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뽈 게레스의 기도문
(Paul Geres)
1.
주님, 오늘 아침 자리에서 일어날 때, 여느 날과 다름없는 하루가 되겠지 하고 스스로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어요.
여느 날처럼 늘 타던 같은 지하철을 탔고, 하나도 달라지지 않은 국제 사회 정세에 대한 비평기사를 신문에서 읽었습니다.
늘 밟고 오르던 같은 계단을 밟고 올라가서, 제 책상 위에 쌓여 있는 신문들, 지난 십년 동안 늘 그렇고 그랬던 신문들을 훑어보았지요.
짐꾼도 같은 짐꾼이었고 관리인도 같은 관리인이었습니다. 항상 보여주던 무심한 표정으로, 오늘도 별로 색다른 일이 일어나지 않으리라고 말하더군요.
점심 시간에는 늘 먹던 같은 밥을 먹었습니다. 오늘은 월요일이었어요. 오후 5시까지 자리를 지켰고, 퇴근하여 집으로 돌아오면서 내일도 같은 일이 반복되리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모든 것이 참 지겹네요.
뭔가 아주 다른 것을 저는 희망했지요. 활기에 차서 흥분되는 삶을 살아갈 어느 날을 꿈꾸었습니다. 그런데 그건 그야말로 꿈이었어요. 그래도, 그 꿈에서 깨어나는 것이 저에겐 아픔입니다.
저는 무슨 짓을 해도 그냥 저일 뿐이에요. 압니다. 다른 사람이 저라면 행복할 수 있을 겁니다. 예, 그건 그래요. 하지만, 그 사실이 저의 지루함과 고단함을 덜어주지는 못하지요.
주님, 이 밤에는 저의 고단함에 대하여, 여기서 벗어나고 싶은 욕망에 대하여, 당신께 말씀드려야겠습니다. 당신말고 누구한테 이런 말을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도 이해 못합니다. 사람들은 말하지요. "도대체 뭘 그리 불평하는 거야?" 어쩌면 그들이 옳을 것입니다. 사람이 직장에서 자기 맡은 일을 하는 것이야말로 정상이니까요.
그래서 이렇게 당신한테만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아무것도 바꾸지 마십시오. 제 인생도 굳이 바꾸실 것 없습니다. 바뀌어야 하는 것은 바로 저예요.
주님, 자신에 대하여 생각을 덜 하도록 저를 도와 주십시오. 저처럼 날마다 그 날이 그 날인 사람들이 제 곁에 있음을 볼 수 있도록,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2.
주님 방금 금전출납부 정리를 마쳤습니다. 이제 저는 고요함과 평화를 얻고자 당신께 돌아가야겠습니다. 그리고 위엄도 회복해야겠지요. 지난 이십여년, "목표 달성"을 위해서 노심초사하느라고 썩혀두었던 인간의 존엄 말입니다.
다음달 생계비 걱정에 빼앗겼던 평화와, 적은 수입마저 끊기어 동전 한 닢 남지 않았을 때 잃었던 고요함을 이제는 되찾아야겠어요.
제가 두려운 것은, 주님, 궁핍 그 자체가 아닙니다. 목숨이야 어떻게든 살아남을 테니까요.
진짜로 무서운 것은 좌천과 실직이에요. 동전 한 잎 없어서 그래서 돈 말고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게 될까봐 그게 두렵습니다. 어차피 수입 많은 친구들하고 저를 견주어 볼 터인 즉, 그것이 겁납니다. 하루에도 수 십 번, 백화점 계산대나 진열장 앞에 설 때마다 그러고 있거든요.
주님, 남들을 질투하게 될까봐 그것이 겁납니다. 경멸하는 말투로 "그자들은 운이 좋았을 뿐이야......" 하면서 속으로 이를 갈지 않을까, 그게 두렵단 말씀입니다. 그리고, 뭐니뭐니해도, 주님, 저는 제가 얼마나 탐욕스러운지를 잘 압니다.
그래서 이렇게, 인간의 위엄을 지킬 수 있도록 저에게 은총을 베풀어 달라고, 주님, 당신께 시방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3.
주님, 오늘 밤은 제대로 되는 일이 하나도 없네요. 제가 이 일을 해낼 수 있다고는 물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저 어떻게든 피해야겠다고 생각했지요. 그런데 아닌 겁니다!
지금 저는 정말이지 모두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입니다. 어차피 닥쳐야 할 것들이라면 차라리 포기하겠어요. 그래도 제가 할 만큼 했다는 사실을 주님은 아실 테니까요.
무엇보다도 저를 맥빠지게 하는 것은, 저 자신에 대하여 꽤 괜찮은 인간이라고 생각해 온 습관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주님, 저를 지금 가장 괴롭히는 것은 상처 입은 제 자존심입니다.
주님, 그게 좋지 않은 일임은 저도 알아요. 하지만, 이리 저리 변죽 울릴 것 없이 곧장 그것을 당신께 돌려드리겠습니다. 비록 저의 뉘우침이 순수하지 못해도, 그래도 저는 제가 지은 죄를 뉘우칩니다.
무엇보다도 저 자신을 가장 크게 뉘우칩니다. 저는 제 자아가 변화되었다고 생각했어요. 밤마다 자기 영혼을 방문하여 그것이 제대로 있음을 확인하고 즐거워했다는 세네카처럼, 제가 저 자신을 자랑스러워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주님, 저는 당신보다 저 자신을 더 많이 사랑했고, 당신보다 저 자신을 앞세웠습니다. 용서해주십시오.
제가 지은 죄를 뒤로 돌려 끌고 다니는 대신, 당당히 지고 다니는 법을 가르쳐주세요. 당신 앞에 죄인인 저 자신을 용감하게 받아들이고, 그것에 대하여 어린애처럼 앵돌아지지 않도록 도와주십시오.
저를 용서해주십시오. 제 죄를 용서해주십시오. 그리고 도한, 제 상처 입은 자존심도 용서해주십시오.
주님, 제가 다른 사람들과 하나도 다를 것 없는 인간임을 깨닫게 해 주셔서 정말 고맙습니다.
<뽈 게레스는 프랑스 한 산업도시 교구 사제였던 신부의 필명이다. 이 기도문은 '불가능한 날들의 기도'에서 가져왔다.>
월간 <풍경소리 제92권>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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