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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막11:12-14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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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성관 목사 |
참고 : |
무화과나무의 열매
마가복음 11:12~14, 20~23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니가>라는 책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말하면서,
"이 사건을 통해 예수는 불합리한 사람이요, 비상식적인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13절에 나오듯이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열매가 없다면서 저주를 퍼부어 그 나무를 말라죽게 한 것을 보게 될 때, 기독교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종교가 아닌 것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13절의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한 것은
6월과 7월이 본격적인 수확기인데, 바로 이 때가 아직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무화과나무는 3, 4월경이면 잎사귀가 나오는데, 이때 열매도 나옵니다. 이 열매가 차츰 익기 시작하여 6, 7월이면 완전히 다 익습니다.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팔레스타인에서는 "파가" 라고 부르는데, 먹을 만한 과일이 없는 4월, 5월경에는 아직 익지 않은 이 무화과 열매를 먹기도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예수님이 몹시 배 고프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셨다면, 무화과나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텐데, 너무도 시장하신 예수님이 아직 익지 않은 "파가" 라도 잡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가 유월절 무렵이었으므로 4월 초순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잎이 무성하게 나 있으니 열매도 나왔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섭섭하신 예수님이 "너는 어째서 무늬만 무화과나무냐" 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여유가 있을 때는, 하루를 천년 같이 느긋하게 우리를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급하실 때에는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면서 재촉하십니다. 요4:35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이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심히 적으니 어떡할꼬 하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마 9:37). 이런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제자들이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당장 예수님은 직접 온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셨고, 제자들은 당장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흩어 내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도 걱정이 되셨는지,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구나... (마 10:16)" 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익지 않은 무화과 열매라도 잡수고자 내게 오시게 될 급한 상황이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우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지금, 나는 그런 때를 위해 대비책이 되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무엇을 대비할 것인가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벌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완전히 익은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여 놓고서 자세히 안을 살펴보니, 단 하나의 열매도 달려 있지 않았다는 것, 거기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있고, 내용은 없는 것, 요즈음 용어로 무늬만 진짜 같은 신앙생활을 지적하는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일날이면 교회 가는 것을 알고 있고, 예배가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묵도합시다" 그러면 예배가 시작되고, 목사가 축도하면 예배가 끝난 줄 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 까지는 다 그런 대로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예배는 11시부터 12시까지가 아니라, 그 이후부터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참 된 예배를 드렸느냐는 것을 예배 시간 중에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후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삶이 얼마나 달라지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ABC는 예배당 안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위로도 얻고, 용기도 얻고, 새 힘도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활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일하는 현장에서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가게에서 손님에게 하는 말의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의 사건과 똑 같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가다 마음이 막막해 질 때가 있습니다.
기껏 열심히 부르짖고 설교하였는데, 곧 바로 예배 후에 만난 성도가 전혀 다른 얘기를 할 때, 그렇습니다. 특별히, 어떤 직분을 맡은 성도가 그럴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주중에 제 자신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도 있어서, 저를 보면서 가슴 아픈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냐,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그 결과로써 내게 무엇이 주어지고, 내게 어떤 좋은 일이 생겼느냐 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바뀌었고, 내 안에 말 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넘쳐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며 살게되었느냐,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실망시킨 그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마치 사람을 대하듯 말씀하셨습니다. 14절에 "예수께서 나무에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너무 하신 것 아니냐, 이건 감정적인 보복이다" 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보장합니다.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을 꾸미고, 진행하시지 않습니다.
14절 끝 부분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듣더라" 여기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벌을 내리신 까닭이 바로 먼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으며,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다음 날 아침 같은 길을 걸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다 말라 버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보세요. 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로 무화과나무가 말랐는데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인데, 먼저 상황과 사건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보았지만, 베드로만이 어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 내고, 말씀 그대로 되었구나 라고 깨닫고, 예수님께 고백한 것입니다. 보고, 듣고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맙시다. 하나님 말씀이 생각나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떠올라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보는 것이고, 진짜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주 깊은 동굴에 조그만 호수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물고기들 중에 눈이 멀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구를 해 보니, 깊은 동굴 안에서 캄캄한 호수에서 살기 때문에 빛을 볼 필요가 없다 보니,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적으로 눈이 퇴화되어 장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눈과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쓰고 놔두면 퇴화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의 얘기를 자세히 보면, "어, 정말로 말 그대로 되었네"
그래서 놀라서 호들갑을 떨면서 "예수님, 예수님, 어제 저주하신 나무가 말랐어요!" 어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는 속으로 별일 다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정말 그대로 된 것을 보고, 놀랬다는 것입니다. 당신 능력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말에 대해, "놀랬냐, 그러나 놀래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하나 말라죽게 한 것이 무엇 대수냐, 하시면서, 그리고는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이 이루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 고 덧 붙이셨습니다.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는 말은 그 당시 사회에서 쓰던 말로서,
어려운 일을 만난 경우를 뜻하였습니다. 즉, 정말, 말 그대로 북한산을 향하여 "너 한강으로 빠질지어다" 라고 63빌딩 꼭대기에 서서 믿고 외치면, 붕 날아와서 한강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기적이 일어 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줄 믿고" 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미래형입니다. 이루어질 줄 믿는 상태를 계속하여 가지고 있어라 라는 뜻입니다. 처음 몇 시간, 몇 일은 믿었는데, 그 다음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계속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예배드리는 한 시간 동안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 것 같은데, 저 힘들고 험한 삶의 현장에서는 믿음은 온데 간데 없고, 당장 눈앞의 현실이 더 파워가 세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바로 이러한 신앙적 삶들이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껍데기의 신앙을 낳는 것입니다. 잎만 무성한 신앙은 위험합니다.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 때문에 위험합니다. 열매 있는 신앙을 가지도록 합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예배당 안에서만 사용 가능한 믿음이 아니라, 저 어둡고 힘든 세상에서도 능히 사용되어지는 마스터 골드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성관 목사
마가복음 11:12~14, 20~23
영국의 유명한 철학자 버트란트 러셀이 <나는 왜 기독교인이 아니가>라는 책에서 오늘 본문에 나오는 무화과나무 사건을 말하면서,
"이 사건을 통해 예수는 불합리한 사람이요, 비상식적인 사람임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나는 예수를 믿지 않는다" 라고 했습니다. 13절에 나오듯이 아직 무화과 철이 아니라고 했는데도, 열매가 없다면서 저주를 퍼부어 그 나무를 말라죽게 한 것을 보게 될 때, 기독교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최고의 종교가 아닌 것 같다라고 한 것입니다. 13절의 무화과의 때가 아니라고 한 것은
6월과 7월이 본격적인 수확기인데, 바로 이 때가 아직 아니었다는 뜻입니다.
무화과나무는 3, 4월경이면 잎사귀가 나오는데, 이때 열매도 나옵니다. 이 열매가 차츰 익기 시작하여 6, 7월이면 완전히 다 익습니다. 아직 익지 않은 열매를 팔레스타인에서는 "파가" 라고 부르는데, 먹을 만한 과일이 없는 4월, 5월경에는 아직 익지 않은 이 무화과 열매를 먹기도 하는 것입니다.
12절에 예수님이 몹시 배 고프셨다고 했습니다. 이것이 오늘 사건의 발단이 되었습니다. 배가 고프지 않으셨다면, 무화과나무에 관심을 보이지 않았을 텐데, 너무도 시장하신 예수님이 아직 익지 않은 "파가" 라도 잡수시려고 했던 것입니다. 그 때가 유월절 무렵이었으므로 4월 초순경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잎이 무성하게 나 있으니 열매도 나왔겠지 하는 기대감을 가지고 무화과나무에 다가가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기대감이 실망으로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너무도 섭섭하신 예수님이 "너는 어째서 무늬만 무화과나무냐" 라고 책망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여유가 있을 때는, 하루를 천년 같이 느긋하게 우리를 기다려 주실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도 급하실 때에는 천년을 하루 같이 여기면서 재촉하십니다. 요4:35에 "너희가 넉 달이 지나야 추수할 때가 이르겠다 하지 아니하느냐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 예수님이 추수할 것은 많은데 일군이 심히 적으니 어떡할꼬 하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마 9:37). 이런 후에 어떤 일이 일어난 줄 아십니까? 제자들이 무척 고생을 했습니다. 당장 예수님은 직접 온 마을을 두루 다니시며 가르치기 시작하셨고, 제자들은 당장 둘씩 짝을 지어 전도 여행을 흩어 내 보내셨던 것입니다. 그러면서 예수님도 걱정이 되셨는지,
"내가 너희를 보냄이 양을 이리 가운데 보냄과 같구나... (마 10:16)" 라고 하였습니다. 아직 익지 않은 무화과 열매라도 잡수고자 내게 오시게 될 급한 상황이 언제든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오늘 본문에서 우리가 배우는 첫 번째 교훈입니다. 지금, 나는 그런 때를 위해 대비책이 되어 있는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까? 어떻게 무엇을 대비할 것인가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벌주신 이유가 무엇인가, 먼저 이것을 알아야 합니다. 열매들이 주렁주렁 달려 있는데, 완전히 익은 열매가 있는 것처럼 보여 놓고서 자세히 안을 살펴보니, 단 하나의 열매도 달려 있지 않았다는 것, 거기에 근본적인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껍데기만 있고, 내용은 없는 것, 요즈음 용어로 무늬만 진짜 같은 신앙생활을 지적하는 오늘 우리를 향한 말씀입니다.
우리는 주일날이면 교회 가는 것을 알고 있고, 예배가 어떤 순서로 진행되는지 알고 있습니다. "묵도합시다" 그러면 예배가 시작되고, 목사가 축도하면 예배가 끝난 줄 다 알고 있습니다. 여기 까지는 다 그런 대로 잘 되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진짜 예배는 11시부터 12시까지가 아니라, 그 이후부터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참 된 예배를 드렸느냐는 것을 예배 시간 중에는 잘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예배가 끝난 후부터 분명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삶이 얼마나 달라지고 있느냐, 이것입니다. 신앙 생활의 ABC는 예배당 안이 아니라, 밖에서부터 시작됩니다. 주일 날, 예배를 드리고 은혜를 받았습니다. 위로도 얻고, 용기도 얻고, 새 힘도 생겼습니다. 그러면 우리 생활의 태도가 달라져야 합니다. 일하는 현장에서 모습이 달라져야 합니다. 가게에서 손님에게 하는 말의 내용도 달라져야 합니다. 만약에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고 있다면, 그것은 오늘 본문의 사건과 똑 같습니다. 잎사귀만 무성한 것입니다. 저는 가끔 가다 마음이 막막해 질 때가 있습니다.
기껏 열심히 부르짖고 설교하였는데, 곧 바로 예배 후에 만난 성도가 전혀 다른 얘기를 할 때, 그렇습니다. 특별히, 어떤 직분을 맡은 성도가 그럴 때는 더욱 그렇습니다. 물론 주중에 제 자신이 전혀 다른 모습으로 살고 있는 것을 보게 될 때도 있어서, 저를 보면서 가슴 아픈 때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신앙의 본질이 무엇이냐, 예배의 본질이 무엇이냐입니다. 내가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고, 그 결과로써 내게 무엇이 주어지고, 내게 어떤 좋은 일이 생겼느냐 보다는, 내가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바뀌었고, 내 안에 말 할 수 없는 평화와 기쁨이 넘쳐서, 세상을 긍정적으로 보며 살게되었느냐, 이것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실망시킨 그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마치 사람을 대하듯 말씀하셨습니다. 14절에 "예수께서 나무에 일러 가라사대, 이제부터 영원토록 사람이 네게서 열매를 따먹지 못하리라"
"너무 하신 것 아니냐, 이건 감정적인 보복이다" 라고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하시는 일은 보장합니다. 절대적으로 개인적인 차원에서 일을 꾸미고, 진행하시지 않습니다.
14절 끝 부분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듣더라" 여기에 포인트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무화과나무에게 벌을 내리신 까닭이 바로 먼저 제자들을 가르치기 위함이었으며, 잎만 무성하고 열매는 없는 그 당시의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경고의 메시지였습니다. 20절을 보십시오. 다음 날 아침 같은 길을 걸어 다시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에, 무화과나무가 뿌리부터 다 말라 버린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베드로가 어제 예수님이 하셨던 말씀이 생각나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예수님, 보세요. 어제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로 정말로 무화과나무가 말랐는데요!" 이 말이 뜻하는 바는 무엇입니까? 두 가지 인데, 먼저 상황과 사건을 보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순간 하나님의 말씀과 예수님의 가르침을 생각해 낼 수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른 제자들도 다 보았지만, 베드로만이 어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생각해 내고, 말씀 그대로 되었구나 라고 깨닫고, 예수님께 고백한 것입니다. 보고, 듣고 아는 것으로 끝나지 맙시다. 하나님 말씀이 생각나야 하고, 예수님의 가르침이 떠올라야 합니다. 그런 사람이 진짜 보는 것이고, 진짜 듣는 귀를 가진 사람이라고 성경은 말합니다. 아주 깊은 동굴에 조그만 호수가 있는데, 그 안에 있는 물고기들 중에 눈이 멀어 있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연구를 해 보니, 깊은 동굴 안에서 캄캄한 호수에서 살기 때문에 빛을 볼 필요가 없다 보니, 세월이 흘러가면서 자연적으로 눈이 퇴화되어 장님이 되고 만다는 것이었습니다. 우리의 영적 눈과 귀도 마찬가지입니다. 안 쓰고 놔두면 퇴화될 것입니다. 다음으로 베드로의 얘기를 자세히 보면, "어, 정말로 말 그대로 되었네"
그래서 놀라서 호들갑을 떨면서 "예수님, 예수님, 어제 저주하신 나무가 말랐어요!" 어제 예수님이 무화과나무를 향하여 말씀하실 때는 속으로 별일 다 있다 라고 생각했는데, 오늘 정말 그대로 된 것을 보고, 놀랬다는 것입니다. 당신 능력 대단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이 말에 대해, "놀랬냐, 그러나 놀래지 말고 하나님을 믿어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나무하나 말라죽게 한 것이 무엇 대수냐, 하시면서, 그리고는 "이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하며, 그 말이 이루어질 것을 의심하지 않고 믿으면 그대로 되리라" 고 덧 붙이셨습니다.
"산더러 들리어 바다에 던지우라" 는 말은 그 당시 사회에서 쓰던 말로서,
어려운 일을 만난 경우를 뜻하였습니다. 즉, 정말, 말 그대로 북한산을 향하여 "너 한강으로 빠질지어다" 라고 63빌딩 꼭대기에 서서 믿고 외치면, 붕 날아와서 한강으로 떨어질 것이라는 얘기가 아니라, 우리의 삶 가운데 힘들고 어려운 일이 있을 때에, 하나님을 믿고 신뢰하면, 기적이 일어 날 것이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이를 줄 믿고" 라는 말을 기억하십시오. 미래형입니다. 이루어질 줄 믿는 상태를 계속하여 가지고 있어라 라는 뜻입니다. 처음 몇 시간, 몇 일은 믿었는데, 그 다음에 의심을 가지고 있으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계속적인 상태를 말합니다. 예배드리는 한 시간 동안은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 것 같은데, 저 힘들고 험한 삶의 현장에서는 믿음은 온데 간데 없고, 당장 눈앞의 현실이 더 파워가 세지는 것이 우리의 모습인데, 바로 이러한 신앙적 삶들이 잎은 무성하지만, 열매는 없는 껍데기의 신앙을 낳는 것입니다. 잎만 무성한 신앙은 위험합니다. 우리에게 오실 예수님 때문에 위험합니다. 열매 있는 신앙을 가지도록 합시다. 열매를 맺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 예배당 안에서만 사용 가능한 믿음이 아니라, 저 어둡고 힘든 세상에서도 능히 사용되어지는 마스터 골드 믿음이 우리 모두에게 있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
/이성관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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