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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롬8:2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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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257726 |
2009.5.31
성령의 피조물
오늘은 전 세계 교회가 다함께 지키는 성령강림절입니다. 사도행전의 보도에 따르면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기억하고 기도하던 원시 기독교 공동체에게 성령이 임했습니다. 그 뒤로 그들은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했다고 합니다. 사도행전의 역사는 바로 성령의 역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고넬료 가족에게 성령이 임하는 걸 보고 놀랐습니다. “이 사람들이 우리와 같이 성령을 받았으니 누가 능히 물로 세례 베풂을 금하리오.”(행 10:47) 사도행전만이 아니라 모든 신약성서는 성령을 전합니다. 성령의 충만을 말하고, 성령의 열매에 대해서 말합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율법을 지킴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그들이 성령을 받았다고 했습니다.(갈 3:2-5) 교회 공동체는 바로 성령의 피조물로 자기 정체성을 확립했습니다.
니케아-콘스탄티노플 공의회는 교회의 구조를 세 가지로 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 성령의 피조물,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입니다. 삼위일체론적인 교회론입니다. 이중의 하나가 바로 성령의 피조물입니다. 성령이 교회를 만들었다는 게 무슨 뜻일까요? 교회는 단순히 어떤 인간적인 조직이 아닙니다. 목사와 장로와 집사로 구성되는 그런 조직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로마 가톨릭교회라는 조직, 또는 장로교회나 루터교회라는 조직체가 아닙니다. 그런 교권이 인정해야만 교회가 되는 게 아닙니다. 교회 조직을 뛰어넘는 창조의 영이며, 진리의 영이고 부활의 영인 성령에 의해서만 가능한 공동체입니다. 성령의 피조물은 자유의 공동체입니다. 성령에게만 의존하기 때문에 그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자유롭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의 출발은 바로 이런 자유의 복음이었습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령의 피조물이라는 사실은 경우에 따라서 왜곡되기도 합니다. 초기 기독교 공동체에 만연했고, 지금도 여전한 열광주의에 의한 왜곡입니다. 열광주의는 성서말씀을 초월하고, 교회의 직무를 초월하는 성령과의 직접적인 소통을 강조합니다. 결국 신학을 부정하고 구체적인 교회 공동체를 무시합니다. 황홀경과 초월적 신비에 치우침으로써 교회 체제와 신조와 신학과 전통을 우습게 여깁니다. 이들에게는 두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첫째, 이들의 신앙적인 경험이 남달리 뜨겁기 때문에 그 확신으로 다른 이들을 쉽게 배척합니다. “예수구원, 불신지옥”이라는 글씨를 써 붙인 십자가를 들고 도심 한복판에서 전도합니다. 둘째, 역사보다는 개인의 초월적 신앙 경험만을 추구합니다. 이들에게 역사는 무의미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역사도 역시 실종됩니다. 그들은 무조건 예수님의 영광에 초월적으로 참여한다는 사실에만 매달리느라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셨다는 역사적 사실을 외면합니다. 고난 없이 승리에만 매달립니다.
이런 열광주의 신앙은 한국교회에 유난히 강합니다. 오순절 성령강림을 강조하는 소위 ‘순복음’ 유의 교회가 대표적입니다. 그들은 표면적으로 드러나는 성령의 은사에 치중해 있습니다. 방언, 입신, 치유 등을 앞세웁니다. 그런 은사가 없으면 신앙이 없거나 신앙이 약한 것처럼 말하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신학과 교회의 직무는 약화됩니다. 그 이외에도 회심과 전도를 강조하는 ‘부흥회’ 유의 교회나 성직 제도를 타파하려는 회중교회도 여기에 속합니다. 이들에게 예전 예배는 의미가 없습니다. 교회 전통도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지금 여기서 예수님을 주님으로 영접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 모든 유형의 교회들은 성령과의 직접적인 경험을 강조한다는 특징이 있습니다.
이런 열광주의가 모두 잘못되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열광주의는 문자나 조직에 묶인 신앙을 자유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열광주의는 유대교 바리새파의 율법주의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중세기 개신교 열광주의는 로마 가톨릭의 교권으로부터 자유를 얻기 위한 노력이었습니다. 초기 루터도 그런 흔적을 보이고, 뮌처는 심각하게 열광주의에 빠졌습니다. 열광주의는 나름으로 신앙적 진정성을 확보하려는 열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그런 열광주의가 극단으로 치닫게 되면 결국 교회의 본질까지 훼손한다는 것입니다.
바울은 이런 열광주의자들과 싸웠습니다. 고린도 교회는 전형적인 열광주의가 만연했습니다. 고린도 교회의 열광주의자들은 성령을 자신들이 소유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증거가 바로 방언이었습니다. 그 방언을 천사의 말이라고 주장했습니다.(고전 13:1) 방언은 곧 그들이 성령을 받은 증거였습니다. 그들은 그것을 자랑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방언을 울리는 꽹과리가 될 수 있다고 경고했습니다. 고전 14장에서 바울은 그것을 예언과 비교하면서 더 자세하게 설명했습니다. 통역하는 사람이 없으면 교회에서 공적으로 방언하지 말라고 했습니다.(고전 14:28) 왜냐하면 모든 것은 교회의 덕을 세워야하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방언을 거부한 것은 아닙니다. 그는 다른 사람보다 방언을 더 많이 했습니다.(고전 14:18) 문제는 고린도 교회에서 방언이 믿음을 자랑하는 도구로 변질되어 버렸다는 데에 있습니다. 바울에게는 개개인의 믿음과 확신이 중요한 게 아니라 교회의 덕과 질서가 중요했습니다. 덕을 세우는 은사가 아니라면 그것은 결국 성령의 은사가 될 수 없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
고린도 교회를 향한 바울의 가르침에서 오늘 우리가 방언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말아야 한다는 것인지를 물을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고린도교회에서 일어난 특수한 종교현상이었기 때문에 그것을 근거로 방언의 타당성 여부를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것은 그렇게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정작 중요한 것은 바울이 말하는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입니다.
롬 8:26절에 그 단서가 있습니다. 거기서 바울은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신다고 말했습니다. 성령이 탄식한다는 말이 무슨 뜻일까요? 성령이 어떻게 탄식할까요? 탄식은 한탄하여 한숨을 쉬는 겁니다. 말할 수 없는 탄식이란 말로 표현해낼 수 없는 슬픔을 가리킵니다. 말문이 막히는 슬픔입니다. 여기서 ‘말할 수 없다’는 그 사실이 중요합니다. 바울은 고후 12:1-10절에서 초월적인 환상과 계시 경험을 말합니다. 그는 셋째 하늘에 이끌려갔다고 합니다. 몸 안에 있었는지 밖에 있었는지도 모를 지경이었습니다. 그는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고후 12:4) 언어 너머의 세계에 대한 경험이었습니다.
동양의 가르침에서도 불립문자(不立文字)라는 말이 있습니다. 참된 진리는 언어와 문자로 세울 수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로 규정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위해서 형상을 세울 수 없고, 이름을 붙일 수도 없습니다. 칼 바르트 식으로 말해서 ‘절대타자’인 그분은, 즉 이 세상에서 존재유비가 불가능한 그분은 우리의 그 어떤 인식론적 범주로 규정될 수 없습니다. 사랑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 사이의 사랑은 말로 표현이 불가능합니다. 사랑의 시(詩)는 그냥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사랑을 담지는 못합니다. 보세요. 눈빛 하나로 통할 수 있는 두 사람의 관계를 말로 설명이 가능할까요? 그냥 함께 존재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관계를 어떻게 인간의 말로 표현한단 말입니까?
말이 나오지 않는 궁극적인 상황에서 인간은 탄식할 수밖에 없습니다. 남이 알아들 수 없는 소리를 외칩니다. 아, 어, 욱 하는 외마디만 나옵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갑자기 죽었다고 합시다. 말을 잃습니다. 방언은 바로 그와 같은 소리 현상입니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대화할 때 사용하는 그런 언어 너머의 언어입니다. 궁극적인 언어입니다. 선험적 언어입니다. 이런 점에서 방언은 천상의 언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이렇게 묘사했습니다. “성령이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느니라.”(롬 8:26)
방언이 오해될 수도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방언을 배운다고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 시범을 보인다고도 합니다. 할렐루야를 수없이 반복해서 외치라고 강요하기도 합니다. 그런 현상들은 인간의 심리 기술적 작용입니다. 인간은 어떤 방식으로든지 엑스타시 경험을 할 수 있습니다. 셋째 하늘에 올라간 경험에 의해서만 가능한 언어 이전의 언어를 사람이 가르칠 수는 없고, 배울 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많은 사람들이 그런 걸 억지로라도 경험하려고 애를 쓴다는 것은 성서가 말하는 방언의 본질이 무엇인지 전혀 모른다는 의미겠지요.
지금 바울은 방언을 중심으로 한 열광주의자들과 투쟁하고 있습니다. 방언 문제에서 열광주의자들과 바울 사이에서 가장 결정적인 차이는 다음과 같습니다. 열광주의자들에게 방언은 영광의 증거였던 반면에 바울에게는 오히려 결핍의 증거였습니다. 바울에게서 방언은 기독교 공동체의 영적 능력과 풍요로움을 말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 연약함을 말하는 것입니다. 마치 어린아이들의 울음소리, 우리가 알아들을 수 없는 옹알이와 같습니다. 그것은 승리가 아니라 고통입니다. 그것을 기쁨이 아니라 슬픔입니다. 그것은 “말할 수 없는 탄식”입니다.
피조물의 탄식
방언에 대한 열광주의자들과 바울의 차이가 왜 중요할까요? 핵심은 세상과 역사입니다. 열광주의자들은 몰아적 황홀경에 빠져서 세상과 역사를 포기했습니다. 세상은 간 데 없고 부활의 영광만 보인다는 식입니다. 그들은 곧 예수님이 재림하시기에 더 이상 이 세상의 정의와 평화를 위해서 투쟁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셋째 하늘에 오른 신비로운 경험을 한 사람이지만 이 세상의 현실을 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천상의 언어라 할 수 있는 방언을 오히려 지상의 말할 수 없는 탄식이라고 보았습니다. 그에게서 하늘의 언어와 땅의 언어가 일치합니다. 성령이 교회 공동체를 통해서 바로 그 일을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롬 8:22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그 탄식을 피조물의 탄식이라고 말합니다. “피조물이 다 이제까지 함께 탄식하며 함께 고통을 겪고 있는 것을 우리가 아느니라.” 여기서 피조물은 모든 세상 사람들과 모든 생명체를 말합니다. 그뿐만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도 역시 속으로 탄식하며 구원을 기다린다고 했습니다. 아직 구원받지 못했습니다. 여전히 속으로 탄식하고 있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예수를 믿어도 먹지 않으면 배가 고프고, 일이 잘 안 풀리면 짜증이 납니다. 모든 피조물은 나그네처럼 이 세상에서의 삶을 견뎌내야 합니다. 피조물의 탄식입니다. 그 탄식이 바로 “말할 수 없는 탄식”이기도 합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그런 탄식의 깊이를 알게 하는 영입니다.
오늘 한국교회는 성령운동이 매우 활발합니다. 스스로 그렇게 평가하고 있습니다. 성령 충만을 크게 외칩니다. 성령 대각성운동도 펼칩니다. 성령을 우리가 쉽게 다룰 수 있는 것처럼 말합니다. 성령은 스위치만 누르면 되는 선풍기바람이 아니라 예측할 수 없는 태풍과 같습니다. 우리가 성령을 마음대로 소유할 수 있는 게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성령의 소유가 되어야 합니다. 성령의 피조물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성령의 피조물인지 아닌지를 알 수 있는 한 가지 기준은 피조물의 탄식에 대한 우리의 영적 감수성입니다.
지난 5월29일에 노무현 전 대통령의 영결식이 국민장으로 열렸습니다. 지난 일주일동안 조문한 이들만 전국적으로 5백만 명에 가깝고 그날 노제에 모인 사람들마나 40만 명이 넘었다고 합니다. 저희 교회 교우들 중에서도 봉하에 직접 조문을 다녀온 분들도 있고, 노제 현장에 가신 분들도 있습니다. 저는 지난주일 밤에 서울샘터교우들과 조계사에 조문을 다녀왔습니다. 국민의 한 사람으로 마음속으로 지지했던 대통령의 서거를 애도하는 마음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와중에 저는 뜻밖의 소식을 듣고 당혹스러웠습니다. 두레교회의 담임 목사이시고 뉴라이트 상임의장으로 이명박 대통령의 대통령 당선을 위해서 크게 공헌하신 김 아무개 목사님께서 당신의 묵상칼럼에서 노무현 전 대통령의 죽음을 매도한 글을 쓰셨습니다. 청소년의 모방 자살이 염려된다고 말입니다. 죽을 정도로 억울한 일을 당했으면 마지막 까지 법적으로 따져야 한다고 말입니다. 약 3:1절을 인용하면서 자질과 능력이 없는 사람이 지도자가 된 것이라고 비판했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옳은지 틀린지를 여기서 왈가왈부하지 않겠습니다.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라 하더라도 시와 때가 있는 법입니다. 15개월 전까지 한 나라의 대통령으로 있는 분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면 한 인간으로서의 고통이 어땠을지를 조금이라도 헤아려보는 게 옳지 않았을까요? 한 인간이 겪는 피조물의 탄식을 들여다보았어야 합니다. 그의 죽음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하더라도 일단 초상이라도 끝난 뒤에 말하는 게 좋았겠지요.
오늘 한국교회는 피조물의 탄식에 대한 영적 감수성을 모두 잃었습니다. 사회적 마이너리티를 귀찮은 존재로 생각합니다. 다른 종교를 모두 부정합니다. 자신들과 신학적으로 조금만 달라도 적대적으로 대합니다. 저는 현풍에서 목회를 하고 있을 때 주변에서는 자유주의자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오늘 큰 교회가 작은 교회의 탄식을 외면합니다. 큰 교회와 작은 교회의 영적 연대성도 허물어졌습니다. 모두 자기 교회 성장에만 몰두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가장 큰 교단인 장로교 통합 측은 금년 한해를 3백만 신자 달성을 목표로 잡았습니다. 그렇지 않아도 작은 교회들은 생존 자체가 어려운데, 큰 교회 중심으로 숫자 늘리기 운동을 벌인다면 결과가 어떨지 뻔합니다.
오늘 피조물의 탄식에 대한 영적 감수성을 잃었다는 것은 한국교회가 성령을 외면한다는 증거입니다. 또는 성령을 바울이 경계한 열광주의로만 받아들인다는 증거입니다. 인간 삶의 깊이를 놓친다는 증거입니다. 2009년 성령강림절에 우리는 이런 비극적인 현실을 목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슬퍼하지 마십시오. 용기를 잃지 마십시오. 성령이 하나님의 뜻대로 교회 공동체를 위해서 간구하십니다. 그분의 중보기도가 교회를 살립니다. 아멘!(2009.5.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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