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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축복 받는 사람 (눅 15:25-32)
< 순종하는 삶의 축복 > 가끔 차를 타면 어린아이들이 자리싸움을 합니다. 그때 아빠가 한 아이에게 양보하라고 할 때 투덜거리면서 그 말을 들으면 그것은 진정한 양보와 순종이 아닙니다. 부모의 이해만큼 자녀의 순종도 중요합니다. 부모님과 생각이 달라도 순종해야 합니까?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어긋난 일이나 불법적인 일을 지시하는 것이 아니면 일단 순종해야 합니다. 진짜 순종은 순종하기 힘들 때 기쁘게 순종하는 것입니다. 그때 헌신의 의미도 알게 됩니다. 인생이 헌신을 모르면 작품 인생이 될 수 없습니다. 헌신은 어디에서 시작됩니까? 작은 일에 순종하면서 시작됩니다. 어떤 분은 현재 순종하지 않으면서 말합니다. “목사님! 제가 나중에 잘 되면 큰 힘이 되어드릴게요.” 물론 앞으로 잘될 때 충성하는 것도 큰 힘이 되지만 지금 힘든 상태에서도 기쁘게 순종하고 충성하면 더욱 힘이 됩니다. 또한 순종하는 것은 존경하는 것입니다. 부모님께 불평이나 말대꾸를 하지 말고 부모님이라는 것 하나만으로도 최대한 존경하십시오. 과거에 큰 상처를 받았어도 부모님의 명예를 밟지 마십시오. 자신과 생각과 달라서 그렇지 부모님 때는 부모님이 아는 최상의 방법으로 자신을 키웠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모님이 자기 뜻에 맞춰주기를 바라기보다 먼저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순종하십시오. 부모님을 거역하는 것은 하나님을 거역하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철저히 부모님의 권위를 존중하고, 말이나 표정에서도 최고의 존경심을 보여드리십시오. 감옥에 간 사람들의 가장 부족한 것이 무엇입니까? 여러 연구에 의하면 ‘순종하고 존경하는 마음’이 가장 부족하다고 합니다. 그것은 순종하는 태도의 중요성을 잘 말해줍니다. 그러므로 자녀를 사랑해서 자녀가 잘되기를 정말 원하면 순종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길러주고, 자신도 권위에 순종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가지십시오. 에베소서 6장 2-3절에는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이 약속 있는 첫 계명이니/ 이는 네가 잘 되고 땅에서 장수하리라.” 효도는 고루한 옛 사상이 아니라 최고의 축복의 원천입니다. 효도가 없으면 절대 축복도 없습니다. 더 나아가 하나님을 최고로 경배하십시오. 부모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 최대의 축복의 원천이라면 하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은 더욱 최대의 축복의 원천입니다.< 하나님의 축복 받는 사람 > 본문의 비유는 ‘돌아온 탕자의 비유’와는 달리 ‘집안의 탕자의 비유’라고 합니다. 누가 집안의 탕자입니까? 둘째 아들이 돌아온 것을 기뻐하는 아버지에 대해서 못마땅해 하는 첫째 아들입니다. 첫째 아들이 열심히 아버지를 위해 일한 자기에게 무엇을 해주었느냐고 대들 때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설득하려고 애씁니다. 이 장면을 보면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지 알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까요?1. 형제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 본문을 보면 아버지가 첫째 아들에게 무엇을 원합니까? 둘째 아들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첫째가 둘째를 못마땅하게 여기는 것은 이해되지만 그래도 둘째를 받아들인다면 아버지의 축복은 첫째에게 훨씬 더 많이 갑니다. 아버지는 자식들의 효도만큼 형제간의 사랑도 기뻐하고, 형제간에 사랑하는 것 자체가 중요한 효도입니다. 하나님도 형제 사랑을 통해서 하나님 사랑을 느끼시기에 형제끼리 싸우면 축복을 받을 수 없습니다. 본문에서 왜 형이 동생을 배척합니까? 시기심 때문입니다. 살다 보면 그런 시기와 질투의 시련을 당할 때가 많습니다. 특히 가까운 사람이 시기와 질투로 잘못된 행동이나 말을 하면 미운 마음이 듭니다. 바로 그때가 시험 때이고 훈련 때입니다. 그 시험과 훈련을 잘 이겨내야 복된 인물이 됩니다. 다윗은 사울 왕의 끊임없는 시기와 질투 속에서 분노하며 칼로 사울을 대적했다면 그는 왕이 되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가까운 사람의 시기와 질투라는 힘든 훈련을 이겨냈기에 하나님은 사울의 축복을 떼어다가 다윗에게 맡겨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축복 받기를 원하면 가까운 사람과 손윗사람의 시기와 질투를 잘 극복하십시오. 그 훈련에 합격하면 하나님은 시기하는 사람의 축복을 떼어다가 자신에게 주실 것입니다. 2. 헌신을 포기하지 않는 사람 왜 형은 동생을 환대하는 아버지를 못마땅하게 생각했습니까? 오랫동안 순종한 자기보다 동생을 더 환대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버지가 첫째 아들을 설득했습니다(30-31절). “아들아 내 것이 다 네 것이지 않니. 지금 동생이 죽었다가 살아난 것과 같으니까 즐거워하고 기뻐하는 것을 이해해라.” 그 설득을 듣고 계속 순종했다면 첫째 아들은 둘째보다 훨씬 더 큰 축복을 받고 아버지의 것을 다 가졌을 것입니다. 살다 보면 열심히 헌신하고 봉사한 자기보다 그렇게 하지 않은 남이 더 하나님의 축복을 받는 것을 볼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헌신의 진정성을 보는 시험입니다. 그때 포기하지 않고 계속 헌신하면 하나님 것이 자신의 것이 됩니다. 그러므로 환경 때문에 헌신을 포기하지 말고 조금 더 버티십시오. 어떤 상황에서도 버티면 버틸 수 있습니다. 그만 두면 열릴 길도 막히지만 버티면 막힐 길도 열립니다. 하나님의 뜻을 따라 포기하는 것은 괜찮지만 시험 때문에 헌신을 포기하지는 마십시오. 예수님은 갈보리 십자가상에서 “다 이루었다.”고 말씀했습니다. 그처럼 선한 일이라면 끝까지 헌신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시험 때문에 포기하면 항상 잘못된 결과를 낳습니다. 물론 헌신의 모양이 달라질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헌신 자체를 포기하면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 것으로 만들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축복을 자신의 것으로 만드는 가장 큰 비결은 힘들고 어려운 환경에서도 원망하지 않고 헌신을 포기하지 않는 것입니다. 3. 소리 없는 헌신하는 사람 본문 29절 말씀을 보면 첫째 아들은 자기가 여러 해 동안 아버지께 순종했음을 내세웁니다. 그처럼 자기 공로를 내세우면 하나님의 인정과 축복이 사라지지만 자기 공로를 내세우지 않으면 하나님이 인정해주시고, 그 다음부터 축복이 주어지는 것은 시간문제가 됩니다. 그처럼 소리 없이 헌신해야 하나님의 인정을 받습니다. 사랑도 소리 없는 사랑이 진짜이고, 축복도 소리 없이 주어지는 축복이 진짜입니다. 슬픔도 너무 드러내지 마십시오. 감격의 눈물은 많이 흘리되 슬픔의 눈물은 줄이십시오. 기쁨도 너무 드러내지 마십시오. 감탄사를 아끼고 오직 신앙적 도전과 권면을 위해 필요한 경우에만 겸손하게 기쁨을 드러내십시오. 간증도 자기 믿음 자랑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그처럼 기쁨과 즐거움도 절제하는 것이 좋고, 훌륭한 일을 해도 드러내지 않고 절제하는 것이 좋은데, 하물며 원망과 불평은 더욱 절제해야 합니다. 본문에서 첫째 아들이 “재산을 창기와 함께 날린 자식을 그렇게 환대하면 됩니까?”라고 했을 때 그 말을 동생이 들었다면 얼마나 상처가 되겠습니까? 그렇게 남에게 상처를 입히고 어떻게 축복을 바라겠습니까? 물론 공격적 언사를 쓴 첫째 아들이 나중에 이렇게 사과할지 모릅니다. “동생! 미안해! 그때는 내가 제 정신이 아니었어!” 그래도 상처는 남습니다. 그러므로 불평하는 말이나 공격적인 말은 최대한 절제하십시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사람 몇 사람이 있습니다. 첫째, 책 한 권 읽은 사람은 무섭습니다. 다른 책도 읽어보아야 사고의 폭이 넓혀집니다. 둘째, 체험 한번 한 사람도 무섭습니다. 한번의 체험으로 자기 체험이 제일이고 대단한 영적 승진을 한 줄 오해하면 안 됩니다. 하나님은 사람마다 체험도 다양하게 주십니다. 셋째, 성경 한 구절을 들이대며 따지는 사람도 무섭습니다. 성경은 전체적으로 봐야 균형 잡힌 신앙이 생깁니다. 넷째, 남에게 상처를 주고 자기는 뒤끝이 없다는 사람도 무섭습니다. 뒤끝이 없는 것 자체는 좋은 성품이지만 뒤끝이 없다고 내세우는 것은 실제로 좋지 않을 때가 많습니다. 남의 마음에 상처를 입혀 놓고 자기 혼자만 뒤끝이 없다고 내세우면 당하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기가 막힐 일입니까? 어느 날,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인 빌리 썬더 목사님에게 한 중년 여인이 찾아와 말했습니다. “목사님! 저는 순간적으로 참지 못해 성질 잘 내는 것이 흠이지만 그래도 뒤끝이 없어서 금방 풉니다.” 그때 빌리 썬더 목사님이 대답했습니다. “자매님! 자매님이 성질을 낸 후 자매님이 뒤끝이 없기는 쉽지만 그 성질부린 것으로 누군가의 마음에 남겼던 상처는 아주 오래 간다는 것을 항상 잊지 마세요.” 뒤끝이 없는 사람들은 대개 공격적이고 상처를 잘 줍니다. 반대로 뒤끝이 있다고 놀림 받는 사람들은 대개 공격 받고 상처 받는 입장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뒤끝이 없는 자기 생각만 하고 쉽게 말하지 마십시오. 말을 내뱉기는 쉬워도 주워 담기는 쉽지 않습니다. 또한 자기는 주워 담아도 상대에게는 상처의 흔적이 남습니다. 그러므로 자기관리를 위해 이렇게 기도하십시오. “하나님! 혈기를 내는 말로 인생의 실패자임을 드러내지 않게 하소서!” 대개 보면 무엇인가 실패하고 있다는 좌절감이 혈기와 신경질로 나타납니다. 그러므로 실패에 대한 좌절감이 혈기와 모난 말로 나타나지 않게 하십시오. 모나게 살지 않고 둥글둥글 살면서도 얼마든지 의롭게 살 수 있습니다. 부부 싸움도 최대한 은혜롭게 하십시오. 그것도 소중한 훈련입니다. 그처럼 해가 되는 말과 행동은 최대한 자제하고 소리 없이 자기 몫 이상을 해내려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축복을 받습니다.4. 은혜를 오래 기억하는 사람 본문을 보면 아들들에 대해 끝없이 참는 아버지의 무한한 사랑을 느낍니다. 그래도 아들들은 아버지의 사랑을 거의 이해하지 못합니다. 특히 본문에 나오는 첫째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를 위해 무엇을 했다는 것은 잘 기억했지만 아버지의 은혜는 잘 기억하지 못했습니다. 얼마나 불행한 모습입니까? 세상에서 제일 복이 없는 사람은 감사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열심히 감사를 훈련하고 감사를 실천하십시오. 감사한 마음이 하나님 관계와 인간관계를 깊게 합니다. 가끔 저에게 어떤 성도님들이 말합니다. “목사님! 조금 쉬어가면서 하세요.”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압니다. 그 말은 “목사님! 존경하고 감사해요.”라는 말을 달리 표현한 말입니다. 그래서 그 말은 들으면 정말 고맙고 목회자를 알아주고 있다고 생각하니까 더욱 기쁩니다. 저는 1992년 12월 27일에 인천에서 32살의 나이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그때는 모르는 것이 너무 많았습니다. 그래서 쉼을 두려워했습니다. 아내가 새벽기도에 하루라도 빠지면 엄청나게 싫었습니다. 주일예배 때는 밤새워서 말씀을 준비하느라고 피곤에 찌든 얼굴로 강단에 설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 피곤에 찌든 얼굴에 성도들은 더 은혜 받을 줄 알았지만 그것이 큰 착각이었습니다. 성도들은 피곤에 찌든 목회자의 얼굴만 봐도 은혜가 되지 않습니다. 그 사실을 시간이 지나면서 점차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런 목회 경험들이 생겨서 목회지를 분당으로 옮겨 1999년 1월 10일, 새롭게 교회 설립예배를 드릴 때는 이렇게 결심했습니다. “목회자도 쉼이 필요하다. 그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이제 6년 동안 열심히 사역하고 2005년 1월에 안식년을 가지겠다.” 실제로 안식년 개념은 필요합니다. 정신없이 뛰면 정신없이 망할 확률도 많습니다. 목회자도 설교하는 위치에만 있지 않고 설교를 듣는 위치에도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남의 설교를 들으면서 “저렇게 설교해야 하겠다! 저렇게 설교하지 말아야 하겠다!”라고 많이 배웁니다. 또한 안식년 때 기도하면서 새롭게 목회철학을 가다듬고, 목회의 창조적 변화를 꾀할 수도 있습니다. 그처럼 유익이 많아도 한국 목사님들은 거의 안식년을 가지지 못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첫째, 안식을 노는 것으로 생각해서 죄책감을 가지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목회자에게 안식년은 그저 노는 해가 아니라 ‘목회와 설교 연구 년’입니다. 게다가 성도들도 항상 듣던 담임목사의 설교가 아니라 다른 목사님의 설교도 들어봐야 신선함을 느끼고, 다시 1년 후에 담임목사의 설교를 들으면 또 다른 신선함을 느낍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재충전과 신선함을 위해 안식년은 필요합니다. 둘째, 안식년을 가지면 영원히 안식할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즉 안식년을 가지면 자기 위치가 흔들릴 것을 염려하고 불안해합니다. 실제로 1년 동안 다른 설교자의 설교를 들으면서 담임목사와 마음이 멀어지고 교회가 어려움에 빠진 교회도 많습니다. 그러나 그런 부작용을 염려할 정도로 자기 양떼를 믿지 못하고 그 정도로 자신감이 없다면 차라리 다른 길을 찾는 것이 낫습니다. 셋째, 실제로 교회가 작아서 일꾼과 재정 부족으로 안식년을 가지고 싶어도 가지지 못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런 여러 이유로 한국 사람들은 안식년을 갖는 것은 두려워합니다. 그러나 안식을 두려워하지 말고 오히려 안식을 두려워하는 삶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안식이 없는 삶은 반드시 파멸을 부릅니다. 인간이 스스로 쌓은 공든 탑은 무너질 때는 한꺼번에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안식이 없어야 간신히 지탱해나갈 탑이라면 차라리 미리 조금씩 무너지는 것이 미래의 새로운 창조와 준비를 위해서 더 낫습니다. 그런 목회철학이 생겨서 분당에서 목회를 할 때는 안식년을 가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첫째 안식년인 2005년 1월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도저히 안식년을 가질 형편이 못 되었습니다. 그래서 2주 휴가로 안식년을 대체하며 둘째 6년이 지난 2011년 1월부터는 꼭 안식년을 가지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몇 주 전에 성경공부 하다가 안식년 얘기가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때 한 집사님이 말했습니다. “목사님! 안식년을 가지세요. 저희들에게 맡겨놓고 안심하고 갔다 오세요.” 그때 그 말이 얼마나 고맙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이번에도 안식년을 가지지 못할 것 같습니다. 교회뿐만 아니라 ‘온라인 새벽기도, 미션퍼블릭, 네트영어’라는 큰 사역들이 줄줄이 있고, 2012년 기독교 선교연맹 한인 총회도 준비해야 하고, 또한 재정도 문제입니다. 그런 상황이지만 “목사님에게는 꼭 안식년도 꼭 필요하니까 마음 놓고 안식년을 가지세요.”라는 말해주니까 그 말이 또 다른 감사와 애정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면서 얼마나 고맙게 느껴졌는지 모릅니다. 연로한 부모님이 제일 기뻐하는 말이 무엇입니까? “부모님! 더 늦기 전에 많이 놀러 다니세요.”라는 말입니다. 그 말에는 감사표현이 담겨 있고 자녀들이 자기를 생각해주는 것을 느끼니까 기쁩니다. 게다가 돈을 들여서 패키지여행을 보내드리거나 직접 같이 여행에 모시고 가면 얼마나 기쁩니까? 그때 은혜를 아는 마음을 받으면서 자식 키운 보람을 느낍니다. 사실 그렇게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은 어떤 신앙적인 의식보다 중요합니다. 며칠 전 저희 선교연맹에서 목회자 부부초청 야유회를 개최했습니다. 이번에는 금요심야 기도회 때문에 참석 못한 목사님들이 많습니다. 어떤 개척교회 목사님은 수요예배에 사람들이 나오지 않아서 얼마 전 수요예배 때 다른 전도 특강에 참석했습니다. 그런데 마침 그날 한 성도가 수요예배에 왔다가 교회 문에 잠긴 것을 보고 “어떻게 목사님이 수요예배에 말없이 안 나오느냐?”고 하면서 목사님을 힘들게 했습니다. 그래서 그 목사님이 눈치가 보여서 야유회를 못 간다는 얘기를 듣고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반면에 어떤 교회 성도들은 말합니다. “목사님! 야유회 잘 갔다 오세요. 저희들이 대신 기도할게요.” 그 교회에는 지금 장로님이 4명인데 목사님이 가끔 빠지면 자기들끼리 더 은혜롭게 기도회를 합니다. 더 나아가 목사님이 총회에 참석하거나 다른 집회에 참석하면 새벽예배 때 장로님들에게 돌아가면서 설교하도록 시킵니다. 그러면 장로님들이 한 달 전부터 설교준비를 하면서 본인도 은혜 받고 성도들도 미숙하게 설교하는 모습을 통해서 그 순수함에 더 은혜를 받습니다. 그래서 목사님이 가끔 자리를 비우는 것을 더 좋아합니다. 얼마나 차이가 있습니까? 같은 상황을 ‘정죄와 불평거리’로 만들 수도 있고 ‘기쁨과 감사거리’로 만들 수도 있습니다. 결국 사랑은 이해입니다. 그런 이해가 없어서 요새 눈치 보는 목사님들이 정말 많습니다. 어떤 목사님은 미국 시골지역에서 벌써 15년째 목회합니다. 그곳에는 즐길 문화가 거의 없고 삶이 아주 단조롭습니다. 게다가 한인들이 거의 없으니까 외롭고 문화충격도 큽니다. 게다가 그 목사님은 인터넷도 좋아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점점 마음이 메말라졌습니다. 시골 지역에 사는 국제 결혼한 한국 여성들을 긍휼히 여기는 마음으로 불타는 사명감을 가지고 그곳을 찾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내면의 기쁨이 사라졌습니다. 어느 날, 그 목사님에게 탈출구가 생겼습니다. 어쩌다가 낚시를 시작했는데 재미있었습니다. 그래서 낚시를 다니는 횟수가 잦아지면서 얼굴이 점점 시커멓게 탔습니다. 성도들은 목사님이 얼굴이 타는 것이 궁금했습니다. 그러다가 한 성도가 목사님이 낚시 다니는 것을 알고 그 얘기를 교인들에게 하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결국 낚시도 못하게 되었고 요즘은 가끔 몰래 숨어서 낚시하러 다닙니다. 그런 얘기를 들을 때마다 은혜와 감사가 넘치는 넉넉한 삶을 서로 보여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경제학 법칙 중에 “악화(惡貨)가 양화(良貨)를 축출한다(Bad money drives out good).”는 ‘그레샴의 법칙’이 있습니다. 살다 보면 그처럼 ‘악함’이 ‘선함’을 축출해서 점차 상황과 인간관계가 악화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어떻게 ‘선함’이 ‘악함’을 축출하고 점차 상황과 인간관계를 낫게 만들 수 있습니까? 무엇보다 은혜를 깊이 깨닫고 감사하는 인격을 키우면서 서로 이해하고 용납하는 삶을 키워야 합니다. 나중에 보면 그런 이해와 용납이 있는 사람이 결국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습니다. <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십시오 > 하나님의 무한한 사랑을 생각할 때 가장 부끄러운 모습은 용납이 없는 모습입니다. 부모님을 기쁘게 하려면 형제들끼리 잘 지내야 하듯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면 형제를 용서해야 합니다. 그처럼 용서가 중요하지만 사실 용서처럼 어려운 것은 없습니다. 미운 사람을 용서하는 것은 무거운 십자가입니다. 그래서 예배를 잘 드리는 사람도 용서는 정말 힘들다고 하소연합니다. 그래서 매번 용서하는 일에 실패해도 다시 용서하는 일에 도전해야 합니다. 신앙생활의 목적은 더 사랑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런데 누구를 미워하면 자신이 힘들어집니다. 그러므로 먼저 용서하십시오. 하나님은 용서하는 성숙한 마음을 가질 때 더욱 큰 은혜를 주십니다. 용서는 상대방을 위한 것보다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용서하지 않고 미워하는 것은 천천히 자살을 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용서 없는 삶이 얼마나 치명적입니까? 그러나 용서하면 영혼도 살고 어느새 마음의 평화도 찾습니다. 어느 날, 한 목사님이 용서를 설교하는데 설교 후에 한 성도가 찾아왔습니다. 그는 돌아가신 아버지를 생각하면 분노가 생기고, 곧 예외 없이 배가 아픈 것을 알고, 자기도 아버지를 용서하고 싶은데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했습니다. 그때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성도님! 저를 당신의 아버지로 생각하고 제 눈을 똑바로 보고 나서 저를 용서해보세요. 이것은 당신의 아버지보다 당신 자신을 위한 것입니다.” 그는 그대로 했고 그 후 만성 위경련이 사라졌습니다. 옛말에 “미운 놈 미워하면서 살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렇게 살면 속이 후련해질 것 같지만 나중에 보면 오히려 그 미움이 내 영혼을 압박하고 건강을 해칩니다. 역시 사는 길은 용서하는 삶에 있습니다. 진정한 용서는 어렵지만 어렵기에 용서하면 큰 은혜를 받습니다. 실제로 용서만큼 세상을 바꾸고, 가정을 바꾸고, 나를 바꾸는 것은 없습니다. 항상 이해와 용서가 넘치는 성도가 되어 하나님의 큰 축복을 받는 축복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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