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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세계관의 패러다임

논문신학성경 예수생명............... 조회 수 2412 추천 수 0 2010.05.31 11:3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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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기독교 세계관의 패러다임

서론 - 패러다임(Paradigm)이란 무엇인가?

근래에 들어서 패러다임(Paradigm)이란 말이 자주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된다. 특히 패러다임의 변화(Paradigm Shift)에 대한 논의가 많이 되고 있다. 그렇다면 패러다임이란 무엇인가? 패러다임이란 어떤 집단이 공유하고 있는 사고의 틀로서, 그 집단의 구성원들은 그것에 대해서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경우가 많다. 사람들은 자기가 어떤 패러다임에 근거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리고 그 패러다임에 의해서 자기 생각을 구성해 나가게 마련이다. 그러다가 자신의 패러다임과 다른 그것을 만나게 되면 상당히 당황하게 마련이다. 자기가 살던 문화권을 떠나 다른 문화에 들어가게 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문화충격(Culture Shock)"을 느끼게 된다. 자기가 살던 곳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사고하고, 행동하는 사람들을 만날 때, 그 사람들을 이상하게 보고, 비정상적이라고 느끼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그곳에 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그 이방인이야말로 비정상적인 것일 뿐이다. 이러한 형태는 근래에 들어서 "미래충격(Future Shock)"이라는 것으로도 나타난다. 세상이 급변함으로 인해, 사람들은 자기가 어릴 때 당연한 것으로 여기던 것(Paradigm)이 나이가 든 후에는 당연한 것이 되지 않는 것을 보고 충격을 받게 되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하면, 패러다임이란 곧 세계관을 말하는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할 수 있다. 사실 우리는 세계관과 패러다임을 구별하기 힘들다. 그러나, 이를 구별할 수는 있다. 패러다임은 세계관 안에 포함되어 있지만, 패러다임이란 말이 세계관을 다 포괄할 수는 없는 것으로 보인다. 또, 어떤 경우에는 다른 세계관이지만, 패러다임은 같은 것을 사용하는 경우가 있다. 이슬람교, 유대교, 기독교는 모두 같은, 적어도 비슷한 패러다임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슬람교의 세계관과 기독교의 세계관이 같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또, 같은 기독교인이면서도, 성경의 진리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면서도, 다른 패러다임을 사용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그래서 같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섬기면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으면서도, 다른 패러다임을 사용하여 자기 세계관을 설명하기 때문에 생기는 혼란이 있을 수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이렇게 같은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인정되면서도 서로 다른 틀을 가지고 세상을 설명하는 것들을 살펴보려고 한다.

1. 창조-타락-구속

가장 많은 지지를 받고 있는 기독교 세계관의 패러다임이 바로 창조-타락-구속이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선하고 아름답게 창조하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은 정말 "살만한" 곳이다. 그러나, 인간의 범죄로 인하여 이 아름다운 세상이 타락하였고, 결국 고통과 괴로움이 세상에 존재하게 된다. 이 문제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해결해 주셨고, 그 십자가의 공로를 믿는 자들은 구속을 받아 처음 창조의 혜택을 지금과 미래에 누리며 살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패러다임을 채택한 사람이라면 자기의 주변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을 이 틀에 관련시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노동"의 문제를 생각해 보자. 원래 사람은 노동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러나 창조의 노동은 결코 고통이 아니었고, 기쁨이요, 의미였다. 그러므로 내가 노동하고 있다는 것, 그것은 기쁨이며, 하나님께서 내게 일할 장소와, 기회와, 능력을 주셨다는 사실이 축복이라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노동 가운데서 기쁨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는 내 선조와 내가 죄로 타락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일하기 싫은 마음이 들고, 힘든 것은 결국 죄의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노동현장에서 벌어지는 모든 불합리와 고통은 다 죄의 결과이며, 이는 이 세상에 사는 모든 사람들이 그 타락으로 인하여 감수할 수밖에 없는 짐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구속받은 사람들은 미래에 이 노동의 고통으로부터 해방되어 진정한 기쁨의 노동을 할 때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또한 그것은 미래의 일일 뿐 아니라 현재에도 그 영향력을 끼치게 될 것이다. 적극적으로는, 구속받은 사람들은 노동의 고통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해결해 나가며, 또한 극복해 나가는 힘을 얻게 된다.
노동을 예로 들어 설명했지만, 다른 모든 영역의 것도 이 틀에서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의 모든 것이 이 틀에 입각해서 정립된다. 개인의 삶, 즉 태어나서 자라고 결혼하고 노동하는 모든 삶에서부터 시작하여 사회적 관계 역시 이 틀을 사용한다. 물론 패러다임이 같다는 것이 같은 의견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패러다임이 같다고 하더라도, 다른 의견이 존재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이는 정치는 원래 선하게 창조되었으므로 이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그 타락한 부분들을 변혁함으로써 선하게 사용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다른 이는 정치 자체가 타락의 결과물이라고 주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떤 이는 돈은 원래 선한 것이므로 그것을 타락한 영으로 사용하지 않고 구속된 마음으로 사용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보는가 하면, 어떤 사람은 돈이란 것 자체가 타락한 인간의 영이 발명해낸 것이라고 주장할지도 모른다. 이들은 그 의견을 달리하고 있지만, 분명 같은 패러다임에 근거해서 논의를 전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창조-타락-구속의 패러다임은 근래 기독교 세계관 운동의 기본적 패러다임으로 자리잡아 왔다.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하면 이 패러다임을 떠올릴 정도가 된 것이다. 특히 이 패러다임은 기독교 역사관에 근거하고 있는 것으로, 세계를 통시적인 시각으로 보는 것이다. 미들톤-왈쉬의 "그리스도인의 비전" 알버트 월터스의 "창조, 타락, 구속" 등의 기독교 세계관 서적들이 이 패러다임을 반영한다. 그리고 이 패러다임은 개혁주의적 입장의 대표적인 틀이라고 할 수도 있다.

2. 구조-방향

창조-타락-구속 패러다임에 근거한 것이면서도 약간의 충돌이 불가피한 패러다임으로 구조-방향의 패러다임이 있다. 창조-타락-구속 패러다임이 통시적인 시각이라면, 구조-방향은 공시적인 시각이라고 할 수 있다. 구조-방향 패러다임에서는, 하나님의 창조가 타락하였다는 것은 창조의 구조는 변화되지 않았으되 그 방향이 바뀌었다고 보는 시각이다. 곧 칼이 주부의 손에 들렸을 때에는 맛있는 음식을 만드는 데에 사용되지만, 강도의 손에 들렸을 때에는 범죄에 사용된다고 하는 것과 같은 개념이다. 하나님의 창조는 타락한 후에도 그 "구조"는 변화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다만 같은 구조가 다른 방향으로 사용됨으로 인하여 잘못된 형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구조-방향 패러다임은 나름대로 설득력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불가피하게 반대에 직면하게 된다. 구조-방향 패러다임에 의하면 우리가 세상을 보는 눈이 상당히 낙관적인 것이 된다. 여하튼 구조는 변화하지 않았다. 그러므로 우리가 취하고 있는 것은 모두 선하다. 다만 우리가 선한 것을 악하게 쓰지 않으면 된다. 이는 옳은 것으로 여겨지면서도, 사람들로 하여금 타락의 심각성에 대해서 각성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는 경고를 받는 패러다임이다. 물론 우리는 그 방향의 전환, 곧 타락이 얼마나 심각하게 이 세상에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가 하는 것을 잊지 않음으로써 이 패러다임을 창조적으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구조-방향 패러다임 역시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와 세계에 대해 적절한 해석을 제공해주는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이다.

3. 역설

위에서 설명한 패러다임 외에 다른 독특한 패러다임이 존재한다. 여기서는 편의상 이를 "역설" 패러다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다른 사람들은 이를 뭐라고 부르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이 패러다임은 Karl Barth 등의 신학에서 사용되고 있는 실존주의적 시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다. 구조-방향 패러다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 있지만, 같지는 않다. 타락이란 상태는 하나님의 창조라는 아름다움과 타락이라는 절망이 공존하고 있는 상태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는 간단하게 이해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세상의 모든 것은 하나님의 창조이기 때문에 선하고 아름다운 것이다. 그러나 타락이란 이 세상의 전적인 부패를 말하는 것으로서, 이 세상에는 전혀 선한 것이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창조이기 때문에 선한 것이 아닌가? 그것 역시 맞는 말이다. 그러므로, 이 세상은 완전히 선하면서도 또한 전혀 선하지 않다. 이는 구조-방향 패러다임의 보완이라고 볼 수 있으면서도, 구조-방향 패러다임과 심각한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패러다임이다.
구조-방향 패러다임에서는 이 세상은 여하튼 본질적으로 선하다. 그러므로 우리가 누리고 있는 것은 본질적으로 선하므로, 그것을 바른 방향으로 사용하면 된다. 그러나, 이 역설의 패러다임에서는 결코 이 세상은 선하지 않다. 그러면서도 또 선하다. 역설 패러다임에서는 이 타락의 문제를 매우 심각하게 보며, 구조-방향 패러다임의 "구조" 역시 타락했다고 본다. 정치, 돈 등의 것은 본질적으로 타락의 현상이다. 그러면서도 이는 창조에 기틀을 두고 있기에 선하다. 그렇다면, 정치는 타락의 산물이므로 정치란 것이 없어지게 해야 하는가? 그러나 그렇게는 안 된다. 정치는 선할 수도 있는 것이다. 여하튼 우리는 정치라는 것의 영향력을 받으면서 살게 된다.
눈치챈 사람도 있겠지만, 역설 패러다임의 가장 큰 약점은 어떤 실천적인 방향을 제시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럼 우리는 어떻게 살란 말인가?"에 대해서 답을 주지 못한다. 우리는 그저 타락한 세상에서 참으면서 살아야 하는 것일 뿐이다. 아무리 실천적인 행동을 찾으려 해도, 이러한 패러다임을 고수하는 이상, 명확한 비전을 제시하거나, 자기의 삶을 체계적으로 꾸려나가기에는 부적합하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구조-방향 패러다임의 약점인 타락의 심각성을 간과하는 것에 대한 경고로서 역할할 수 있는 것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시각을 만날 수 있는 저자로서는 쟈크 엘룰이 있다.

4. 반정립

창조-타락-구속이나 구조-방향, 역설 패러다임 등은 존재론적인 시각을 바탕으로 한 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비해, 이는 무엇이 옳고 그른가의 판단 근거를 마련해주는 패러다임이라고 할 수 있다. 기독교 세계관에서는 반정립과 변증법의 논쟁이 존재해 왔다. 반정립이란 "A가 아닌 것은 A일 수 없다"는 단순한 개념을 바탕으로 하는 것이다. 산상수훈의 내용처럼, Yes는 Yes라고 하고, No는 No라고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예를 들어서 "돈은 선하다"라는 언급이 있다고 하자. 이는 옳거나 그르거나 둘 중의 하나이지, 옳기도 하면서 그르기도 한다는 언급은 옳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반정립의 패러다임 내에서는 돈은 선하다, 그렇지 않다의 논쟁은 있을 수 있어도, 옳으면서 그르다는 식의 언급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이다.
반정립의 틀은 상당히 우리의 삶에 대한 명확한 시각을 제공한다. 무엇이 옳고 그른가에 대해서 논쟁의 여지가 있다고 하더라도, 옳고 그르다는 판단이 서게 되면 우리가 어떻게 살 것인가에 대한 명쾌한 답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반정립은 "흑백논리"라는 비난을 받을 수도 있다. 그리고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그 논의가 발전되기보다는 같은 루틴을 계속 돌게 된다. 그럼으로 인해 동의를 이끌어내기보다 다른 분파의 대립을 이끄는 틀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또, 과연 반정립적인 시각이 언제나 성경적인 것인가의 질문에도 분명히 그렇다는 답을 내리기 힘들 때도 있다. 반정립을 주장하는 대표적인 저자는 프란시스 쉐퍼라고 할 수 있다.

5. 변증법

우리는 단순히 생각하면, 옳고 그른 것을 생각함에 있어서 반정립 외에 또 다른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되지만, 변증법적인 판단의 틀을 사용하면 반정립의 틀과는 전혀 다른 결과를 얻게 된다. 변증법적 시각을 사용하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에 대해서 명확한 답을 내린다는 것이 힘들어지게 된다. 어떠한 명제가 있으면 그 명제에 대한 반대가 있고, 그 두 명제의 합이 존재하게 되는데, 이것이 계속 정, 반, 합의 발전을 이루어 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무엇이 옳고 그른가가 명확해지지 않는다. 옳고 그른 것을 따지기 전에, 그 사고의 발전을 이루려는 사고의 틀인 것이다.
신학적으로 보면, 영-미 계통에서는 반정립의 틀이 받아들여지고 있고, 유럽 대륙에서는 변증법의 틀이 상당히 설득력 있게 등장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된다(쟈크 엘룰은 프랑스 사람이었고, 바르트는 독일 사람이었다). 변증법적 틀은 주로 실존주의적인 입장에서 많이 사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역시 변증법은 역설에 근거하고 있는 것이므로 분명한 실천적인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틀이라는 비판을 면할 수 없을 것이다. 물론 변증법이나 역설 패러다임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그 "실천적 대안"을 찾는 것 자체에 대해서 비판을 가할 것이지만 말이다.

지금까지 기독교 세계관 내에서 사용되고 있는 몇 가지 패러다임을 살펴보았다. 아무래도 그 기본은 창조-타락-구속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기본적 입장은 창조-타락-구속과 반정립에 근거한 입장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 입장은 이런 것이라고 해도, 다른 패러다임에 대해서 무조건 배타적인 입장을 보이는 것은 현명한 일은 아니다. 다만, 우리가 여러 서적을 읽을 때에 그 패러다임이 어디에 기초되어 있는가를 파악하는 것이 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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