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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고린도전 길희성 형제............... 조회 수 2233 추천 수 0 2010.06.06 09:3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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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고전15:35~58 
설교자 : 길희성 형제 
참고 : 새길교회 2010.4.4 주일설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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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몸이 다시 사는 것을 믿사오며”

[ 고린도전서 15 : 35 ~ 58 ]

 

길희성 형제

 

오늘은 크리스마스와 더불어 기독교 최대의 명절이고 축제인 부활절입니다. 크리스마스가 하늘로부터 땅으로 임하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구원의 사건으로 기념하는 것이라면, 부활절은 땅에서부터 하늘로 승천하신 그리스도의의 구원 사건을 기뻐하고 찬양하는 축제입니다. 크리스마스와 부활절은 하늘과 땅을 이어주는 예수님의 구원 사역을 기념하는 축제로서, 예수 탄생의 의미와 예수 부활의 의미를 바로 깨닫는 것은 우리 신앙의 핵심에 속합니다. 

 

오늘 봉독한 고린도 전서 15장의 말씀은 현재 우리가 가지고 있는 부활 신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증언입니다. 복음서의 부활 이야기들은 고린도 교회에 보낸 바울의 편지보다 훨씬 후대, 적어도 몇 십 년 후에 수집되고 편집된 것들로서, 부활에 관한 한 우리는 복음서보다도 바울의 이 증언에 더 귀 기울일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여기서 “그리스도께서 살아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선포도 헛되고 여러분의 믿음도 헛될 것입니다”고 단언합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이 세상에만 해당되는 것이라면, 우리는 모든 사람 가운데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라고 말합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모든 것이 예수님의 부활에 달려 있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사람들처럼 바울 당시의 유대인들 사이에도 죽은 사람이 어떻게 다시 살아날 수 있겠냐고 하며 부활을 부정하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특히 사회의 상층부를 차지하고 살면서 정통 신앙을 자처하던 사두가이파 사람들은 서민층 신앙을 대변하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이나 예수님과 달리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사실 부활과 최후심판과 영생에 대한 믿음은 구약 성서 전체의 사상이나 주류 사상이 아니었고, 구약 시대 말기에 속하는 다니엘서 같은 데서 처음으로 분명한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습니다. 그것이 예수님과 바울을 통해 기독교의 핵심적 신앙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오늘의 성서 말씀에서 부활을 믿지 않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서, 죽은 자의 부활은 있으며 실제로 그리스도께서는 그 첫 열매, 첫 증거가 되었다는 것을 복음 선포의 핵심으로 강조하고 있습니다.

 

종교의 근본 사명은 나 자신을 변화시키고 사회를 변혁하는 데 있을 것입니다. 이런 힘이 없는 종교는 죽은 종교이며, 평생 신앙생활을 해도 자신이 변하고 세상을 변화시키는 힘을 경험하지 못한다면 그런 신앙은 죽은 신앙일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누구도 이 자기 변화와 사회 변혁의 완성을 보지 못하고 죽는다는 사실입니다. 영원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은 우리로 하여금 죽음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살았던 삶이 결코 허무하지 않고 우리가 추구하던 가치와 이상, 자기를 변화시키고 정의로운 세계를 이루기 위한 우리의 열정과 헌신이 끝내 허무로 끝나지 않고 죽음을 넘어서 언젠가 완성될 것이라는 확신과 희망을 줍니다. 죽음을 극복하는 이러한 신앙이 없다면 종교는 한낮 윤리 도덕이나 사회운동의 차원을 벗어나지 못할 것입니다. 

 

 삶과 죽음은 결코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삶 속에서 늘 죽음을 의식하며 살고 있으며, 이런 의미에서 죽음은 우리 삶의 일부입니다. 아침에 눈을 뜨면, 오늘 또 하루가 나에게 주어지는구나 하면서 우리는 하루를 시작합니다. 주어진 시간을 의식할 때마다 우리는 암암리에 우리 삶의 유한성과 죽음을 의식하게 됩니다. 쇼펜하우어는 말하기를, “우리 삶은 죽음으로부터 꾸어온 돈이며 잠은 이 꾼 돈에 대해 지불하는 매일의 이자”라고 했습니다. 어쩌면 삶이 주인이 아니라 죽음이 주인일는지도 모른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이며, 우리는 삶을 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죽음을 살고 있을는지도 모른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우리는 우리의 유한성을 의식할 때마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와 이상, 헌신과 열정이 정말 무슨 의미가 있는지 회의가 들 때가 많습니다. 그저 어차피 주어진 인생이니 사는 날까지 편히 살다가 가는 게 상책이 아닐까 하는 소극적인 생각도 종종 하게 됩니다. 

 

사실, 현대인의 가장 큰 정신적 문제는 사후의 삶을 믿지 못하는 데 있다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죽음은 인생의 막다른 골목, 모든 것의 끝장, 모든 의미의 종말이라는 허무주의가 알게 모르게 현대인의 의식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문제는 죽음이 무의미하다면 결국 삶도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과거 인류의 대다수는 죽음을 하나의 통과의례로 보았으며 죽음을 통과하면 또 다른 세계, 어쩌면 더 고차적인 세계가 열린다고 믿고 살았습니다. 하지만 과학적 세계관과 세속주의적 인간관에 물든 현대인의 의식에는 죽음이란 문자 그대로 절멸일 뿐입니다. 그리고 어차피 인생이 허무로 끝나는 것이라면, 우리의 삶 또한 근본적으로 허무를 면할 수 없다는 허무주의가 암암리에 현대인의 인생관을 지배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누리는 부귀영화는 말할 것 없고, 우리가 추구하는 높은 이상이나 가치들도 내가 죽으면 끝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죽음을 다른 세계로 가는 통로요 더 고차적 삶으로 인도하는 문이라고 보는 인생관을 가지고 살면, 죽음이 자기 삶을 돌아보고 인생을 더 성숙하고 의미 있는 삶이 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지만, 죽음을 순전히 절멸과 허무로 보는 현대인에게 죽음은 모든 의미의 상실이기 때문에 오히려 살아있는 동안 즐겁게 삶을 즐기다 가자는 향락주의의 구실이 되는 것입니다. 바울 사도의 말대로, “만일 죽은 사람이 살아나지 못한다면, ‘내일이면 죽을 터이니, 먹고 마시자’”며 살 것입니다. 요즈음 나이 많은 사람들이 친구들 모임에서 ‘구구팔팔 이삼사’라는 구호를 외치기도 한다. 아흔아홉 살까지 팔팔하게 살다가 이삼일 앓고 죽는 것이 최고라는 것이지요. 모두들 우렁차게 외치곤 하지만, 어쩐지 그 우렁찬 소리 속에 허무의 어두운 그림자가 드려져 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습니다.       

  

  죽음에 대해 좀 깊이 성찰하는 사람들 가운데는 죽음 자체를 부정하면서 죽음에 대해 달관하는 자세를 가지려는 사람이 많습니다. 우선, 내가 죽어도 기억될 것이라는 데서 위안을 받으려 합니다. 내가 남긴 가족이나 친구들이 나를 기억할 것이며, 내가 남긴 저서나 업적들을 통해서도 기억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무언가를 성취하고 남기려고 애를 씁니다. 자기 이름으로 교회나 학교 건물을 짓는다거나 재단을 설립하기도 합니다. 사회적으로 인정받고 싶은 마음도 있겠지만, 영생을 향한 갈망의 간접적 표현일 것입니다. 하 지만 우리는 이 모든 것이 다 부질없는 짓임을 압니다. 죽은 자는 머지않아 잊히게 마련이고, 설령 기억된다 해도 자기 삶을 기억하는 자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데 그것이 무슨 의미가 있고 위로가 된다는 말인가 반문하게 됩니다.

 

화이트헤드라는 철학자의 사상을 이어 받은 과정신학이라는 현대 신학의 한 흐름이 있는데, 이 과정신학에서는 우리의 삶은 사후에 하나님에 의해 남김없이 전부 기억될 것이라고 말합니다. 이것을 ‘객관적 영생’이라 부르는데, 나와 나의 기억은 사라지지만 하나님께서 나의 모든 것을 영원히 기억하실 것이라는 뜻에서 주관적 영생이 아니라 객관적 영생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의 삶을 기억하는 내가 존재하지 않는데, 하나님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나의 삶이 무슨 의미가 있냐고 물으면 할 말이 없을 것입니다.

 

그런 식으로 죽음이 극복된다면 굳이 하나님을 들먹일 필요도 없습니다. 하나님이 없어도 나의 삶의 자취와 영향은 어떤 식으로든 영원히 계속될 것이기 때문이다. 내가 죽어도 나의 자식과 후손, 나의 재산과 유산, 나의 저서, 나의 업적, 하다못해 내가 남긴 말 한 마디, 행동 하나 하나가 어딘가에 어떤 형태로든 남을 것이며, 완전한 소멸이란 없을 것입니다. 내가 태우고 간 삶의 에너지는 어떤 변형된 형태로든 존속할 것입니다. ‘나’라는 이 특수한 개체는 허물어져도 형태만 달리 할 뿐 영원히 존속할 것이라는 생각에서 어느 정도 위로를 찾을 수 있을 것입니다.

 

따지고 보면 우리 인생은 자연이라는 거대한 에너지의 순환 과정 속에 잠시 모습을 드러냈다가 자연의 품 안으로 다시 되돌아가는 것이지요. 인간도 자연이라는 거대한 리사이클링 과정의 일부이며 나라는 개체는 죽어도 영원한 자연의 생명 속에 안길 것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고 노무현 대통령의 유서처럼, 그야말로 ‘자연의 한 조각’으로 돌아갈 것이며, 자연의 무한한 생명, 절대적 생명, 장회익 교수가 말하는 ‘온 생명’은 계속될 것이고, 나는 거기로 되돌아간다는 생각으로 위안으로 얻을 수 있겠지요. 장자가 노래하는 대로, 삶과 죽음은 낮과 밤의 교체처럼 자연의 순환과정일 뿐인데 하나를 더 선호하고 다른 하나를 미워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라는 것입니다.

 

불교의 근본 가르침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나’라는 존재는 본래 실체가 없는 것이라는 무아의 진리를 깨닫는 것이 불교의 요체입니다. ‘나’라는 것이 본래부터 실체가 없는 것인데, 도대체 누가 살고 누가 죽느냐는 것입니다. 나는 온통 나 아닌 것으로 되어 있으며 그러한 관계망 속에 남의 신세를 지면서 임시적으로 존재할 뿐입니다. 하늘과 땅, 산과 바다, 숲과 나무들, 부모 친척, 친구들이 모두 이 나라는 특수한 존재를 연출하는 인연의 그물이 되어 나라는 존재가 지금 잠시 모습을 드러내고 있을 뿐, 본래부터 ‘나’라는 존재는 실체가 없는 것이며 ‘나’라는 관념은 허구요 망상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사실을 모르고 나에 집착하면서부터 우리 인생의 모든 비극이 시작되며, 어리석게도 우리는 죽음을 안고 고민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사는 나도 없는데 죽는 나가 어디 있으며, 하물며 죽은 후에 존재할 항구적 나라는 것은 더욱 더 망상에 지나지 않으며 어리석은 집착이나 희망사상일 뿐이라는 것입니다.

 

이 무아 사상도 결국 인간을 포함한 자연의 모든 생명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상과 대동소이한 자연주의적 인생관입니다. 자연의 무수한 개체들은 서로 연결되고 조건이 되어서 끝없이 생멸을 거듭하지만, 나무 잎 하나가 떨어져 대지의 영원한 생명으로 흡수되었다가 또 다시 다른 잎이나 꽃으로 피어나듯이, 모든 유한한 생명들은 죽음을 통해 더 큰 생명의 순환과정으로 편입된다는 인생관입니다.

 

제가 2007년에 일본에 1년 간 체류했던 일이 있었는데, 그 때 일본에서는 “천의 바람이 되어”라는 노래가 중장년 층 일본인들 사이에서 선풍적 인기를 탔던 적이 있습니다. 노래를 부른 가수는 신통치 않았지만 잘생긴 외모에다 가사가 워낙 좋아서 크게 유행을 한 것 같습니다. 가사는 작자미상이며 미국 9.11 테러 희생자들을 위로하는 추모집회에서 낭독되었던 시였는데, 아라이 미쯔(新井 滿)라는 일본 작곡가가 번역하고 곡을 붙였습니다. 영시 원문과 아라이의 번역이 차이가 있는데 둘 다 좋아서 적당히 둘을 참고해서 우리말로 옮겨 보았습니다:

 

나의 무덤에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에 없소, 나는 잠든 게 아니요

나는 허공에 부는 천 줄기의 바람

 

가을에는 햇빛이 되어 영근 알곡에 내리 쏘이고

겨울에는 다이아몬드처럼 반짝이는 눈이 된다오

아침에는 새가 되어 당신을 깨우고

밤에는 별이 되어 당신을 지켜준다오

 

나는 허공에 부는 천 줄기의 바람

나의 무덤에서 울지 마오

나는 거기에 없소, 나는 죽은 게 아니오

 

죽은 자를 그리워하는 애절한 마음이 배어 있습니다. 죽은 자가 햇빛과 바람, 눈과 별이 되어 산 자 곁에 가까이 있습니다. 인간과 자연이 하나 되는 동양적 자연주의와 물아일여(物我一如) 사상이 깔려 있는 듯한 시이며, 한 송이 꽃이나 돌 하나에도 영혼이 깃들어 있다는 애니미즘 신앙이 깔려 있는 것 같기도 합니다. 여하튼 시인은 죽은 자가 한 인격적 개체로 존속하기를 바라는 것은 아니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산 자의 곁에 가까이 있다는 생각에서 위안을 구합니다. 저의 절친했던 친구가 잠들어 있는 평안학사의 앞뜰에 세워진 자그마한 돌비석의 아름다운 시구가 생각납니다: “님은 꽃으로 웃고 바람으로 스치시네.”

 

하지만 이런 자연주의적 인간관과 인생관들이 진정으로 위로가 될지는 의문입니다. 결정적 문제점은 여전히 개체로서의 나, 현세를 살다가 죽은 인격체로서의 개인은 결국 사라지며, 사람은 죽으면 다 마찬가지가 된다는 데 있습니다. 선한 사람이든 악한 사람이든 궁극적으로 자연의 순환체계 속으로 흡수되어 사라지기는 매한가지이며, 아무도 자기 인생에 대해 책임질 일이 없으며 책임질 수도 없습니다. 억울하게 인생을 살다가 간 무수한 인간들의 눈물은 영원히 씻을 길 없고 의로운 자들이 흘린 피는 보상 받을 길 없으며, 의로운 삶을 살다고 고통 속에 죽은 자들이 복권되는 일도 없을 것입니다. 또 우리들의 피땀 흘려 추구하던 진리와 선과 아름다움, 치열하게 투쟁하던 정의로운 세상도 우리가 죽으면 우리와 아무 상관없고, 우리의 인생은 영원히 미완성으로 남을 것입니다. 설령 우리가 추구하던 가치와 이상이 실현되는 날이 온다 해도 그것을 확인하거나 누릴 나는 없을 것입니다.

 

개인이라는 것을 중요시 하지 않고, 개인은 집단을 위해 존재할 뿐이며 개체란 본래 허망한 것이고 ‘나’라는 관념은 망상에 지나지 않으며, 나와 너의 차이도 별거 아니고 선과 악도 개인이 아니라 모두의 공동 책임이며, 그것으로 연출된 역사의 모든 갈등과 비극은 허망한 게임에 불과할 뿐이라고 우리가 생각한다면 모르지만, 개인들의 사후 운명이 모두 마찬가지가 된다는 인생관과 내세관을 우리가 과연 진지하게 수용하고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듭니다. 히틀러와 테레사 수녀가 사후에 같은 운명을 맞는다는 생각을 여러분이 정말로 수용할 수 있습니까? 개체의 소멸과 죽음을 달관하는 동양적 자연주의가 개인의 이기심을 초월하는 매우 숭고한 사상이기는 하나 만족스럽지는 못합니다. 과연 그런 인생관과 내세관을 가지고 우리가 얼마나 현세를 도덕적으로 진지하고 보람 있게 살 수 있을지 의문이 드는 것입니다.

 

오늘 읽은 성서 말씀, 고린도 전서 15장의 말씀에서 바울은 몸의 부활과 구원이라는 내세관과 영생관을 강력하게 논증하고 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그의 몸은 죽었으나 그의 영혼은 영원히 산다는 정도의 생각이 아니라, 십자가에 달려 죽었던 그의 몸이 부활함으로써 지상에서 활동하던 구체적 인간 예수가 죽음을 초월하여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은 인간이 몸과 영혼을 다 갖춘 온전한 인간으로서, 개체적 인격체로서 영생을 누릴 수 있음을 실제로 보여준 최초의 결정적 사건으로서, 흙으로 빚어 만든 첫 사람 아담이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운명을 안고 사는 존재였다면, 두 번째 인간 그리스도는 하늘에 속한 새로운 인간으로서 하나님과 더불어 영생을 누리는 존재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우리 모두도 아담과 같은 땅에 속한 옛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와 같이 하늘에 속한 새사람으로서 영생의 확신과 희망을 가지고 살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몸이 다시 산다는 것은 영혼만을 가진 반쪽 인간으로서가 아니라 현세를 산 김 아무개, 이 아무개라는 구체적 인격체로서 영생을 누린다는 것을 뜻합니다. 히브리 사람들이나 바울에게는 몸이 없는 인간, 영혼만의 인간은 생각할 수 없었습니다. 영생이 있다면 영혼만의 영생이 아니라 지상을 살고 간 몸과 영혼의 전인적 구원이고 영생입니다. 부활신앙은 실로 영혼의 불멸이나 육체로부터 영혼의 해방을 구원으로 간주하는 플라톤주의 사상이나 힌두교 사상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바울은 부활을 논증하는 오늘의 말씀에서, 전혀 몸의 부활을 영혼만의 구원에 대비시키고 있지 않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습니다. 바울에게 인간은 몸을 떠나 생각할 수 없는 존재이기 때문이며, 몸은 죽지만 영혼은 불멸한다는 식의 구원관 같은 것은 생각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에게 인간은 어디까지나 몸과 영혼이 같이 가야 하는 존재이며, 몸의 부활은 당연히 몸과 영혼의 영생을 의미했습니다. 몸이란 바울에 있어서 단순히 영혼에 대비되는 개념이기보다는 인간 자체, 인간 전체를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보아도 무방합니다.

 

몸은 죽지만 몸에서 해방된 영혼은 불멸한다는 철학적 사상과 달리, 우리의 몸도 영생에 참여한다는 부활신앙은 실로 너무나 상식을 뛰어넘는 믿음이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기 어려워하는 것이 사실입니다. 신학자들 가운데도 몸의 부활과 영생에 대해서는 애매모호한 자세를 취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기독교 전통은 부활에 대해서 영적 부활과 몸의 부활을 일단 구별합니다. 정통 신앙, 성서적 신앙, 바울의 신앙은 둘 다 긍정하지만, 영적 부활만 수용하고 몸의 부활은 수용하지 않거나 유보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도 많습니다. 나는 둘 다 믿는 사람이지만, 영적 부활만 믿고 사는 신앙도 문제는 있지만 매우 훌륭한 신앙이라고 일단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영적 부활이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영적으로 동참함으로써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사는 새로운 존재로 태어난다는 생각입니다. 영적으로 부활하여 바로 지금 여기서 영생을 누린다는 것입니다. 새길교회의 신앙고백처럼, 우리는 교회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하는 신앙공동체임을 고백하는 신앙이며,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내 안의 그리스도가 산다”는 신앙입니다. 지상에서 하나님나라 운동을 전개하시면서 참다운 삶의 길을 보여주신 예수님의 유한한 육신은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의 죽음이 오히려 그를 육체의 한계에서 벗어나 무한한 영의 그리스도가 되게 하여 그의 몸인 교회에 살아계시면서 그가 못 다하고 간 하나님나라의 운동과 사역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이 영의 그리스도, 혹은 그리스도의 영은 교회라는 기독교의 울타리마저 넘어서 온 세계를 변화시키는 힘으로 작용하고 있다고 저는 믿습니다. 영적 부활이란 나는 죽고 내 안에 그리스도의 영이 산다는 신앙이며, 부활과 영생은 사후에 누리는 축복이 아니라 지금 이미 그리스도의 영을 받아 사는 신자들의 삶 속에 영적으로 현실화되는 복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영생을 지금 여기서 맛보지 못한 자는 아마도 사후에도 누리지 못할 가능성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영적으로 예수의 죽음과 부활에 동참한다는 신앙은 사즉생(死卽生)의 신앙입니다. 죽어야 산다는 신앙이지요. “나는 감히 단언합니다. 나는 날마다 죽습니다”는 바울 사도의 고백대로, 옛사람의 죽음을 통해서 비로소 진정한 생명인 영생을 얻는다는 사즉생의 신앙입니다. 이러한 신앙이 철저하다면 죽음을 두려워할 필요가 없고, 내가 죽으면 어떻게 될까 염려할 필요가 없는 경지에 이를지도 모릅니다. 지금 이미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어 영생을 누리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사즉생의 신앙과 사상은 실로 매우 고귀한 신앙이며 불교나 다른 모든 종교들의 진정한 가르침과 기본적으로 일치합니다. 불교도 근본적으로 자기를 죽이고 더 큰 생명을 얻는다는 사즉생의 철학이며 실천이기 때문입니다. 요놈의 ‘나’를 죽여야 진정한 자아, 참 나, 참 생명이 탄생한다는 가르침이며, 저는 이것이 모든 종교의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가르침이며 영적 진리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저는 예수님의 부활이나 우리들의 부활을 이렇게 단지 영적 부활로만 간주하는 견해에 전적으로 찬동할 수는 없습니다. 부활과 영생을 순전히 나의 내면적 변화, 영적 변화로만 이해하는 영생관은 사후에 겪는 개체와 개인들의 운명에 대해서 모호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입니다. 사후에 개체로서의 인격의 존속 여부를 애매하게 내버려 두는 추상적인 내세관과 영생관은 죽음의 문제를 만족스럽게 해결하지 못한다고 저는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무엇보다도 그런 영생관은 인생의 도덕적 부조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요즈음 저는 이 문제로 고심하고 있으며 저에게 남은 마지막 결정적인 사상적 문제로 씨름하고 있습니다. 수십 년 종교와 철학을 공부해 오다가 인생의 황혼기에 들어선 저로서 마지막 남은 문제라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앞서 언급한 자연주의적 세계관이나 불교의 무아 사상, 그리고 영혼만의 구원을 주장하는 플라톤주의나 힌두교 사상 모두에 전적으로 만족하지 못하기 때문이며, 또 부활을 순전히 영적 경험으로만 보는 관점에도 전적으로 찬동할 수 없기 때문이다. 몸의 부활 사상이 유치하고 저급해 보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제가 성서와 바울의 증언에 따라 부활 신앙에 매달리고 있는 이유입니다. 

 

결론부터 말씀드린다면, 저는 몸의 부활 사상에 따라 영적 부활만 아니라 몸의 부활, 그리고 이에 따라 개체, 개인의 영생을 믿으며 또 믿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이렇게 생각하는 것은 결코 단지 ‘나’라는 개체의 소멸을 두려워하고 그야말로 영원히 살고 싶은 욕망 때문만이 아니라, 억울하게 현세를 살다가 죽은 무수한 인간들의 운명을 생각하기 때문이며, 사후 심판과 지옥을 믿지 않는 한 인생의 도덕적 부조리를 해결할 길이 없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히틀러나 마더 테레사가 죽으면 동일한 운명을 맞을 것이라면, 세계와 인생은 궁극적으로 부조리하며 그런 세계는 내가 믿는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세계가 아닐 것이며, 내가 믿는 정의의 하나님은 결코 그런 일이 벌어지도록 방치하지 않을 것이라는 믿음 때문입니다. 십자가에 억울하게 죽은 예수를 하나님께서 살리셨다면 예수의 제자를 자처하면서 예수와 비슷하게 흉내라도 내면서 산 사람들도 그 분의 운명을 따를 것이며, 그와 정반대로 불의하고 악독하게 산 사람은 반드시 사후에 어떤 형태로든 책임을 지는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시고 주관하는 세계일 것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평소에 기독교의 전통적인 인생관과 내세관이 지니는 가장 큰 맹점은 패자부활전이라는 것이 없다는 것이라고 생각해 왔습니다. 삶의 기회는 단 한 번밖에 없으며, 이 유일회적 삶을 어쩌다 한 번 잘못 태어나거나 잘 못 살면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가 하면, 별로 의롭게 살지도 않았는데 단순히 예수를 믿고 교회 다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천국의 행복을 영원히 누린다는 식의 너무나도 단순하고 가혹하고 불공정하기 짝이 없는 내세관을 가지고 교회는 2000년을 행세해 왔는데, 이제 우리는 이러한 말도 안 되는 내세관을 과감히 수정할 때가 되었다고 믿습니다. 이런 생각이 현대 기독교에 끼치는 해악은 이루 말할 수 없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세계와 인간의 운명을 그렇게 디자인하신 하나님은 결코 제가 믿는 하나님이 아니고, 의롭고 선하시고 사랑이신 하나님이 주관하시는 세계와 인생은 그런 것이 아닐 것이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저는 몸의 부활, 개체로서의 인간의 영생을 믿고 사후심판과 지옥을 믿지만, 동시에 인간의 운명을 그렇게 단순하게 이분법적으로 재단하는 종래의 신앙은 과감히 수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몸의 부활 신앙에 따라서, 사후에 모든 인간들에게 개체로서, 개인으로서 구체적으로 의미가 있는 또 하나의 삶의 기회가 주어져야 하며 그럴 것이라고 믿습니다. 그리하여 인생을 미처 살아보지도 못하고 죽은 어린 생명들이나 억울하게 죽은 무수한 인생들이 부활하고 복권되어 다시 한 번 삶의 기쁨을 누릴 수 있는 기회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또 인생을 부족하게 살거나 잘못 산 사람들은 하나님을 대면하여 뼈아픈 회개의 눈물을 흘리고 몸과 마음이 정화되는 기회가 있을 것이며, 극악하게 산 사람들에게는 반드시 지옥의 형벌이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이런 구체적이고 사실주의적인 내세관이나 영생관이 없다면, 죽은 자들이나 남아 있는 자들에게 진정한 위로는 있을 수 없으며,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할 뿐 아니라 삶도 허무를 면하기 어렵다는 생각을 금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몸의 부활에 대해 몇 가지 유의할 점이 있습니다.

첫째, 부활은 인간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이라는 사실입니다. 부활은 생명 자체이시고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의 몸을 다시 살리셨다는 것이지 죽은 예수 스스로가 마치 자다가 벌떡 일어나듯이 부활했다는 것이 아닙니다. 부활에 관한 가장 이른 증언들은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주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오늘의 본문에서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살리셨다고 말하고 있으며, 바울 서신 가운데 가장 먼저 쓰인 데살로니가전서 1장 10절에서도 “예수를 하나님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 살리셨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또 사도행전에 나오는 베드로의 유명한 설교도 하나님께서 죽은 예수를 다시 일으켜 세우셨다고 증언하고 있습니다.

 

부활은 인간의 가능성이 끝났을 때 일어난 하나님의 역사이지 결코 인간의 역사가 아니라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습니다. 부활을 실제 사건으로 믿는다 해도 우리가 이 점을 간관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은 실제 사건이었지만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진 신비이며 초월적 사건이지, 결코 우리 인간들에 의해 일어나거나 인간의 상식으로 이해될 수 있는 사건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부활은 새로운 창조입니다. 새 하늘과 새 땅에서 일어날 사건의 신호탄입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동시에 종말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만들어 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부활신앙입니다.

 

둘 째, 부활은 단순한 일시적 소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일시적 소생이라면 예수가 정말로 죽은 것이 아니었든지, 아니면 소생한 다음에도 다시 죽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부활은 일시적 소생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사도신경에서 우리는 “몸이 다시 사는 것과 영원히 사는 것을 믿사오며”라고 연이어 고백하는 것입니다. 부활은 영생의 문이지 현세의 연장이 아닙니다. 따라서 부활하는 몸은 지상에서의 몸, 썩어질 몸의 소생이 아니라, 하늘의 생명, 하나님의 영원한 생명에 참여할 썩지 않는 몸이라고 바울은 증언합니다. 부활하는 몸은 하나님의 생명의 영, 부활의 영에 의해 일으킴을 받는 새로운 몸, 변화된 몸, 영의 몸 spiritual body라고 바울은 말합니다. 선지자 에스겔이 환상 가운데서 본 것처럼, 앙상한 죽은 뼈들이 하나님의 영의 바람이 불자 일제히 살아난 것처럼, 부활의 몸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 살아난 변화된 몸이며 영광의 몸입니다.

 

셋째, 예수님의 부활은 종말론적 사건으로서, 역사의 종말, 즉 구시대가 지나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생명의 역사, 새 하늘과 새 땅이 이미 열리기 시작했음을 알리는 결정적 신호탄과 같은 사건이었습니다. 부활은 종말에 모든 인간에게 일어날 우리 모두의 부활의 선취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의 부활을 죽은 자의 첫 열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예수의 부활과 더불어 죄와 죽음의 역사는 이미 극복되기 시작했으며 새로운 참 생명의 역사,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가 열리기 시작했다고 초대 그리스도인들은 확신했으며, 그러한 기쁨을 안고 고난 속에서도 세상을 이겼다는 승리감, 지상의 삶을 살지만 천국백성으로서 하늘의 삶을 사는 기쁨을 안고 산 것입니다.

 

넷째, 무엇보다도 부활은 예수님께서 벌였던 하나님나라의 운동, 십자가의 처형으로 끝장났던 것처럼 보였던 그 운동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의 부활은 예수 운동의 부활이었으며 예수와 함께 새로운 세상을 꿈꾸다가 절망했던 제자들의 희망의 부활이었습니다. 예수님의 몸의 부활은 결코 제자들의 환상이 아니었고 스승 예수가 남긴 인격적 감화를 잊지 못한 그의 추종자들이 만들어낸 이야기가 아닙니다. 자기가 지어낸 이야기를 박해 속에서 목숨을 걸고 선포하며 다니는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의 마음으로 기억되기 전에 먼저 몸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의 부활이 바로 그를 영원히 잊지 못할 스승으로 만들었으며, 천국 복음을 선포하고 천국 운동을 하고 다니셨던 전도자 예수를 선포하고 전파해야 할 신앙의 대상, 전도의 대상으로 만든 것입니다. 십자가의 참극으로 수제자 베드로까지 두려움 속에 스승을 모른다고 세 번 씩이나 부정하고 나머지 제자들도 모두 도망쳐 버리는 마당에 예수 운동은 일단 끝장난 것 같았습니다. 이러한 판국을 뒤집은 것은 결코 스승의 인격에 감화를 받고 그를 그리워하던 그 잘난 제자들의 용기와 힘이 아니라, 예수를 다시 살리신 하나님 자신의 힘이었습니다. 로마의 공권력에 의해 십자가에 처형당한 죄수 예수가 다시 살아났다고 공공연히 떠들고 다닐 정도로 무모한 제자들의 용기는 부활 사건 없이는 설명이 안 되고, 십자가에 무력하게 죽은 예수를 다윗의 후손 그리스도 곧 메시아라고 전파하고 다니는 우스꽝스러운 일도 부활 사건과 확신 없이는 도저히 설명이 안 되는 미친 짓이었을 것입니다.

 

바울 자신도 부활하신 주님을 다마스쿠스 도상에서 직접 만나기까지는 십자가에 달린 죄수를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얼마나 어리석고 한심한 사람들이었는지를 누구보다도 잘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무도 예수의 부활을 눈으로 직접 목격한 사람은 없지만, 부활의 가장 강력한 증거는 예수님의 천국 운동이 그의 십자가의 패배 이후에도 계속되었다는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자체입니다. 십자가의 패배, 그리고 온갖 역경과 박해 속에서도 제자들과 예수 따름이 들이 예수 운동을 계속할 수 있었다는 사실,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교회가 2000년 이상 계속되었다는 사실 자체는 부활 사건을 떠나서는 설명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수’ 예수를 하나님께서 다시 살리셨다는 것은 하나님께서 그를 의롭다고 인정하신 것이었으며, 그가 온 몸을 바쳐 선포하고 증언했던 하나님나라의 비전이 결코 허황된 꿈이 아니라 이미 현실화되기 시작했음을 입증해주는 사건이었습니다. 인간의 법정은 그를 죄수로 사형에 처했지만, 하나님의 심판은 그를 의로운 자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살리신 것입니다. 이로써 그가 벌였던 하나님나라 운동은 계속될 수 있었으며, 2000년이 지난 오늘도 우리는 천국백성으로 믿음과 소망과 사랑 가운데서 그 사역을 계속하게 된 것입니다.

 

부활의 신앙과 소망이 우리에게 암시하는 것은, 영생의 세계에서 우리의 몸도 부활하신 주님의 몸과 같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초월하여 아무 때나 여기저기에 나타나는 자유로운 몸일 것이며, 하늘의 천사들과 같이 빛나는 형체를 지닌 몸일 것이라는 것입니다. 마치 애벌레가 고치를 벗고 나비가 되어 하늘을 날듯이, 부활한 우리의 영의 몸도 그러한 자유로운 몸이 아닐까 상상해봅니다.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부활의 몸은 지상에서의 정체성을 지닌 몸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부활하신 주님에게서 십자가에 처형당한 예수를 제자들이 알아볼 수 있었듯이, 우리들의 부활한 몸도 변화된 몸이기는 하지만 현세를 살았던 몸으로서, 서로 알아 볼 수 있는 형체를 지닌 몸일 것입니다.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가끔 천국 가면 누구를 제일 먼저 만나보고 싶은가라고 반 농담처럼 묻습니다. 농담만은 아닐 것입니다. 제자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본 것처럼 우리도 천국에서 서로를 알아 볼 것입니다. 평생 예수를 믿었는데, 우리도 예수님 얼굴을 한 번만이라도 뵈어야 할 것 아닙니까? 또 지상에서 맺었던 우리들의 소중한 인연들도 어떤 식으로든 계속될 것이라고 부활신앙은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세상을 사는 동안 누구를 죽도록 미워하면 안 될 것입니다. 미워했다 해도 죽기 전에 화해하고 죽어야 할 것입니다. 천국에서는 미움이라는 것은 없겠지만, 누가 압니까, 서먹서먹한 관계가 영원히 계속될는지!

 

어느 할머니한테 예수 믿으라고 하니까, 예수 믿으면 무엇이 좋으냐고 물었다고 합니다. 천당 가지요. 천당 가면 우리 죽은 영감도 만날 수 있나요? 물론이지요. 그 놈의 영감 거기서 또 봐요? 난 예수 안 믿겠수다 했다는 우수개소리가 있습니다. 하지만 이 할머니나 전도한 사람이 한 가지 간과한 사실은, 천국에서도 우리는 서로를 알아보겠지만 지금의 죄 많고 허물 많은 모습은 아닐 것이고 변화된 존재들일 것이라는 점입니다. 천국에는 재회의 기쁨은 있겠지만, 옛 모습 그대로의 재회는 아닐 것입니다.

 

몸이 부활하여 영생을 누리는 세계는 사람만 변화되는 세계가 아니라 만물이 변화되는 세계일 것입니다. 뭇 생명들과 함께 하는 다채로운 세계일 것입니다. 천국은 흔히 생각하듯이 그야말로 24시간 예배만 드리는 지루하기 짝이 없는 세계가 아니라, 하나님의 창조의 역사가 완성되는 새로운 창조의 세계, 새로운 삶이 전개되는 세계일 것입니다. 요한 계시록의 저자가 환상 가운데서 본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며, “하나님이 친히 그의 백성의 눈에서 눈물을 닦아주실 것이니, 다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은 이러한 새로운 창조, 새로운 세계에 대한 비전과 소망을 안고 현세를 의미 있게 보람 있게, 기쁘게 살아가는 것입니다.

 

이러한 영생의 세계는 현세와 너무나 다를 정도로 추상적이고 영적이지 않고, 그렇다고 지나치게 구체적이고 유치해서 현세와 너무 같지도 않습니다. 영생이 현세와 아주 다르거나 무관하다면, 현세는 하잘것없는 무의미한 것이 되어 버릴 것이고, 도대체 하나님께서 왜 우리에게 현세를 허락하셨는지 이해하기도 어렵습니다. 반면에 영생이 현세의 단순한 연장이나 반복이라면 영생도 아니고 구원도 될 수 없을 것입니다. 내세는 현세의 완전한 폐지가 아니라 현세의 완성입니다.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 새 하늘과 새 땅이 첫 번 창조, 옛 창조의 폐지가 아니라 완성이듯, 영생은 현세를 산 우리의 삶과 인격의 완성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새길 신앙고백은 그래서 창조의 보전과 완성을 믿는다고 종말론적 신앙을 함께 고백하는 것입니다.

 

저는 부활한 사람들이 각자 현세의 기억을 가지고 하나님과 더불어 하나님 안에서 영생을 살 것이라고 믿습니다. 개인의 정체성이 있는 한 영생에도 개인 간의 차이는 있을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대로 천국에서는 결혼이나 부부 관계나 이기심의 근원인 가족 제도 같은 것은 없을 것이며, 바울 사도의 말씀대로 그리스도 안에서 남자와 여자, 주인과 종, 그리스인이나 유대인의 구별이 무의미하듯이, 인종이나 국가나 부족이나 계급 같은 집단의 차이는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천국 영생에 개인 간의 차이와 다양성은 존재하지만 차별이나 시기 같은 것은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 성인들, 신앙을 위해서 그리고 의를 위해서 목숨을 바친 순교자들은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을 것이며, 우리처럼 그저 그렇게 살다가 죽은 평범한 신자들은 하나님을 그만큼 멀리서 대할 것이며 즐거움도 덜할 것입니다. 반면에 극악한 삶을 산 사람들, 평생 자기만 알고 남을 괴롭히고 짓밟으며 산 악인들은 빛이신 하나님의 낯을 대하기 어려워 스스로 멀리 도망칠 것이며 괴로움 속에서 자기 삶을 후회하고 참회할 것입니다.

 

나는 지옥이 있다고 믿지만, 지옥은 하나님께서 악인을 가두기 위해 별도로 만들어 놓은 공간이 아니라, 어두운 삶을 살았던 죄인들이 빛이신 하나님의 낯을 두려워하고 견디지 못해 도망치면서 자초한 고립된 세계일 것입니다. 그래서 지옥의 문은 누가 밖에서 잠그는 것이 아니라 죄인들이 스스로 안에서 잠그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지옥의 고통이 영원한 것이라고는 믿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식과도 같은 피조물들을 영원히 벌주기 위해서 별도의 공간을 만들어 놓았다거나, 그렇게 되도록 내버려 둘 것이라는 것은 주일학교 시절에나 믿었던 것이지,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 것을 복음이라고 전파하고 다니거나 그런 생각으로 위로나 기쁨을 얻는 사람이 있다면 아마도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리라 생각합니다. 우리 인간 부모들도 자식이 아무리 못 된 짓을 해도 끝까지 포기하지 않고 품는데, 사랑 자체이신 하나님이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단테가 지은 신곡의 지옥편을 보면, 지옥 입구에는 “여기에 들어오는 자는 희망을 가지지 말지어라”라고 쓰여 있습니다. 읽는 사람의 마음을 섬뜩하게 만드는 신곡에서 가장 인상에 남는 구절 가운데 하나지만, 그런 영원한 절망으로서의 지옥은 중세 사람들이나 믿었던 것입니다. 지옥의 영벌이라는 것이 존재한다면, 이는 사랑의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고 하나님의 실패를 의미합니다. 한 인간이 지은 악이 아무리 크기로서니 영원히 벌을 받을만한 죄는 없을 것입니다. 죄에 대한 개인의 책임은 엄중히 물어야 하지만, 따지고 보면 선이 오직 개인의 공로만이 아니듯, 악 또한 개인의 책임만은 아닙니다. 가령, 600만 유태인을 죽음으로 몰고 간 히틀러 같은 사람의 범죄도, 그의 범죄를 방조하거거나 협조한 수백만의 독일인들, 또 뻔히 알면서도 협조하거나 수수방관한 국제사회도 비난을 면키 어려운 것입니다.

  저는 사후의 심판을 믿고 지옥의 존재를 믿습니다. 악인이나 선인이나 똑 같은 사후 운명에 처한다는 것은 인생에 대한 모독이고 하나님에 대한 모독이며, 인생을 웃기는 것으로 만들어버립니다. 지옥이란 것은 없으며 사람은 죽으면 그뿐이라는 생각은 바로 지옥에 갈 악인들의 희망사항은 될지언정 사랑과 정의의 하나님이 주관하는 세계는 아닐 것입니다. 하지만 최후심판은 하나님이 근엄한 재판관처럼 않아서 양과 염소를 가르는 식의 심판이 아니라, 우리 모두가 사후에 빛이신 주님을 대할 때 저절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는 자기심판이라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오늘 어쩌면 건너서는 안 될 선을 건넜고 해서는 안 될 말을 너무 많이 한 것이 아닌가 자성합니다. 듣는 여러분들 가운데서도, 어떻게 사후 세계에 대해 그렇게 잘 아는가 물으실 것입니다. 근거가 무어냐고 따지고 싶은 마음도 드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넘기 어려운 선을 감히 넘는 것은, 우선 저 자신이 너무나 궁금해 하는 문제이고, 또 많은 사람들이 궁금해 하지만 신학자들이 시원한 대답을 주지도 못하고 문제를 회피하거나 답하기를 꺼려하는 문제이기 때문입니다.

 

근거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제가 살아온 인생의 경험, 제가 관찰하고 이해한 세계의 인생의 성격, 그리고 제가 믿는 성서의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만난 하나님, 그리고 무엇보다도 십자가에 달려 죽은 죄인 예수를 하나님께서 의롭다고 인정하셔서 부활의 영생으로 이끄셨다는 부활 신앙에 비추어서, 그렇게밖에는 내세를 이해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믿지 않고는 이 세상을 의미 있게 살아가기 어렵다고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물론 지식이 아니라 믿음이고, 믿음에 인생을 걸고 사는 삶의 문제입니다. 그런 내세관이 맞는지 아닌지는 사후에나 알게 될 것입니다. 틀린다 해도 후회하지 않을 것이며 상관없습니다. 우리의 삶을 심판할 기준은 우리의 사상이나 신학이나 내세관이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의 뜻에 따라 선한 삶을 살았는가에 달려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나와 다른 내세관을 가지고 의미 있게 살 수 있는 사람은 그렇게 할 것이며, 불자들과 타 종교 신앙의 사람들은 물론 다른 인생관과 내세관을 가지고 살 것입니다. 상관없습니다. 누가 맞을지는 모르지만, 한 가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바는 사후에 하나님 앞에서 우리들 모두의 운명을 결정하는 것은 우리들의 사상이나 종교가 아니라 우리가 얼마나 인간답게 살았느냐는 것이라는 점입니다. 제가 믿는 하나님은 네가 어떤 사상을 가지고 살았느냐, 어떤 교리를 믿었고 어떤 종교를 따랐느냐고 묻지 않고, 네가 어떻게 너의 인생을 살았냐고 물을 것이라고 저는 확신하기 때문입니다.

 

죽음 이후에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무엇일까요? 우리를 기다리는 것은 허무가 아니라 하나님의 놀라운 생명의 세계라고 부활신앙은 말합니다. 창조의 하나님은 동시에 종말의 하나님이십니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신 창조의 하나님은 죽음에서 생명을 창조하시는 새로운 창조의 하나님이시라고 우리는 믿습니다. 그리스도인은 바로 이러한 믿음과 소망 가운데서 현세를 더 의미 있고 값어치 있게 살아가려는 존재들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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