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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계3:14~2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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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송자 목사 |
참고 : | 새길교회 2010.5.9 주일설교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자”
[ 요한계시록 3 : 14 ~ 22 ]
김송자 목사
계시록이 쓰여 젓던 주후 2세기 초에서 중엽까지 교회가 안고 있었던 심각한 문제는 로마제국의 폭정, 동족 유다교인들의 박해, 또 자꾸만 지연되는 재림 문제였습니다. 로마정부는 제국을 통치하기 위한 지배 이데오르기로서 황제 숭배를 강요했으며, 종교의 자유는 황제숭배를 인정해야만 보장 받을 수 있었습니다. 또 동족 유다교인들의 박해 또한 심각했습니다. 예수를 주로 고백하는 자들은 모두 회당에서 쫓겨나는 이야기가 요한복음서에 세 번 언급되고 있으며 그리스도 교인들을 ‘배교자’ ‘멸망당할 인간들’ ‘생명책에서 지워질 사람들’ ‘의인들의 반열에 들지 못하는 사람들’ 등 많은 저주의 문구들이 그들의 예배서에서 발견되고 있습니다. 로마정부와 동족 유다교의 박해 속에서도 그리스도교인들의 유일한 희망은 자신들의 시대에 예수가 왕권을 가지고 재림하시어 이 억울하고 서럽고 뒤틀린 이 세상을 하나님 창조의 목적대로 회복시킬 것이라는 소망이 있기에 곧 재림하실 예수를 기다리며 고난을 이겨내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네로의 박해는 점점 더 심해지고 베드로 바울의 순교 또 예루살렘성의 파괴 등 교회에 대한 박해는 더욱더 심각해저 갔습니다. 이런 박해 속에서 어떤 교회는 로마제국과 타협하기도 하고 황제숭배를 받아드림으로서 교회에 대한 박해를 피하고 자 하기도 했음을 일곱교회에 보내는 편지 속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에베소 교회는 처음 사랑을 버렸으며 버가모 교회는 발람의 가르침을 따라 우상의 제물을 먹었으며 두아디라교회는 이세벨처럼 우상숭배와 음행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작은 능력으로 끝까지 참고 견디는 빌라델피아 교회나 환란과 궁핍 속에서도 끝까지 진리를 지키고 있는 서머나 교회를 주님은 칭찬 하셨습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교회들은 황제숭배를 받아드림으로서 교회의 정체성을 잃게 되었고 좌절과 절망과 흔들리는 믿음 안에서 교회의 존립문제에 심각한 도전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아시아 일곱 교회에 교회의 본질을 회복시키고 해방을 향한 신앙의 역동성을 찾고 또 그리스도 교인들의 결단을 촉구하고자 요한은 하나님 계시의 말씀을 아시아 일곱 교회에 보내게 된 것입니다.
주님은 자신의 지체인 교회가 부패하고 타락하였다고 그냥 잘라 버리시지는 않습니다. 경고와 책망과 칭찬으로 치료 하십니다. 그 치료의 처방전이 바로 일곱 교회에 보내는 편지요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인 것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말씀은 단지 지상의 조직교회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영적교회인 바로 우리들 믿는 자 각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이기도 하며 바로 우리 믿는 각 개인의 주관적 교회이기도 한 것입니다. 우리는 예수를 구주로 영접함으로서 우리 몸은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이 되었으며, 동시에 교회인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믿음의 상태와 영적능력과 영적 상태에 따라 나 자신이 이 일곱 교회 중 어느 한 교회 혹은 여러 교회의 특징을 지닌 한 교회가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일곱 교회에 주시는 모든 말씀을 애써 배우고 그 말씀들을 다 지켜 행함으로 책망이 없는 교회가 되어야 하며 동시에 내가 소속된 교회를 책망이 없는 교회로 만들어 나아가야 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성공주의를 복음이라 착각하고 성장해온 한국교회가 이 아시아 일곱 교회에 주시는 주님의 책망과 경고의 말씀에 주목해야 할 것 입니다. 사실 기독교적 성공은 세상 적으로 볼 때 실패와 관련이 있습니다. 예수가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인류구원이 있었고 30배 60배 100배의 열매는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썩을 때 가능한 일입니다.
제가 이 시간 소개하고자 하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아시아 일곱 교회 중 맨 마지막에 소개되는 교회로서 시대적으로는 종말시대 교회의 모습이며 성령의 인도를 받는 교회가 아니고 일반 사람들에 의해 사람 뜻대로 운영되는 교회입니다. 그래서 이교회는 주님이 안 계신다고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먼저 본문 14절에서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이 말씀하신다’. 이 모습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나타나신 주님의 모습입니다. 왜 주님은 라오디게아 교회에 이런 모습으로 나타나셨을까요? 그것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주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 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하나님을 증거 하기 위해 죽도록 충성하셨습니다. 정말로 확고하고 견고하고 신뢰할만한 분으로 하나님의 충성되고 참된 증인이셨습니다. 하나님 창조의 목적을 떠난 교회, 세상적인 목적만을 가진 교회,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닙니다. 타락하고 진리가 없는 거짓된 교회, 라오디게아교회에 주님은 아멘이신 분이시요, 신실하시고 참되신 증인이시오, 하나님의 창조의 처음이신 분으로 나타나셔서 교회의 본질이 어떤 것인지를 일깨워주시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 15절에서 16절에서 책망과 경고의 말씀으로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상태를 진단해 주십니다. ‘나는 네 행위를 안다. 너는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면 좋겠다. 네가 이렇게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않고 차지도 않으니, 나는 너를 내입에서 뱉어 버리겠다’. 이런 상태는 라오디게아 교회의 영적상태입니다. 음식물이 아주 차거나 더울 때는 부패되지 않습니다. 우리의 신앙도 마찬가지로 미지근할 때 영적 잠에 빠집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 우상 사이에서 머뭇거렸듯이 라오디게아 교회도 제국에 적당히 순응하며, 편한 길을 갈 것인가, 아니면 절대로 타협하지 않는 고난의 길을 택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사이에 이미 세상은 그들을 덮어 버렸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생각을 타고 들어옵니다.
그래서 잠언 4장에 “무엇보다도 네 마음을 지켜라. 그 마음이 바로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이다”는 말씀을 다시 한 번 우리 마음속에 새겨야할 것 입니다. 이런 머뭇거림은 이미 세상에 점령당했음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런 머뭇거리는 신앙을 내 입에서 토하여 버린다고 하셨습니다. 크리스챤이라는 이름에 만족하지 말고, 예수의 제자로서 존재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주님이 오실 날 주님은 우리에게 어떤 신학적 질문을 하지 않을 것이며, 우리가 복음을 위해서 얼마만큼 헌신했으며, 어느 감옥의 재소자를 만났으며, 어느 노숙인을 돌보았으며, 고아와 과부를 어떻게 돌아보았는지를 물을 것입니다. 다음은 17절 19절에서 이 교회에 주시는 권면의 말씀을 살펴보겠습니다. ‘너는 풍족하여 부족한 것이 조금도 없다고 하지만 실상 너는 네가 비참하고 불쌍하고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나는 네게 권한다. 네가 부유하게 되려거든 불에 정련한 금을 내게서 사고, 네 벌거벗은 수치를 가려서 드러내지 않으려거든 흰옷을 사서입고 네 눈이 밝아지려거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나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책망도 하고 징계도 한다. 그러므로 너는 열심을 내어 노력하고 회개 하여라’. 라오디게아 교회가 제국에 순응함으로서 밀려오던 파도는 피할 수 있었으나 더 이상 교회라 볼 수는 없었습니다. 육신의 눈에 보이는 풍요로움, 거대한 교회건물 엄청난 헌금액수 많은 교인 수 외국에서 다년간 공부하여 높은 학위를 받은 목회자들 농촌이나 해외로 파송되는 선교사의 수, 이만하면 족하고 성공한 목회요 자랑 할 만 하고 부족한 것이 없다고 자만하고 안일에 빠져있는 라오디게아교회를 향하여 주님은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한다고 책망하십니다.
믿는 자들의 참 부요는 영적 부요입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산 체험과 영적능력에 있어서는 갖은 것도 없고, 아는 것도 없으며, 갖고자 하지도 않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그래서 가난하고 가련하고 곤고한 것입니다. 아시아 일곱 교회 중 종말적 교회, 인본주의적 교회 하나님의 칭찬의 말씀은 하나도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는 성령의 역사가 없는 말씀으로 메마르고 죽어있는 교회였습니다. 열매가 없는 무화과나무를 예수님이 저주하시자 말라죽었지만 언젠가는 생명이신 예수를 받아드림으로서 가지가 연하여 지고 잎이 나서 열매가 맺히듯이 라오디게아 교회도 생명이신 예수님을 소유해야 열매를 맺혀서 주님으로부터 버림받지 않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귀 있는 자는 성령이 교회들에게 하시는 말씀을 들으라고 하십니다. 소경 바디메오가 들었던, ‘보아라’ 하는 성령의 말씀입니다. 성령의 말씀은 나 개인에게 주시는 사적이며, 주관적 말씀입니다. 내 안에 계시는 성령께서 나 개인에게 주시는 말씀, 그래서 들을 귀 있는 자 만 들을 수 있습니다. 들을 귀 없는 사람은 하나님의 말씀밖에는 보지 못합니다. 그 많은 무리 중에서 ‘보아라’ 하는 성령의 말씀은 바디메오만 들은 것입니다. 타락하고 진리가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주님은 사랑하신다고 하십니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은 바로 나의 모습이며 우리의 모습이고 한국교회의 모습이기에 절망적이었던 내 영혼에 소망이 생깁니다. 그리고 세 가지 처방전을 주십니다.
첫째, 불에 정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라.
둘째,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
셋째,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라.
이 세 가지 처방전은 모두 주님으로부터 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 가지를 실행하여 책망이 없는 교회로 회복될 때, 즉 이기는 자들에게 주님의 보좌 우편에 앉게 해주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세가지 처방전중
첫째는 불에 정련한 금을 사서 부유하게 하라하십니다. 교회는 금이여야 하며 금 촛대여야 합니다. 이런 금과 같은 믿음은 그냥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련이라는 대가를 치루어야 합니다. 불에 정련된 금과 같은 믿음은 주님으로부터 사기 위해서는 우리가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충성되고 참된 증인으로 살 때 흘리는 땀과 눈물과 고통과 억울함과 핍박, 외로움 그것이 바로 우리가 주님께 지불해야할 대가입니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되기를 포기 했습니다. 황제 숭배를 강요받았으나 제국에 순응할 때 세상의 풍요로움과 육신의 편안함이 주어지는 유혹을 거부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 교인들이 성령 충만 할 때 세상을 이길 수가 있으며 성령충만 함이 없으면 세상을 초월 할 수 없으며 세상을 본받을 수밖에 없습니다. 그로인해 얻은 부와 권세라면 그것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 아니라 세상이 준 것이라 볼 수밖에 없습니다. 이런 교인들로 교회가 가득 찬다면 그것은 이미 교회가 아니며 하나님의 복음과 진리와는 상관이 없는 교회라고 볼 수 있습니다. 세상적으로 부요한 교회 라오디게아 교회에 가장 부족한 것은 연단(정련)입니다. 그들은 안일에 빠져 연단을 싫어합니다.
부족함이 없으니 하나님께 간절함도 없습니다. 그러나 연단이라는 댓가 없이 금과 같은 믿음은 살 수 없으며 영적 풍요도 얻을 수 없습니다. 연단이 두려워서 하나님나라 의를 버리는 자는 하나님나라 백성이 아니며, 세상은 하나님나라 의를 행하는 자들을 미워합니다. 교회의 타락은 그리스도를 생명의 양식으로 먹는데서 떠나 육의 것을 구하는데서 부터 시작됩니다. 생존을 위한 의식주를 넘어서 쌓아두기 위한 것이라면 기름을 태워서 하나님께 향기로운 제사를 드려야 할 것을 우리 몸에 자꾸 축적시켜서 거대한 몸집으로 불리는 교회와 같습니다.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주님의 계명을 지키며 땀과 눈물을 많이 흘려 축적되어있는 기름을 자꾸 태워야 합니다.
두 번째 처방전은 흰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라고 하십니다. 그리스도 교인들이 입어야할 옷은 두 가지가 있습니다. 먼저 하나님 앞에 칭의를 위한 것으로 예수로 옷 입어 의롭다 함을 얻고 하나님 앞에 나갈 수 있는 옷입니다. 두 번째는 주님과 매일매일 동행하기 위한 옷으로 하얀 세마포 옷입니다. 이것은 성도의 옳은 행실 즉 주님의 계명을 지키는 일입니다. 이 두지가 옷을 입지 못하면 벌거벗은 자요 부끄러운 자들입니다. 벌거벗은 창피한 모습을 하고서도 육신의 몸에만 값비싼 옷을 걸치고 나는 부자요 부족한 것이 없다고 교만해 하고 있으므로 그래서 곤고하고 가련하고 눈먼 자들입니다.
세 번째 처방전은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하십니다. 라오디게아는 안약으로 유명한 도시였습니다. 세계각처에서 이 안약을 사기 위해 이 도시로 왔습니다. 이들에게 육의 눈을 치료할 약은 있었으나 영의 눈을 치료할 안약은 없었습니다. 이 안약은 주님만이 가지고 계십니다. 영의 눈을 뜨기 위해서는 소경 바디메오처럼 ‘주여 보기를 원하나이다’ 하고 주님 앞에 외치고 나와야 합니다. 앉아있던 자리를 걷어차고 겉옷을 벗어버리고 달려 나와야 합니다. 잠잠 하라는 주위의 방해도 물리 처야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를 내 안에 소유 하는 것입니다. 예수를 내 안에 소유하기 위해서는 내 손에 가진 것을 다 버리고 주님만을 붙잡아야 합니다. 빌립보서 3장 8절에 ‘나는 그리스도 때문에 모든 것을 잃었고 모든 것을 오물로 여깁니다. 나는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 있는 사람으로 인정받으려고 합니다.’라는 바울의 고백을 우리는 본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리스도가 얼마나 귀중한가를 안다면 그리스도를 얻기 위해 기꺼이 대가를 지불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이 주신 이 세 가지 처방전 즉 불에 정련된 금으로 부유하게 하는 것, 흰옷을 사서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가리는 것, 안약을 사서 발라 보게 하는 것 을 힘써 지키고 행하여 금과 같은 믿음으로 하나님 앞에 칭찬받는 고회로서 회복되어야 합니다.
사랑하는 새길교회 형제자매 여러분, 특별히 여선교회 회원여러분, 지금 이 시대를 영적으로 육적으로 위기의 시대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교회의 위기로부터 시작된 생명경시, 환경위기는 세계도처에서 여러 가지 재앙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주님 재림 전에 나타나는 여러 가지 징조들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성서에는 교회나 가정이나 국가가 위기가 있을 때마다 여성들의 헌신으로 다시 일으켜 세웠던 예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새 역사 탄생을 위해 죽음을 무릅쓴 마리아의 용감한 결단이 있었기에 메시아 탄생이 있었고, 출애급 때 여성 지도자인 미리암 이야기, 자기 백성들을 죽음의 길에서 건져낸 에스더, 민족의 구원자 드보라, 전쟁을 막아낸 아벨의 지혜로운 여인, 요시아 왕때 종교개혁의 동반자인 여자예언자 훌다 이외에도 수없이 많은 여성들의 헌신으로 위기에 처한 가정이나 교회나 국가를 일으켜 세우는 원동력이 되었다고 성서는 증언하고 있습니다. 칭찬받을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라오디게아 교회, 육의 눈에 보이는 것에는 풍족하지만 정말 있어야 하는 영적인 것에는 가난한 교회, 아름답게 차려입고 모여들지만 참 말씀에 대한 행함이 없어서 벌거벗은 사람이 모이는 교회, 영의 눈이 멀어서 아무것도 보지도 못하는 교회, 입으로는 주여! 를 외치지만 실상 그 심령 안에 주님은 안계신 교회, 더웁지도 차지도 않은 교회, 세상과 적당이 타협하면서 안일함에 빠진 교회, 이러한 모습은 바로 우리의 모습이 아닙니까. 이제 우리는 깨어날 때입니다. 주님이 말씀하신 무화과 나무의 비유를 배워야합니다.
23년 전 새길교회가 새길신앙고백에 기록된 대로 창조의 보존과 완성을 위해, 인간의 생명과 존엄을 지키기 위해, 하나님의 정의와 평화의 실현을 위해, 하나님나라 복음을 위해 헌신하기로 했던 초심으로 돌아가 교회와 나라를 위해 또 가정을 위해 뜨거운 열정으로 기도하고 헌신하기를 먼저 여선교회 여러분에게 촉구합니다. 그래서 새길교회가 교회의 정체성을 잃고 헤매고 있는 한국교회에 새 길을 제시 할 수 있는 역할을 감당하수 있도록 죽도록 충성하는 주님의 참된 증인이 됩시다.
제가 40대 초반에 처음 만났던 하나님은 말씀으로 저를 완전히 뒤집어 놓았습니다. 목사님이 강대상에서 외친 말씀의 검이 제 심령에 꽂혔고 골수를 쪼개는 역사가 일어나고 저는 뜨거운 용광로 속으로 들어간 것 같은 체험을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정말 하나님의 말씀은 앞뒤 양날이 선 날선 검이라는 성경 말씀대로였습니다. 그때부터 저는 교회를 위해서 기도하며 열심히 전도했습니다. 날마다 놀라운 체험 속에서 살았습니다. 그리고 저희 가정에 아들 둘이 있는데 큰 아이 이야기를 잠간 하겠습니다. 오래전 30여년 전 이야기 입니다마는 그때 아들이 머리를 다처서 병원에서 검사한 의사는 뇌출혈이 심하여 예측불허하다고 했습니다. 남편은 저에게 어떻게 할 것이냐고 물었습니다. 저는 아들이 죽더라도 싸늘한 병원 시트위에서 보내고 싶지 않았습니다. 내 가슴에 품고 있다가 보내고 싶었습니다. 집에 와서 아들 방에 눞혀 놓고 두 손을 번쩍들고 하나님께 기도 했습니다. ‘하나님, 죽고 사는 것은 하나님 손에 달렸는데 그러나 하나님께 아들을 살려 달라고 기도하고 싶습니다. 지금 저희 상황이 기뻐 할 상황은 아니지만 야고보서 1장 말씀에 보니 형제자매 여러분, 여러 가지 시험에 빠질 때에, 그것을 더할 나위 없는 기쁨으로 생각하십시오. 여러분은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낳는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게 역사하시는 분 엘리아나 베드로에게 역사하셨던 하나님은 지금 나에게도 동일하게 역사하실 줄 믿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인간이 아니시고 신이시기에 식언치 않는 분이시니 저는 이 말씀을 그대로 믿겠습니다. 기뻐할 상황은 아니지만 기뻐하라고 하니 기뻐하면 감사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이 시험에 합격할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라고 고백하는 순간 뜨거운 불덩어리가 온몸에 확 덮처 왔습니다. 전 너무 기쁘고 감사했습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불로 응답하시는 분이라는 말씀을 기억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3일 밤낮을 꼼짝 않고 그 자리에 앉아서 말씀보고 기도하고 회개하면서 지냈는데 3일째 되는 날 혼수상태에 있던 아들이 눈을 뜨고 엄마 배고파하고 일어났습니다. 머리 안 아프냐 하고 물으니 안 아프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바나나 2개를 주었더니 정말 마파람에 게 눈 감추듯 먹어 치우고 나가 놀겠다면서 마당으로 나갔습니다. 저는 그동안 밀린 일 좀 하려고 부엌과 거실과 방으로 뛰어다니면서 거의 치우고 난 다음 아들이 어디 있나 찾으려고 창문 밖을 내다보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아들이 그 당시 유행하던 스카이 콩콩이라는 놀이기구를 타고 깡충깡충 뛰고 있었어요. 인간적인 생각으로 머리 다친 애가 저렇게 심하게 뛰면 어떻게 될까 싶어서 창문을 두드리며 아들보고 하지 말라고 소리쳤습니다. 그런데 제 가슴속에서 세미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걱정하지 마라, 내가 고쳐주는 것은 완벽하게 고쳐준다 라는 음성이 들려 왔습니다. 저는 믿음이 없음을 다시 회개하고 아들에게 그냥 놀라고 했습니다. 그 아들이 잘 자라서 대학졸업하고 미국, 중국에 가서 공부하고 이제 5월 15일 결혼하게 됐습니다. 다시 한 번 하나님께 감사와 영광을 드립니다.
기도
우리의 생사화복을 주관하시는 하나님, 안일함에 빠져 차지도 뜨겁지도 않은 라오디게아 교회와 같은 이 시대 기독교인들에게 어서 깨어 회개하고 열심을 내라 하시는 성령의 말씀을 들을 수 있는 저희들이 되게 하여 주십시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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