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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25: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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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231603 |
2009.4.12
이사야의 묵시록
구약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사야 24-27장은 ‘이사야의 묵시록’이라고 부릅니다. 묵시록은 고대 이스라엘 문학의 독특한 형식입니다. 음악이나 미술에 고전파, 낭만파, 인상파 등의 서로 다른 표현 양식이 있는 것과 비슷하고, 또는 문학에 시, 소설, 수필 같은 장르가 있는 것과 비슷합니다.
이스라엘에 묵시록 기자들이 출현하게 된 역사적 배경이 있습니다. 기원전 587년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정복당했습니다. 고대에 전쟁은 제로섬 게임과 같습니다. 패배하면 모든 걸 잃고, 승리하면 모든 걸 얻습니다. 다윗 왕궁과 예루살렘 성전이 파괴되고 국보급 기물들이 약탈당했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죽고, 다치고, 삶의 터전을 잃었습니다. 그 와중에 부녀자들의 피해는 오죽했겠습니까. 하나님의 도성인 예루살렘이 함락당한 뒤 유대 지도자들은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의 역사가 왜 이렇게 몰락했는지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자칭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그 하나님은 세상을 창조하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아브라함을 갈대아 우르에서 끌어내셔서 가나안에 정착하게 하시고 후손과 땅을 주겠다고 약속을 맺으셨습니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 강한 손을 펼쳐서 해방시키신 분이십니다. 당대 최고 군사력을 자랑하던 파라오 군대를 바다에 장사지낸 분입니다. 아무도 감히 생각할 수 없었던 일들을 그 하나님이 행하셨습니다. 시내 산에서 모세를 통해서 율법을 주시면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되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그들은 바벨론에 의해서 초토화되고 말았습니다. 일어날 수 없던 일이 일어나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거짓말을 한 건가요? 하나님이 주무시나요? 하나님이 그들을 버리신 건가요? 도대체 무엇이 문제인가요?
예언자들이 발견한 대답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버린 게 아니라 이스라엘이 하나님을, 그 하나님의 말씀을 버렸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이스라엘이 맺은 약속을 이스라엘이 먼저 깼습니다.(렘 31:32) 문제는 이스라엘에게 있었습니다. 그들은 하나님만으로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은 현실적으로 다가오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는 좀더 강한 자극이 필요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우상을 섬길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고통당하고 멸망당하게 되는 이유였습니다. 예언자들은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다시 하나님에게로 돌아오라고 선포했습니다.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따르면 하나님이 약속을 새롭게 하시고 그들을 지킬 것이라고 말입니다. 이런 역사 해석이 바로 신명기사관입니다. 거의 모든 예언자들이 이런 역사관에 근거해서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이들과 다른 차원에서 역사를 해석한 예언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바로 묵시록 기자들입니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의 특징이 있습니다. 하나는 그들의 선포가 담고 있는 역사적 범주입니다. 그들은 이스라엘의 역사에 한정되지 않고 전체 인류의 역사를 내다보았습니다. 우주론적인 시각으로 역사를 해석했습니다. 사 25:6,7에 만군, 만민, 모든 민족이라는 단어들이 나오는데, 그런 것들이 바로 우주론적 차원을 가리킵니다. 다른 하나는 그들이 현재의 세상과 역사를 일반 예언자들에 비해서 훨씬 비관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이 묵시록 계열에 속한 성서기자들은 지금의 세상에서 아무런 희망을 볼 수 없었고, 그 세상은 곧 망할 것이라고 보았습니다.
사 24장은 여호와 하나님이 땅을 벌하신다고 했습니다. 6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저주가 땅을 삼켰고 그중에 사는 자들이 정죄함을 당하였고 땅의 주민이 불타서 남은 자가 적도다.” 25장의 시작도 그런 파멸입니다. 2절은 이렇습니다. “주께서 성읍을 돌무더기로 만드시며 견고한 성읍을 황폐하게 하시며 외인의 궁성을 성읍이 되지 못하게 하사 영원히 건설되지 못하게 하셨으므로” 그들은 이 세상을 완전히 부패한 것으로 보고 그 어디에서도 구원을 찾아볼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 세상은 하루빨리 망해야만 했습니다.
기원전 587년의 예루살렘 함락을 목도한 그들의 눈에 세상이 그렇게 보인다는 건 당연합니다. 수년전에 미국의 공격을 받은 아프가니스탄과 이라크 주민들, 또는 이스라엘의 공격을 받은 팔레스틴 가지 지구 주민들에게 세상이 그렇게 보였을 겁니다. 연예계의 먹이사슬 구조에서 견디다 못해 스스로 생명을 끊은 고 장자연 씨가 경험한 세상도 그랬을지 모릅니다.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다 죄 아래에 있다.”(롬 3:9)는 바울의 진술도 이런 묵시록 흔적입니다. 거기서 바울은 시편을 인용하면서 모든 이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묵시록 기자들의 이런 비관적인 역사 해석은 일리가 있습니다.
묵시록 기자들이 세상과 역사를 부정적으로 해석하고 묘사하는 것만으로 끝났다면 그들은 단지 허무주의자, 회의론자, 염세주의자에 불과했겠지요. 그것은 하나님의 구원 역사와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묵시록 기자들의 영성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들은 훨씬 궁극적인 구원을 선포했습니다. 고통이 깊은 곳에서, 절망이 깊은 곳에서 훨씬 높은 구원을 내다보았습니다.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는 주님의 말씀이 가리키고 있듯이 삶의 나락으로 떨어진 사람만이 그것과 질적으로 전혀 다른 구원의 세계를 경험할 수 있는 법입니다. 이사야의 묵시록 기자는 그런 구원을 25:6-8절에서 선포했습니다.
죽음이 없는 세상
본문 6절에서 우리는 묵시록 기자의 영적 상상력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께서 시온 산에서 잔치를 배설하십니다. 그 잔치에 나오는 먹을거리가 두 가지입니다. 기름진 것과 맑은 포도주입니다. 술을 좋아하시는 분들은 하나님이 준비하신 잔치를 기대해도 좋습니다. 직접 말씀을 읽어보겠습니다. “골수가 가득한 기름진 것과 오래 저장하였던 맑은 포도주”를 준비하신다고 합니다. 전쟁의 패배로 삶의 토대가 완전히 허물어진 그들에게 이런 먹을거리가 얼마나 그리웠을지는 상상이 갑니다. 하나님의 구원에 대한 절박한 심정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7절은 한 걸음 더 나아갑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민족의 얼굴을 가린 가리개를 제하신다고 했습니다. 초상이 났을 때 얼굴을 가리개로 덮습니다. 하나님이 그 가리개를 제한다는 말은 죽음의 슬픔을 극복하게 하신다는 뜻입니다. 어떻게 극복하게 하실까요? 단순히 죽은 사람을 다시 살려낸다는 말씀인가요? 죽은 사람이 다시 살아나도 기쁨은 잠시뿐입니다. 죽은 사람을 기억에서 잊어버리게 하신다는 건가요? 헬라 신화에는 저승에 망각의 강 ‘레테’가 있다고 하더군요. 그런 방식으로 슬픔이 희미해질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으로 해결될 수는 없습니다. 그건 선의의 속임수입니다. 이사야의 묵시록 기자는 다른 대답을 제시합니다.
본문 8절을 보십시오. 놀라운 선언입니다. 그가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묵시록 기자들이 전하는 여호와 하나님은 죽음을 무너뜨리는 분이십니다. 죽음이 무너질 때 모든 사람들의 얼굴에서 눈물이 씻길 것이며 하나님의 백성들의 수치도 제거될 것입니다. 죽음이 무너질 때 죽음으로 인해서 얼굴을 덮었던 가리개도 더 이상 필요가 없습니다. 인간 삶의 모든 문제의 해결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이사야의 묵시록 기자가 한 이 말을, 즉 하나님이 죽음을 무너뜨린다는 이 말을 조금 더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죽음이 무엇이냐 하는 질문이 필요합니다. 아무도 죽음이 무엇인지 모릅니다. 죽어 봐야만 죽음을 알 수 있는데, 죽으면 다시 삶으로 돌아올 수 없으니 어떻게 죽음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간혹 죽어서 천국을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것은 허튼 주장입니다. 우리는 죽음 자체를 모릅니다. 우리 앞에 놓인 분명한 사실은 죽음이 입을 벌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무도 거기를 피해갈 수 없습니다. 죽음 앞에서 우리는 모든 것을 내려놓아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업적을 포기해야 합니다. 가까운 사람과도 떨어져야 합니다. 그때에서야 우리는 모든 율법으로부터 해방되겠지요.
성서 기자들도 죽음이 무엇인지에 대해서 직접 말하지 않습니다. 대신 죽음이 왜 시작되었는지에 대해서 말합니다. 성서기자들은 이런 죽음을 인간이 행한 죄의 결과라고 생각했습니다. 인간이 본질적으로 악하기 때문에 죄를 범한 것은 아닙니다. 인간은 그 어떤 피조물보다 선하게 창조되었습니다. 창세기 타락설화에 따르면 인간을 유혹하는 악의 세력이 존재합니다. 고대 신화의 방식으로 묘사하고 있는 그 타락설화는 악의 유혹에 취약한 인간 실존을 정확하게 지적합니다. 인간은 인격적이고 도덕적인 노력으로 죄를 극복할 수 없습니다. 인간에게 죄를 극복할 수 있는 능력이 아예 없다는 것입니다. 결국 인간은 죄의 결과인 죽음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인간의 숙명이며, 딜레마입니다.
여러분, 그렇다고 불안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저는 여러분들이 죄의식에 휩싸이라는 말씀을 드리는 게 아닙니다. 성서는 인간이 죄와 죽음을 극복할 수 없다고 말하지만 그것이 핵심은 아닙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죄와 투쟁하신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하나님이 죽음의 세력과 싸우신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그렇게 하고 싶어도 그럴 능력이 없습니다. 오히려 아담과 카인 설화에서 보듯이 악의 세력에게 이용당할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악, 죽음과의 존재론적 싸움은 하나님의 몫입니다. 그 사실을 오늘 이사야의 묵시록 기자는 여호와 하나님이 죽음을 영원히 무너뜨릴 것이라는 말로 대변했습니다.
이 묵시록을 여러분은 어떻게 받아들이시나요? 묵시록 기자가 무너질 거라고 했던 죽음은 아직 무너지지 않았습니다. 죽음으로 인한 눈물과 분노는 여전히 인간의 삶을 절망스럽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의학이 첨단으로 발전한 시대에도 우리는 거의 무방비 상태로 죽음에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단순히 죽음만의 문제가 아닙니다. 인간의 모든 욕망과 그 욕망으로 인해 벌어지는 비인간적인 사건들은 죽음에 대한 무의식의 발로라는 점에서 죽음이 인간의 삶 전체를 똬리를 틀듯이 움켜쥐고 있습니다. 죽음의 세력이 하나도 약해지지 않았다면 이사야의 이 묵시록은 백일몽이었을까요? 죽음을 넘어서고 싶어 한 유대인들의 심리적 투사일까요? 유토피아적 망상에 불과한 것일까요?
예수 부활하셨네
우리는 이사야의 묵시록 기자가 본 영적 상상력이 인류의 구체적인 역사에서 실현된 사건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고 아리마대 요셉의 무덤에 묻혔습니다. 하나님 나라를 선포한 한 유대 청년의 삶이 그렇게 끝나는 것 같았습니다. 아마 많은 이들이 “좋은 사람이었는데, 아깝게 죽었군.” 했을 겁니다.
그를 추종하던 제자들도 모두 흩어져 고향으로 돌아갔습니다. 얼마 후 제자들은 이상한 경험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들에게 예수님이 나타났습니다. 이건 도저히 합리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무덤에 묻혔다는 건 죽음이 확인된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지 않은 사람과 만날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예배를 드리는 이 자리에 있던 한 사람이 밖으로 나갔다고 합시다. 그리고 문을 잠갔는데 얼마 후에 이 자리에 나타났다고 합시다. 이런 일은 마술이 아니라면 있을 수 없습니다. 마술은 실제가 아니라 속임수입니다.
예수님의 제자들도 자신들의 경험이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분명하게 알고 있었습니다. 헛것을 본 게 아닌가 하고 의심했습니다. 예수님의 몸을 실제로 만져보지 않으면 믿을 수 없다고 한 도마의 주장은 괜한 게 아닙니다. 그런데 어느 한 제자만이 아니라 여러 제자들에게 그런 경험이 일어났습니다. 개인에게도 나타나고, 집단적으로도 나타났습니다. 제자들은 그 경험이 무엇인지를 놓고 심각한 고민에 빠졌습니다. 그들은 구약성서를 다시 읽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그들은 이미 구약이 메시야의 부활을 예언했다는 사실을 깨닫고, 자신들의 경험이 바로 그것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바로 그 하나의 사실에 매달렸습니다. 사람들이 십자가에 처형한 예수님이 바로 구약성서가 예언한 부활의 메시아라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예수님의 공생애에 직접 만난 적이 없었던 바울도 부활의 주님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복음서 기자들과 달리 이 사실을 논리적으로 설명합니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난” 예수 그리스도는 게바에게 나타나셨고, 열두 제자에게 나타나셨으며,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나타나기도 했고, 자신에게도 나타나셨다고 합니다. 그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 믿음도 헛것”이라고 합니다.(고전 15:14) 기독교 신앙의 모든 것이 바로 예수님의 부활에 놓여 있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바로 죽음의 세력을 무너뜨린 하나님의 구원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이 현실에서는 예수님의 부활로 죽음이 완전히 무너진 것 같지가 않지요? 이사야의 묵시록 기자가 그 사실을 선포한 뒤에도 여전히 죽음의 세력이 기승을 부리고 있듯이 말입니다. 이런 현실에서 부활 생명을 인식하고 뚫어보는 것이 신앙의 눈입니다. 저는 여러분을 말도 되지 않는 어떤 것을 무조건 믿으라고 다그치는 게 아닙니다. 부활 사건을 신비화하거나 심리화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기독교 신앙의 고유한 생명 경험에 들어가라는 뜻입니다. 그것은 광신도 아니고 미신도 아닙니다. 더구나 자기도취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일으킨 생명 사건에 영적인 눈을 뜨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 여러분에게 필요한 신앙적 태도는 구태의연한 생명 형식에 길들여지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부활의 영성으로 들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가 지금 경험하는 그런 생명 형식을 절대화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부활은 그런 것과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전적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변화하는 사건입니다. 아직 까지 인류가 경험하지 못한 유일회적인 생명으로의 변화입니다. 그것은 실험실에서 반복적으로 생산하거나 증명해낼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유전공학자들이 복제기술을 통해서 멋진 외모에 지성과 건강을 모두 갖춘 복제인간을 만들어낸다고 해도 그것은 조잡한 생명입니다. 그런 것은 아무리 무늬를 멋있게 만든다고 하더라도 결국 유한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영원한 생명을 담을 수가 없습니다. 그런 것은 달걀 안의 생명에 불과합니다. 알의 안과 밖은 전혀 다른 세계입니다. 부활 생명은 생명에 대한 우리의 모든 선입견 너머에서 다가올 것입니다.
2009년 부활절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죽음을 영원히 무너뜨리라 한 이사야 묵시록 기자의 선포가 예수님의 부활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 사실을 알고 믿는 우리는 비록 죽음의 그림자가 배회하는 이 세상에서 살지만 생명의 승리에 참여한 사람들입니다. 여러분, 기억하십시오. 예수 다시 사셨습니다. 죽음의 세력은 영원히 무너졌습니다. (2009.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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