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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출12:37-4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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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17924 |
세계에서 가장 큰 해양운하는 수에즈운하로 길이가 192킬로미터인데, 1869년에 완공되었다고 합니다. 홍해와 지중해를 잇는 인공뱃길입니다. 이로 인해서 아시아에서 유럽으로 가는 뱃길이 아프리카 남단 케이프타운을 돌아가는 것보다 최소한 1만 킬로미터 이상 단축되었습니다. 바로 운하가 놓인 곳이 구약성서에서 가장 중요한 역사적 사건인 출애굽과 긴밀히 연관됩니다. 출애굽은 기원전 1290년에 일어났다고 하니, 지금부터 대략 3천3백 년 전의 일입니다. 모세는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학대당하던 자기 민족을 이끌고 나일강 유역의 고센을 탈출해서 지금의 수에즈운하 지역을 따라서 시내반도로 내려왔습니다. 그들이 건넜다고 하는 홍해는 히브리어 원어로 ‘얌숩’인데 ‘갈대 바다’라는 뜻입니다. 아마 수에즈 운하 지역의 어느 갈대 늪지대를 건넌 것으로 추정됩니다. 오늘 본문은 홍해, 즉 갈대 늪을 건너기 바로 직전의 상황에 대한 설명입니다. 그 내용을 간략히 봅시다.
이집트의 바로는 민족을 이끌고 시내 광야로 나가서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겠다는 모세의 요구를 거절했습니다. 밀고 당기는 과정에서 열 가지 재앙이 내리자 바로는 결국 모세의 요구를 받아들였습니다. 바로의 허락을 받은 모세는 사백삼십 년 동안 이집트에서 소수민족으로 살던 사람들을 끌고 광야로 나왔습니다. 가나안을 향해서 긴 여정을 시작한 것입니다. 그런데 북쪽 지중해 해안선을 따라가는 지름길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블레셋이 버티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광야생활 시작부터 큰 전쟁을 치르기에는 여러 가지 어려움이 많았겠지요. 그래서 홍해가 있는 남쪽으로 방향을 틀었습니다. 숙곳을 지나 에담이라는 곳에 장막을 쳤습니다. 성서기자는 여호와께서 낮에는 구름기둥이, 밤에는 불기둥이 그들의 길을 인도하고 지켜주셨다고 합니다.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이 백성 앞에서 떠나지 아니하니라.”(출 13:22) 여기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도대체 무엇을 말하는 걸까요?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무엇을 보았는가
본문이 가리키고 있는 그 상황으로 돌아가 봅시다. 지금 홍해 앞에 도착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애굽의 고센 지역에서 살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애굽의 시민권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고난의 행군이었지요. 그들의 삶이 얼마나 힘들었는지를 출애굽기 1장이 생생하게 보도합니다. 애굽 사람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늘어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을 강제 노역을 시켰습니다. 피라미드나 왕궁을 건축하는 일이었겠지요. 성서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어려운 노동으로 그들의 생활을 괴롭게 하니 곧 흙 이기기와 벽돌 굽기와 농사의 여러 가지 일이라. 그 시키는 일이 모두 엄하였더라.”(출 1:14) 바로는 급기야 새로 태어나는 이스라엘 아이들 중에서 남자 아이들은 모두 죽이라는 명령을 모든 산파에게 내렸습니다. 끔찍한 명령입니다. 이런 역사적 경험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큰 두려움을 안고 살게 했을지는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사람은 개인이나 민족이나 모두 극도의 고통은 잊지 못합니다. 이것이 결국 정신적 외상, 즉 트라우마로 발전하기도 합니다. 요즘 우리나라에 불법 체류하고 있는 제삼세계 노동자들을 생각하면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고난이 깊어질 때 모세가 등장합니다.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의 힘을 결집시켜서 애굽의 바로와 싸웠습니다. 더 이상 노예로 살지 않겠다는 겁니다. 애굽으로부터 독립하겠다는 겁니다. 요즘 중국에서 독립하려고 애를 쓰는 티베트와 비슷합니다. 힘겨루기에서 모세가 이겼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모든 살림살이를 싸들고 일단 애굽을 빠져나왔습니다. 완전히 피난민 행렬과 똑같습니다. 애굽의 힘이 닿지 않는 가나안까지 지름길로 보름이나 한 달이면 도착할 수 있다는 야무진 꿈을 안고 엑서더스의 여정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지름길이 블레셋에 막혀버렸습니다. 그들과 전쟁을 벌일 여력은 없습니다. 물론 모세가 전쟁을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닙니다. 만약 전쟁에서 지는 날에는 오도 가도 못하는 신세가 됩니다. 그럴 바에서 조금 우회하더라도 전쟁을 피하는 게 좋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홍해 쪽으로 내려와서 진을 쳤습니다. 전쟁을 피할 수 있으니 다행이긴 했으나 뭔가 처음부터 조짐이 좋지 않은 것만은 분명합니다. 광야를 횡단하는데 계획했던 날짜보다 더 많은 날짜가 필요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는 아무래도 마음이 조급해지기 마련입니다.
상황이 아무리 열악하더라도 이스라엘 백성들이 목표에 대한 확신과 내적인 정체성만 명백하다면 큰 문제는 아닙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모두 별로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그들의 목표는 가나안 땅입니다. 하나님이 모세를 통해서 그들에게 준 목표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에게는 거기에 가야할 이유가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축복이고 약속인데, 그들에게 그게 왜 분명하지 못했다고 주장하나, 하고 이상하게 생각할 분들이 있겠지요. 성서 기자들은 그렇게 표현하고 있지만 실상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가나안은 별로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 못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애굽에서 살던 고센은 나일강 유역의 기름진 땅입니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고센이 좋았습니다. 그런 것만 놓고 본다면 이스라엘이 가나안 땅으로 갈 이유는 하나도 없습니다. 문제는 자유입니다. 이스라엘이 애굽에 머물러 있는 한 자유는 보장되지 않습니다. 가나안은 비록 척박한 땅이지만 자유가 보장됩니다. 당시 사람들이 어느 쪽에 더 마음을 두었을까요? 자유인가요, 물질적인 풍요인가요? 일반적으로는 후자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도 우리와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다만 모세는 달랐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뜻을 알았습니다. 비록 궁핍하다고 하더라도 가나안에서만 이스라엘 민족이 참된 자유를 누리고 살 수 있으며, 그럴 때만 하나님의 민족으로 자리를 잡을 수 있다고 확신했습니다. 모세와 그를 신뢰하던 몇몇 사람을 제외한다면 아무도 가나안 땅으로 가야한다는 목표에 확신이 없었습니다. 그들은 마지못해서, 또는 애굽의 학대가 너무 심해서 어쩔 수 없이 따라나섰을 뿐입니다.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도 분명하지 못했습니다. 구약성서학자들의 연구에 의하면 출애굽 공동체는 이스라엘의 단일 민족으로 구성된 게 아닙니다. 당시 애굽에서 학대받던 여러 소수민족의 총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뿐만이 아니라 광야에서 떠돌이로 살던 크고 작은 종족의 이합집산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히브리’라는 단어는 그 당시 근동에서 살던 하층민을 의미합니다. 이들이 광야생활에서 단일대오를 유지한다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먹을거리와 물이 부족할 때마다 그들은 모세에게 불평불만을 터뜨렸습니다. 이럴 바에야 애굽에서 살던 때가 더 좋았다고 민중들을 선동했습니다. 아주 심각할 때는 내전과 비슷한 사건도 일어났습니다. 금송아지를 만들었다는 이유로 모세는 한나절에 삼천 명이나 되는 사람을 죽였습니다.(출 32:28) 일벌백계 식으로 처리하지 않으면 안 될 정도로 이 출애굽 공동체의 정체성은 사분오열의 상태였습니다.
본문의 상황이 어떤지를 저는 앞에서 네 가지로 설명했습니다. 첫째,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정신적으로 깊은 상처를 안고 있습니다. 둘째, 출애굽 초기에 벌어진 상황이 예측에서 어긋났습니다. 셋째, 가나안 땅이라는 목표에 대한 확신이 강하지 못했습니다. 넷째, 그들의 정체성이 서로 갈렸습니다. 정신무장도 시원치 않고, 내부 결속력도 희미했습니다. 이런 사람들이 광야를 횡단해서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는 것은 ‘미션 임파씨블’입니다. 더군다나 지금 그들이 당도한 곳은 홍해 앞 에담입니다. 그들은 지금 배수진을 친 격입니다. 앞으로 나가자니 홍해가 버티고 있고, 뒤로 돌아가자니 블레셋이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보따리를 싸서 다시 애굽으로 돌아갈 수도 없습니다.
당시에 모세도 불안하고 백성들도 불안했을 겁니다. 그들이 놓인 상황만 놓고 본다면 독안에 든 쥐입니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이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필요했습니다. 그들이 애굽을 떠날 때 바로에게 임한 열 가지 재앙과 같은 그런 확실한 증거 말입니다. 바로 그 순간에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런 제일 처음 발견한 사람이 누군지는 성서는 말하지 않습니다. 모세가 그 사람일 수도 있고, 아니면 익명의 어떤 사람이 그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아니면 아주 자연스럽게 민중들 사이에 그런 소문이 퍼져나갔을지 모릅니다. 저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바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증거가 아니냐, 하고 말입니다. 거기서 다시 용기를 얻을 수 있었겠지요. 한번 해보자는 결의를 다질 수 있었겠지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화산활동입니다. 낮에는 화산의 구름과 화산재가 분명하게 보였고, 밤에는 용암이 쏟아내는 불꽃이 보였습니다. 고대인들에게 그것보다 더 장엄한 광경은 없었을 겁니다. 산꼭대기에서 짙은 회색 연기와 불길이 솟구칩니다. 그 안에 무엇이 있을까요? 고대인들에게 활화산 현상은 신의 현현으로 받아들여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구름기둥과 불기둥 이야기는 크게 보면 시내 산 전승에 속합니다. 시내 반도 아래쪽에 자리한 시내 산은 모세가 처음 부름을 받은 호렙 산입니다. 출애굽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를 건넌 뒤에 시내 산에 도착하게 되고, 거기서 십계명을 비롯한 여러 율법을 완성했습니다. 시내 산의 장면을 성서기자는 이렇게 표현합니다. “셋째 날 아침에 우레와 번개와 빽빽한 구름이 산 위에 있고, 나팔 소리가 매우 크게 들리니 진중에 있는 모든 백성이 다 떨더라.”(출 19:9) 전형적인 화산 폭발의 장면에 대한 묘사입니다.
이 대목에서 조금 이상하다고 생각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군요. 하나님이 낮에는 구름기둥으로, 밤에는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인도하신다는 본문은 결국 화산 폭발을 하나님의 특별한 행위로 오해한 거냐 하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 개입이 아니라 단순한 자연현상에 불과한 거냐 하는 질문입니다. 여기서 길을 잃으면 안 됩니다. 가장 확실한 사실부터 확인합시다.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화산폭발이라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또한 그것을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이해한 이스라엘 백성들의 생각도 분명한 사실입니다. 이 두 사실은 모순되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이 자연을 창조한 분이시며, 그 하나님이 바로 이 세상을, 이 자연을 통치하십니다. 따라서 이 세상에서, 이 자연현상에서 하나님의 창조능력과 통치행위를 인식한다는 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이런 일들은 구약성서가 자주 증언합니다. 시편은 “날은 날에게 말하고, 밤은 밤에게 지식을 전한다.”(시 19:2)는 방식으로 자연을 통해서 하나님을 찬양합니다. 만나 이야기도 그렇습니다. 만나는 지금도 시내 광야에서 발견할 수 있는 식물성 먹을거리입니다. 우리가 어렸을 때 칡을 캐 먹는 것과 비슷한 경우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다른 사람들이 눈여겨보지 않았던 만나를 발견하고 그것을 하나님이 내려주신 특별한 먹을거리라고 생각했습니다. 샘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은 광야를 횡단하면서 샘물을 만날 때마다 그것을 하나님이 특별히 내려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이 증거다
오늘 본문이 말하는 핵심이 무엇일까요?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가야 할 방향을 지시해 주었다고 합니다. 이건 아주 사실적인 표현입니다. 그들은 낮이나 밤이나 구름기둥과 불기둥을 기준으로 가나안 땅을 향한 방향을 잃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고대인들은 광야에서 해나 별을 보고 방향을 잡았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날씨가 나쁠 때는 아무런 소용이 없었습니다. 활화산은 늘 그 자리에서 날씨에 상관없이 사람들이 갈 방향을 지시해 줄 수 있습니다. 당시 시내 반도의 지리를 잘 알고 있던 모세가 이 화산을 놓고 백성들을 이끌고 나갈 수 있었다는 건 하나님의 은총임에 틀림없습니다. 그 사실을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이 구름기둥과 불기둥으로 자신들을 이끌어주셨다고 생각한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런 신앙경험을 유치하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화산폭발에 대한 지리학적 지식이 없는 어리석은 사람들이었다고 무시하지 마십시오. 그들의 관심은 하나님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이었습니다. 하나님의 계시였습니다. 하나님을 향해서 그들의 영혼을 집중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렇게 하나님에게 집중한 백성들이었기에 만나 경험을 할 수 있었고, 구름기둥과 불기둥 경험을 할 수 있었습니다. 모세는 호렙 산에서 불이 붙었으나 타지 않는 가시떨기 현상을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그들의 눈에는 세계 모든 것이 바로 하나님의 창조 능력이며, 통치 능력이었습니다. 오늘 우리는 이들의 이런 신앙 전통을 이어받은 사람들입니다.
영적인 눈을 떠 보십시오. 그러면 만나가 보일 겁니다. 눈을 감으면 아무리 옆에 만나가 지천으로 널려 있어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영적인 눈을 뜬 사람에게는 구름기둥과 불기둥이 살아 있는 하나님의 구원 섭리로 보일 겁니다. 눈을 감은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상투적인 것으로 떨어질 뿐입니다. 세상이 따분하게 느껴질 겁니다. 이미 주변에 하나님이 살아 계시고 구원하신다는 증거가 널려 있는데도 엉뚱한 것만 찾아다닐 겁니다.
오늘 우리에게 가장 결정적인 구름기둥과 불기둥은 무엇일까요? 돈인가요? 그렇다고 한다면 우리의 삶은 너무 허무합니다. 도대체 무엇이 우리를 생명의 길로 안내하는 근거입니까? 무엇이 하나님의 임재를 확인해 줍니까? 여러분은 이미 대답을 알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예수님은 2천 년 전 유대에서 살았던 한 성자에 불과합니다. 우리는 전혀 다른 눈으로 그를 봅니다. 우리는 예수님의 얼굴에 빛나는 하나님의 영광을 봅니다. 그게 여러분에게 보이시나요? 예수 그리스도의 운명이 바로 인류 구원의 유일한 길이라는 사실이 보이시나요?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의 인생 여정을 인도하는 가장 확실한 구름기둥과 불기둥이십니다. 그가 우리와 늘 함께 하십니다. (2009.11.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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