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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하라!

요엘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433 추천 수 0 2010.08.05 00:2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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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욜2:21-27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15566 

emoticon

오늘 설교의 본문인 요엘서는 예언자 요엘이 선포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엘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는 그가 브두엘의 아들이라는 사실(욜 1:1)만 제외하면 아무 것도 없습니다. 본문에 대한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요엘이 예언자로 활동한 시기는 바벨론 포로기 이후가 분명하다고 합니다. 학자들에 따라서 조금씩 연대가 달라지는데, 대략 기원전 5-4세기라고 합니다. 그 당시 유대 나라의 형편은 별로 좋지 않았습니다. 기원전 587년에 예루살렘이 바벨론에 의해서 함락당한 뒤에 많은 왕족과 귀족들이 바벨론으로 포로로 잡혀 갔습니다. 바벨론은 유대의 지도층 인사들을 자기나라에 동화시켜버리려고 했습니다. 우리의 일제 강점기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습니다. 많은 지도층 인사들이 대세를 따라서 결국 친일 행각을 벌였습니다. 이런 일들은 지난 인류 역사에서 제국과 피식민지 나라에서 반복해서 일어난 것입니다. 예루살렘 함락 50년 뒤인 기원전 538년 이후에 몇 번에 걸쳐서 포로 송환이 있었습니다. 유대의 지도층 인사들이 고국에 돌아와서 왕조를 새로 세우고 예루살렘 성전을 재건하고 율법을 복원했습니다. 그러나 유대 나라는 국력을 점점 잃게 되고, 페르시아와 헬라와 로마의 지배를 받게 되었습니다. 그런 탓인지 요엘서의 전체적인 분위기는 어둡습니다. 자연재해와 하나님의 심판이 반복됩니다. 그런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구원은 망각되지 않았습니다. 암담한 현실에서도 요엘은 하나님의 묵시적 약속을 선포합니다. 오늘 본문이 그 중의 하나입니다.

 

복지사회

 

21-23절에서 요엘은 여호와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할 대상을 셋으로 묘사합니다. 첫째는 땅입니다.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 여호와께서 큰일을 행하셨음이로다.”(21절) 땅이 마치 설교를 듣기나 하는 것처럼 요엘이 말합니다. 땅을 향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한 것은 땅이 두려워할 만큼 엄청난 일들이 일어났으며, 그럴 가능성이 높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땅이 두려워한다는 게 무슨 말일까요? 극심한 가뭄이나 홍수, 또는 자연재해 같은 거겠지요. 요엘은 묵시사상에 근거해서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팥충이가 남긴 것을 메뚜기가 먹고 메뚜기가 남긴 것을 느치가 먹고 느치가 남긴 것을 황충이 먹었도다.”(욜 1:4) 요즘도 간혹 해외 토픽으로 등장하는 메뚜기 때의 습격을 생각해보십시오. 모든 농작물을 먹어 치웁니다. 땅이 두려워할만한 일들입니다. 하늘이 어두워지고, 땅이 흔들릴만한 일들입니다. 사람만이 아니라 땅도 두려워할만한 사건들입니다. 그러나 요엘은 “땅이여, 두려워하지 말고 기뻐하며 즐거워하라.”고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합니다.

 

둘째는 들짐승들입니다. “들짐승들아, 두려워하지 말지어다. 들의 풀이 싹이 나며 나무가 열매를 맺으며 무화과나무와 포도나무가 다 힘을 내는도다.”(욜 2:22) 들짐승들이 요엘의 설교를 알아들을 까닭은 없습니다. 이것도 역시 문학적 수사입니다. 사람의 말을 못 알아듣는 들짐승마저 이제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다는 뜻입니다. 이런 장면을 우리는 아프리카 대륙에서 벌어지는 짐승들의 생존 노력에서 볼 수 있습니다. 가뭄이 들기 시작하면 각종 짐승들은 호수로 모입니다. 그 호수마저 말라버리면 또 다른 호수를 찾아 나섭니다. 모든 호수가 말라버렸는데도 비가 오지 않는다고 상상해보십시오. 들짐승들의 불안은 고조에 달합니다. 그 순간에 비가 옵니다. 들짐승들은 이제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됩니다. 죽음의 문턱에서 구원을 받았으니까요.

 

셋째는 시온의 자녀들입니다. “시온의 자녀들이,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로 말미암아 기뻐하며 즐거워할지어다.”(욜 2:23) 시온의 자녀들은 물론 하나님의 백성들입니다. 그들이 기뻐해야 할 이유는 앞에서 땅과 들짐승들에게 한 말과 똑같습니다. “마당에는 밀이 가득하고 독에는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치리로다.”(욜 2:24) 땅이 두려워할 정도로 심각했던 재난이 여기서 다시 언급됩니다. “메뚜기와 느치와 황충과 팥중이가 먹는 햇수대로 너희에게 갚아 주리니”(욜 2:25) 여호와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원상으로 복구시켜주신다는 겁니다. 이제 그들은 더 이상 굶어죽을 걱정을 하지 않아도 됩니다.

 

요엘의 이런 설교가 상대적으로 풍요로운 세상에 살고 있는 우리에게는 별로 실감 있게 들리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고대 유대인들은 그야말로 생존 위기를 일상으로 느꼈습니다. 어디 유대만이겠습니까. 우리의 고대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렇게 오랜 옛날로 돌아갈 것도 없습니다. 1,2백 년 전의 우리 선조들이 어떻게 살았을까요. 6.25전쟁이 있었던 1950년대에도 실제로 굶어죽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요엘이 설교를 하던 시절은 지금부터 2천4백 년 전입니다. 하루하루 겨우 삶을 버텨내던 그들에게 요엘은 앞으로 풍족하게 먹게 될 것이라는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여호와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내려주실 테니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요엘의 설교는 그대로 성취되었을까요? 유대나라가 잘 사는 나라가 되었을까요? 우리는 유대나라, 즉 이스라엘이 어떤 고통을 겪었는지 세계역사를 통해서 이미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요엘의 설교와는 정반대되는 일을 겪었습니다. 그 나라는 바벨론 포로 이후에 계속해서 주변의 강대국에게 지배를 당했습니다. 기원후 70년에는 로마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완전히 파괴되었습니다. 그 뒤로 2천년 동안 나라도 없이 전 세계로 흩어져서 디아스포라로 살았고, 가는 곳곳마다 미움을 받았습니다. 급기야 히틀러의 나치즘에 의해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들이 참혹하게 죽었습니다. 앞으로 풍족하게 살아갈 것이라는 요엘의 예언은 유대인들의 역사에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요엘은 왜 실현되지 못할 예언을 선포하는 것일까요? 

 

여기에 또 다른 질문이 있습니다. 이것이 더 중요한 질문이거나, 아니면 앞의 질문에 대한 대답일지도 모릅니다. 요엘의 예언 내용을 잘 보십시오. 거의 모든 것이 복지 차원입니다. 23절이 말하는 이른 비와 늦은 비라는 표현은 가나안 종교의 영향을 받은 것입니다. 원래 유대인들은 농사가 아니라 목축으로 살았기에 이른 비와 늦은 비는 중요하지 않고 푸른 목장과 잔잔한 시내가 중요합니다. 어쨌든지 요엘은 지금 농사 풍년을 머리에 그리고 있습니다. 자연재해가 하나도 없는 시절을 그리워하고 있습니다. 모두가 풍족히 먹게 되는 때를 말합니다. 그야말로 풍요로운 사회복지가 완전히 달성된 북유럽 사람들이 누리는 삶의 조건입니다. 이런 삶이 바로 하나님이 주시는 구원일까요?

 

아닙니다. 복지와 풍요는 이집트와 바벨론과 가나안의 신이고, 자본주의를 숭상하는 현대인들의 신입니다. 유대인들의 신앙이 가장 깊었던 때는 반대로 삶의 조건이 가장 어려웠던 출애굽 이후 광야시절입니다. 그 시절에 유대교의 신앙은 모든 토대를 잡았습니다. 예언자들은 가나안의 기복적이고 주술적인 신앙을 극단적으로 경계했습니다. 여호와 하나님을 위한 형상을 만들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물질적인 풍요에 기울어지는 것을 거부하는 가르침이었습니다. 이런 문제에서 신약은 더 분명합니다. 예수님은 마당에 밀이 가득하고 항아리에 새 포도주와 기름이 넘친다는 말씀을 하신 적이 없습니다. 오히려 반대입니다. 가난하고 핍박을 받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씀하셨고, 풍년들이 들어 창고를 늘리겠다고 야무진 꿈을 꿨던 부자의 어리석음을 비유로 말씀하신 적도 있습니다. 

 

오해는 마십시오. 기독교가 물질을 혐오하는 종교라거나 가난을 미화하는 종교라고 보면 곤란합니다. 물질은 부정하고 영혼은 순수하다는 이원론적 주장은 초기 기독교가 이단으로 배척한 영지주의자들에게나 해당됩니다. 기독교 신앙은 물질을 결코 부정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몸도 역시 하나님의 거룩한 창조입니다. 그러나 물질을 숭배하지 않습니다. 피조물은 결코 숭배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물질을 부정하지는 않지만 숭배하지 않는다는 게 말처럼 쉬운 게 아닙니다. 사람은 부지불식간에 물질 숭배에 기울어집니다. 여러분은 속으로 적당한 선을 지키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겠지요. 경제적으로 풍요롭게 살면서 하나님을 바르게 믿기만 하면 된다고 말입니다. 그렇게 할 수 있다면 그렇게 해 보십시오. 그게 쉽지 않을 겁니다. 왜 그런지 아세요? 이에 대해서 긴 말씀은 드리지 않겠습니다. 여러분들이 경험적으로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사람이 하나님과 돈을 함께 섬길 수 없다는 주님의 말씀만 기억해도 됩니다. 모든 인류의 꿈인 복지사회가 더 확실하게 자리를 잡으면 잡을수록 하나님을 향한 마음이 줄어들 수밖에 없습니다. 그래도 부자가 한번 되어 보는 것이 평생 꿈이라고 생각할 분이 계신가요? 하나님을 실제로 믿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그런 생각을 할 수가 없습니다. 

 

놀라운 일

 

그런데 본문에서 요엘은 왜 이런 복지사회를 하나님의 구원인 것처럼 선포했을까요? 그는 사이비 예언자인가요? 그는 바알 숭배자인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요엘의 예언을 정확하게 이해하려면 다음의 두 가지 사실을 놓치지 말아야 합니다. 첫째, 복지는 정말 극빈자들에게만 구원의 징표입니다. 일용할 양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일용할 양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일용할 양식을 위해서 기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시각장애인에게는 보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합니다. 예수님도 공생애 중에 많은 장애인을 치료하셨습니다. 지금 요엘의 설교를 듣는 유대인들의 형편을 살펴보십시오. 그들에게는 끼니가 필요했습니다. 생존 조건이 너무나 열악했습니다. 본문에는 문학적인 수사로 멋있게 표현되어 있지만 여호와 하나님이 그들에게 약속으로 주신 것은 지금 절대 빈곤층이 국가로부터 최저생활비를 받는 정도에 불과합니다. 유대인들이 부자가 된다는 말이 아니라 최소한의 생존이 보장된다는 말입니다. 물질과 소유에 대한 무한대의 욕망이 아니라 생존에 대한 신뢰를 말합니다.

 

둘째, 요엘이 정작 여기서 말하고 싶은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셨다는 사실입니다. 26절을 읽겠습니다. “너희는 먹되 풍족히 먹고 너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너희 하나님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이라. 내 백성이 영원히 수치를 당하지 아니하리로다.” 21절에도 여호와께서 “큰 일”을 행하셨다는 표현이 나옵니다. 하나님이 행한 일은 놀라우며 큽니다. 모두 굶어죽어야 할 지경에도 그분은 자기 백성들을 특별한 방식으로 살리셨습니다. 유대인들은 광야에서 40년 동안 만나와 메추라기를 통해서 그 혹독한 시절을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놀라운 일입니다. 요엘은 당시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방식으로 배불리 먹는 일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이라고 말한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유대백성으로 홍해를 건너게 하셨다는 고백과 똑같습니다. 여기 두 가지 사실이 연결되어 있습니다. 배부름과 놀라운 일입니다. 어디에 방점이 찍힐까요? 당연히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이게 실제로 무슨 말인지 아시겠지요? 하나님만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뜻입니다. 놀라운 일은 오직 하나님에 의해서만 가능합니다.

 

이 대목에서 중요한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요엘은 앞에서 땅과 들짐승을 향해서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이는 곧 하나님의 백성을 향한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놀라운 일을 행하신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만이 세상일과 세상 소문으로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건 서로 맞물려 있는 사태입니다. 세상일과 소문으로 두려워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얼마나 놀라운 일을 행하시는지를 전혀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요엘 시대와 마찬가지로 오늘 상대적으로 풍요롭게 살고 있는 우리도 온갖 일로 두려워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마음을 두지 않는다는 데에 놓여 있습니다.

 

그 놀라운 일은 궁극적으로 창조와 구원입니다.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사실보다 더 크고 놀라운 일은 없습니다. 성서는 늘 그 사실을 지적합니다. 창세기만 그걸 말하는 게 아닙니다. 모든 성서가 그 사실을 근거로 말합니다. 욥기도 역시 그렇습니다. 욥의 재난이 누구의 책임이냐 하는 논란으로 분분하던 욥과 친구들은 하나님이 창조한 세상에 대한 설명 앞에서 입을 다물고 말았습니다. 사도신경의 첫 구절이 전능하신 하나님의 세상 창조라는 사실도 우연한 일이 아닙니다. 바로 그 하나님만이 세상과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사실보다 더 놀라운 일은 세상에 없습니다. 특히 기독교인들에게는 예수님의 십자가와 부활이야말로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입니다. 거기서 하나님의 창조와 구원이 완성되기 때문입니다. 다시 말씀드립니다. 이 사실을 알고 있는 사람은 세상일과 소문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염려하지 않습니다.

 

두려움과 염려로부터 자유로워진 사람은 당연히 여호와의 이름을 찬송할 것입니다. 그 이외의 것으로는 우리가 찬송할 필요는 없습니다. 그 이외의 것은 마치 어른이 되었는데 용돈은 얻은 것과 비슷합니다. 용돈을 좀 많이 받으면 어떻고 적게 받으면 어떻겠습니까? 그 이외의 것은 아이들과의 놀이에서 왕 역할을 맡은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으로 우리가 찬송할 수 있을까요? 그것은 그냥 놀이일 뿐입니다. 놀이는 그냥 즐겁게 놀면 됩니다. 그러나 찬송을 드려야 할 분은 오직 한 분입니다. 우리에게 놀라운 일을 행하신 하나님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은 추수감사절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생존을 지켜주셨다는 사실 앞에서 놀라워하고, 찬송하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일을 보십시오. 씨앗이 땅에 심겨져 싹이 트고 탄소동화작용으로 먹을거리를 생산했습니다. 참으로 놀라운 일입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건입니다. 여러분, 간곡한 마음으로 말씀드립니다. 더 이상 다른 것으로 놀라거나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자녀들의 수능시험 결과로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신종플루를 조심해야겠지만, 두려워하지는 마십시오. 우리가 예상하지 못하는 방식으로 하나님은 우리를 지키십니다. 그 하나님은 죽은 자로부터 예수를 살리신 분이십니다. 그의 이름을 찬송하십시오. 그가 우리의 하나님이십니다. 아멘! (2009.11.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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