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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요10:11-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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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245108 |
2009.5.3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가기 위한 가장 중요한 우리의 태도는 질문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의 가르침에 트집을 잡거나 시비를 걸라는 말이 아닙니다. 트집은 바리새인들의 주특기였습니다. 가이사에게 세금을 바칠까요, 말까요 하는 질문은 트집입니다. 질문은 트집이 아닙니다. 질문은 진리로 들어가는 문과 같습니다. 실제로 궁금한 것이 많은 사람들이 질문을 합니다. 궁금한 게 많다는 것은 그의 영혼이 진리에 공명한다는 증거입니다. 아이들에게 질문이 많다고 하지요? 별이 왜 반짝이는지, 자기가 어디서 왔는지, 왜 남자와 여자가 있는지, 왜 바람이 부는지 등등, 모든 게 궁금합니다. 나이를 먹으면서 이 세상에 길들여지면 질문을 잊어버립니다. 길들여진다는 것은 자신이 뭔가를 알고 있는 것으로 착각한다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기독교 신앙에 길들여지면서 질문을 잊어버릴 수 있습니다. 기독교 신앙의 중심에 들어가려면 여러분은 이런 질문의 세계로 들어가야 합니다. 이런 질문은 우리가 죽을 때까지 계속되어야 합니다.
그중의 한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예수님의 십자가를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고 믿습니다. 이 사실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물론 틀린 생각이 아닙니다. 그러나 조금 다른 방향에서 생각해보십시오. 하나님은 왜 십자가 처형이라는 방식으로 인류를 구원하셨을까요?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말씀으로 인류를 구원하실 수 있었을 텐데요. 예수님이 공자님이나 부처님처럼 천수를 다 살면서 하나님 나라를 선포하셨다면 오히려 더 빨리, 더 확실하게 인류 구원이 이뤄지지 않았을까요? 이에 대한 최종적인 대답은 종말이 이르러야 찾을 수 있을 겁니다. 지금은 잠정적인 대답을 성서에서 들을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가 어떻게 대답하는지 귀를 기울여보십시오.
목숨을 버린다
요한복음 기자는 예수님을 ‘선한 목자’로 표현합니다. 이런 표현은 공관복음에는 없는 요한복음의 독자 전승입니다. 시편 23편은 여호와를 ‘나의 목자’라고 표현했습니다. 요한복음을 읽는 독자들은 이 시편을 연상했을 겁니다. 여기서 선한 목자와 삯군이 비교됩니다. 삯군은 도둑이나 마찬가지입니다.(10절) 겉으로는 양을 지킨다고 하지만 그것은 단지 돈 때문입니다. 삯군은 이리가 오면 양을 버리고 달아납니다.
선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버립니다. 오늘 본문에 ‘버린다’는 단어가 11절, 15절, 17절, 18절에 반복해서 나옵니다. 그 목자가 선한 목자인지 삯군인지를 분간할 수 있는 길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는가 아니면 달아나는가에 있습니다. 여기서 이 목자가 선하다는 것을 분명히 해야 합니다. 성서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칼로스’(선한)는 ‘참 빛’(요 1:9)에서 사용된 ‘참’(알레티노스)이거나, 또는 ‘신적 인간’이라는 뜻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린다는 이 사실에서 중요한 것은 그가 스스로 선택한 죽음이라는 사실입니다. 전쟁에 나갔다가 폭탄에 맞아서 어쩔 수 없이 죽는 것이 아닙니다. 죽지 않으려고 이리저리 피해 다니다가 막다른 골목 안에 빠져들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위해서 스스로 자기 목숨을 내어줍니다. 요한복음이 선한 목자 표상을 통해서 말하려는 것은 예수님이 남에게 떠밀려서 십자가에 달린 게 아니라 스스로 내어주었다는 사실입니다.
요한복음의 이런 대답은 초기 기독교가 풀어야 할 근본적인 질문과 연관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 아무도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의 구원론적 차원을 이해하지도, 인정하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십자가는 모두에게 배척받았습니다. 바울에 따르면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은 유대인들에게 거리낌의 대상이고, 이방인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그것은 종교적인 차원에서나, 정치적인 차원에서나, 철학적인 차원에서나 부끄러움의 대상일 뿐이었습니다. 아무도 그런 죽음을 원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공관복음서에 따르면 예수님도 십자가의 죽음을 피하고 싶어 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제사장들이 보낸 군인들에게 체포당하기 바로 직전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그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정말 예수님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했을까요? 마지못해 십자가에 돌아가신 걸까요? 이에 대해서 요한복음 그렇지 않다고 대답합니다. 예수님은 선한 목자가 양을 위해서 목숨을 버리듯이 우리를 위해서 십자가에 달리셨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 대한 설명이 서로 다른 것처럼 보입니다. 공관복음은 십자가를 피하려고 한 것으로, 요한복음은 스스로 택한 것으로 묘사했습니다. 공관복음에서는 수동적으로 묘사되었고, 요한복음에서는 능동적으로 묘사되었습니다. 겉으로는 달라보여도 실제로는 다르지 않습니다. 십자가 사건 앞에서 취한 예수님의 태도에는 수동성과 능동성이 복합적으로 작용합니다. 양자가 긴장을 이루고 있습니다. 미래의 불확실성이라는 차원에서는 수동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십자가의 죽음은 모든 것이 끝장나는 것입니다. 생명을 얻는 길이 아니라 생명을 포기하는 길이었습니다. 하나님 나라에 대한 자신의 선포와 행위가 완전히 수포로 돌아가는 일이었습니다. 그것을 피하고 싶다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공관복음서에서도 결국 아버지의 뜻대로 하시라고 기도하고 그 운명을 받아들였습니다. 자신으로서는 불확실하지만 하나님 안에서는 확실하다는 사실을 아신 것입니다. 하나님이 인자하시다는 사실을, 하나님 안에서만 생명이 보장된다는 사실을 받아들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께 순종하는 자세로 십자가를 받아들였습니다. 이것은 분명히 능동적인 사건입니다. 공관복음은 수동성에 포커스를, 요한복음은 능동성에 포커스를 두었습니다. 이렇게 말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수동적 능동성이며, 능동적 수동성입니다. 여기에 참된 신적인 능력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기자는 이것을 독특한 방식으로 진술했습니다. 예수님에게 고유한 ‘권세’가 있다고 말입니다. 그는 목숨을 빼앗긴 분이 아니었습니다.(18절) 물론 형식적으로만 본다면 산헤드린 공의회와 로마 총독이, 그리고 그들에게 설득당한 유대인 민중들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처형시켰습니다. 복음서 기자는 역사를 그렇게 평면적으로 보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목숨을 건드린 자도 없고, 건드릴 자도 없습니다. 그 목숨은 오히려 예수님의 몫입니다. 예수님 자신이 목숨을 버릴 권세도 있고 다시 얻을 권세도 있습니다. 그런 권세가 있는 분이 결국 자기 목숨을 버렸습니다. 이게 말이 안 되나요? 너무 현학적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앞에서 질문한 내용을 다시 기억하십시오. 말씀 한 마디로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왜 말씀 한 마디로 세상과 인류를 구원하지 않으시고 자기 아들을 십자가에 다는 방식을 취하셨을까요? 그렇다면 그분의 전지전능이 손상되는 게 아닐는지요. 그런 식으로만 세상을 바라본다면 우리는 결코 기독교 신앙의 중심으로 들어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전능, 권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그런 것과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분의 전능은 오히려 무능으로 나타납니다. 그분의 높으심은 오히려 낮추심으로 나타납니다. 거꾸로도 똑같습니다. 그분의 낮추심이야말로 그분의 높으심입니다. 그분의 무능이야말로 그분의 전능입니다. 초라한 말구유에 누운 분이 바로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아들이었습니다. 몰트만은 <십자가에 달린 하나님>에서 전능의 하나님이 바로 십자가에 달렸다고 설명했습니다. 저주의 상징이었던 십자가에 하나님이 계시된 것입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그 하나님이 바로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십니다.
풍성한 생명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우리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내 주셨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게 끝났다면 그것은 결정적인 사건이 되지는 못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내 목숨을 버리는 것은 그것을 내가 다시 얻기 위함이니 이로 말미암아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느니라.”(요 10:17) 다시 목숨을 얻었다는 사실이 없다면 버리는 것은 일종의 휴머니즘의 실현에 불과합니다. 이렇게 박애주의 정신에 따라서 산 사람은 많습니다. 때로는 부모를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고, 국가를 위해서 목숨을 버리기도 하고,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 친구를 위해서, 또는 어떤 정치적 신념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초개같이 버리기도 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가장 거룩한 사람들을 순교자라고 합니다. 그들은 신앙을 위해서 목숨을 바친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죽음은 그저 숭고한 죽음일 뿐이지 예수님의 죽음과는 비교될 수 없습니다.
무엇이 다를까요? 우리는 왜 순교자들을 따르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따를까요? 예수님만이 생명을 얻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만 부활하신 분이십니다. 그 부활로 예수님은 영원한 생명을 얻었습니다. 그분만이 하늘로 올라가셨습니다. 하나님과 하나가 되셨습니다. 그분을 통해서 우리는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 10:10) 그렇습니다. 예수님만이 우리에게 풍성한 생명을 허락하십니다. 그분만이 양을 위해서 자기 목숨을 버림으로써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는 선한 목자이십니다.
풍성한 생명이라는 말은 자주 들었지만 그게 실질적으로 마음에 와 닿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너무 막연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문제에 관해서 깊이 생각하는 건 골치 아프니까 모든 걸 접어두고 그저 열광적으로 믿음 생활을 하든지, 아니면 단지 교회생활에 매달려버리고 맙니다. 교회에서 좋은 사람 만나고, 재미있는 행사를 하고, 또 경우에 따라서 사람들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사실에 비중을 두고 신앙생활을 합니다. 이처럼 풍성한 생명을 모른 채 주님을 선한 목자로 따르는 시늉을 한다는 건 불행한 일입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건 목자와 양의 관계입니다. 그 관계가 분명해야만 풍성한 생명이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목자가 양을 알아야 하고, 양이 목자를 알아야 합니다. 선한 목자는 양을 잘 압니다. 좋은 양은 목자를 잘 압니다. 양쪽이 서로 알아야만 풍성한 생명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아는 게 쉽지 않습니다. 요한복음에 따르면 안다는 것은 마치 하나님이 예수님을 알고 예수님이 하나님을 아는 것과 같습니다.(14,15절) 요한복음이 말하는 안다는 차원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이 세상에서 경험하는 그런 차원과는 다릅니다. 우리는 안다고 해봐야 상대방의 신상명세에 관한 것뿐입니다. 부부도 그 이상을 알기 힘듭니다. 사람을 너무 자세하게 알려고 노력하지 않으시는 게 좋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한계가 있습니다. 알았다고 생각했지만 결국 모른다는 사실만 확인될 뿐입니다. 실망할 일만 일어납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얼마 전에 검찰 소환 조사를 받았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과 박연차 씨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우리가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오랫동안 가깝게 지냈던 그들이 서로 몰랐다는 것, 그래서 실망할 수밖에 없는 일들이 일어났다는 것은 분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에서 안다는 건 기본적으로 성령의 일입니다. 성령은 우리보다 우리를 더 잘 아시는 분이십니다. 성령만이 사람의 중심을 아십니다. 우리가 어떤 대상을 그 중심에서 안다는 것은 성령을 안다는 의미입니다. 초기 기독교가 오순절 성령 강림 경험 뒤에 방언, 즉 새로운 언어를 말하고, 예수님을 세상에 변증하기 시작했다는 사도행전의 보도도 바로 이것을 말합니다. 성령이 바로 기독교의 인식론적 통로라는 뜻입니다. 이런 점에서 우리는 성령이여, 우리에게 오소서, 하는 기도를 드려야합니다. 성령을 통해서 우리는 선한 목자가 주시는 풍성한 생명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이 무엇일까요? 물론 교리 문답 식의 대답은 잘 알고 있을 겁니다. 풍성한 생명은 곧 구원을 얻는 거라고 말입니다. 옳은 대답이지만 그것은 또 구원이 뭐냐 하는 질문으로 이어질 뿐입니다. 이 땅에서도 행복하게 살고 죽어서 천당 가는 게 바로 풍성한 생명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 행복이 무엇인지, 천당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이 또 따라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기쁨과 자유, 평화가 바로 풍성한 삶이라고 생각합니다. 그것도 옳은 대답입니다. 여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기쁨, 자유, 평화는 예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얻을 수 있는 것들입니다. 그렇다면 선한 목자이신 예수님이 주시겠다고 하신 풍성한 생명은 무엇일까요?
여러분, 그것은 약속입니다. 그 풍성한 생명은 예수님을 통해서 주어진 종말론적 약속입니다. 그것이 아직 우리에게 현실로 다가오지는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나라가 아직 현실로 완성되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그 풍성한 생명은 잔치와 같습니다. 잔치집의 처녀들은 잔치에 참여하기 위해서 신랑이 오기를 기다립니다. 이 처녀들이 재촉한다고 해서 신랑이 빨리 오지 않습니다. 신랑이 오기 전까지는 잔치가 시작될 수 없습니다. 그때까지는 지루한 기다림이 있습니다. 그 지루한 기다림이 풍성한 생명을 약속으로 받은 우리 기독교인들의 인생입니다.
오늘 기독교인들이 착각하는 게 있습니다. 풍성한 삶을 현재 누릴 수 있다는 생각이 그것입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의 현실은 아무리 신앙이 좋아도 힘듭니다. 다른 사람에게만이 아니라 우리 자신에게 실망할 때도 많습니다. 허무할 때도 많습니다. 우리가 교회 공동체에서 누리는 생명도 역시 제한적입니다. 공동체에 대한 기대가 크면 실망이 더 클 수도 있습니다. 풍성한 생명과 오늘 우리의 삶이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 풍성한 삶을 기다리는 사람은 이 허무한 삶에서 영적 긴장감을 안고 삽니다.
오늘은 부활절 넷째 주일입니다. 부활의 주님만이 우리의 선한 목자이십니다. 왜 그럴까요? 그분만이 완전한 생명을 얻으셨으며, 그분만이 우리에게 부활의 풍성한 생명을 주시기 때문입니다. 그 부활 생명이 우리에게 현실로 드러나는 그날까지 희망을 안고 이 삶을 견디고 헤쳐 나갑시다. (2009.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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