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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고전12:3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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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
본문/고전12:3, 엡5:18, 행2:1-4
1. 들어가는 이야기 /
단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이야기 하는 중 상호 간에 그 단어에 대한 이해 차이로 쓸데 없는 오해와 시간을 낭비한 경험을 해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저술의 첫장은 그 저술에서 사용하는 개념에 대한 定義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우리나라 말로는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 남녀 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등 모두 구별 없이 사랑이라고 합니다만 희합어에서는 이 각각의 경우에 따라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은 스톨케,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은 필리아, 남녀 사이의 뜨거운 애정적 사랑은 에로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라고 구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중생 체험,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이 각각 다른 것이냐? 아니면 같은 것이냐?는 문제로 많은 오해와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를 봅니다. 같다는 사람도 있고 다르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성도들이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感을 잡고 두루뭉수리로 그때 그때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사실 이 문제는 < 성령 충만이라는 희랍 원어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 >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2. 중생체험과 성령세례 그리고 성령충만은 다르다는 주장
순복음교회의 주장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는 체험이다. 성령세례는 중생체험과는 별개의 것이다. 중생체험은 하였으나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는 나약하고 무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힘있고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우선적으로 방언을 하게 되고 이 성령세례 후 점점 성령이 더욱 역사하여 성령충만하면 신유, 예언, 투시,축귀의 능력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 조용기 성령론 )
순복음교회의 성령운동에는 긍정적인 일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축처진 한국교회에 신선한 성령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을보면 성령의 풍성하고 다양한 능력과 은사들 즉, 지혜의 능력,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 능력, 교육자적 능력, 지도자적 능력,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역사성, 점진적인 경건성의 촉진 등을 도외시하고 방언, 신유, 입신, 축귀, 등 신비적이고 황홀한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성령을 극히 제한하였다는 점입니다.
3. 희랍어 프레레스( PLERES )와 핌프레미( PIMPLEMI )의 개념
우리나라 말로는 구별 없이 그저 < 성령 충만 >이지만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희랍 원어에 < 가득하다, 충만하다, 넘치다 >는 뜻을 가진 단어가 두가지가 있는데 < 프레레스 >와 < 핌프레스 >가 그것입니다. 이 두 단어의 쓰임새를 추적하면 중생체험, 성령세례, 성령충만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정리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프레레스 프뉴마 하기오스 ( 성령 충만 )
프레레스라는 단어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기도와 말씀의 결과로 이루어진 내적경건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눅4:1에 세례 받으신 후의 성령충만한 예수님의 모습,
행6:3에서 집사 자격으로서의 성령충만, 행11:24에서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경우 < 프레레스 >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눅5:12에서 문둥병자는 문둥병이 점점 심해졌다는 뜻에서, 행9:36에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가 오랜동안 점점 쌓여왔다는 뜻에서, 그리고 엡5:18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에도 < 프레레스 >가 쓰이고 있습니다. 즉 프레레스 라는 단어는 평소 점진적이고 계속적으로 성장한 결과 충만하게 된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둘째, 핌프레미 프뉴마 하기오스 ( 성령 충만 )
< 핌프레미 >라는 단어는 독특하고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성령님의 주도적이며 계시적인 사건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성령의 다이나믹한 역사 개입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눅1:41에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났을 때 성령이 충만하여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고 있음을 찬양합니다. 행2;4에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충만, 행4:31에 제사장과 로마의 위협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파합니다. 눅5:7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 그물을 던져 고기를 충만히 잡습니다. 이상의 모든 경우는 보통 때가 아니라 비상한 위기이며 특별한 시간에 일어난 일회적이며 계시적 사건의 상황입니다. 그 때 그 상황을 충분히 해결 할 수 잇을 만큼 충만하였ㄷ는 의미에서 < 핌프레미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중생체험과 성령세례 그리고 성령충만은 결국 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고전12:2에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중생 체험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영적 체험입니다. 이 중생의 은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 속에는 이미 성령님이 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롬8:14에 <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한다면 내 속에 계신 성령은 누구시며, 또다른 세례를 주시는 성령은 누구시란 말인가? 그럴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생케 하신 분이 내 속에 거하시는 그 성령님이시오 각가지 은사를 주시는 분도 바로 내 속에 계시는 그 성령님입니다. 과연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러면 왜 나는 방언도 못하고, 예언도 못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발휘하지도 못하며 사는가? 나 스스로 생각해도 나의 신앙은 왜이리 시시한가? 왜 이리 구질구질한가?
5. 이제부터 내 속에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소멸치 말자!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 성령님의 음성을 소멸치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우리를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 롬8:30 ). 이치가 이럴진대 우리가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 할 것입니까? 그런즉 이제 후로는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입시다. 그리고 성령님께 그 아름다운 은사를 간구합시다. 그리하면 성령님은 거룩한 바람이 되셔서 내 속에 강열하게 불어 오셔서 각가지 은사로 나를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1. 들어가는 이야기 /
단어에 대한 정확한 정의를 내리지 않고 이야기 하는 중 상호 간에 그 단어에 대한 이해 차이로 쓸데 없는 오해와 시간을 낭비한 경험을 해본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저술의 첫장은 그 저술에서 사용하는 개념에 대한 定義에 할애되고 있습니다. 예를들면 우리나라 말로는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 남녀 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 등 모두 구별 없이 사랑이라고 합니다만 희합어에서는 이 각각의 경우에 따라 부모자식 사이의 사랑은 스톨케, 학문과 예술에 대한 사랑은 필리아, 남녀 사이의 뜨거운 애정적 사랑은 에로스, 그리고 하나님의 사랑은 아가페라고 구별하여 부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에서 중생 체험, 성령 세례, 성령 충만이 각각 다른 것이냐? 아니면 같은 것이냐?는 문제로 많은 오해와 혼란이 일어나는 경우를 봅니다. 같다는 사람도 있고 다르다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많은 성도들이 혼란스러워 하면서도 나름대로의 感을 잡고 두루뭉수리로 그때 그때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 됩니다. 사실 이 문제는 < 성령 충만이라는 희랍 원어의 개념을 명확히 이해 >하면 자연스럽게 풀릴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됩니다.
2. 중생체험과 성령세례 그리고 성령충만은 다르다는 주장
순복음교회의 주장이 대표적인 경우일 것입니다. 이들의 주장은 중생이란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로 영접하고 회개하고 복음을 영접하고 예수를 믿고 새사람이 되는 체험이다. 성령세례는 중생체험과는 별개의 것이다. 중생체험은 하였으나 성령세례를 받지 못한 신자는 나약하고 무능한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다. 힘있고 살아있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성령세례를 받아야 한다. 성령세례를 받은 증거는 우선적으로 방언을 하게 되고 이 성령세례 후 점점 성령이 더욱 역사하여 성령충만하면 신유, 예언, 투시,축귀의 능력을 받게된다는 것입니다. ( 조용기 성령론 )
순복음교회의 성령운동에는 긍정적인 일면이 분명히 있습니다. 축처진 한국교회에 신선한 성령의 바람을 불러 일으켰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그러나 부정적인 면을보면 성령의 풍성하고 다양한 능력과 은사들 즉, 지혜의 능력, 사회에 대한 예언자적 능력, 교육자적 능력, 지도자적 능력, 성도의 교제와 교회의 역사성, 점진적인 경건성의 촉진 등을 도외시하고 방언, 신유, 입신, 축귀, 등 신비적이고 황홀한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여 성령을 극히 제한하였다는 점입니다.
3. 희랍어 프레레스( PLERES )와 핌프레미( PIMPLEMI )의 개념
우리나라 말로는 구별 없이 그저 < 성령 충만 >이지만 신약성경에서 사용되는 희랍 원어에 < 가득하다, 충만하다, 넘치다 >는 뜻을 가진 단어가 두가지가 있는데 < 프레레스 >와 < 핌프레스 >가 그것입니다. 이 두 단어의 쓰임새를 추적하면 중생체험, 성령세례, 성령충만에 대한 오해와 혼란이 정리되리라고 생각합니다.
첫째, 프레레스 프뉴마 하기오스 ( 성령 충만 )
프레레스라는 단어는 점진적이고, 지속적인 기도와 말씀의 결과로 이루어진 내적경건의 충만을 의미합니다. 눅4:1에 세례 받으신 후의 성령충만한 예수님의 모습,
행6:3에서 집사 자격으로서의 성령충만, 행11:24에서 바나바가 성령이 충만하였다는 경우 < 프레레스 >가 사용되고 있습니다. 눅5:12에서 문둥병자는 문둥병이 점점 심해졌다는 뜻에서, 행9:36에 다비다의 선행과 구제가 오랜동안 점점 쌓여왔다는 뜻에서, 그리고 엡5:18에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에도 < 프레레스 >가 쓰이고 있습니다. 즉 프레레스 라는 단어는 평소 점진적이고 계속적으로 성장한 결과 충만하게 된 경우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둘째, 핌프레미 프뉴마 하기오스 ( 성령 충만 )
< 핌프레미 >라는 단어는 독특하고 특별한 상황 속에서 일어난 성령님의 주도적이며 계시적인 사건을 나타낼 때 사용됩니다. 문제 해결을 위한 성령의 다이나믹한 역사 개입을 나타낼 때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눅1:41에 엘리사벳이 마리아를 만났을 때 성령이 충만하여 마리아가 예수를 잉태하고 있음을 찬양합니다. 행2;4에 오순절날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 충만, 행4:31에 제사장과 로마의 위협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베드로와 요한이 성령이 충만하여 복음을 전파합니다. 눅5:7에 베드로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 그물을 던져 고기를 충만히 잡습니다. 이상의 모든 경우는 보통 때가 아니라 비상한 위기이며 특별한 시간에 일어난 일회적이며 계시적 사건의 상황입니다. 그 때 그 상황을 충분히 해결 할 수 잇을 만큼 충만하였ㄷ는 의미에서 < 핌프레미 >라는 단어가 사용되고 있는 것입니다.
4. 중생체험과 성령세례 그리고 성령충만은 결국 한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고전12:2에 <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중생 체험이란 자신이 죄인임을 깨닫고, 눈물로 회개하고 예수님을 진정으로 나의 구주로 고백하는 영적 체험입니다. 이 중생의 은혜는 성령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한 사람 속에는 이미 성령님이 거하고 계신 것입니다. 롬8:14에 < 누구든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 >이라고 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성령세례를 다시 받아야한다면 내 속에 계신 성령은 누구시며, 또다른 세례를 주시는 성령은 누구시란 말인가? 그럴수는 없는 것입니다. 중생케 하신 분이 내 속에 거하시는 그 성령님이시오 각가지 은사를 주시는 분도 바로 내 속에 계시는 그 성령님입니다. 과연 그 말이 진실이라면 그러면 왜 나는 방언도 못하고, 예언도 못하고, 성령의 능력을 체험하지도 발휘하지도 못하며 사는가? 나 스스로 생각해도 나의 신앙은 왜이리 시시한가? 왜 이리 구질구질한가?
5. 이제부터 내 속에서 간구하시는 성령님의 음성을 소멸치 말자!
성령님은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십니다. 말 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십니다. 그 성령님의 음성을 소멸치 말아야합니다. 우리는 압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미리 부르시고 부르신 우리를 의롭다 하시고 의롭다 하신 우리를 또한 영화롭게 하셨다는 사실을! ( 롬8:30 ). 이치가 이럴진대 우리가 무슨 말을 할 것입니까? 이렇게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는데 누가 우리를 대적 할 것입니까? 그런즉 이제 후로는 성령의 음성에 귀기울입시다. 그리고 성령님께 그 아름다운 은사를 간구합시다. 그리하면 성령님은 거룩한 바람이 되셔서 내 속에 강열하게 불어 오셔서 각가지 은사로 나를 충만케 하실 것입니다.
댓글 '1'
양 요한
샬롬 목사님^^ 우연히 위의 설교를 보고 송구하지만 몇자 적습니다. 서로 정통한 교단이니 오해 없으시길 바라구요. 위의 사항은 교단이 추구하는 바의 교리이니 이단의 문제로 비화되진 않습니다. 하지만 문서적으로 순복음의 교리에 대해 말씀하시니 몸담고 있는 저로서 간략하게나마 도움을 드리길 원합니다. 중생의 체험때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이시나 내가 성령님을 사모할때 성령세례의 체험을 하게되어 그때부터 역사하시는 능력으로서의 성령님으로 성숙된 신앙으로 변화되어 갈뿐 아니라 그 이후 우리는 성령이 소멸되지 않도록 계속해서 성령충만을 위해 성령님과 교통하며 우리의 믿음을 지켜나가야 합니다. 목사님이 말씀하시는데로 순복음에서는 방언, 신유, 입신, 축귀, 등 신비적이고 황홀한 감정적이고 감각적인 측면만을 강조하진 않는답니다. 저희 교단에서도 역시 성령의 풍성하고 다양한 능력과 은사들을 인정합니다. 참고로 저는 기하성의 목회자이자 대학원의 교수입니다.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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