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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삼하5: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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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275546 |
오늘 설교 본문인 삼하 5:1-10절은 다윗 왕조가 확고한 기반을 다지게 된 두 가지 사건을 담고 있습니다. 하나는 이스라엘 모든 지파가 다윗이 있는 헤브론에 와서 다윗을 왕으로 섬기겠다는 충성서약을 한 사건입니다. 그 이전까지는 다윗은 남유대의 작은 지역에서만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원로들이 다윗에게 기름을 부었습니다. 다른 하나는 여부스 족이 차지하고 있던 예루살렘을 함락시켜 가나안 전체를 지배하게 된 일입니다. 사사시대와 사울 왕 시대에도 예루살렘은 여전히 여부스 족의 성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은 천연요새라서 함락시키기가 어려운 탓이었습니다.
다윗은 원래 왕이 될 만한 위치에 있지 못했습니다. 이스라엘의 초대 왕은 사울이었고, 그에게는 요나단을 비롯해서 몇 명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원칙대로라면 사울의 아들들 중에서 한 명이 왕이 되어야만 했습니다. 목동출신인 다윗은 사울의 부마이기도 하고, 경호대장이기도 하고, 수하 장군이기도 했습니다. 사울의 말년에 다윗은 남쪽 유대 지역을 장악할 수 있었습니다. 사울은 블레셋과 전쟁을 치르는 중에 세 명의 아들들이 같이 죽습니다. 그걸 계기로 다윗은 헤브론을 거점으로 남유다의 왕으로 정식 등극합니다.
그것으로 사울 가문과 다윗의 정권 쟁탈전이 끝난 게 아닙니다. 다윗이 헤브론에서 왕으로 등극하자, 사울의 군사령관인 아브넬은 마하나임에서 사울의 남아있는 아들 이스보셋을 왕으로 세웁니다. 다윗은 남유다의 왕이고, 이스보셋은 북이스라엘의 왕으로 자리를 잡은 겁니다. 다윗은 남유다 권력을 확실하게 장악했지만 이스보셋은 자기를 왕으로 세운 장군 아브넬의 눈치를 보는 형편이었습니다. 유다와 이스라엘은 2년 동안 전쟁을 치렀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이스보셋의 군사령관 아브넬이 죽고, 이스보셋도 이어서 죽습니다. 두 사람 모두 타살되었습니다. 오늘 성경 본문이 가리키는 대로 그제야 다윗은 남유다만이 아니라 북이스라엘까지 통치하는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성서기자는 이렇게 결론을 내립니다.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니 다윗이 점점 강성해졌다고 말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했기 때문에 다윗 왕조가 강성해졌다는 성서기자의 진술은 옳은 건가요? 하나님께서 다윗과 함께 하셨다는 증거는 무엇일까요? 다윗은 실제로 하나님이 선택한 왕인가요? 그렇다면 그 이유는 무엇일까요?
다윗은 누군가?
남북 이스라엘의 전체 역사를 통틀어서 다윗처럼 위대한 왕은 없었습니다. 성서기자들은 다른 왕들을 선한 왕과 악한 왕으로 평가했는데, 선한 왕의 기준이 바로 다윗이었습니다. 다윗은 이스라엘 역사에서 빛나는 성군이었습니다. 그의 아들 솔로몬이 사치와 부패로 하나님의 심판을 받을 지경에 놓였을 때도 아버지 다윗 덕분으로 솔로몬 생전에는 심판을 받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신약성서 기자들도 예수님이 다윗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말합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를 객관적으로 살핀다면 다윗에게도 잘못이 많습니다.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칼을 차고 다니는 야전사령관이었습니다. 남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어야 할 전쟁을 밥 먹듯이 한 사람입니다. 힘이 없을 때는 비굴하게, 힘이 있을 때는 건방지게 행동했습니다.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신세인 요즘 한국의 정치인들처럼 아무리 개인으로 순수하더라도 때가 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서 권모술수도 많이 행했습니다. 그의 운명도 기구했습니다. 왕궁의 근친상간을 막지 못했고, 왕자의 난도 막지 못했으며, 심지어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 압살롬을 피해 야반도주하기도 했습니다. 솔로몬만 제외하고 대다수의 아들들이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다윗은 편안하게 눈을 감지 못했을 겁니다.
다윗의 마지막 장면은 왕상1,2장에 나옵니다. 다윗의 아들 아도니야가 장군 요압과 제사장 아비아달과 함께 왕을 자처하고 나섰습니다. 서열로 본다면 당연히 자기가 다윗을 이어 왕이 되어야했지만 궁중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이 불리하다고 여겼는지, 먼저 치고 나왔습니다. 이 소식을 들은 나단은 왕비 밧세바를 찾아가서 솔로몬을 왕으로 옹립할 계획을 짰습니다. 밧세바가 먼저 다윗의 침실을 찾아갔습니다. 다윗은 너무 늙어서 거동하기도 힘든 때였습니다. 밧세바가 무슨 말로 늙은 다윗의 마음을 사로잡았을지 뻔합니다. 이어서 나단이 들어옵니다. 나단은 다윗의 정신적 지주입니다. 밧세바 사건으로 나단에게 큰 약점이 잡힌 적도 있습니다. 나단은 늙은 다윗을 압박했습니다. 결국 다윗은 솔로몬을 후계자로 선포합니다. 다윗은 곧 죽습니다. 그 뒤로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상상에 맡깁니다. 솔로몬은 배다른 형 아도니야와 그에게 협조한 장군 요압을 죽입니다.
베들레헴에서 양을 치던 다윗이 권력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모든 행복한 삶은 끝났습니다. 그는 평생 싸움꾼으로 살았습니다. 한번 쥔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서 정적을 제거하는 일을 반복해야만 했습니다. 정치라는 게 그렇습니다. 자식들도 똑같은 일을 반복했습니다. 그가 죽음에 임박한 순간까지 두 아들이 싸우는 걸 지켜봐야했습니다. 그가 눈을 감을 때 속이 얼마나 쓰렸겠습니까.
그렇다고 해서 다윗이 악한 왕이었다는 말씀은 아닙니다. 그는 크게 훌륭한 것도 없고, 그렇게 나쁜 것도 없는 왕이었습니다. 다만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볼 때 그는 위대한 왕이었습니다. 그는 이스라엘을 탄탄한 국가로 만든 최초의 왕이었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그의 능력이라면 능력입니다. 그는 분명히 이스라엘의 영웅입니다. 그가 이스라엘을 완전한 통일국가로 세운 데에는 그의 능력만이 아니라 운도 많이 따랐습니다. 사울 왕과 그의 아들들이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죽지 않았다면 다윗의 운명도 달라졌을 겁니다.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 달아날 때도 운이 좋아서 생명을 부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일들은 그에게 수 없이 많았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다윗에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있었다는 사실을 중요하게 여깁니다. 그에게 믿음이 있었는지, 그게 얼마나 올바른 믿음이었는지를 우리가 판단하기는 어렵습니다. 한 국가의 지도자가 믿음이라는 명분으로 행한 것들이 실제로는 하나님의 뜻과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많으니까요. 유럽 국가들이 아프리카와 아메리카를 식민지로 점령할 때 기독교 신앙을 앞세웠습니다. 미국의 청교도들은 노예상인들에게서 양심에 거리낌이 없이 흑인을 돈으로 샀습니다. 마녀사냥과 종교재판은 너무 잘 알려진 이야기들입니다. 남아프리카공화국에서 1948-1994년까지 아파르트헤이트(인종분리법)를 주도한 이들은 모두 기독교 신앙을 잘 따르는 백인들이었습니다. 이런 불의하고 불미스러운 역사를 믿음으로 합리화할 수는 없습니다.
다윗 왕조의 후손이라는 사실을 자랑하는 지금의 이스라엘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팔레스틴 원주민들과 함께 살고 싶어 하지 않습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들은 무력으로 팔레스틴 원주민들을 강제 이주시키기도 하고, 팔레스틴 사람들이 마음대로 이동할 수 없도록 높은 벽을 치기도 합니다. 그들은 여호와 하나님을 잘 믿고 있으며, 자신들의 행위를 하나님의 뜻이라고 주장합니다. 물론 그들도 언제 있을지 모를 팔레스틴 원주민들의 테러로부터 자국민을 보호해야하기 때문에 어쩔 수 없다고 말합니다. 구약성서 기자들이 보도하는 다윗에 관한 이야기도 이와 비슷합니다. 정략과 완력으로 정적을 소탕하고, 예루살렘 성에 살고 있던 여부스 족을 쫓아냈습니다. 다윗이 점점 강성해졌습니다. 그 모든 게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승리주의 신앙의 모순
하나님이 함께 하시면 우리가 강한 사람들이 될까요? 목동이었다가 왕이 되고, 졸병이었다가 장군이 되고, 월세 집에 살다가 호화주택에서 살게 될까요? 거꾸로 우리가 강성해져야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일까요? 이것은 승리주의신앙입니다. 승리주의 신앙은 우리를 유혹합니다. 그게 우리의 생명을 안전하게 보존할 것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많은 기독교인들이 이 승리주의 신앙에 물들어 있습니다. 예수 믿고 영혼이 잘되고 번성하고 강건해진다는 삼박자축복에 마음을 빼앗기고 있습니다. 그들은 기독교 신앙을 번성의 신학으로 포장합니다. 예수를 믿기만 하면 불가능이 없다고, 긍정의 힘을 보여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이런 메시지는 성서적이지 않습니다. 신앙적이지 않습니다. 상식적이지도 않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세상에는 부자가 있으면 가난한 사람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모두가 강성해질 수 없습니다. 모두가 건강하게 살지 못합니다. 하나님이 예수 믿는 사람들만 편애해서 잘 되게 하지도 않습니다. 예수를 잘 믿지 않는 일본 사람들이 세계에서 가장 부자이고, 가장 장수한다고 합니다. 예수 잘 믿어도 큰 사고나 질병으로 죽기도 하고, 예수 안 믿어도 인생이 잘 풀릴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본문은 무슨 이유로 하나님이 함께 하시니 다윗이 강성해졌다고 말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강성해졌다는 것에 초점을 두지 말고 하나님이 함께 계시다는 말에 초점을 두고 읽으십시오. 성서기자에게는 하나님이 다윗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민족과 함께 했다는 사실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의 조상인 아브라함과 함께 했습니다. 이삭과 야곱과 요셉과 함께 하셨습니다. 이집트에서 고난당하던 시절에도 그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40년 광야시절에도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 그들은 놀라워했고, 거기에 자신들의 운명을 걸었습니다.
다윗이 강성해졌다는 말은 곧 유대민족이 강성해졌다는 뜻인데, 고대 유대인들이 하나님을 경험하는 한 방식을 가리킵니다. 그들은 그런 방식으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경험했습니다.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말과 강성해졌다는 말은 똑같은 것으로 생각하지 마십시오. 흔한 예를 하나 들어야겠군요. 어머니 품에 안겨 있는 아이들은 어머니를 배고파 울면 젖을 주는 대상으로만 경험할 수 있습니다. 촉감과 후각으로 느낍니다. 그러나 나이가 들면 때로 어머니에게 회초리를 맞기도 하고, 삶에 대해서 어머니와 깊은 대화도 나누게 됩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어머니에 대한 경험 자체입니다. 어머니가 자기와 함께 있다는 그런 경험 말입니다. 오늘 성서본문은 다윗 왕조가 강성해진다는 사실을 통해서 하나님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물론 승리주의 신앙입니다. 그것을 신약시대의 우리가 똑같은 차원에서 받아들인다는 것은 대학생으로 자란 딸이 어머니 젖을 그리워하는 것과 비슷하겠지요.
예수가 임마누엘이다
장성한 사람이 된 후로는 어린아이의 일을 버렸다고 고백하는 바울처럼(고전 13:11) 우리는 이제 하나님 경험을 승리주의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버려야 합니다. 그렇지만 여기서 중요한 것은 승리주의를 버린다고 해서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사실에서조차 눈이 어두워지면 안 된다는 사실입니다. 우리는 유대인들의 경전이며, 초기 기독교가 그대로 받아들인 구약성서를 통해서 그 하나님 경험의 진정성을 배워야합니다. 초기 기독교는 구약의 영적 시각을 유지하면서 전혀 새로운 하나님 경험을 말합니다.
마태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출생 전승을 전하면서 이사야 7:14절을 인용합니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의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이 임마누엘은 오늘 설교 본문 삼하 5:10절에서 표현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입니다. 신약의 신앙은 구약의 승리주의 신앙을 넘어섰습니다. 그 단초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제자들이 처음부터 그 사실을 알고 있었던 건 아닙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따라나선 뒤에도 여전히 승리주의 신앙에 머물러 있었습니다. 그들의 메시아론도 다른 유대인들과 마찬가지로 시오니즘, 정치 경제적인 승리주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수난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일 수 없었습니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일어나면 안 된다고 말리던 베드로를 향해서 예수님은 “사탄아, 내게서 물러나라.”고 꾸짖기도 했습니다.
신약의 신앙이 승리주의가 아니라면 실패주의냐,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을 겁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모두 십자가에 처형당하듯이 세상에서 실패하고 비루하게 살아야 한다는 건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럴 리가 있나요. 예수 믿는 사람이 염세적으로, 비관적으로 세상을 사는 건 옳지 않습니다. 우리도 승리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승리는 구약이 말하는 승리주의와는 다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 이후로 승리는 전혀 새로운 차원으로 올라섰습니다. 이 승리는 다윗왕조가 강성해지는 차원과는 전혀 다른 것입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해서 잘 먹고 잘 사는 승리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세상에서의 승리와 실패에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쉽지는 않지만 그렇게 노력합니다. 삶을 생존경쟁의 원리로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우리의 관심은 예수 그리스도의 궁극적이고 종말론적 승리에 있습니다. 그의 승리는 죽음을 넘어 생명에 이르는 것입니다. 이것보다 더 본질적이고 궁극적인 승리가 어디 있을까요?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게서 일어난 이런 승리를 믿고 희망하고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 승리는 미래에 일어날 기다림의 대상만이 아닙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 비밀스럽게 개입해 있습니다. 구원의 신비와 생명의 신비가 지금 여기서 우리를 사로잡고 있습니다. 그런 경험이 있으신가요? 너무 막연한가요? 이런 경험의 실증을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이 우리의 영혼을 가득 채워서 우리의 자아가 축소되는 경험이 그것입니다. 바로 거기서 여러분은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자유가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 알게 될 것입니다.(2009.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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