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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빌2:5~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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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신동현 간사 |
참고 : | 새길교회 2010.1.31 주일설교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아바타와 아이티, 그리고 구원신화
[빌립보서 2 : 5 ~ 12]
신동현 간사
1. ‘수면교육’과 ‘공갈’ 젖꼭지: 욕망의 표출과 조절
새길교회 간사로 있던 작년, 제게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습니다. 바로 저희 가정에 아기가 태어났던 것입니다. 결혼한 지 5년 만의 일이었습니다. 저도 아내도 각자가 목표한 일들을 해나가느라 바빠서, 아기를 갖는다는 생각을 가져볼 겨를이 없었습니다. 계획도 없었던 아기가 생기게 되니, 뜻하지 않은 일이라 한편으론 놀랍기 그지없었습니다. 그러나 아기를 가졌다는 아내의 말을 들었을 때의 그 기쁨, 그리고 분만실에서 아내의 산고를 함께 겪으며 갓 태어난 아기를 보았을 때의 그 감격은, 정말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작년 말 저는 간사직을 마치고 난 후, 한 달 동안 집에서 아기를 돌보며 보냈습니다. 아직 백일도 채 되지 않은 아기를 돌보면서 큰 기쁨과 행복을 느끼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아기를 돌보는 일이 참 힘든 일임을 알게 됐습니다. 초보 엄마 아빠에겐 아기 목욕시키는 일부터 기저귀를 가는 일, 잠재우는 일 등의 하나하나가 서툰 모험과도 같은 것이었습니다.
아기를 돌보는 일들 중에서 가장 힘든 일은, 잠을 재우는 일이었습니다. 특히 저희 아기와 같이 ‘씩씩한’ 아기는 활동량이 많아서 쉬이 잠을 자려하지 않았습니다. 더군다나 모유 수유를 하는 터라, 잘 때도 아기는 엄마 젖을 계속 물고서 자려고 했습니다. 젖을 물고 잠을 자는 습관이 들게 되면 엄마도 힘들뿐더러 아기도 건강에 이롭지 못하다고 해서, 젖을 떼고 잠자리에 누워 잠에 들게 하는 ‘훈련’을 해야 했습니다. 일명 ‘수면교육’이라고 합니다. 백일도 안 된 아기에게 ‘수면교육’이라는 어떤 엄격한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던 저는 아기에게 원하는 만큼 젖을 물려줘야 아기의 인성발달에 좋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내는 단호했습니다. 아기에게 필요한 만큼 충분히 젖을 주되, 젖을 물고 잠에 들지 않도록 혼자서 아기 침대에 뉘어서 잠자리에 들도록 습관을 들여 줘야, 아기도 엄마도 잠을 푹 잘 수 있어서 아기와 엄마 모두에게 좋다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저희는 아기의 ‘수면교육’에 ‘올인’했습니다.
수면교육을 위해 유용한 것은 일명 ‘공갈 젖꼭지’라고 불리는 노리개 젖꼭지입니다. 엄마의 젖꼭지 대신에 노리개 젖꼭지를 빨면서 참을 청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희 아기는 노리개 젖꼭지를 빨려고 하지 않았습니다. ‘공갈 젖꼭지’라고 불리듯, 엄마의 진짜 젖꼭지가 아닌 단지 그것을 모방한 가짜 젖꼭지였기 때문이었나 봅니다. 아무리 엄마의 젖꼭지와 닮았다고는 하지만, 아기에게 그것은 엄마의 진짜 젖꼭지와는 아무래도 모양이나 촉감이 다른 가짜 젖꼭지였습니다. 아기는 그것을 너무도 잘 감별해냈습니다. 노리개 젖꼭지를 물리면 이게 뭐냐는 듯이 몇 번 빨다가는 이내 뱉어내곤 했습니다. 아기의 젖을 빨려는 욕구는 대단한 것이어서, 엄마의 젖을 물고 싶어서 얼굴이 벌게지도록 숨이 넘어갈 듯 크게 울어댔습니다. 그 빨기 욕구를 노리개 젖꼭지로 달래면서 잠을 청하면 좋으련만, 끝끝내 노리개 젖꼭지는 입에 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아기는 그렇게 울다 지쳐서 잠에 들곤 했습니다. 좀 편히 잠을 자면 좋으련만, 자신의 욕구를 채우기 위해 사력을 다했습니다.
그런데 리얼 젖꼭지가 아닌 ‘공갈’ 젖꼭지는 싫다던 그 아기가 결국은 타협점을 찾기에 이르렀습니다. 누가 가르쳐 준 것도 아닌데, 자기 손을 빨며 위안을 삼고 잠들었던 것입니다. 아기가 손가락을 빠는 것에 대해서는 위생상의 문제, 손가락 변형 등의 이유로, 빨지 못하도록 권하는 쪽과, 아기의 빨기 욕구를 해소해줄 수 있으므로 막을 이유가 없다고 권하는 쪽으로 견해를 달리하고 있습니다. 노리개 젖꼭지를 끝끝내 빨지 않는 우리 아기의 상황에서는 손가락이라도 빨면서 빨기 욕구를 해소하는 편이, 그리고 그렇게 하면서 잠을 청하는 편이 최선은 아니지만 차선은 되겠기에 그렇게 하도록 했습니다. 그러던 것이 요즘은 자기 손을 빨지 않고서도 잠을 잘 잡니다. 물론 자기 전에 약간 칭얼대기는 하지만, 엄마 아빠의 자장가와 토닥임을 위안 삼아 잠에 들게 됐습니다. 빨기 욕구 못지않게 수면 욕구 또한 거부할 수 없는 것이어서, 아기도 어느새 빨기를 포기하고 잠에 드는 편이 자신에게 더 이롭다는 것을 터득한 모양입니다. 어차피 잘 잘고 나서 잠에서 깨면 엄마가 순순히 젖을 물려줄 터이니, 더 젖을 빨고 더 놀고 싶어도 조금 참았다가 한 잠 잘 자고난 후에 다시 젖을 빠는 편이 자신에게 보다 이로웠던 것입니다.
그러고 보면, ‘수면교육’이라는 것이 아기에게 일정한 생활패턴을 익히게 해주어서 익숙한 생활리듬에 따라 생활하게 해주는 것 같습니다. 아기에게 지금은 젖을 먹을 때이고, 다음은 놀 때이고, 그 다음은 낮잠 잘 때이다, 낮잠을 자고 나면 젖을 먹는다는 식으로, 하루의 일과를 몸에 익히게 하여 불필요하게 자신의 욕구를 표출하고 요구하느라고 열을 올리지 않아도, 일정한 하루의 생활패턴에 따라 자신의 욕구를 적절히 충족시킬 수 있도록 조절하게 하는 것입니다. 육아의 첫 난관을 접하면서, 저는 태어난 지 백일도 안 된 시기부터 이렇게 욕망을 조절하는 방법에 대해 자의로든 타의로든 터득하게 된다는 사실을 흥미롭게 생각해보게 됐습니다. 이 욕망의 조절장치는 앞으로 커가면서 각각의 성장 단계와 다양한 삶의 영역 속에서 더욱더 시험되고 단련될 것입니다. 반면에 때로는 각각의 발달 단계와 상황 속에서 욕망의 표출과 충족이 억압되거나 왜곡되면서, 심리적인 인성의 형성과 발달에 문제가 생기게 될 수도 있을 겁니다.
2. ‘빵꾸똥꾸’ : 욕망 표출의 왜곡된 방식
요즘 세간에 화제가 되고 있는 ‘빵꾸똥꾸’라는 유행어도 욕망의 표출과 조절의 메커니즘에 생긴 어떤 왜곡으로부터 비롯된 것이 아닌가 합니다. ‘빵꾸똥꾸’라는 유행어는 문화방송의 시트콤 <지붕 뚫고 하이킥>에 나오는 ‘해리’라는 아이가 질러대는 말입니다. 해리는 3대가 함께 사는 부잣집의 늦둥이 손녀로, 질투심이 많은 신경질쟁이입니다. 온갖 투정을 다 받아주는 집안 분위기 때문에, 이모뻘 나이인 식모 ‘세경’에게 마구 반말을 할 정도로 버릇이 없습니다. 또 식모 세경의 동생으로 자신과는 동갑내기인 ‘신애’를 때리고 구박하면서 걸핏하면 “이 빵꾸똥꾸야, 어딜 만져. 다 내꺼야” 라고 고함을 질러대기도 합니다.
이런 해리의 언행은 사회적으로 큰 이슈가 되기도 했습니다. ‘빵꾸똥꾸’가 방송통신심의위원회로부터 권고 조치를 받은 것입니다. 방송통신심의위원회는 “해리가 폭력적인 언행을 사용하는 내용이 장기간 반복적으로 묘사된다”며 “방송법 제100조 1항을 위반했다”고 밝히면서, “다른 어린이 시청자들이 모방할 가능성이 있어 올바른 가치관과 행동양식 형성에 악영향을 미칠 우려가 있다”고 지적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방송통신심의위원회의 지적과는 달리, ‘빵꾸똥꾸’와 해리 캐릭터에 대한 시청자의 사랑은 그칠 줄을 몰라서, 오히려 사회 곳곳에서 ‘빵꾸똥꾸’라는 말이 유행어로 번지는 계기가 됐습니다. ‘빵꾸똥꾸’에 대한 권고 조치를 보도하던 한 방송사의 앵커는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해 생방송 도중 실수를 하는 방송 사고를 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네티즌들은 오히려 “웃기는데 어쩌란 말이냐” “실수해도 재미있다”는 반응을 보였다고 합니다. 또 국회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소속의 한 국회의원은 라디오 방송에서 “해리는 정신분열증”이란 발언을 했다가 성난 네티즌들의 질타를 받기도 했습니다. 제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시트콤 속에 나오는 해리의 언행이 다소 과장된 면이 있고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면도 없지 않아 있는 것이 사실이지만, 권고조치를 내릴 만큼 문제의 소지가 있는 ‘폭력적 언행’은 아닌 것 같습니다. 물론 극 속에서 해리의 언행에 아무 문제가 없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다만 그런 해리의 언행이 극 속의 한 장치로 기능하고 있고, 그것이 그 극 속에서 어떻게 전개될 것인지, 추이를 지켜봐야 하는 문제라는 것입니다.
그런 측면에서 “해리는 정신분열증”이라는 말은 다소 과장된 측면이 없지는 않지만, 일면 해리의 왜곡된 심리상태를 잘 보여주는 말이기도 합니다. 정신과적인 소견으로 정신분열증 판정을 받을 정도의 상황은 아니겠지만, ‘빵꾸똥꾸’를 연발하는 해리의 심리 속에는 이율배반적인 양가적 욕구가 존재하는 것 같습니다. 이런 측면은 해리의 부모가 해리의 ‘빵꾸똥꾸’라는 말을 고쳐보려고 노력하는 일화에서 잘 나타납니다. 그 일화를 보면, 해리가 ‘빵꾸똥꾸’를 연발하게 된 것은 해리가 어린시절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의 어떤 경험으로부터 기인합니다. 해리가 말을 배우기 시작할 무렵, 할아버지인 순재는 평소대로 해리 앞에서도 방귀를 잘 뀌었는데, 딸인 현경이 “아버지는 똥꼬를 들이대며 방구를 끼냐?”며 짜증을 냈고, 순재는 “방구를 끼면 어때서 그러냐?! 그런데 똥꼬가 뭐냐”면서 화를 냅니다. 그러자 이때 해리가 ‘빵꾸똥꾸’라고 옹알이를 시작했던 것입니다. 해리가 말을 떼는 것이 늦었던 터라 해리의 ‘빵꾸똥꾸’라는 말에 엄마는 기뻐했고, 그래서 결국 해리는 말을 시작할 때부터 ‘빵꾸똥꾸’라는 말이 입에 붙게 되어서, 고치기 힘들었던 것입니다.
‘빵꾸똥꾸’라는 말이 그리 유쾌한 언사는 아닙니다. 다만 해리의 뇌리 속에는 자신이 ‘빵꾸똥꾸’를 입에 내기 시작했을 때 주변으로부터 받았던 찬사와 애정을 기억하고 있는 것입니다. 해리는 자기소유에 대한 집착이 강하며, 또 분노를 잘 참아내지도 못하고 늘상 폭력적으로 해소하려고 합니다. 그럴 때마다 내뱉는 ‘빵꾸똥꾸’라는 말은 그런 해리의 이중적인 욕망을 예리하게 표상해주는 열쇠말이 됩니다. 사랑과 관심을 받고자 하면서도, 그런 자신의 욕망을 폭력적으로 분출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폭력적인 분출이 ‘빵꾸똥꾸’라는 말로 표출될 때, ‘빵꾸똥꾸’라는 말의 어의와 어감이 주는 ‘코믹’한 요소는 그런 해리의 욕망의 표출을 희화화해줍니다. 그래서 해리가 참 문제 있는 아이라고 여겨지면서도, 정말 귀여운 ‘캐릭터’로 인기를 끌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해리가 자신의 욕망을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적절히 조절하여 올바로 표출하는 방식을 습득하고 있지 못한 아이라는 사실은 분명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해리는 ‘버릇없는’ 아이임에 틀림없습니다. 하지만 그 버릇없음이 해리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고려할 필요가 있습니다.
가족 내에서 해리는 무관심의 대상입니다. 해리의 감정과 욕구는 적절히 수용되지 못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해리가 ‘빵꾸똥꾸’라고 말할 때, 그것이 표면적으로는 해리의 분노를 표현하는 욕설이 될 수도 있겠으나, 그 이면에서는 ‘빵꾸똥꾸’라고 지칭된 대상과 소통하고 싶어 하는 강한 양가적 욕망을 표명하고 있기도 합니다. ‘빵꾸똥꾸’라고 질러댈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인 해리는 자신의 이해받고 싶어 하는 내면을 자극적 방식으로 표명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렇다고 하더라도 해리의 방식은 대상과 올바르게 소통할 수 있는 쌍방향적인 소통의 방식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안 될 것입니다. 아마 그런 해리의 소통 방식의 변화가 앞으로 극의 진행과정 속에 그려지기를 기대해봅니다. 욕망은 적절한 방식으로 표출되어야 하고 해소되어야 합니다. 억압되거나 왜곡되거나 또는 역으로 적절히 조절되지 않은 무제한의 욕망은 자신은 물론 타인에게도 해악을 끼칩니다. 물론 적절한 방식을 습득해나가는 것과 함께, 욕망의 대상과 지향에도 발달과 진화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3. 변신의 욕망, 구원의 판타지 : 영화 ‘아바타’
외화로는 최초로 국내 관객 동원 천만 명을 넘어선 할리우드 영화 ‘아바타’에 대해서 요즘 논의가 분분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아바타’라는 영화에 천만 관객을 끌어들었느냐는 것입니다. 대부분의 분석들은 완성도 높은 3D 영화라는 점을 내세웁니다. 영화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했다는 것입니다. 반면 내용적으로는 ‘수정주의 서부극’에 지나지 않는다는 평이 많습니다. 한마디로 하면,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늑대와 함께 춤을’ 정도의 스토리라는 평입니다. 하지만 그 정도로 평하기엔 영화 ‘아바타’에는 현대인들의 감수성을 자극하는 보다 깊이 있는 상징들이 많이 함축되어 있는 듯합니다. 영화의 그 함축된 의미들이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는 것입니다. 영화 ‘아바타’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까운 미래인 2154년, 인간들은 에너지 고갈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지구에서 4.4 광년 떨어진 행성 판도라에서 대체 자원을 채굴하려 합니다. 판도라 탐험을 주도한 기업은 행성의 토착민인 ‘나비족’에게 그들이 원하는 보상을 해주는 대신 그곳에 묻힌 값비싼 에너지원을 얻으려고 합니다. 독성을 가진 판도라의 대기와 토착민 나비족의 존재 때문에 에너지원 획득에 어려움을 겪고 있던 인간들은 그들을 설득하기 위해 ‘아바타 프로그램’을 진행시킵니다. ‘아바타 프로그램’은 키가 3m가 넘고 뾰족한 귀와 긴 꼬리, 파란 피부를 가진 토착민 나비족의 DNA와 인간의 DNA를 결합해 새로운 생명체 아바타를 만들고, 그 아바타를 ‘링크 머신’을 통해 인간의 의식으로 원격 조정하는 것이었습니다.
영화의 주인공인 제이크 설리(샘 워딩튼)는 전투 중 부상을 당해 하반신이 마비된 해병대원이었습니다. 그는, ‘아바타 프로그램’의 과학자였던 자신의 쌍둥이 형이 피살당하자, 형을 대신하여 프로그램에 참여해 판도라로 가게 됩니다. 링크 머신 안에서 자신의 의식으로 아바타를 조정하게 된 제이크는 아바타를 통해 자유자재로 활동하게 되고, 에너지원 채굴을 막으려는 나비족의 무리에 침투하라는 임무를 부여 받습니다. 판도라의 생태계를 연구하는 어거스틴 박사(시고니 위버)와 함께 아바타로서 그곳에 침투한 제이크는 나비족의 여전사 네이티리(조 샐다나)와 함께 혹독한 훈련과 다채로운 모험을 경험하게 되고, 결국 제이크는 그녀를 사랑하게 되어, 나비족의 일원으로서 용감한 전사가 됩니다. 하지만 판도라 탐험을 지원하는 기업에선 제이크의 영상기록을 통해 그가 배신한 것을 알게 되고, 토착민 나비족을 강제로 쫓아내어 에너지원을 약탈하기 위해 전쟁을 일으킵니다. 이 전쟁에서 제이크는 나비족을 이끌며 인간들로부터 판도라를 지켜내고자 합니다.
한 영화평론가는 영화 ‘아바타’의 이야기를 “문명화되고 타락한 인간 종과 전-문명 혹은 초-문명 상태의 순수한 외계 종과의 대결”이라고 요약합니다. 그러면서 이 영화의 한 가지 중요한 요소는 ‘변형’(transformation)의 모티브라고 말합니다. 인간의 육체가 유전자 합성을 통해 나비족의 육체로 변형된다는 것입니다. 정확히 말하면 유전자 합성으로 태어난 유사 나비족 육체를 모종의 전자생물학적 통신 메커니즘을 통해 유전자를 제공한 인간의 육체로 감각하고 통제하는 것이지만, 영화의 결말에는 주인공의 의식은 자신의 유전자가 합성된 나비족 육체로 새로 태어나는 것으로 그려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어떤 은유적인 변신이나 결단을 통한 사회적 정체성 이동이 아니라, 육체 그 자체의 질적 변화를 말합니다. 따라서 이것을 차라리 생물학적 뉘앙스의 변태(變態, metamorphosis)라고 해야 맞을 것이라고 합니다. 이 변형/변태의 욕망은 ‘아바타’라는 제목에서부터 이미 적극적으로 표명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 변형/변태가 실현되고 완성되는 영화의 마지막 순간, 이 영화가 주는 감각적 쾌락은 극점을 찍게 됩니다. 이 변형/변태의 욕망 실현이 3D 영상으로 구현되고 있다는 점이 사람들을 더욱 끌어들이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사실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아바타’는 분신(分身) 또는 화신(化身)을 뜻하는 말로, 사이버공간에서 사용자의 역할을 대신하는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지칭합니다. 그러나 본디 ‘아바타’라는 말은 산스크리트어 ‘아바따라(avataara)’에서 유래한 말이라고 합니다. ‘아바따라’는 ‘내려오다’라는 뜻을 지닌 동사 ‘아바뜨르’의 명사형으로, 신의 지상으로의 ‘강림’ 또는 지상에 강림한 신의 ‘화신’을 뜻합니다. 고대 인도에선 땅으로 내려온 신의 화신을 지칭하는 말이었으나, 인터넷시대가 열리면서 3차원이나 가상현실게임 또는 웹에서의 채팅 등에서 자기 자신을 나타내는 그래픽 아이콘을 가리키게 된 것입니다.
힌두교에서는 세상의 특정한 죄악을 물리치기 위해 신이 인간이나 동물의 형상으로 나타난다고 봅니다. 산스크리트어로 ‘하강’을 뜻하는 이 ‘아바타라’라는 말은 비슈누 신의 10가지 화신의 모습을 가리키는 데 쓰였습니다. 비슈누의 여덟 번째 화신인 크리슈나는 많은 지역에서 신의 지위로까지 격상하기도 했는데,〈바가바드기타〉에서 크리슈나는 ‘아바타라’의 출현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정의가 사라지고 불의가 넘칠 때 나는 화신을 보낸다. 나는 선을 보호하고 악을 물리쳐 정의를 세우기 위해 언제나 나타난다.”
영화의 작가나 감독이 아바타의 어원이 되는 ‘아바타라’에 담긴 신화적 함축들을 잘 알지는 모르겠습니다. 단순히 자기 자신의 분신이라는 단순어 어의로 사용했을 것 같습니다. 어쨌든 의도하지는 않았겠지만, 영화 ‘아바타’의 스토리는 아바타의 어원이 되는 ‘아바타라’가 본래 지니고 있던 신의 화신과 변신, 그리고 그를 통한 구원이라는 신화적 구조를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결국 주인공 제이크는 ‘하늘의 사람’으로서 나비족으로 화신하여 그들을 구원하는 영웅이 되었기 때문입니다. 물론 제이크 자신만의 능력과 노력만으로 구원의 화신이 된 것은 아닙니다. 영화는 나비족 여전사 네이티리의 도움에 의해 나비족의 전사로 다시 태어나는 제이크를 그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이크의 이러한 변형과 변신에는 결정적으로 나비족의 수호여신 ‘에이와’의 역할이 지대합니다. 나비족으로 화신한 제이크의 희생적 투신과 나비족 여전사의 도움, 그리고 수호여신의 강림이라는 신인협조를 통해 나비족은 폭력적인 침탈세력인 인간이라는 악으로부터 구원에 이르게 됩니다.
4. 그리스도 찬가 : 하강과 상승의 구원신화
영화 ‘아바타’가 그리고 있는 한편의 구원신화는 그리 낯선 광경은 아닙니다. 성서 속에도 화신과 변신의 구원드라마는 나타납니다. 가장 집약적으로 잘 그려진 것은 바로 오늘 읽은 빌립보서 2장 6절에서 11절까지의 본문말씀입니다. 빌립보서 2:6-11의 말씀을 보통 ‘그리스도 찬가’라고 일컫습니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 찬가는 바울이 지은 것이라기보다는 바울 이전의 원시 교회에서 낭송되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이 찬가가 불려진 또는 낭송된 삶의 자리는 교회의 예배의식으로서 세례의식이나 성만찬 의식이었을 것입니다.
J. 그닐카의 주석에 따르면, 이 그리스도 찬가의 운율적인 구조를 살려 직역하면 다음과 같은 찬양시가 됩니다.
그는 하나님의 현존방식으로 계셨으나,
1) 하나님과 동등함을 고수하려 탐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현존을 수용하셨다.
2) 사람들과 같은 모습이 되며,
그 모습이 사람으로 나타나,
3) 자신을 낮추어,
죽음에 이르기까지 복종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
4) 그 때문에 하나님이 그를 또한 높이 올리셔서,
그에게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선사하셨다.
5) 그리하여 예수의 이름 안에서 모든 무릎을 꿇으며,
(즉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 위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 있는 자들의)
또 모든 혀가 주 예수 그리스도라고 고백하였다.
(하나님 아버지의 영광이 되도록)
그리스도 찬가의 구조와 내용은 하강과 상승의 구원자 표상을 담고 있습니다. “십자가의 죽음에 이르기까지”라는 구절을 바울의 첨가로 보았을 때, 이 찬가는 전체적으로 바울신학의 주요 주제인 믿음과 칭의는 물론 십자가와 부활이라는 주제와도 매우 다르게 됩니다. 그래서 많은 학자들은 이 그리스도 찬가가 비바울적인 바울이전의 그리스도교 공동체에서 왔을 것이라고 추측합니다. 종교사적으로 이 그리스도 찬가의 근원을 헤라클레스 신화로 찾거나, 유대교의 묵시문학인 ‘인자’, 이사야가 말한 고난 받는 ‘야훼의 종’ 등의 표상에서 찾으려는 노력들은 현재 지지되고 있지 않습니다. 구약성서의 지혜사상에 나타나는 선재하는 지혜의 관념과의 유사성에서 그리스도 찬가의 근원을 밝히려는 노력도, 구약적인 관념을 벗어난 그리스도 찬가의 표현들에 대한 설명에서 어려움에 봉착하고 맙니다. 결국 오늘날 여러 주석가들은 영지주의적인 구원신화의 그리스도교적인 변형에서 이 그리스도 찬가의 기원을 찾습니다. 물론 그리스도 찬가가 단순히 영지주의적 구원신화의 모방품은 아닙니다. 낮춤과 높임의 사고는 성서적인 유대교의 사상에도 나타나며, 그리스도 찬가에는 이러한 성서적 요소가 아울러 담겨져 있습니다. 근본적으로는 비유대교적인 사상이지만, 유대 기독교적인 요소가 이방인 그리스도교적인 요소와 함께 인상적인 종합을 이루어 융합된 결과로 바로 이 그리스도 찬가라는 나왔을 것입니다. 이렇게 형성된 그리스도 찬가 속에서 구원자인 ‘그분’은 하나님의 현존방식으로 선재했으나, 모방할 수 없는 방법으로 구체적인 인간운명 안으로 들어와, 죽음이라는 극점에 이르기까지 자신을 낮춘 결과, 복종에 대한 상으로 하나님에 의해서 우주적인 주님으로 높여진 분입니다.
유대적인지 비유대적인 이 찬가의 배경을 찾으려는 노력과는 별개로, 모든 구원자 신화, 영웅 신화는 동서고금을 초월하여 유사한 원형적 구조를 띤다고도 볼 수 있습니다. 영문학자이자 문예비평가인 노스롭 프라이는 모든 문학의 원형의 신화 속에서 찾습니다. 그러면서서 그는 성서적 이야기의 원형 구조를 유턴(U-turn) 구조라고 표현했습니다. 프라이는 모든 이야기는 추락, 투쟁, 구원, 복귀라는 신화적 이미지의 원형적 구조를 갖는다고 보았는데, 성서적 신화는 마성적/비극적 현실에서 천사적/희극적 비전으로, 죄악에서 구원으로, 실낙원에서 복락원으로 나아가는 유턴의 구조를 갖고 있다고 본 것입니다. 동서고금의 여러 구원신화들이 그 구체적인 표상에서는 차이를 보이겠으나, 하강과 상승의 유턴 구조를 기본 골격으로 갖는다는 점에서는 대동소이할 것입니다.
어쨌든 바울은 이 그리스도 찬가를 자신의 서신에서 인용하면서, 빌립보교회에 전하려고 하는 자신의 가르침과 권면의 내용의 중요한 근거로 삼습니다. 바울은 이 그리스도 찬가를 근거로 해서 빌립보교회에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가짐을 본받으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그리스도 찬가를 통해 바울이 말하려는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가짐이란, 바로 다름 아닌 겸손과 순종의 태도입니다. 바울에 따르면, 겸손과 순종의 신앙적 실천이야 말로 구원의 완성을 향해가는 첩경이 됩니다. 바울이 볼 때, 그리스도 찬가에 나타난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자기 비움과 낮춤의 자발적 희생이야말로, 모든 믿는 자들이 구원의 완성을 위해서 따라야할 신앙적 삶과 실천의 모범이요 전형인 것입니다. 바울에게서 하강과 상승의 구원신화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의 죽음을 죽으므로 그리스도와 함께 부활에 동참하는 십자가의 순종과 부활의 생명이라는 바울의 복음적 지평으로 확대되어 재해석되고 있는 것입니다.
5. 구원의 의미를 묻다 : 아이티의 대지진 참사 앞에서
구원신화를 이야기의 기본골격으로 갖고 있는 할리우드 영화에 수많은 사람들이 몰리고 있습니다. 아마 현실에서는 충족될 수 없는 구원의 욕망을 3D 입체영화 속 구원신화에서 대리만족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렇다고 한다면 과연 오늘 우리에게 ‘예수께서 나의 구원자가 되십니다’ 라는 고백은 어떤 의미가 되고 있습니까? 과연 오늘 우리에게 ‘구원’이라는 것이 의미 있는 언어로 자리하고 있기는 한 것입니까? 갑갑한 현실의 삶을 잠시나마 잊게 하는 판타지 영화 속 구원신화에서나 나오는 정신적인 위안거리는 아닌지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강과 상승의 구원신화가 오늘 우리에게도 의미 있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구원을 필요로 하는, 그리고 자신의 전존재를 내어맡길 만한 구원자의 표상을 갈구하는 그런 현실에 우리가 처해있기 때문이 아닐는지요? 그렇다고 한다면, ‘예수가 구원이시다’는 도그마적 표명을 반복하는 것은 의미 없는 읊조림에 지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도대체 우리가 처한 현실이 무엇이고 누가 무엇 때문에 구원을 열망하는지, 그리고 그들을 위한 그리고 그들과 동시대를 살아가는 바로 우리를 위한 구원은 무엇인지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오늘 지구반대편 대지진 참사를 겪고 있는 아이티에 과연 구원은 무엇일지 생각해보게 됩니다. 인간의 역사를 통해 철저히 버림 받은 아이티는 대지진 참사로 하늘에게서마저도 버림받은 듯 보입니다. 그렇기에 십만 명이 넘는 사상자를 낳은 아이티의 지진 참사 앞에서, 과연 우리가 고백하는 구원의 의미는 무엇일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지 잘 정리가 되지 않습니다.
지진 참사를 통해 관심을 갖게 된 멕시코만의 섬나라 아이티. 아이티는 라틴아메리카에서 흑인 노예들에 의해 독립한 최초의 공화국이었다고 합니다. 인간으로부터 버림받은 아이티의 역사는 다음과 같습니다.
1492년 콜럼버스가 아이티가 위치하고 있는 히스파니올라 섬을 항해하기 이전에 아이티의 역사는 거의 알려져 있지 않았습니다. 16세기말 토착 인디언인 아라와크족은 일하다 죽거나 병으로 죽거나 또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몰살당해서 대다수가 멸종한 상태였습니다. 당시 스페인 정착촌은 대개 섬 동쪽 끝부분에만 드문드문 있었습니다. 케이맨 제도에 기지를 둔 프랑스 해적들이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고 섬의 서쪽 끝부분을 장악해서 재배농장을 세우기 시작했습니다. 1644년에는 북서쪽에 포르드페를 세웠으며 곧 프랑스 서인도회사가 나서서 포르드페의 소유권을 주장했습니다. 1697년 프랑스는 히스파니올라 섬의 서쪽 부분을 생도미니크라고 새로 이름 붙였습니다. 18세기 동안 이 식민지는 상당한 경제적 번영을 누렸으나, 이는 노예제를 근간으로 한 것이었습니다. 섬의 해방 노예들은 프랑스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1804년 원래 ‘아이티’라는 국호 아래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그러나 아이티는 그후 안정된 정권을 수립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장 피에르 보이에가 통치했던 1813∼43년을 제외한 19세기 동안, 이 나라는 암살과 혁명으로 얼룩진 정권교체를 계속 경험해야 했습니다. 보이에 정권이 전복된 이후 쿠데타와 암살이 다시 벌어졌습니다. 20세기 초 미국은 아이티에 대한 광범위한 통상 특권을 얻어냈고, 1915∼34년까지 해군을 주둔시켰습니다. 이 부대가 철수한 후, 아이티는 국내의 정치 불안뿐만 아니라 도미니카 공화국의 적대행위로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그후 1957년 프랑수아 뒤발리에가 대통령에 선출되었습니다. 그는 친위부대를 편성하여 반대자들을 진압하고 종신 대통령직을 고수했습니다. 경제적 쇠퇴, 계속된 국내불안, 도미니카 공화국과의 불편한 유대관계 등에도 불구하고 뒤발리에는 1971년 죽을 때까지 독재정치를 했습니다. 그 후 그의 아들 장 클로드 뒤발리에가 권력을 승계했습니다. 장 클로드의 통치기간에도 아이티의 경제적 불균형, 정치적 탄압, 타락한 정치관행 등은 여전히 계속되었습니다. 그러나 1986년 널리 퍼진 국민적 불안은 반정부 시위로 표출되었고 장 클로드는 축출되었습니다. 그러나 이어서 일어난 민주적 정치개혁의 실패로 여전히 군부통치하에 있다가 1990년 12월 6일 대통령 선거에서 가톨릭 신부인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민간정부를 출범시켰습니다. 그는 해방신학 신봉자여서 외국자본 도입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고, 1991년 다시 장군 세드라스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리스티드를 축출하고 군정체제를 확립하는 등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국제사회와 미국의 군사적 대응으로 세드라스가 권좌에서 물러나고 다시 아리스티드가 대통령에 복귀하여 민정이 회복되었으나, 그 이후에도 정치 불안과 경제적인 낙후로 인해 세계 최빈국의 불명예를 안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2010년 1월 12일에 규모 7.0의 대지진이 발하여, 아이티는 역사적 가장 처참한 대재앙을 경험하게 되었습니다. 인재에 천재가 겸친 대재앙을 경험하고 있는 것입니다. 판도라 행성의 나비족을 위한 구원은 현실 속에서는 있을 수 없는 한낱 ‘허탄한’ 신화에 지나지 않나 봅니다. 흑인 노예들의 ‘해방공화국’을 꿈꾸었던 아이티가 지금은 인재에 천재를 더한 대참사의 현장이 되어 있습니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신화를 신앙적 현실로 고백하고 추앙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오늘의 현실에서 있어야 할 신앙적 태도와 실천은 무엇입니까? 내가 가진 욕망의 그리스도적 발달과 진화가 필요합니다. ‘빵꾸똥꾸’를 연발하는 유아기적인 인성의 수준에 멈춰 있지는 않은지, 자신의 삶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필요합니다. 자기 것에 대한 집착과 타자에 대한 무관심, 그로 인한 무지의 폭력을 행사하고 있지는 않은지요? 그러면서도 나의 내면은 사랑받고 싶고, 인정받고 싶고, 타인과의 소통에 집착하고 있다면, 그런 나의 내면은 타자를 향해 열려진 공간으로 확장되어야 할 것입니다. 나의 욕망의 지평이 타자와의 욕망의 지평으로 성숙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를 구원자로 고백하는 신앙적 삶에 합당한 모습일 것입니다.
오늘 여기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를 나의 구원자로 고백한다고 하는 것은, 그런 자기 집착과 자기애로부터 벗어나서, 구원을 열망하는 오늘 우리의 현실 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상을 입고, 자기를 낮춤으로 죽기까지 순종함으로, 나와 이웃의 구원을 이루는 구원의 판타지가 오늘 우리 삶의 희극적 비전으로 열려야 합니다. 고통 받는 이웃들을 위한 구원의 화신들, 곧 구원의 아바타로, 나를 비우고 버리고, 메타모르포시스, ‘변신’하는 욕망을 꿈꿔보는 것은 어떨는지요? 그때에, ‘내가 당신을 봅니다’는 영화 ‘아바타’의 명대사처럼, 나와 대면한 그들 속에서 ‘당신’의 ‘영혼’을, 곧 하나님의 형상을 보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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