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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넷을 항해하면서 발견한 다시 읽고 싶은 글을 스크랩했습니다. 인터넷 공간이 워낙 넓다보니 전에 봐 두었던 글을 다시 찾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닙니다. 그래서 스크랩할만한 글을 갈무리합니다. (출처 표시를 하지 않으면 글이 게시가 안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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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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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1 권 창조의 말씀 -27. 정신 속에 존속하는 시간.
나의 영혼이여 깨어나라. 주의력을 집중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우리를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진리가 어렴풋하게 나타나나기 시작한 곳으로 주의를 돌려라.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소리가 물체로부터 울려나와 계속 울리다가 방금 그쳤습니다.
이제는 조용합니다.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소리는 울리기 전에는 미래였습니다. 그리고 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소리는 아직 없었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잴 수 있었던 것은 울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잴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멎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가고,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것이 지나가면서 어떤 시간의 공간으로 뻗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의 간격에 의해 잴 수가 있었습니다.
현재에는 어떤 시간의 간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때는 지나치고 있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다른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아직도 울리고 있습니다. 울리는 동안에 잽시다.
울리고 나면 잴 수 있는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정확하게 재보고 길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말해 봅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울리고 있습니다.
잴 수 있는 것은 울리기 시작한 때부터 멎는 때까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재는 것은 어떤 시초로부터 종말까지의 간격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끝나지 않은 소리를 재어 길다든가 짧다든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소리와 비슷하다던가, 어떤 소리의 두 배, 세 배,
그 밖에 몇 배라는 등의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멈추었을 때에는 이미 그것은 없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잴 수 있을까요?
게다가 우리는 시간을 잽니다.
그것은 아직 없는 시간은 아니고, 이미 사라진 시간도 아니고,
퍼질 사이조차 없는 시간도 아닙니다.
또 끝이 없는 시간도 아닙니다.
즉 우리가 재는 것은 미래의 시간도, 과거의 시간도,
현재의 시간도, 지나가고 있는 시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을 재는 것입니다.
'Deus Creator Omnium(만물을 내신 주여)'ㅡㅡ
이 시구는 여덟개의 단음절과 장음절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1, 제3, 제5, 제7의 네 음절은 짧고,
네 개의 장음절, 제2, 제4, 제6, 제8음절이 1단위입니다.
나는 발음해 보고 이들 장음절의 하나하나는
그 단음절의 하나하나에 비하여 두 배의 길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명료한 감각으로 듣는 경우도 그대로입니다.
감각에 의해 확실한 것은 짧은 음절로 긴 음절을 측정하고
또 장음절을 두 배의 길이로 감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이 다른 쪽 다음에 울릴 때
짧은 것이 먼저이고 긴것이 나중이라고 한다면
단음절을 기억해 두었다가 장음절에 맞추어 재고
그것이 단음절의 두배의 길이에 해당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장음절은 단음절이 끝난 후가 아니면 울릴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 장음절도 그것이 현재 있는 동안에 잴 수가 있을까요?
끝나지 않으면 측정할 수가 없을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난다는 것은 과거가 된다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무엇을 재는 것일까요?
그것에 의해서 재는 단음절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두 가지가 모두 울렸다가는 날아가고 이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재고 훈련된 귀를 신뢰하는 동안에 있어서
'이 음절은 시간의 간격에 있어서 1의 길이이며 이 음절은 두 배의 길이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음절이 지나가서 끝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재는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음절 그 자체가 아니고
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그 무엇입니다.
나의 정신이여, 나는 너에 의해서 시간을 잰다.
제발 나를 혼란스럽게 방해하지 말아다오.
즉 그것은 네가 너 자신에 대해
여러가지 감각적 인상의 떼를 지어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나는 너에 의해서 시간을 잰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 너의 속에 만드는 인상은 그것이 지나가 버린 후에도 남아 있다.
나는 현존하는 인상을 재는 것이지 그 인상을 낳은 지나간 것을 재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측정할 때, 바로 그 인상을 나는 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인상이 시간인지 내가 재는 것이 시간이 아닌지가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가 침묵을 재고 그 침묵은 그 소리가 계속된 만큼의
시간을 계속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마치 아직도 소리가 계속되는 양 사유를 긴장시켜서
소리의 측정 쪽으로 뻗어 중간에 끼는 침묵의 간격에 관한 무엇인가를
시간의 길이로써 표현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마음속에서 노래나 시구나 어떤 이야기나 그 밖에 무엇이든 잴 수 있는
움직임을 계속하여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
시간의 길이라는 점에서 얼마만큼의 비율인가를 소리내어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언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가 얼마간 긴 소리를 내는 데 얼마만큼의 길이로 하려고
미리 생각하면서 정하는 경우는, 분명히 그 사람은
침묵 속에 정한 시간의 길이를 정신에 맡기어 그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는 울려서 먼저 정해진 종점에 이르러 그칩니다.
아니, 차라리 '그 소리는 울렸다.그리고 울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가 끝난 부분은 분명히 이미 울려 버렸지만
남아 있는 부분은 이제부터 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현재의 정신적 작용을 통해 미래는 과거로 흘러가버림으로써
미래는 줄고 과거는 늘어나
드디어 미래에 남아 있지 않고 모든 것이 과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나의 영혼이여 깨어나라. 주의력을 집중하라.
하나님은 우리를 돕는 분이시다.
우리를 만든 것은 우리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진리가 어렴풋하게 나타나나기 시작한 곳으로 주의를 돌려라.
어떻습니까?
예를 들어서 어떤 소리가 물체로부터 울려나와 계속 울리다가 방금 그쳤습니다.
이제는 조용합니다. 소리는 이미 사라지고 없습니다.
그 소리는 울리기 전에는 미래였습니다. 그리고 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때 소리는 아직 없었으니 말입니다.
지금도 잴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미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잴 수 있었던 것은 울릴 때입니다.
왜냐하면 그때 잴수 있는 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때에도 멎어 있지는 않았습니다.
그것은 가고, 사라져 가고 있었습니다.
바로 그렇기 때문에 잴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요?
사실 그것이 지나가면서 어떤 시간의 공간으로 뻗고 있었습니다.
그 시간의 간격에 의해 잴 수가 있었습니다.
현재에는 어떤 시간의 간격도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간을 측정할 수 있는 때는 지나치고 있는 순간이라고 한다면
자, 한 번 생각해 봅시다.
다른 소리가 울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것은 연속적으로 아직도 울리고 있습니다. 울리는 동안에 잽시다.
울리고 나면 잴 수 있는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 정확하게 재보고 길이가 어느 정도나 되는지 말해 봅시다.
그러나 그것은 아직 울리고 있습니다.
잴 수 있는 것은 울리기 시작한 때부터 멎는 때까지입니다.
사실 우리가 재는 것은 어떤 시초로부터 종말까지의 간격에 불과합니다.
그러므로 아직 끝나지 않은 소리를 재어 길다든가 짧다든가 말할 수는 없습니다.
어떤 소리와 비슷하다던가, 어떤 소리의 두 배, 세 배,
그 밖에 몇 배라는 등의 말을 할 수도 없습니다.
그러나 그 소리가 멈추었을 때에는 이미 그것은 없겠지요.
그러면 어떻게 그것을 잴 수 있을까요?
게다가 우리는 시간을 잽니다.
그것은 아직 없는 시간은 아니고, 이미 사라진 시간도 아니고,
퍼질 사이조차 없는 시간도 아닙니다.
또 끝이 없는 시간도 아닙니다.
즉 우리가 재는 것은 미래의 시간도, 과거의 시간도,
현재의 시간도, 지나가고 있는 시간도 아닙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시간을 재는 것입니다.
'Deus Creator Omnium(만물을 내신 주여)'ㅡㅡ
이 시구는 여덟개의 단음절과 장음절을 번갈아 가며 사용하고 있습니다.
제1, 제3, 제5, 제7의 네 음절은 짧고,
네 개의 장음절, 제2, 제4, 제6, 제8음절이 1단위입니다.
나는 발음해 보고 이들 장음절의 하나하나는
그 단음절의 하나하나에 비하여 두 배의 길이를 가지고 있음을 알았습니다.
또 명료한 감각으로 듣는 경우도 그대로입니다.
감각에 의해 확실한 것은 짧은 음절로 긴 음절을 측정하고
또 장음절을 두 배의 길이로 감각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한쪽이 다른 쪽 다음에 울릴 때
짧은 것이 먼저이고 긴것이 나중이라고 한다면
단음절을 기억해 두었다가 장음절에 맞추어 재고
그것이 단음절의 두배의 길이에 해당된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까요?
장음절은 단음절이 끝난 후가 아니면 울릴 수가 없는데 말입니다.
그 장음절도 그것이 현재 있는 동안에 잴 수가 있을까요?
끝나지 않으면 측정할 수가 없을텐데 말입니다.
그러나 그것이 끝난다는 것은 과거가 된다는 뜻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다면 대체 나는 무엇을 재는 것일까요?
그것에 의해서 재는 단음절이 있는 곳은 어디일까요?
두 가지가 모두 울렸다가는 날아가고 이제는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나는 재고 훈련된 귀를 신뢰하는 동안에 있어서
'이 음절은 시간의 간격에 있어서 1의 길이이며 이 음절은 두 배의 길이이다.'
라는 확신을 가지고 대답합니다.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 음절이 지나가서 끝나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재는 것은 이미 사라져 버린 음절 그 자체가 아니고
나의 기억 속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는 그 무엇입니다.
나의 정신이여, 나는 너에 의해서 시간을 잰다.
제발 나를 혼란스럽게 방해하지 말아다오.
즉 그것은 네가 너 자신에 대해
여러가지 감각적 인상의 떼를 지어 방해하지 말라는 뜻이다.
다시 한 번 말하고 싶다. 나는 너에 의해서 시간을 잰다.
지나가 버리는 것이 너의 속에 만드는 인상은 그것이 지나가 버린 후에도 남아 있다.
나는 현존하는 인상을 재는 것이지 그 인상을 낳은 지나간 것을 재는 것은 아니다.
시간을 측정할 때, 바로 그 인상을 나는 재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인상이 시간인지 내가 재는 것이 시간이 아닌지가 문제일 뿐이다.
그러면 우리가 침묵을 재고 그 침묵은 그 소리가 계속된 만큼의
시간을 계속했다고 말하는 경우를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마치 아직도 소리가 계속되는 양 사유를 긴장시켜서
소리의 측정 쪽으로 뻗어 중간에 끼는 침묵의 간격에 관한 무엇인가를
시간의 길이로써 표현하려는 것은 아닐까요?
사실 우리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고 입술도 움직이지 않고
마음속에서 노래나 시구나 어떤 이야기나 그 밖에 무엇이든 잴 수 있는
움직임을 계속하여 한쪽이 다른 한쪽에 대해
시간의 길이라는 점에서 얼마만큼의 비율인가를 소리내어
말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확하게 언명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또 누군가가 얼마간 긴 소리를 내는 데 얼마만큼의 길이로 하려고
미리 생각하면서 정하는 경우는, 분명히 그 사람은
침묵 속에 정한 시간의 길이를 정신에 맡기어 그 소리를 내기 시작합니다.
그 소리는 울려서 먼저 정해진 종점에 이르러 그칩니다.
아니, 차라리 '그 소리는 울렸다.그리고 울릴 것이다.'라고 말하는 편이 좋겠습니다.
왜냐하면 그 소리가 끝난 부분은 분명히 이미 울려 버렸지만
남아 있는 부분은 이제부터 울릴 것이기 때문입니다.
이와 같이 해서 현재의 정신적 작용을 통해 미래는 과거로 흘러가버림으로써
미래는 줄고 과거는 늘어나
드디어 미래에 남아 있지 않고 모든 것이 과거가 되고 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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