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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막2:27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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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추응식 형제 |
참고 : | 새길교회 2010.6.13 주일설교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미니멈 (마가복음 2장 27절)
2010년 6월 13일 주일예배 추응식 형제
어느날 예배를 마치고 앉아있는데 우리교회에서 늘 친구처럼 대해주시는 정대현 선생님께서 다가오셔서 “교회달력에 있는 추선생님 글을 보니까 추선생님 신앙은 미니멀인것 같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제가 영어는 잘 못하지만 이 말은 제가 30년 전쯤 대학시절에 접해본 적이 있습니다.
예술작품에서 미니멀은 ‘최소한’이라는 말뜻 그대로 작가가 작품에 예술적인 기교나 개인의 감정표현을 최소화하는 것입니다. 화가가 아름다운 꽃을 그렸다 해도 그것은 개인의 감정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꽃은 화가에게는 아름다운 표현대상일지 모르지만, 꽃가게 하는 사람에게는 상품이고, 그것을 배달하는 사람에게는 짐일 뿐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꽃은 개인적 사적 관계를 모두 떠난 ‘꽃 그 자체- 물(物)자체’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현대 화가는 그리지 않는 캔버스를 걸어놓기도 하고, 마르셀 듀상이라는 작가는 화장실 변기를 그대로 화랑에 옯겨 놓기도 하였습니다.
얼마 전 우리 교회 배정은 선생님 전시회에서도 물고기 같은 형상이 보이기는 한데, 바닥에는 그 물고기를 표현하는 고무조각이 흩어져 있는 것을 볼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작품을 보면서 작가는 하고자 하는 이야기를 나름대로 이렇게 생각해보았습니다.
난 속이지 않겠다. 물도 없는 화랑벽에 무슨 물고기가 있을 수 있겠는가. 지금까지 천에다가 물감을 발라놓고 그것을 물고기라고 말해왔던 그런 허상은 보여주지 않겠다. 위대한 고흐의 해바라기도 천에 붙어있는 물감조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제 보아라 여러분들이 여기서 물고기라고 보았던 것은 하나의 고무조각에 지나지 않은 것이었다. 그 검정 고무조각에서 검정고무신을 보든 물고기의 비늘을 보든 그건 여러분들의 자유다. 난 최대한 실상, 즉 물질 그대로를 보여주려고 했고, 그래서 최대한 그리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혹 비늘모양 고무조각에서 비린내를 느낀다면 그 환상도 그대에게는 실상이다. 내가 고무조각에서 심해를 느끼는 것처럼.
이처럼 미니멀이라는 것은 작가의 꾸밈을 최소화하고, 일상의 현상 그대로를 제시함으로써, 보는 사람의 자유를 극대화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림이라는 것이 어떻게 그리느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 바라보느냐하는 문제로 바뀌어 지는 것입니다. 이것은 마치 제사장이 가르치는 종교에서 모든 사람이 스스로 믿는 종교로 바뀌어 지는 것과 같습니다. 그림은 그리는 기술이 아니라 바라보는 기술로 바뀝니다. 이 세상을 아름답게 바라볼 수 있으면 바로 그 사람이 화가입니다. 종교적 의식에 익숙한 사람이 제사장이 아니라 하나님을 잘 바라볼 수 있는 사람이 제사장이 됩니다. 그러니까 누구든지 제사장이 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아름답게 볼 수 있는 한,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예술품이 될 수 있습니다. 이것은 또한 성물과 성소가 따로 있지 않다는 것을 말해 줍니다. 그리고 이것은 본래의 자유입니다. 그 자유는 접시에 고인 물에서도 천지를 보고, 보르네오 식탁 밑에서도 원시의 동굴을 느낄 수 있게 해줍니다. 강남청소년회관이 마가의 다락방이 될 수도 있고, 가나의 혼인잔치집일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우리가 우리들의 마음속에서 자유롭게 공간과 관념의 한계를 넘나들려면 대전제가 있어야 합니다. 그것은 가능한 한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작위적인 자기중심적 규정을 삼가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미니멀 작가들은 꾸미지 않은 일상 물건을 작품이라고 그냥 던져 놓습니다. 그러므로 미니멀이라는 것은 무언가 없애나가는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냥 없는 것을 없다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있는 것을 없애나가는 의도적인 행위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자유롭게 다니던 마을 앞 백구마당 가운데에 전봇대가 세워졌습니다. 사람들은 눈앞에 보이는 전봇대가 거슬렸고, 갑갑함을 느꼈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사람들은 그것에 익숙해졌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동네 아이가 전봇대에 부딪혀 크게 다친 일이 생겼습니다. 마을 사람들에게는 다시 그 전봇대가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힘을 모아 그 전봇대를 다른 곳으로 옮기게 하였습니다. 동네 앞을 가로막은 전봇대가 없어지자 사람들은 큰 자유를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그 뒤 새로 이사온 사람들은 그냥 텅 빈 백구마당을 마을 사람들이 왜 좋아하는지 알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허전함을 느꼈고, 동네 발전을 위해서는 그 마당에 무언가 세워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이 마을 사람들처럼 사회 어느 곳에나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는 것 같습니다. 각기 자기 역할을 하면서 때로는 조화를 이루고, 마찰도 있는 것 같습니다.
새길교회는 동네 마당 가운데에 버젓이 서 있는 전봇대를 보고 그것을 치워야겠다는 생각에서 출발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동안 교회사에서 작위적으로 더덕더덕 붙여 온 것들을 과감히 떼어버리고 가능한 한 치장되지 않은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자 노력해온 교회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교파나 건물, 그리고 사람 위에 서있는 성직자도 두지 말자고 했고, 사도신경 같은 것들도 채택하고 있지 않습니다.
뿐만 아니라 보통교회가 그 교회의 리더에 의해 정체성과 명성이 만들어지는 반면, 새길교회는 오히려 그런 점들을 경계해 왔습니다. 그것은 교회와 문화원의 대표자, 설교자, 예배 후 교회를 대표해서 배웅인사를 하는 사람들이 누군지를 보면 쉽게 알 수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새길교회는 종파나 교파에 의해 규정되지 않는 예수를 따르고자 하였습니다. 이런 점에서 새길교회는 미니멀적인 순결성을 추구해왔다고 할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외람되지만 정대현 선생님께서 말씀하셨던 새길교회 달력의 제 글을 읽겠습니다.
하나님의 세상을 만드는 것은 우리가 만든 우상을 걷어내는 일일 것입니다. 하나님 나라라 부르지도 않을 것입니다. 그저 섭리대로 살아가는 것일 뿐, 어떤 수사(修辭)도 없을 것입니다. 마치 이름 없음이 하나님의 이름이고, 모양 없음이 하나님의 모습인 것처럼 말입니다.
우리가 종교적으로 무언가 규정하는 것을 주저하는 것은 이 세상에는 태초부터 이미 하나님의 거대하고 정교한 법이 시행되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지금 이 순간에도 성령이 함께 하심을 믿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 오셔서 당시의 각종 규정과 관습을 고치셨습니다. 말하자면 창조질서법 불일치 판정을 내리신 것입니다. 사람들이 질서를 위해 만든 것도 예수님이 보시기에는 무질서로 보인 것입니다. 하나님의 법정신은 마가복음의 안식일에 대한 규정에 나타나 있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하여 생긴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하여 생긴 것이 아니다.(마가 2:27) "
사람들의 섣부른 규정에 대한 잘못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진리를 왜곡하고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한 그 잘못을 지적하고 계십니다. 이러한 지적은 과거의 일이 아니라 지금 우리를 향하고 있습니다. 욕망과 소비, 생산의 계속적인 확대를 통해 유지되는 이 사회에서 우리들의 삶을 제한하는 유무형의 규정들은 넘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사회는 말할 것도 없고, 교회들도 나름대로 교회를 규정하고 성서를 규정하고 목회자, 교인을 규정하고, 나아가서는 절대자도 규정합니다. 하나님이냐 하느님이냐하는 이름조차도 교회의 규정에 따라 다르게 부르고 있습니다. 이 규정들은 때로 가치를 전도시키고, 배타성으로 서로 부딪히게 만들기도 합니다.
이런 자기중심적 규정의 가장 큰 잘못은 하나님의 무한성을 가리는 것입니다. 무소불위, 광대무변하신 하나님을 왜소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자기 아집 속에 가두고, 자기 교회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고, 자기 교파 안에 가두어 두게 됩니다. 이것은 곧 사람을 그 속에 가두는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사람이 하나님을 놓아주자는 역설적 표현이 있겠습니까?
우리가 그릇의 빈 공간을 사용하듯 저는 텅 빈 느낌의 예배당을 다니고 싶었습니다. 나그네처럼 다니고 싶었습니다. 아주 이기적으로 다니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23년 전 어느 날 예배를 마치고 나오는데, 줄서서 교회 등록을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가슴이 덜컹 하였습니다. 제 앞에서는 김용덕 선생님께서 교인카드를 작성하고 계셨습니다. 마음이 약해 줄을 빠져나가지도 못하고, 우물쭈물 하다가 그냥 교인카드에 이름을 적었습니다. 예배당 안과 밖의 구별 없이 지유롭게 살고 싶었는데, 이름을 적고 나니 좀 구속감이 느껴졌습니다.
뒤에 새길교회에서 대문에 붙이라는 고무명패를 나누어주었는데 안 붙이기는 그렇고 해서, ‘새길’이라는 이름은 잘라내고 그냥 ‘교회’ 부분만 붙여놓기도 했습니다. 구역예배 때 사람들이 그걸 보고 웃었습니다.
미니멀은 작가가 꾸미지 않기 때문에 보는 사람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새길교회도 이와 같습니다. 콘크리트로 만들어진 이 공간은 하나지만 이것을 각자가 느끼는 모습은 다양할 것입니다. 저는 새길교회를 저처럼 느끼고, 또 다른 사람은 다른 사람의 모습으로 느끼고, 또 어떤 사람은 아주 전통적인 교회로 느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다양한 모습을 하나로 만드는 것은 시장에서 길들여진 가시적인 반듯함이 아니라 자기와 다른 것을 서로 이해하고 존중하는 마음일 것입니다. 저는 이것이 새길교회의 가장 중요한 점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동안 저로서는 텅 빈듯한 교회를 이기적으로 다녔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 빈곳을 사랑으로 채워 주셨습니다. 그것을 증언하는 것으로 제 말씀을 마치겠습니다.
저는 새길교회에서 모녀를 차례로 만났습니다. 어머니 되시는 분은 새길교회가 함께했던 현대교회에서 만났는데 그 때 그분 연세는 80이 훨씬 넘었습니다. 저는 교회에서 항시 그분 뒤에 앉았고, 그 분의 기도하는 모습을 지켜보았습니다. 어느 날 우연히 백혈병 걸린 제 제자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는 잊고 있었는데 한참 지난 어느 날 “강경민 학생 요즘 어때요?” 하고 물었습니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이름을 자세히 말씀드리지도 않았는데 그 분은 또렷이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아니 권사님 그 학생 이름을 어떻게 기억하세요?” 하니까 “전에 내가 듣고 매일 기도하고 있어요.”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학생은 완쾌되어 결혼도 하고 잘 살고 있다는 이야길 들었습니다. 저는 이 양 권사님을 제 신앙의 스승처럼 생각하고 있습니다.
강남청소년회관 새길교회에서는 이제 돌아가신 양 권사님의 따님 옆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역시 저는 이 분께 우연히 치매 걸리신 저희 어머니 이야기를 해 드린 적 있습니다. 그 뒤 어쩌다 저희 어머니 이야기가 나오니까 “그래 김, 경, 오 씨!” 하고 저희 어머니 이름을 또렷이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순간 저는 눈물이 나오려고 하였습니다. ‘어떻게 어머니 이름을 기억하고 계실까, 전에 지나가는 말로 언뜻 말씀드린 것 같은데....’ 그래서 저는 “권사님, 어떻게 제 어머니 이름을 기억하고 계세요?” 하니까 송 권사님은 그의 어머니 양 권사님이 하시던 말씀과 똑 같이 “제가 김경오씨를 위해 기도하고 있어요.” 하고 말씀하시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도도 잘 안하는데…, 아, 내가 다른 사람을 위하지 않아도 다른 사람은 나를 위해 주는 곳. 나보다 약하시고 위로 받으셔야 할 분이 오히려 위로를 해 주는 곳. 조용히… 보이지 않는 곳에서….’
요한복음 3장 8절 말씀을 읽고 마치겠습니다.
바람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는 듣지만,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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