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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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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지, 정치, 민주주의
고 세 훈 (고려대학교 교수)
1. '복지' 한국의 부끄러운 통계
일인당 국민소득 세계 32위, 복지국가 수준 세계 132위. 세계 180여 개국 가운데 한국이 차지하는 '공식적인' 위치이다. 한국사람은 혼자 잘 먹고 잘 살되 이웃의 어려움에는 무관심하거나 자기 것을 나누는 데는 지극히 인색하다는 말이겠다. 가령 장애자와 실업자의 고통은 사회의 관심여부와 그 정도에 따라서 그 당사자인 개인과 전혀 무관한 일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한국사회는 '복지는 사람 사이의 관계일 뿐'이라는 명쾌한 언명을 정면에서 배반한다. IMF 위기가 위기의식의 확대재생산을 가져왔던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모름지기 실천(재정지원)으로 뒷받침되지 않는 관심(말)은 언제나 공허하다. 정치인들의 무수한 공약(Iea³)이 공약(Ioa³)으로 되는 이유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 정권의 복지의지(국민복지에 대한 관심의 정도)를 알기 위하여 그 정권이 복지를 위해 어느 정도의 예산을 실제로 배당하고 있는가를 먼저 살펴보곤 한다. 우리의 부끄러움을 확인하는 통계를 몇 가지 더 짚어보자. 1995년 사회복지부문에 책정된 정부예산은 GNP와 총예산 대비 각각 1.16%와 7.8% 였다. 같은 해 대표적인 선진 복지국가인 독일과 스웨덴은 각각 GNP의 14%와 23%, 그리고 총예산의 49%와 51%를 복지예산에 할당하고 있다. 우리와 소득수준에서 크게 차이가 없는 그리스와 포르투갈의 경우도 총예산의 30% 이상을 복지를 위해 사용하고 있다.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부가 들어선 이후에도 복지분야와 관련된 예산점유율은 그 이전 몇 년과 비교하여 오히려 점차 감소했다. 문민정부가 출범하던 1992년경우 예산대비 8.7% 였던 것이 95년에는 7.8%로 떨어졌다. 현재 우리는 반세기 전의 서구국가들 뿐 아니라 OECD 최빈국인 터키에도 훨씬 못 미치는 복지수준을 가지고 있다. 요컨대 한국복지체계는 정부로서는 거의 비용이 들지 않는 체계이다. 얼마 전 실업기금의 조성과 공여를 둘러싼 온갖 잡음은 이러한 준비되지 않은 체계를 가감 없이 반영해 줄 뿐이다.
통계란 많은 경우 드러내기보다는 오히려 감춘다고 하지만, 이러한 수치 배후에 감춰져 있는 것까지 끄집어내면 우리는 한층 부끄러워 해야한다. 요약하면 이렇다. 우리는 6공화국에 들어서면서 국민연금제도와 의료보험제도의 전면적 실시를 보게된다. 그러나 급부는 엄격한 보험산정식 계산, 즉 보험가입자의 임금수준과 고용경력에 의해서 결정적으로 좌우되며, 따라서 우리의 사회보험제도는 저소득층을 위한 소득보전이나 재분배 장치로서의 역할을 거의 포기한 상태다. 극빈층을 위한 공적부조도 최저생계비를 훨씬 밑도는 수준에서 대상자에게 공여되고 있을 뿐 아니라, 지출의 내용도 필요에 대한 대응의 성격을 띠었다기 보다는 전년도에 준하여 '잔여적으로' 책정된 예산에 맞춰 '대충' 결정된다. 예산의 절대적 부족과 예산책정의 경직성에 더하여, 서비스전달체계와 관련된 문제점들, 예컨대, 복지요원의 절대적 부족과 전문성 결여, 행정편의주의적 관행과 비효율성, 대상자선정과 예산관리에서의 임의성과 비과학성 등 허다한 문제점들로 인하여 한국의 공적부조제도는 자활을 위한 기반조성이나 최저생활의 보장이라는 원래의 '화려한' 취지를 거의 살려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의 공적부조제도는 복지수혜 대상자들을 비정상적인 사람들로 '낙인찍으며'(stigmatizing), '궁지에 몰아넣는'(penalizing) 일을 일상처럼 반복한다. 복지가 감추고 숨어야 되는 일일 때, 복지국가의 발전은 참으로 요원한 일이 된다. 미래에는 좀 나아질까? 불행히도 우리 정치의 논리와 관행상 복지한국의 전망 또한 쉽게 낙관할 수 없다.
이미 지적했듯이, 한 국가의 복지의지는 지출을 뒷받침할 수 있는 예산배정에서 일단 드러난다. 오늘날처럼 정부의 기능이 팽창한 경우에는, 예산규모와 그 내용은 국민경제의 모든 지표들(물가, 실업율, 주가, 이자율 등)에, 따라서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막대한 영향을 미친다. 그리하여 예산을 짜는 문제야말로 정치의 절정인 셈이다. 1년에 한 차례 있는 연말정기국회를 예산국회라 부르지 않는가. 복지문제가 주로 예산의 문제일 때, 그것은 기본적으로 정치문제일 수밖에 없다. 정치는 국민의 요구가 지지의 형식으로 동원될 때 시작된다. 복지대상자들은 사회경제적 지위에서 취약하고 요구는 많게 마련이다. 그런데 한국적 정치현실은 최근까지 이들이 자신들의 요구를 정치적으로 집약하고 대변할 변변한 조직이나 정당을 갖는 것을 허용하지 않아 왔다. 이러한 상황에서 이들의 이해와 요구가 복지라는 명목으로 예산에 반영될 것을 기대하는 것은 무책임하다. 최근 창당발기대회를 가진 민주노동당이 이를 위해 어떤 긍정적인 역할을 하리라고 기대하는 것도 당분간 무망한 노릇이다. 고용구조와 계급형성과 관련하여 한국의 노동운동의 역량이 극도로 핍진한 상태에 있기 때문이다.
어느 때 부터인가, 복지는 새로 들어선 정권들이 표방한 국정지표의 단골메뉴였다. 그것은 5공정부의 4대 국정지표 가운데 하나였고, 문민정부라는 김영삼 정부도 현 '국민의 정부'도 복지에 관한 '의지'를 지겹도록 표명하고 강조한 바 있다. 그러나 예산의 구체적 뒷받침이 더불어 제시되지 않는 한, 결연하고 비장해 보이는 '의지'도 허약한 정치적 제스쳐에 불과할 수 있다. 원래 정치란 것이 수사학(rhetoric)의 결전장이었던 측면이 많았다 하더라도, 지금 우리는 말의 성찬을 즐길 만큼 한가한 상황에 있지 않다. '위'에서 번다한 말들이 오고 가는 동안에도, 말 못하는 '아래'는 무심히 고통스럽다. 모름지기 '위'의 말에 책임있는 무게가 실리려면, 그 말은 '아래'로부터 시작되고 견제되어야 한다. 제대로 된 민주주의가 그래서 중요하다. 그리고 복지국가의 발전은 최소한 절차적 민주주의, 즉 참여의 제도화가 어느 정도 갖춰진 상황을 전제로 한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서 노동의 정치참여와 관련된 일련의 민주적 개방이 시도되고 있지만, 노동의 권력자원과 정치적 동원이 정상적으로 (혹은 실질적으로) 제도화 되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더욱이 세계화 파고 속에서 신자유주의적 언술이 초담론의 위세를 떨치는 작금의 상황은 우리의 복지전망을 더욱 암울하게 만든다. 복지를 위한 제도와 정책의 유산이 부재하고 해방이후 반세기 동안 공고화된 파행적 정치경제 구조 속에서 이미 노사의 권력배분이 현격한 불균등을 노출하는 상황에서는 탈규제와 유연화로 요약되는 '자유화' 요구가 오히려 '민주화'를 무색케 할 수 있다는 현실 인식은 그래서 중요하다. 한국의 '자유민주주의'는 여전히 혼란스런 개념이다.
2. '보이지 않는 손'의 실패
복지국가란 무엇인가? 80년대 영국(세계)의 대표적 우익 정치가였던 대처(Margaret Thatcher)는 복지국가를 사회주의 체제라고 통분해 마지 않았지만, 복지국가는 기본적으로 자본주의적 현상이고 자본주의의 끈질긴 생명력에 기여한 바 오히려 크다. 복지국가가 좌파이론가들에 의해서 국가독점자본주의의 한 말기적 형식으로 매도되는 사실도 이 점을 역설적으로 부각시킨다. 이런 점에서 현실 사회주의의 몰락을 자본주의의 성공으로 곧바로 등치(Ooo·)시키는 것은 무책임하며 오히려 현실 자본주의가 상대적으로 "덜 실패했다"고 보는 인식은 중요하다. 복지국가라는 현상은 '경제'체제로서의 자본주의에 익숙해 있는 국가들이 기존의 자본주의의 실천에 의문을 제기하며 '정치'가 좀 본격적으로 나서야겠다고 발상한데서 비롯되었다.
알다시피 자본주의란 시장(market)을 가장 우월한 자원배분의 도구로서 간주하는 경제체제이다. 시장에서 개인들은 자신들의 경제적 이해관계에 따라 '자유롭게' 경쟁하며 계약을 형성하고, 그 가운데 '보이지 않는 손'은 적절한 생산·소비·고용·임금수준을 보장해 주는 것으로 가정된다. 균형에서의 이탈은 언제나 단기적이며, 가만 놔두면 (laissez-faire), 시장의 자동조절장치로 인하여 균형점은 곧 다시 회복된다는 것이다. 시장에 대한 이러한 낭만적 신뢰의 근저에는 물론 자유주의 철학이 깔려있다. 자유주의는 개인의 자유, 특히 재산권 행사에서 개인의 자유를 제일의 기본권으로서 중시한다. 즉 자유주의에서 자유는 무엇보다 개인의 재산권의 자유이다. 그러한 자유는 시장에서 최적으로 실현되며, 따라서, 그 자체가 선(a¼)인 시장은 교정이 아닌 보호의 대상이다.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시장에서 '실패한 개인'이다. 예컨대 빈곤이나 실업은 그것을 당한 개인의 책임이 주가되며 그것은 일차적으로 게으름과 무능, 무절제 등 개인적 품성의 결과로서 간주된다.
그러나 시장 자체가 도저한 불완전한 장치라는 사실은 곧 드러났다. 단기적 불황은 장기적 공황으로 발전되기도 하며, 자본의 집중은 가속화되고, 빈부의 격차는 오히려 증가한다. 무엇보다 시장은 모든 사람에게 똑 같이 공평하고 중립적인 공간이 아니었다. 재산과 경제적 지위에 따라 시장적 자유는 차별화 되어있고, 따라서 경쟁이나 계약의 당사자들은 대등한 위치에 있지 않았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관계를 보자. 노동자들은 단 하루도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다 팔지 않으면 생존 즉 노동력의 재생산은 불가능하다. 그런데 자본(기업)간 경쟁이 심화되고, 기술이 발달할수록 노동시장은 공급과잉의 상태에 있기 쉽고 이미 고용된 노동자들조차 재해나 질병 혹은 임금삭감이나 해고의 두려움 앞에서 안전하지 못하다. 생존이라는 절박한 명제 앞에서 노동자들은 고용주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불리한, 즉 덜 자유로운 계약 당사자 일 수 밖에 없다. 공급이 수요를 '스스로' 창출하지 못할 때, 재고와 실업의 악순환 속에서, 수요는 더욱 줄고 저축은 투자로 연결되지 않으며, 투기는 극성을 부린다. 그 와중에서 시장적 경쟁으로부터 '비'자발적으로 밀려난 수많은 사람들이 체계적으로 양산된다. 여기에는 장애자, 어린이, 노약자, 병자 등 원천적으로 시장진입이 어렵거나 원천적으로 시장적 경쟁에서 불리한 위치에 있는 사람들 뿐 아니라, 실업자나 저임금 노동자 등 최소생계를 유지할 수 없는 모든 사람들이 포함된다. 시장에서 밀려난 자, 즉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서 상품화시키는데 실패한 사람들에게 가장 큰 문제는 절박한 생존의 문제이다. 이처럼 자신들이 통제할 수 없는 구조(시장)의 횡포 앞에서 지극히 무기력해 있는 개인들에게 생계의 책임을 묻는 일은 공허하다. 이들에게 시장은 자유의 공간이 아니라 억압과 소외의 공간일 뿐이며, 시장에서의 자유란 행사할 만한 재산권을 가진 사람들의 자유만을 실제로 의미하고 있었다.
근대 자유주의 정치철학의 태두였던 로크(John Locke)나 고전적 시장자유주의의 선구적 이론가였던 스미스(Adam Smith)도 재산권이 신성한 것은 그것이 노동의 산물임을 전제했기 때문이다. "모든 재산형성은 사회적 성격을 지닌다"라는 원론적인 말을 들먹일 필요도 없이, 오늘날처럼 부자의 재산형성 자체가 상속과 배당, 이자, 지대 등 자산소득에 절대적으로 의존하는 상황에서는 재산권행사에 대한 일정한 (정치적) 제약은, 자유주의 논거에 기댄다 하더라도, 우선 논리적으로 타당하다.
3. 정치의 중요성
복지국가란 시장의'보이지 않는' 실패를 '보이는' 정치가 예방하고 수습해야 한다는 사상에 기초해 있다. 이제 자본주의는 상대적으로 우월한 경제체제일지 모르나 그것은 지극히 불완전한 체제임이 명백해 졌다. 특히 시장경제가 체계적으로 양산한 사람들의 복지를 위해서 누군가 나서야 했다. 과거에 그 '누군가'는 봉건시대의 영주이기도 하였고, 교회일 수도 있었으며, 어떤 독지가일 수도 있었고, 그리고 자신의 가족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자본주의가 흥성하면서 복지기능을 담당하였던 이러한 제도들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거나 그 중요성이 현저히 감소하였다. 봉건제는 소멸하였고, 교회는 그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대가족제는 해체되었다. 더구나 독지가의 불확실하고 임의적인 사적 자선에 의존하기에는 자본주의적 시장에서 '밀려난 자들'은 너무 많고 그들의 요구와 필요는 매우 다양하며 체계적이다. 이러한 때에 그 '누군가'의 역할을 국가가 떠맡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 된다.
복지국가란 자본주의의 경제논리가 낳은 시장실패의 사전적 사후적 교정을 위한 정치적 선택의 산물이다. 따라서 복지국가란 정치에 대한 일정한 신뢰를 전제로 한다. 근본주의적 맑스주의자들은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서 정치란 허구이며 자본가들의 경제적 지배를 은폐하기 위한 상부구조적 장치에 불과하다고 단정한다. 반면에 고전적 자유주의 혹은 신보수주의 이론가들은 시장의 극대화 따라서 정치의 극소화를 주장한다. 그들에게 시장은 오로지 이윤동기에 의해서 움직이는 자유로운 생산의 영역이며, 정치는 부담스러운 소비의 주체일 뿐이다. 좌우 이데올로기 모두에서 정치는 불신의 대상일 뿐이다. 그러나 자본주의 '경제'체제는 보수주의자들이 주장하듯이 그렇게 완벽한 것이 아니며, 정치 또한 맑스주의자들이 얘기하듯이 그렇게 무기력하지 않다. 이 점에 관한 한, 역사라는 기차가 모퉁이를 돌 때마다 지식인들은 어김없이 창 밖으로 튕겨져 나갔다는 맑스 자신의 희화는 간단없이 확인되었다. 복지국가는 정치에 대한 일정한 신뢰에 기반해 있다. 그런 점에서 복지국가는 어느정도 탈(÷)이데올로기적이다. 그것은 사회경제적 불평등을 정치를 통해서 완화시킬 수 있다는 소박한 희망에 근거해 있는 것이다.
4. 민주주의 - 정치의 선용을 위한 장치
요컨대 우리는 정치를 막무가내로 팽개칠 수 없는 현실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무엇이 정치를 신뢰하게 하는가? 정치의 불신시대에 정치를 논한다는 것은 매우 당혹스럽다. 문제는 이미 편만해 있는 정치가 또한 사라지지 않는 한, 그것은 선용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따라서 우리의 과제는 정치가 선용될 수 있도록 가능한 한 좋은 여건을 만드는 것이다. 나는 정치에의 신뢰를 고양하는 최소한의 여건 혹은 장치로서 민주주의를 들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정치가 지루하고 불신 받는 이유는 우선 민주주의가 제대로 실현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단정하고자 한다. 민주주의란 무엇인가?
정치의 선용을 위한 장치로서의 민주주의를 논하기 위하여 우리는 민주주의의 단계를 들먹거릴 여유가 없다. 특히 한국적 실정에선 절차 수준에서 시민참여의 제도화가 다양하게 보장된다면 우선은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것이 실질적 민주화, 즉 복지국가로 이어지는 것은 그 다음의 중장기적 과제이다. 다수가 언제나 옳기 때문이 아니다. 숫자의 정치도 타락하면 중우정치가 된다. 그런 점에서 민주주의는 분명 최선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는 원천적으로 불완전한 인간들을 피차 견제케 하며, 인격적 대등성을 전제해 주는 차선의 고안물이다. 숫자라는 것은 (물질에 비해) 도덕적인 시비에 덜 노출되며, 다수가 소수보다 틀릴 가능성이 상대적으로 적고, 틀렸다고 판명되었을 때에도 큰 소란없이 변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민주주의는, 잘만 운영되면, 돈의 지배를 수(a|)의 지배로 바꿀 수 있는 절묘한 장치이다. 예컨대 인간의 운명이 (소수의 재력가가 행사하는) '물질적' 힘에 의해서 좌우되는 것보다 다수의 대등한 '인격체들'에 의해서 결정되는 것이 그래도 낫다. 정치가 사회내의 강자, 가진자의 이익만을 그대로 대변한다면, 정치의 매력은 사라진다. 정치가 사람을 흥분시키는 이유는 그것이 경제적 약자를 정치적으로 편들어 줄 수 있다는 기대 때문이다. 영국의 만년 노동당원이며 경제사학자였던 토니(Richard Henry Tawney)가 말했던 대로, 좋은 사회란 물질(자본)에 대한 보상 보다 인간(노동)에 대한 보상이 많은 사회이다. 이러한 사회를 위한 정치를 우선 가능하게 해 주는 것이 절차수준에서의 민주주의이다.
지나친 단순화일지 모르나, 서구복지체제의 발달은 거의 전적으로 아래로 부터의 참여의 제도화로서 민주주의에 빚지고 있다. 간단히 살펴보자. 우선 시장에서의 불리한 처지를 만회하기 위하여 노동자들이 택한 방법은 숫적으로 연대하여 자신의 세력을 규합하는 일이었다. 그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여 사용자를 경제적으로 견제하였고, 노동자정당을 만들어 정치적 진입에 성공하였다. 요컨대 노동조합과 노동자정당은 이미 존재하는 시장의 불평등 구조를 시정하기 위한 자구책이었다. 특히 시장에서는 '부'(돈)가 말을 하지만, 정치에서는 너나없이 평등한 한 표만 행사함으로 '수'(투표)가 그 위세를 떨친다. 우월한 것이라고는 숫자밖에 없는 노동자들이 수의 논리가 지배하는 정치에 관심을 갖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 정치적으로 동원된 노동자들은 의회에서 다수당을 형성하거나 타 정당과 연대함으로, 시장이 강제당했던 불이익들을 복지법안(정책)을 통해서 시정하려 했다.
오늘날 서구 복지국가들 가운데 수권정당으로서 노동자정당을 갖지 않은 나라는 없다. 이 모두를 가능케 한 것은 물론 집회, 결사, 정치적 참여의 자유를 일찍이 허용했고 실천했던 서구국가들의 민주주의 제도였다. 이것이 서구 복지국가가 태동하고 발전해 온 맥락이다. 어느 역사에서도 '가진 사람들(haves)'이 자신들이 가진 것을 자진해서 내놓으려 했던 예는 드물다. 복지국가가 '가진 사람들'로 부터 '가지지 못한 사람들(have-nots)'로의 소득이전을 그 핵심내용으로 하는 한, 재산가들, 즉 시장에서 우월한 협상력과 경쟁력을 가진 사람들은 민주주의를 도입하는데 (특히 성인남녀로 선거권을 확대하는데) 적대적일 수밖에 없다. 당연히 서구 정치사에서 재산의 과다에 따라 결정되던 투표권이 하층계급에게도 확대되고 서구의 시민들이 집회, 결사, 정치적 참여의 자유를 획득하기까지는 참으로 많은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우리 또한 지난 세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국의 민주주의를 위해서 자신과 가족을 희생하여 왔는지 익히 알고있다. 민주주의는 충분하지는 않으나 시장의 교정과 복지의 확대를 위한 최소한의 구조를 제공한다.
5. 대표 없이 복지 없다
한편 복지국가는 산업화를 통한 국부의 축적을 어느 정도 요구한다. 물적 토대의 형성 없이 복지공여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80년대 이후 한국은 서구 복지체계의 기본 틀이 완결되었던 서구국가들의 50년대 국부수준을 훨씬 능가한 상태이다. 따라서 산업화가 문제라면 한국의 경우 복지국가로의 진입을 위한 중요한 조건을 구비한 셈이다.
다시 선진국가의 경우를 보자. 무엇보다 서구 복지국가의 발전사는 사회경제적 하층집단, 즉 복지의 주 수혜자들의 '소동'없이 복지없다는 말을 실감시킨다. 그러한 소동은 정치적 민주주의가 도입되기 이전엔 주로 거리에서 민주화를 외치며, 그리고 민주주의가 제도화된 이후에는 주로 의회에서 복지의 제도화라는 이름으로 의회에서 이루어 졌다. 과거 한국의 무소불위의 국가는 민주적 개방을 최대한 억제하였을 뿐 아니라 민주화를 요구하는 거리의 정치에 대해서 지극히 억압적이었다. 노동운동은 관'인'노동운동만이 존재하였고, 노동자는 집단으로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으며, 노동자정당은 아예 허용되지 않았다. 민주화 과정에서 간간이 출몰했던 진보정당이란 것들도 '아래'의 추동이 아닌 기본적으로 엘리트들의 연합체였다. 그러는 사이, 한국의 자본은 다양한 경로를 통해서 정치와 유착하였고, 대노동 전략에서 매우 견고하고 일관된 정책을 관철해 나갈 수 있었다. 한국의 자본이 다양한 통로를 통해서 산업적·정치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반면, 노동이 산업적·정치적으로 조직과 참여에서 각종 법적 제한을 받고 있는 한, 진정한 의미의 복지입법은 매우 지난한 일일 수밖에 없다.
70년대 80년대 제안된 몇몇 복지법안들이 기본적으로 반노동적인 성격을 띠고 있거나, 그나마 실행이 자주 연기되곤 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정치사에서 '복지'가 기껏 취약한 정통성의 보전 혹은 은폐를 위한 정치적 선언 내지 수사의 차원에서 주로 제기되어 왔음을 말해준다. 예컨대 1988년에 비로소 시행되기 시작한 국민연금제는 이미 1973년의 국민연금법으로 법적 기초가 마련되었었으나, 그것은 복지보다는 정권유지를 위한 자금조성에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그나마 법제정 며칠만에 법집행이 무기연기 되었었다. 1976년의 의료보험법 개정도 비슷한 취지에서 대통령의 일방적 지시에 의해서 추진된 것이었다. 법개정과정에서 발생하였던 갈등도 주로 전경련과 의사협회 등 지배적 이익단체들 간의 갈등이라는 성격을 띤 것이었으며 당시 노동통제의 정치적 도구로서 주로 기능 하였던 노총의 의견마저 철저히 배제되었다. 제5공화국에서 4대 국정지표의 하나로 내걸었던 '복지사회의 건설'이라는 캐치프레이즈도 미국 눈치보기의 결과로 만들어진 '구호'였다는 것은 이미 유명한 얘기이다. 1995년 7월에 시행되기 시작한 고용보험법의 경우도 보험료율과 적용대상범위 등 핵심적 쟁점에서 기업 측의 의견이 압도적으로 반영되었다. 고용이야말로 최대의 복지일 수밖에 없었던 우리의 실정에서 IMF의 터널은 실로 암담함 자체였다. 터널 속 멀리 보이는 불빛이 터널 밖의 햇살인지 이 쪽으로 돌진해 오는 기관차의 헤드라이트인지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우리의 현실은 참담하다.
김대중 정부가 들어서면서 과거에 제약받았던 노동 기본권은 많이 신장되었다. 우선 산업적 수준에서 복수노조결성, 교원 및 공무원의 단결권 허용, 3자 개입 등이, 비록 완전한 형태는 아닐지라도, 하나하나 입법화되었다. 또한 정치적 수준에서도 이제 한국의 노동은 하나의 계급 혹은 집단으로서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서구사회가 19세기말과 20세기 초에 완결한 최소한의 민주적 절차가 한 세기 지난 오늘날에야 비로서 현실화되고 있는 것이다. 이미 지적했듯이 노동의 산업적 정치적 조직과 동원은 먼저 존재하는 경제적 불균등 구조에 대한 자기 방어적 대응의 성격이 강하다. 특히 서구사회에서 복지국가의 발전이 대항세력으로서 노동의 정치적 산업적 조직과 동원에 결정적으로 빚지고 있음을 고려할 때, 집단으로서의 노동의 정치참여가 지속적으로 배제되는 한, 한국복지의 앞날은 결코 희망적이지 못하다.
민주주의가 불완전할 때, 정치는 지루한 소모의 영역일 뿐이다. 아래로 부터의 부단한 압력에 열려있는 정치만이 깨어있는 정치이다. 서구의 복지체계는 팽팽하게 깨어있어서 긴장한 정치의 산물이었다. 역사의 어느 시점에서도 가진자가 집단적으로 솔선하여 복지를 허용한 예는 없다. 위로부터의 일방적 양보 혹은 개혁은, 있다 하더라도, 언제나 불확실하며 불안정하기 마련이다. 그것은 몇몇 개인들의 변덕이나 자리바꿈 같은 우연한 요인들에 의해서 언제든지 취소될 수 있기 때문이다. 과거 김영삼 정부의 개혁구호에 반신반의했던 것은 그것이 아래로 부터 뒷받침되지 않은 (즉 민주적 절차로 제도화되지 않은) 개혁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해방이후사가 반복적으로 보여주듯이 아래에서 비롯되고 아래가 떠받쳐 주지 않을 때, 개혁을 위한 온갖 구호는 빈말이기 십상이다. 역사는 "대표 없이 복지 없다"라는 명제를 거듭 확인시킨다. 우리는 별수 없는 인간이라도 자꾸 선한 방향으로 사용될 수 있도록 구조를 만들어가야 한다. 복지는 민주주의라는 구조 위에서 가능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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