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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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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기다리는 밤은 사랑하는 자가 다시 올 기약도 없는 것 같은 칠흙 같이 어두운 밤이다. 나를 사랑했던 기억도, 그가 준 호의도, 그가 보인 사랑의 고백도 산산이 깨뜨려 버리는 혼돈의 밤이요, 확신이 물 녹듯 녹아내려 기다림조차도 헛되게 느껴지는 무의미의 시간이요, 엠마오로 가는 제자들처럼 허탈하고 소망이 없는, 모든 것이 끝난 것 같은 밤이요 그래도 여전히 끝이 아닌 소름끼치도록 권태로운 시간들이 계속 될 뿐인 밤이요, 어디도 탈출구가 보이지 않아 답답하고 좌절하고 무력해지는 나날들이요, 나도 나를 잊는 밤이요, 거센 물결에 난파되어 생명줄 놓고 표류하는 데에 익숙해지는 밤이요, 보이지 않는 손길에 이끌려 온갖 두려움과 의심을 뒤로 하고 눈을 감은 채 따르는 밤이니 나를 기르시는 그 사랑이 눈물겨울 수밖에 없구나.
왕후가 왕을 위해 준비되고 단장되듯이, 더러운 옷을 벗어던지고, 마음에 숨어 있는 죄들을 다 도려내고, 성령의 기름과 향유로 온 몸을 향기롭게 하고, 의의 새 옷을 걸치는 자는 복이 있다. 왕이 그를 사랑해서 그 온갖 고통과 아픔 속에서 자신의 신부로 준비되게 하는 것이니, 이 정화의 불길을 견디는 자는 복이 있다. 자식을 본 산모가 그 해산의 고통을 다 잊듯이, 십자가의 수치와 부끄러움을 그 앞에 놓인 즐거움으로 인해 다 기억함이 없듯이, 왕이 걸어오시는 발자국 소리를 들을 때, 그의 기쁨은 세상 어느 것에 비길 데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요한계시록 해설中 )
십자가의 요한의 영성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부족한 시대가 이 시대다. 무엇이 중요한지를 정확히 이해하지 못했기 때문에 모두가 주먹구구식으로 이 영성을 해석하지 못하고 있다고 보아야 옳다. 십가가의 요한이 말한 어둔 밤이 도대체 성경적인 배경을 갖고 있느냐 하는 것에 대해서도 올바른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것이 영성신학의 현주소가 되겠다. 단지, 그의 언어로 영혼의 밤이 있느니, 지성의 밤이 있느니 이야기를 하고 있어 현대인에게는 지극히 낮설고 모호한 개념이 되고 만 것이다.
영성신학계에서는 이 연합과 일치의 과정을 아가서에 나타난 여인의 고뇌하는 밤에서 그 근거를 찾으려고 한다. 아3:1-5절과 아5:2-8절을 인용하면서 영혼의 수동적인 밤과 영혼의 능동적인 밤을 이야기한다고 말할 뿐이다. 그런데, 정작 아가서의 참된 해설을 찾지 못한 가운데서 이런 말들을 하니까, 도무지 영성신학은 신비주의처럼 비치어지고 있으며, 그 성경적인 근거를 잃어버리고 공중에 붕 뜬 상태처럼 표류하고 있다. 영성신학은 말씀에 깊이 근거를 찾아야 혼돈과 방황을 마무리할 수 있다고 본다. 그저 카톨릭적인 영성의 끝자락을 잡고 쫓아가는 형태의 신학이 아니라, 개신교적인 토양에 뿌리를 깊이 박아야 표류하지 않고, 역사를 통해 이어져 온 귀한 영성적인 유산을 교회를 풍성하게 하는 차원에서 적용해 갈 수가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아가서의 올바른 해석을 하는 일이 시급한 과제며 왜 그것이 어둔 밤과 연결이 되는 것인지를 설득력있게 전달할 수가 있어야 되겠다. 뿐만 아니라, 이 어둔 밤이 성경 어느 부분에서 신학적인 배경을 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깊은 고찰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필자는 먼저 아가서와 영성신학과의 관련을 자리매김하기 위해서, 아가서의 해설에 있어 올바른 관점은 남녀 간의 사랑으로 전체를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렇게 해석할 때에야 그 부분 부분에서 영성적인 적용을 충분히 할 수 있게 된다는 점이 아주 중요하다. 아가서를 알레고리로 해석하는 것은 작품의 통일적인 이해가 없기 때문에 그렇다. 깊은 영적인 의미는 도출하나 전체적인 해석을 내리지 못한다. 버나드의 끌레르보조차도 아가서 3장까지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성경해석에 있어서는 실패한 것이나 다름이 없다. 아가서에 대해서 최근 송재근 교수가 기본적인 해석을 남녀간의 사랑이라는 관점으로 해석하고 있는데, 그것은 옳다고 할 수 있다. 남녀 간의 사랑으로 이 아가서를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것이 하나의 노래들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노래라는 것은 불리워지는 것이고 그것은 오페라나 뮤지컬과 같이 대중에게 공연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라고 보아야 옳다. 고대 근동의 이런 형태의 작품이 존재하느냐를 따지는 것도 중요한 부분이다. 분명히 옳다. 그러나, 그런 근거가 보이지 않는다 해도 성경의 해석은 또한 자증적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것이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말씀이면 성령께서 증거하실 것이다.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그 하나님이 증거하실 것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송재근 교수는 적용의 차원에서 그리스도와 교회 간의 사랑으로 적용해 나갔는데 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문제가 되는 부분은 모든 아가서를 그렇게 적용할 수 있느냐 하는 부분이 되겠다. 필자의 관점은 그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고 하겠다. 아가서는 남녀간의 사랑 안에서 어느 부분 부분이 그런 적용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어줄 뿐이라고 보아야 옳다. 마찬가지로, 영성적인 적용도 부분 부분에서 가능해진다고 보아야 해석에 있어서 통일성을 헤치지 않게 된다. 다른 어떤 해석 방식도 아가서를 통일적인 관점에서, 전체로 해석해 내는 데는 실패할 수밖에 없다고 보인다. 아가서에 나오는 많은 사랑의 찬가들은 어떤 해석 방법을 내어놓아도 바른 적용이 되기가 어렵게 되어 있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자신의 관점을 주장하면 할수록 자신의 말들이 그 주장을 허물어 버리게 될 것이다. 너무 초라한 자신의 행색을 보고 아름다운 여인 앞에서 부끄러워서 줄행랑을 쳐버릴 수밖에 없는 꼴이 되고 만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관점을 설득력있게 제시하기 위해서는 이 작품이 과연 극시 형태로, 오페라처럼 해석할 수 있을 만큼 통일성을 갖고 극의 플롯도 충분히 잘 짜여져 있는지를 자세히 살펴보아야 한다. 즉, 다시 말하면, 아무리 극시의 형태라고 해도 그 전체의 구성이 어떠냐에 따라서, 그렇게 보는 관점이 옳다 할 수도 있고 그렇지 않다 할 수도 있게 된다는 말이다. 인터넷에 이미 올려놓은 아가서의 극중 설정 과 이 사랑을 멈출 수 없어 를 참고하기 바란다. 좀 더 완성된 형태의 논문은 차후에 정리하려고 하므로 이 부분은 이 정도로 충분한 가능성이 있음을 보이는 것으로 대신하려고 한다.
아가서가 남녀 간의 순수한 사랑을 다루고 있고, 그 부분에서 영성적인 적용이 가능하다는 어느 정도의 가능성 위에 성경적인 더 넓은 근거를 얻어보도록 하자. 이를 위해서는 이 밤의 성격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하겠다. 왜 십자가의 요한은 밤을 이야기하고 있는지를 알게 된다면, 그 성경적인 근거 또한 분명해진다고 하겠다. 십자가의 요한에게 있어서 이 밤은 주님을 상실한 상태를 표현하기 위해서 쓰여진 용어였다. 그것은 아가서를 영혼의 밤을 이해하는 근거로 사용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고 하겠다. 아가서의 두 본문은 모두 여인이 사랑하는 님을 떠난 상태에서 그 사랑의 상실로 번민하며 그 사랑을 찾아가는 과정이 그려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 밤은 철저히 버려진 상태요 그 밤은 떠난 사랑을 기다리는 밤이요, 가도 가도 끝없는 기다림이 그 밤의 성격이라고 보면 옳다. 현실적인 차원에서는 영혼이 하나님과의 연합과 일치를 향해 나아가는 과정이 진행되기 때문에 그 기간은 수년 수십년이 걸릴 수도 있게 된다. 그러므로, 그 밤은 아주 권태로운 시간이다. 말할 수 없이 고통이 가득하나 벗어나지 못하는 구덩이와도 같다. 다윗이 말한 기가 막힌 웅덩이와 수렁이 이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시40:2).
이런 성격으로부터 필자는 이 밤을 열 처녀의 비유에서 주님이 든 신랑을 기다리는 신부의 비유에 연결시킬 수 있다고 본다. 신랑이 오시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밤이 이 밤과 같은 의미일 수 있다는 말이다. 필자가 이미 이 밤을 의미하는 열 처녀의 노래 를 올려놓은 바가 있는데, 또한, 주께서 오시기를 기다리는 이 밤은 종말론적인 배경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가 있게 된다. 주님이 오실 그 마지막에 박해 가운데 있을 성도들 그들에게서 이 밤의 성격이 가장 잘 나타난다는 점을 우리는 놓치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기다린다는 것은 그만큼 이유가 있기 때문이다. 주님이 계시지 않는 것 같은 상황이 전제 된다는 말이 된다. 사악한 적그리스도의 통치 하에서 주님의 구원을 기다리는 것 만큼 간절한 기다림은 없다는 점이다. 주님의 재림을 기다린다는 것은 고통과 아픔으로 가득한 사단이 다스리는 세상으로부터의 구원을 바라기 때문이라는 의미가 되기 때문이다. 그 때가 되어야 주님을 기다리는 신부는 부활의 영광을 입고, 그들을 박해하던 세상 왕국은 그리스도의 입에서 나오는 검에 몰락할 것이다. 보수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밤이 지나면, 새벽이 오듯이, 그 깊은 밤을 지나면 신랑 예수께서 오신다. 공중에서 혼인잔치를 하게 되는데, 영성적인 차원에서 그것은 결국 일치에 도달하는 것이므로, 이 땅에서 주님이 오셔야 이루어질 결혼관계에 들어가게 된다는 말이 된다. 그래서, 영적인 결혼이라는 말도 성경적인 근거를 가지게 되는 것이다. 변화의 과정 그것은 깊은 밤이다. 철저히 주님께 버려져서 어둠에 내동댕이쳐지는 밤이다. 주님의 사랑과 호의도 다 사라진 듯하다. 내가 가진 의는 누더기처럼 그 앞에 더럽기 한량없다. 그러나, 그 밤이 자신을 정화해내는 밤이 되는 것이요 위장한 하나님의 손길이 되는 것이다. 주위는 온갖 원수들로 가득하고 결박과 환난도 있을 수 있는 밤이다. 사막교부들의 글을 보면 그들의 입에 있는 기도는 늘 예수여 구원하소서 였다. 이 깊은 밤으로부터 주께서 구원하시는 그 일만 바라며 그 시간들을 걸어갔다는 말이 된다.
아무리 기다리고 기다려도 구원은 오지 않는다. 주님이 얼굴빛을 비추실 그 날만 간절히 기다린다. 그래도 밤이어라가 계속 된다. 영혼은 절대적인 믿음으로 이 어둔 밤을 전진 또 전진하며 분투한다. 이 영혼의 밤에 우리 안에 좌절과 절망이 찾아와도 여전히 영혼은 소망 가운데 견고하게 되는데 절대적인 소망이 자리잡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 오실 그 날에 대한 소망이 현실적인 어둠과 낙심을 넘어가게 된다는 말이다. 아무리 어둠이 깊고 아무리 주님이 버리셔도 그 날에 주님이 오실 그 소망은 흔들 수 없게 된다. 이 소망이 이루어져야 하나님의 사랑이 그 마음에 부은 바 되기 시작하는데 일치가 오는 것이다. 이미 첫 부분에 올린 요한계시록 해설 가운데 언급된 내용과 같다고 하겠다.
간략하게나마, 십자가의 요한의 영혼의 밤에 대한 이해를 위한 방향을 짚어보고, 그 가능성을 제시해 보았다. 분명한 결론보다는 이 글이 영성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문을 열어주는 기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래 보면서 이 글을 마무리하려 한다.
영성은 무슨 신비주의자들의 이상하고 잘못된 이야기들이 아니라, 성경에 뿌리를 박고 성령에 의해서 주도되는 인간 변화의 과정이며 이 시대를 변화시키는 복된 길이 될 수 있음을 이해하는 사람들이 늘어났으면 한다. 이 시대에 변화는 그 방향에 있어서 분명해야 하리라 본다. 자신의 영광을 얻기 위함도 아니요 사역을 크게 늘리는 데에 있는 것도 아니요 자신의 온전함을 자랑하기 위함도 아니라, 죄인이 되더라도 하나님의 나라에서 끊어지더라도 영혼을 구원하는 복음 전파의 일에 바쳐진 온전한 그릇이 되는 데에 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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