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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사64:1-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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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40357 |
오늘 설교 본문인 이사야 64장이 포함된 이사야 56-66장을 쓴 사람은 일반적으로 제3 이사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1-39장의 제1 이사야, 그리고 40-55장의 제2 이사야와 활동시기가 다릅니다. 학자들의 설명에 따르면 제 3이사야는 기원전 530년 전후 대략 2,3년 정도 예언자로 활동했습니다. 기원전 530년의 시대적 특징은 기원전 587-537년에 있었던 바벨론 포로 이후입니다. 바벨론에 의해서 예루살렘이 초토화되고 많은 유대인들이 바벨론에 포로로 잡혀간 사건은 이스라엘의 정치, 사회 문제만이 아니라 종교에도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백성인 자신들이 몰락하게 된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질문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들은 그런 역사적 사실을 이해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이스라엘의 조상인 아브라함이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에 자리를 잡고 살았고, 그 후손들이 이집트에 이민을 떠났다가 하나님의 명령으로 다시 가나안으로 왔습니다. 가나안은 하나님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의 땅’이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가나안에서 세계 모든 민족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하게 살 거라고 믿었습니다. 그런 민족이 완전히 망했습니다. 예루살렘 성전은 물론이고 예루살렘 도시 전체가 파멸되었습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렇게 자기 백성이 나락으로 떨어지는 걸 내버려두는 하나님이 누군가 하는 회의가 들지 않을 수 없었을 겁니다.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인지, 아니면 자신들이 하나님의 백성이 아닐지 모른다는 회의입니다. 이런 회의가 오늘 본문을 기록한 제 3이사야 시대에도 여전했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무능력한 존재인가, 하는 회의를 근본적으로 거부합니다. 하나님은 “하늘을 가르고” 강림하시는 분이십니다.(사 64:1) 하늘은 고대인들에게 초월적이고 절대적인 능력의 세계입니다. 하나님이 하늘을 가른다는 것은 하나님이 그런 절대적인 세계의 주인이라는 뜻입니다. 이사야는 그런 하나님의 절대적인 능력에 대해서 보충해서 설명합니다. 하나님 앞에서는 산들이 진동합니다. 이방 나라들이 벌벌 떱니다. 하나님은 이런 능력으로 하나님의 백성들을 지키신다고 합니다. 이런 하나님을 본 사람도 없고, 들은 사람도 없습니다. 그 하나님은 금시초문의 존재십니다. 이사야는 지금 출애굽 사건을 언급하는 중입니다.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방식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에서 구해내셨습니다. 당시 세계 최고의 군사력을 자랑하던 바로의 기마병들을 홍해 바다에서 전멸시켰습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이 무능력하다는 의심과 의혹을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암담한 신세가 된 것일까요? 이사야의 대답은 명확합니다. 이스라엘의 범죄가 대답입니다. 5b절 말씀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범죄하므로 주께서 진노하셨사오며 이 현상이 이미 오래 되었사오니 우리가 어찌 구원을 얻을 수 있으리이까?”(사 64:5) 예언자들은 자기 민족에게서 벌어지는 불행과 재앙을 죄의 결과로 보았습니다. 그것 말고는 이런 상황을 해명할 길은 없었습니다. 이런 예언자들의 생각은 선악과 사건에까지 맞닿아 있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했다는 사실과 인간이 죽는다는 사실의 충돌을 창세기 기자는 선악과를 통해서 해명했습니다. 인간의 죄, 즉 불순종이 결국 인간의 죽음을 불러왔다고 말입니다. 이런 관점이 구약성서 전체를 관통하고 있습니다.
신약성서는 이 문제를 다르게 접근합니다. 태어날 때부터 시각장애인이었던 사람을 본 제자들은 예수님에게 누구의 죄로 이 사람의 운명이 이렇게 결정되었는가, 하고 물었습니다. 이 사람의 죄냐, 아니면 부모의 죄냐 하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대답은 분명합니다. 이 사람의 죄도 아니고 부모의 죄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나타내려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장애를 고치는 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이었습니다.(요 9:1 이하) 이 말씀을 마치고 예수님은 그의 시력을 회복시키셨습니다. 모든 질병과 재앙을 죄의 결과로 본 구약의 관점을 넘어선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이스라엘의 재앙이 범죄 때문이라는 예언자들의 시각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두 가지 관점에서 그렇습니다. 첫째, 그 시대는 그런 충고를 들어야할만한 시대였습니다. 이사야가 그 시대를 어떻게 묘사하는지 들어보십시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 우리는 다 잎사귀 같이 시들므로 우리의 죄악이 바람 같이 우리를 몰아가나이다.”(사 64:6) 그 시대가 총체적으로 부패했다는 뜻입니다. 둘째, 이들의 범죄는 단순히 부도덕성만을 가리키는 게 아니라 하나님에 대한 무관심을 가리킵니다. 7a절 말씀을 보십시오.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가 없으며, 스스로 분발하여 주를 붙잡는 자가 없사오니” 이 말은 이스라엘 모든 사람들이 먹고 사는 데에만 관심을 둔다는 뜻입니다. 생명의 근원에 대해서는, 정의와 평화에 대해서는 아무런 관심이 없습니다. 그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고 이름을 내는 것에만 몰두합니다.
이사야는 이런 상황을 이렇게 묘사합니다. “주께서 우리에게 얼굴을 숨기시며 우리의 죄악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소멸되게 하셨음이라.”(사 64:7) 하나님이 얼굴을 숨겼다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을 버리셨다는 뜻입니다. 그 상황이 얼마나 참담했으면 하나님이 숨으셨다고, 하나님이 계시지 않다고 토로했겠습니까? 이사야는 본문 끝자락에서 다시 이렇게 호소합니다. “주께서 아직도 가만히 계시려 하시나이까 주께서 아직도 잠잠하시고 우리에게 심한 괴로움을 받게 하시려나이까?”(사 64:12) 지금 이사야는 하나님의 은폐,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합니다. 그 어디에도 하나님을 찾는 이들이 없습니다. 하나님도 아무런 말씀을 하지 않습니다. 막막한 상황입니다.
이런 묘사는 물론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하나님의 얼굴이 따로 있을 까닭이 없습니다. 그가 자신을 숨긴다는 것도 말이 안 됩니다. 하나님은 기본적으로 무소부재하신 분입니다. 없는 곳이 없는 분입니다. 이것은 아무도 하나님을 찾지 않는 상황에 대한 문학적 묘사입니다. 하나님의 침묵이라는 묘사도 역시 그렇습니다.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고, 지금도 늘 자기를 계시하시는 하나님이 어떻게 침묵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이 말씀하고 행동하신다는 증거를 찾기 힘들다는 사실을 그렇게 표현한 것입니다.
이사야의 이런 영적 경험을 이해하는 건 그렇게 어렵지 않습니다. 예루살렘의 파괴, 포로생활, 귀환 뒤에 일어난 성전재건의 어려움, 이스라엘이 일어설 거라는 예언자들의 예언이 성취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 등을 살펴보면 이해가 갑니다. 오늘 우리의 상황은 어떨까요? 우리도 이사야와 똑같은 상황에 놓여 있을까요?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의 은폐와 하나님의 침묵을 경험할까요? 사람들은 이사야 시대와 우리 시대는 다르다고 생각합니다. 그들의 경우는 실제로 절망적이었지만 우리의 경우는 오히려 희망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들은 생존 자체가 위태로웠지만 우리는 최소한 생존은 넘어섰고 오히려 풍요를 구가한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한다는 증거가 많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생각이 완전히 틀린 건 아닙니다. 이사야 시대보다는 지금 우리의 시대가 표면적으로 나아보입니다. 실제로 조건이 좋습니다. 먹을 것도 상대적으로 풍부하고, 핸드폰과 인터넷을 일상으로 사용합니다. 미군이 남한 땅에 60년 이상 주둔하고 있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식민지가 아니라 어엿한 주권국가입니다.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가톨릭과 개신교를 합해서 전인구의 30% 쯤 됩니다. 예배도 많고 기도회도 많고 성경공부 모임도 많습니다. 해외 선교사 숫자가 미국 다음으로 우리나라가 많습니다. 세계에게서 열 손 가락 안에 드는 큰 교회가 우리나라에만 다섯 개 이상입니다. 하나님이 살아 계시다는 증거가,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증거가 산더미같이 보입니다.
우리가 세상 사람들과 똑같은 기준으로 살아가는 사람이라고 한다면 이런 정도로 만족하고 즐겁게 살면 됩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독교인들입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시각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시각이 무엇인지 한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다는 예수님의 비유입니다.(눅 15:3-7) 양 백 마리를 키우던 사람이 한 마리를 잃었습니다. 목자는 아흔아홉 마리를 들에 놓아두고 한 마리를 찾아 나섭니다. 한 마리를 찾기 위해서 아흔아홉 마리를 위험에 방치한다는 것은 무모한 행위처럼 보입니다. 여기서 아흔아홉과 하나를 단순하게 비교하면 곤란합니다. 잃은 한 마리를 향한 목자의 심정을 말하는 겁니다. 기독교인의 영성은 바로 여기에 놓여 있습니다. 잃은 한 마리의 양, 소외된 한 사람, 사회적 소수자에 대한 깊은 연민과 연대가 그것입니다. 오늘 잃은 한 마리의 양이 누구인가요?
한 마리에 관심을 두기는 쉽지 않습니다. 나머지 아흔아홉 마리를 잘 키우는 게 훨씬 경제적입니다. 사회적 소수자, 그늘진 구석에 자리한 이들에게 가까이 가는 건 여러모로 불편합니다. 서울역에는 노숙자들이 많습니다. 요즘은 날씨가 추워서 그들이 대합실에 자리를 잡을 때가 많습니다. 그들은 대낮에도 소주병을 들고 다닙니다. 몸에서 악취가 납니다. 이런 이들 곁에 가까이 가는 건 어색한 일입니다. 그들이 담배 한 가치를 달라거나 술값을 달라고 가까이 오면 짜증이 날 수도 있습니다. 제가 극단적인 예를 들었는지 모르지만 잃은 한 마리 양을 찾는다는 건 사실 어렵고 귀찮은 일입니다. 그러나 어쩝니까? 우리가 메시아로 믿는 예수님이 주신 말씀입니다. 용기가 없어서, 또는 게을러서 그렇게 살지 못한다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그런 쪽의 시각만이라도 알고 있어야하지 않을까요? 그래야 기회가 올 때 주님의 제자로 행동할 수 있지 않을까요?
노숙자 문제가 불쾌했다면 고상한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십시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바로 잃은 양 사건과 비슷합니다. 잃은 양은 자기가 길을 잃은 거라고 한다면,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에게서 버림받은 겁니다. 양쪽 다 세상에서 따돌림을 당한 사건이라는 점에서는 똑같습니다. 당시에 유대인은 물론이고, 헬라인을 비롯한 모든 사람들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저주로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바울은 그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습니다.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고전 1:23) 초기 기독교는 온 세상이 수치라고 생각한, 그래서도 가까이 가기도 싫고 생각하기도 기분 나쁜 예수의 십자가를, 그 십자가에 달려 죽은 예수를 메시아로 믿었습니다. 그들이 그렇게 믿을 수 있었던 이유는 물론 하나님이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기 때문입니다. 십자가 사건의 처절함, 무력감, 좌절을 우리가 뼈저리게 느끼지 않으면 부활 생명도 가능하지 않습니다. 그렇습니다. 그 십자가는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심이며, 하나님의 침묵입니다. 예수님은 그 자리에서 하나님, 왜 나를 버리십니까, 하고 외쳤습니다. 이사야의 절망과 한탄이 이 절규에 오버랩 됩니다.
저도 지난 2009년 일 년 동안 하나님의 침묵을 자주 경험했습니다. 대표적으로 두 가지만 말씀드리겠습니다. 하나는 용산참사입니다. 매주일 기차를 타고 서울을 다녀오면서 용산역을 지날 때마다 가슴이 답답해서 견디기 힘들었습니다. 다행히 작년 연말에 국무총리의 유감표시와 적절한 보상을 통해서 문제가 해결되었습니다. 아직도 남은 문제는 많습니다. 다른 하나는 교사들의 해임 사건입니다. 서울교육청은 일제고사를 그대로 따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초등, 중등 선생님들을 해임했습니다. 자초지종을 자세히 말씀드리지 않겠습니다. 법적으로 잘못이 있다면 누구든지 그에 대한 문책을 받아야 합니다. 그러나 잘못보다 더 큰 문책을 내리는 건 잘못입니다. 부도덕한 일을 행한 교사들도 몇 개월 감봉으로 끝나는 마당에 교사 나름의 교육 철학으로 학부모들에게 일제고사를 치르지 않을 자유가 있다는 문건을 보냈다는 이유로 해임시킨다는 건 횡포입니다. 이런 횡포는 선거법 위반으로 실형을 선고받아 교육감 자리를 내놓은 아무개 서울 전 교육감이 저지른 것입니다. 다행히 얼만 전 법원은 교사들의 해임이 무효라고 선고했습니다. 요즘 검사의 기소가 법정에서 번번이 무죄로 결정이 납니다. 미네르바 사건도 그렇고, 정연주 KBS 전 사장 사건도 그렇고, 강기갑 국회의원 사건도 그렇습니다. 이번에 법원에서 해임 무효 선고를 받은 선생님들은 서울 교육청에서 상고를 하지 않으면 다음 학기부터 학교로 돌아갈 수 있겠지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이와 비슷한 일은 많습니다. 정의롭지 못한 권력의 남용으로 인해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왜 이런 일들이 반복될까요?
이사야는 정말 하나님이 얼굴을 숨기고, 하나님이 침묵한다고 생각한 걸까요? 저는 앞에서 그것을 답답한 상황에 대한 문학적인 수사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실제로는 문학적 수사에 머물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향한 강력한 요구입니다. 하나님을 찾으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라는 요구입니다. 이스라엘의 참담한 상황을 이사야는 범죄의 결과라고 지적했습니다. 가장 큰 범죄는 곧 하나님을 찾지 않는 것입니다. 잃은 한 마리의 양을 자기 잘못이니 어쩔 수 없다고 내버려두는 것입니다. 우리끼리 잘 먹고 잘 살면 된다는 안일한 생각에 빠져 있는 것을 가리킵니다. 자기연민이며, 자기집중입니다. 그것의 극단이 바로 자폐입니다. 생명은 생명의 근원인 하나님과의 소통을 통해서만 가능한 일인데, 그것이 단절되었다면 죽을 수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은 오늘 저의 설교를 듣고 마음이 편치 않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들이 모두 예언자와 똑같이 살아야 한다고 독촉하는 게 아닙니다. 그건 설교를 듣는다고 해서 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옳다고 생각해도 그렇게 살아가기에는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습니다. 그러나 최소한 성서가 말하는 생명의 길이 무엇인지, 하나님을 믿고 산다는 게 무엇인지는 성찰해야 합니다. 그것에 대한 부단한 성찰이 없다면 우리의 신앙은 결국 상투성에 빠집니다. 교회는 단순히 신앙적인 친교모임이 되고 맙니다. 성도 여러분, 비록 현실이 고달프고 거칠더라도, 하나님이 행하신 놀라운 일에 일단 마음을 집중하십시오. 예수가 지신 십자가와 부활에 영적인 관심을 기울이십시오. 현실은 하나님의 침묵이지만, 그 침묵 가운데서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게 될 것입니다.(주현절 후 둘째 주일, 1월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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