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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변증적 성격

목회독서교육 배경식 교수............... 조회 수 2746 추천 수 0 2010.05.30 15:13: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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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칼빈의 기독교 강요와 변증적 성격

 

배경식 교수 (한일 장신대)  http://user.chollian.net/~fampae

 

깔뱅의 기독교강요에서 보여지는 변증적 성격

 

서 언

 

깔뱅의 기독교 강요가 여타의 다른 교의학 처럼 기독교인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을 체계화시킨 교리서인가 아니면 당시의 개신교 신앙을 핍박하며 성경중심의 신앙을 혼란스럽게 하던 소위 카톨릭 신자로 자처하던 비 복음적인 사람들과 무신론자들 그리고 잘못된 신앙을 추구하던 이단들에 대한 변증서인가 라는 문제는 제기해 볼 만한 물음중의 하나이다. 전자를 강조하는 사람들은 깔뱅의 기독교강요를 평신도를 위한 교회의 책으로서 루터의 요리문답(Cathecism)과 사도신경의 틀을 갖는 신앙고백서라고 주장하나 후자의 사람들은 개신교 인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은 결코 카톨릭 신앙에 비해 전혀 "새로운 것" 또는 "갓 태어난 것",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 아니라 복음적이며 성경적임을 분명히 하는 변증서라고 말할 것이다.

당시 카톨릭 교회의 지도자들은 개신교도들에 대하여 "로마 카톨릭의 법적제도인 교회조직(ecclesiastical constitutions)에 대항하여 교회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사람들로서 모든 제도와 정부를 전복하며 사회의 평화와 안정을 해치고 모든 법률을 폐기하고 권력과 재산을 분쇄하는 행동을 한다"라고 지적하면서 개신교도들을 "투옥, 추방, 재산 몰수 및 화형 등으로 처분해야 하며 육지와 바다에서 말살 시켜야 한다"고 외쳐댔다. 이것은 개신교에 대한 매우 잘못된 오해이며 이러한 오해와 비방에 대해 프란시스 I세 왕이 직접 나서 변증해 줄 것을 깔뱅은 간곡히 요청하고 있다.

우리는 여기에서 깔뱅의 현실적인 시민 정부관을 보게된다. 그에게 있어서는 세 속의 통치권이 결코 신앙과 별개의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나라를 통치하면서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봉사하지 않는다면 그 왕은 왕의 통치권을 행사하는 것이 아니고 산적 행위를 하는 것이다"라는 어거스틴의 말을 인용하여 교회와 국가의 밀접한 관계를 지적하고있다. 국가는 평화와 질서를 유지하는 임무에 더하여 올바른 교리와 예배가 유지되도록 노력해야 하며 또한 계명을 범하는 모든 죄를 형벌하는 일도 행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하였다. 국가는 그 법률을 하나님의 율법에 준거할 것을 요구하였다.    

기독교가 태동한 이래 2000년의 시간이 지나오는 지금까지도 이러한 논쟁은 교회의 안과 밖에서 끊이지 않고 제기되고 있으며 우리가 믿는 신앙의 내용이 복음적 인가 비복음적 인가라는 물음은 성경에 비추어 그 해답을 얻어야 할 것이다.

필자는 깔뱅의 기독교강요를 그 시대의 기독교교리 전체를 다루는 요리문답이면서 동시에 변증서라고 규정하면서 깔뱅이 프랑스 왕 프란시스 I세에게 드리는 헌사를 중심으로 일반적인 변증의 내용과 함께 본 논거를 전개해 보려 한다. 

 


    1. 깔뱅과 그 시대의 사상적 배경

 


깔뱅 시대에 주류를 이루는 사상은 인문주의(humanism)이다. 당대의 사람들은 인문주의를 통해서 고전사상을 발견하고 그 속에서 전개되는 인간의 가치와 존엄성을 이해할 수 있었다. 인문주의자로서 깔뱅의 대표적인 작품은 세네카의 「관용론」(Commentary on Senecas De Clementia)과 「기독교강요」(Institutes of the Christian Religion)이다. 그의 인문주의적 사상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가 처했던 정치적 상황을 이해해야 하며 동시에 그에게서 고전문헌에 심취한 인문주의적 태도를 볼 수 있다.

깔뱅이 이 작품들을 저술할 때는 당시 프랑스의 국왕 프란시스 1세(1515-1547)가 집권하며 프랑스의 개신교도들을 박해하던 시기이었다. 깔뱅이 세네카의 사상을 선택한 것은 스토아 사상이 기독교사상과 마찬가지로 신의 섭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세네카의 관용론에서 깔뱅은 폭군(The Tyrant)을 국민의 뜻에 부합하지 못하는 자, 무절제하게 권력을 행사하는 자로 규정하면서 의로운 통치자와 구별하는 것을 보게 된다. 고전문학에 대한 전반적인 주석이며 사회정치 이론과 실천에 관한 그의 정치 철학을 보여 준 저서라고 보여진다.

깔뱅정치 사상의 또 다른 배경은 「기독교강요」의 서문과 그의 신학 사상에 잘 나타나있다.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서한을 통해 개신교의 신앙고백을 교리의 형태를 가지고 잘 나타내고 있다. 이것은 일종의 기독교 변증론으로서 이단자들과 난동자들로 오해를 받고있던 프랑스에 거주하는 개신교도들을 변호하고 있다. 이 서문이 갖는 의미는 자신의 뜻이 왕에게 전달되어 관철되기를 바랬으며 동시에 어떠한 위험과 고난을 각오하면서 까지 라도 왕을 설득하여 개신교를 이해 시키려했던 호교론적인 면이 나타난 것이다.

정치사상과 관련하여 나타나는 그의 신학 사상은 "하나님의 주권"(The sovereignty of God)이다. 이것을 잘 나타내주는 성구로서는 "여호와는 인애와 공평과 정직을 땅에 행하는 자"(렘 9:24)를 든다. 그의 정치적 권위와 근거는 다른 여타의 철학이나 국가, 사회, 국민에 있는 것이 아니라 삼위일체가 되시는 하나님의 의지에 달려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그의 정치사상은 인문주의적 성격을 가지면서도 신학적임을 알게 된다.

   

1) 시민정부(Civil Government)

깔뱅의 시민정부는 사회적 계약이나 약속에 의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보편적 은혜"에 근거한다. 시민정부는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주신 은혜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시민정부의 존재 윈인을 인간의 죄 때문에 신이 제정한 세속질서로 보는 상황적 원인(occasional cause)과 인간 구원의 사역과 시민질서를 유지하기 위해 시민정부가 필요하다는 실제적 원인(effectual cause)으로 보는 경우가 있다. 그는 정교의 분리를 주장하면서도 정부의 존재를 부정하는 재세례파와 세속정부의 권위를 지나치게 과장함으로서 하나님의 통치와 대립하는 군주론 자들을 비판하고 있다.

깔뱅이 관심을 갖는 것은 안전하고 질서있는 인간의 자유이다. 자유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으며 말 할 수없이 귀한 보배이며 생명의 절반 이상이라고 한다. 깔뱅은 집권자들을 자유의 수호자로 규정하면서 그들의 직책에 충실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전제 정치와 무정부 상태를 이런 면에서 거부한다.

인간사회에서 시민정부가 하는 일은 "빵과 물과 태양과 공기가 하는 일 만큼이나 중요하다. 사실상 그 위치는 훨씬 더 귀중하다. 왜냐하면 .... 이런 모든 활동을 포함한 .. 그이상의 일을 하기 때문이다. 우상숭배,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모독... 한마디로 그리스도인들이 거리낌 없이 종교생활을 할 수 있도록 하여 인간 사이에 인간성이 보존되도록 한다."

집권자들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충성되이 직무를 수행하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그들에게 그 지위를 통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을 맡기셨으며 바울 역시 다스리는 일을 하나님의 은사로 인정하였다(롬 12:8). 권세는 하나님의 법규정이며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않는 권세는 없다고 보았다.

이러한 것을 통해 깔뱅이 강조하는 것은 집권자들의 권리행사 보다 시민의 권위이다. 시민의 권위는 "하나의 소명이며 하나님 앞에서 거룩하고 합당 할 뿐 아니라 인간의 전 생활에서 그 어느 소명보다도 신성하고 훨씬 더 영예스럽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깔뱅은 어떠한 정부형태를 선호하고 있는가? 민주정치에 근접한 귀족정치(an aristocracy bordering on democracy)라고 한다. 그 이유로는 여러 사람이 권리를 행사하는 것이 보다 안전하고 받아들일 만하며 서로 돕고 훈계함으로써 자유가 감소되는 것을 막고 침해받지 않기 때문이다. 이렇게 이루어진 시민정부는 예배를 존중하며 건전한 교리와 교회를 보호하며 시민의 삶을 사회에 적응시키며 사회정의와 평화를 수립하고 증진시키는 것이다.     

2) 복음에 대한 왜곡들(Perversions of the Gospel)

깔뱅의 시대에 이르기까지 그리스도의 복음이 왜 잘못 해석되고 신앙생활이 변질되었는가 라는 것을 알기 위해서는 역사적으로 교회가 갖는 사상적인 전 이해를 갖는 것이 필요하다.  

제 2세기의 기독교는 사상적으로 도전해오던 내부적, 외부적인 혼란에 직면하여 교회의 조직과 존속을 위해 대처하게 되었다. 교회의 존재를 정당화해야 했으며 교부들은 교활한 사상적 오류들로부터 교회의 순수성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외부적인 박해는 당시의 종교적, 정치적 권위를 상징하는 유대인들과 로마정부로부터 온 것들이었으며 내부적인 것으로는 교회를 사상적으로 혼란하게 하며 어지럽히던 영지주의(Gnoticism)이었다.

콘스탄틴(Constantinus) 대제에 의해 기독교는 313년 로마의 국교로 인정받은 기독교는 밀라노 칙령에 의해 모든 사람들에게 자유스러운 종교가 되었다. 그가 기독교를 믿은 것은 정략적인 면도 없지 않으나 신앙적으로 굳은 신념이 있었던 것을 부인 할 수 없다. 그가 남긴 업적들은 십자가의 형벌 폐지, 검투 금지, 여성의 보호, 이마에 낙인찍는 것 금지 등이다. 동시에 교회의 법률에 국가의 공인을 주었으며 일요일을 법정 공휴일로 정하고 성경의 보급에 힘을 썼다. 수도를 콘스탄틴으로 옮겨 기독교적인 새 도시를 건설하였다.

부정적인 것들로는 기독교가 국교로 된 이후 이교도의 사당들이 교회에게 주어지고 관직에 나가는 사람들은 기독교를 의무적으로 믿게 하였다. 이로 인해 명목상의 기독교인들이 생기기 시작하였으며 교회가 자연히 부패하게 되었다.          

깔뱅이 살던 16세기는 복음에 무지한 카톨릭교도들이 소위 종교재판(Inquisition)이라는 명목으로발덴파(Waldenses)를 잔인하게 핍박하던 시기이다. 리용(Lyon)의 부자상인 페터 발도(Peter Waldo)가 1176년 경 어느 신학자로부터 신께로 가는 최선의 길은 "자신이 가진 모든 소유물을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고 주님을 따르는 것"(마 19:21)이라는 말씀에 감화를 받은 이후 신약성경대로 살기위해 성경을 번역하고 가난에 근거한 사도적 청빈을 실천하였다. 그를 중심으로 모여 든 사람들은 자신들을 "마음이 가난한 자들"(The Poor in Spirit)이라고 하였다.

그 이후 이들은 카톨릭 교회로부터 무식한 평신도 그룹으로 간주를 받아 전도나 설교하는 것을 금지 당했으며 교황 루시우스 III세에 의해 교회로부터 파문을 당하였다. 그러나 이들의 신앙적 실천은 매우 순교적이었으며 개혁적이었다.

발덴파 교도들은 카톨릭 교회가 중시 여기던 죽은 자를 위한 미사나 기도, 고해성사, 연옥 그리고 성지순례 등을  비 성경적이라고 거부하였으며 자신들의 독립된 교회 조직체를 만들어 복음서의 내용대로 둘씩 둘씩 짝을 지어 전도하며 검소한 신앙생활을 하였다. 깔뱅은 이들의 성경적이며 개혁적인 신앙을 그대로 받아들인 듯하다.

발덴파들은 초기에 동조자들이 많아져 스페인 북부와 오스트리아, 독일에까지 퍼졌으나 카톨릭교회의 조직적인 종교재판과 박해에 밀려 알프스 계곡으로 쫓겨갔다. 이들 중에는 독일을 중심으로 전 유럽에 종교개혁이 일어나자 그 원칙에 찬동하며 개신교도들이 된 사람들이 많이 있다.

깔뱅이 기독교강요 제 1판을 쓴 시기는 프랑스의 발덴파 교도들이 카톨릭 교도들로부터 잔인하고 야만적인 박해를 받고있던 1534-35 년경이다.

깔뱅은 프란시스 I세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사악한 무리들의 횡포가 극에 달하여 이 나라에서는 건전한 교리가 더 이상 설 자리가 없게 되었음을 알았다" 라고 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사악한 사람들에 대해 깔뱅은 "불과 검으로 나라를 어지럽히며 조직적인 종교재판(Inquisition)을 하는 정신 이상자와 같은 사람들을 말하며 이들은 그리스도를 조금이라도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라고 까지 칭하였다. 이들 가운데에는 그리스도에 주리고 목말라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음을 알기 때문에 이들을 위해서 기독교강요를 초보적인 가르침으로 쓴다고 하였다. 당시의 종교재판은 카톨릭신앙에 위배되는 사람들을 투옥, 추방, 재산몰수 및 화형에 처하였으며 지역사회에서 이들을 완전히 격리시키는 것이었다.

깔뱅은 종교재판과 종교적 탄압을 "바리새인들의 폭정"으로 규정하면서 프랑스 전역에서 핍박을 받는 복음주의 자들을 위한 탄원으로 기독교강요를 쓴다고 까지 말하고 있다. 프란시스 1세 왕에게 드리는 헌사에서 그는 "법질서에 의거하지 않고 또 사법적인 진지함보다는 폭력적인 열기에 의해 취급되고 있는 아니 뒤흔들리고 있는 이 소송에 대해 철저하게 심리해 주시기를 바라는 이 요청은 결코 부당한 것이 아닙니다"라고 말한다. 이렇게까지 주장하는 것은 왕에게 맡겨진 통치 행위가 성직자들에 의해 지켜지지 않고 있으며 이로 인해 하나님의 영광과는 거리가 먼 봉사로서의 통치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 결과는 하나님의 진리를 가리우며 하나님의 영광을 가로채는 행위라고 말하고 있다.

우리가 믿는 기독교 신앙의 사상체계를 크게 나누어 보면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는 깔뱅주의(Calvinism)와 인간의 자유의지를 강조하는 알미니안주의(Arminianism)가 있다. 양쪽 모두 그 밑 바탕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주장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근본적으로 상이한 가치관 위에서 성경을 해석하기 때문에 인간의 자유와 하나님의 주권은 강조점이 다르게 나타난다. 여기에서 신학적으로 구원을 이루는 신앙과 행위의 문제가 다루어지는데 깔뱅주의는 신앙(faith)을 근거로, 알미니안주의는 신념(belief)을 전제로 하는 선한 행위로 구원을 이룬다고 하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참된 구원의 문제는 오늘날까지도 논란이 되어오고 있다.

신앙(faith)이란 신앙생활(living faith)을 의미하는 것이므로 이미 그 속에 선한 행위를 포함하고있다. 그렇지 못할 경우에는 죽은 신앙일 뿐이다. 깔뱅은 이 일의 구체적인 실현을 위해 제네바에서 윌리암 파렐(William Farel)과 함께 일종의 신정정치를 시도 한 듯하다. 그의 신앙생활을 뒷받침해주는 유일한 권위는 "성령의 감동을 받아 기록된 성경"이었다.  

 


     2. 기독교 강요의 형성과 변증적인 성격

 


깔뱅은 성경과 교부들의 저서들, 주석서 들을 계속 읽고 인용함으로서 기독교강요를 보충하였다. 제 1판은 그의 나이 27세인 1536년부터 시작하여 제 2판은 1539년 그리고 제 3판은 1543년에 출간하였다. 그는 이 책을 통해 심오한 사상가, 지혜로운 조직가, 위대한 학자 그리고 방대한 저술가라는 평을 받게된다. 그의 기독교 강요에는 은총의 교리를 강조한 어거스틴의 영향이 교회론에 까지 미치는 것을 보게 된다. 존 크리소스톰의 영향은 제 2판부터 나온다.

슈트라스부르크에서 가르침을 받은 마틴 부쳐(M. Bucer)의 영향력 가운데 예정론은 기독교강요의 초판과 재판을 이어주는 디딤돌 역할을 한다. 그의 교리문답(1537-38)과 로마서주석(1539)에 확실하게 보여 진다. 특히 슈트라스부르크에서의 프랑스 인을 위한 소규모 회중 목회기간(1538-1541)이 주던 경험은 교회의 본질과 훈련, 기독교적 경배와 찬양에 관한 실질적인 견해를 갖게 하였다. 이것은 제네바를 개혁하기 위해 가능한 모든 법적이며 행정적인 체계를  동원하여 교회, 법원, 학교의 심방 그리고 광범위한 서신교환 등 기독교강요를 체계화시키는 밑거름이 되게 하였다.

기독교 강요를 그는 평신도들이 읽고 성경을 중심으로 하는 신앙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썼다  그리고 성경의 참된 이해는 성령에 의한다고 말한다(1:7, 3:2). 루터에게서도 보여지듯이 구약의 인물들을 그는 전기(傳記)와 동일시함으로서 성경해석에 경험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기독교강요와 시편주석에 나오는 다윗을 본받아(Imitatio Davids)는 그 한 예이다. 그는 다윗으로 하여금 그의 영적 상태를 대변하게 하였다.

신약에서는 바울이 칼빈의 영혼 상태(status animae)를 가장 잘 반영해 준다. 시편 주석의 서문(1555-57)에서 밝힌 대로 자신의 개종과 신앙적 성장에 대해 그는 로마서 1:18-25를 든다. 진실과 거짓의 대립 그리고 하나님과 자아에 대한 두 지식의 가정은 이 구절에서 유래된다.

기독교강요는 경건의 책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영화롭게 하자는 한 인간의 진실한 노력이며 간절한 바램이기도 하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을 지배하시는 왕이시다"가 그 주제이다. 진정한 왕권은 자신이 하나님의 대사임을 인정하는 것이며 하나님의 거룩한 말씀에 따라 통치하는 것이라고 한다. 프랜시스 1세에게 보내는 편지에도 이것을 언급한다.

그는 바젤의 피난처에서 소르본 대학의 가톨릭 신학부의 기독교신앙을 반대하였으며 동시에 무정부적인 열광적 신앙을 가진 재침례파로부터 자신을 분리하고 있다. 기독교강요는 개신교가 카톨릭으로부터 받는 정치적, 교회적 위기를 변증하는 변증서이기도 한다. 그러나 깔뱅은 일차적으로 법을 전공했으며 성서를 체계화 시켰다. 철학, 논리학, 수사학 등 모든 조직에 필요한 것들은 이차적 도구들이다. 항상 깔뱅의 사고 속에는 "구원의 역사"에 대한 간절함이 구구절절 흐르고 있다.

기독교강요의 구조를 보면 개신교신앙의 변증적 내용이 무엇이며 그것은 왜 그런가를 알 수있다. 제 1권은 창조주 하나님에 관한 지식, 제 2권은 그리스도과 구원, 제3권은 성령의 역사, 제 4권은 교회의 본질 그리고 시민 정부로 되어 있다. 


    3. 프랑스왕 프랜시스 I세에게 드리는 헌사

 


깔뱅의 기독교강요를 변증적 문서로 이해하려면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헌사를 주의 깊게  보아야 한다. 헌사에는 기독교강요의 저술 배경으로부터 시작하여 복음주의 자들의 탄원과 핍박의 내용, 관습과 교회에 관한 잘못된 이해들 그리고 왕을 통한 하나님의 변호를 기다린다는 것으로 끝을 맺고 있다.


   1) 기독교강요가 쓰여진 배경

기독교강요는 프랑스 민족의 독실한 신앙에 도움을 주려 함이라고 전제한다. 초판의 라틴어 제목을 보면 이러한 의도가 여실히 보여진다. "구원론에서 알아야 하는 제반 사항과 경건의 개요를 거의 빠짐없이 다룬다. 경건에 열심이 있는 사람들도 모두 일독할 가치가 충분한 저서이며 .... 지극히 기독교적인 프랑스 왕에게 드리는 서언에서 이 책은 하나의 신앙고백으로 왕에게 헌정되고 있다." 깔뱅의 기독교강요는 경건한 삶을 살아 가는데 도움이 될 수있는 기본 지침을 제공하는 것이었으며 이들의 구원을 이루기 위한 책이라는 것이다.

깔뱅의 「기독교 강요」가 독일어로는 지침(Unterweisung)이나 강의(Unterricht)로 번역되어 있다. 강요(Institutio) 자체는 두 부분으로 구분되며 교훈(instruction)과 교육(education)의 의미를 갖는다. 기독교 교리 개요의 성격을 갖는 이 책은 프랑스에서 신실한 개신교 신앙을 위해 박해를 받고있는 믿음의 형제들을 위해 박해자 프란시스 1세에게 바치는 신앙고백서로 계획되었다. 개혁교회 자체의 생존을 위한 탄원서이며 동시에 성서적 신앙을 소유한 개신교도들을 변호하는 변증서이다. 이런 면에서 깔뱅은 그릇된 소문으로 인한 복음주의자들에 대한 박해를 지적하면서 왕의 공정한 조사와 증언을 요구하고 있다.

 


   2) 핍박받는 복음주의자들을 위한 탄원

깔뱅의 탄원은 카톨릭교회의 개신교 인들을 향한 무자비한 횡포로부터 시작한다. 투옥, 추방, 재산몰수, 화형, 방화, 협박, 공포심 조성 등이다. 이런 것들을 통해 그리스도의 진리가 땅에 묻혀지고 빛을 보지 못함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때에 조국 프랑스에서는 신앙적 절개를 지키기보다는 비겁함과 타협이 이루어지고 있다고 개탄한다. 이 내용을 심리하고 판결해 달라는 것이다.

통치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봉사로 이해하는 깔뱅은 프란시스 왕에게 다음의 세 가지를 요구하고 있다. 하나님의 영광이 보존되고있는가? 하나님의 진리가 수호되고있는가? 그리고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가? 등이다. 

깔뱅은 이러한 전제를 한 다음 복음주의자와 카톨릭 신앙을 철저히 구분한다. 복음 주의자는 성서적 신앙을 가진 사람들이며 복음의 진리를 위해서는 영웅적 순교를 하는 사람들을 말한다. 카톨릭 교도들은 성서적 신앙을 경시하고 교회가 제정하여 요구하는 하찮은 일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라고 한다.

카톨릭 성직자들의 열심의 내용들은 무엇인가? 우선 신앙의 내용인 성서적 신앙을 무시하고 거부하며 교회의 판단에 복종하도록 한다. 교황청과 교회의 권위를 하나님의 영광보다 우선으로 여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한 이들의 경건 생활은 미사와 연옥신앙, 순례, 기타 공적을 쌓는 외형적인 신앙에 있다. 그리스도에 관한 어떤 신앙을 갖고 있느냐 아니냐는 중요한 일이 아니다. 이는 인간이 만든 제도와 법을 가지고 자신들의 치부를 위해 일하는 탐욕적인 행위(빌 3:19)이다. 성서를 거부하며 하나님을 모독하는 행위이다.  

 


      4. 복음주의 교리에 반대하는 적대자들의 주장

 


카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제도적 교회의 교리는 복음주의 교리와는 그 내용이 전혀 다르다. 그들의 주장은 1) 개신교 교리는 새로운 것, 갓 태어난 것 그리고 의심스럽고 불확실한 것이다. 2) 교회를 통하지 않는 구원은 참된 교리가 아니다. 3)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 등이다. 이에 대한 깔뱅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1) 복음주의적 교리는 말씀에 근거한다.

깔뱅은 개신교가 추구하는 신앙의 내용인 기독교강요를 하나님의 말씀에 근거하여 체계화하였다. 개신교의 교리는 지금까지의 카톨릭이 중시하던 교회의 전통과 사도적 전승, 교부들의 가르침 등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그리스도 자신과 그의 복음에 우선을 두었다. 이에 대한 근거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칭의에 관한 근거 제시(롬 4:25)와 이사야 선지의 하나님 인식의 당위성(사 1:3)을 든다. 하나님의 말씀의 재발견인 것이다. 이러한 성서의 재발견에 대하여 카톨릭 교회는 개신교의 교리 자체를 의심스럽고 불확실하며 새로운 것이라고 하였다. 이것은 그들의 성경에 대한 무지의 소산이라고 하였다. 기독교의 진리가 오랫동안 묻혀있고 알려지지 않았던 것은 인간들의 무지와 게으름, 잘못 때문이며 하나님의 자비스러운 은총으로 인해 그 교의를 되찾은 것이라고 한다. 이는 성경의 재발견과 해석학에 대한 문제제기이다.

 


   2) 구원은 오직 그리스도를 통하여

깔뱅은 구원의 길이 교회를 통해서인가 아니면 오직 그리스도를 통해서인가에 대한 선택의 문제를 제시하였다. 카톨릭교회는 개신교도들이 거룩한 교부들의 승인과 오랜 전통을 거부하고 있으며 새로운 교의를 만들어 배포함으로써 그로 인해 생겨나는 새로운 종파들과 불온한 소란들과 방종한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러나 깔뱅은 성경의 재발견과 교의의 체계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것이라고 말한다. "우리들의 확신은 정반대의 것으로서 죽음의 공포도 두려워하지 않으며 나아가 하나님의 심판대까지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중세의 신학의 중심은 구원론(Soteriology)이었다. 인간이 어떻게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사람들은 이 문제의 진정한 해답을 얻기 위해 부단히 노력하였다. 루터를 포함한 종교개혁자들 역시 이 문제가 중심사안 이었다. 루터로 하여금 종교개혁의 자극을 준 것 역시 로마 카톨릭의 고해제도와 이에 연관된 면죄부 판매였다.

루터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오직 믿음(롬 1:17)이라는 진리의 말씀에 접했을 때 회개의 생활이 시작되었으며 예수가 요구하는 참된 회개는 개인이 쌓는 보상의 행위가 아니라 그리스도안에서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의 사역임을 깨닫게 되었다. 여기에서 중세 카톨릭 신학의 중심적인 것들인 면죄부, 사제의 면죄권, 적선행위, 인간의 공로 교리 등이 거부되었다.

루터에게서의 회개와 신앙의 우선 순위에 대해서는 율법과 복음의 틀에서 보면 죄의 뉘우침인 회개와 예수를 믿음으로 얻어지는 신앙 그리고 신앙의 생활 순으로 보여 진다. 깔뱅은 그의 출발점이 영원한 선택과 구원의 약속에서 설정된 신비적 연합에 있기 때문에 양자는 밀접한 연관이 있다고 보았다.

    

   3)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

카톨릭 교회에서 보여지는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은 신비스러운 미사와 성자숭배에서 온다. 교회가 이것들을 정했기 때문에 옳다고 주장한다. 이들은 교회에서 행해지는 모든 것을 신비스러운 것으로 믿었다. 교회를 통해 구원이 이루어진다고 전적으로 믿었기 때문이다. 교황은 하나님의 대리자로서 구원을 제공하는 자이며 성수는 죄를 사하며 사탄을 물리치는 것으로까지 사용하였다. 마리아 성상은 숭배의 대상으로서 하나님께 이르는 기도를 받으시는 분으로 간주되었다. 성자들은 기적을 행하는 자들로 보았다. 이들은 공로사상을 하나님의 말씀보다 우위에 둠으로서 결국 말씀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이는 모두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려는 것이며 기적들을 이용하여 복음을 파괴하려는 행위 일 뿐이다.

깔뱅은 사탄도 거짓 선지자나 요술가들을 통해 그 나름대로 이적을 행함을 주지시키며 기적은 하나님의 이름을 존귀케 하는 것에만 사용되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이것은 단순하고 교육받지 못한 자들을 미혹하는 적 그리스도적인 행위임을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기적을 요구하는 신앙은  사탄의 유혹이며 참 예배를 버리는 헛된 행위라고 까지 말한다.      

 


    5. 교부들이 개혁 교리를 반대한다는 부당한 주장

 


깔뱅의 교부들에 대한 신뢰도는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바가 없다. 교부도 인간처럼 과오를 범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카톨릭 교도들은 그들을 성자의 수준에 놓고 이해하려 하는 데에서 문제가 생긴다고 보았다. 더욱이 그들은 교부들의 결점과 오류들을 경탄하며 그들의 글에 기록된 내용들은 유의하지 않고 잘못 설명하거나 왜곡시킨다고 깔뱅은 말하고 있다. 그것들은 마치 황금 가운데에서 찌꺼기를 거두어 드리는 것과 같다고 하였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경계를 범하지 말라(잠 22:28)는 솔로몬의 잠언서를 인용하면서 깔뱅은 카톨릭 교도들의 신앙생활이 교부들의 것과 어떻게 다른지를 여러 가지 예를 들면서 비판하고 있다. 카톨릭의 종교의식에서 사용되는 금, 은, 상아, 대리석, 보석, 비단 등은 예배와는 연관이 없는 광적인 사치이며 사순절에의 자유스러운 육식과 수도승들의 노동의 의무감과 신성함, 교회 안에서의 성상숭배, 죽은 자에 대한 염려와 쉼에 관한 것들이다.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올바른 예배는 말씀과 성찬이지 외적인 치장이 아니며 연구와 명상과 기도에 전념하는 수도승도 일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수도사들이 일을 하지 않으면 게으름과 음란이 그것으로부터 온다고 보았다. 그리고 죽은 자는 편히 쉬게 하는 것이 교부들의 주장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금이나 은을 필요로 하지 않으시는 분으로서 풍성한 의식보다는 인간의 회개와 신앙을 요구하신다.

사순절 금식기간에도 신자들은 자유스럽게 고기를 먹을 수 있으며 그리스도나 성자들의 상을 교회 벽에 그림으로서 구체적인 예배의 대상을 삼는 것은 우상의 숭배라고 교부들은 말하고 있다.

빵과 포도주의 성찬예식 사용은 신성에 연합되는 것과 같으며 말씀이 선포되는 순간 떡과 포도주의 실체는 사라지고 살과 피로 변한다는 화체설은 근거가 없는 것임을 말하고 있다.

교부들 중에는 죄를 범한 자들을 엄격하게 성찬을 금하며 제외시킨 자들이 있는데 카톨릭 교회는 누구나 돈만 바치면 미사를 허용하고 믿음과 성례전의 교제 없이 그리스도의 은총과 공로를 팔아먹는 행위를 하고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결혼 생활은 합법적이며 순결한 것임에도 불구하고 성직자의 독신 생활을 강요하는 것은 역시 신앙의 경계를 넘은 것이라고 지적한다.

이러한 신앙과 생활에 대한 문제들은 성경으로부터 증거를 찾아 결정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과 상관없이 수많은 제도, 수많은 교회 법, 수많은 결정들을 정해 놓았으니 이 경계를 망각한 것"이라고 한다. 이는 성경의 우위성을 교회 위에 두는 것이며 성경의 전체 귄위는 교회의 판단에 전적으로 좌우됨을 거부하는 개혁적인 사상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으로부터 태생된다는 것이 개혁자들의 주장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말씀이 사색적인 신학 논쟁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경의 단순성과 성령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된다.


    6. 관습과 진리의 추구

 


카톨릭 교인들은 인간의 관습을 중시한다. 많은 사람들이 중시하는 관습은 법의 구속력을 가지게 되며 이에 근거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였다. 그러나 깔뱅은 관습을 사적인 악으로 표현한다. 그 이유로는 인간 자체에 대한 신뢰심의 결여이다. 하나님의 주권적 은혜에서 보여지는 인간의 전적 타락(Total Depravity)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인간의 판단이 과연 옳은가?라는 물음까지 제기한다. "인간의 판단이 올바르다면 선한 사람들의 관습이 추구되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흔히 그것과 전혀 다릅니다. .... 인간사를 볼 때 대다수의 사람들을 기쁘게 할만큼 좋은 관습들이 허용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하이델베르크 요리문답 문 91에 의하면 "선행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답으로 "우리자신의 의견이나 사람의 전통들에 근거해서 행해진 선행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율법을 따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참 믿음에서 우러나온 선행입니다"라고 되어있다. 진정한 선행은 참된 믿음과 하나님의 율법과의 일치, 올바른 동기가 전제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 이외의 것은 상대적인 선으로서 진정한 선이 아니다. 이런 면에서 사람들의 관습이나 전통에 의해 행해지는 모든 행위들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선을 행 할 수 없으며 전적으로 죄를 행하므로 모든 인간들은 구원에 합당한 선에서 무능력함을 보여 줄 뿐이다.

깔뱅이 이렇게 인간의 전적인 타락의 범위 안에서 상대적인 선을 주장하는 것은 영원한 진리의 추구가 시간적인 길이와 관습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이 참여하는 공동적 합의에 의해 이루어 질 수 없음을 분명히 한다. 영원한 진리가 되시는 하나님의 말씀에 기초한 믿음에 의해서만 선의 행함이 가능함을 역설하는 것이 된다. 이런 면에서 본다면 깔뱅에게 있어서 회개는 신앙의 열매라고 보는 것이 옳다.

진리는 관습이나 인간의 공모에 의하지 않는다. 다수의 힘이 악을 허용하기도 하고 면제하기도 하는 것이 인간사이다. 수많은 사람가운데 믿음으로 노아와 그의 가족이 구원을 받았다(창 7:1, 히 11:7). 사악한 관습은 마치 전염병과도 같다. 무지한 가운데 짓는 죄는 변명할 수 있으나 진리를 반대하는 것은 핑계할 구실이 없다.

 


    7. 참 교회와 거짓 교회

 


카톨릭의 교회관은 외형적으로 가시적인 제도인 로마교회와 성직자들을 말한다. 교회는 구원을 집행하는 하나님의 대리기관으로서 영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기관이다. 카톨릭 교회는 교회에 대해 신비라는 말을 사용한다. 여기에서 신비라 함은 "교회의 본질이 신적 기원이며 초월적이며 또한 구원의 도구라는 뜻"을 의미하는 것으로서 전 인류를 의미하는 만민의 빛(lumen gentium)을 말한다. 인간 이성으로 명확히 증명해 낼 수 없는 하나님이 인간과 함께 하는 비밀들을 설명해야하는 본질적 의미에서의 신비 그 자체이다.

개신교회는 교회를 하나님의 말씀을 순수하게 전하고 성례전을 올바르게 집행하는 곳으로 규정한다. 카톨릭교회의 교회관은 교회라는 건물과 그 속에 들어있는 사도직의 계승으로서의 성직 제도를 말하며 개신교는 만인 제사장직에 근거한 신앙 공동체(Gemeinde)를 말하고 있다. 하나님을 경배하고 예배하는 곳이 교회이다. 교회는 자신의 백성과 항상 함께 하신다는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 있다(마 28:20).

깔뱅은 구체적인 예로서 엘리야의 광야교회를 든다.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바알과 아세라의 선지자 850명을 물리친 후 이세벨을 피하여 호렙산 동굴에 혼자 있음을 고백할 때(왕상 19:10, 14)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7,000명이 있음을 알게 된다. 초대 교회 역시 핍박을 피해 외형을 가지지 못했으며 교회가 지속해오는 동안 전쟁과 폭동, 이단의 횡행 속에서 교회존재가 전혀 드러나지 못했으나 교회는 그리스도의 손으로 지속되며 그의 보호로 보전되며 그의 권능으로 안전하게 지켜 준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의 형태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1) 눈에 보이는 교회만이 교회가 아니다.

2) 교회를 로마교회와 성직자의 자리에 둘 수 없다.

3) 참된 교회는 순수한 하나님의 말씀의 선포와 올바른 성찬예식의 집행에 있다.

엘리야(왕상 19:10, 14)시대의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7000명이 교회이며 교회 안의 적그리스도를 피해 산이나 숲, 호수, 감옥, 계곡으로 간 사람들이 신앙의 공동체로서 교회라는 것이다.

4) 하나님이 교회의 견고한 터를 세우시고 인치시며(딤후 2:19) 통치하신다.

그의 진리를 순종하기를 거절하고 그의 빛을 져버리면 짙은 흑암 속에 떨어지게 함으로써 참 교회의 어떠한 외형도 더 이상 남아있지 못하게 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렇게 믿음이 없는 자는 벌하시고 참된 자녀는 맹렬히 타는 풀무불 꽃 가운데에서도 구원하신다(단 3장).

5) 권위를 상징하는 뿔 달린 주교관이나 홀장 등 허식으로 교회를 판단할 수 없다.

카톨릭교회는 사도의 직을 계승한다는 로마의 교황이나 그가 성별한 주교들은 자신들이 교회의 목자이며 하나님의 성별된 자들이라고 한다. 트렌트 공의회(1545-1563)를 통해  교회 개혁을 추진하면서 교회의 가시적 조직을 더 강조한다. "교회는 그리스도교 신앙을 고백하고, 같은 성사를 받으며 정당한 목자들 특히 교황의 지도 하에 모인 사람들의 단체"로 이해하고 있다. 깔뱅은 교회의 모습을 외형적인 단체나 모임 이라기 보다는 신앙적인 면으로 보면서 카톨릭 교회를 비판한다. 

구약의 예로서 아론과 그 아들들은 제사장으로 임명을 받았으나 금송아지를 만들어 오류를 범했으며(출 32:4) 아합왕을 속인 400명의 선지자들을 교회라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제사장, 서기관, 바리새교인들이 모여 공의회를 만들어 그리스도의 형 집행을 모의했다는 것이다. 교회사를 보면 바젤회의에서 유게니우스의 교황직을 사퇴시키고 아마데우스를 선출하였으나 왕후들의 후원과 지원으로 유게니우스가 재 선출된 것에 대해 합법성을 논하고 있다. 모든 교황들과 추기경들, 수도원장들, 사제들이 이렇게 정치적으로 선출되어 그 직무를 행할 때 교회로서의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있느냐는 질문이다. 

깔뱅은 그들의 말은 듣되 행위는 본받지 말아야 될 바리새인들이며(마 23:3) 그들이 있는 곳은 교회가 아니라 영혼을 죽이는 도살장이요 교회의 선동자요, 파멸자와 파괴자임을 지적하고 있다. 오늘의 카톨릭 신학은 개혁교회의 교회관의 결함을 그리스도론의 과소평가로 지적하고있다. 동시에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 신자들의 어머니라고 하면서도 외적인 보조 수단으로 이해하는 것이 문제라고 지적한다.

 


   8. 깔뱅의 국가관

 


깔뱅은 그의 기독교강요 4권 20장 "시민정치에 관하여"(On Civil Government)에서 "하나님께서 제정하신 두 개의 질서로서 교회와 국가의 관계"를 논한다. 그리스도의 영적 왕국과 국가정치는 매우 상반된 것이나 국가정치는 마치 인간의 삶에 필요한 빵이나 물, 빛, 공기 이상으로 중요하다고 본다. 정치가 하나님의 이름에 반역하여 우상을 세우는 것은 결코 허용할 수 없다고 본다.

국가는 인간의 공동체적 삶을 유지하는데 필요하며 도덕적 질서를 확립하고 기독교의 공적 형태를 보호함으로써 최대의 기여를 한다. 교회는 국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의 호의와 지원에 의존할 수 있어야 한다.  

정치가 종교를 박해한 전형적 형태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이다. 유대교의 종교와 빌라도로 대표되는 로마의 법이 결탁하여 종교인을 대표하는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이다. 정치는 표면상 승리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참패당했다. 그리스도의 죽음 그 자체가 인류의 죄를 대속하는 유일한 사건이 되었기 때문이다. 정치는 종교를 정복할 수 없다. 정치자체를 자신이 구원할 수도 없다.

종교 역시 정치와 무관할 수 없다. 교부들의 변증서나 신앙고백을 보면 그 시대의 현실적인 정치문제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을 보게 된다. 종교 없이는 정치에 구원이 없다. 정치와의 현실적 절충이 없이는 종교에 현실성을 줄 수가 없다. 정치를 정치의 원리에만 맡겨 둘 수 없다. 세계의 불행과 참화를 우리는  제 1차, 2차 세계대전을 통하여 통감한 바 있다.

세계사는 신정정치를 대표하는 헤브라이즘과 그리스 도시국가를 가능케 한 헬레니즘의 교차의 흐름으로 되어 있다. 전자는 인간의 수중에서 실패와 비극의 연속이었으며 후자는 의무는 있어도 자유가 명확하지 않다. 종교개혁자들은 그들의 신앙문서에서 교회와 국가를 상호 병존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루터의 이신칭의(sola fide)는 개인적이며 내면적, 신비적 특색을 갖는데 반하여 칼빈은 "오직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을 주창함으로써 칭의의 내면성뿐 아니라 성화와 윤리의 외면성을 강조하고 신앙 공동체의 사회적이며 외면적 그리고 합리적인 면을 강조하고 있다. 루터에게는 그의 인격의 위대함과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중세적 분위기가 남아있었다. 그래서 그는 농민전쟁이 있었을 때 영주와 지주를 지지하였다. 이와 다르게 깔뱅의 직업윤리는 산업자본주의의 발전을 가져오는 유형이 되었다.

깔뱅의 "하나님께 영광"이라는 말은 창조주이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전 세계가 하나님의 활동무대라는 말이다. 동시에 칭의는 그리스도인과 그 사회의 성화에 기독교윤리의 실천 조항이 됨을 말하고 있다. 깔뱅의 특색은 종교적 진리를 내면성을 넘어서는 정치적 현실로 본 것이다.

깔뱅은 이것을 16세기에 제네바에서 시도하였다. "정치적인  하나님 예배"를 교의나 신학에 머물지 않고 정치와 사회적 실천으로 연결하였다. 이것은 정치적 자유와 기독교적 민주주의에 영향을 주어 화란과 스코트랜드 그리고 미국의 독립에 이르기까지 정치적 민주혁명을 가능케 하였다.

교회와 국가는 독립된 기능과 기관을 갖고 그러면서도 상응하여 천지의 주되신 하나님의 통치의지를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칼빈은 기독교강요 서문에서 프랑스의 국왕 프란시스 1세에게 헌사하기를 "하나님의 영광이 정치의 목적이 되지 않는 곳에는 올바른 통치가 없다"라고 까지 역설한다.

그의 정치론은 1) 그리스도의 영의 왕국과 국가정치가 상호 관련 속에 있다 2) 지배자의 기능과 법, 지배자에의 복종에 관해 논한다. 그는 신구약 성경을 통일된 권위로 받아들여 그의 이론을 정립한다. 그의 이론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세계의 모든 지역은 신의 주권 하에 있다. 신의 주권은 어떤 독재적인 왕이라도 통치하고 계신다. 신의 통치는 교회와 정치에까지 미치고 있다.

 


   9. 개혁교리의 신실성

 


교회 속에 소란과 폭동과 논쟁이 일어나는 것은 사탄의 계략에 의한 것이다. 사탄은 평안히 쉬면서 게으름과 안일과 방탕 속에 지내다가 교회를 향락 속에 잠들게 한다. 여기에서 거짓 사도들(고전 1: 10, 고후 11:3, 갈 1:6)이 나온다.

사탄이 진리를 공격하는 방법은 두 가지이다.

1) 폭력을 사용하여 참된 씨앗인 진리를 제거하려는 것이다. 위로부터 밝은 빛을 비취어 사탄의 흑암을 몰아내고 강한 자가 일어나(눅 11:22) 그의 왕국을 공격하자 그때서야 비로소 오랜 동안의 졸음에서 깨어나 싸우려고 무기를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2) 가라지를 뿌려서 기운을 막아 성장과 결실을 못하도록 한다. 사탄이 폭력의 방법을 사용하다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자 바꾼 새로운 전략으로서 분쟁과 교리적인 논쟁을 일으켜 진리를 모호하게 하다가 소멸시키려는 장기적인 전술이다.

전자는 카톨릭교회 자체이며 후자는 재 침례주의 자들(Ana-, Catabaptist)과 악한 자들이다. 이들의 공통점은 사람들을 선동하여 폭력과 논쟁과 의견의 불일치를 가져오게 하며 악의를 품고 투기와 분쟁을 일삼게 한다. 여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주님께 귀를 기울이는 것이다. 주님은 사탄의 간계를 드러내 주셨으며 모든 계략에 대비하여 완전 무장하도록 방어력을 주셨기 때문이다.

악한 자들과 반란분자들이 일으키는 폭동이나 분파적인 행동을 하나님의 말씀의 탓으로 돌리는 것은 사악한 일이다. 구체적인 예로서 엘리야는 이스라엘을 괴롭게 하는 자라는 문책을 당했으며(왕상 18:17) 그리스도는 유대인에게 선동가였으며(눅 23:5, 요 19:7) 사도들은 백성을 충동시킨 죄로 고발을 당했다(행 24:5). 이러한 예들을 통해 볼 때 소란과 폭동을 일으키고 오류를 전하고 논쟁을 일삼는 자들은 하나님의 권위에 대항하는 사탄적인 일을 하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때에 혼란에 빠지는 사람들도 있다.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다. 복음 진리에 중립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억지로 풀다가 멸망을 자초하였으며(벧후 3:16) 은혜를 더하기 위해 죄를 짓는 자들이며(롬 6:1) 교회를 파괴하려는 거짓 선지자들이다(고전 1:10, 고후 11:3, 갈 1:6). 이들은 진리의 복음을 전할 때 착한 뜻으로 하지 아니하고 악의를 품고 투기와 분쟁으로 복음을 전한다(빌 1:15, 17).  이는 성령의 자유를 육신의 방종으로 격하시키는 일이다(벧후 2:18-19).

경건한 성도들을 이렇게 유혹하며 위험에 빠트리고 형제들 사이에 논쟁이 일어나게 할 때 어떻게 해야 할까? 외부적인 일들에 대해 모르는 체 하거나 진리의 말씀을 포기하거나 외면하는 것은 신앙적인 일이 아니며 이런 종류의 환란과 핍박 속에서 견뎌온 사도들의 신앙과 행위를 본 받아야 한다. 승리의 확신을 가져야 함을 역설하고 있다. 바울이 전한 복음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사망으로 쫓아 사망에 이르는 냄새(고후 2:15)이지만 믿는 자들에게는  생명으로 생명에 이르는 냄새(고후 2:16)이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롬 1:16)이다. 이러한 표증이 신실한 자에게 힘이요 구원의 보증이다.

 


    10. 하나님의 변호

 


깔뱅의 기독교강요가 변증서임을 확실하게 해주는 표현은 "왕이여, 거짓 고소를 조심하소서!"라는 이 한마디의 표현으로 족하다. 여기에서 그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해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라 화평의 하나님(고전 14:33)임을 먼저 든다. 동시에 그분은 마귀의 일을 멸하게 하시려고 아들을 보내셨으며(요일 3:8) 죄를 짓게 하는 자가 아니심(갈 2:17)을 말한다.

새 복음을 가진 개신교도들이 선동적인 발언을 하며 세상 왕국들을 전복하려 하고 음모를 꿈꾸고 있다고 하지만 이것은 전혀 사실무근이며 그러므로 무죄한 자는 하나님의 변호를 기다릴 뿐이라고 한다. 신앙을 쫓아 사는 죄 없는 자는 하나님의 뜻을 기다리면서 고국을 떠난 망명 중에서도 프란시스 왕을 위해 기도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신앙적인 생활에 있어서 순결과 관용, 긍휼과 절제, 인내와 겸손, 그 이외의 덕행들을 가지고 개신교도들은 사나 죽으나 주님의 이름을 거룩하게 하며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고 예배하는 것은 명백한 사실(빌 1:20)이라고 자신들을 변호하고있다.

선량한 시민으로서 복음을 위해 죽임을 당하는 상황들을 왕에게 전하면서 깔뱅은 법과질서의 회복을 강하게 요구한다. 동시에 왕의 개신교도들을 향한 편견의 수정과 만왕의 왕되신 주의 의로(잠 25:5)다스림을 간곡히 기원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왕의 사건진상의 파악과 호의가 주어지지 않을 때에는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양같이(사 53:7-8; 행 8:33) 궁지에 몰리며 인내로 주의 강하신 손을 기다린다고 한다. 주의 강하신 손은 가난한 자들을 고통에서 건져 주시며 대적 자들을 벌하시기 위해 무장으로 나타나심을 시사하고 있다. 왕의 보좌는 의로(잠 25:5) 왕권은 공명으로 굳게 세워질 것을 기원한다.     

 


    결 언

 


지금까지 살펴 본 바대로 깔뱅의 기독교강요는 개신교 인들의 복음적 신앙을 체계화시킨 교리이면서 동시에 "갓 태어난, 새로운, 변질된 신앙"으로 오해를 받고있는 개신교 신앙의 내용을 당시의 카톨릭 사회에 보여준 변증서이다. 이 책을 통해 깔뱅은 한편으로는 카톨릭 교도들로부터 이단자와 난동자로 오해를 받고있는 개신교도들을 변호하고 있으며 다른 한편으로는 카톨릭 교회가 갖고 있는 신앙의 내용을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변호와 비판의 기준은 물론 복음의 기초가 되는 성경이다.

깔뱅이 이렇게 당시의 절대 권력의 기초가 되는 카톨릭교회를 비판하고 나설 수 있었던 것은 인문주의적 사상에 의한 것이라고 보여진다. 보다 새로운 인간다움을 추구하면서 새 시대의 인간상을 실현하려던 고전의 연구는 그 시대의 지성인들에게 교회중심적 세계관을 거부하게 하는 동인이 되었다. 여기에서 고전중의 고전으로 간주되던 성경의 자유스러운 연구는 성경을 접하는 사람들로 하여금 틀에 박힌 제도적 외면 신앙이 아니라 성령의 조명에 의한 개인의 신앙 고백적인 내면 신앙으로 전환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카톨릭 교회는 이러한 개인 신앙운동을 이단으로 규정하고 심지어 국가를 전복시키려는 음모로 까지 몰고 가서 국가의 공인아래 종교재판(Inquisition)을 실시했으며 그로 인해 수많은 사람들이 투옥, 추방, 재산몰수, 화형, 방화, 협박을 당하였다. 이 모두는 하나님의 이름으로 행해졌다는 데 문제가 있다.

깔뱅이 기독교강요를 쓴 때는 이러한 탄압이 절정에 이른 1530년대 중반이다.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적 박해를 피해 피신을 하고 있었으며 깔뱅 역시 제네바에 와서 이러한 소식들을 종교망명자들을 통해 듣고 있었다.

프란시스 1세에게 보내는 헌사를 통해 그가 말하는 것은 국가의 통치는 하나님께 봉사하는 것이므로 종교재판과 개신교의 탄압으로 인해 자행되는 모든 행위들을 공정하게 조사해서 판결해 달라는 것이었다. 구체적으로는 자신의 조국 프랑스에서 프란시스 1세에 의한 정치를 통해 과연 하나님의 영광이 보존되며 진리가 수호되며 하나님의 나라가 유지되고 있는가 구체적으로 묻고 있다.

깔뱅은 당시 카톨릭 교회가 신봉하고있는 교회의 제도와 교리들을 열거하면서 개신교의 복음주의적 교리와 차별화를 시킨다. 지금까지 구원을 이루는 길이라고 믿던 면죄부, 고백성사, 적선행위, 인간의 공로 등이다. 동시에 교회의 절대 권위를 유지시키기 위한 신비스러운 미사와 성자숭배, 마리아 숭배, 교황숭배 등이다. 이것들은 하나님의 영광보다 사람의 영광을 구하려는 적그리스도적인 사탄의 유혹이며 복음을 파괴하려는 행위라고 까지 심하게 비판하고 있다.

성경은 신앙과 생활에 있어서 규범과 근거가 되어야 하며 성경을 근거로 하여 교회가 태생됨을 말하고 있다. 성경의 권위가 교회에 의해 판단되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를 통해 성경의 단순성과 성령의 역사를 재조명하며 성경의 권위를 회복하는 것이 된다.

교회는 구원을 집행하는 하나님의 대리기관으로서 영적으로 세상을 지배하는 곳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수수하게 전하고 성례전이 집행되는 곳이다. 사도직 계승으로서의 성직제도가 아닌 만인 제사장직에 근거한 신앙공동체를 말한다.

깔뱅의 교리 체계를 대변하는 "하나님께 영광(soli Deo gloria)의 신학"은 종교적 내면성을 넘어서서 전 세계가 하나님의 활동무대임을 시사하는 "하나님의 선교"를 가능케 하는 말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카톨릭교회가 믿고 신봉하던 교회안의 영적인 하나님을 우주와 역사의 주관자로 모시며 사회의 모든 분야에서 오직 하나님께 영광을 드리기 위해 사는 신앙적 결단을 프란시스 왕에게 요구하고 있다. 이런 면에서 깔뱅의 기독교강요는 오늘을 살고있는 이 시대의 변증서이며 동시에 복음주의적 신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는 개신교의 교리서이기도 하다.

 


참조: 하나님의 선교는 지금까지의 선교의 틀의 변화를 갖는다. 선교의 위대한 시기를 기점으로 시작된 선교는 1950년까지 교회의 확장과 발전이 곧 하나님의 나라 실현이라는 목표를 가지고 되어왔다. 1952년 윌링엔 국제 선교대회에서 선교의 주체는 교회와 인간이 아니라 하나님이라는 "하나님의 선교"(고후 5:20)를 말하게 되었다. 교회적 선교론이 선교적 교회론으로 바뀐 것이다.

하나님의 선교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의 특징을 갖는다.

1) 선교의 주체는 교회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이는 하나님은 그의 사역을 교회 밖의 세계를 통해서도 역사 하심을 믿는 것이다. 선교의 구조가 하나님-교회-세계에서 하나님-세계-교회로 된다.

2) 선교의 대상이 교회와 그리스도인 만이 아니라 피조물 전체를 포함한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은 만물을 구원하시는 일이시다. 인간 뿐 아니라 모든 세력과 사회구조, 세계의 모든 종교인들을 포함한다. 그리스도를 통해 보여지신 하나님은 만물의 창조주로서 하나님의 구속의 완성은 개인의 영혼만이 아니라 인간의 모든 생활, 사회, 사상, 종교 등 전체의 구원을 말한다.

3) 하나님의 뜻은 역사의 발전 과정에서 현실의 한 복판에서 찾아야 한다. 하나님이 역사의 주인이시며 역사적 사건을 통해 일하시는 분이시며 메시야적 샬롬을 세우시는 분이시다. 교회는 세계와 역사를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한다. 하나님은 파사의 고레스를 통해 말씀하시고 이스라엘을 해방시키셨다(사 45:1-3).

하나님의 선교에서 보여지는 교회는 자신을 위해 있는 것이 아니라 타자를 위한 신앙공동체라고 함이 옳다. 교회는 먼저 한 인간의 내면적인 회개와 구원을 말하며 눌린 자, 가난한 자, 포로된 자의 해방과 회복을 중시하며 하나님의 선교의 한 부분으로서 봉사하기 위해 있다. 특권적인 선택보다 인간화(Humanization)가 있는 헌신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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