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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3:16-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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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
1. 들어가는 이야기 /
병든 자에게는 그 병을 낫게하는 약이 복음입니다. 사막 한가운데 물 없는 사람에게는 오아시스가 복음입니다. 돈이 없어 부도낼 지경에 처한 사람에게 돈이 복음입니다. 사람이 처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길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전쟁, 고통, 무의미, 굶주림, 죽음 이 모든 인생의 얽히고 섥힌 모든 궁극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복음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모든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은 어떻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2. 복음은 스스로 밝습니다
토마스 스코트는 < 천로역정 >에 대한 해설서를 쓴 사람입니다. 어느날 그의 부인이 < 천로역정 >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여보 당신 그 책을 다 이해하면서 읽고 있는거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이 대답하기를 그럼요 아주 재미 있어요 그런데 요즈음 나는 당신이 쓴 천로역정 해설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이란 답습이나 모방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 고백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때 다양한 표현과 해설이 가능할 수 있다고 하나 오늘날 복음에 대한 해설집들이 복음 자체 보다 더 존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루터, 칼빈의 해설집도 그 빛이 바래기 마련이며 바르트, 불트만, 브룬너, 고가르텐, 몰트만, 틸리히, 부르거만, 니버,...등등의 모든 신학자의 해설집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듯 흐르는 세월과 함께 퇴색하고 잊혀져 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인 성경 말씀 자체보다 신학 해설집을 더 중히 여기고 그것에 정통함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 속에서 복음이 그 스스로 자기 자체를 밝게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은 생명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수양과 묵상의 결집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사람의 인생 여정에는 각가지 고난과 염려, 슬픔과 고독, 질병과 죽음의 구렁텅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죽음, 절대 허무 그 자체가 있습니다. 이런 궁극적인 인생의 절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철학이 해결해 주지 못하였고, 예술이 해결해 주지 못하였고, 깊은 산 속에 들어 앉아 도를 딱는 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구원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주신 것입니다. 절망, 염려, 질병, 고통, 무의미, 전쟁, 갈등, 고통, 절대 허무, 저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허무로 돌아갈 우리 인생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복음이며 생명인 것은 우리가 죽은 후 죽음 저편에서 이루어지는 미래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Now and Here)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사건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풀잎 끝에 달린 이슬이요, 잠깐 있다가 없어질 아침 안개 같이 절망적이고 절대 허무한 우리 인생이 참되고, 충일한 존재론적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는 것이기에 더욱 복음이며 생명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영생의 길을 안내하는 표시판이며 절망의 막힌 담을 무너트리는 우렁찬 나팔 소리이기에 또한 생명입니다.
4. 복음은 심판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히9:27 >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심판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것인가? 하는 판단 기준, 심판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판단 기준으로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그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벌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살아 있는 현재에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곧 심판이 됩니다. 살아 있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살아 있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치 않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 둘째 사망의 불못에 던지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복음은 심판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4:12).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자는 영생의 축복을 받으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유다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저에게 도리러 좋았을뻔 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 저에게는 복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생명인 동시에 심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조건 중립적 위치에 서 있는 것인가? 복음은 생명 50%, 심판 50%인가? 아, 감사하게도 그게 아닙니다. 생명 99%, 심판 1%입니다. 무엇으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 >
통곡 하고 싶도록 감사하고 또 감사 하신 밀씀!
병든 자에게는 그 병을 낫게하는 약이 복음입니다. 사막 한가운데 물 없는 사람에게는 오아시스가 복음입니다. 돈이 없어 부도낼 지경에 처한 사람에게 돈이 복음입니다. 사람이 처한 절박한 상황 속에서 그 문제를 해결해 줄 길을 복음이라고 합니다.
전쟁, 고통, 무의미, 굶주림, 죽음 이 모든 인생의 얽히고 섥힌 모든 궁극적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길이 복음입니다. 그 길이 무엇입니까?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러므로 예수께서는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하신 것입니다. 예수로 말미암아 이 세상의 모든 궁극적인 문제를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그 복음은 어떻한 특성을 가지고 있는가?
2. 복음은 스스로 밝습니다
토마스 스코트는 < 천로역정 >에 대한 해설서를 쓴 사람입니다. 어느날 그의 부인이 < 천로역정 >을 읽고 있는 것을 보고, 여보 당신 그 책을 다 이해하면서 읽고 있는거요? 하고 물었습니다. 그 부인이 대답하기를 그럼요 아주 재미 있어요 그런데 요즈음 나는 당신이 쓴 천로역정 해설서를 이해할 수 있는 지혜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있어요 라고 하였습니다.
신학이란 답습이나 모방이 아니라 자신의 주체적 고백으로써 하나님에 대한 인간의 응답이라고 할 때 다양한 표현과 해설이 가능할 수 있다고 하나 오늘날 복음에 대한 해설집들이 복음 자체 보다 더 존중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루터, 칼빈의 해설집도 그 빛이 바래기 마련이며 바르트, 불트만, 브룬너, 고가르텐, 몰트만, 틸리히, 부르거만, 니버,...등등의 모든 신학자의 해설집도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듯 흐르는 세월과 함께 퇴색하고 잊혀져 갈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인 성경 말씀 자체보다 신학 해설집을 더 중히 여기고 그것에 정통함을 자랑으로 여긴다면 어불성설입니다. 왜냐하면 성경 말씀 속에서 복음이 그 스스로 자기 자체를 밝게 비추시기 때문입니다.
3. 복음은 생명입니다
복음은 인간의 수양과 묵상의 결집이 아니라 위로부터 온 하나님의 구원의 메시지입니다. 사람의 인생 여정에는 각가지 고난과 염려, 슬픔과 고독, 질병과 죽음의 구렁텅이가 있습니다. 그리고 영원한 죽음, 절대 허무 그 자체가 있습니다. 이런 궁극적인 인생의 절망에서 구원 받을 수 있는 길은 없었습니다. 철학이 해결해 주지 못하였고, 예술이 해결해 주지 못하였고, 깊은 산 속에 들어 앉아 도를 딱는 다고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았습니다. 구원 받을 길이 없었습니다. 사람의 생각으로는 날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 세상을 사랑하사 그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셔서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치 않고 영생할 수 있는 길을 주신 것입니다. 절망, 염려, 질병, 고통, 무의미, 전쟁, 갈등, 고통, 절대 허무, 저 영원한 죽음에서 살아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영원한 허무로 돌아갈 우리 인생에게 복음이 되는 것입니다.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복음이며 생명인 것은 우리가 죽은 후 죽음 저편에서 이루어지는 미래적인 사건일 뿐 아니라 지금 바로 여기서 (Now and Here) 생명으로 충만해지는 사건이기에 더욱 그러합니다. 풀잎 끝에 달린 이슬이요, 잠깐 있다가 없어질 아침 안개 같이 절망적이고 절대 허무한 우리 인생이 참되고, 충일한 존재론적 의미와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누리는 것이기에 더욱 복음이며 생명입니다. 그리고 복음은 영생의 길을 안내하는 표시판이며 절망의 막힌 담을 무너트리는 우렁찬 나팔 소리이기에 또한 생명입니다.
4. 복음은 심판입니다
우리 인생은 모두 죽음에 이릅니다. 그러므로 성경은 <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다 히9:27 >고 하셨습니다. 그러면 심판 때에 영원한 생명을 얻을 것인가? 영원한 형벌에 떨어질 것인가? 하는 판단 기준, 심판 기준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는 그 판단 기준으로 그 아들의 이름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으나 그 아들을 믿지 아니하는 자는 영벌에 떨어질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 요3:36 >고 하신 말씀이 바로 그것을 선포하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살아 있는 현재에 예수를 믿느냐? 믿지 않느냐? 하는 것이 곧 심판이 됩니다. 살아 있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얻습니다. 살아 있는 지금 예수님을 영접치 않은 사람은 영원한 형벌 둘째 사망의 불못에 던지우게 되는 것입니다. 이와같은 의미에서 복음은 심판이기도 합니다.
복음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 예리합니다(히4:12). 그러므로 복음을 믿는 자는 영생의 축복을 받으나, 복음을 믿지 않는 자는 유다가 차라리 태어나지 않았더라면 저에게 도리러 좋았을뻔 한 것처럼 복음을 듣지 못한 것이 저에게는 복이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라고 하시는 것입니다.
5. 그럼에도 불구하고 복음은 복음입니다
복음은 생명인 동시에 심판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렇다면 복음은 무조건 중립적 위치에 서 있는 것인가? 복음은 생명 50%, 심판 50%인가? 아, 감사하게도 그게 아닙니다. 생명 99%, 심판 1%입니다. 무엇으로 그렇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까?
<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3:17 >
통곡 하고 싶도록 감사하고 또 감사 하신 밀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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