌이 그의 공개강연과 다양한 글을 통해서 전국적으로 그 이름이 남한사회에 알려지기 시작하자 점점 더많은 청년들과 대학생들이 그와 함께 공동체 생활을 하고자 씨 농장으로 몰려들었다. 그래서 씨 농장의 전성기에는 약 50명의 공동체 회원들이 함석헌과 함께 농장의 거주자로 일했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씨알농장에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씨 농장을 찾은 청년들과 대학생들의 대부분은 농사일에 관심이 있어서 농장을 방문했다기 보다는, 함석헌 개인에 대한 존경심 때문에 온 경우가 많았다. 그러므로 이러한 청년과 대학생들은 사회, 정치, 종교문제에 대해 함석헌의 생각과 의견을 접해보고 싶어했다. 그러나 이들의 대부분은 실제적인 농사일에는 초심자였고, 야외에서 농사일에 전념하는것 보다는 함석헌의 사상을 앉아서 듣는 것에 더 열중했다. 결과적으로 씨 농장의 생활을 위한 생산양은 눈에 띄게 감소하기 시작했다.
함석헌의 씨 농장 공동체의 쇠퇴를, 미국 뉴욕주 북부의 이상향적 공동체였던, 완이다 공동체(Oneida Community)의 쇠퇴와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것이다. 완이다 공동체는 1848년부터 1970년까지 22년간 동안 유지 됐었다. 완이다 공동체의 창시자는 이상향적인 보다 나은 삶을 추구했었다. 그러나 이상향 공동체의 실현을 위해서 모든 공동체 회원의 극도의 심리적 헌신자세가 요구되었다. 결국 극단적 선택의 갈림길에 놓이게 된 공동체 회원들의 삶은 비참한 상태로 전락되었다. 마른 카든의 지적처럼, 완전주의자나 이상주의자가 제시한 목표나 이상을 현실에 적용시키고자 분투, 노력하는 일이, 반드시 행복한 삶을 보장해 주지도 않고 이상적인 사회의 실현을 보장하지도 않는다.
1961년 5월 박정희는 군사정변에 의해 정권을 찬탈했다. 특별히 1970년의 유신선포 후 박정희의 군사독재가 강화됨에 따라, 씨 농장에 대한 군사정권의 박해도 강화 되어갔다. 박정희는 5.16군사 정권의 정당성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적인 함석헌을 눈에 가시같이 여기고 있었다. 중앙정보부를 창설한 김종필은 심지어 함석헌을 "정신분열증에 걸린 노인네"라고 까지 악평하기 조차했다. 종종 박정희의 똘만이들은 씨 농장의 거주자들에게 협박, 압력, 회유를 통해 농장을 떠나라고 경고했다. 씨 농장의 거주자였던 홍명순은 확신있게 말했다: "만약 박정권이 씨 농장을 탄압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더라면, 오늘날 씨 농장은 대단히 성공적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원인이 어쨌든 간에, 농장 내부의 비효율적 운영 때문이었던지 아니면 박정희의 외부적 탄압에 의해서이건, 유신정권이 기승을 부리던 1973년, 씨 농장은 더 이상 존속하지 못하고 빚더미에 쌓여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은 이로서 조직가로서의 그의 한계와 '실패'를 씁쓸하게 체험했다.
“환영받지 못한 예언자”
1956년 월간지 {사상계}를 통해서 함석헌은 한국교회의 한국사회에 대한 역할에 대해 논평했다. 이 당시 {사상계}는 한국사회 및 정치 문제를 다룬 가장 영향력 있던 잡지로서 지성인과 대학생들 계층에 많은 독자를 확보하고 있었다. 장준하(1918-1975)는 {사상계}의 주간으로 일제하 상해임시정부 당시 김구주석의 비서직을 지내기도 했다. 장준하는 또한 일제시대 반일 독립운동 단체인 광복군의 회원으로 만주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서 투쟁하기도 했다. 1945년 김구가 중국본토에서 남한으로 귀국했을 때 장준하는 김구의 수행원겸 비서로서 함께 조국으로 돌아왔다. 6.25 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1953년 4월, 장준하는 남한 피난정부의 수도였던 부산에서 {사상계}를 창간했다. 전후 {사상계}는 남한 지식인 사회의 지적발달과 자극에 많은 영향을 주었다. 반면 {사상계}는 이승만과 박정희 정권으로부터는 끊임없는 탄압과 고난을 받았다. 마침내 1966년 박정희는 {사상계}를 영원히 폐간 시켜버렸다. 장준하는 남한사회의 민주화와 언론자유를 위한 그의 노력을 인정한 필리핀 정부로부터 1962년 8월 막사이사이 언론상을 받기도 했다.
장준하는 함석헌이란 이름을 그의 어린시절부터 들어왔다. 그러나 장준하가 함석헌을 직접 만난 것은 1950년 중반기에 들어서였다. {사상계}의 주간으로 장준하는 함석헌에게 전후 남한사회에 대한 그의 논평을 기고해 달라고 청탁했다. 장준하는 함석헌이 한국민족을 향해 무엇인가 말하고 싶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함석헌에게 계속해서 끈질기게 {사상계}를 위한 원고를 재촉했다. 몇 달째 원고를 미뤄오던 함석헌은 마침내 1956년 1월, 풍자적인 비평기사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를 {사상계]에 기고했다. 이 글을 통해서 함석헌은 전후 한국사회의 문제에는 냉담하고, 점점 기형적, 교조적이 되어가는 한국교회의 전반적인 문제점에 대해 통렬한 비판을 퍼부었다. 이때가 기독교 정당이라 불리던 자유당의 부패가 극에 달하던 때이고, 동시에 천도관, 통일교, 기도원, 부흥회운동이 기승을 부리던 때였다.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가 제사적, '마술적'인 면에서 벗어나 한국 사회의 도덕과 정의를 위해 앞장서야 한다고 지적했다. 물론 종교의 세계는 윤리나 사회정의 이상의 세계이지만, 윤리의식이나 현실감각이 없는 종교는 미신적이고 편협한 신앙으로 전락한다는 것이 함석헌의 쟁점이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도덕적이고 합리적인 신앙인이 될 것을 권고했다.
함석헌의 기사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로 인해 {사상계}는 하루아침에 10만부 이상이 팔렸고, 남한 사회의 베스트 셀러 잡지가 되기 시작했다. 장준하는 함석헌에 대한 그의 첫인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첫눈에 함선생님은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시골 할아버지 같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참 잘생기고 멋있는 노인이었다. 나는 이렇게 온건해 보이고 수줍어 해 보이는 시골 촌색시 같은 분이 그렇게 폭풍우 같이, 활력있고 힘찬 글을 쓰셨는지 놀라울 뿐이었다." {사상계}에 그의 첫 글을 발표한 뒤 약 4개월 후인 1956년 5월, 함석헌은 여러 친구들의 재정적 도움으로 조그마한 집을 장만 할 수 있었다. 비로서 55세의 나이에, 그의 인생에 처음으로 함석헌은 집을 장만한 셈이었다.
함석헌의 이승만 정권과 한국교회에 대한 풍자적 비판의 글은, 그를 일약 전국적인 규모의 '유명한 언론인'으로 만들었다. 한완상은 이 당시 대학생들 중에 함석헌의 글을 읽어보지 않은 학생은 없었을 정도라고 표현했다. 반면에 함석헌은 보수적인 교인들과 자유당 인사들로부터는 심한 비난을 받았다. 그들은 함석헌을 '독설가' 심지어는 '친공주의자' 혹은 '빨갱이'로까지 몰았다. 함석헌의 말과 글이 대학생들과 진보적 지식층들로부터 호응을 얻어 갈수록, 그에 대한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과 자유당 인사들의 적개심과 비방 또한 증가했다. 그들은 함석헌이 그들의 기득권 유지와 사회에서 확보해 놓은 권위를 위협한다고 보았던 것 같다.
함석헌에 대한 자유당과 보수적인 교회 지도자들의 끊임없는 비방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사상계}를 통해서 그의 생각을 남한 사회에 발표 할 수 있었다. 함석헌은 말과 글을 통해서 자유-민주정신의 씨앗을 남한 사회에 심고자 힘썼다. 격동의 한국사를 통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말못하는 씨 들의 입장을 대변함으로써, 함석헌은 '벙어리'가 된 씨 들의 입을 열고, 그들의 닫힌 영혼을 일깨우려고 하였다. 1957년 3월 {사상계}, [할말이 있다]에 쓴 그의 글은 이렇다:
"우리나라 역사는 벙어리 역사다. 무언극(無言劇)이다. 이 민중은 입이 없다. 표정이 없다. 사람인 이상 입이 없으리만, 있고도 말을 아니하고 자라온 민중이다. 사람인 담에야 속이 없으리만 그 속을 나타내지 않고 온 사람들이다. 할말이 없어서일까? 아니 있다면 세계 어느 나라의 민중보다 할말이 많을 것이다. 입으로는 할 수 없는 말을 가슴에 사무치게 가진 사람들이다. 그러면서도 발표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오천 년 역사라면서 민중의 글자가 생긴 것은 겨우 오백 년 전이요, 순수한 민중문학이 없는 민족, 민권(民權)의 발달은 전혀 보지 못한 나라...."
함석헌은 한국사를 맹목적인 복종과 무조건적인 침묵의 역사로 보았다. 그러므로 그는 현대를 사는 한국인들에게, 각자가 갖고있는 언론의 자유와 표현의 자유를 양도(讓渡)할 수 없는 권리로서 누릴 것을 권장했다.
한편, 이승만과 자유당의 횡포를 체험한 함석헌은, 이승만과 자유당의 정치적 노리개가 된 한국교회의 종교적 진실성에 더욱 회의를 품게 되었다. 이때부터 함석헌은 제도화된 종교 안에 자신의 영성(靈性)을 가두어두기보다는 자유자재로 무한하게 종교의 진리를 추구 할 것을 결의했다. 그는 기독교를 "선택된 사람(選民)"들만의 종교로 보기보다는 소외되고 억눌린, 버림받은 씨 들의 종교로 보았다. 제도 속에 갇혀있는 종교에 대한 그의 입장은 다음과 같이 뚜렷했다.
"종교는 인간을 위하고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 있지, 인간을 착취하자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종교가 하나의 강력한 제도로 자리 잡을 때, 그것은 특권층만을 위한 종교로 전락하기 쉽고, 역사의 진보를 오히려 방해한다.... 사실 참종교는 박해 아래서 성장한다." 그의 글을 통해서 함석헌은 종교의 제도권 밖으로 밀려나거나, 교회 중심주의로부터 소외 되어있는 버림받은 씨 들에게 위로를 주었고, 그들의 역할을 부각 시켰다.
이승만정권과 김일성정권 사이의 적개심은 6.25전쟁후 날이 갈수록 악화 되어갔다. 김일성은 이승만을 "미제국주의의 강아지"라고 불렀고, 반면에 이승만은 김일성을 "반역자" 이며 "소련과 중국의 꼭두각시"라고 비방했다. 남북의 정권이 서로 한참 비방을 일삼을 때인 1958년 8월, 함석헌은 {사상계}에 [생각하는 백성이라야 산다]를 기고함으로써 남북정권의 정책을 통렬히 비판했다:
"우리가 일본으로부터 해방이 됐다 할 수 있으나 참 해방은 조금도 된 것 없다. 도리어 전보다 더 참혹한 것은 전에 상전이 하나였던 대신 지금은 둘 셋이다. 일본시대에는 종살이라도 부모 형제가 한 집에 살 수 있고 동포가 서로 교통할 수는 있지 않았나? 지금 그것도 못해 부모 처자가 남북으로 헤어져 헤매는 나라가 자유는 무슨 자유, 해방은 무슨 해방인가? 남한은 북한을 소련-중공의 꼭두각시라 하고, 북한은 남한을 미국의 꼭두각시라 하니 남이 볼 때 있는 것은 꼭두각시뿐이지 나라가 아니다.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다."
이러한 함석헌의 비판을 이승만과 자유당은 용납 할 수 없었다. 결국 "우리는 나라 없는 백성"이라는 대목의 그의 글은 국가 보안법 위반죄로 걸려들게 되었고 곧 함석헌은 수감되었다. 감옥 안에서 57살의 나이에 함석헌은 젊은 경찰들로부터 구타를 당하기도 했다. 아이러니칼하게도 함석헌은 일본군이나 소련군의 손에 의해서 수감 된 것이 아니라, '해방된' 조국에서 같은 동포의 손에 의해서 수감된 것이다. 이때를 기점으로 함석헌은 그의 "본향(조국)에서도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가 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함석헌의 '죄'는 6.25전쟁 후 남북정권의 부정부패를 솔직하게 지적한 것뿐이었다. 함석헌이 반이승만파나 반자유당인사 이었는지는 모르지만, 결코 친공주의자나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 결국 함석헌으로부터 공산주의자 혐의를 찾을 수 없었던 자유당의 손발인 경찰은 20일 후 어쩔 수 없이 그를 석방시킬 수밖에 없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서 함석헌은 항상 억압받는 자, 약한 자의 편이었고, 그래서 기독교정권인 이승만 정권아래서 함석헌의 기독교중심주의적 혹은 성경중심주의적 사고는 좀더 보편주의적이고 인도주의적(人道主義的)인 경향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그러므로써 함석헌에게 이제 기독교 신앙만이 유일한 참신앙이 아니게 되었고 성경만이 전체진리를 대표하는 유일한 경서가 아니게 되었다. 그래서 1961년 개정한 그의 한국역사 책에서 함석헌은 좀더 인도주의적, 좀더 세계주의적, 그리고 좀더 보편주의적으로 변모된 그의 새로운 시각을 대폭적으로 반영했다:
"1961년에 그[성서적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 세째판을 내려 할 때에 나는 크게 수정을 하기로 하였다. 고난의 역사라는 근본 생각은 변할 리가 없지만 내게는 이제는 기독교가 유일의 참 종교도 아니요, 성경만 완전한 진리도 아니다. 모든 종교는 따지고 들어가면 결국 하나요, 역사철학은 성경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나타나는 그 형식은 그 민족을 따라 그 시대를 따라 가지가지요, 그 밝히는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 그 알짬되는 참에 있어서는 다름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 곁들여서 내 태도를 결정하게 한 것이 세계주의와 과학주의다....모든 교파주의적인 것, 독단적인 것을 없애 버리고 책 이름도 {뜻으로 본 한국역사}라고 고쳤다. '성서적 입장'이라는 대신 '뜻으로 본'이라고 붙일 때에 나는 여러 가지로 생각하였다. 많은 기독교인 더구나 무교회 신자들을 섭섭하게 할 것과 심하면 거침돌이 될 것까지 생각하였다. 그러나 나는 이제 기독교인만 생각하고 있을 수 없다. 그들이 불신자라는 사람도 꼭 같이 생각하지 않으면 안 된다...."
1930년대나 1950년대와 비교해, 1960년대 함석헌의 역사관, 세계관이 근본적으로 변했다. 이러한 그의 시각변화에 대해서 그 자신이 이미 예측했듯이 함석헌은 이제 보수적인 교회그룹으로부터 "타락한 인간"이란 낙인이 찍히기 시작했다. 외부의 비방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그가 자연인으로서 깨달은 기독교의 진리를 주저없이 표현했다.
"기독교의 목적은 하늘나라에 가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하늘나라에 가기 전에 그 나라가 이 땅위에 임하게 하는데 있다. 학문도 현실생활에 적용되어서 인류의 삶에 도움을 주지 못하면 무익한 것처럼, 종교도 살아있는 역사의 짐, 인류의 짐을 지지 않는 한 무익한 것이다."
위와 같은 함석헌의 기독교관, 종교관은 대부분의 한국교인들에게 최소한 그후 10년간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0여 년 후인 1970년대 초반에 들어서야 그의 사상은 민중신학의 등장으로 좀더 구체화되고, 대중으로부터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했다. 그러나 함석헌은 이때까지 한국 정치문제의 일선에 앞장서서 전국적인 규모의 대모나 집회를 이끌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1961년 5.16 군사정변 전까지 함석헌은 남한의 민주화 운동이나 인권운동의 전면에 직접적으로 등장하기보다는, 사색이나 단식, 혹은 글을 통해서 간접적으로 대항한 인상이다. 5.16전까지의 함석헌은 행동가라기보다는 사상가로서 그의 내적 혹은 영적힘의 수양과 향상에 심혈을 기울인 것 같다. 어떤 이들은 이 당시의 사색적인 함석헌을 '소극적'인 함석헌으로 이해하기도 했다.
결과적으로, 함석헌은 기독교를 유일한 인류의 종교나 진리로 보기보다는 진리를 소유한 많은 인류의 종교중의 하나로 이해하기 시작했다. 그는 인간이 추구하는 진리의 세계가 기독교뿐 아니라 다른 종교의 길을 통해서도 성취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점에 있어, 함석헌은 {성경}과 {도덕경}을 함께 인용하므로써 도가(道家)와 기독교와의 유사성을 비교했다:
"보아도 안 보이는 존재이니 형태가 없고, 들어도 안 들리니 존재이니 그 깊이를 잴 수 없고, 잡아도 안 붙잡히는 존재이니, 그 것은 이성이나 논리로는 알 수 없는 영적인 것이다." {도덕경} 14장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십시오. 분명히 말합니다. 많은 사람이 들어가려고 애써도 들어가지 못할 것입니다." {성경} [누가복음] 13장 24절
{성경}과 {도덕경}의 공통적인 발췌구절을 통해서 함석헌은 인간이 진리를 발견하고, 깨닫는 일이 육체적으로 뿐만 아니라 정신적으로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를 보여 주고자 했다. 또한 {성경}과 {도덕경}의 유사성을 제시함으로써 함석헌은 인간이 궁극적인 진리의 세계를 오직 하나의 종교만을 통해서 이해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라고 역설했다. 궁극적인 진리란 결국 끊임없이 변하는 것이 아닐까, 그것은 시간이나 공간의 벽속에 단단히 가두어 둘 수 있는 것이 아닐 것이다. 그러므로 고정관념을 깨는 탄력성있는 사고가 진리를 광범위한 입장에서 볼 수 있는 가능성을 제공해 주리라. 함석헌도 그래서 궁극적인 진리를 깨닫는데 있어서 하나의 길을 고집하기보다는 보다는 다양한 길을 통해서 도달 하고자 힘썼던 것 같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남이 만들어 놓은 고정된 길이나 교조화된 종교적 교리를 통해서 궁극적 진리를 깨닫고자 한다. 기성교회의 교리는 중세 계급신분사회의 유산이다. 중세는 평등이 중요한 사회가 아니었고 수직적인 주종의식(主從意識)이 강조되는 사회였다. 자유와 평등이 중요시되는 현대사회의 풍토에 맞게, 완고하고 답답한 종교적 교리도 현대의 시대정신과 흐름을 탄력있게 반영해야 생존할 수 있을 것이다.
다섯 번째 마당 : 군부정권 아래서 (1961-1989)
20세기를 통해서 한반도의 씨 들은 거의 대부분을 군사독재자나 혹은 군사정부의 통치아래 놓여있었다. 특히 196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30년이 넘는 기간, 박정희, 전두환을 비롯한 소위 정치군인들은 남한의 사회와 정치를 비롯한 거의 모든 분야를 철저히 독점해 나갔다. 박정희와 전두환의 군사독재시절을 통해서, 많은 씨 들과 정치인들은 요주의 인물로 블랙리스트에 오르거나, 인권침해, 공갈, 고문 등 심지어 사형선고까지 받아야 했다. 반면 소수의 정치군인들만은, 행정부나 공기업 및 사기업의 요직을 횡탈(橫奪)하여 문자그대로 "태평성대(太平聖代)"한 그들만의 좋은 세월을 보냈다.
위의 역사적 상황을 염두에 두면서, 이 마당에서는 함석헌 생애의 마지막 부분인 1961년부터 1989년을 고찰할 것이다. 이 기간동안, 함석헌은 가장 직접적이고 왕성하게 남한의 정치-사회적 민주화와 씨 들의 인권향상을 위해 일했다. 무엇이 함석헌을 '낙심에 빠진 죄인' 으로부터 '지칠 줄 모르는 자유의 투사'로 변신시켰을까? 어떻게 해서 그가 "멋진 새세상(Brave New World)"을 창조하기 위해 끈질기게 뛰어 다니는 참여자로 변모했을까? 박정희-전두환의 군사정권에 온몸으로 저항하는 한편, 그는 사상적으로는 열렬히 퀘이커리즘에 심취하게 되었고, 급기야 {씨 의 소리}를 창간하게 된다.
5.1. 군사정변과 퀘이커리즘(1961-1970) : 나그네 함석헌
함석헌의 정치적 관여, 혹은 좀 더 정확하게 표현해서 사회정의를 추구하기 위해 직접적으로 남한의 현실문제에 참가하게된 경위의 배후에는 서구의 퀘이커리즘, 민중 신학자 안병무, 그리고 {사상계}의 장준하와 깊이 연관 되어있다.
함석헌이 퀘이커리즘을 처음 접하게 된 것은 그가 오산학교에서 면학에 힘쓸 때인 1921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때 그는 카알라일의 {의상철학}을 통해서 퀘이커리즘에 관한 글을 읽었다. 함석헌은 이때 카알라일의 글을 통해, 초창기 퀘이커운동의 지도자인 조지 폭스에 대해 큰 인상을 받았고, 이일을 계기로 함석헌은 폭스의 자서전인 {일지}를 읽게 되었다. 꼬리에 꼬리를 물듯이,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에 관한 독서를 통해서 서구의 다른 뛰어난 퀘이커들의 삶의 역정(歷程)을 대하게 되었다. 이때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에 대해 약간의 호기심을 느끼게 된다.
그후 함석헌이 유학차 일본에 있을 때(1923-1928) 그는 처음으로 우찌무라 간조 그리고 니토베 이나조(1862-1933: 일본의 첫 퀘이커, 국제 연맹 부총무와 일본 국회의원직을 지냄)와 함께 일본 퀘이커 모임에 출석한바 있다. 그러나 이때 함석헌이 일본 퀘이커들로부터 별로 큰 영향을 받은 것 같지는 않다. 그때부터 약 20년후인 1947년까지 함석헌의 퀘이커리즘에 대한 관심은 한동안 중단되었다. 1947년 함석헌은 북한에서 막 월남한 상태였고 한국 YMCA 총무 현동완으로부터 서구 퀘이커들의 양심적 병역거부운동에 대해 듣게 되었다. 현동완은 YMCA 총무로서 금방 미국여행에서 돌아온 상태였다. 함석헌은 그때를 이렇게 회상했다:
"미국 퀘이커들의 평화운동...나는 그말을 듣고 많이 놀랐습니다. 수많은 젊은이들이 사람 죽이기를 목적으로 하는 전쟁에는 같이 곁들어 할 수 없다는 생각에 징병령을 반대하고 나서서 즐겨 감옥에 들어가고 남아 있는 교도들은 책임을 지고 그들의 뒤를 돌봐주며 운동을 전개해 나간다는 것이었습니다."
함석헌이 그 생애에 처음으로 서양 퀘이커교도들을 직접 만나게 된 것은 6.25전쟁이 끝난 직후였다. 1953년 한국 전쟁직후 함석헌은 전북 군산병원에 한국의 피난민들을 위해 의료봉사팀으로 파견나온 영국과 미국 퀘이커교도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다. 이때부터 영국인 퀘이커 의사 라이트(Ingle Wright: 1923-1997)박사를 포함한 미국인 퀘이커 봉사자들은 한국인 이윤구(1929- )와 함께 첫 퀘이커 예배 모임을 가졌다. 이로서 이윤구는 한국의 첫 퀘이커교도가 되었다. 함석헌은 군산병원에서 서구 퀘이커들의 인도주의적인 활동에 큰 감동을 받았다. 이때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로 받은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좋은 인상으로 인해, 마침내 1967년 함석헌 자신은 퀘이커교도가 되기에 이른 것 같다.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들에 대한 그의 첫인상을 다음과 같이 술회했다:
"6.25 직후 우리나라 복구사업을 하는데 퀘이커교에서 영-미 합작으로 수십여 명의 사람을 보내왔었지요. 그들이 군산에서 파괴된 도립병원 복구공사를 했는데 거기 우리나라 젊은이들이 참가해 처음으로 퀘이커를 알게 되었지요. 나는 그 사람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들의 신앙에 참 감동했어요. 그들로 인해 나는 퀘이커리즘에 흥미를 느끼기 시작했어요."
물론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의 인도주의적이고 평화주의적인 행동에 감동을 받아서, 결국 그 자신 퀘이커 교도가 되기로 결심했다는 그의 고백에 의심의 여지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또한 기억해야 할 것은 이 당시 함석헌은 한국내에서 '이단자 기독교인'으로 극도의 외로움을 또한 느끼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그의 스승 유영모로부터 함석헌은 여전히 비난받고 있는 상태였고, 보수적 한국교회의 교단으로부터는 격렬하게 배척 당하고 있는 처지였다는 것이다.
함석헌이 기존의 교회 조직이나 제도에 대하여 상당히 회의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300년이 넘는 역사를 가진 또 다른 종교조직, 퀘이커회의의 교도가 되기로 결심한 배후에는 또 다른 이유들이 있다.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주요 관심이 죽은 후에 하늘나라에 가는 것보다는 지금 이 세상에서의 세계평화와 사회정의에 집중된 것에 영감을 받았다. 분류적으로 그리고 역사적으로 퀘이커리즘은 개신교 신앙에 속한다. 퀘이커는 그 역사를 통해 성경과 기독교의 정통 교리를 믿는 것만큼, 현실문제에 대한 관심과 인도주의적인 활동도 동등하게 중요하다고 믿어왔다. 인종차별반대 운동가이며 정치가인 윌리암 펜, 노예제도반대 운동가 존 울만, 최초의 여성참정권 주창자이며 사회개혁가 엘리자베스 프라이 등은 모두 열렬한 퀘이커교도였다.
또한 절대계의 진리뿐만 아니라 상대계의 진리를 추구하려는 퀘이커들의 열정은, 서구역사를 통해 과학발달 그리고 과학과 종교 사이의 접목과 연결에 주요 공헌을 해왔다. 특별히 퀘이커리즘의 원산지인 영국의 경우 뛰어난 퀘이커 과학자들이 영국사회에 준 영향과 공헌을 살펴볼 수 있는데, 그들의 이름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건축설계가 아브라함 다비, 천문학자 아더 에딩톤, 유전공학자 프란시스 겔톤, 화학자 존 달톤, 소독약과 방부제를 발명한 조셉 리스터, 인류학자 이 비 테일러 등이다. 1851년으로부터 1900년 사이에 영국의 퀘이커는 영국 왕립과학회의 회원으로 추천되는 확률이 퀘이커가 아닌 다른 학자들보다 50배나 더 많았다.
함석헌은 또한 '역사적'인 것에 뜨거운 열정과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역사감각을 중요시했기에, 그는 퀘이커리즘의 '속의 빛'을 '속의 소리' 즉 '양심의 소리'로 해석했고, 이 양심의 소리는 함석헌에게 곧 '하느님의 소리' 이자 '역사의 소리'였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각 시대의 역사 뒤에는 하느님의 손길이 항상 함께 한다고 믿었고, 동시에 인류역사 자체를 하느님의 한 양상으로 보았다. 아마도 함석헌에게 있어서, 하느님의 개념이 다른 표현으로는 역사이었던 듯 하다. 이러한 함석헌의 사관(史觀)이 어떤 이에게는 그가 너무 결정론적 역사관에 치우치지 않았나 하는 의구심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으리라. 그러나 함석헌은 또한 인간이란 존재가 역사의 산물임과 동시에 역사의 창조자라고 역설한다.
더우기 함석헌은 하느님을 총체적 존재임과 동시에 일체적 존재로 이해했는데, 그는 신약성경을 예로 들어 그의 사관을 이렇게 펼쳐 나간다.
"예수는 자기 말은 자기가 하는 것이 아니요, 자기를 보내신 이가 하는 것이라 하였다. 그 보내신 이란 보통 말로 하면 역사요, 종교적인 말로 하면 하나님이다. 하나님의 아들이라 하나 역사의 아들이라 하나 다른 말이 아니다. 그러므로 한 예수를 가지고 마태는 아브라함의 자손이라 했고, 누가는 아담의 자손이라 하였고, 요한은 바로 하나님 자신이라 할 수 있는 '말씀'이라 하였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광범위한 역사의식이 없는 종교는, 삶의 단면만 보여줄 뿐 전체를 보여주지 못하기 때문에, 무익한 것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은 근본적으로 역사적인 존재이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뚜렷하고 폭넓은 역사의식에 많은 공감대를 느꼈던 것 같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리즘을 좋아하는지 이렇게 이야기 한 바 있다:
"퀘이커들의 역사를 대하는 태도입니다. 누구나 현대 사람인 담에는 역사적인 입장에 서지 않을 수 않을 수 없지만 퀘이커처럼 역사 더구나도 미래에 대해 진지하고 용감한 태도를 가지는 사람은 없습니다....자기 [퀘이커자신들] 걱정이 아니라 세계 걱정을 하기에 힘을 다하고 있습니다."
퀘이커 신앙은 영적인 통찰력과 이해에 뿌리를 두고있다. 이러한 퀘이커들의 신앙세계는 이성(理性)의 세계 이상이지만, 현실 생활에 나타날 때는 또한 아주 이성적으로 보인다. 함석헌이 종교의 신비주의적 요소와 상식주의적 요소를 모두다 중요시 한만큼 그는 퀘이커들의 '이성적 신앙'에 많은 공감을 가졌던 것 같다. 함석헌은 미래의 종교가 광신적이기보다는 과학적이어야하고, 감정적이기보다는 현실감각을 지니면서 영적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이성을 결핍한 종교는 맹목적 미신과 다를 바 없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들과 직접적으로 접촉하게 되었을 때, 동서 문화의 차이와 역사적 이질성에도 불구하고, 그는 퀘이커들의 신앙관과 그 자신의 종교관에 많은 공통점이 있음을 깨달았다. 함석헌이 1955년 쓴, 기독교인에게 있어서 기도의 의미와 하나님의 씨앗이 각 씨 들 속에 내재해 있다는 주장은 퀘이커들이 신앙관인 성속을 구별하지 않는 "전 삶 자체의 신성함(all life is sacramental)"과 많은 유사성이 있다. 함석헌의 글을 보자: "기도하란 말은 말로 하란 말이 아니다. 말로 하는 기도는 기도의 가장 끄트머리, 가장 껍데기에 지나지 않는다. 정말 기도는 몸으로 살림으로 하는 기도다." "나는 하나님은 아니요 하나님의 모습을 가진자, 자라 하나님에게까지 갈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다." 서구 퀘이커들이 고정된 교리나 신경(信經)보다는 다양하게 변해가는 '속의 빛'을 강조한 것처럼, 함석헌 또한 그의 영적 행로를 통해서 경직된 종교의 교리나 형식주의보다는 탄력성 있는 내적 신앙을 중요시했다. 일찌기 1953년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이 교회의 고정적인 교리에 수동적으로 복종하기보다는 다변적으로 변화해가는 삶을 주체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역설한바 있다: "동양의 맘이 본 생명의 근본 모양도 역(易)아닙니까? 역이란 변이란 말입니다. 인생은 변합니다. 인생이 변하는 것이라면 불변하는 교리란 있을 수 없습니다."
1959년에 함석헌이 쓴 글을 통해서 우리는 또한 그가 주장한 종교인의 역사의식과 사회 참여론이, 서구 퀘이커리즘과 많은 유사성이 있음을 살펴볼 수 있다. 특별히 이 글에서 함석헌은 '속알 밝힘'이라는 용어를 사용하는데 이것은 퀘이커리즘의 근본사상인 '속의 빛'과 아주 흡사하다. 이 글을 통해 함석헌은 한 개인이 갖고있는 역사-사회의식과 그 개인이 지닌 종교의식(意識) 사이의 상호 연관성을 강조했다:
"모든 종교 도덕은 어쩔 수 없이 '나'에서 시작하는 것이니 물론 다시 말할 것 없다. 모든 것의 터는 낱사람에 있다. 그러나 내 속알 밝힘이 산골짜기나 골방 속에서 되느냐 하면 절대 아니다...속알 밝힘은 반드시 그 어두워진 역사적 사회적 사회 살림 속에서 해야만 할 것이다...아무도 제 인격을 온전히 이루고 혼을 기르는데 역사적 사회를 떠나 외토리로 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런 점에 있어서,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들의 여러 근본정신에 이미 큰 공감대를 갖고 있었던 듯하다. 서구 퀘이커들이 주장해오던 속 생명(Inward Life)이 그에게는 존심양성(存心養成), 속의 빛(Inner Light)은 속알 밝힘이었고, 퀘이커들의 사회및 역사 감각, 종교인으로서의 과학의식 등도 모두 함석헌이 평소에 생각해 오던 바였다.
실제로 함석헌은 서구 퀘이커리즘이 얼마나 동양적인 종교인가를 재삼 강조한 바도 있다: "서양 사람에게서 나온 종교 중에서 동양 사람에게 제일 가까운 사상이 바로 퀘이커주의라고 할 수 있어요." "하워드 브린튼이 [퀘이커리즘을] 서양에서 난 종교 중에서 가장 동양적인 것을 가진 종교다 그랬는데...하여간 비슷하게 동양적인 그런 게 있는 것은 사실이오. 신비를 인정하는 거지요." 그래서 아마도 함석헌이 서구 퀘이커리즘과 동양의 고전종교와 많은 사상적 일치성을 보았던 것 같다. 특별히 함석헌은 퀘이커들이 하느님의 말씀을 듣기 위해 침묵예배를 드리는 것과 불교신자가 불도를 터득하기 위해 참선하는 과정이나, 노자가 강조한 명상을 모두 비슷한 종교적 행위로 보았다. 이런 면을 고려할 때, 함석헌의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는 하나다"는 종교적 보편주의 주장은 그에게는 극히 자연스러운 결론인 듯하다.
그는 또한 인간 정신의 발달이 조직적 세뇌나 귄위적 억압을 통해서 오는 것이 아니라 열린 마음과 자유스런 토론을 통해서 온다고 믿었다. 노자가 이야기하는 마음을 비운다는 것과 퀘이커의 침묵명상을 그는 기성사상, 기성윤리, 기성신조를 다 버리는 것으로 이해한 것 같다.
함석헌은 현대인들의 하느님에 대한 관념이 고대인들의 가지고 있던 신에 대한 고정관념과는 달라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이러한 시대변화에 따르는 관념변화의 절박한 필요성을 태아와 그 어머니의 비유를 통해서 설명했다: "아기가 어머니 뱃속에 있을 때는 전수히 어머니 몸에서 오는 것으로 살지만, 생명이 자라서 어느 시기에 오면 거기가 도리어 죽는 곳이요 어서 거기를 탈출하여야 된다는 지혜가 솟게 됩니다. 그래서 죽을 각오를 하고 거기를 빠져나오면 일순간에 새 살림이 시작됩니다." 함석헌의 위와 같은 비유를 통해서 우리는 과거의 생동하는 종교적 영감(靈感)일지라도, 그것이 끊임없이 오늘의 시대정신에 맞게 재해석, 재적용되지 않고는, 그저 화석화된 교리에 불과해진다는 교훈을 배울 수 있다. 그러므로, 종교적 신앙은 고정관념이 되어서는 안될 것이다.
기독교를 삶의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예수를 삶의 중심으로 한다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예수를 삶의 중심으로 한다는 것은 예수처럼 이타주의(利他主義)적 삶을 산다는 것이다. 예수는 남을 위해 살고 남을 위해 죽었다. 아니 그에게는 남이 아니라 모두가 자신의 분신(分身)이었다. 그는 유대인으로서 같은 유대인인 바리새인 앞에서 이방사람인 사마리아 사람을 선한 사람이라 불렀고, 바리새인들을 독사의 자식이라 부른 반면 선한 사마리아 사람에게 구원이 있을 것이라 했다. 그럼 결국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이타주의적인 삶을 사는 사람, 남을 위해 사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아닐까. 기독교의 교리를 열심히 암송하고, 성경을 믿는다고 선포하는 사람이 기독교인이 아니고, 자기 이웃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 같이 여기는 사람이 예수의 정신대로 사는 참 기독교인일 것이다. 함석헌이 생각한 기독교인 된다는 것은 결국 이러한 이타주의적인 삶을 사는 것을 말한 것이 아닐까.
종교적 보편주의의 입장에 선 함석헌은 또한 퀘이커리즘과 노장사상의 평화주의 사이에 유사성을 느꼈다. 퀘이커리즘과 노장사상사이에 여러가지 비슷한 면이 있는 것만큼,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을 '새로운 종교'로 이해하지는 않았다. 본인도 영국 퀘이커회의 회원으로서 퀘이커리즘이 근본적으로 기독교와 크게 다르지 않다는 결론을 내린다. 분류상으로 퀘이커리즘은 비국교도 전통에 속하는 기독교의 한 종파이다.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이 새종교의 탄생을 위해 태아(胎兒) 역할을 할 것으로 보았다. 그의 표현을 보자: "퀘이커리즘은 내가 생각하는 새 종교는 아닙니다. 그러나 미래의 새종교는 퀘이커리즘과 비슷한 형태의 종교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그러한 가능성의 씨앗이 퀘이커리즘 안에 있습니다." 특별히 퀘이커들의 단체적인 명상을 함석헌은 인류의 새 종교를 위한 한 가능성의 씨앗으로 보았다. 그는 서구 퀘이커들의 명상과 동양의 명상인 참선과 어떻게 다른가를 지적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參禪)과는 다릅니다. 퀘이커의 명상은 동양의 참선처럼 개인적인 명상이 아니라 단체적인 명상입니다. 퀘이커들은 그들이 단체로 명상할 때 하느님이 그들 중에 함께 임재한다고 믿습니다. 동양의 참선은 비록 열 사람이 한 방에서 명상하더라도 개인주의적입니다. 나는 내 참선이고, 저 사람은 저 사람 참선이기 때문에 모래알처럼 되는 것입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이 하워드 브린튼의 {퀘이커 300년}을 읽었을 때 그는 퀘이커들의 단체 및 협동 정신에 큰 감동을 받았다. 특별히 {퀘이커 300년}에서 브린튼이 퀘이커들의 '속의 빛'이 개인적인 것일 뿐 아니라 단체적인 것임을 강조했던 것을 상기하며,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이 그의 사상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이야기했다:
"내가 {퀘이커 300년}을 읽는 동안에 새로 얻은 것 중의 가장 큰 것은 공동체 정신입니다. 나는 이날까지 대체로 자유주의 속에서 살았으니 만큼, 개인주의적인 생각을 면치 못했습니다. 그래서 어리석고 교만하게도 세상이 다 없어져도 나 혼자만으로도 기독교는 있을 수 있다 했습니다. 못할 말이었습니다. 이제 전체를 떠난 개인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동양사회가 역사를 통해 강한 집단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서구의 퀘이커리즘과 비교해 함석헌은 동양전통이 전체를 위한 자발적 협동정신이 부족하다고 보았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전체를 위한 주체적 협동정신이 결여된 것을 동양의 결정적인 한계로 보았다. 퀘이커리즘을 통해 함석헌은 전체의식이 없는 한 개인의 영향력이 얼마나 미약한 것인가를 깊이 깨달았다. 함석헌이 갖고있던 전체의식이나 전체론은 결국 독단적인 통치를 견제하기 위한 여론정치를 말하는 것이 아닐까.
여기서 우리는 왜 동아시아의 종교나 노장사상이, 서구의 퀘이커리즘과 비교해 전체를 위한 주체적 협동의식을 결여해왔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역사를 통해 강력한 동아시아의 전제군주들이 씨 들의 독창성이나 주체의식을 고무하기보다는, 무조건적 복종심과 숙명주의 인생관을 불어넣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경직된 권력풍토는 동아시아에 집단의식의 발달을 유도해 왔다.
반면 역사를 통해 서구 퀘이커리즘의 주체적 협동의식은 사회전체를 위한 각종 개혁운동이나 인권운동의 활동 등으로 활발하게 표출되어 왔다. 동양의 노장사상은 현실초월적인 면이 많기 때문에 도교인들 역시 현실의 문제에 부딪혔을 때 초월적이거나 '이상적'인 경향이 강했다. 너무 이상에만 집착하면 현실세계를 다루는 감각이 뒤떨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일 것이다. 함석헌은 초월적인 노장사상에 매료되었지만, 그는 동시에 어떤 종교나 사상도 사회나 역사를 움직이는 힘이 되려면 공적인 증언으로 나타나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함석헌에게 있어서 이 공적인 증언은 산골짜기 속에서의 조용한 명상보다는 세속에서의 직접적인 행동이었다.
한편 함석헌이 '죄'를 범한 후 외로움과 고독감에 그를 위로해줄 친구를 그리워하고 있을 무렵인 1961년, 그런 함석헌에게 친구가 되고자 서구 퀘이커들이 나타났다. 훗날 함석헌은 무엇이 그를 서구 퀘이커들과 극도로 가깝게 만들었는지 술회했다: "내가 퀘이커리즘을 공부한 후 퀘이커가 되기로 결심했던 것이 아닙니다.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오갈데가 없게 된 나는 퀘이커모임에 나갔습니다." 이때가 1961년 1월이었다. 1958년 2월 이래로 미국 및 영국 퀘이커교도들은 이윤구를 비롯한 소수 한국인들과 함께 서울에서 퀘이커 예배모임을 갖고 있었다.
함석헌의 외로움은 그가 죄를 범한 후 더욱 극대화 되어갔다. 함석헌은 스승 유영모와 주변인들로부터 '버림받은 이단자'의 다급한 처지로서 자신을 위로해줄 영적인 안내자를 절실하게 구했던 것 같다. 서구 퀘이커들은 이런 절박한 상황에 있는 함석헌을 따뜻하게 맞아주었고, 기꺼이 그의 영적인 친구가 되어 주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퀘이커리즘과 극도로 가깝게 된 동기는 신학적으로 퀘이커사상에 어떤 큰 동감을 느껴서라기보다는, 그가 절박한 상황에 처해 있었을 때 퀘이커들이 다정한 그의 영적 '친구'가 되어 주었기 때문이었다. 점차적으로 퀘이커들과의 직접적인 만남을 통해서 함석헌은 또한 사상적으로도 퀘이커리즘에 많은 공감을 느껴가기 시작했다. 이 당시 함석헌의 심정을 공자(孔子)의 말 한마디로 적절히 요약 할 수 있을 것이다: "친구가 있어 멀리로부터 찾아오면 어찌 즐겁지 아니한가!"
"전환점"
1962년, 미국 퀘이커들은 필라델피아 있는 펜들힐 퀘이커 연구원으로 10개월간 함석헌을 초대했다. 다음해인 1963년 봄, 영국 퀘이커들 또한 그를 버밍험에 있는 우드브룩 퀘이커 연구원으로 초대했다. 30년 후인 1990년 봄, 필자는 우드브룩에 3개월간 머물며 함석헌이 그곳에 남긴 발자취를 찾아보았다. 1963년 우드브룩에 머물면서 함석헌은 영국 퀘이커들에게 한번 한국사에 대한 강의를 영어로 했는데 그는 그의 영어발음 때문에 고민을 많이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그는 영국인 퀘이커들에게 충분한 감동을 준 것으로 보였다. 그때 한 영국인 퀘이커는 함석헌의 영어강의가 "언어의 장벽을 무너뜨리는 감동을 전했다"고 기록했다. 펜들힐과 우드브룩에 머무르면서 또한 함석헌은 그가 범했던 죄를 정화시키고자 절실하게 힘썼다. 동시에 퀘이커리즘을 본격적으로 공부하면서 함석헌은 퀘이커의 자율적 원칙에 깊이 매료되었고 많은 공감을 느꼈다.
함석헌이 퀘이커들과 많은 사상적 공감을 느꼈음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그는 특별하게 퀘이커 회원이 되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함석헌은 그때의 심정을 이렇게 회상했다: "처음에는 퀘이커의 회원 됨을 그렇게 중대하게 생각하는 데 반대하는 생각이었습니다. 회원과 참석자를 그리 구별할 것이 무엇이냐 했습니다." 이것은 아마도 그의 1953년 "대선언"이후 함석헌이 어떤 특정 종교의 조직에 회원으로 가입하는 것을 꺼려했기 때문이었으리라. 그의 '조직 기피증'은 퀘이커회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때 함석헌은 그 자신을 외딴 들판의 고독한 방랑자로 묘사했다: "나는 소속된 집이 없는 승려처럼, 밤에는 시원한 뽕나무 아래서 한숨 자고, 다음날 아침 유랑(流浪)을 계속하는 나그네 같은 삶을 살았습니다."
1967년 함석헌은 태평양 퀘이커 연회의 초청으로 미국 북 캐롤라이나의 세계 퀘이커 대회 모임에 참석하게 되었고, 이때 함석헌은 퀘이커회의의 공식 회원이 되기로 결심하게 되었다. 그럼 무엇이 '종파 기피증'에 있었던 함석헌을 퀘이커회의 공식 회원이 되도록 만들었을까? 함석헌은 그때의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토로했다:
"나는 퀘이커들의 우의(friendship)에 대해 책임감을 느꼈습니다. 나 자신으로 하면 새삼 교파에 들어가는 것도 아니요, 회원이 되고 아니된 것을 따라 다름이 조금도 있을 것 없이 나는 나지만 그들이 나를 대해주기를 아주 두텁게 대해주는데 내가 언제까지나 옆에서 보는 사람으로 참고하는 있는 것은 너무도 의리상 용납될 수 없는 일, 너무도 무책임하고 잔혹한 일이라 생각됐습니다...퀘이커리즘은 신비파 운동에서 일어났지만 다른 모든 신비파들이 빠지는 극단의 주관주의에 빠지지도 않고, 그렇다고 다른 모든 큰 교파들이 하는 것처럼 권위주의에 되돌아가지도 않습니다...퀘이커가 완전한 종교란 말은 아닙니다. 가장 훌륭한 종교란 말도 아닙니다. 내가 지금 나가는 방향에 있어서 그렇게 하는 것이 마땅하다, 그 다음은 모릅니다. 적어도 지금은 마땅하다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아마도 함석헌은 영원한 구도자였던 것 같다. 마침내 1967년 함석헌은 정식으로 퀘이커의 회원이 되었고, 동시에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씨 의 목소리가 되었다. 그러나 1965년 이래, 벌써 함석헌의 사진과 그에 대한 기사는 미국 퀘이커들의 잡지인 {프랜드 저널}(Friends Journal)에 "한국의 간디 퀘이커 함석헌"으로 등장했다. 실제로 퀘이커들은 회원과 참석자들을 크게 구별하지 않는다. 함석헌이 처음 만난 미국인 퀘이커 아터 미첼 (Arthur Mitchell)이 함석헌을 놓고 한 증언이 그러한 퀘이커들의 태도를 반영해준다. 미첼이 함석헌을 처음 만난 후 그 인상을 이렇게 말했다: "함석헌, 당신은 퀘이커 회원이 되기 이전에 이미 퀘이커였습니다." 미첼의 함석헌에 대한 이러한 증언은 아주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있다. 비록 함석헌은 퀘이커들의 비형식주의, 반교리주의, 검소함, 평등주의, 평화주의, 사회개혁적인 태도등에 매료되었지만, 그가 퀘이커의 회원으로 가입하기 이전에 함석헌은 벌써 그 안에 이러한 요소들을 지니고 있었다.
반면에, 함석헌의 전(前)신앙이던 무교회운동은 "오직 성서만으로"의 원칙에 입각해 있었고, 사제지간의 수직적 관계와 충성심을 강조했다.
이러한 면을 염두에 두면 함석헌이 왜 퀘이커리즘에 매료되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 같다. 함석헌은 그가 왜 퀘이커에 매료되었는지 그 이유를 이렇게 이야기했다:
"나는 갈수록 퀘이커가 좋습니다. 좋은 이유는 그들은 형식을 차리지 않기 때문이요 교리나 신학 토론에 열중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목사도 없고 신부도 없고 아무 차별이 없습니다. 모든 사람이 꼭 같은 자격으로 앉아 누가 누구를 가르치겠다는 것도 누가 뉘게 배우겠다는 것도 없이 둘러앉아, 그저 하나님께서 그 가운데 나타나 계시기를 기다리는 것뿐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에 오셔요', '이것 아니고는 구원 없습니다'식의 전도가 없고, 있다면 그저 밭고랑에 입 다물고 일하는 농부처럼 잘됐거나 못됐거나, 살림을 통해서 하는 전도가 있을 뿐입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마음에 드는 것은 종교 냄새가 별로 나지 않는 것입니다. 그들은 자연스럽고, 속이 넓으면서도 정성스럽습니다. 누가 와도, 불교도가 오거나, 유니테리안이 오거나, 무신론자가 온다해도, 찾는 마음에서 오기만 하면 환영입니다. 그러니 참 좋지 않습니까?"
함석헌의 퀘이커에 대한 언급을 통해서 우리는 퀘이커의 평등주의와 다른 종교에 대한 편견이 없는 태도를 엿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퀘이커리즘의 평등사상에 대한 애착에도 불구하고, 실제로 한국 퀘이커 모임에서 함석헌의 위치는 일본 무교회 모임에서 우찌무라의 위치와 별로 다를 것이 없었다. 다른말로, 대부분의 한국 퀘이커들은 퀘이커리즘 자체에 대한 흥미 때문에 퀘이커 모임에 출석했다기보다는, 함석헌의 감화를 듣기 위해서, 혹은 예배모임 후에 함석헌이 이끄는 성경공부 모임에 참석하기 위해서 퀘이커모임에 출석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므로, 서구의 퀘이커 모임과는 달리, 한국의 퀘이커 모임에는 진정한 평등사상이 부족했다. 요약하면 한국 퀘이커들의 초점은 퀘이커리즘 자체였기보다는 함석헌이었다. 이러한 한국 퀘이커 모임에서 함석헌의 위치는 전통 유교적인 틀속에서 동아시아의 전형적 '스승'같은 함석헌의 모습을 보여준다. 함석헌과 다른 한국 퀘이커들과의 관계는 공자와 그 제자들과의 관계를 우리들에게 연상시킨다. 한국 퀘이커들이 함석헌을 동등하고 평등하게 대했다고 보기는 어렵고 특별한 존경심으로 대우했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함석헌 사후에 한국 퀘이커 모임이 침체의 길로 접어든 것은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한 한국 퀘이커 모임의 평등주의 결여 현상에도 불구하고, 전체적으로 퀘이커리즘은 후기 함석헌의 삶과 사상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특별히 퀘이커리즘은 함석헌에게 종교인으로서의 사회적 책임감과 타종교에 대한 종교적 관용성을 더욱 일깨워 주었다. 서구 퀘이커들이 종교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그들이 속한 사회의 각종문제에도 지대한 관심과 참여의식을 보인 만큼, 함석헌은 퀘이커리즘을 통해서 보다 넓은 안목과 다양한 시각을 갖출 수 있었다.
더우기 부수적으로, 함석헌의 남한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활동들이 서구 퀘이커들에 의해서 견고하고 확실하게 후원과 지지를 받았다. 아마도 진리란 함석헌이 지적한 것처럼 올바른 인간관계의 정립에 있지 않을까: "길은 인간관계에 있습니다. 눈은 별[동양의 노장사상]을 보지만 가는 것은 땅을 디디는 발[서구의 퀘이커리즘]입니다." 결국 모든 인간의 문제는 '발과 별'의 조화에 있지 않을까. 함석헌이 서구의 퀘이커들과 친밀한 인간관계를 확립하게되자, 서구의 퀘이커들 또한 함석헌의 인권운동과 민주화를 위한 노력들을 헌신적으로 지지해 주었다. 특히 영국과 미국의 퀘이커들은 함석헌이 유신체제 아래서 민주주의를 위해 고난을 받고 있을 때, 국제 여론을 환기시킴으로서 함석헌의 인권운동에 전폭적인 지지를 보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소위 '명동사건'으로 인해 독재자 박정희에 의해 구금 당하고 있었을 때, 영국의 퀘이커 주간지인 {프랜드}(The Friend)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함석헌 감금되다; -- 함석헌은 '3.1 구국선언'에 이어 다른 8명의 한국 기독교인들과 함께 체포되었다. 함석헌이 박정희 정권에 의해 체포된 것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 세계 퀘이커 협의회(Friends World Committee for Consultation)는 박대통령에게 함석헌을 비롯한 다른 구금자들을 조속히 석방시켜 줄 것을 항소했다. 더불어 우리 영국 퀘이커회는 국제 평화관계위원회 간사들과 합동으로 재영 한국 대사관에 같은 종류의 항소문을 보냈다. 이 항소문을 통해서 우리는 함석헌의 종교적 원칙에 입각한 비폭력주의와 그의 인도주의를 위한 전적인 헌신을 언급했다. 미국 퀘이커회 (American Friends Service Committee) 또한 박대통령에게 항소문을 보냄과 동시에, 포드 대통령에게 서면을 보내 남한의 인권이 극악하게 무시되는 상황에서는 미국이 박대통령에게 경제원조를 중지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동아시아의 도교협회나 불교회로부터 함석헌이 그의 민주화 운동을 위해 위와 같은 국제적 차원의 지지와 후원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함석헌은 아마도 그래서 현대 세계정세를 움직이는데 서구의 실제적 영향력과 효율성을 감지했던 것 같다. 함석헌은 현대세계에 있어서 서구의 두드러진 영향력을 이렇게 지적했다:
"지금 이 세계를 이만큼이라도 유지해가는 게 뭘로 되는지 아십니까?...완전히 기독교적은 못되지만, 그래도 현실을 유지해가는 것은 서구적인 지성이에요...서구적인 지성이란 거는 17세기 18세기 근대에 오면서 발달한 건데, 그건 사실은 기독교 신앙이 아니고는 안됩니다." 결과적으로, 서구 인권운동그룹의 지지와 후원이 없었다면, 함석헌의 민주화를 위한 노력과 활동들은 박정희나 전두환의 폭정에 의해 더욱 제약받았을 것이라는 결론이 나온다. 실제로 서구 퀘이커들의 지속적인 국제적 지지를 받아가며 함석헌은 더욱 효과적이고 효율적으로 그의 인권운동과 민주화 운동을 전개해 나갈 수 있었다.
함석헌은 기독교가 로마의 콘스탄틴 대제(기원후 280-337)이후 지배이념화 되고 정치제도권과 결탁하므로서 씨 과 생활을 함께 했던 예수정신의 의미를 상실했다고 믿었다. 콘스탄틴 대제는 그의 통치권을 강화하기 위한 한 방편으로 기원 후 313년 기독교를 공식 로마제국의 종교로 채택했다. 이때를 기점으로 교회는 로마정치 권력의 시녀로 전락했다. 함석헌은 박해 받던 자, 씨 의 종교였던 기독교가 이때부터 통치자, 박해하는 자의 종교로 변질되었다고 보았다.
그때부터 영의 종교였던 기독교는 교리의 종교가 되기 시작했고, 서구 제국주의의 침략 정책을 묵인하는 앞잡이가 되었다. 이런 맥락에서 함석헌은 국법에 의하여 공인을 필요로 하는 국가종교는 늙은 종교, 침체된 종교로 믿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교회가 세속권력으로부터 공인을 얻어서 국가교회가 되어가는 것은, 교회가 자체의 정신적 통솔력을 잃었다는 증거이고 결국 그것은 세속적 정치 세력의 간섭을 받게 되는 시작이었다. 아마도 그래서 함석헌이 영국의 국가종교가 아닌 비국교, 퀘이커리즘에 매료되었던 것이 아닐까. 분명히 국가종교는 국가의 통치 이데올로기로서 국가의 정책과 충돌을 피하고 보조를 맞추려는 경향이 강하다.
함석헌의 정치-사회 정의의 추구를 위한 직접적인 소위 현실참여는 또한 안병무와의 깊은 만남에 뿌리를 둔다. 1963년 여름, 미국 펜들힐과 영국 우드브룩 연구소에서 퀘이커리즘을 공부한 함석헌은 유학중인 안병무를 만나러 독일을 방문했다. 안병무는 그 당시 함석헌의 모습에서 구약 성경에 등장하는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 모세의 모습을 연상했다고 술회했다. 특히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가 되기 이전에 "말이 어눌한 사람으로서" 어쩔 수 없이 광야생활을 하는 모세의 모습을 안병무는 함석헌의 모습에서 연상했던 것 같다. 모세가 그 자신을 이스라엘 민족 지도자가 되기에는 부족한 사람으로 생각했던 것처럼, 함석헌도 그 자신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이끌기에는 부족한 사람으로 여겼다.
안병무가 직접 운전하는 "씨 의 수레 (폴크스바겐: Volkswagen)"를 타고 함석헌은 꿈에 그리던 북유럽 나라들을 한달간 여행했다. 이때를 함석헌은 그 생애에서 가장 행복한 때라고 술회하기도 했다. 그들은 여행 중에 한국의 장래를 위한 많은 대화와 토론을 나누었던 것 같다. 특히 안병무는 함석헌이 이제는 박정희 군사정권에 대항해 직접적인 행동을 취해야 할 것이라고 끈질기게 촉구했다: 1961년 군사정변이래 정권을 장악하던 박정희가, 함석헌이 외유 중이던, 1963년에 이르러는 이미 공화당을 만들어 놓고 대통령이 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안병무로부터 박정희에 관한 신문기사를 전해 읽던 함석헌은 흐르는 눈물 때문에 하던 식사를 끝낼 수 없었다. 곧 함석헌은 그의 인도와 아프리카 여행계획을 취소하고 귀국길에 올랐다. 귀국 즉시 함석헌은 대중 집회와 강연을 곳곳에 열어서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함석헌은 자신이 정치에 참여하게 한 결정적인 동기를 안병무가 주었다고 고백했다. 물론 함석헌은 이 전에도 그의 글과 말로서 사회-정치 비판을 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때 안병무와의 만남을 계기로 함석헌은 그의 생애에 처음, 직접적으로 대중집회를 주최해서 정권의 부당성을 비판했다. 독일로부터 급히 귀국한 함석헌은 안병무에게 그의 결의가 담긴 서신을 보냈다. 이때 함석헌의 글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얼마나 남한의 민주화를 위해 비장한 각오를 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일은 드디어 벌어지고 말았습니다...나는 이제 결심했습니다. 극한 투쟁을 하기로. 비폭력의 국민운동을 일으켜 민정(民政)을 수립하도록 하자는 것입니다. 물론 나야 정치가는 아니지만 여론을 일으키도록 하렵니다. 지방순회도 생각하고...요새 안형 생각을 자꾸 합니다...1963년 7월 24일"
독일에서 귀국한 이래 함석헌은 서울 시민회관, 오산고교, 대광고교 등에서 시국문제를 중심으로 다양한 대중 강연회를 열었다. 이 강연회 등을 통해서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을 정면으로 지적했다. 함석헌이 주최한 각 공개 강연회에는 약 8만에서 9만명의 씨 들이 모여들었다. 결국 함석헌의 직설적인 박정권에 대한 비판은 특히 남한의 지식층과 대학생층의 의식개혁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다. 함석헌의 이러한 언론자유와 민주화를 위한 노력에 대한 공헌으로, 1963년 그는 사상계사로부터 첫 월남언론상을 수상 받기도 하였다. 함석헌은 여러 번의 대중집회와 경찰들과의 직접적인 충돌경험을 통해서, 한국의 사회-정치 문제에 대한 책임감과 인권부재현상에 대한 의식을 더욱 뚜렷하게 깨닫기 시작했다. 함석헌은 결국 박정희 정권과의 직접적인 충돌과 체험을 통해서 절망에 빠져있던 이상주의자로부터 시국을 진단하는 "현실주의자"로 변모한 것이다.
대중공개강연 이외에도 함석헌은 주요 일간신문과 월간잡지에 5.16의 부당성과 박정권 비판에 대한 글을 연속적으로 기고했다. 특히 {동아일보}에 기고한 글을 통해서 함석헌은 "불의에 대해 침묵을 지키는 것은 결국 그 불의에 대한 공범자"라고 선언하기까지 했다. 1963년 {사상계} 8월호에 함석헌이 기고한 [3천만 앞에 울음으로 부르짖는다]라는 글을 통해서 우리는 박정권 정통성문제에 대한 그의 기탄없는 직언을 엿볼 수 있다:
"박정희 님, 내가 당신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라고도, 육군대장이라고도 부르지 않는 것을 용서하십시오. 나는 당신을 양심을 가지고 이성을 가지는 인간 박정희 님으로 알고 대하고 싶습니다...여러분은 여러 가지 잘못을 범했습니다. 첫째 군사 쿠테타를 한 것이 잘못입니다. 나라를 바로잡잔 목적은 좋았으나, 수단이 틀렸습니다. 그리고 수단이 잘못될 때 목적은 그 의미를 잃어버립니다...여러분은 아무 혁명이론이 없었습니다. 단지 손에 든 칼만을 믿고 나섰습니다. 그러나 민중은 무력만으로는 얻지 못합니다...큰 잘못은 혁명공약을 아니 지킨 것입니다...군정을 2년간 하겠다는 말을 듣고 [민중은] 깜짝 놀랐습니다...그러나 2년이 다 되어도 당신들이 물러갈 생각은 아니하고 미리 정당 조직을 하는 등 박정희 님이 출마한다 했다 아니한다 했다 하는 데 아주 실망을 해버렸습니다."
윗 글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함석헌은 종교적 문제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 문제들에 관해 전반적으로 자신의 입장을 밝혔다. 함석헌은 이러한 두려움 없는 외침을 통해서 남한사회에 '한국의 양심'으로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제 함석헌은 그가 원하던 원하지 않던 간에 남한사회의 정치적 분규에 깊이 말려들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은 그의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인 1961년까지 동서양의 여러 종교와 철학을 섭렵하는 '종교적 방랑자'의 길을 걸었었고, 이것은 또한 모세가 이스라엘의 민족지도자로서 공생애에 들어가기 전 광야에서 40년간 '방황기'를 가진 것을 우리에게 연상시킨다.
한편 함석헌의 직설적인 조언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1960년대의 한국 정치는 한사람의 손안에서 놀고있었다. 박정희는 남한 정치의 모든 분야를 자신만의 손아귀에 쥐는 일인 독재체제를 강화시켰고, 이 과정에서 그의 조카사위이며 심복인 김종필도 제외되기 일쑤였다.
박정권의 성격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해서 우리는 박정희 개인의 역사적 배경을 간략하게나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일본 식민지 시절, 몇몇 한국인들은 자발적으로 일본군에 지원할 수가 있었다. 그들 중 일본 제국주의통치체제에 적극적 충성심을 보인 한국인들은 일본군의 초급장교로 진급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고, 박정희는 그런 한국인 중의 하나였다. 특별히 만주군관학교시절 일본제국주의에 대한 박정희 생도의 충성심은 잘 알려져 있다. 그후 동경 군관학교 생도시절, 박정희는 그의 한국인으로서의 뿌리를 감추려고 시도했다. 이를 안 동경 군관학교 교장인 나구모 치우찌 (なぐも ちゅいち) 장군은 그의 하급자인 일본인 장교들이 모인 장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다까끼 [박정희]는 출생으로는 조선인일지 모르나, 우리 일본왕을 향한 그의 충성심은 보통 일본인들보다 훨씬 열렬하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그의 일본인 급우들로부터 "특등 일본인(tokuto Nipponjin)"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박정희는 일본군관학교 시절 다까끼 마사오(たかぎ まさお) 라는 일본이름을 사용했는데, 후에 그가 만주에서 일본군인의 신분으로서 쓰던 이름은 오까모토 미노루(おかもと みのる)였다. 일본군에서 이중 이름을 사용했다는 것은 박정희가 한국인으로서 같은 한국인 광복군과 독립군을 토벌하는 일에 정보대 요원으로 활약했었다는 것을 암시한다. 일본군들은 만주에서 한국 독립군들의 무장 궐기를 진압하기 위해 일본군안에 한국인들을 진압군으로 이용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해서 보면, 일제시대부터 박정희가 철저한 친일파 한국인이었다는데는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다.
1965년 7월, 박정희는 전국적인 규모의 반대 데모에도 불구하고 한일국교정상화를 강행했다. 박정희는 경찰력을 동원하여 야당의원들의 반대를 무력으로 묵살시켜 버렸다. 결국 야당의원들은 이에 대항하여 국회등원을 거부했다. 박정희는 한일국교정상화를 반대하는 서울대학교에 군대를 진입시켜 대학생들의 데모를 진압했다. 일본을 향한 그의 정책을 관철시키기 위해 박정희는 남한의 전국 대학에 휴교령을 선포하고 반대데모를 하는 시민들과 학생들을 가차없이 체포, 구속했다. 이때 함석헌은 박정희의 한일국교정상화 정책에 반대하여 삭발을 하고 2주간이 넘게 단식투쟁을 벌였다. 그리고 함석헌은 박정희 정권의 부당성을 비판하는 내용의 글을 일간신문에 계속해서 투고했다.
비록 함석헌은 사회정의를 향한 뚜렷한 의식을 가지고 있었지만, 그의 사상과 이념을 현실에 효율적으로 적응시킬만한 정치적 조직력과 동원력을 갖추고 있지 못했다. 장준하를 통해서 함석헌은 그의 이념을 사회-정치 현실에 적절하게 실행시키는데 필요한 구체적인 방안과 방법론을 배웠다. 함석헌과 장준하와의 관계는 1956년 1월 함석헌이 장준하가 주관하는 {사상계}지에 [한국의 기독교는 무엇을 하려는가?]라는 세태 풍자적 글을 기고한 후부터 급속히 가까워 졌다. 이치석은 함석헌과 장준하의 '상호의존'적인 관계를 제갈량(181-234)과 유비(161-223)의 관계처럼 묘사했다
한사람은 현인(賢人)에 깊은 사상가, 다른 한사람은 뛰어난 조직력을 갖춘 왕성한 행동가.
함석헌의 장준하에 대한 생각과 배려는 특별했다. 1967년, 장준하가 감옥에 갇혀 있었을 때, 함석헌은 주변의 강력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장준하를 국회의원으로 당선시키기 위해 대대적인 규모의 캠페인을 벌렸다. 결국 장준하는 함석헌의 분투덕분에 한국역사상 처음으로 옥중당선하는 국회의원의 영광을 누렸다. 더우기 장준하는 자신이 감옥에 갇혀 있을 때도, {사상계}잡지의 공식적 주간(主幹)으로서, 그를 면회 온 함석헌에게 창살 너머로 {사상계}를 위해 글을 써줄 것을 계속해서 종용했다. 또한 함석헌은 이렇게 감옥 살창 너머로 하는 장준하의 부탁을, 개인적인 부탁으로 여기기보다는, 역사의 명령, 하나님의 명령으로 여겼다.
한편 1960년대 한국 개신교인들은 '교회 성장 운동'이란 구호 아래 그 회원의 확보를 위해 전력을 다했다. 이시기에 한국교회의 복음주의운동은 전국적으로 급속히 확산되었으며 동시에 기독교 라디오 방송국이 창설되었다. 1960년대 한국 개신교인은 그 수적인 면에 있어서 약 2배이상 증가했고, 결국 전국민의 6%가 개신교인이되었다. 그러나 이 당시 한국교회의 급속한 양적인 성장에 비해 질적인 개혁이 뒤따르지 못했다.
1960년대의 한국교회의 빛나는 성장운동과는 대조적으로 같은 시기에 한국의 정치적 상황은 재난의 연속이었다. 1969년 6월 20일, 야당 국회의원 총재 김영삼은 박정희가 동원한 정치 깡패들로부터 산성(酸性)공격을 받았으나 심한 부상을 간신히 모면했다. 이어서 박정희는 1969년 9월 야당의원들이 국회 등원을 거부한 가운데 삼선개헌을 국회에서 '날치기'로 통과시킴으로서 세번째 대선에 정권을 장악할 준비를 갖추었다. 한국의 정치적상황은 마치 희극처럼 보였으나 실제로 그것은 비극의 시작이었다.
5.2. {씨 의 소리}와 "죽을때까지 이걸음으로" (1970-1989)
"강(强)을 약(弱)으로 제(制)함"
1960년대를 통해서 박정희는 중단없는 경제성장과 반공을 그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그러나 1970년대 들어서 국제경기나 국내경기는 중동(中東)의 '오일 위기'로 불황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고, 반면에 미국과 중공은 소위 핑퐁외교로 데탕트 분위기를 조성해 나갔다. 박정희는 이제 그의 정권유지를 위해 경제성장과 반공 대신에 새로운 통치이념을 '발명'할 필요를 느끼기 시작했다. 결국 박정희는 반공에 덧붙여 남한을 언론을 조정하기 위한 수단으로 '국가안보'를, 그리고 인권문제를 제압하기 위한 수단으로 유교의 충효사상을 그의 새로운 통치이념으로 내놓았다.
한편 함석헌은 1970년 4월 19일, 4.19 혁명 10돌이 되는 날, 한국의 민주화와 언론의 자유를 증진시키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월간지 {씨 의 소리}를 창간했다. 발간사를 통해서 함석헌은 한국의 언론이 사회정의를 바로잡기 위한 수단이 되어야 할 것이라고 촉구했다: "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 함석헌은 그의 표현처럼 '타고난 민주주의자'로서 한국 씨 들과의 직간접적인 교감을 통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발견하고자 노력했다. {씨 의 소리}를 통해서 함석헌은 문어체가 아닌 구어체 혹은 '함석헌체'의 글로 그의 한국 정치-사회에 대한 느낌을 직접적으로 씨 들에게 전했다. 1970년대를 통해 {씨 의 소리}는 박정희정권의 언론탄압에 직설적으로 대항하는 유일한 매개체였다. 함석헌은 {씨 의 소리}를 통해 박정권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한국의 무력하고 겁많은 지식인들, 특히 언론인들을 거침없이 비판했다.
1971년 대선에서 간신히 김대중을 제압한 박정희는 곧 유신헌법을 공포하여 국회를 해산 시켰고 그의 독재권을 강화 시켰다. 특히 민청학련사건을 통해서 박정희는 그의 정권에 비판적인 8명의 대학생을 사형에 처했다. 70년대를 통해서 박정희의 공포정치는 긴급조치 등을 통해 계속해서 박차를 가했고, 씨 들은 두려움과 불안함 가운데 매일 매일을 보내야 했다. 함석헌은 침체와 패배주의에 빠진 씨 들에게 그의 말과 글 그리고 행동을 통해서 희망과 격려를 심어주고자 힘썼다. 사실상 야당이 해체된 가운데 함석헌은 인권향상과 민주주의를 위한 재야(在野)의 지도자로 부상했다. 더불어 함석헌의 제자인 안병무나 김동길등도 {씨 의 소리}를 통해서 그들의 생각이나 입장을 한국사회에 발표하게 되었고, 결국 함석헌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한 인권운동에 앞장서게 되었다.
박정희는 눈에가시 같은 {씨 의 소리} 첫호가 출판되자 곧 폐간조치를 내렸다. 그러나 국가를 상대로 한 항소에서 함석헌이 법정에서 승리함으로서 {씨 의 소리}는 부활되었다. 박정희의 {씨 의 소리} 죽이기는 계속 되었고, 결국 1972년 10월 함석헌은 박정희가 선포한 국가비상계엄령으로 체포되는 수난을 거듭했다. 소용돌이치는 외적인 수난에도 불구하고 이 당시 함석헌이 쓴 글을 살펴보면 그가 여전히 내적인 희망을 잃지 않은 것을 볼 수있다: "아무리 강한 것도 영원히 강한 것은 없고, 아무리 약한 것도 영원히 약한 것은 없습니다...근시안적으로 보면 진리가 항상 패배하는 것 같지만 크게 보면 진리가 항상 승리한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위와 같은 함석헌의 글은 그가 얼마나 노장사상의 낙관주의로부터 영향을 받았는가를 또한 반영해준다. {도덕경}의 한 예를 통해서 우리는 노자의 낙관론을 엿볼 수 있다: "세상에 물보다 부드럽고 약한 것은 없어. 그러나 부드러운 물이 단단한 바위를 뚫지. 결국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정복하고 부드러운 것이 단단한 것을 정복해. 진실은 역설(逆說)적이야."
함석헌이 의식했건 안했건 1970년대에 접어들어 그의 이름은 한국의 민주화 운동을 위한 지도자중의 한사람으로 세계여론에도 알려지기 시작했다. 나중에 함석헌의 생애에서도 종종 일어나는 것처럼 그는 이제 군사정권의 핵심부원들에게 '골칫거리'가 되기 시작했다.
유교에서는 충효를 모든 덕목의 근본으로 간주한다. 유교의 윤리는 개인적인 관계에서 뿐 아니라 개인과 통치자와의 관계를 계급적 관계로 규정한다. 1970년대를 통해서, 박정희는 유교의 충효개념을 크게 강조하였다. 이러한 유교의 이념을 선별적으로 강조함으로서 박정희는 한국 노동운동에 고삐를 조이고자 했다. 유교에서 개인은 소아(小我)로서 보조적인 존재인 반면 통치자는 최고 주권을 가진 대아(大我)적인 존재이다.
특별히 흥미있는 것은, 중국인이 이해한 개인주의(個人主義)라는 것은 "각자가 각자를 위하여"라는 부정적인 의미이고, 자유(自由)라는 것은 "조절되지 않은 충동"으로 통치자의 입장에서는 역시 부정적인 개념이다. 그러므로 중국의 유학자가 존 밀(John Start Mill: 1806-1873)의 유명한 저서인 {자유론}(On Liberty)을 중국어로 번역했을 때 {권계론}(權界論)으로 번역한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중국인 유학자는 서구의 자유라는 개념을 "권력에 한계와 제한을 가하는"개념으로 밖에는 이해할 수 없었다. 개인의 권리와 자유 그리고 법앞에서 통치를 하는 자나 통치를 받는 자가 모두 동등하다는 개념은 유교에서는 역시 기괴한 개념이었다. 공자에게 정치인은 아버지와 같은 존재였고 그러므로 그는 강력한 가부장적인 정권을 이상형으로 보았다. 이러한 공자의 사상은 유교의 역사를 통하여 변하지 않는 근본적 교리로 남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집고 넘어갈 것은 공자자체는 위대한 인본주의자였다는 것이고 유교 역시 동아시아 역사에 철학적으로는 큰 공헌을 했다는 것이다. 공자의 의도는 전제군주의 독재정치에 이념적 정당성을 마련해 주자는 것이 아니었다. 춘추전국시대의 중국이 정치-사회적 소용돌이 속에 휩싸여 있었을 때 공자는 사회적 질서와 정치의 도덕률을 강조했던 것이다.
그러나 전제적인 왕조는 공자의 사상을 자신들의 정권을 합리화하는 도구로 이용했던 것이다. 박정희 역시 공자의 가부장적 교리를 자신의 독재정권을 강화시키고 뒷받침하는 이념적 무기로 이용했다.
전통적으로, 유교는 통치자의 지배이념이나 상류계층의 철학으로 받아들여져 왔다. 반면에 노장사상은 통치권을 장악한 유학자층에 의해서 이단사상이나 심지어 위험한 사상으로 여겨져 왔다. 특별히, 성리학(신유학)이 조선왕조의 통치이념으로 채택되었을 때, 유학자들은 노장사상을 이교적인 사상으로 배척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장사상은 서민층에게는 민속적인 종교의 형태로 환영 받아왔다. 노장사상이 한국에 독특하게 민속유산으로 남긴 것으로는 신선사상을 들 수 있다. 중국과 한국은 둘 다 권위주의적인 역사를 가졌다. 유교의 권위주의를 정(正)의 개념으로 볼 때 신선사상은 이 권위주의에 대한 반(反)의 개념으로 이해할 수 있다. 신선사상에 등장하는 신선은 초역사적이고 초자연적인 능력을 가진 존재로 나온다. 이 신선은 기존의 제도와 권위주의적 속박에 저항하는 존재다. 신선은 비판의식과 저항의식을 옹호하고 기존의 고정된 세속적 가치체계를 정면으로 도전하며 거꾸로 된 역(逆)가치를 추구한다.
함석헌이 박정희의 유교사상 강조에 대항에 노장사상을 강조한 것은 이런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결국 1971년 7월부터 1988년 5월까지 함석헌은 {노자}와 {장자}의 공개강좌를 진행했다. 그의 공개강좌를 통해 함석헌은 사회적 신분이나 종교적 성향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은 존엄성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주장했다. 더불어 함석헌은 인간의 가치를 박정희가 주창한 경제제일의 원칙에 반대해 도덕제일주의를 내세웠다. 그러므로서 함석헌은 유신체제하에서 피폐해가는 한국의 사회-정치적 상황을 종교적 도덕성을 통해서 개혁하고자 했다. 함석헌의 시각에는 도덕성을 상실한 종교는 미신이나 광신과 전혀 다를 바가 없었다.
박정희가 유교의 충효를 강조한데 반해, 함석헌은 노장의 자유정신과 초월사상을 강조했다. 중국역사를 통해 도가에서 유가의 규율이나 속된 태도를 엄중하게 비판한 것처럼, 함석헌은 박정희가 유교이념을 재강조하는 것에 신랄한 비판을 가했다. 유교에는 계급적의식과 숙명론적 개념이 강하고, 이는 개인의 모험심이나 도전심을 부정적인 것으로 취급한다. 전통적인 유교개념에서 이름(名)이나 칭호를 부여하는 것은 한 개인이 통치자(皇帝)아래 한 계급적 위치에 귀속되어 있다는 것을 표시한다. 그러나, 노자가 이야기하는 도(道)는 이러한 계급적 관계, 통치자 아래 속하기를 거부한다. 그래서 노자는 도에다 이름 부여하기를 거부하는 것이고, 도에는 이름이 없는 것이다(道可道 非常道, 名可名 非常名).
유교는 본래 중국황실의 관료제도와 사회를 이끌기 위한 도덕 및 정치적 규범을 세우고 형성하고자 하는 일에 그 이념적 목적을 두었다. 이와 대조적으로 노장사상은, 인위적 구성이나 인습적인 속박에 반대해 자연주의적 철학과 자유정신을 제의했다. 유교는 또한 각자가 자기 자신과 가정을 다스린 후에야 국가의 문제를 다룰 수 있다고 믿는데(修身齊家後 治國平天下), 실제로 수신을 완벽하게 할 수 있는 개인은 아무도 없으므로 유교의 이념대로 하면 씨 들의 사회나 정치 참여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로저 아므스가 지적한 것처럼 "사실 공자에게 있어서, 개인이 주체라든가 개인이란 개념은 없다. 개인은 단지 사회관계의 계급층을 형성하는 껍질과 같은 존재로만 의미가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유교에서 황제와 씨 사이의 불평등한 관계는 정치에 꼭 필요한 요소이다. 공자는 인간사이의 관계는 불평등해야 된다고 보았고, 불평등한 인간관계를 없애버리는 것은 곧 문명을 혼돈과 파멸상태로 이끌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므로 공자에게 있어서 각 개인은 사회속에서 불만없이 정해진 위치에 속해있으면서, 위로는 통치자(황제)를 섬기는 일이 유일하게 문명을 유지할 수 있는 길이었다.
공자가 예(禮)와 도덕적 행실을 강조한데 반해, 노장은 인위적이지 않은 도의 길을 따름으로서 내적인 조화와 평온을 양성(養成)할 것을 권장하였다. 도덕경에 의하면, 가장 이상적인 통치자는 씨 들의 생활에 최소한의 간섭만 하기 때문에 씨 들이 그 존재를 전혀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노장의 무위는 완전한 무활동이나 게으름의 개념이 아니다. 노장의 무위란 조용히 생색내지 않는 행동이다. 무위의 정책을 실천하는 통치자와 씨 들의 관계는 자연스럽게 조화되고 흡수되었기 때문에 씨알들은 통치자의 영향력과 공헌을 느끼지 못한다. 노자는 이런 통치자를 이렇게 표현한다: "공적을 세운 지도자는 그가 공을 세운 장소에 머무르지 않는다(功成以不居)." 이것은 또한 마치 최고의 숙련공이 다듬은 옥이나 수정은 후에 거칠은 흔적 하나 없이 말끔하고 깨끗한 상태를 보여주는 것과 같다. 이러한 노장의 무위는 기독교식으로 이야기하면 "오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여 너의 착한 행실이 남의 눈에 띄지 않게 하라"는 것과 같다. 이러한 노장사상을 현대식으로 표현하면 "최소한의 정부가 최고의 정부다"(the least government is the best form of government)라고 할 수 있고, 이것을 종교에다 대고 표현을 하면 최소의 조직을 가지고 있는 종교가 최고의 종교다(the religion with the least institution is the best form of religion)라고 할 수 있다. 노자의 좀더 직접적인 표현으로는 "좋은 산수가(算數家)는 주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로 이야기 할 수 있고, 장자의 표현으로는 "편안한 신발을 신고 걸으면 발을 잊는다. 허리띠가 편안하게 잘 맞으면 허리를 잊는다"로 묘사될 수 있다.
함석헌이 이러한 노장사상, 특히 무위사상에 깊이 매료 되어있는 이래, 독재적이거나 비민주적인 정권은 그의 본성과 양립할 수 없었던 것 같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란 "최대다수의 최대행복"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있어서는 소외된 소수의 존엄성을 다수의 횡포로부터 보호하는 것도 중요한 민주주의 원칙의 하나였다. 그러므로 그는 소수의 비기독교인들이 다수의 기독교인들의 횡포로 인해 소외되는 것이나, 권리를 박탈당한 씨 이 특권층의 횡포로 유린당하는 것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노장의 무위사상은 함석헌의 민주주의를 위한 직접적인 사회참여를 이해하기 위해서 뿐 아니라, 그의 보다 인도주의적인 사상의 탄력성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중요하다. 특별히 함석헌은 해방 후 이승만이나 박정희의 더러운 독재 정치 속에서도 그가 사상적으로 살아나올 수 있었던 것은 신선한 노장사상을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라고 고백한바 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노장사상을 한국의 씨 들에게 공중강연과 저서를 통해서 재해석, 재소개 하는 일은 유교의 충성윤리를 국가적인 차원에서 강조하는 독재자 박정희에 대항하는 철학적 무기였는지도 모른다. 1973년 11월에 접어들어 함석헌은 노장강연이외에도 씨 들을 대상으로 퀘이커리즘과 성경공부모임을 개설했다. 그리고 이러한 강연 모임을 통해서 함석헌은 기독교의 사회정의 의식을 더욱 부각 시켰다.
자유를 위한 행진
반체제 인사들의 인권운동에 대한 박정희의 보복조치는 시간이 흐를수록 포학해졌다. 1973년 8월,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전 야당 대통령후보 김대중은 동경으로부터 납치되어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중앙정보부 지하실로 끌려왔다. 1971년 8월이래 김대중은 함석헌과 공동으로 민주수호 국민 협의회를 창설해 박정희의 독재정치에 대항하던 차였다. 그러나 1975년 1월 박정희는 마침내 민주수호 국민협의회를 무력으로 강제 해산 시켰고, 함석헌을 포함한 민주인사들을 체포, 연금, 고문하고 이들이 민간임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재판을 통해 각종 형을 언도했다.
1970년대에 들어 한국교회는 크게 두 파로 갈리기 시작했다. 한파는 다수파인 소위 "성령파"로 박정희가 선언한 '유신'이니, '국가 비상사태'니 '대통령 긴급조치'니 등에도 아랑곳없이 복음주의를 바탕으로 한국교회성장운동에 총력을 기울였다. "성령파"에서는 1974년 미국 침례교 목사인 빌리 그레함을 초대하여 여의도 광장에서 대대적인 부흥집회를 열기도 했다.
다른 한파는 소수파인 소위 "인권파"로 한국 기독교인의 사회-정치적 책임의식을 강조했다. "인권파"는 박정희 정권으로부터 별로 지지를 못받고 오히려 탄압을 받은 반면, "성령파"는 정부와 '성령'의 열렬한 지지에 힘입어 한국 개신교인은 1970년대 2배 이상이 증가했다. 다수파인 "성령파" 한국 교회에서 '주의복음','주께영광', '주찬양'등 '3주'나 '3박자 구원'등을 강조할 때인 1970년대, 함석헌은 정치적 부조리로 인해 고난받는 한국의 씨 과 자신의 사회정의를 위한 몸부림 가운데에서 예수의 교훈과 성경의 진리를 파악하고자 힘썼다.
미국인 선교학자 그레이슨이 지적했듯이, 한국의 교회 성장 운동은 확실히 서구에서도 주목할 만한 업적중의 하나로 여겨지지만, 동시에 그것은 한국기독교인의 질적인 저하에 큰 원인이 되었다. 한국교회 목사의 주된 설교 내용은 어떤 사회문제에 대한 관심과 고려보다는 '축복받는 삶의 비결'등에 중점을 둔다. 또한 교인들도 오직 복받기 위해서 열렬히 기도하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문화의 단점중의 하나인 당파심은 또한 개교회의 확장과 성장문제를 교단이나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보다 우선시하는 모습으로 나타난다. 그러므로서 교단이나 한국교회 전체를 위한 큰 안건 등은 개교회의 큰건물을 짓기 위한 확장공사 계획 등에 밀려 외면되기 일쑤다.
함석헌은 공개강연을 통해 노자, 장자, 성경 및 퀘이커리즘에 관한 공부모임을 주도하는 한편, 1973년 12월에는 유신헌법을 염두에 두고 '현시국상황에 대한 공개토론회'모임을 개최하기도 했다. 그리고 이러한 토론회를 통해서 함석헌은 인간의 기본권 보장, 철저한 3권분립의 원칙 실행, 공정한 선거절차를 통한 정권교체의 필요성 등을 선언했다. 결국, 함석헌의 민주주의와 인권향상을 위한 노력 등은 장준하가 주도하는 "유신헌법의 민주적 개정을 위한 100만인 서명운동"으로 결실을 맺었다. 함석헌의 뜨거운 후원과 장준하의 뛰어난 캠페인으로 인해, "100만인 서명운동"이 시작된 지 불과 열흘만에 40만명의 씨 들로부터 지지서명을 받았다. 이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는 바로 다음날 장준하를 즉시 구속수감 시켰다.
1974년 11월, 함석헌은 윤보선, 김대중과 공동으로 민주회복 국민협의회(민협)를 설립하고 공동의장이 되었다. 유신헌법 선포 후에 야당이 무력화된 상태에서 민협은 사실상 재야에서 집권당인 공화당의 독주에 대항해 야당의 역할을 철저히 수행했다. 민협은 또한 도와 시를 포함한 전국적인 규모의 조직망을 갖추고 있었는데, 1975년 3월에 이르러 민협은 전국적으로 50여개의 지방본부를 두고 있었다. 이때 민협에선 "민주시민을 위한 헌장"을 발표했는데, 그 주요 요지는 민주주의를 저해하는 모든 법적, 제도적인 조직기구에 대항해 민주시민은 저항해야할 것을 선포했다. 이 헌장은 민주적 저항운동으로서 세 가지 원칙을 제시했는데 그 내용은 첫째 폭력을 사용하지 않는 비폭력 저항, 둘째 시민 불복종 운동, 세째 민주세력간의 총단결을 주요 골자로 삼았다.
1974년 한 해 동안에 1,000명 이상의 시민이나 학생들이 데모로 인해 구류되었고, 그중 180여명은 장단기간에 걸쳐 교도소에 수감되었고 그중 몇 명은 교수형에 처해지기도 했다. 특별히 장준하 또한 이 당시에 수감되었는데, 감옥 안에서 그는 "거꾸로 밧줄에 매달린 채 그의 몸 여러군데는 불길에 타서 화상을 입었고", 그가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군사재판에 회부되어 15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후 장준하는 몇 달 후에 석방되었지만 곧 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되었다. 그때가 1975년이었고, 장준하의 죽음은 오늘날까지 의문사로 남아있다.
1975년 4월 8일, 박정희는 대통령 긴급조치 7호를 발령하므로서, 대학생들의 데모 행위를 전면적으로 금지 시켰고, "대통령 모욕죄"를 제정해 박정희 자신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불법화했다. 더불어 고려 대학교내에 군대를 진입시켰다. 그러나 시민들의 저항은 계속되었고 결국 많은 반체제인사들은 수감되었다. 그로부터 한달 후 박정희 시민들의 저항에 대항해 "긴급조치 9호"를 계속해서 발령하므로서 "국가안보와 사회질서를 위하여" 라는 명목으로 민주화를 향한 씨 들의 열망을 더욱 탄압했다.
긴급조치 9호의 발령으로 재야의 인권활동과 민주화 운동이 한동안 눈에 띄게 약화되었다. 그로부터 약 1년간의 침묵 끝에, 1976년 3월1일, 함석헌, 김대중, 윤보선, 안병무, 이문영, 이태영, 이우정 등이 박정권과 유신체제에 정면 도전장을 내밀었다. 그것이 "3.1 구국 선언"이었고 소위 "명동사건"이었다. 미국의 {뉴욕 타임즈}는 이때 "3.1 사건"을 아래와 같이 간략하게 보도했다:
"서울의 반체제 인사들이 박대통령의 사임을 요구하다. 서울, 남한, 3월 2일 - 남한의 재야지도자들은 성명서를 발표해 박정권이 긴급조치를 철폐할 것과 동시에 1972년 유신헌법으로 인해 제약받는 모든 정치적 자유를 회복시킬 것을 요구하였다. 이 성명서는 12명의 주요 정치 및 종교 지도자들에 의해 서명되고 배부되었다. 이 성명서에서 반체제인사들은 박정희대통령을 독재자로 표현했고 대통령직에서 책임을 지고 사임할 것을 요구했다. 이 성명서에 서명한 주요인사들은 전대통령 윤보선, 1971년 대통령선거 후보자 김대중, 인권운동 지도자 함석헌 등이다..."
함석헌이 다른 재야 인사들과 함께 주도한 "3.1 구국선언"은 긴급조치 아래서 침체에 빠져있던 재야의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에 큰 활력제가 되었다. 3.1 선언 후 함석헌은 자신의 개인적 자유를 곧 박탈당하지만 동시에 그의 행동은 국제적 주목과 지지를 받게된다. 영국의 주간지 {프랜드} (The Friend)지는 3.1사건 후 함석헌이 치루는 공판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은 다른 17명의 기독교인들과 함께 금년 5월이래 서울에서 열린 공판에 회부되었다. 8월29일, 모든 피고인들은 징역을 선고받았고, 함석헌은 8년형의 징역을 선고받았다. 유죄를 선고받은 18명의 남녀 기결수들은 한국에선 저명인사들이다. 함석헌 자신은 75세의 나이이고, 그는 종종 '한국의 간디'로 불리었다. 다른 인사들 중엔 한국의 전 대통령, 전 외무부장관, 1971년 대통령선거 후보자, 두 명의 신학교수, 다섯명의 신부와 목사들이다. 이들 중 12명은 '3.1구국선언서'에 서명을 한 이유로 기소되었다 (3월1일은 한국인들이 일본식민지정책에 반대해 1919년 3.1운동을 일으킨 기념일로서 중요한 날이다). 이 선언서를 통해서 서명자들은 인간의 자유를 억압하는 긴급조치를 폐기하고, 국회를 복원시킬 것과, 사법부의 독립을 요구했다. 또한 이 선언서는 박정권이 권력을 포기하거나 아니면 한국의 경제구조를 철저히 재검토 할 것을 촉구했다."
함석헌은 법정에서의 진술을 통해서, 3.1선언은 목적은 민주주의를 위한 그의 열망을 양심에 입각해서 표현한 것이지 정치적 야심이나 동기는 없다고 이야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을 포함한 서명자들은 "체제 전복 시도의 죄"로 공판을 받게 되었다. 그러나 재판장은 판결문에서 함석헌을 포함한 피고인들이 "유신헌법을 모욕" 했다고 선언했으나, 검찰측에서 주장한 "국민 봉기를 시도"했다는 혐의에 대해선 언급하지 않았다. 함석헌과 다른 서명자들이 제창한 3.1.구국선언은 결과적으로 반체제인사들의 인권활동과 민주화운동에 큰 자극제가 되었다. 3.1구국선언 사건을 시작으로 연속적인 대학생들의 데모와 여러 시민단체로부터의 성명서가 뒤따랐다. 또한 3.1사건은 진보적인 한국의 기독교인들에게 다양한 인권위원회와 인권기구 창설을 위한 최초의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 75살의 함석헌은 8년간의 징역을 선고받았고 그의 인권을 박탈당했다. 함석헌이 이런 구류상태에 있었을 때, 그는 영국 퀘이커들에게 서간을 보냈다. 다음에 우리가 살펴볼 함석헌의 서간은 그의 외적인 시련에도 불구하고 어떻게 그가 내적으로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1976년 8월9일 새벽 4시... 지난주 금요일 기도 예배를 드리던 중 나는 오는 8월11일 법정 최후진술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까 깊이 생각했습니다. 그때 나는 마음이 열어지는 체험을 했습니다. 나는 우리를 기소한 검찰 측 사람들과 악수를 나누고 그들을 위로할 생각입니다. 이번 일은 [민주주의를 위한] 우리 투쟁의 끝이 아닙니다. 나는 내자신이 옳다는 것을 확신하기에 우리를 심판하는 판사들과 검사들을 용서하고 그들을 위해 기도합니다. 하나님이 새로 오는 세상을 맞이할 자격을 우리에게 주시고자 저희들을 훈련시키시고, 길고 긴 고난과 시험을 우리 씨 들에게 허락하셨다고 느낍니다. 지금까지 우리들이 여러 값진 고난과 시험을 견딜 수 있게 된 것에 하느님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하느님은 살아 계십니다! 나는 여러분 모두가 건강하시고 진리 안에서 생활하시기를 기도합니다."
위의 서간은 함석헌이 유치장 안에서 재판을 앞두고도 마음의 평정을 유지하고, 심지어 자신을 심판, 박해하는 자들에게조차 얼마나 따뜻한 인간애를 가지고 있었는지 반영한다. 함석헌의 석방을 위한 서구 퀘이커들의 로비 활동이 서구의 정치인들에게 얼마나 영향을 미쳤는지는 평가하기 어렵다. 하여간 이 서간을 쓴 후 얼마 되지 않아 함석헌은 집행유예로 석방되었다.
한편 함석헌과 관련해 한국 노동자들과 지식인들이 단합한 일례를 방림방직공장의 잔업수당분쟁 경우를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이 사건은 이 공장 여성근로자들의 탄원서를 통해서 시작되었다. 여성근로자들은 이 탄원서에서 그들이 새마을운동이란 이름으로 매일새벽 1시간씩 무임금으로 초과 근무를 해야 했다고 호소했다. 그리고 공장주는 직원들에게 1년에 5일에서 15일간의 년휴가만(일요일을 포함해서) 허락했다. 더우기 공장주는 직원들이 근무시간에 상관없이 주문받은 양의 공정을 끝내기 전까지는 퇴근하지 못하도록 강요했다. 그래서 종종 여성근로자들은 새벽 1시나 2시까지 퇴근을 못하고 일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 처해졌다. 그러나 공장주와 박정권은 여성근로자들의 이러한 불만을 전혀 귀담아 듣지 않았고 계속해서 무임금 초과근무만을 강요하므로서 사태를 악화시켰다. 결국 영등포 도시산업선교회에서 이 문제를 중재하고자 발벗고 나섰다.
이 중재의 결과로 1977년 8월 28일, '방림방직 임금체납 문제에 관한 대책위원회'가 103인의 시민들에 의해 만들어졌고 함석헌은 고문에 임명되었다. 이 대책 위원회에서는 방림공장의 여성근로자들을 돕기 위한 캠페인을 시작했고 한 달만에 만명의 씨 들로부터 지지 서명을 받았다. 공장주와 대책위원회의 협상은 공장주의 비협조정책으로 인해 무산되었고, 이에 대항해 대책위원회에서는 포스터와 전단을 만들어 길거리의 씨 들에게 나누어주었다. 방림공장 여성근로자들의 권익을 위한 기도모임과 데모 등이 진행되는 가운데, 공장에서 쫓겨난 여성근로자들의 생계를 뒷받침하기 위한 후원금이 모아졌다. 노동운동이 한국에서 쟁점이 되기 시작한 것은 전태일(1948-1970)이 분신자살한 1970년 11월부터였다. 전태일은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노동조건을 공중에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자신의 몸을 불살라 자살했다.
그러나 전태일의 분신자살에도 불구하고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열악한 근무조건은 거의 개선되지 않았다. 박정권은 근로자들의 희생을 담보로 재벌과 결탁해 소위 '중단없는 전진'의 경제성장만을 추구하고 있었다. 1977년 10월 15일, 마침내 함석헌은 다른 재야인사들과 더불어 '평화시장 노동자들의 인권을 위한 협의회'를 창설했다. 평화시장에는 약 2만 7천명의 노동자가 약 900개의 중소 의류공장에서 일하고 있었다. 어떤 직공들의 한달 수입은 최저 생계비에도 훨씬 못 미쳤다 (미화 $9.50). 그들은 하루 평균 15-16시간, 주 6-7일을 쉴새없이 일해야 했다. 평균적으로 4명의 노동자가 비좁은 한 평의 공간에서 비지땀을 흘려가며 일했다. 결국 함석헌은 다른 재야의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의 노동자들을 위한 인권헌장'을 발표했다. 이 헌장을 통해서 함석헌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생활고와는 대조적인 박정희의 "특권층만을 위한 경제성장과 억압, 은폐정치"를 가차없이 꾸짖었다.
민족과 가정 사이에서
1969년 이래로 함석헌의 아내 황득순은 중풍으로 종종 몸이 마비되었고 그래서 병상에 눕는 경우가 많았다. 1938년 이후 함석헌의 파란만장한 생애를 고려할 때에 황득순의 건강이 왜 그렇게 악화되었는지 납득할 만도 하다: 1938년 이후 1969년까지 30년 이상 남편 함석헌은 정권이 바뀔 적마다 감옥문을 들락날락하며 고정된 직장이나 수입이 없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그의 아내와 자녀들을 재정적으로 적절히 후원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 말은 어린 자녀들을 부양할 재정적인 부담이 무언중에 황득순에게 지워졌다는 의미가 된다. 사회복지시설이 전무한 시대를 살아온 황득순은 남편이 감옥에 갇혀있는 동안 남편 옥바라지는 물론 남은 자녀들을 부양하기 위해서 안해본 잡일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황득순은 다섯 명 자녀의 어머니였고 재정적으로는 거의 무력한 남편의 아내였다. 함석헌이 영적으로나 내적으로는 풍성한 삶을 살았다고 짐작되나, 그의 외적인 경제생활은 빈곤의 악순환이었을 것이다.
황득순은 전통적인 한국의 아내상 이었던 것 같다. 황득순은 함석헌의 표현대로 그 이름처럼 함석헌의 어떤 결정이던지 불평 한마디 없이 그저 순종으로 받아들였다. 그러나 함석헌이 살림과 돈에 "무관심한"사람 이었기 때문에, 재정적으로 무력한 남편을 놓고 생활인 황득순의 말못하는 심리적 고민과 갈등도 상당히 컸으리라 짐작된다. 함석헌은 자신이 감옥문을 들락날락 하는 사이에 때로는 황득순이 머리에 광주리를 이고 행상으로 여러 식구들의 생계를 꾸려나가기도 했다고 술회했다. 결국 1978년 황득순은 말못하는 생활고로 인해 신경성 파킨슨병을 얻게 되었고 그것으로 그녀의 삶을 마감하기에 이른다. 자신의 몸은 전혀 돌보지 않고 평생을 오직 남편 함석헌과 자녀들을 위해서만 살아온 여인 황득순, 그래서 그녀의 별명은 "나야 뭐" 였다.
사상가 함석헌과 생활인 황득순의 사이에서 우리는 인도의 사상가 간디와 그의 아내 카스투바(Kasturba)의 관계를 연상시킬 수 있다. 간디와 그의 아내 카스투바는 생애를 함께 했다. 그러나 삶에 대한 그들의 시각은 아주 달랐다. 영국 언론인 페트릭 프랜치는 간디와 카스투바의 부부사이를 이렇게 요약했다: "카스투바는 그녀의 거의 모든 생애를 통해서 간디와 그 아들사이에 원만하고 행복한 가족관계를 유지하고자 힘썼다. 카스투바는 그녀의 네 명의 아들을 아버지 간디의 '엉뚱하고 들뜬 공상적인 계획'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전력을 다했다."
함석헌은 종교사상가로서 그의 조국의 정치사회적 문제를 항상 의식하고 해결하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또 한 여인의 남편으로서는 무책임하고 심지어 이기적인 인간의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그가 조국의 필요에 응할 것이냐 아니면 가족의 필요에 응할 것이냐는 큰 딜레마였을 것이다. 많은 경우에 그는 그 두개의 가치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했다. 함석헌은 아내 황득순의 가정을 위한 무조건적 헌신과 희생을 뚜렷이 의식했던 것 같다. 동시에 가장으로서 무책임한 자신의 결점을 충분히 인식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아내]는 그렇게 순종-봉사를 했는데 나는 그에 대해서 성실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나를 치시지 않고 그를 치셨습니다...나의 가장 큰 잘못은 그를 내 믿음의 친구로 생각하지 못한 점입니다." 그 자신이 고백했듯이 함석헌은 아내 황득순을 비롯한 자신의 가족들에게 남편노릇과 가장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30여년 동안의 한국의 군사정권 아래서, 거의 모든 대부분의 가장들은 자신에게 의지하는 가족의 안정된 생활을 위해 (혹은 자신의 실질적 이득을 위해), 독재자인 박정희, 전두환에게 아예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아니면 최소한 소극적인 침묵으로 협조했다. 함석헌은 이런 면에서 철저하게 군사정권과 어떤 종류의 타협이나 양보를 거부한 소수의 한국인 중의 하나다. 비록 함석헌은 자기가 속해있던 사회의 개혁을 위해 온몸과 전생활로 헌신했지만, 역설적이게도 자신은 스스로가 속한 사회와 가족으로부터 점차적으로 탈락된 존재가 되어간 모습을 보여준다. 함석헌의 사상과 그의 민주화를 위한 다양한 노력들이 한국인들에게 결국 민주주의를 바탕으로 삶의 향상을 가져다주었지만, 그의 가족들의 삶의 향상을 위해선 함석헌은 오히려 속수무책하고 대책없는 가장의 모습을 보여준다.
1978년 5월 8일, 함석헌이 전라도 광주에서 민주화를 위한 공개강연에 열중해 있었을 때, 아내 황득순은 오랜 지병(持病)이던 파킨슨병에 의해 운명했다. 함석헌은 아내 황득순의 임종의 자리에 함께 할 수 없었다. 그 시간 함석헌은 자신의 몸을 씨 들에게 줌으로서, 아내와 자녀들과 육체적으로 함께 할 수 없었다. 공개강연이 끝난 다음날 새벽, 함석헌은 집에 돌아와 61년간 자신의 아내였던 황득순의 시신을 바라보았다. 민족을 위한 예언자의 가정생활은 빈곤하거나 모순적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닐까.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상처뿐인 영광"을 가진 예언자였던 것 같다. 함석헌이 만일에 독신자였었다면 그는 가정생활의 곤경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었을 것이고,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의 책임을 면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함석헌은 그의 결혼생활을 후회한 적도 있었다. 필자는 한번 함석헌의 다음과 같은 감화를 들은 적이 있다: "내가 이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면 결혼을 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함석헌 세대의 한국인에게 있어서 결혼은 선택의 여지가 없는 '의무적 행사'였고, 결국 인간은 자기가 속한 역사-문화적 환경으로부터 탈출할 수 없는 것이 아닐까.
일찍이, 그의 부친이 운명했을 때, 함석헌은 일본헌병의 손에 의해 감옥에 갇혀 있었고 그래서 그의 부친의 시신조차 볼 수 없었다. 그의 모친과 두 자녀는 1947년이래 북한에서 월남할 수 없었고, 그래서 함석헌은 자신의 생애의 끝날까지 그 모친과 두 자녀를 다시 만날 수 없었다. 함석헌의 격동의 삶은 이런 면에서 분단상황에서 한국인의 비극적인 삶을 그대로 반영해준다.
아내의 죽음을 슬퍼하고 애도할 시간도 없이 한국의 급박한 정치상황은 함석헌을 다시한번 민주화운동의 선봉으로 밀어넣었다. 1978년 6월, 함석헌은 씨 들의 손에 의해 한국 인권운동연합회의 의장으로 추대되었다. 다산의 작가로서, 종교 사상가로서,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서, 그리고 월간지 {씨 의 소리}의 주간으로서 함석헌은 이제 한국의 씨 들이 처한 위기상황을 민주주의 길로 인도할 책임을 그 어깨에 짊어진 것이다.
함석헌이 의장으로 있는 인권운동연합회의 활동범위는 광범위했다. 인권운동연합회는 노동자의 권리를 침해하는 기업주들에게 노동자를 대신해서 항의문을 보냈고, 동시에 군사정권에 의해 해직당한 대학교수들의 생계를 위해 해직교수를 위한 후원금을 모집했다.
1978년부터 박정희는 통일주체국민회의 대통령 선거인단의 '압도적인'지지로 대통령직의 4선을 준비하고 있었다. 인권운동연합회는 유신헌법에 의해 만들어진 이래 행정부의 꼭두각시 역할을 하는 통일주체국민회의의 무력한 기능에 대해 비판하는 내용의 성명서를 발표했다. 특별히 함석헌은 통일주체국민회의 선거인단이 박정희의 대통령직 4선출마의사에 99.9%의 동의표를 보인 것은, 전원찬성, 일당독재체제인 북한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점을 지적했다.
더욱이 1979년 3월, 함석헌은 윤보선, 김대중과 더불어 민주통일 전국연합회를 창설함과 동시에 공동성명서를 발표했다. 이 성명서를 통해서 함석헌, 윤보선, 김대중은 남북간의 평화통일은 민족의 최고지상과제이며, 이러한 통일은 국민의 주권행사를 바탕으로 한 민주적인 정부의 손에 의해서 이루어져야 한다고 단언했다. 또한 이 성명서는 한국경제발전의 혜택이 일부특권층의 손에만 돌아가서는 안되며 전국민에게 골고루 분배돼 야하고, 민주주의는 민권의 신장에서 시작된다는 점을 역설했다.
함석헌은 이 공동성명서의 발표로 인해 체포, 구금되었고, 김대중은 친공혐의로 사형선고를 받았다. 그러나 외국의 여론과 미국의 압력으로 박정희는 김대중의 사형선고를 집행할 수 없게 된다. 야당 당수이던 김영삼은 박정희의 지시에 의해 국회의원직을 박탈당하고 국회에서 추방되었다. 김영삼의 의원직 제명사건은 부마사태를 초래했고, 전국의 씨 들과 대학생들은 박정권의 유신체제에 반대하는 광범위한 시가행진과 데모를 벌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박정희의 경호실장 차지철은 "필요하다면 백만에서 이백만의 시민을 탱크에 깔아죽이고서라도 정권을 유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침내, 1979년 10월26일, 박정희와 차지철은 중앙정보부장 김재규(1926-1980)의 총탄에 맞아 즉석에서 사망했고, 이로써 18년간 유지되었던 박정희의 독재정권은 유신체제와 더불어 막을 내렸다.
그러나 이로부터 한 달도 안되어서, 함석헌은 다른 122 여명의 재야인사들과 함께 계엄령 및 대통령 간접선거 반대평화시위모임에 참가한 혐의로 다시 체포 구금되었다. 그들 중 20여명은 보안대 사령부에서 군인들의 군화발에 무차별 몰매를 맞았다고 후에 진술했고, 함석헌은 1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함석헌은 집행유예로 몇 주만에 석방되었다. 교도소에서 출감되자 마자, 함석헌은 서울을 비롯한 대구, 전주, 부산, 광주, 제주도 등에 걸쳐서 "현시국을 보는 우리의 자세"등의 제목으로 전국적인 규모의 공개강연회를 열었다. 이때가 소위 "80년 봄"이었다.
한편, 1980년 4월 16일, 전두환은 헌법에 "군인은 중앙정보부장직에 임명 될 수 없다"는 조항을 위반하고 자신을 중앙정보부장 직무대행직에 스스로 임명했다. 그럼으로서, 전두환은 군인의 신분으로 남한의 군과 정치적 권력을 모두 자신의 손아귀에 독점했다. 동시에 대통령 권한대행 최규하를 비롯한 다른 국무위원들은 전혀 무력한 위치에 처하게 되었다.
전두환의 이런 위헌적 행동은 대학생들과 많은 지성인들로부터 지탄과 비판을 받았다. 곧이어 약 10만명의 대학생들은 서울에서 계엄령 철폐의 구호를 외치며 가두 데모에 나섰다. 그러나 이러한 대학생들의 가두 데모는 결과적으로 전두환에게 무력으로 권력을 찬탈할 구실을 마련해주게 되었다. 80년 5월, 전두환은 군사쿠데타를 일으켰다. 전두환의 명령으로 몇 백명에서 몇 천명에 이르는 시민들은 광주에서 계엄군의 총칼에 무참히 학살당했다. 전두환은 계엄령을 전국으로 확산함과 동시에 남한의 전 대학교에 무기한 휴교조치를 내렸고, 탱크를 동원해 국회를 해산시켰다.
전국 주요도시는 전두환이 지휘하는 계엄군의 군화발아래 놓여있었고, 함석헌, 안병무, 김동길을 포함한 몇 십만명의 한국인들은 교도소에 수감되거나 가택연금 되었다. 이때 많은 재야인사들은 계엄군으로부터 심한 물고문, 전기고문 등을 받기도 했다. 1980년 10월 27일, 전두환은 해산된 국회대신 81명의 허수아비 의원을 둔 국보위를 만들었다. 정당은 완전해체 되었고, 야당 지도자 김대중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기존 정치인들의 거의 대부분은 소위 '정화법'에 의해 정치활동이 전면중지 되었다. 미국을 포함한 서방의 언론은 김대중 사형선고에 반기를 들었고, 결국 전두환은 김대중을 미국으로 추방하는 것으로 사형선고를 대신해야 했다. 그 당시 전두환은 이렇게 말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새로운 대한민국에서 구시대의 직업정치인들이 설자리는 없을 것입니다."
1980년 7월 계엄사령부는 함석헌이 주간하는 월간지 {씨 의 소리}, 안병무가 주간하는 {현존}등을 포함한 170여개의 잡지를 전부 폐간 조치했다. 동년 11월 14일에 이르러, '언론학살'을 위한 언론통폐합법의 청사진이 허문도의 주도하에 만들어졌다. 비록 전두환 자신은 부인하지만, 전두환정권은 성격상 박정희 유신정권의 철저한 계승자로 볼 수 있다. 그것은 군과 비밀경찰(중정, 안기부)을 바탕으로 민주인사를 탄압, 고문하고 독재력으로 정권을 유지해 갔기 때문이다.
1980년대를 통해서, 그의 노익장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남한에 자유 민주주의를 정착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전국 공개강연, 공중집회 등으로 왕성한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1985년 인천사태 이후 재야는 크게 급진파와 온건파의 양극으로 분류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함석헌은 점차로 과격파 반체제 그룹으로부터 소외되기 시작했다. 어떤 과격파 반체제 그룹에선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을 무너뜨리는 유일한 길로서 폭력과 테러를 바탕으로 한 사회혁명만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비록 함석헌은 군사정권에 반대해 민주정부를 수립하고자 활동했지만, 그는 동시에 어떤 종류의 폭력행사에도 동의할 수 없었다. 그러므로 과격파 반체제 그룹과 함석헌과의 갈등은 불가피 해지기 시작했다.
한편, 1987년 1월 대학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은 전국의 대학생, 노동자들은 물론 중산층 화이트칼라 근로자들에게까지 전두환 정권에 대한 분노심을 심어다 주었다. 4월 13일 전두환의 대통령간선제 선언에 이어, 6월의 한국전역은 반전두환 가두 데모로 휩싸였다: 6월 10일 4십만명의 씨 들이 전국에서 반전두환 데모로 거리를 메웠고, 6월 18일에 이르러서는 이 숫자가 5십만명, 6월 26일에 이르러서는 백 4십만명으로 급격하게 증가하기 시작했다. 이제 전국은 걷잡을 수 없는 가두데모의 소용돌이 속에 휩싸이게 되었다.
전두환은 군과 탱크를 동원해 씨 들의 데모진압을 계획했으나 미국측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이제 전두환은 선택의 여지없이 대통령 직선제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12월16일 대통령 직접선거가 거행되었다. 야당후보 김대중, 김영삼의 분열과 함께 여당후보 노태우는 35.9%의 지지표를 얻고 대통령직에 당선되었다. 함석헌은 이때 야당후보자들의 분열에 큰 회의를 느꼈던 것 같다. 그는 김대중과 김영삼 어느 후보에게도 표를 던지지 않았고 투표하기를 아예 포기했다. 동시에 함석헌은 제도권의 극우보수세력과 재야의 좌익급진세력으로부터 모두 냉대를 받기 시작했다: 극우보수세력은 그를 재야의 선동가 정도로 보았고 좌익급진세력은 그의 비폭력원칙을 너무 온건하고 무력한 '투쟁방법'으로 보았다. 함석헌은 다시한번 "본향에서 환영받지 못하는 예언자"의 처지가 된 셈이었다. 이때쯤 함석헌은 심한 직장암으로 서울대 병원에 입원하게 된다.
그러나, 그의 현저한 육체적 쇠퇴에도 불구하고, 비정치인겸 평신도 종교사상가로서 좌우익 이념의 벽을 넘어, 함석헌은 국무위원들에 의해 한국을 대표하는 민족의 지도자로 선정되었다. 그러므로, 1988년 10월, 서울에서 올림픽이 개최되기 직전, 함석헌은 내각에 의해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추대되었다. 함석헌이 그의 전 생애를 통해 항상 평화주의를 추구한 것을 고려할 때 그가 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 선정된 것은 조금도 놀랄 일이 아닐 것이다. 그의 육체적 상태가 아주 쇠약했음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평화올림픽을 위한 서울올림픽준비위원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그의 병실침대를 박차고 나왔다. 이로서 서울평화올림픽의 위원장으로서 함석헌은 한반도의 모든 씨 을 대표하게 된 것이다. 서울평화올림픽 선언문은 올림픽을 통한 세계의 평화를 선언했고 함석헌을 포함 600명의 전세계 주요 민간지도자, 세계정치지도자, 세계 노벨평화상 수상자들이 함께 이 선언서에 서명했다. 이것이 함석헌이 그의 조국과 씨 을 위해 마지막으로 한 사랑의 봉사였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평화를 위한 시도도 어떤 재야인사들과 과격한 운동권으로부터 "노태우 정권에 협조하는 행위"로 비판을 받기 시작했다. 심지어 함석헌과 아주 친밀한 인사들 중에도 이러한 그의 행동을 그가 노태우에 의해 정치적으로 이용당하는 것으로 본 이들이 있다. 등잔밑이 어둡다는 것과, 큰 인물의 덕은 그가 속한 시대로부터는 이해 받지 못한다는 속담이 사실일 것이다. 기독교 사상가로서 타종교를 향한 함석헌의 인도적 관용성과 사상적 포용성은 그와 동시대를 살았던 대부분의 한국기독교인들로부터는 환영받지 못했다. 오늘날에서조차 어떤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함석헌의 종교적 관용성을 '이상한' 시각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의 마지막 사랑의 봉사로부터 약 4개월 후인, 1989년 2월 4일, 함석헌은 그의 고난에 찼던 삶의 여정을 서울대학병원에서 끝마쳤다.
여섯 번째 마당 : 함석헌이 남긴 것
한국의 민주주의
함석헌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 자유와 민주주의를 추구하였고 동시에 한국의 씨 에게 자유민주정신의 싹을 심어주었다. 필자는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한 함석헌의 내적헌신과 외적활동은 그의 종교적 다원주의적인 입장과 깊은 상관관계에 있다고 믿는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민주주의 주요 원칙중의 하나는 종교적 다원주의를 바탕으로 이념적 다원주의와 정치적 다원주의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이었으리라. 더욱이 그의 종교적 신앙심, 특별히 기독교적 신앙심은 함석헌이 남한의 민주화를 위해 지칠 줄 모르고 뛰어다니도록 끊이지 않는 원천적 힘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므로 함석헌에게 있어서, 자유를 위한 사회적 행동가로서 그의 삶과, 종교적 관용주의자로서 그의 사상은 동전의 양면처럼 떨어질 수 없는 관계였다. 우리는 종교적 양심을 상실한 사회를 이상향적 사회로 생각할 수 없듯이 사회의식이 결여된 종교를 바람직한 종교로 생각할 수 없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두고 함석헌이 하나의 씨 로서, 하나의 평신도 종교인으로서 한국의 종교와 사회간의 바람직하고 이상적 관계를 위해 어떤 역할을 수행했는지 살펴볼 것이다.
기독교의 사회-정치적 면의 회복자
과거로부터 한국인들은 외부의 침입과 내부로부터의 억압에 시달린 탓인지 숙명관이나 체념의식이 강했다. 압제 당한 민족에게 어쩌면 숙명론이나 체념관은 불가피한 결과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경우 이러한 체념적 숙명관은 유교적 전통의 낡은 사고방식과 함께 깊이 한국인들의 의식 속에 뿌리를 박은 감이 있다. "송충이는 솔잎을 먹어야" 라는 속담이나 "뱁새가 황새 따라 가려다 가랭이 찢어진다"라는 우리 속담이 다 이런 면을 반증한다. 편안하게 현상유지만 바라고 문제의식을 느끼지 못한다거나, 현실 고통의 도피수단으로 점쟁이나 기형적 종교집단을 찾는 것도 다 이런 병든 심리상태를 보여주는 일례다.
함석헌의 그의 다양한 공개강연과 다작(多作)의 글을 통해서 이러한 한국인들의 숙명관과 체념의식을 깨뜨리고자 힘썼고 동시에 종교인, 사회인으로서 역사의식을 심어 주고자 노력했다. 함석헌은 인간사에 운명론이나 숙명론을 믿지 않았다. 대신에 그는 천명(天命) 곧 하느님의 섭리를 믿었고, 이러한 하느님의 존재를 함석헌은 인격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내재적이고 동시에 우주적인 존재로 파악했다. 더우기, 그는 '씨알의 소리'로서 한국적 풍토에 새 생각, 새 믿음인 민주주의를 외쳤다. 그러므로서 서방언론에서 보도했듯이 함석헌은 일종의 '한국의 간디'로서의 삶을 살았다. 그러나 간디와는 달리, 함석헌은 전국적인 규모의 씨 저항운동을 불러일으킬 수 없었고, 이것을 함석헌의 정치적(혹은 종교적)역량의 한계로 평가할 수 있다. 아니 한국적 풍토의 한계로 표현함이 더욱 적합하다. 그래서 함석헌은 잘 짜여진 조직력과 동원력보다는 그의 공개강연과 글, 성서공부, 노·장 공부모임등을 통한 개인적 영향을 각 씨 들에게 미침으로서 불의한 정권에 대항했다.
함석헌은 그의 말과 글을 통해서 기독교의 근본은 종교적일 뿐만 아니라 사회-정치적이어야 한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강조하였다. 한국인의 종교관이 사회-정치관과 너무나 절묘하게 일치관계에 있다는 점을 고려할 때, 함석헌이 주장한 자유진보적 종교관은 한국의 사회-정치적 자유민주화운동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원규에 연구에 의하면 한국에 있어서 종교관이 보수적인 그룹들은 정치, 사회, 경제문제 또한 보수적으로 인식한다. 다시 말하면 보수적 성향이 강한 종교인일수록 제도권의 정치구조에 대하여, 비록 그것이 군사독재체제라 할지라도, 덜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오히려 긍정적인 입장을 취한다.
특별히 기독교인의 경우, 보수적 신앙을 가진 그룹은 사회변혁보다는 현상유지를 바라는 경향이 강하고 한국사회의 각종문제에 대해 구조적 잘못보다는 개인적 잘못을 강조한다. 경제문제에 있어서는 부의 분배에 별로 관심이 없고 '낙관적' 입장을 취한다. 반면에, 자유주의적인 기독교신앙을 가진 그룹은 정치의식이 진보적이고 비판적 성향이 강하며, 종교인의 사회참여를 중요시한다. 진보적 성향의 기독교인들은 또한 보수적 성향의 기독교인들보다 사회문제를 더욱 예민하게 의식하고, 개인적 책임이나 잘못보다는 사회-구조적 책임이나 잘못을 강조한다. 이들은 또한 보수적 신앙인 그룹보다 한국의 경제상황에 대해서도 비판적이고 미심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다.
이원규의 연구를 통해서 우리가 내릴 수 있는 결론은 한사람이 갖고 있는 종교관은 그의 정치, 사회, 경제관에도 끊을 수 없는 깊은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이런 면을 고려할 때 20세기 한국에 있어서, 함석헌은 보수적인 한국기독교인들의 종교적 심성을 진보적 심성으로 변화시켰고, 타종교에 대하여는 편견을 갖지 않도록 영향을 끼쳤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함석헌의 종교관으로부터 사상적 영향을 받은 장준하, 안병무, 김동길, 한완상, 이태영, 문동환, 김찬국 등의 진보적 기독교인들이 70년대를 통해서 무력화된 야당을 대신해 재야 민주화운동의 지도자로 떠오른 것은 이런 면에서 자연스러운 결과였다. 전통적으로 한국의 기독교인들은 친미파 성향이 강했고 반공이념에 투철했기 때문에, 반공을 국시로 삼은 박정권에게 있어서 조차 이들 진보적 평신도 기독교 지도자들을 "빨갱이"로 만드는 것은 그리 쉽지만은 않았다. 이점에 있어서 기독교계 재야인사들은 비기독교계 재야인사들보다 이념논쟁에 있어서 유리한 위치에 서 있었다.
군사독재 기간 중, 운동권 대학생들이 응집력있고 기동적인 저항집단을 형성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함석헌을 위주로 한 안병무, 김동길과 같은 재야의 기독교 인사들이 사회전반에 있어서는 더욱 광범위한 영향력을 미쳤다. 운동권 대학생들 중에는 실제로 좌경이나 심지어 친공 그룹이 있었고 이들이 민주화 운동의 주도권을 쥐고있던 반면, 재야의 기독교 인사들은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이 대체로 반공 성향이 강했다. 그래서 강경파보다는 온건파 민주세력으로서 함석헌을 필두로 한 재야의 기독교인사들은,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위한 든든한 하부조직역할을 그래도 유리한 입장에서 수행해낼 수 있었다. 이 당시 중요한 시국 성명서에는 반드시 재야의 진보적 기독교인사들이 압도적으로 참가해 있었는데, 성명서 서명자중의 평균 69%는 이들 진보적 기독교인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인권운동 참가자중 평균 44.5%는 언제나 진보적 기독교계 인사들이 주도적 세력으로 점유하고 있었다.
함석헌을 위주로한 평신도 기독교인들은 재야 자유민주주의 민권운동의 주류로서 남한 정치-사회의 무대 위에 확고한 위치를 확보했다. 특별히 주목할 것은 1970년대에 유신체제아래서는 공식적 야당이던 신민당이 거의 정당으로서의 그 기능을 발휘할 수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함석헌을 위주로한 재야의 기독교인들은 공식 교회 지도자나 정당의 지도자가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씨 의 인권향상, 빈민구제, 노동조건 개선 등의 요구를 주장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의 영향을 받은 진보적 한국 기독교인들의 주요 시국문제에 대한 중추적 역할과 공헌은 확연했다.
1970년대, 소수의 재벌집단은 막대한 부를 축적한 반면, 대다수의 씨 은 그저 생계를 유지하기에 바빴다. 이시기의 한국의 정치는 정당정치가 아니었고, 아니 정확하게 표현해서 정치가 존재하지 않았다. 정치가 부재되고 민주주의가 사라진 상태에서 대다수의 씨 은 자신의 인간으로서의 기본권리를 찾기에 스스로 바둥거릴 뿐이었다. 함석헌은 이러한 생활고에 시달리는 밑바닥 씨 의 수난을 절대자인 하느님의 고난과 동일시했다. 그러므로 70년대를 통해서 함석헌은 억압받고, 무력화되고, 고통받고 있는 씨 의 목소리가 기꺼이 돼주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종교인이란 반드시 그가 속한 시대의 사회-정치적 상황과 고민을 민감하게 의식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인이 성서적 근본주의 노선을 택하고 세속사에 대해 은둔적이며 도피적인 자세를 취하기보다는 사회문제에 책임의식과 적극적인 현실참여정신을 가질 것을 주창했다.
한국의 기독교인은 크게 세 부류로 나눌 수 있는데, 첫 번째 부류는 근본주의자(fundamentalist)이고, 두 번째 부류는 더욱 근본주의자(more fundamentalist)이며, 마지막 세 번째 부류는 최고의 근본주의자 (most fundamentalist)이다. 한국의 기독교인이 이같이 압도적으로 근본주의자 경향이 강한 이유로는 초기 서양선교사의 영향이 크다. 19세기 후반과 20세기 초반 한반도에 상륙한 서양선교사의 복음을 향한 종교적 열정은 의심할 여지없이 뜨거웠다. 이 당시 초기 서양선교사의 나이는 하나같이 20대였는데, 예를 들면 언더우드는 26세, 아펜젤라와 알렌은 27세, 스크랜톤은 29세였다. 이러한 젊은 서양선교사의 한반도 복음화를 위한 헌신적 자세와 정열에 대해선 전혀 의심의 여지가 없지만,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사회에 대한 경험이 부족했고, 한인간으로서 충분히 성숙했다고 보기는 어려울 뿐더러 어떤 면에서 순진한 청년에 불과했다. 대부분의 오늘날 한국 기독교인은 초기 서구의 선교사로부터 순진한 복음의 열정과 더불어 이러한 인간으로서의 미숙함과 무경험을 또한 신앙적 유산으로 물려받았다.
그러므로 오늘날 한국기독교인은 종교가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관계정립이라는 것은 의식하되, 종교란 또한 타문화, 사회, 정치환경과 상관관계에 있다는 것은 깨닫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초기의 서양선교사들은 한반도에서 일본식민정권과의 충돌을 최대한으로 피하기 위해서 기독교의 현실역사의식적인 면이나 정치적인 면은 그들의 설교내용에서 철저하게 배제시켰다. 그러한 맥락에서 한국의 기독교는 정치에 무관심한 종교로 변형되었던 것이다. 교리적인 면에서는 극단 보수적이 되었고, 사회개혁 보다는 각개인의 '인품완성'에 더 초점을 맞추게 되었다. 그리고는 '속된 사회' 보다는 '성스러운 교회'일에만 온정열과 주의를 기울이는 기형적인 종교로 전락해 버렸던 것이다. 그러므로 보수적인 교단일수록 소위 '성속'에 대한 구별이 강하고, 기득권 지키기에는 관심이 가열돼 있으되, 사회 및 정치의 각종 부정부패 문제에는 무감각한 반응을 취했다.
그러나 20세기 한국인들의 사생활은 압도적으로 정치적 간섭을 받았다. 일찌기 아리스토텔레스가 지적했듯이, 인간이란 정치를 좋아하건 싫어하건 정치적 동물일 수밖에 없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한국의 기독교인이 상실했던 본래 기독교의 모습인 현실역사의식적인 면과 정치적인 면을 회복시키고자 힘썼던 것이다.
함석헌 민주화운동의 그 성서적 연관성
신약성경의 공관복음을 살펴볼 때 예수에게 있어선 성속 즉, 종교적인일과 사회-정치적인 일의 구분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함석헌이 그의 삶을 통해서 종교적인 일과 사회-정치적인 일을 구별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성서적이라 할 수 있다. 함석헌은 더 나아가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성령을 "사회악과 싸워서 세상을 건질 생각을 하는 것"으로 해석하기도 했다. 함석헌은 그의 조국이 사회-정치악에 의해서 전복당하기를 원하지 않았고, 그래서 비폭력적인 방법으로 그러한 사회-정치악을 소멸시키려고 힘썼다. 그러나 이러한 함석헌의 기독교관 혹은 종교관을 한국의 극우보수층 기독교인은 "너무 정치적" 이거나 "너무 정치간섭주의" 신앙관으로 보았다. 반면에, 과격한 재야측과 소위 운동권에서는 함석헌의 민주화 운동을 위한 비폭력원칙을 "너무 종교적" 이거나 "너무 수동적"인 저항으로 보았다. 여기서 우리는 함석헌 문제를 성서와의 관련성 속에서 이해하기 위해, 복음서의 예수의 언행이 그 당시 사회환경에 미친 영향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예수의 사회적 지위와 목수로서의 직업은 세속적인 기준으로는 보잘것이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로마 제국의 식민지 청년으로서 그 당시의 사회, 정치, 종교(유대교)에 관해 독학으로라도 지식을 넓혔던 것으로 보여진다. 복음서를 통해서 주목할만한 것은 당시의 사회적 신분이 높았던 지식인 사두개인은 물론이고, 종교지도자 바리새인, 법률가, 장로, 심지어 약삭빠른 첩자들조차도 초라한 목수 출신의 예수를 논쟁으로 누를 수 없었다는 것이다. 예수와 이들이 벌인 논쟁의 주제는 당시의 종교적인 문제에서부터, 정치적, 역사적, 법률적, 도덕적인 문제 등 거의 인간사의 모든 문제를 망라했다. 인텔리 정치인 니고데모 같은 이도 시골뜨기인 '괴짜' 예수에게 비밀리에 찾아와 진지한 질문을 퍼붓기도 했다. 더구나 당시의 기득권 층은 이러한 예수의 언행에 대해 일종의 위협과 두려움을 느꼈고 기회가 되면 '골치덩이' 예수를, 박정희가 장준하를 죽이듯 아예 잡아죽일 방법을 모색했다. 그러나 동시에 이들 기득권 층은 예수를 죽이는 일이 민중의 난동을 초래할 것이라는 염려로 한때 예수 살해계획을 보류하기도 했다.
예수는 과연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었을까? 그의 의중이야 어찌되었든 간에, 예수는 이제 로마식민통치로부터 무력과 유혈을 동원해서라도 이스라엘의 독립을 계획하는 과격한 유대인 민족진영으로부터, 점차 이스라엘 민족을 독립시킬 민족지도자, 잠재적 메시아로 열렬한 주목과 기대를 받기 시작했다. 그런 면에서 친로마파인 기득권 층의 유대인들과 로마식민정권에서 예수를 경계하고 그의 언행으로부터 권력도전, 체제전복의 위협을 느낀 것은 자연스러운 일일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당시 예수의 언행은 종교인으로서는 '너무 정치에 간섭하는듯한' 인상을 풍겼고, 반면 사회혁명가, 잠재적 정치인으로서는 '너무 종교적'인 냄새를 풍겼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기서 예수와 유다 사이의 관계를 재조명 해봄으로, 예수가 과연 순수한 종교사상가였는지 아니면 사회참여를 부르짖는 정치적 행동가였는지의 여부를 더 뚜렷하게 파악할 수 있을 것 같다.
일반적으로, 성서역사가들은 유다가 로마식민정권에 무력으로 대항하는 유대인 독립운동단체인 열심당 (Zealots)의 열광적인 회원이었거나 최소한 이들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고 추정한다. 열심당은 일제시대 한국식으로 표현하면 독립군이나 광복군과 비슷한 단체다. 한국의 광복군과 좀 다른 점이 있다면 열심당원들은 유대인으로서의 민족애 외에, 로마식민정권에 저항하여 무력투쟁을 하는 자신들의 독립운동을 통하여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역사(役事)할 것으로 믿었다는 것이다. 즉 유대인 민족주의에 유대교의 종교신앙이 함께 합쳐진 과격한 정치-종교적 지하조직이 열심당이다.
유다는 과격한 행동주의자였고, 비폭력을 주장하는 예수와는 달리,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고 불의한 로마정권으로부터 이스라엘을 독립시키려는 야심에 차있었다. 비록 유다만이 예수의 열두제자 중 오직 갈릴리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예수가 유다를 회계로 임명한 것이 주목을 끈다. 이것을 1970년대 한국적 상황으로 풀이하면, 재야조직원 중에서 오직 유다만이 유일하게 호남인이 아니었는데도 불구하고, 호남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은 단체에서 중책을 맡은 것으로 비교할 수 있다. 어느 시대 어느 집단을 막론하고 돈 관리의 책임을 맡은 사람은 그 집단으로부터 신뢰와 능력을 인정받은 사람이다. 다른 말로 인간은 믿을 수 없는 얼렁뚱땅한 아무사람한테나 자기들의 돈을 맡기지 않는다는 말이다.
만약 회계직이 유다에게 금전적 욕구를 불러일으킬 유혹이 된다고 생각했다면, 전지전능한 예수는 그를 돈을 관리하는 자리에 임명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한 유다 자신도 돈 몇푼 훔치는데 관심이 있는 좀도둑 근성이 있었다면 물질적으로 가난한 전도자인 예수를 쫓아다니지는 않았을 것이다. 로마의 착취로부터 식민지 이스라엘의 빈곤과 사회문제에 대한 의식이 예민한 유다는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예수의 발에 부었을 때 당당하고 거침없이 스승 예수를 비판하기도 했다: "왜 이 향유를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주지 않았소?" 그러므로 여기서 우리가 추정해서 내릴 수 있는 결론은 유다가 예수의 뒤를 따라다닌 동기는 종교적 동기나 금전적 동기가 아니라, 민족주의자적인 동기와 사회-정치적 동기라는 것이다.
유다의 주요 관심사는 로마의 지배로부터 그의 조국 이스라엘의 정치적 독립이었고 사회정의의 실현이었다. 이 목표를 위해 유다는 민중봉기를 일으킬 잠재적 영향력이 있는 예수의 도움이 필요했던 것이다. 유다와 예수는 오랜 기간 동안 주야를 가리지 않고 시간을 함께 보냈다. 둘은 다른 제자들과 더불어 숙식을 함께 했을 것이고 성경에는 기록되어 있지 않지만 여러가지 주제로 토론, 대화, 심지어 논쟁을 벌였을 것이다. 예수 곁에서 1년 혹은 3년을 지내며 유다는 예수의 정치-사회적 메시아로서의 잠재력에 확고한 신념을 가졌을 것이다. 유다는 예수제자 중 가장 열렬한 민족주의자였고, 순진하고 단순투박한 갈릴리 출신의 다른 제자들보다 현실감각이 날카롭고 빠른 냉철한 행동가로서 예수의 정치적 잠재력을 용이하게 꿰뚫어 보았다.
무력을 동원한 정치적 독립과 로마체제 전복에 관심이 집중되었던 유다가 예수의 '정치적 잠재성'을 파악못했더라면 순수히 '종교적이고 복음적인' 예수 곁에 그렇게 오래 머물러 있지 않고 빨리 떠났을 것이다. 아마도 유다는 실제로 예수가 정치적 의미의 통치자, 즉 로마제국에 대항해 이스라엘의 정치적 왕이 될 수 있다고 믿었던 것 같다. 유다는 적절한 시기가 되면 예수가 열심당과 연합해 그의 조국 이스라엘을 억압자 로마정권으로부터 해방시키는 물리적 전투도 불사할 것으로 믿었던 것이다.
대부분의 유대인들도 예수가 자기들을 로마의 예속되고 속박된 위치에서 물리적으로 해방 시켜줄 메시아라고 기대했다. 기득권층과 로마 권력층은 예수를 위험한 선동자로 인식했고 그러므로 그런 예수의 언행을 항상 주시했다. 결국 예수가 종교적 의미의 죄인 취급을 받아 유대법에 의해 돌에 맞아 죽기보다는, 군사-정치적 범죄인 취급을 받아 침략자 로마법의 십자가형에 의해 최후를 맞은 것이 또한 예수의 침략정권에 대한 '정치성'을 반영하는 간접적인 증거다. 여기서 우리는 정치인이나 군인이 아닌 민간인 신분임에도 불구하고, 시인 김지하가 70년대 민사재판이 아닌 군사재판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상황을 상기할 수 있다.
한편, 예수 자신이 의식한 스스로의 메시아관은 열렬한 유대인 민족주의자나 그 당시 묵시적 종교집단, 그 어느 그룹과도 구별되는 독특한 것이었다. 의심할 여지없이 예수는 정치인이 아니었고, 그의 목적도 유대사회의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예수는 자신이 속해있는 시대의 사회 정치적 문제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만도 아니었다. 오히려 예수는 이스라엘과 유대인의 정치-사회문제에 깊은 관심과 염려를 가지고 있었다. 결과적으로 예수는 기존의 정치질서와 종교적 규율을 위협한다는 혐의로 정치권력의 손에 의해서 사형에 처해진 것이다. 만일 예수가 `순전한 복음주의자'였고 '정치와는 아무 상관이 없는' 존재였다면, 왜 그가 정치권력과 기존의 종교 기득권층으로부터 끊임없는 감시와 경계의 대상이 되었을까? 그리고 왜 그런 정치와는 무관한 인물인 예수가 '군중들에게 난동을 야기 시킬지도 모른다'고 정치권력층에서는 우려할 수밖에 없었을까?
유다와 예수와의 이런 미묘한 관계를 염두에 두고, 우리는 1970-80년대 군부독재체제 아래서 과격한 운동권 대학생과 재야지도자 함석헌과의 미묘한 관계를 가정할 수 있다. 1970-80년대 과격한 운동권 대학생들 중에선 군사독재체제에 반대하여 재야지도자 함석헌이나 문익환 등을 이용하여 게릴라전을 통해서라도 군부독재정권을 전복하고 민주정권을 세우기를 열망한 그룹이 있었다. 실제로 장준하는 박정권에 대항해 무력 게릴라전을 구상하기도 했었다. 이때 시국문제로 깊은 고민을 하는 한 의식있는 운동권 대학생이 있었다고 가정하자. 그 대학생이 과연 누구의 주변을 맴돌겠는가? '3박자 구원'을 이야기하는 세계최대규모의 여의도 순복음교회 조용기목사의 주변보다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하고 감옥문을 들락날락하는 문익환목사나 함석헌 주변을 맴돌지 않을까? 유다가 누구인가? 1970-80년대 한국적 상황으로 표현하면 그는 시국문제로 고민하는 과격한 운동권 젊은이다. 예수가 누구인가? 1970-80년대 한국적 상황으로 표현하면 그는 시대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처럼 아파하고 울부짖는 사회의 양심적 스승이 아닐까?
물론 과격한 운동권 대학생의 기대와는 달리 비폭력을 주장하는 함석헌은 결코 군사독재체제에 대하여 무력투쟁을 용인하지 않을 것이고, 정치인이 아닌 그로서는 정권을 잡아야 하겠다는 야심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예수당시의 로마식민정권이 블랙리스트에 오른 예수의 언행을 항시 주목하고 경계했던 것처럼, 박정희 군사정권은 블랙리스트에 오른 재야의 함석헌 그룹이 행여나 정권타도나 정부전복을 계획하지 않을까 끊임없이 경계하고 주시했다.
70-80년대를 통해서 소위 정부비판을 하는 진보적 기독교인은 한국 전체기독교인 중에서는 소수그룹에 속했다. 그러나 동시에 주목할 것은 이 소수그룹의 기독교인을 통해서 당시의 가장 중요한 시국성명서들이 발표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때 박정권은 이들 소수 그룹의 기독교인을 재야의 주요한 정치적 교섭상대로 여기기도 했었다. 반면에 군사정권은 '순수 복음주의'교회나 기득권층과 밀착해있는 극우보수 기독교인들로부터는 체제전복위협을 느끼지도 않았을 뿐더러, 시국문제를 풀기 위한 정치교섭상대로 여기지도 않았다는 것이다.
한편 혼돈스러운 그의 주변상황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의 선 자리는 '정치와는 상관없는' 근본적 복음주의 기독교인그룹이나 아니면 독재체제전복에 열중해있는 운동권그룹 중 그 어느 그룹과도 달랐다. 예수의 선 자리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는 정치와는 아무상관없는 순전한 복음주의자도 아니었고, 또한 로마식민정권의 체제전복에 열중해있는 인물도 아니었다. 함석헌도 정치인이 아니었고, 그의 목적도 군사독재아래서 정치적인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동시에, 함석헌은 자신이 역사적으로 속해있는 시대의 사회-정치적 문제에 냉담하고 무관심한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함석헌은 종교인으로서 한국의 정치-사회문제에 깊은 관심과 염려를 가지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의 입장과 민주화를 위한 행동은 지극히 성서적이었고 아주 예수적이었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그의 예수관을 표현하기도 했다: " 예수는 정치하잔 목적은 아니었고 '내 나라는 이 땅에 있지 않다'고 분명히 말했지만, 그럼 사회에 대해 무관심했나 하면 그렇지 않다. 그와 정반대로 애끊는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가장 걱정한 것은 민중의 양심이 썩어버리는 일이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정치-사회적 민주주의는 그의 종교적 신앙과 같은 것이었다. 그래서 그런 그에게 있어서 민주주의를 향한 자유의 길과 궁극적 절대자를 향한 사랑의 길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이 정확하게 일치하는 것이었다. 민주주의 중요한 요소 중의 하나가 언론의 자유라고 할 때, 함석헌은 분명히 그의 직설적이고 통쾌한 말과 글을 통해서 한국에 언론의 자유를 확립시키고자 했다. 그래서 그는 인간의 기본권을 억압하는 독재권력을 거침없이 비판했고, 양심수의 즉각적인 석방을 요구했으며, 한반도에서 공산주의를 대항하는 가장 효율적인 무기는 바로 민주주의라고 주창했다. 그런 함석헌이 1970-80년대를 통해서 남한의 민주화운동을 상징하는 재야의 인물로 부각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한국의 수많은 씨 에게 민주주의가 현실이 아닌 하나의 미약한 꿈에 불과했을 때, 함석헌은 자유하는 씨 의 상징이었고, 민주정신의 화신이었다.
전 한계레신문사 대표 송건호는 박정희의 유신독재기간 함석헌의 두려움없는 활동에 대해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그 당시 아무도 독재적인 박정권에 대해서 감히 말하거나 글쓰는 사람이 없었어요. 어느 언론인, 대학교수, 지식층도 감히 박정권의 부당성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어요. 함석헌선생만이 유신정권의 불법성과 부도덕성을 두려움없이 당당히 비판했지요. 지금도 나는 함선생이 어떻게 어디서 그런 용기가 나왔는지 알 수가 없어요. 어떻게 그렇게 두려움이 없었을까?"
유신체제 아래서는 소위 '국가원수모독죄'가 있었고 그러므로 박정희에 대한 어떠한 비판도 곧 범죄행위로 간주되었다. 세속적인 정권에 대한 함석헌의 두려움없음은 절대자 혹은 하느님과의 밀접한 그의 영적 교섭에서 연유되는 것이 아닐까. 함석헌은 가족 외에는 아무 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재산도 없었고, 고정된 수입도 없었으며, 사회적인 지위는 더구나 없었고, 어느 정치집단과도 아무런 이해관계가 없는 하나의 자유로운 씨 이었다. 노자가 표현했듯이, "남을 위해 더 행하는 사람은 더 소유한 사람과 같다. 남에게 더 주는 사람은 더 가진 사람과 같다." 함석헌은 사랑하는 조국의 민주주의를 위해 언제든지 죽을 준비가 되어있는 씨 이었고, 그러한 그의 조국애가 독재권력에 대항했던 함석헌의 가장 무서운 무기가 아니었을까. 그래서 예수는 "사랑 안에는 두려움이 없다. 진정한 사랑은 두려움을 내어쫓는다"라고 했던 것이 아닐까.
함석헌이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하는 동안인 1963년, 그는 사상계사로 부터 월남언론상을 수여받았다. 그리고 1979년과 1985년에 걸쳐 함석헌은 미국 퀘이커회에 의해 노벨평화상 후보로 추천되기도 했다. 1987년 그는 또한 동아일보사가 제정한 제 1차 인촌언론상을 수상받았다. 이것은 30여년간의 군사독재기간을 통하여 그의 {씨 의 소리}가 한국의 언론자유를 위해 미친 영향과 공적을 평가하여 제정된 상이었다. 정진석은 언론인 아닌 언론인으로서 함석헌이 한국언론사에 끼친 영향을 이렇게 요약했다: "비록 함석헌은 전문적이고 직업적인 언론인이 아니었지만, 군부독재기간을 통하여, 그는 무소속 언론인으로서 한국의 언론자유를 적극적으로 증진시킨 장본인이었다."
함석헌은 현대사회의 언론이 예수가 유대인과 로마인을 상대로한 역할과, 석가가 인도인과 힌두교도들을 대상으로한 역할, 소크라테스가 아테네의 청년들과 궤변론자들을 놓고 한 역할, 그리고 공자가 고대 중국인들을 계몽, 선도하고 비판한 사회적 양심으로서의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했다: "시저 죽는 것을 배웠으면 오늘의 시저도 죽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프랑스 혁명사를 읽었으면 민중의 앞장을 서야 할 것 아닙니까? 소크라테스, 예수의 수난을 보았으면 그와 같이 죽어도 옳은건 옳다 그른 건 긇다 말을 했어야 할 것 아닙니까?...옛날 예수, 석가, 공자의 섰던 자리에 오늘날은 신문이 서 있습니다. 오늘의 종교는 신문입니다."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하는 과정에 있어서, 함석헌은 종종 불가피한 어려움과 시련을 겪어야 했다. 그러나 어떠한 외부의 고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결코 낙담하지 않았다. 함석헌은 그가 뿌린 한국의 민주주의를 향한 씨앗이 언젠가는 열매를 맺으리라고 믿었다. 인권신장을 향한 그의 열정은 결코 식지 않았고 그가 살아있는 동안 그의 삶과 더불어 계속 되었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한국에 민주주의를 실현해야 한다는 것은 어쩌면 하나의 종교적 신념이었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이러한 자신의 신념을 한반도의 씨 과 함께 더불어 나누기를 원했던 것 같다.
함석헌은 인간이란 존재를 정치적 존재일 뿐 아니라 종교적 존재라고 보았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종교의 세계와 정치의 세계는 분리된 세계가 아니라 서로 뒤엉키고 얽힌 관계였다. 그는 종교를 인간의 내적 생활의 상징으로 보았고, 반면에 정치는 인간의 외적 생활의 상징으로 파악했다. 그러므로 그는 종교적 경외심을 결핍한 정치나, 정치문제에 무관심한 종교를 생각할 수 없었다. 함석헌은 중세 유럽의 경우처럼 종교가 세속정치를 지배해서도 안되고, 그 반대로 20세기 제국주의 시대처럼 정치권력으로서 종교의 세계를 조종해서도 안된다고 믿었다. 이러한 그의 종교와 정치에 대한 시각을 함석헌은 다음과 같이 요약했다: "기독교도가 그 정신을 살리는 정치를 할 수 있고 다른 종교도 역시 믿는 사람으로서 정치를 할 수는 있지만, 기독교 또는 어떤 종교가 그 자체로서 정치를 할 수는 없고 따라서 기독교정당이란 있을 법한 일이 아니지요. 궁극적으로 종교의 이념은 정치적 방법으로는 펼 수 없는 것입니다. 그것은 타락이에요." 함석헌은 정치적 권력이나, 지식, 문화 등 모든 것이 한 곳으로 집중하는 것보다는 분산하는 것이 이상적이고 또 그것이 역사의 방향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1992년 12월, 한국은 대통령선거를 치루었다. 1961년 5.16 군사정변이래, 남한의 대통령은 모두 직업군인이었거나 혹은 군출신이었다. 그러나 1992년 한국의 대통령 선거를 놓고 영국 {파이넨셜 타임즈}에서 보도했듯이, "한국의 대선에서 30여년만에 처음으로 대통령 후보자들 중 군출신이 하나도 없었다." 여당의 김영삼후보나 야당의 김대중후보 모두 군출신이 아니었다. 1992년 대선에서, 김영삼이 대통령에 당선되므로서 1961년 5.16후 처음으로 민간인 출신이 대통령이 된 것이다. 1997년 대선에서는 김대중이 역시 민간인출신으로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1970년대 박정권하에서 두 김씨 모두 재야의 함석헌과 함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일했다. 함석헌과 함께 두 김씨는 군사독재의 비상계엄령 아래서 구속, 체포, 연금, 단식 등의 체험을 나누기도 했다.
30여년간의 군사독재 아래서 한국의 씨 들은 자유민주주의를 누릴만한 자격이 없는 존재들처럼 권력자들의 손에 의해 세뇌되어 왔었다. 그러나 함석헌을 비롯한 진보적 기독교인들의 인권운동과 민주화운동의 공헌으로 남한의 군부독재는 그 종적을 감추었고 군사정권의 유산도 점차 사라져가고 있다. 더불어 한국은 이제 그 역사를 통하여 어느 때 보다도 더욱 이상적인 민주주의 체제에 가까워 오고 있다. 탄압과 인권유린으로 점철된 30여 년간의 군부정권에도 불구하고, 남한이 군사독재 아래서 눈부실 만한 경제성장을 이루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이 '눈부신' 경제성장을 위해서 많은 씨 들이 빈곤, 폭력, 인권부재, 공포정치 등의 직간접적인 체험을 끊임없이 강요받아야 했던 것도 또한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한국에서의 경제성장은 박정희나 전두환이 주창했듯이 아마도 저임금, 미비한 근로조건, 궁핍한 서민생활의 담보, 초과연장근무 등에 의해서만 성취가능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오늘의 서구에서도 물론 한 개인이 자신의 사업을 확장시키기 위해서는 초과연장근무 등의 수단을 통해서 하는 경우가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은 근로자 자신이 민주적인 제도하에서 자의에 의해 그 일을 하느냐 아니면 독재자의 강요로 인해 어쩔 수 없이 타의에 의해 그 일을 하느냐 일 것이다. 순전히 경제성장적인 요소만 거론하자면, 1930년대의 세계공황을 극복하는데 있어서 독일의 히틀러 (Adolf Hitler: 1889-1945)나 소련의 스탈린의 경제정책이 미국의 루즈벨트의 경제정책보다 훨씬 '효율적'이었고 '생산적'이었다. 그러나 인간사에는 과정이 결과보다 중요하고, 수단이 목적보다 중요하며, 도덕율이 효율보다 중요하다. 그래서 역사가는 도덕성을 무시한 히틀러나 스탈린을 잔인한 독재자로 규정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한국의 민주화는 결국 함석헌의 도덕율의 승리다. 그것은 또한 군사독재에 맨몸으로 대항한 한국씨 의 민주주의를 향한 승리이며, 결국 물질만능과 효율만능에 대한 인간존엄성, 인간도덕성의 승리다
마치는 말 : 함석헌-신의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에서
함석헌은 '무소속'기독교인으로서, 성속의 경계선을 무너뜨렸다. 반면에, 대부분의 한국기독교인들은 소위 '중립론'과 '제정분리(祭政分離)'의 원칙을 내세워 군사독재정권 아래서 사회참여를 아예 거부했다. 그런 기독교인들은 함석헌의 인권운동과 민주화를 위한 활동을 기독교인의 신분에서 벗어난 행동으로 보았다.
이상적인 종교인은, 그의 삶을 통해서 초월적인 영원성을 추구함과 동시에 역사현실의 세속적인 사회참여를 함께 병행시켜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하느님을 초월적인 존재일 뿐 아니라 내재적인 존재로 믿었다. 그리고 또한 인간도 초월적인 면을 강조하면 하나님의 아들이요, 내재적인 면을 강조하면 사람의 아들이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이러한 현세적 내재성과 영원적 초월성을 하나로 결합시켰다. 인간은 누구나 어느 특정한 역사적 한 시기에 태어난다. 그러나 인간은 무한하고 영원한 세계를 동경한다. 그러므로 인간존재에게 있어서, 영원의 세계와 자신이 속한 역사현실의 세계는 둘 다 필요불가결한 세계다. 역사적으로 구체적인 사건에 온몸으로 참여하는 일과 종교적 신앙심을 영적으로 성숙시켜 나가는 일은, 함석헌이 하느님을 향한 믿음의 길을 가는데 있어서 둘 다 꼭 필요한 일이었다. 그는 기독교인이 이세상의 도피자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믿었다. 오히려 이세상의 일에 저 세상의 일보다 더욱 열심히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우리는 인간 개인이란 존재를 사회나 역사를 떠나서는 생각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 종교인에게 있어서 신의도시와 세속도시 사이의 구분이란 있을 수 없다. 함석헌에게 있어서, 그의 종교적 신앙심과 인간애가 바로 신의도시와 세속도시, 절대자 하느님과 상대자 인간을 연결해주는 통로와 같은 것이었다. 그는 하느님의 사랑이나 공의는 휴머니즘과 인간애를 통해서 드러날 수 있다고 믿었다.
비록 함석헌이 살던 시대는 끊임없이 흑백논리가 강요되던 시대였지만, 그는 하느님의 역사와 인간의 역사를 둘로 나누어서 생각하는 논리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함석헌에게, 인간의 역사는 곧 하느님의 역사였다. 그는 역사를 하느님과 인간사이의 대화로 보았고 인간이 하느님을 찾아가는 과정의 기록을 역사라고 보았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하느님의 계시는 그저 공중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반드시 구체적인 인격을 통해서 오는 것이라고 믿었다. 그는 그에게 현존하는 인간이 곧 하늘나라와 하느님의 대변자였다.
인류가 진화해 왔듯이 하늘나라와 하느님에 대한 개념도 계속해서 진화되어 가야할 것이다. 그런 면에서 인생에 결론은 없다. 인생은 그저 과정의 연속일 뿐이다. 함석헌은 종교의 역사를 속화(俗化)의 역사로 파악했다. 종교가 세속화 되어가는 것만큼 정치는 영적화 되어가야 할 것이다. 결국 사회악과 대항하는 것과 영원한 하늘나라의 추구는 둘 다 똑같이 동등하게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함석헌은 또한 평화와 사회정의의 가치는 둘 다 끊을 수 없는 관계라고 정의했다: "구경의 목적은 세계 평화에 있지만 평화는 정의 없이는 실현되지 않는다. 사람은 근본이 사회적인 존재다."
그러므로 그가 속한 사회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함석헌은 평화주의자로서, 그 사회의 어려움을 자신의 어려움처럼 느꼈다. 이것이 그가 그 시대의 사회적 '도전'에 개인으로서 '응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다.
더욱이, 함석헌은 유연한 노장사상과 내적 빛을 강조하는 퀘이커리즘을 통해서, 외적 힘의 강약에 상관없이 인간은 내적 존엄성과 평정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는 노장사상의 역설적 논리를 통해서 "강을 약으로 제할 수 있다"고 믿었다. 노자는 이렇게 증언했다: "크고 강한 것은 낮은데 처해질 것이다. 부드럽고 유연한 것은 높은데 처해질 것이다." 약함을 강함으로 상징함으로서, 함석헌은 강력한 식민제국주의 나 독재정권의 힘을 극복할 용기를 한반도의 씨알에게 심어주었던 것이다.
그는 퀘이커리즘의 속의 빛을 통해 내적 힘을 기르고 사회개혁을 추구하는 정신을, 한국민족이 그 의지를 기르고 일으켜 세우는 한 방법으로 배우기를 원했다. 함석헌은 그의 전 생애를 통해서 불굴의 용기와 저항정신을 보여주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그의 내면에는 용기와 저항정신에 못지 않게 항상 유연함과 '젠틀'한 정신을 지니고 있었다.
세계적인 기준으로 판단해볼 때 함석헌의 성취는 아주 미약한 것으로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함석헌 개인의 한계라기 보다는 한반도의 상황적 한계다. 2차대전후 한반도는 세계냉전 이데올로기가 한군데로 몰린 가장 극렬한 전투장이었다. 남한 박정희나 전두환의 독재국가주의는 북한 김일성의 독재공산주의와 별반 차이가 없었다. 남한에선 특히 대부분의 친일파잔당이 군대, 경찰, 학계, 언론계, 경제계, 정치계등 사회 전반의 기득권을 고수하고 있었다. 이런 풍토 속에서 함석헌은 해방 후에도 계속해서 권력에 저항해야만 하는 저항자로서의 자신의 모습을 발견할 수밖에 없었다. 이래서 함석헌은 한국 역사를 "등뼈가 부러진 역사", "엎친 데 덮친 재난"으로 표현한 것이다. 한국인의 큰 불행은 한국민족의 운명이 너무나도 자주 외부세력에 의해 결정되어 왔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성취나 공헌을 평가하기 어려운 또 다른 이유 중의 하나는 마찌니(Giuseppe Mazzini: 1805-1872)의 경우와 비슷하다. 둘 다 어떤 눈에 쉽게 보이는 정치-외교적 업적 혹은 군사적 정복이나 승리로서의 성취를 민족에게 가져온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다. 함석헌이나 마찌니의 공헌과 성취는 씨 의 마음속에 이상과 희망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요한 민족의 비전을 심어 주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성공여부를 정권에 저항하는 그의 조직력이나 동원능력 등에 두고 본다면, 그는 또한 '실패자'로 평가될 수밖에 없다. 냉전이 정점의 극에 달한 한반도에서, 날카로운 조직력을 갖춘다는 것은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가 그랬던 것처럼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키아벨리적 잔인함이 필요했던 것이다. 함석헌은 이런 면에서 분명히 낙제자였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의 전 삶을 통해서, 함석헌은 '성공의길' 보다는 오히려 '옮음의 길'을 추구했다는 것이다.
연약한 하나의 인간으로서, 함석헌은 그의 한계, 단점, 불완전함이 있었다. 그는 씨 을 사회-정치적 세력으로 규합해 나가는데 있어서 전혀 강력한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는 씨 의 저항활동을 위해 어떤 잘 짜여진 운동전략이나 전술프로그램을 작성한 것도 아니었다. 그는 누구에게도 "무엇을 하시오"라고 지시나 명령도 하지 않았다. 그가 민족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웅대한 야심이나 강렬한 의욕이 있었다고 보기는 더욱 어렵다. 그러나 어떻게 보면 다소 '소극적'으로 함석헌은 그저 씨 과 함께 더불어 불의한 정권에 대항했다.
더우기 현세적인 의미에서 함석헌의 소위 '직업경력'을 보면 우리는 더욱 아련한 난관에 빠지고 다음과 같은 질문이 떠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어떻게 생계를 유지했을까? 반반한 직장이 따로 있었을까? 가장으로서 식구를 제대로 돌보았을까? 그가 분명히 가정을 가진 사람이었지만 그를 가정적인 사람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특별히 재정적인 면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의 아내는 그를 '올바른 이'로서는 좋아했을런지 모르나, 그날 벌어 그날 먹는 것같이 가난한 살림을 꾸려야 하는 한 인간의 아내로서 그녀는 이상주의자인 남편 꿈만 먹는 가장을 어떻게 생각했을까? 그의 아들은 아버지 함석헌을 민족의 위대한 지도자로서 존경했지만, 함석헌은 이러한 자녀들에게 '다정한 아빠'보다는 '호랑이 아버지'였다. 비록 재정적으로는 종종 쪼들리는 살림을 살았지만 함석헌이 한가정의 가장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가장으로서 가족을 제대로 돌보지 못한 불합격 남편이었고 아버지였다. 고정적인 수입이 없이 어떻게 그가 현대사회에서 생존해갈 수 있었을까? 세속적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함석헌은 과연 낙제자 혹은 실패자로서의 삶을 살았던 것일까?
그렇다 현세적인 면에서 함석헌은 전적인 실패자로도 평가될 수 있다. 그러면 우리는 그를 인생의 낙오자로 보아야 하는가? 1928년에서 1938년을 제외하고는, 그는 한번도 안정된 직장이나 고정된 수입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재물이나 재화에 아주 무관심하다 못해 초연한 그의 모습은 우리에게 청빈낙도(淸貧樂道)한 조선조 유학자의 삶을 상기시켜준다. 정신세계인 신의도시와 물질세계인 세속도시 사이에서 그 어느 쪽에도 전적으로 치우치기를 거부하는 함석헌의 삶의 양태는 사회학적으로 보면, 그가 마치 소외되어버린 주변인(이질의 두 문화 속에서 어느 쪽에도 동화되지 않은 개인)처럼 우리 눈에 비쳐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노자, 예수, 소크라테스, 세례 요한 등도 그들이 살았던 시대, 사회의 주류세력으로부터 소외된 주변인으로 보일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함석헌이 사회적으로 모든 사사한 이해관계를 떠나서 기꺼이 변두리인 일수 있었기에, 자신만의 고유하고 독특한 사관과 사상을 형성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함석헌은 자신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묘사한 바 있다:
"저는 이 새(신천옹)가 좋습니다. 신천옹(信天翁)이라 이름한 이유는 이 놈이 날기는 잘해 태평양의 제왕이라는 말을 들으면서도 고기를 잡을 줄은 몰라서 갈매기란 놈이 잡아먹다가 이따금 흘리는 것을 얻어먹고 살기 때문입니다. 그래 일본 사람은 그 새를 바보새라고 합니다. 제가 좋아하는 이유는 이 바보새란 이름 때문입니다. 어쩌면 제 사는 꼴도 바보새 같다 할 수 있습니다. 마음은 푸른 하늘에 가 있으면서 밥벌이할 줄은 몰라 여든이 다 되어 오는 오늘까지 친구들의 호의로 살아가니 그 아니 바보새 아닙니까?"
함석헌은 또한 그의 삶 자체를 계속적인 실패자로 보았다. 그리고 자신의 실패한 삶을 마치 '바보새'의 삶과 같이 역설적(逆說的)인 독백을 통해서 묘사하기도 했다:
"의사를 배우려다 그만두고, 미술을 뜻하다가 말고, 교육을 하려다가 교육자가 못되고, 농사를 하려다가 농부가 못되고, 역사를 연구했으면 하다가 역사책을 내던지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으면서, 집에선 아비 노릇을 못하고,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하고, 학자도 못되고, 기술자도 못되고, 사상가도 못되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
필자는 함석헌을 한국 현대사에 있어서 가장 영향력 있던 이상주의자로 규정한다. 이상주의자였던 그였기에 냉혹한 현실과 직면할 수밖에 없었다. 그의 조국이 일본제국주의 손아귀로부터 독립을 염원했을 때 그는 삶으로 저항했다. 그래서 자신의 편안한 삶을 위해 의사가 되려는 꿈을 포기했고 역사책을 내던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조국의 민주주의와 한반도의 씨 을 위해 두려움 없는 말과 글로서 언론의 자유, 표현의 자유를 추구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가족을 위해 아버지 노릇, 남편 노릇을 제대로 할 수 없었고, 좋아하던 미술공부를 '사치'로 여기고 체념할 수밖에 없었다. 함석헌의 차남 함우용은 그 아버지를 이렇게 묘사하기도 했다: "아버님은 집안일이나 가계에는 거의 관심이 없으셨다. 아버님의 주요관심은 언제나 '조국의 운명', '독립', '민족', '정의', '평화', '진리'등이었다...아버님은 우리(자녀)들에게 선물을 주실 때도 먹는 것이나 사탕보다는 언제나 책이나 읽을 것을 주셨다."
독립운동과 민주화운동으로 함석헌은 항상 주야없이 분주했으리라 짐작된다. 그런 그가 사랑하는 자녀들과 한가롭게 앉아서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눌 시간을 가졌으리라고는 보기 어렵다. 함석헌의 사위 최진삼 또한 그가 장인으로부터 받은 인상을 이렇게 표현했다: "함선생님은 정의를 위하여 살고 정의를 위하여 죽어야 한다고 제게 가르치셨습니다." 함석헌이 민족을 위한 위대한 아버지였는지는 몰라도 우리는 그를 가족을 위한 다정한 아버지였다고 평가하기는 힘들 것 같다. 동아시아의 유교적인 전통에서 보면, 그는 확실히 가족을 위한 모범가장이 아니었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모순적인 가장이었다. 모순적인 가장의 모습을 우리는 또한 넬슨 만델라의 경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만델라의 자녀들은 아버지 만델라에 대해 이렇게 증언한바 있다: "우리는 우리에게 아버지가 있다고 생각했고 어느 날 (27년의 징역살이 끝에) 아버님이 마침내 우리 곁에 돌아왔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당황스럽게도 우리 아버지는 돌아오자마자 곧 우리 곁을 떠났습니다. 그는 이제 민족의 아버지가 되어버린 것입니다."
함석헌은 그의 조국과 민족을 위해 자신의 아내와 가족을 버린 것처럼도 보인다. 전환기를 사는 민족지도자의 삶은 불안정할 수밖에 없고 그의 사생활은 공익을 위해 희생될 수밖에 없는 것인지. 한 공인의 삶이 전쟁터의 격전장처럼 되어갈 때, 우리는 거기에서 따뜻한 가정생활이나 화기애애한 사생활의 '사치'를 기대할 수 없을 것이다. 함석헌의 뜨거운 조국애로 인해, 결국 그의 가족은 어쩔 수 없이 값비싼 희생을 치룬 것이다. 넬슨 만델라 역시 민족의 안녕과 가족의 안녕을 사이에 놓고 이렇게 자문하기도 했다: "타인의 안녕과 이웃의 편안한 삶을 위해 나의 가족을 희생자로 만드는 일이 과연 정당화 될 수 있을까? 늙고 오갈데 없는 홀어머니를 돌보아 드리는 일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을까?"
예수는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자가 큰일에도 충성된다고 하였다. 그러나 정치-사회적으로 혼란과 억압의 시기에, 만약 모든 가정의 가장들이 가족의 이익이나 개인적인 안녕을 공익보다 앞세우고, 아무도 외곬수적으로 공적인 목표를 추구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공을 위한 사회개혁을 성취하기 어려울 것이다. 존 울만은 미국 노예제도 폐지론자로서, 흑인 노예해방운동을 하느님의 일로 여겼고, 결국 이일을 위해 자신의 가족을 돌보지 않고 전심전력을 기울이며 돌아다녔다. 간디가 인도를 대영제국으로부터 독립시키기 위해 피로를 잊고 뛰어 다녔지만, 간디의 아들은 그 와중에 술주정뱅이가 되었고, 이것은 간디가 자식에 대한 아버지로서 의무를 태만했다고 지적받을 수 도 있다. 분명히 간디 아들의 입장에선 아버지 간디가 '민족의 영웅'으로 보이지 않았고 결국 그 아들은 아버지 간디를 이렇게 비판하기도 했다: "당신이 그렇게 위대하다면, 그것은 어머니 덕인 줄이나 아시오." 넬슨 만델라의 첫 번째 부인이었던 에블린은, 만델라가 자신이나 자녀들보다 다른 어떤 것에 더 헌신된 사람이란 것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만델라 또한 남아공에서 흑인들의 인권향상을 위한 그의 노력을 결코 중단 할 수 없었다. 만델라의 시각에선, 여호와의 증인이었던 아내 에블린이 인간적으로는 매력적이고, 착하고, 강한 신앙을 가진 좋은 엄마였다. 예수가 이야기 한 것처럼 에블린은 지극히 작은 일에 충성된 사람이었던 것 같다. 그러나 만델라는 백인들의 흑인 차별-탄압 정책에도 불구하고 에블린의 신앙은 그녀에게 무조건 복종심과 굴종심만 가르쳐 주었다고 느꼈고, 만델라는 이러한 아내의 관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결국 에블린은 아이들을 데리고 남편 만델라를 영원히 떠났고, 우리는 한 여성의 남편과 한가정의 아버지로서 실패한 만델라의 모습을 이 경우를 통해서 볼 수 있다.
레오 톨스토이는 제정(帝政)러시아에서 자신과 자신의 가족이 귀족의 신분으로서 누리고 있었던 편안하고 안락한 삶과, 자신의 재산을 가난한 사람에게 나누어주고, 농노를 해방시키고, 이웃을 섬기며 검소하게 이상적으로 살고 싶었던 삶 사이에서 괴리감과 모순감을 느꼈다. 톨스토이는 자기가 믿고있는 종교적 신앙대로 남을 위한 인생을 살고있지 못하는 자신의 모습을 경멸할 위선자의 삶이라고 고백하고 괴로워했다.
만약 우리가 인간이란 존재를 공익중심보다는 가족중심의 삶의 가치로서 평가한다면, 존 울만, 간디, 만델라, 톨스토이, 함석헌 등은 "무책임한 실패자"라고 밖에 볼 수 없다. 함석헌은 한심한 남편이었고 아버지였지만, 자신은 가족보다 더욱 중요하고 시급한 가치를 위해 일한다고 믿었던 것 같다. 그는 민족을 위해 자유의 수호자, 민주주의의 주창자 역할을 할 수 있다고 느꼈던 것 같다. 물론 이것은 함석헌의 자기정당화일 수도 있다.
넬슨 만델라는 모든 인간은 인생에 있어서 두 가지 의무가 있다고 했다. 하나는 가족이나 부모에 대한 의무이고 또 다른 하나는 조국이나 인류공동체에 대한의무가 그것이다. 안정된 사회나 정의가 자리잡은 사회에서는, 각 개인은 각자의 능력과 성향에 따라 이러한 의무를 적절히 수행해 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인간의 기본권이 묵살 당하고 독재와 거짓이 판을 치는 나라나 사회에서는, 인간은 이러한 의무를 제대로 정직하게 수행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부정부패와 불의가 난무하는 사회에서는 정직하게 자유와 정의를 추구하는 개인은 권력에 의해 소외되어가거나 처벌받기 일쑤다. 독재자가 정권을 장악한 사회에서, 조국이나 인류공동체 대해 올바른 의무를 수행하고자 하는 개인은 불가피하게 가족이나 가정에 대한 의무를 수행할 기회를 박탈당하게 되고 자유와 존엄성을 빼앗긴 삶을 강요 받게된다. 독일의 나찌정권 아래서 디트리히 본훼퍼 목사나, 과학자 알버트 아인슈타인의 경우가 적절한 예가 될 것이다. 넬슨 만델라의 경우와 같이, 처음에 함석헌은 가족의 안녕을 등지고 민족의 안녕을 위해 일하고자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20세기 한반도에 불의와 독재가 판치는 상황에서, 씨 의 존엄성과 자유를 추구하며 산다는 것은 곧 그에게 한 부모의 자식으로서, 한 여성의 남편으로서, 한가정의 아버지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귀중한 기회를 가차없이 빼앗기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다.
함석헌의 삶과 생각은 한반도의 자유민주주의를 향한 열망과 씨 의 권익을 지켜주기 위한 뜨거운 사랑에 의해 이어져 왔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이러한 조국과 씨 에 대한 애정과 열정이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 그를 두려움 없이 외치는 자로 변화시켰고, 평화를 좋아하는 조용한 시골 할아버지 같은 그를 광야의 '독설가', '선동자'로 만들었고, 가정적이고 다정한 아버지일 수 있었던 그를 머리둘 곳이 없는 이산가족으로 바꾸어 놓았으며, 젠틀하고 평범한 사람이던 그를 한시대의 '이단자', 저항자로 변화시켰던 것이다.
자신의 종교인 기독교가 타종교를 배척하고 한국기독교인이 기독교의 종교적 우월주의를 주장했을 때, 함석헌은 타종교인의 입장과 처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기독교적 입장'을 '뜻으로 본'으로 수정할 수밖에 없었고, "성경을 연구하자 하면서 성경을 들고만" 있었고, "어부라면서 고기를 한 마리도 잡지 못하는 사람"이 된 것이었다.
'민족주의'라는 미명하에 역사를 통해서 많은 범죄와 죄악이 행해져왔다. 김일성은 북한에서 '주체사상'으로 북조선 인민공화국의 민족주의를 주창하고, 남한에선 이승만과 박정희가 '반공과 부국강병'이란 이름으로 대한민국만의 민족주의를 선언했을 때, 함석헌은 흑백논리와 좌우의 이념장벽 그리고 민족주의를 넘어선 세계주의, 세계화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그에게는 한국민족의 권익만큼 다른 민족의 권익도 중요했다. 그는 키재기를 앞세우는 민족주의, 국가주의시대는 막을 내렸고 인류는 이제 세계주의, 세계화의 목표를 향해 모두가 함께 더불어 가야 한다고 믿었다.
함석헌에게, 민족이나 국가는 인간의 궁극적 가치가 아니었다. 그의 궁극적 가치는 한국만이 문제가 아닌 전 인류를 상대로 한 인류애였고 세계주의였다. 그러기에 그는 자신을 "나가선 국민 노릇을 못한" 사람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그래서 그는 생애의 말년에 광신적 국가주의자들로부터는 애국심이 없는 사람으로 오해를 받았고, 과격한 좌경세력으로부터는 구식인물이라 비난을 받았고, 보수적 기독교인으로부터는 너무 '자유분방한'사람으로 냉대를 받았다. 이러한 비난과 냉대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에게 있어서는, 한국의 기독교인보다는 한국인 전체가 더 중요했고, 한국인보다는 세계인 전체가 더욱 중요했던 것이다. 함석헌은 지구공동체를 염두에 두고 인종, 국가, 종교, 이념을 초월한 휴머니스트였고 이상주의자였다.
그의 계속적인 '실패'에도 불구하고, 함석헌은 인류는 영원의 세계를 향해 끊임없이 진보, 향상되어 간다고 믿었고, 인간의 도덕을 규정하는 마지막 표준도 가족이나 민족을 넘어선 세계공동체에 있다고 확신했다. 역사적 낙관주의자인 함석헌에게 궁극적으로 실패나 성공은 그다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비록 온 세계가 부패, 불신, 무지, 정욕의 겹친 곳이라도 함석헌은 그것을 실패의 세계, 버려야할 세계로 보지 않았다. 냉랭한 배신의 키스를 입에 받으면서도 유다를 "친구"라고 부를 수 있는 예수의 무조건적이고 절대적인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상대적인 차원에서의 실패니 성공이니 하는 것은 함석헌에게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던 것이다.
함석헌은 심지어 '실패'한 유다를 예수의 이면이라고 여기기도 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에게 있어서 성속의 구분, 사회-정치적 일과 종교적인 일의 구분이 무의미한 것처럼 실패나 성공을 구분하는 것은 별 의미가 없었다. 그러므로 그는 모든 장소를 성당으로, 모든 일을 예배로 여겼고, 이세상과 저 세상을 구분하지 않았다. 그는 인간의 신체구조를 비유로 들어 이러한 그의 종교관을 설명하기도 했다: "육체적 생명의 근본되는 먹을 것이 들어가는 것과 정신적 생명의 양식인 말이 나오는 것이 한 구멍으로 하게 되었고, 더러운 찌꺼기를 내보내는 것과 새 생명의 창조를 하는 것이 역시 하나로 되어 있다는 데도 반드시 무슨 뜻이 있어야 할 것이다."
인간은 세속세계, 즉 현상세계의 경험을 통해서 하느님세계 즉 절대세계의 경험을 할 수 있다. 모든 인간의 삶의 양식은 각자 다르지만 하느님은 모든 종류의 인간을 다 포용한다. 그러므로 절대자에게 있어선 성속(聖俗)이 다른 두개의 세계가 아니고 하나의 세계다. 노자가 이야기한 도의 본질처럼, 하느님은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차별하지 않는다. 함석헌에게 있어서도 성이 곧 속이었고, 속이 곧 성이었다. 그러므로 그는 하느님의 일과 세속의 일을 구분하지 않았다.
만약 우리가 한인간의 성공여부를 그 인간이 역사적으로 살았던 시대에만 한정시켜서 평가한다면, 예수의 경우 역시 실패한 사람 혹은 패자로 평가될 수 있다. 함석헌의 주장처럼 기독교인의 입장에서야 십자가에서의 죽음이 예수의 승리였지만, 세속적인 입장에서 그것은 한 식민지 청년지식인의 비참한 최후였다. 십자가에서 예수가 죽은 후, 그의 제자들은 두려움에 질려 모두 도망갔고, 가장 가깝다는 소위 반석같은 제자 베드로도, 스승 예수를 부인했을 뿐만 아니라 심지어 저주하기까지 했다. 그 당시 시대적 눈으로 판단한다면 예수야말로 얼마나 참담한 '실패자'였고 '패배자'였나! 노자는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다: "거대한 완성품은 마치 뭔가 빈틈이 있는 듯이 보인다: 그러므로 그 영향력은 무한정하다; 큰 재능을 가진 이는 아주 어리숙한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자기가 속한 역사적 시대로부터 탈출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자기가 살던 시대의 부산물이란 말이다. 함석헌의 세속적인 실패는 결국 진리의 승리가 아니었을까. 행인지 불행인지 인간이란 존재는 쓰라린 실패와 좌절을 겪어 보아야 비로소 하느님의 구원을 체험할 수 있다. 하느님은 곧 사랑이고 이러한 신과의 영적교감을 통해서 인간은 언어로 표현할 수 없는 영적 황홀경을 체험할 수 있다. 그런 하느님의 존재는 인간에게는 영원히 신비로운 존재다. 그리고 이 신비로움에 인간은 흥분이나 공포로 전율하기도 하고 넋을 잃고 매혹되기도 한다.
분명히, 오늘날 인간은 조직이나 제도없이 살아가기가 아주 어렵다. 그러나 함석헌에게, 경직된 조직이나 제도는 곧 생기에 찬 삶에 못을 박는 것이었다: 그의 생애를 통해서 언제나 조직된 정치권력은 그와 씨 에게 폭력을 휘둘렀고, 제도적인 종교는 그와 씨 의 자유분방한 정신 활동에 속박과 억제를 가했다. 그러므로 함석헌은 조직이나 제도는 작을수록 이상적이라 여겼다. 이런 면에서 함석헌은 첨예한 조직가라기보다는 자유분방한 사상가 였다.
함석헌은 한 개인의 영적탐색과 사회정의를 위한 몸부림은 항상 밀접히 상호연관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 느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개인의 영적탐구에 관심있는 사람들과 사회변혁에 심혈을 기울이는 사람들은, 서로가 서로를 존중해주고 나의 관점을 남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고 믿었다.
그것이 그가 많은 경우에 "글쎄요"의 입장을 취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중의 하나다. 함석헌은 현상적인 정치권력의 장악을 추구하는 일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었고, 보다 본질적인 정치의식, 역사의식을 갖고 이상적인 나라공동체를 만들어가며 살아가는데 관심이 있었다.
빨리 달리는 사람일수록 강한 바람의 저항을 받을 것이다. 맹자의 표현을 빌리자면, 하늘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큰일을 할 사람에게 뼈와 살을 깎는 고난의 훈련을 시킨다. 그의 격동많은 삶을 통해서, 함석헌은 수많은 고난과 시련을 체험했다. 그러나 그는 그러한 시련에 굴복하기보다는 항상 그것을 극복하고자 힘썼다. 그의 가혹한 삶의 역경과 수난에도 불구하고 그는 고통에 찌든 고뇌에 찬 사람보다는 유연한 사랑의 사람으로 남을 수 있었다.
함석헌의 전 생애와 사상은 그가 살았던 시대의 도전과 질문에 응전하고 대답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의 응전과 대답을 통해서, 그는 20세기 한국인의 민족으로서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안토니 스미스가 지적했듯이, "오늘날 민족주의는 각 민족에게 확고한 비전과 정치적 응집력을 제공해 준다. 민족주의는 또한 대중적 열의와 지지를 이끌어 낼 수 있게 한다." 그러므로, "민족에겐 공동으로 이해하고, 열망하고, 느끼고, 의식하며, 민족을 하나로 함께 묶어줄 이상적인 이념이 필요하다."
역설적이게도, 함석헌이 한국을 놓고 파악한 '세계사의 하수도', '패배자'로서의 민족의 개념은, 종래의 서구제국주의적 민족주의의 개념인 '성공', '승자'(특별히 전쟁에서의)와 같은 물리적 강자위주의 가치관에 정면도전이 되면서도 민족을 하나로 묶는 구심점 역할을 해준다. 함석헌이 제시한 이러한 민족주의의 개념은 기존의 승자중심, 강자위주의 민족주의론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전혀 독특하고 새로운 민족주의론이다. 함석헌은 물리적 힘이나 군사력이 약한 민족을 열등한 민족으로 보지 않았고, 한국인으로서 한국인만이 세계인을 위해 공헌할 수 있는 독특한 사명이 있다고 느꼈다. "하느님의 발길에 차인 존재인 나는 누구인가?", "수난의 여왕인 한국인은 누구인가?"라는 질문은 세계사 안에서 억눌린 자, 탄압받는 자로서 한국인의 정체성을 발견하려는 그의 피땀흘리는 영적인 시도였다. 이러한 함석헌의 한국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찾기 위한 시도는 또한 모순적이고 역설적이라고도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그는 탈민족주의 길을 외쳤고 자신을 세계주의자로 선포했기 때문이다: "세계는 하나가 될 때가 되었다. 우리 전체인류가 결국은 한 조상으로부터 온 한 형제자매라는 것을 깨달을 때에 비로소 우리는 싸움과 전쟁을 그칠 것이다."
오늘날 우리는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는"세계에 살고있다. 이승만뿐 아니라 박정희나 김일성조차도 오늘날의 한반도 현실에서는 "거대한 인물"로 평가되고있고 기념관이나 동상을 세워서 기념할 사람들로 여겨지고 있다. 더욱이, 박정희의 반공과 부국강병 그리고 김일성의 주체사상에 비교해, 함석헌이 주창한 휴머니즘적 평화사상이나 이타적 도덕주의는 오늘날 냉냉한 현실주의 실익정책의 구호에 밀려 아주 무력하게 까지 보이는 실정이다. 약육강식, 무전유죄 유전무죄, 적자생존의 원리가 여전히 판을치는 인간사의 일을 경험하면서 우리는 박정희가 주장한 단순한 물리적 힘의 가치관이 함석헌의 이상주의적 가치관보다 좀더 적절한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게된다. 박정희는 한때 이렇게 말한 바도 있다: "인간사에는 경제가 정치나 문화보다 우선한다." 마찬가지로 인간은 우선 먹어야 사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시에 인간은 또한 빵으로만 살수는 없다.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정신적인 존재라는 말이다. 영국 퀘이커 조나단 데일은 이런 질문을 우리에게 던진다: "승자, 권력자, 부자의 가치보다 세계는 이제 다른 가치관에 귀를 기울여야 하지 않을까?"
그의 생애 동안 함석헌은 자신의 이상과 종교심을 갖고 여러가지 사회, 현실문제에 직접 몸으로 부딪쳤다. 그러므로, 한국의 씨 은 이러한 그의 말과 행동을 통해서 조국의 미래를 향한 희망과 격려를 얻을 수 있었다. 그의 올바른 정치를 위한 제언은 민주화 운동의 기폭제가 되었고, 그가 한 종교적 관용주의의 발언은 권위주의적이고 편협한 한국사회와 한국기독교에 자유의 길을 향한 불붙는 도전장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함석헌의 시대"가 과연 한국현대사에 있었는가 라는 질문에 선뜻 그렇다고 대답하기가 쉽지 않다. 훗날 역사가가 또한 "함석헌의 시대" 라고 한국사의 한 장을 기록할런지도 확실하지는 않은 것 같다. 한국현대사, 특히 해방후의역사는 싫으나 좋으나 어쩔 수 없이 이승만, 김일성, 박정희의 시대가 아니었을까?
그렇지만, 함석헌이 한반도와 세계의 씨 을 향해 가졌던 이상은 밤하늘의 북극성에 비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북극성은 지구로부터 멀리 떨어진 행성이기에 가까이 있는 언덕보다는 더 결정적인 표준, 더 궁극적인 목표가 될 수 있다. 아무리 많이 북극성을 향해 걸어가도, 밤길을 가는 나그네는 북극성에 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북극성이 존재하지 않는 것도 아니고, 북극성이 쓸모없는 것도 아닌 것이다. 오히려 가까운 언덕처럼 나그네가 쉽게 도달할 수 있는 것이면, 그것은 더 이상 밤길을 걷는 사람의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없다. 인간은 단지 유한적인 시간과 한정된 인생을 산다. 그러나 그 유한적인 존재인 인간들 중에 어떤 이들은 함석헌처럼 시대와 역사를 넘어서서 영원히 남는 것을 생각하고, 무한정적인 인간의 가치를 추구한다. 인간은 매순간의 삶의 단계에 있어서 끊임없이 성장이 요구되고 계속해서 성숙함을 필요로 하는 늘 불완전한 존재이지만, 동시에 항상 완전한 것을 동경하며 언제나 완벽함을 추구하는 모순덩어리 같은 존재다. 인생은 그래서 끊임없는 변화의 연속이고, 인간의 삶은 영원한 창조, 영원한 재생산의 연속이다. 그러므로 삶은 잘 만들어진 기성품이 아니라 영원한 미완성품인 것이다.
반공, 부국강병 혹은 주체사상이 과연 인간이 추구해야할 생의 목표가 될 수 있을까? 혹은 이러한 구호들이 인류를 이끌어 나갈 정신의 나침판 역할을 할 수 있을까? 함석헌이 제시한 이상은 마치 북극성처럼 인류를 향해 영원한 목표, 영원한 정신의 나침반이 될 수 있다. 아무리 노력해도 인류는 북극성에 영원히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아무리 많이 애를 써도 이 인류는 목적보다는 수단이 존중받는 사회, 야비한 권력가나 무자비한 승자보다는 정직하고 올바른 사람이 대접받는 사회를 영원히 만들 수 없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에 있어서 인간의 가치는, 러스킨의 지적처럼, 능력의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도덕성의 가치에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인간의 가치를 이러한 도덕의 가치로 보았고 인간성의 핵심을 도덕성에 두었다.
박정희나 김일성은 성공적인 경제정책이나 장기집권능력으로 어떤 부류의 사람들로부터는 영웅대접을 받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이에 비하면 함석헌은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역사의 뒤안길로 초라하게 사라져간 도덕적인 한사람이었다. 함석헌은 민첩하고 약삭빠른 정치인이 아니었다.
그는 어쩌면 도저히 실현불가능한 도덕적인 사회, 도덕적인 국제관계를 추구한 영원한 이상주의자였다. 공자와 맹자는 둘 다 인간의 본성을 선하다고 파악했다. 그러나 동시에 세상은 악하고 이 악한 세상에서 인간의 선한 본성은 수많은 유혹에 끌려 부패되기 쉽다고 보았다. 기독교는, 인간의 본성을 악하다고 보고 이 세상에 가득찬 죄의 유혹을 경고한다. 장자는 세상에 선한 이는 적고 드문 반면, 악인은 도처에 넘쳐흐른다고 탄식한다. 라인홀드 니버는 인간각자는 도덕적인데 이러한 인간이 모여사는 사회는 부도덕한 사회라고 지적한다. 함석헌은 부도덕한 사회의 도덕적인 하나의 씨 이었다.
모든 인간은 순진무구하고 때묻지 않은 이상주의자로 이 세상에 태어난다. 그러나 세월이 흐르고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대부분의 인간은 때묻어가고, 순수함을 상실해간다. 그리고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변모해간다. 토마스 홉스가 표현한대로 "만인에 대한 전쟁"이 요구되는 이 세상에서 인간은 어쩔 수 없이 이상과 원칙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현실과 타협하고 철저한 현실주의자가 되지 않고는 세상을 살아가기가 아주 어려울런지도 모른다. 극도로 소수의 인간들만이 현실세계의 달콤한 유혹이나 외부의 혹독한 조건에 관계없이 죽는 날까지, 자신의 이상과 꿈, 그리고 원칙을 지킨다. 함석헌은 그런 소수의 이상주의자중 한사람이었다.
함석헌이 20세기 한반도에 미친 정치적 영향력에 대해서도 필자는 또한 아주 회의적이다. 결국 함석헌은 한국현대사에 있어서 정치적인 인물이었다기보다는 인도주의적인 인물이 아니었던가? 정치적으로 말하면 함석헌은 처절한 '실패자'였다. 그러나 한국의 민주화를 위해 그가 어떤 의미로든 공헌한 것은 사실이고, 더불어 그의 보이지 않는 영향으로 인해 한국의 씨 은 군부독재를 물리치고 민간정부를 불러들일 수 있었다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함석헌의 지나친 겸손이 정치적으로 그의 영향력을 축소시켰을 수도 있고, 어느 정당과도 철저히 손잡기를 거부한 그의 행동은 곧 그가 민족지도자로서의 책임감을 포기한 것이라고 평가되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를 통해서 예수가 인류에게 보여준 것처럼, 인간의 양심이나 도덕적 영향은, 정치나 정치적 영향력보다 더욱 가치가 있는 것이다. 함석헌은 '한국의 양심'으로 불리우기도 했다. 그러나 양심적인 인간이 부패한 사회에서도 꿋꿋이 지도자로 부상될 수 있을까? 인간의 역사를 통해서 그 시대에 만연한 사회적 부조리와 부패에도 불구하고, 오직 극소수의 인물만이 양심적인 방법으로 민족의 지도자가 될 수 있었다. 그리고 함석헌은 그런 민족지도자 중의 한사람이었다. 노자와 예수가 가졌던 삶의 좌우명이 함석헌의 전체 생애와 사상을 요약하는데 아주 적절한 듯하다:
"선한 이에게, 나는 선하게 대한다. 선하지 않은 이에게, 나는 역시 선하게 대한다." "하나님은 해가 악한 사람과 선한 사람에게 다 같이 비치게 하시고 의로운 사람과 의롭지 못한 사람에게 비를 똑같이 내려 주신다."
* 이 논문을 위해 필자와의 단독 인터뷰에 응해준 분들의 명단은 다음과 같다 (가나다 순: 신분은 면담할 당시로 1992년, 1993년, 1998년에 행해짐):
계훈제 (재야 인권운동가), 김경재(한신대 신학과 교수), 김동길(전 연세대교수), 김용준(고려대 화학과 교수), 노명식(전 한림대 사학과 교수), 송건호(전 한겨레신문사 대표), 안병무(한신대 신학과 명예교수, 민중신학자), 이태영(한국 가정법률상담소 소장), 장기려(부산복음병원 명예원장), 함우용(농업, 함석헌의 차남) 외.
후기
1989년 2월 4일 새벽 5시 40분, 전화벨이 요란히 울렸다. 전화 저쪽의 전해주는 사람은 "함선생님 돌아가셨어요!"라고 말했다. 즉시 택시를 타고 나는 서울대학병원으로 향했다. 택시 안의 라디오뉴스에선 벌써 "함석헌의 죽음"을 보도하고 있었다. 비록 이른 새벽이었지만, 서울대병원 영안실엔 벌써 몇 사람의 조문객이 서성거리고 있었다. 그의 관을 보고, 그의 시신을 보고 나는 마치 나 자신이 그 관속에 누워있는 듯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 그의 시신 앞에 예를 올린 후, 나는 많은 생각을 했다: 그의 삶, 그의 죽음, 그리고 나의 인생 ... 3시간 후, 나는 8년간 공무원으로 일하던 철도청에 사직서를 제출했다.
그로부터 3년 반 후인 1992년, 역사학도로서, 나는 영국 에섹스대학교에서 학사논문으로 [함석헌과 한국의 민주주의] (Ham Sokhon and Democracy in Korea)를 썼다. 5년 반 후인 1994년, 동대학교 대학원 사학과 석사논문으로 나는 [함석헌의 노장사상과 퀘이커리즘 이해](Ham Sokhon's Understanding of Taoism and Quakerism)를 제출했다. 9년 반 후인 1998년, 나는 영국 쉐필드대학교 대학원 박사논문으로 [한국인 퀘이커 함석헌의 생애와 사상에 관한 연구](An Examination of the Life and Legacy of A Korean Quaker, Ham Sokhon)를 집필했다. 이 논문은 함석헌의 거대한 삶과 생각을 서구의 대학에서 학문적으로 정리해 보려는 나의 작은 몸부림이었다.
'함석헌'이란 친숙치 않은 이름석자를 처음 접한 것은 1979년 겨울, 김동길 선생님의 강연을 통해서였다. 그로부터 머지 않아, 나는 함석헌의 공개강연을 직접들을 기회를 가졌다. 그때 나는 20대 초반의 청년이었고, 그의 조용한 열변에 나는 마치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것 같은 주체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
그후 나는 밥을 먹어도, 잠을 자도, 친구를 만나도, 길을 걸어도 매순간 어디서나 그를 생각했다. 함석헌은 나의 취미였고 나의 에너지였고 나의 궁극적 관심이었고 나의 전부였다. 그의 글을 닥치는대로 읽었고, 그의 강연을 미친듯이 쫓아다녔다. 나는 결국 함석헌에 미친 젊은이, 함석헌 환자가 돼버렸다.
내가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철도공무원으로 내 인생을 마감했을 것이다.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우리와는 너무 다른 서구사회를 체험하지 못했을 것이고 영국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지 못했을 것이다. 무엇보다도, 내가 그를 만나지 못했다면 나는 이 논문을 집필하는 영광을 누려보지 못했을 것이고, 그것은 내 삶에 가장 큰 손실이었을 것이다. 태평양 한가운데에 빗방울 한 방울이 더해지듯이, 이 논문이 함석헌의 거대한 사상적 유산을 더하는데 하나의 작은 빗방울이라도 될 수 있다면 그에 더 큰 바램이 없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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