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출처 : |
---|
예수에게 나타난 창조신학
김 지 철(장신대:신약학)
들어가는 말
하나뿐인 지구가 당면한 생태계의 위기적 현상에 대해 오늘날처럼 많은 염려와 근심을 해 본 시기는 일찌기 없었을 것이다. 우리 모두가 아는대로 오늘날 지구의 이러한 생태학적 위기는 그동안 인간이 개발해 놓은 산업화의 구체적 결과인 것이다. 자연에 대한 인간의 잘못된 사고와 태도로 말미암아 야기된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자연을 향한 인간의 일방적 지배사상이 자연에 대한 착취와 그에 따른 엄청난 재해를 자초한 것이다. 자연을 인간의 진정한 벗으로서 사귐의 대상으로 여기기 보다는 다만 인간을 위한 이용가치 수단으로만 평가해온 때문이라 할 수있다. 그러다 최근에 들어서서 비로서 인간조차도 자연의 한 부분일 수 밖에 없다는 자각이 삮트게 되었다. 자연에 대한 이해에 하나의 새로운 전기가 마련되기 시작한 것이다. 자연의 파괴에 따른 생태학적 위기를 현상적으로 보며 뒤늦게 깨닫게된 후회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러한 자연파괴와 생태학적 위기에 대해 신학도 그 일조를 가했다는 비판에 있다. 오랜동안의 구속사적인 신학의 방향성이 인간중심적인 사고를 부추키므로 말미암아 자연에 관한 신학적인 관심과 반성을 뒷전에 밀어놓았다는 것이다. 즉 기독교 신학이 하나님을 구원의 주와 동시에 창조주라 고백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창조신학을 구속사신학의 주변으로 취급함으로써, 실제적으로 자연에 대한 인간의 새 관계를 모색하는 데 등한시했고, 그 결과 자연위에 다만 지배적으로 군림하려는 위치만을 강조해왔다는 비난이다.
따라서 이제라도 이 엄청난 생태계의 위기상황을 극복하기 위하여 자연에 대한 새로운 이해를 고취해야 한다는 반성이 신학계내에서 심각히 일고 있다. 곧 우리의 신학은 자연을 향해 새로운 신학적 평가를 기울여야 할 시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옛 전통신학의 논의중의 하나였던 자연속에 나타난 계시논쟁의 정당성에 대한 것으로서의 자연신학은 아니다. 하나님의 피조물인 자연을 어떻게 신학적으로 평가할 수 있는가라는 의미로서의 자연의 신학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성서에 나타난 창조신학을 신학적으로 다시금 재 평가하는 일은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된다. 다만 문제는 오늘날의 생태학적인 현상 모두를 단순히 성서적 언어와 사고로 직결시킨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은 과제라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서의 창조신앙적 진술을 통한 새로운 자연이해는 오늘날 우리가 지닌 이 자연의 생태학적 위기를 극복하는 데 있어서 뿐만 아니라, 진정한 인간이해를 위해서도 긴요한 과제라 생각된다. 신약에 나타난 창조에 대한 진술들은 구약에 비해 그 내용이나 그 분량면에 있어서 매우 열악한 것처럼 보인다. 어찌보면 하나님의 창조에 대한 진술이 신약에서는 거의 생략되고 침묵되어 있지 않은가 질문하게도 된다. 그러나 창조신앙에 대한 신약의 이러한 경향성은 신약기자들이 창조주 하나님에 대하여 관심이 없어서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오히려 그 보다는 창조신앙이 기독론적인 평가와 해석에 전제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먼저 예수와의 관계성에서 창조신앙의 가능성이 담겨있는 귀절들을 제시하고, 이어 그 속에서 구체적으로 창조신학적 내용을 찿아 봄으로써, 예수를 통해 나타난 창조신학이 구원과 해방신앙전통과 어떻게 맞물려 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그리고 끝으로 그에 따른 창조신학의 해석학적 틀 및 명제 몇가지를 제시해 보고자 한다.
I. 예수에게서의 창조신학적인 기초본문
예수는 피조물 자연속에서 창조주 하나님의 근본적 질서와 그 분의 흔적을 친히 보고 듣고 깨달은 분으로 성서에 나타난다. 그의 언어와 표현속에는 창조주 하나님이 지으신 하늘과 땅의 모든 사물들이 지극히 자연스럽게 등장하는 것을 쉽게 보게된다. 곧 동물과 식물의 생명과 성장에 대한 예수의 관심(참새 한마리/ 풀 한포기/ 농사(씨앗의 비유)/ 양치기/ 인간의 키와 머리카락/ 나무의 열매/ 태양 과 비/ 바람과 홍수/ 소금과 빛/ 하늘에 나타난 날씨예고등)은 창조질서에 대한 그의 지혜적 수용을 전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예수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와 들풀을 보며, 그것들은 단지 피조물일 뿐이며 창조주로서 그들을 먹이시고 입히시고 키우시는 하나님(마 6,26.28.30)을 기억하는 것이다. 자연만물의 자연스러움과 조화와 아름다움에 대한 예찬이다. 이러한 사고는 구약에 하나님께서 '보기에 참 좋았다'(창 1,31)라는 맥락과 일치한다. 인간의 손으로 이루어놓은 어떤 문화의 찬란함보다도 하나님의 피조물의 영광이 더 위대한 것임을 말해준다. 말하자면 예수는 누구에게나 다 이해되는 이러한 표현들을 통해서 그의 제자들에게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강하게 심어주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말씀중에 직접 창조신앙의 내용을 진술한 부분이 그리 많지 않다 하더라도 그의 교훈의 문맥상 창조신앙이 자연스럽게 전제되어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예수의 창조신학에 대한 직접적이고 간접적인 자료들을 포함하여, 그것을 크게 두기지 범주로 분류해 보면,
첫째로 예수의 말씀을 통해서 제시되는 창조신학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귀절들과, 둘째로 예수의 행위양식에서 드러나는 창조신학적 틀로 나눌 수 있을 것이다.
우선 첫번째 범주에 속하는 귀절들은 다음 두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하나는 예수의 교훈중에서 하나님을 창조주로 언급하거나 또는 전제하는 형태의 본문들이며(하늘과 땅의 주인: 마 11,25; 또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마 6,1.9.26.32; 창조의 보존자: 마 6,26 이하/눅 12,22 이하; 마 10,29-31/눅 12,6-7), 다른 하나는 보다 구체적으로 에수의 은유적 말씀이나, 하나님 나라의 비유에 나타나는 것(예: 너희는 세상의 소금과 빛이다:마 5,13.14; 씨 뿌리는 비유: 마 13,3 이하; 겨자씨 비유: 마 13,31 등)으로 창조세계의 질서들과 현상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고 그 속성과 특징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의 비유를 설명하는 형태들이다. 여기서 식물들과 동물들, 그리고 더 나아가 인간의 생태적 현상이 전제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더우기 그것이 단순히 자연현상에 대한 진술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과 인간과의 관계성을 설명하는 지혜적 말씀의 성격을 띄고 있다는 데 우리의 관심을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것이 구약의 지혜전승에 나타나는 창조신학적 진술과 관련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두번째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는 예수의 행위에 나타난 창조신앙적 귀절들을 들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들은 보다 하나님의 새 창조라고 말할 수 있는 구원과 해방사건과 관련해 언급되어져야 할 것이다. 예를 들면 예수의 축사행위는 하나님의 창조의 샬롬의 차원에서 이해될 때 보다 분명하게 바르게 이해된다는 뜻이다. 마찬가지로 예수가 베푼 병치유나, 기적 또한 하나님의 창조가 지닌 본래적 인간성의 통전적인 회복으로서, 카오스에서 코스모스에로의 새로운 창조성을 염두에 둘때 이해 가능한 주제들이라 할 수 있다. 이런 귀절들을 통하여 우리는 하나님의 창조와 구속/해방이라는 두가지 큰 속성이 합류하고 있음을 살펴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보다 구체적인 해석학적인 평가와 이해가 요청되리라 생각되어 진다.
II. 예수의 교훈속에 나타난 창조주 하나님
이스라엘에게 있어서 모든 만물을 창조하신 창조주는 처음부터 단순한 믿음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믿음의 전제였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말 것인가라는 고민은 구약의 창조신앙에서 볼 때, 전혀 고려되지 않은 문제이기 때문이다. 이스라엘의 창조신앙이란 창주주가 지으신 이 세계속에 그들이 살면서 사유하고 행동하기 위한 전제로서의 창조신앙이었던 것이다. 예수도 구약에 나타난 이러한 창조신앙을 자기의 신앙내용으로 수용하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수는 하늘과 땅의 자연들을 그의 신학적 주제를 설명하기 위한 주제로서 거리낌없이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창조의 질서들을 인정하고, 피조물에게서 나타나는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의 흔적들을 언급하곤 한다.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이 해와 비를 내리시는 분이며, 공중의 새의 둥지를 마련하고, 들의 백합화를 자라 꽃피게 하시는 창조의 보존자이시라는 것이다. 바로 모든 인간들이 삶의 경험을 통하여 얻게되는 지혜의 말씀이다. 따라서 실제로 예수는 구약의 지혜전승의 맥을 잇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창조신학적인 말씀은 바로 구약의 지혜적인 말씀과 상응하기 때문이다(참조 마 5,45; 6,26이하/눅 12,22이하; 마 10,16/눅 10,3; 마 10,29-31/눅 12,6-7 등). 그것은 다음 몇가지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다.
첫째는 하늘과 땅의 주인으로서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신앙이다.
하나님이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마 5,34; 6,26.32; 11,25; 참조 행 7,49; 17,24; 사 66,1)라는 고백은 유대적 창조전승을 이어받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들고 다스리는 분이시다. 그리고 그 하나님은 동시에 하늘에 계신 창조주이시다(마 6,9). 여기서 우리의 주의를 끄는 것은 하나님을 수식하는 하늘이 무슨 의미인가하는 점이다. 하늘은 하나님의 피조물이면서 동시에 그 분이 거주하는 자리이기도 하다. 그러면 구체적으로 그것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예를 들면 주기도문에서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라는 언급은 지상의 아버지와는 대비되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하늘이란 언어를 통한 하나님의 초월성을 의미하고 있는가? 이것을 주기도문에 있어서 계속되는 청원인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 이루어짐을 비는 간구와 관련해 이해할 때, 비로서 그 의미가 분명해진다. 하늘이라고 하는 초월적인 하나님의 자리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뜻이 이 땅에서도 구체화되기를 바란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여기서 하늘을 하나님과 동일화된 신성을 지닌 대상으로 단순히 일치시켜서는 안된다. 말하자면 하늘은 하나님의 신적인 본성에 속하는 자리이긴 하나 그렇다고 전혀 접근 불가능한 자리로서 상존하는 것은 아니다. 다음의 본문을 생각해 보자. 예수가 세례받을 때, 하늘이 열렸다고 공관복음서(마/막/눅)는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예수는 바로 하늘로 가는 길의 문이라는 것이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예수가 있는 곳에는 하늘이 실현된다(요 1,51 창28,12과 함께)는 뜻이다. 특히 마가복음에는 하늘이 찟겼다(1,10)고 표현함(막 15,38에서 성소휘장이 찢겼다는 말과 동일한 언어)으로써, 하나님께서 준비한 예수의 십자가는 이미 예수의 세례안에서 시작된 역사임을 확증하고 있다. 그러기에 예수의 하나님 나라는 하늘나라로도 표현될 수 있었고, 그 나라는 지금 여기 역사의 현장에서 이루어지는 구체적 나라로 선언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하늘이 곧 하나님 자신은 아니다. 단지 상대적인 초월성을 지닌 피조물일 뿐이다. 왜냐하면 궁극적인 종말에 가서는 땅처럼 하늘도 사라질 것이기 때문이다(막 13,31 병행, 히 12,26; 벧후 3,7.10.12; 계 21,1).
또 한가지 중요한 것은 하늘과 땅을 창조하신 분을 향하여 예수는 아버지라고 고백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하늘과 땅을 만들고 그냥 방치하거나 장난감처럼 마구 다루시는 분이 아니라, 그가 만든 피조물에 대해 연민과 관심을 갖고 보기에 좋게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또한 만물이 복을 누리도록 그의 피조물을 궁휼히 여기고 보호하고 보존하시는 분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세계에 대한 하나님의 창조와 보존과 다스림이란 자식에 대한 부모의 사랑의 관계에서 이해해야 되는 것이다. 곧 부모의 자식에 대한 사랑으로부터 이스라엘이 종되었던 애굽땅에서 자유케 된 해방사건이나, 예수의 하나님나라에 참여하는 구원의 사건이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것은 창조신앙과 구속(해방)신앙의 결정적인 접촉점이며 연결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여기서 한가지 더 생각할 것은 예수가 하나님을 하늘의 아버지로 제시할 때, 그것은 그의 제자들에게 하나님상을 바르게 가르치기 위함이었다는 사실이다. 곧 창조주 하나님을 향하여 '아버지'라는 칭호를 덧붙임으로 피조물을 돌보시는 하나님의 부성에 대한 강조를 자연스럽게 가미하고 있는 것이다. 산상설교에서 그것은 더욱 잘 나타난다. 예수는 산천의 초목과 새와 짐승들을 인간과 비교하면서 부성의 사랑의 지닌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말씀하고 있다(마 6,25 이하). 본래 본문의 맥락에 의하면 초목과 짐승에 하나님의 관심의 초점이 있다기 보다는 그것보다 더 귀한 피조물인 인간에게 있다는 것을 강조하려는 것은 분명하다. 즉 공중의 새도, 들의 꽃도 그 모든 것을 만드신 창조주 하나님이 돌보신다면 인간들은 더 말할 것이 무엇이겠느냐라는 표현이다. 특히 예수는 인간의 의식주에 대한 일반적인 삶의 내용을 자연의 피조물들, 그리고 인간의 자기 노력적인 작업과 비교하면서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을 부각시킨다. 예를 들면, 인간이 자기 삶을 위하여 열심히 심고 거두고 창고에 모아들이므로 그 염려를 줄일 수 있겠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이 세상의 미물처럼 보이는 공중의 새와 들의 백합화도 먹이고 입히시거든 하물며 인간은 더 잘 먹이고 키우고 돌보시지 않겠느냐라는 질문이다. 그러나 또한 그것은 그 반대로 인간의 모든 자기 영광이(솔로몬의 영광) 하나님의 피조물들이 지닌 영광과 비교할 때, 사실은 들의 꽃만큼의 영광도 되지 못한다는 예수의 선언이기도 하다. 인간이 그렇게 노력하고 준비해도 그 영광은 하잘 것 없는 것이며, 근심과 염려도 줄일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구약의 지혜전승에 나타나는 공통적인 특징을 엿볼 수 있다. 즉 인간의 자기 한계성과 피조성에 대한 절감이며 동시에 이와 더불어 드러나는 하나님의 위대한 행위들이다. 예를 들면, "너희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 할 수 있느냐?"(마 6,27)라는 예수의 질문은 피조물 인간이 지닌 한계성의 확인과 더불어 참 지혜자는 인간의 모든 것을 아시고 준비하시고 돌보시는 하나님의 행위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만약 하나님이 세상의 피조물을 돌보시는 그 돌보심이 인간의 자기돌봄보다 더 크다면, 피조물중에 최고의 피조물인 인간을 돌보시는 창조주 하나님의 사랑을 받아 들여야 하지 않겠는가라는 질문이다. 다시 말하면 창조주 하나님은 아버지의 심정으로 모든 피조물을 다 보존하고 돌보는 분이라는 사실을 전제하는 것이다.
이 의미는 더 확장될 수 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부성뿐만 아니라, 우주적인 부성의 특징도 제공하신다는 사실이다. 즉 하나님은 동물과 식물에게도 하나님의 부성을 제공하시며, 더 나아가 해와 비를 악인과 선인모두에게 다 비추고 내리시는 분(마 5,43-48)이시다. 따라서 여기서 의미하는 바는 단순히 인간중심적(또는 의인중심적)인 협의적 의미를 탈피한 우주적 부성으로서의 하나님의 모습에 대한 강조이다. 하나님은 단지 당신이 좋아하는 인간을 편애하거나, 싫어하는 인간을 억압하기 위해서, 피조물의 자연질서를 단순히 변경하거나 파괴하는 분이 아니라, 인간 누구에게나 하나님의 복을 주기 위하여 자연질서를 보호하시는 분이라는 사실이다. 악인에게도 선인에게도 해를 비추고 비를 내리시므로 인간 모두가 천지를 창조하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을 알고 찬송하기를 원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창조적인 온전성이다. 따라서 이 온전함을 바르게 배울 때, 우리는 비로서 창조주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과 궁휼, 그리고 그의 온전하심에 동참하게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예수의 교훈을 통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것이 부성의 사랑으로 자연의 질서를 보존하시며 그것을 모든 인간에게 공평한 복을 제공하시는 분이 우리의 아버지되시는 창조주 하나님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한가지 더 부연 할 것은 예수의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만드신 분일 뿐만 아니라, 삶과 죽음을 다스리는 주인이라는 사실이다(마 10,29-31/ 눅 12,6-7; 참새 두마리가 한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너희 아버지께서 허락지 아니하시면 그 하나라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리라. 너희에게는 머리털까지 다 세신 바 되었으니 두려워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 마 13,24-30: 가라지는 먼저 거두어 불사르게 단으로 묶고 곡식은 모아 곡간에 넣는다). 하나님은 모든 피조세계의 궁극성까지 관할하고 계신 분으로 피조물의 흥망성쇄뿐만 아니라, 종말론적인 심판의 자리에서 인간의 운명을 그 손안에 쥐고 계신 분이다. 따라서 세상의 모든 존재는 두려움의 세력에 의해 지배를 당해서는 아니되고, 창조하시고 그분의 창조물들을 보살피시는 아버지 하나님의 사랑안에서 진정한 자유함을 얻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자유와 해방을 이루기 위하여 이 세계의 정복자나 지배자라기 보다는, 모든 피조물을 위해 애써 일하며 돌보는 봉사자로 나타난다.
여기서 해석학적인 문제가 제기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부성적인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어떻게 생기는가 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사랑을 지닌 창조주는 다만 인간이 자연과 역사를 들여다 보므로 파악되어지는 분이 아니다. 우리는 예수에게서 그것을 발견한다. 예수는 자연을 통해서 아버지를 깨달은 것이 아니라, 아버지와 아들의 독점적인 인식(마 11,25 이하 참조)을 통해서, 자연과 역사의 사건들을 재 조명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바울도 마찬가지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과 하나님을 아바로 부르게 하는 성령을 통해 자연과 우주에 대한 창조론적 고백이 가능하다고 말하고 있다(고전 8,6; 골 1,15 이하 참조). 따라서 아버지 되신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인식은 자연 그 자체로 부터 얻어진 것이 아니라, 기독론적인 신앙전제안에서 모든 사물과 경험들이 새 의미와 내용을 갖게 되므로써 얻게되는 인식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신앙적 경향성은 구약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창조신앙이 먼저 발생한 것이 아니라, 이스라엘의 출애굽이라는 구속신앙의 관점하에서 하나님이 모든 피조물의 창조주되심을 확인하고 찬양한 것이라 할 수 있다(G.v.Rad). 신약에서는 이제 그리스도를 통해서 깨닫게 되는 것이다. 이 세상을 구원하시려는 하나님의 새 창조뿐만 아니라, 첫 창조에도 기독론적인 참여가 이루어졌다는 고백이다. 뒤집어 말하자면 예수 그리스도없는 이 세상을 통한 신인식이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지 못하고 오히려 자기 한계성속에서 우상숭배라는 타락의 길로 나아 갔다는 것이다(롬 1,18 이하; 고전 1,21 참조).
2) 예수의 비유는 자연속에 나타난 하나님의 피조물의 질서들을 보여준다. 자연은 예수가 하나님과 그의 나라를 설명하고 해석하는 표현수단이 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영광과 비교되는 공중에 나는 새나 들의 핀 백합화(마 6,25 이하), 씨뿌리는 자의 비유(막 4,1-9 병행), 스스로 자라나는 씨앗(막 4,26-29), 겨자씨 비유(막 4,30-33 병행), 부유한 농부비유(눅 12,16이하), 열매맺지 않는 무화과 비유(눅 13,6-9) 종말의 때를 나타내는 무화과나무의 비유(막 13,28), 한 알의 밀(요 12,24), 포도나무 비유(요 15,1 이하)등은 예수의 피조물을 보는 눈을 알 수 있게 한다. 예수는 피조물들을 치밀히 관찰하고 파악함으로써, 그것들을 통하여 하나님 나라를 유비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이 예수에게 있어서 하나님의 창조능력과 솜씨, 종말의 때, 하나님 나라의 내용(하나님의 의와 심판)등을 가르치는 신학적 내용이 되고 있다. 이러한 창조의 세계에 대한 예수의 비유는 창조가 하나님의 손에 근거하며, 그의 청중들이 창조의 근본질서에 따라 변화되는 자연질서를 경험으로 신뢰하고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창조와 창조질서가 예수와 회중과의 대화의 기반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는 일회적인 창조행위와 더불어 창조세계에 허락하는 하나님의 강복행위로서의 창조행위를 인간과의 관계에서 이해한다. 하나님이 자신의 피조물에게 허락하는 강복행위란 곧 동식물의 자라남과 풍성함과 열매맺음이다. 예수는 이러한 하나님의 강복행위가 인간의 삶에서도 풍성하게 샬롬에로 열매맺도록 하나님이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선언한다. 씨의 자람이나 열매맺음같이 인간의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성품도 성숙해야 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이렇게 동식물의 창조의 질서에 순응함으로 받는 하나님의 강복을 인간도 아낌없이 누려야 한다는 사실이다. 이런점에서 인간은 하나님의 강복속에서 다른 모든 피조물들과 함께 사귐을 가져야 할 뿐만 아니라, 그들과 함께 하나님의 풍성한 샬롬에 동참할 특권을 누리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의 말씀가운데 나타난 창조신학에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결코 피조물 자체에 신성을 부여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피조물에 신성을 부여하는 행위란 타 종교성에 자주 나타나는 범신론적 행위로서 철저히 거절되어야 하는 우상숭배이다. 따라서 모든 세계의 피조물들이란 창조주밑에 복종되어야 하며, 인간은 그 모든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의 영광의 흔적들을 목격하고 확인할 뿐만 아니라, 그 자연속에 주신 하나님의 복에 함께 참여해야 할 의무와 사명을 지니고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를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예수의 말씀에 나타난 창조신학은 자연에 대한 고찰이나 관찰에서 창조주 하나님이 발견된다기 보다는 하나님이 아버지로서 인간을 사랑하고 자유케 하고 구원하시려는 계시의 빛아래서 비로소 인간은 자연 만물을 바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창조신학은 예수에게서 자연스럽게 구속신학과 연결된다.
III. 예수의 행위에 나타난 창조신학
예수는 자기 자신을 하나님의 창조속에 함께 행동하는 자로 제시할 뿐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세계에서 누려야 할 복을 가져다 주는 분으로 등장한다. 그가 창조주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림으로 배고푼 민중이 풍성한 떡을 먹게 하는 것이다(막 6,41 이하 참조). 예수는 창조행위자로 하나님의 창조역사에 동참함으로, 그를 통하여 하나님의 창조의 복이 주어지는 것이다. 특히 예수의 기적사화에서 그러한 모습들이 잘 드러난다. 그가 말씀으로 직접 행할 때나, 또는 손으로 만지고 침을 뱉고 진흙을 이겨서 병치유의 기적을 베푸는 것등은 곧 창조주로서의 말씀과 행위이다. 즉 예수가 친히 손으로 진흙을 이기고 눈먼자의 눈을 만지며 치료하는 그의 만짐(요 9,6)은 곧 창조주의 손길이다. 또한 죽음의 깊은 잠을 자고 있는 자를 일으키는 그의 손 역시 생명의 호흡을 불어넣어 주는 창조주의 호흡을 매개하는 것이다. 그 밖에 모든 기적 사건이 마찬가지다. 진물나는 문둥병자를 치유하는 손이나, 듣지 못하는 자의 귀를 손가락으로 막고 '에바다'(막 7,34)하므로 열리게 하는 것, 또한 죽음에 처한 소녀를 향하여 '달리다굼'(막 5,41)이라고 외치는 그 모든 행위와 말씀은 창조를 가능케 하던 하나님의 행위와 말씀인 것이다. 따라서 이 모든 모습을 마가는 '그가 다 잘하였도다'(막 7,37)라고 부연설명한다. 이는 마치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신 후 끝맺는 말로 '보기에 좋았더라'(창 1,31 LXX)라는 말씀을 연상시킨다. 예수의 병치유의 기적은 이렇듯 인간의 죄악과 타락으로 말미암아 왜곡되고 파괴된 하나님의 첫 창조를 새롭게 하는 행위였던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병치유와 축사행위와 기적사건등 이 모든 것은 자연 환경속에서 잘 적응하려는 소극적인 태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지속적으로 참여하는 성육신적인 구체적 표현이라고 할 수 있다.
예수의 축사와 병치유의 기적은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의 생명과 샬롬을 적대하고 손상시키는 악한 세력들을 쳐 부수고 하나님의 창조질서를 회복시키는 메시야적 구원행위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제자들이 예수의 위탁대로 축사와 치유의 기적에 동참한다면(마 10,8 병행 참조; 병든 자를 고치며 죽은 자를 살리며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며 귀신을 쫒아내되 너희가 거져 받았으니, 거져 주어라),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시작된 하나님의 창조행위에 참여하게 되는 것이다. 예수의 축사와 치유행위는 참된 의미의 창조의 완성인 안식일의 샬롬을 회복하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의 나라가 예수의 말씀과 사역속에 구체적으로 실체화됐을 뿐만(눅 11,20 참조) 아니라, 예수와 함께 종말론적인 메시야적 샬롬의 시대가 도래했으며(사 35,5 이하; 61,1 이하 참조), 또한 예수를 통한 새 창조가 시작됐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여기서 다시금 우리에게 흥미를 끄는 것이 유대 바리새주의자들과의 논쟁의 쟁점의 된 안식일에 행한 예수의 병치유사건이다. 예수는 그의 공적인 생애의 출발을 안식일에 이사야서를 읽음으로써 시작했다. 곧 희년의 선포다:"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성령의 세례와 충만함을 입은 예수가 메시야로 등극하고 있는 것이다.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억눌리고 매인 자들에게 자유와 해방을 선포하기 위하여 종말론적 메시야능력을 소유한 분으로 등장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의 희년선포라는 이 맥락을 통해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는 그의 정신을 읽을 수 있다. 예수는 거룩한 안식일의 규정을 제거해버린 것이 아니라, 생명과 샬롬을 창조하시고 허락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메시야적으로 새롭게 해석하며 행위하신 것이다(막 2,23-27 병행; 눅 6,5; 막 3,1-6). '인자는 안식일에 주인이다'란 바로 이를 의미한다. 일곱째 날인 안식일조차도 사실은 인간을 위해 주어진 날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자란 아담의 종말론적인 상응적 존재(고전 15,45 참조)로서 첫 창조의 안식일의 샬롬을 그의 몸으로 실천하는 자인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안식일 치유는 하나님의 궁극적 안식의 샬롬을 현실화하는 예수의 창조행위인 것이다. 인간에게 참된 쉼과 평화의 자리를 주려는 예수가 치유행위를 통하여 치유받은 인간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정한 창조와 안식의 사귐에 들어 서게 하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엿세동안의 창조의 완성에 안식일이 있는 것처럼 예수가 선포한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이 안식의 샬롬을 함께 나누는 예수의 삶의 자리에 있다. 예수가 병을 고침으로서 고침받은 자는 자신과의 소외는 물론이고, 가정과 사회로 부터 새로운 관계성을 회복하게 되고, 마침내는 하나님과의 궁극적 샬롬을 경험하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이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요 5,17)는 예수의 말씀은 하나님의 창조를 지속시키는 예수의 사역을 의미한다.
예수는 이 일을 위해 그의 제자들을 택한다(막 3,14). 예수의 제자선택은 말하자면 창조신학적인 사건인 것이다. 마가는 이러한 창조행위로서의 예수의 12 제자 선택을 강조한다(선택이라는 이라는 어휘는 직책부여를 마치 모세와 아론을 하나님이 택할 때 사용한 언어이기도 하다. 따라서 제자들이 하나님의 나라의 선포를 위탁받고 나아가, 샬롬의 인사를 통해 그들의 일을 시작하는 것(눅 10,5.6 참조)은 결국 이러한 창조신학적인 범주에서 이해될 수 있다.
예수의 공생애 시작전에 성령의 이끌림을 받고 광야로 나가 사탄의 유혹을 물리치고 나타난 상황(막 1,13) 또한 하나의 창조신학적인 틀에서 이해될 수 있다. 사탄과의 씨름에서 예수의 승리란 첫 인간의 실패를 극복하는 자리인 것이다. 왜냐하면 첫 창조의 파라다이스에서 인간과 동물들이 땅에서 함께 안식하던 자리가 예수를 통해서 다시금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예수는 들짐승들과 함께 함으로 종말론적인 메시야적 안식의 자리에 들었음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사 11,1 이하). 말하자면 이제 예수를 통한 하나님의 궁극적인 안식의 샬롬을 지향한 창조세계가 종말론적으로 구체적으로 현실화되고 있음을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는 현 피조세계를 유일하고 궁극적인 창조세계의 자리요 창조신앙의 표준으로 판단치는 않는다. 그는 오히려 새롭게 완성될 질적으로 다른 창조세계를 바라본다. 이 세상에서의 남녀간의 결혼과 같은 것이 없는 하늘의 천사들과 같은 개별적인 존재가 되는(막 12,25 병행) 세계이며,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들이 아브라함과 야곱과 이삭과 함께 하나님 나라의 식탁에 모이는(마 8,11이하/눅 13,29; 사 25,6 이하 참조;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동서로 부터 많은 사람이 이르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함께 천국에 앉으려니) 우주적인 공동체가 이루어지는 세계이다. 새롭게 포도나무의 열매를 먹게 될(막 14,25 병행) 자리이다. 예수가 그리는 이 메시야적 증거의 세계는 이미 이사야 25,6-8의 말씀 가운데 표명되어 있는 종말론적이며 궁극적인 새 창조의 세계인 것이다.
V. 창조신학적 해석학
1) 예수의 자연세계 이해는 이스라엘 지혜전승의 맥락에 기초한다.
예수는 이스라엘의 지혜전승에서와 같이 경험적인 사고를 통해서 창조의 궁극적 질서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기초로 해서 삶을 해석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씨뿌리는 비유에서도 그는 씨가 지닌 실존의 자리를 깊이 꿰뚫고 보고 있다. 날아다니는 새에 의해서 먹히울 씨앗의 운명, 돌짝밭에서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뜨거운 태양빛에 숨이 넘어갈 씨앗의 운명, 가시덤불속에서 숨막히는 생존의 가능성을 향해 몸부림치는 씨앗의 실존적 상황등을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들의 백합화가 아름답게 피고, 하늘의 새가 나는 것을 지켜보면서, 예수는 이 자연의 모든 질서를 만드신 하나님, 자연의 질서속에 참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알고 있는 것이다. 들의 꽃과 공중의 나는 새를 키우시고 먹이시는 하나님의 지속적인 손길을 보고 있는 것이다.
구약의 지혜전통이 경험적인 깨달음을 신학화하는 작업인 것처럼 예수의 창조말씀도 그와 유사하게 나타난다. 다만 구약의 신학화 작업은 '하나님 경외'사상으로 집약되나, 예수에게서는 주로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의 돌봄'에로 신학화 작업의 목표가 드러난다. 그렇다고 하나님과 세계가 단순히 이분화되거나, 그 반대로 동일화되지도 않는다. 자연세계는 하나님의 피조물임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하나님 경험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이 예수가 가진 지혜사상이다. 이스라엘의 지혜전통에 있어서도 그점은 동일하다. 그들의 세계경험은 곧 하나님경험이었고, 하나님 경험은 그들의 세계 경험이었다. 그들이 이렇게 할 수 있었던 것은 자연세계를 움직이며 유지하는 원질서, 곧 하나님의 질서를 그들의 세계경험속에서 깨닫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세계경험이 이스라엘 지혜전승의 '신학화 과정'을 통해서 하나님 경외사상과 자연스럽게 연결되게 된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어느순간이라도 하나님과 세계자체를 동일시하거나 일치시키려 하지 않았다. 그러한 시도에 대해서는 가장 격렬하게 반대하고 거부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세계를 초월해 있는 창조주 하나님과, 피조물의 세계속에 내재해 있는 하나님을 그들의 경험속에서 발견한 것이다. 예수에게서도 이점은 일치하고 있다. 세계를 피조물로 지으시고 그것을 초월하는 창조주 하나님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의 원질서안에 내재하며 그 흔적을 보여 주시는 하나님은 한 하나님인 것이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세계를 창조하여 보존하시는 분임과 동시에 세계를 보존 유지함으로 자기 자신이 창조주임을 끊임없이 계시하시는 분이다. 따라서 피조물은 하나님이 계시하시고 말씀하시는 수단이 되고 있는 것이다.
2) 하나님의 창조능력이 창조의 공간인 자연세계에 나타날 때 그 분을 향하여 창조주 하나님이라고 고백 한다면, 창조의 공간과 더불어 시간 곧 역사속에 나타날 때 역사의 주/구원자/해방자 하나님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듯 피조물 자연세계를 넘어서 역사의 자리에 찿아오시는 하나님을 진술한 것이 구속사 신학이다. 이스라엘은 역사 경험을 통해서 하나님이 역사속에 개입하시는 것을 깨달았다. 하나님은 역사를 만들고 이끄시며, 또한 역사의 자리에 찿아 오셔서 이를 행하시는 분인 것을 안 것이다. 따라서 이스라엘은 역사를 회상함으로 과거를 신학적으로 현재화 시키고, 기다림을 통하여 미래를 종말론적으로 현재화 시켰다. 이것이 구약에서는 출애굽이라는 구원사건에 대한 고백이며, 신약에서는 그리스도안에서의 새 창조의 사건인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창조능력은 회상과 기다림이라는 순환적인 구조하에서 종말론적 역동성을 띄게된다.
3) 예수가 보여준 창조신앙은 인간중심적 세계관이라기 보다는 하나님중심적 세계관이다.
예수에게서 자연피조물은 결코 인간과 맞대결하는 대칭적인 대상성으로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삶의 자리에 동참하는 피조물이며, 하나님의 복을 함께 나누야 하는 대상이다. 따라서 예수의 교훈을 통해 우리는 자연세계를 통해서 인간을 생각하고, 자연과 더불어 사고하며 사는 인간이어야 함을 배우게 된다.
여기에서 서구적 사고의 특징인 분리와 분석적 사고가 동양적인 지혜적 사고인 통합적이며 통전적인 사고로, 또한 주객도식적 개체적 관계성은 교제와 사귐의 만남으로 바뀌어 지는 것이다. 따라서 예수의 창조신학적인 전승을 통해서 우리는 자연이 단순히 인간이 마구 사용해도 좋은 정복과 지배의 대상이 아니라, 피조물안에서 함께 사귐과 만남 그리고 나눔을 가져야 할 대상이라는 통전적 인식방법을 터득할 수 있게 된다.
이를 위해서는 특별히 주체자라고 여겨왔던 인간들이 자연세계의 고뇌와 신음에 대해서 적극적인 참여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곧 기독론적인 의미에서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의 창조 행위에 적극적으로 동참하는 일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무엇인가? 그것은 부성의 사랑을 가지고 이 세상의 모든 피조물들을 지키고 보존하며 보호하시는 것이다. 이를 바울신학적으로 표현한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은 종말론적으로 그가 만드신 모든 피조물들의 고난과 신음에 동참하고 계신다는 것이다. 그는 그의 피조물의 운명을 자신의 운명으로 받아 들이는 사랑이다. 곧 예수의 고난은 인간을 향한, 모든 연약한 자들의 고난에 동참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동시에 모든 피조물의 고난에 동참하는 하나님의 아들의 우주적 고난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로 말미암아 모든 피조물이 구속을 기다리기 때문이다(롬 8,19 이하).
맺는 말
필자는 본 논고를 생태학적 위기를 맞는 우리의 현 상황으로부터 시작했다. 이제 글을 마치면서 다시금 확인 하는 것은 예수의 창조신학을 바르게 이해하는 것이 얼마큼 생태학적 현상의 극복에 중요한가 하는 것이다. 예수는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모든 세계 경험의 영역을 통해서 하나님의 창조의 손길을 발견했다. 창조주 하나님은 우리가 보고, 듣고, 만지는 현 세계와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는 분이 아닌 것이다. 오히려 하나님은 창조주로서 그의 지혜와 영으로 피조물의 자리에 동행하시고, 역사의 주로서 고난받고 신음하는 피조물의 자리를 찿아 오셔서 새 창조를 이룩하시는 분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부성적인 사랑은 예수를 통해 피조물 모두에게 우주론적 부성으로 다가온다. 거기에는 단순한 거룩과 세속의 구분이 아니라 하나님의 안식의 샬롬속에 모든 피조물이 동거하며 동락하기를 바라고 행위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부성이다. 이것을 예수는 그의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는 삶의 자리에서 실천한 것이다. 곧 첫 창조에서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았다라는 카오스에서 코스모스에로의 창조에 대한 본래성을 되찿은 운동이 예수의 하나님 나라운동이라고 할 수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인 궁극적 안식의 샬롬을 모든 피조물이 누리도록 하는 것이다. 죄용서와 축사, 그리고 모든 치유의 기적은 그런 측면에서 이해 되어야 할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을 그가 지으신 피조물들을 통하여 경험할 수 있다. 그러나 만약 우리가 하나님을 초월적인 자리에만 가두어 놓는다면 우리는 삶의 모든 경험적 자리(자연과 역사)에 찿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 할 것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보여준 자연과 세계에 대한 새로운 창조 신학적 이해는 오늘의 생태학적 위기를 신학적으로 극복하는 데 있어서 필수적인 과제라고 생각되어 진다.(각주는 원문{장신논단} (1992년 8 집)에 실려 있으니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
혹 글을 퍼오실 때는 경로 (url)까지 함께 퍼와서 올려 주세요 |
자료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 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