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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벧전4:7-1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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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수 목사 |
참고 : | 말씀의샘물 http://www.wordspring.net |
1. 들어가는 이야기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 로마 보고서, 미래의 대충격에 대하여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의 현재 세계 상황을 주의 깊게 돌아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때(마24:3-13)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프리메이슨, 강신술, 사탄 숭배 등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단 사교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코소보, 보스니아 난민, 쿠르드 난민, 아프리카 난민 등은 모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한 결과입니다. 오존층의 파괴, 북극과 남극의 해빙 현상, 지구 온난화, 공기와 물의 심각한 오염, 기상 이변 속출, 심각의 도를 넘은 생태계의 파괴 현상 등은 요한 계시록16:2-21에 계시된 마지막 때의 재난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는 현상들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이 말씀은 위에 말씀드린 객관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우리 사람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떨어질지 알 수 없는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 같은 생명을 받고 태어난 존재라는 주관적인 의미에서도 사람은 항상 <마지막 때>에 사는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마지막 때를 당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떻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본문을 통하여 힘있게 증거하고 계십니다.
2. <마지막 때>인 줄 알고 계십니까?
실제 상황인 줄 알고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이유에서건 당신의 삶이 한 달 남았다면 당신은 그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스피노자는 이 물음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도 평상시 하던 그대로 살겠다고 대답합니다. 죽은 대답입니다. 스피노자는 안경 렌즈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런 재난 속에서도 나는 평소 내가 하던 일을 계속 하겠노라는 뜻으로 말했다면 <내일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 알의 안경 렌즈를 깎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때를 자기 나름의 철학으로 준비한 것을 <사과나무를 심겠노라>는 그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신앙대로 이 <마지막 때>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해야합니다.
바벨론 벨사살 왕은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써주신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있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서 있는 이 시간이 바로 <만물의 마지막 때>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3. <마지막 때>를 분명히 의식하면서 살라!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늦게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식하였기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여 큰 복을 받았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의식하지 않았기에 여분의 기름이 없어 큰 벌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때가 <마지막 때>인 줄 분명히 의식하며 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사실 이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몰라서 따먹은 것이 아니라 알고도 따먹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몰라서 짓는 것이 아니라 잘 알면서 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인 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이 바로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잊어먹거나 소홀히 여기며 삽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정신 단단히 차리라! 깨어나라! 그리고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본문에 보이는 정신 차리라, 근신하라, 기도하라는 표현은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으로 써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 강조한 것입니다. 깨어나십시오!
4. <마지막 때>를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마지막 때>를 의식한 사람의 삶의 태도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일 죽으리니 내 소유를 모두 팔아, 먹고 마시자! 하는 태도입니다(사2213). 다른 하나는 본문 말씀이 보여주시는 삶의 태도입니다. 전자는 영원히 죽는 길이고 후자는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너희는 사는 길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 길이 무엇인가?
첫째.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신 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언제 경우 따지고 미워하고 할 시간 없으니 열심히 사랑하며 살라는 겁니다.
둘째. 원망 없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즉, 보답 바라는 마음 없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보답을 바라며 하는 대접에는 필연적으로 원망이 생깁니다. 마지막 때인데 언제 보답 받을 시간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무 보답 바라지 않고 나그네를 대접한 것처럼 대접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셋째. 각각 은사 받은 대로 청지기로써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봉사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헌신입니다. 칭찬 받기나, 과시하려는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봉사가 아닙니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이름 없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5. 마치는 이야기 / 네가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 믿느냐?
노스트라다무스, 에드가 케이시, 로마 보고서, 미래의 대충격에 대하여 한번도 들어본 일이 없는 사람이라도 우리의 현재 세계 상황을 주의 깊게 돌아보면 주님께서 말씀하신 마지막 때(마24:3-13)가 멀지 않았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을 것입니다. 통일교, 여호와의 증인, 프리메이슨, 강신술, 사탄 숭배 등 <내가 그리스도라>고 하는 이단 사교가 횡행하고 있습니다. 코소보, 보스니아 난민, 쿠르드 난민, 아프리카 난민 등은 모두 민족이 민족을 나라가 나라를 대적한 결과입니다. 오존층의 파괴, 북극과 남극의 해빙 현상, 지구 온난화, 공기와 물의 심각한 오염, 기상 이변 속출, 심각의 도를 넘은 생태계의 파괴 현상 등은 요한 계시록16:2-21에 계시된 마지막 때의 재난을 그대로 입증하고 있는 현상들입니다.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이 말씀은 위에 말씀드린 객관적 의미에서 뿐 아니라 우리 사람은 누구나 언제 어디서 어떻게 떨어질지 알 수 없는 풀잎 끝에 매달린 이슬 한 방울 같은 생명을 받고 태어난 존재라는 주관적인 의미에서도 사람은 항상 <마지막 때>에 사는 존재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베드로 사도는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고 선포하신 것입니다. 참으로 만물의 마지막 때가 가까웠습니다. 베드로 사도는 이 마지막 때를 당하여 그리스도인이 어떻한 삶의 태도를 가지고 살아야 하는가?를 본문을 통하여 힘있게 증거하고 계십니다.
2. <마지막 때>인 줄 알고 계십니까?
실제 상황인 줄 알고 생각해 보십시다. <어떤 이유에서건 당신의 삶이 한 달 남았다면 당신은 그 남은 시간을 어떻게 쓰시겠습니까?>. 스피노자는 이 물음에 <내일 지구의 종말이 온다고 할지라도 나는 한 그루 사과나무를 심겠다>고 하였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 말을 인용하면서 자기도 평상시 하던 그대로 살겠다고 대답합니다. 죽은 대답입니다. 스피노자는 안경 렌즈를 만드는 사람입니다. 그가 그런 재난 속에서도 나는 평소 내가 하던 일을 계속 하겠노라는 뜻으로 말했다면 <내일 이 세상의 종말이 온다고 해도 나는 한 알의 안경 렌즈를 깎을 것이다>라고 하였을 것입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때를 자기 나름의 철학으로 준비한 것을 <사과나무를 심겠노라>는 그 한 마디로 표현한 것입니다. 우리 모두는 각자의 신앙대로 이 <마지막 때>에 대한 분명한 응답을 해야합니다.
바벨론 벨사살 왕은 하나님께서 손가락으로 써주신 <마지막 때>에 대한 경고를 무시하고 있다가 비참하게 죽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우리가 서 있는 이 시간이 바로 <만물의 마지막 때>라고 경고하고 있습니다.
3. <마지막 때>를 분명히 의식하면서 살라!
지혜로운 다섯 처녀는 신랑이 늦게 올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의식하였기에 여분의 기름을 준비하여 큰 복을 받았습니다. 어리석은 다섯 처녀는 의식하지 않았기에 여분의 기름이 없어 큰 벌을 받았습니다. 오늘 우리의 때가 <마지막 때>인 줄 분명히 의식하며 사는 지혜로운 사람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사실 이렇습니다.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은 것은 몰라서 따먹은 것이 아니라 알고도 따먹은 것입니다. 우리들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죄를 짓는 것은 몰라서 짓는 것이 아니라 잘 알면서 짓습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마지막 때>인 줄 우리는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지금이 바로 <마지막 때>라는 사실을 무시하거나 잊어먹거나 소홀히 여기며 삽니다.
그러므로 베드로 사도는 <정신 단단히 차리라! 깨어나라! 그리고 지금이 마지막 때인 것을 잊지 않도록 끊임없이 기도하라!>고 하십니다. 본문에 보이는 정신 차리라, 근신하라, 기도하라는 표현은 중요한 것을 강조하기 위한 반복적 표현으로 써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세 번씩이나 강조한 것입니다. 깨어나십시오!
4. <마지막 때>를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습은?
<마지막 때>를 의식한 사람의 삶의 태도에는 2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내일 죽으리니 내 소유를 모두 팔아, 먹고 마시자! 하는 태도입니다(사2213). 다른 하나는 본문 말씀이 보여주시는 삶의 태도입니다. 전자는 영원히 죽는 길이고 후자는 영원히 사는 길입니다. 너희는 사는 길을 택하라고 하십니다. 그 길이 무엇인가?
첫째. 무엇보다 열심히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고전 13장의 사랑으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하신 대로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입니다. 언제 경우 따지고 미워하고 할 시간 없으니 열심히 사랑하며 살라는 겁니다.
둘째. 원망 없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應無所住 而生其心 즉, 보답 바라는 마음 없이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보답을 바라며 하는 대접에는 필연적으로 원망이 생깁니다. 마지막 때인데 언제 보답 받을 시간이 있습니까? 아브라함이 아무 보답 바라지 않고 나그네를 대접한 것처럼 대접하면서 살라는 것입니다.
셋째. 각각 은사 받은 대로 청지기로써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봉사는 본질적으로 스스로 우러나서 하는 헌신입니다. 칭찬 받기나, 과시하려는 마음으로 하는 봉사는 봉사가 아닙니다. 빚진 자의 마음으로 이름 없이 봉사하라는 것입니다.
5. 마치는 이야기 / 네가 지금이 <마지막 때>인 줄 믿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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