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성경본문 : | 눅4:16-30 |
---|---|
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30930 |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에 주로 회당에서 말씀을 전하셨습니다. 오늘 본문 16절은 이 사실을 예수께서 안식일을 맞아 자라나신 나사렛의 한 회당에 들어가서 성경을 읽었다고 언급합니다. 그 앞 구절인 15절도 예수님이 여러 회당에서 가르치셨다는 사실을 짚었습니다. 이런 구절에서 알 수 있듯이 예수님은 당시 일반적인 랍비와 마찬가지로 회당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한 곳에 붙박이로 활동하는 랍비가 아니라 유랑 랍비입니다. 회당은 유대인들이 정기적으로 모여서 말씀을 읽고 배우는 곳으로, 종교교육의 센터라 할 수 있습니다. 회당에는 회당장이 있었습니다. 요즘 식으로 담임 목사입니다. 공생애 초창기에는 예수님이 회당장들과의 관계가 좋아서 회당 출입이 자유로웠는데,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형편이 달라졌습니다. 회당장의 눈치를 보면서 회당에 들어갈 수는 없었습니다. 그 뒤로 예수님은 시장이나 해변, 광야 같은 곳에서 사람들에게 말씀을 전했습니다. 예수님이 왜 회당에서 배척을 당하게 되셨을까요? 그 단초가 오늘 본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오늘’의 구원 신탁
예수님이 성경을 읽으려고 앞자리에 섰습니다. 예수님은 회당 일을 도와주는 사람에게서 양피지 두루마리 성경을 받아들었습니다. 이사야는 전체가 66장이나 됩니다. 부피가 커서 여러 두루마리로 되어 있습니다. 그중의 한 권을 받아서 예수님이 읽었습니다. 그 부분이 이사야 61:1 절 이하입니다. 공교롭게도 메시아의 역할에 대한 메시지가 담겨 있는 대목입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시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 4:18,19) 억압당하는 사람들에게 임하는 해방과 자유가 그 핵심입니다. 그것이 바로 메시아의 역할이고, 그것이 바로 은혜라는 겁니다.
어떤 학자나 설교자들은 이 본문을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의 관점에서 접근합니다. 이 메시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이라는 겁니다. 실제 내용이 그렇습니다. 가난한 자, 포로 된 자, 눈 먼 자, 눌린 자들입니다. 이들의 해방을 위해서 오늘 현실에서 투쟁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바로 이런 사람들을 위해서 이 땅에 오셨기 때문입니다. 이런 주장은 오늘 한국처럼 빈부의 격차가 구조적으로 악화되는 상황에서는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습니다. 경제적으로, 사회적으로, 가정적으로 안정되고 힘이 있는 사람들은 그냥 내버려둬도 잘 살아갑니다. 그러나 그런 경쟁력이 턱없이 떨어지는 사람들은 옆에서 도와주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런 문제는 단순히 휴머니즘의 차원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서가 말하는 하나님의 창조 사건과 직결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습니다. 인간이 정의롭고 평화롭게 사는 건 하나님에게서 부여받은 권한입니다. 하나님을 창조자로 믿는 기독교인들이 악한 사회구조로 인해서 인간 존엄성을 상실하는 사태를 방기하는 것은 무책임한 일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회당에서 읽은 이사야의 신탁을 사회 구조의 개혁이라는 차원에서만 접근한다면 원래 누가복음 기자가 말하려는 근본과는 거리가 있습니다. 구약이 신약의 관점에서 새롭게 해석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는 겁니다. 그 이유는 예수님이 왜 회당에서 배척되었나 하는 앞에서의 질문과 직결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사야의 말씀을 읽고 전한 뒤에서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으니라.”(눅 4:21) 마틴 루터는 이 말씀을 이렇게 번역했습니다. 직역으로 말씀드립니다. “오늘 이 성경의 말씀이 여러분의 귀 앞에서 성취되었습니다.” 이사야의 글을 회중들이 단순히 들었다는 뜻이 아닙니다. 훨씬 깊은 의미입니다. ‘오늘’은 이사야의 글을 읽는 예수님을 가리킵니다. 누가복음은 이 사실을 몇 군데에서 설명했습니다. 1) 눅 2:11에서 누가복음 기자는 예수님의 탄생에 관한 목자 전승을 전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2) 눅 19:9은 삭개오 이야기를 전하면서 주님의 말씀을 이렇게 전합니다.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3) 23:43은 십자가 처형이 집행되는 장면에서 나온 이야기입니다. 예수님과 함께 십자가에 처형당한 한 사람이 예수님에게 자기를 기억해달라고 하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이런 누가복음 신학의 배경에서 볼 때 오늘 본문에서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는 말씀은 결국 이사야의 구원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뜻이라는 게 분명합니다.
그 장면을 다시 상상해보십시오. 회당에 사람들이 모여서 찬송을 부르고, 기도드리고,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이사야의 글을 읽는 것까지는 모든 게 자연스러웠습니다. 문제는 예수님의 마지막 멘트입니다. 이사야의 신탁이 자신에게서 성취되었다니요? 도대체 이런 해괴한 일이 어디 있단 말인가, 하고 거기 모인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했겠지요. 그 사람들의 반응에 대해서 누가복음은 이렇게 전합니다. 우선 그들은 예수님을 증언했습니다. 증언한다는 뜻의 헬라어 ‘마르투레오’는 긍정적인 의미와 부정적인 의미로 동시에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그들이 예수님을 찬양했다는 뜻도 되지만 거꾸로 정죄했다는 뜻도 됩니다. 그리고 그들은 예수님의 말을 놀랍게 여겼습니다. 놀랍게 여겼다는 헬라어 ‘타우마조’에도 서로 상반되는 의미가 동시에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들이 예수님의 설교에 관해서 좋은 뜻으로 놀라워했을 수도 있지만, 동시에 부정적으로 놀라워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런 단어는 그것 자체로만은 전자인지 후자인지 확실하게 해석하기 어렵습니다. 전체적인 맥락에서 해석되어야 합니다. 본문을 천천히 좀더 따라가 봅시다.
이사야의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말을 듣고 기분이 상한 사람들이 이렇게 빈정대듯이 말합니다.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눅 4:22) 이어서 예수님이 말씀하셨습니다. 핵심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선민이 아니라 오히려 이방인이 하나님의 뜻을 먼저 바르게 받아들인다는 사실입니다. 두 가지 사실은 서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선지자를 고향 사람들이 알아보지 못한다면 당연히 고향 밖의 사람들이 알아봅니다. 선지자를 이스라엘 사람들이 인정하지 못하고 대신 이방인들이 인정합니다. 실제로 선지자들은 이스라엘에서 제대로 대접을 받아본 적이 없습니다. 이런 일이 왜 일어날까요?
선지자에 대한 고향 사람들의 전이해가 진리를 아는 데 오히려 방해거리입니다. 그들은 선지자가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이었다는 사실만 기억합니다. 더 나쁜 경우는 그 선지자들의 나쁜 점만 골라서 기억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회당 사람들이 예수님을 향해서 “이 사람이 요셉의 아들이 아니냐?” 하고 빈정댄 것도 바로 이런 이유입니다. 요셉은 평범한 목수입니다. 그 동네에서 이렇다 할 정도로 내놓을 만한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촌장도 아니고 랍비도 아니고 부자도 아닙니다. 그냥 그렇고 그런 노동자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이런 요셉의 아들로만 기억했습니다. 그런 예수님이 메시아라는 사실을 그들은 받아들이기 힘들었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몰이해는 나사렛 사람들만의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바리새인들로 대표되는 당시 기존의 종교 엘리트 모두에게 해당되는 문제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가 모두 못마땅했습니다. 그의 가르침과 행위는 그들의 전통과 어긋나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사렛에서 선한 것이 나올 수 없다는 선입견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나사렛 사람들은 예수님을 너무 잘 알고 있기 때문에 거부했다면, 바리새인들은 자기들과 너무 다르기 때문에 거부했습니다. 그들은 모두 예수님을 나사렛 출신 요셉의 아들로만 바라보았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받지 못한다는 말은 앞에서 말씀드렸듯이 다른 곳에서 환영받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사실을 설명하기 위해서 예수님은 구약에 나오는 두 가지 사건을 인용했습니다. 하나는 엘리야 시대에 있었던 사렙다 과부 이야기이고,(왕상 17:8 이하) 다른 하나는 엘리사 시대에 있었던 수리아 사람 나아만 이야기입니다.(왕하 5:1 이하) 사렙다 과부나 나아만은 모두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무시당하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사렙다 과부는 비록 이방인 과부였지만 하나님의 명령을 수행하러 온 엘리야를 알아보고 극진하게 대접했습니다. 그 가정에 놀라운 은혜가 임했습니다. 나아만은 이방인 장군으로 한센병(문둥병)에 걸렸습니다. 엘리사의 말을 하나님의 말로 알아듣고 순종한 그는 병을 고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말을 들은 회당 사람들은 크게 화가 났다고 합니다. 화를 낸 정도가 아닙니다. 예수님을 동네 밖으로 쫓아냈습니다. 추방시킨 겁니다. 고향에 더 이상 머물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종의 멍석말이와 비슷합니다. 상대 못할 종자라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낭떠러지에 끌고 가서 떨어뜨리려고 했습니다. 그들의 행위는 생사람을 잡는 잔인한 테러입니다. 자칫하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처형당하기 전에 고향 절벽에서 떨어져 죽었을지 모릅니다. 그 낭떠러지는 예수님이 어렸을 때 친구들과 함께 놀던 곳이었겠지요. 성난 고향 사람들의 힘에 밀려 강제로 낭떠러지로 끌려갔습니다. 다행히 예수님은 큰일을 당하지 않고 그 자리를 피할 수 있었습니다. 누가 도왔을까요? 어릴 때 함께 놀던 죽마고우들이 어른들을 설득했을지 모르겠군요. 예수가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니니 그를 죽이지는 말자고 말입니다. 혹시 바알세불에 사로잡힌 탓인지 모르니 조금 기다려보자고 말입니다. 아니면 예수님의 영적 권위에 사람들이 모두 흥분을 가라앉히고 순순히 물러섰을지도 모릅니다.
우리의 질문은 이것입니다. 고향 사람들이 왜 이렇게 크게 화가 났을까요? 그들의 성격이 원래 이렇게 과격한 탓일까요? 성격 문제로 돌리기에는 상황이 너무 험악합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인정하기보다는 오히려 비판하는 말씀을 하셨기 때문일까요? 그럴 수도 있습니다. 선지자가 고향에서 환영을 받지 못한다는 말씀이나 이방인들이 하나님의 선택을 받았다는 말씀은 나사렛 사람들로서는 불쾌하기 짝이 없었을 겁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을 낭떠러지도 데리고 가서 죽일 생각했다는 건 아무래도 지나칩니다. 여기에는 더 근본적인 문제가 숨어 있습니다. 그게 도대체 무엇일까요?
신성모독
나사렛 사람들이 마치 인민재판식으로 예수님을 죽이려 했었다는 사실을 다시 주목하십시오. 아무리 큰 잘못을 해도 사람을 죽이는 일은 흔하지 않습니다. 이스라엘의 전통에서도 아주 드문 일입니다. 행 6:8-7:60에 초기 예루살렘 교회에 속한 열두 집사 중의 한 사람인 스데반이 돌에 맞아 죽는 사건이 나옵니다. 사람들은 스데반이 “모세와 하나님을 모독”했다고 고발했습니다.(행 6:11) 스데반은 예언자들을 죽인 이들이 바로 당신들의 조상이고, 당신들이 그런 못된 전통에 따라서 지금 의인을 잡아 죽였다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사람들이 그를 돌로 쳤습니다.(행 7:59) 오늘 본문 말씀과 상황이 비슷합니다. 예수님이 십자가 선고를 받을 때도 신성모독이 죄목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사람을 때려죽일 정도로 과격해지는 경우는 신성모독이라고 느껴질 때입니다. 오늘 나사렛에서 벌어진 소동의 핵심도 역시 신성모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절대적인 존재입니다. 절대적인 존재를 상대화하는 행위가 바로 신성모독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행위의 어떤 것이 하나님을 상대화한 것이었을까요? 예수님이 회당에서 이사야의 글을 읽은 뒤에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 것을 기억하실 겁니다. “이 글이 오늘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21) 이사야의 구원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성취되었다는 진술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상대화한 말씀입니다. 하나님만이 행할 수 있는 사건이 자기에게서 성취되었다고 말하는 예수님이 신성모독자로 비친 것입니다.
나사렛 사람들의 그런 생각과 판단이 이해가 갑니다. 그들의 눈에 예수님은 아무런 근거도 없는 말을 하는 사람입니다. 그가 읽은 이사야의 구원 신탁을 예수님이 실제로는 행하지 못했습니다. 그가 왔어도 가난한 사람은 여전히 가난하고, 포로 된 사람은 여전히 포로로 남아 있고, 눈 먼 자는 여전히 세상을 못 보고, 눌린 자는 여전이 억압을 받고 있습니다. 세상은 아무 것도 변한 것이 없습니다. 그런데 예수가 바로 이사야가 선포한 구원 신탁의 완성자라니, 이게 말이 되나요? 이런 질문은 초기 기독교가 감당해야 할 어려운 숙제였습니다. 예수님을 메시아로 믿는 그들은 세상을 향해서 그에 마땅한 대답을 해야만 했습니다. 로마 제국은 여전히 억압적입니다. 정의와 평화가 오리무중입니다. 그 어디에서도 이사야가 선포한 구원 신탁의 조짐이 없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예수가 메시아라니요? 초기 기독교가 처한 상황이 바로 본문이 묘사하고 있는 낭떠러지와 비슷합니다. 로마의 지성인들이 기독교인들을 무신론자들이라고 말한 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무능력하게 십자가에 처형당한 나사렛 예수를 메시아로 믿는다는 게 말이 안 되는 거였습니다.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오늘 우리도 똑같은 상황에서 삽니다. 우리가 믿는 예수님은 분명히 별 볼 일 없는 나사렛의 목수 요셉의 아들입니다. 그를 우리는 그리스도,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 심판자, 생명의 완성자로 믿습니다. 이게 어떻게 가능한가요? 우리의 영적 관점을 완전히 바꾸지 않으면 이건 말이 안 되는 주장입니다. 신성모독일 수 있습니다. 그 새로운 영적 관점은 가장 궁극적인 생명 사건인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에서 시작됩니다. 이러한 새로운 영적 관점으로 돌아서는 게 바로 ‘메타노이아’, 즉 회심입니다. 이렇게 회심한 사람들은 이사야의 구원 신탁이 예수님에게서 궁극적으로 성취되었다는 사실을 인식하고 믿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게 자신의 운명을 맡깁니다. 그리고 그 구원의 현실을 여전히 어둡고 침침한 지금 여기서 고난 받는 이웃들과 서로 나누면서 살아갑니다. (성탄절 후 첫째 주일, 2009.12.27.)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
최신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