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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마5:9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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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두려워하지 말라 >
일전에 행색이 초라한 한 사람이 교회로 왔다. “어떻게 왔느냐?”고 묻는데 대답은 없이 험상궂게 노려보기만 했다.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인 줄 알고 약간의 돈을 주자 그때부터 그가 한참 날뛰었다. “이 사람이! 내가 거지인 줄 알아!” 그러면서 흥분한 듯이 교회를 때려 부술 듯 행동했고 만원 지폐가 수북한 지갑을 보여주며 돈을 집어던지려고 하면서 말했다. “내가 이 돈을 확 뿌려버릴까 보다. 날 어떻게 봐!”
그를 진정시키려고 했다. “진정하세요. 오해했으면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그렇게 살살 달래도 몇 분간 교회 기물들을 다 때려 부술 듯이 무섭게 날뛰는데 옛날에 권투를 했던 가락이 있어서 전혀 겁나지 않고 다만 그가 불쌍하게 보였다. 그처럼 전혀 겁내지 않고 빤히 쳐다보자 얼마 후 그가 흥분을 가라앉히고 교회 장의자에 10분쯤 가만히 앉았다가 “이제 갑니다.” 하고 툭 나갔다.
나는 아직도 그가 왜 교회에 왔는지 전혀 모른다. 그런데 그가 흥분해서 날뛸 때 침착하게 대하지 않았으면 상황이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사람의 심리가 그렇다. 강도를 만나도 침착하게 대하면 강도도 침착해진다. 그런데 강도 앞에서 “강도야!” 하고 달아나면 강도가 뒤쫓아 와서 칼로 등을 푹 찌른다. 그처럼 두려울 때 침착하게 대하면 두려운 기운이 물러가지만 그때 호들갑을 떨면 두려운 기운에 사로잡힌다.
이제 살면서 두려운 일을 당해도 두려워하지 말라. 마귀가 달려들 때 두려워하고 등을 보이면 마귀는 더 쫓아와 등을 푹 찌른다. 또한 두려움이 있으면 아무리 겉으로 “마귀야! 물러가라!” 하고 소리쳐도 소용없다. 마귀가 이미 마음속의 두려움을 읽었는데 왜 물러가겠는가? 마귀는 어떤 상황에서도 늠름하게 있을 때 “졌다!”고 줄행랑을 치고, 문제와 시련도 믿음의 반석 위에 굳게 서면 곧 물러간다.
항상 믿음 안에서 평안과 늠름함을 잃지 말라. 그처럼 믿음이 주는 평안을 이스라엘 사람들은 샬롬이라고 불렀다. 그들은 샬롬을 가장 큰 축복으로 여겨서 인사할 때마다 “샬롬!”하고 인사했다. “샬롬!”은 문제를 잠재우는 신기한 능력이 있다. 왜 예배하고 기도하는가? 샬롬의 능력을 얻기 위해서이다. 가장 위대한 이웃 사랑이 무엇인가? 샬롬의 능력을 전해주는 것이다.
어려울 때 이렇게 말해주라. “집사님! 힘내세요. 저도 기도할게요. 반드시 좋은 길이 있을 거예요.” 그러면 얼마나 힘이 되는가? 그처럼 샬롬을 전하면서 천국에 가기 전에 천국의 삶을 미리 연습하라. 천국은 땅에서 지옥 같은 삶을 살던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 아니라 땅에서 이미 샬롬의 능력을 가지고 천국의 삶을 산 사람이 죽으면 가는 곳이다. 그러므로 진정 구원받은 자녀라면 자신 안에 샬롬의 능력이 있어야 한다.
< 화평을 위해 필요한 것 >
본문 말씀을 보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 이 구절에서 ‘화평케 하는 자’란 ‘샬롬을 주는 자’를 말한다. 주님은 산상팔복의 7번째 복을 말씀하면서 샬롬을 주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로 불려진다고 했다. 또한 이 말씀은 화평은 그냥 주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화평은 추구하고 노력해야 얻어진다. 구체적으로 화평의 축복을 얻으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1. 믿음
믿음이 견고하면 어떤 상황에서도 화평을 잃지 않는다. 왜냐하면 모든 사건이 합력해 선을 이룰 것을 굳게 믿기 때문이다. 그처럼 믿음이 주는 샬롬은 오늘의 문제를 잠재우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한다.
서울에 있는 한 큰 교회 목사님의 간증이다. 그는 시골에서 목회를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교회를 부임했는데 계속 어려웠다. 그 중에 한 교회는 너무 가난해서 사례 대신 교회에서 문방구를 차려주었다. 그때 목사님은 매일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이 문방구가 살아야 저도 삽니다. 이 문방구가 잘 되게 하소서!” 그런데 얼마 후에 문방구가 망했다.
그때는 하나님이 너무 야속했다. 그러나 문방구를 정리하고 서울로 올라와 목회에 전념하자 교회가 크게 성장했다. 결국 그때 망한 것이 축복이었다. 만약 그때 문방구가 축복 받았다면 그 목사님은 지금도 여전히 문방구에서 연필과 지우개 팔고 있었을 것이다. 그처럼 망한 것이 ‘버림받은 것’이 아니라 ‘더 큰 일을 위한 축복’이 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은가? 그런 믿음을 가지고 어려움 중에도 평안을 잃지 말라.
2. 회개
진짜 화평은 하나님과의 화평에서 비롯된다. 그래서 회개를 통해 하나님과의 화평의 문이 열리면 문제도 해결되고 사람과의 화평도 이뤄진다. 더 나아가 그때 샬롬의 능력을 통해 몸도 건강해진다. 특히 두통, 고혈압, 만성위장병, 알레르기성 비염, 천식, 불면증, 관절염, 신경통, 그리고 암과 같은 병은 회개를 통한 화평의 능력이 필요하다는 싸인이다. 그래서 회개하면 질병 치유의 가능성은 현저히 높아진다.
한 여자 집사가 있었다. 그녀는 심한 알레르기성 비염으로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그래서 짜증이 늘어나면서 성격도 다 버렸다. 그녀는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 저의 막힌 코가 펑 뚫리게 해주세요.”
그렇게 기도하던 어느 날, 기도 중에 자신의 문제를 깨달았다. 문제는 코가 막힌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막힌 것이었다. 그때부터 자신의 신앙적 나태와 교만과 불순종을 회개하며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코가 뻥 뚫리기 전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뻥 뚫리게 해주세요.” 그날 밤새도록 눈물콧물을 흘리며 기도하다가 아침이 되었다. 왠지 몸 전체가 개운했다. 그날 이후로 그녀의 비염은 완전히 사라졌다.
살면서 무엇인가 막힌 것을 느끼거든 하나님과 막힌 것이 있는지 살피고, 회개를 통해 그 막힌 것을 뚫고 샬롬의 능력과 축복을 얻으라. 사람들은 행복의 원천이 환경에 있는 줄 알지만 사실 행복은 자신 안에 있다. 혼자 살 때 행복하지 않으면 결혼해도 행복하지 않다. 결국 행복은 자신 안에 있다. 진정한 행복은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를 통해 샬롬의 능력을 얻을 때 주어진다.
3. 겸손
교만은 패망의 선봉이다. 교만하면 배 아플 일도 참 많다. 옛날에는 사촌이 땅을 사면 배가 아프다고 했지만 요새는 사촌이 땅을 사면 두통, 복통, 신경통에 심지어는 고혈압까지 생긴다. 얼마나 불행한 삶인가? 반면에 남이 잘되면 박수를 쳐주고 “나도 그렇게 잘해야지!” 하고 결심해보라. 그러면 아픈 배까지 낫는다. 남이 나보다 더 이름이 나도 좋게 생각하라. 때로는 이름은 안 나도 중요한 사람들이 있다. 그런 요긴한 사람이 되라.
몸 중에서 발은 가장 수고하지만 가장 무시당한다. 일년 365일을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니면서 제일 수고하는데 사람들은 대개 손만 알아준다. 인간적으로 보면 섭섭하지만 발은 묵묵히 자기 역할을 한다. 그런 보이지 않는 지체가 있기에 건강하게 사는 것이다.
특히 본문에서 화평케 하는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불려진다는 말은 화평케 해야 하나님과 깊은 만남이 이뤄진다는 말이다. 그처럼 하나님과 깊은 만남이 있으면 사실 부러워할 것이 없다. 그때는 재벌도 부럽지 않다. 또한 그때 차별의식과 공로의식도 사라진다. 그래서 교회를 위해 최고의 헌신을 하고도 그 공로를 드러내지 않는다. 공로의 비석을 사람들의 가슴이 아닌 하나님의 가슴에 세우기 때문이다.
사실 땅에서 영광을 크게 받으면 하늘에서는 국물도 없다. 그러나 조용히 하나님을 감동시키며 하나님의 마음에 공로의 비석을 세우면 그의 천국 보상은 누구보다 클 것이고 그의 앞날은 누구보다 찬란하게 될 것이다. 사람은 몰라줘도 하나님 아버지만 알아주면 된다. 그처럼 하나님의 알아주심을 추구하고 하나님의 마음을 얻는 고급 성도가 되면 어떤 상황에서도 마음의 평안을 뺏기지 않을 것이다.
4. 감사
영성 중에 최고의 영성이 있다. 그것은 범사에 감사하는 영성이다. 범사에 감사하려면 꼭 필요한 것이 ‘특이한 것’보다 ‘평범한 것’에서 감사를 발견하는 눈이다. 성경은 하나님의 은혜를 이슬로 비유한다. 또한 이슬이 그치는 것은 저주의 상징으로 표현된다. 반면에 매일 조용히 내리는 이슬은 매일 조용히 주어지는 하나님의 축복을 상징한다. 그처럼 하나님의 진짜 은혜는 대개 이슬처럼 임한다.
사람들은 “은혜!” 하면 기적적인 무엇이 있어야 은혜인 줄 안다. 그래서 불치병 낫는 기적, 떼돈 버는 기적, 갑자기 신데델라 되는 기적만 최고인 줄 안다. 그러나 영혼을 살리는 것은 어쩌다 한번 주어지는 기적이 아니라 매일 주어지는 하나님의 소리 없는 은혜이다. 그 은혜가 인생을 살리고 영혼을 살린다.
기적은 자주 생기지 않는다. 그러므로 기적에 인생의 전부를 걸지 말라. 반면에 하나님이 매일 소리 없이 내려주시는 은혜는 한 순간도 그친 적이 없다. 심장처럼 날 때부터 한 번도 쉬지 않고 뛰는 것이 진짜 기적이다. 다윗은 저녁에 자고 아침에 일어나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라고 고백했다. 그처럼 진짜 기적은 보고 만지는 기적이 아니라 소리 없이 임하는 은혜가 진짜 기적이다.
하나님의 축복은 떠들썩한 모습보다는 은근한 모습으로 온다. 축복을 받았다고 자랑하고, 은사를 받았다고 덜렁거리는 성도들 중에 꾸준히 신앙생활을 잘 하는 성도는 거의 없다. 몇 년 후에 “그분 어떻게 됐어요?”라고 물으면 그 짧은 세월에도 혼돈과 고난으로 얼룩진 삶을 사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받는 삶’보다 ‘이미 주어진 은혜를 깨닫고 감사하는 삶’이다. 일 년에 몇 번 기도원 가는 것보다 1년 365일을 하나님과 동행하며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제 폭포수 같은 은혜를 구하다가 기복주의에 영혼이 쓸려 내려가지 말고 매일 주어지는 이슬의 은혜를 감사하라. 그처럼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감사해야 마음에 깊은 샬롬이 주어진다.
5. 관용
사람에게 제일 힘든 것이 있다. 그것은 용서이다. 그래도 용서를 힘써 실천해야 화평이 주어진다. 살면서 관용을 많이 베풀되 관용을 요구하지는 말라. 다만 자기 책임을 다하라. 그처럼 요구는 작게 하고 책임은 많이 지면서 말없이 수고하는 사람이 되고, 내 수고는 덜 인정받아도 남의 수고는 기쁘게 인정해주는 관용정신을 가지라.
관용이 넘치는 삶을 살려면 3가지가 필요하다. 첫째, 차이에 대한 인식이 필요하다. 사람은 다 다르다. 어떤 사람은 치약 아래를 잡고 짜고 어떤 사람은 치약 위를 잡고 짠다. 둘째, 서로를 그냥 받아들이라. 서로를 바꾸려고 하면 힘들어지지만 서로를 있는 모습 그대로 받아들이고 사랑하면 하나님이 바꿔주신다. 셋째, 서로 마음 문을 열라. 마음 문을 활짝 열면 축복의 문도 활짝 열린다.
20세기에 가장 큰 인물 중의 하나가 만델라이다. 그는 27년을 감옥에서 지내다가 나와서 압도적인 지지로 대통령이 되었다. 그 후 모든 정적을 사면하고 퇴임 후에는 특유의 소박한 미소를 짓고 고향으로 돌아가니까 임기 후에 더 존경받고 있다. 반면에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임기 후에 백담사 가고, 청문회 서고, 감옥 가고, 계란 맞고, 자살했다. 왜 그런가? 관용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축복!’ 하면 그 초점을 자신에게만 두지만 진짜 행복은 남을 행복하게 할 때 주어진다. 성공과 축복을 ‘승자의 우승컵’에서 찾지 말라. 인생을 경쟁관계로만 보면 반목과 대립과 불안으로 결국 자멸한다. 이제는 경쟁의식보다는 동반자의식을 키우고 서로 이해하고 용서하며 화평의 도구가 되기를 힘쓰라. 그러면 자기만 손해 보는 것 같아도 결국 그런 사람이 더 많은 것을 얻게 된다.
6. 나눔
만약 하나님이 사람을 다 똑같이 만드셨다면 불공평으로 인한 불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기계적인 평화는 하나님의 뜻이 아니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평화는 가진 자가 가지지 못한 사람들을 돕고 강한 자가 약한 자를 섬김으로 생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평화이다. 그래서 화평케 하는 자가 되려면 잘 베풀 줄 알아야 한다.
히브리서 10장 39절을 보면 ”뒤로 물러나 침륜에 빠지지 말라.“는 말씀이 있다. 왜 사람이 침륜에 빠지는가? 가장 큰 이유는 인색하기 때문이다. 얻어먹어야 할 때는 얻어먹고 내야 할 때는 내야 인간관계가 견고해진다. 부인하고 싶지만 이상하게도 물질 문제와 신앙 문제는 깊은 관련이 있다. 그래서 물질을 다루는 태도를 보면 대개 믿음의 진실성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탐심 문제를 잘 극복하라. 탐심을 키우면 평안은 줄어들고 탐심을 줄이면 평안은 커진다.
예수님은 누가복음 16장 13절에서 “하나님과 물질을 겸해 섬길 수 없다.”고 했고, 누가복음 12장 15절에서도 유산 문제로 불평하는 청년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고 했다. 탐심은 복을 차버리는 것이고 나눔은 복을 진짜 복으로 만드는 것이다. 사람들은 ‘복’ 하면 무의식적으로 ‘소유의 복’을 연상하지만 진짜 복은 위로는 드리고 옆으로는 나누고 아래로는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통해 주어진다.
물론 어떤 선물을 받으면 기쁘지만 그 기쁨은 작은 기쁨이다. 반면에 드리고 나누고 베풀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가슴 벅찬 기쁨이 있다. 결국 ‘소유의 소외’는 있어도 ‘소유의 복’은 없다. 기복적인 종교는 ‘소유의 복’만을 말하지만 성경은 ‘바침의 행복’만을 말한다. 이기주의는 하나님을 잃고 양심과 도덕성을 잃게 하다가 나중에는 자신이 그토록 소중히 여기는 ‘자신’마저 잃게 한다.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결국 성도가 “돈을 어떻게 쓰느냐?” 하는 질문은 아주 깊은 신앙적인 질문이다. 그 질문에 대한 성실하고 의미 있는 답변을 준비하지 못했다면 차라리 돈이 없는 것이 낫다. 돈을 쓸 줄 모르면 돈이 있는 것이 오히려 불행으로 가는 길이다. 돈을 잘 쓸 줄도 모르면서 “잘 살아 보세!”라고 하면 영혼도 불행해지고 비인격적이고 비양심적이고 비도덕적인 사람들로 인해 사회도 뼈아픈 진통을 하게 된다.
왜 사람들이 재벌들을 곱지 않은 시선으로 보는가? 단순히 시기심 때문만은 아니다. “돈을 어떻게 벌고 쓰느냐?”에 대해 의구심을 풀어주는 재벌이 적기 때문이다. 혹시 재벌의 꿈을 꾼다면 “돈을 어떻게 벌고 쓰느냐?”에 대한 의구심을 멋지게 풀어주는 재벌을 꿈꾸라. 가끔 보면 “내 돈을 가지고 내 맘대로 쓰는데 무슨 상관이야!”라고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처럼 사람이 불쌍하게 보일 때는 없다. 결국 잘 버는 사람이 잘사는 사람이 아니라 잘 쓰는 사람이 잘사는 사람이다. 같이 잘 살려고 하지 않으면 진짜 잘 사는 것이 아니다.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레는 성도들에게 자주 도전했다. “여러분! 최고로 벌고 최고로 쓰십시오.” 번 돈보다 쓴 돈이 의미가 있다. 하늘나라의 장부에는 쓴 돈만 기록되어 있다. 샘은 퍼내야 깊어지고 맑아지듯이 복도 퍼내야 영혼의 샘이 깊어지고 맑아진다. 돈은 돌려쓰는 대상이지 사랑하는 대상이 아니다. 돈은 돌아야 경제도 살고 영혼도 살고 사회도 산다. 돈을 많이 쌓아놓으면 돈을 하나님보다 크게 생각하게 되고, 결국 하늘나라 가는 것이 어렵게 된다. 얼마나 불행한 일인가?
< 지금 주라 >
이제 많이 베푸는 거룩한 큰손의 꿈을 가지라. 그 꿈은 가장 거룩한 꿈이고 얼마든지 이룰 수 있는 꿈이다. 사람들은 흔히 돈이 많아야 나눌 수 있는 줄 안다. 그래서 탄식한다. “하나님! 많이 드리고 나누고 베풀고 싶은데 지금은 돈이 없습니다. 나중에 돈이 생기면 그때 잘 쓰겠습니다.” 아마 그 ‘나중’은 영원히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말씀한다. “아무개야! 지금 어려운 형편에서도 드리고 나누고 베풀라!”
어려울 때 주는 법을 잘 배우면 나눔이 체질화되고 결국 하나님은 그에게 더 많은 것을 주신다. 그러므로 돈이 많아야 베풀 수 있다는 것은 잘못된 인식이다. 조금 있을 때 베푸는 것을 배우지 못하면 많이 있을 때는 더욱 베풀지 못한다. 하나님은 베풀 때 꿔서 베풀라고 하지도 않고, 분수에 넘쳐서 베풀라고 하지도 않고, 나중에 베풀라고 하지도 않는다. 현재 가진 것을 통해 믿음으로 힘써 베푸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다.
사도행전 9장에 나오는 욥바의 다비다는 재산이 바늘과 실밖에 없었지만 그 바늘과 실을 활용해 선행과 구제를 해서 욥바를 감동시켰다(행 9:36). 그처럼 현재 가진 것으로 최선을 다해 나눔을 실천하라. 나눔의 열정이 항상 있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지금’이란 시간을 강조한다. 나눠주는 마음이 하나님이 주신 은혜라면 바로 지금이 그 은혜를 받을만한 때이다(고후 6:2).
죽기 직전에 전 재산을 바치고 죽는 것보다 지금부터 죽을 때까지 나누며 살면 얼마나 더 보람된 삶인가? 앞으로 나눔의 열정과 기회가 사라질 때가 온다. 시간과 기회가 항상 보장된 것은 아니다. 더 이상 건강하지 못할 때가 올 수 있고, 지금보다 더 어려운 물질의 흑암기가 올 수도 있다. 그러므로 지금 나누라. 형편과 여유가 있을 때만 나누려고 하지 않고 현재의 형편과 상관없이 항상 현재의 시간에서 나눔을 실천한다면 얼마나 그 삶이 아름답게 되겠는가?
이제 복의 근원을 꿈꾸라. 나누면 복의 근원이 된다. 밥 먹고 육신을 위해 지내다가 병드는 재주 밖에 없는 사람이 되지 말고, 또한 성도로서 예수님을 믿고 교회 다니는 재주 밖에 없는 사람도 되지 말라.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멋지게 시위할 수 있는지를 생각하며 나눔의 현장으로 뛰어들라. 나눔을 실천도 못한 채 물질을 다 잃고 “그때 베풀 걸!” 하고 탄식한다면 얼마나 안타까운 인생 낭비인가?
왜 중세에 암흑시대가 왔는가? 교회나 교인이 없어서가 아니라 나눔이 없는 교인들이 넘쳤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공부하지 못한 사람을 돌보라고 공부시켰고, 건강하지 못한 사람을 돌보라고 건강 주셨고, 빈약한 사람을 돌보며 하나님의 사랑과 진리를 시위하라고 물질을 주셨다. 그 하나님의 뜻을 따라 하나님이 주신 것을 좋은 일에 멋지게 환원하라. 꽃다발을 주면 주는 사람의 손에 먼저 꽃향기가 나듯이 드리고 나누고 베풀면 자신이 먼저 행복해진다. 진정 행복한 삶을 원하는가? 그렇다면 지금 주라. 그래서 예수 믿고 인물 되는 역사의 주인공들이 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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