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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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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6·03·11
단기선교를 다녀온 청년들에게서 감상문을 받아보았습니다. 같은 기간에 같은 곳에 가서 함께 선교에 참여하고 왔는데 감상문이 다 달랐습니다. 이것이 잘못된 것일까요?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모두 똑같은 감상문을 제출했다면 짜고 베껴서 낸 것이 틀림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각각 다른 감상문을 읽어보니 단기선교 기간에 있었던 일들과 감동을 보다 분명하고 풍성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신약성경에 4권의 복음서가 있습니다. 모두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와 사역과 교훈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4권의 복음서가 다 다릅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서의 내용이 서로 다른 것은 성경에 오류가 있다는 분명한 증거라고 주장합니다. 그러나 오히려 4권의 복음서가 다 같다면 신빙성이 없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마태와 마가와 누가와 요한은 각각 자기들의 독특한 관점과 신학적 입장을 가지고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래서 내용이 조금씩 다릅니다. 이렇게 차이가 있는 복음서들을 통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보다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알 수 있습니다.
사복음서의 특징
사람들은 요한계시록 4:7에 나오는 네 생물, 즉 사자, 송아지, 사람, 독수리를 가지고 사복음서의 특징을 설명해왔습니다. “그 첫째 생물은 사자 같고 그 둘째 생물은 송아지 같고 그 셋째 생물은 얼굴이 사람 같고 그 넷째 생물은 날아가는 독수리 같은데” 요한계시록 4장은 보좌에 앉으신 하나님과 그 영광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여기 나오는 네 생물은 장로나 천사들처럼 하나님께 경배하는, 그리고 하나님의 통치와 관련된 최고 지위에 있는 천상의 존재들입니다.
이 네 생물이 어떻게 사복음서의 특징을 나타낼까요? 사자는 백수의 왕인데, 마태복음과 관련됩니다. 마태복음은 예수님을 왕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두에 왕의 족보가 나오며, 동방박사들의 경배가 나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유대인의 왕이시며 만왕의 왕이시고 나의 왕이십니다. 송아지는 희생적인 동물인데, 마가복음과 관련됩니다. 소는 평생 인간을 위해 봉사하고, 죽은 후에도 가죽과 뼈와 살을 인간에게 바칩니다. 마가복음은 예수님을 고난 받는 종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위해 고난당하시고 십자가에서 자신을 희생제물로 드리셨습니다. “인자의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막10:45) 사람은 누가복음과 관련되는데, 누가는 예수님을 이상적인 사람의 모습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독수리는 요한복음과 관련되는데, 독수리는 높은 곳을 나는 동물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의 특징
요한복음은 다른 복음서와 그 관점이 다릅니다. 왕과 종과 사람의 공통점은 무엇일까요? 다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마태, 마가, 누가복음은 예수님에 대해서 비슷한 관점을 가지고 기록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이 세복음서를 공관복음서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묘사하고 있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관점이 다릅니다.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행적보다는 말씀을 위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탄생이나 세례 받으신 일, 겟세마네 기도와 승천 등에 대한 기록은 빠져 있습니다. 그 대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은 길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요한복음에는 사건에 대한 저자의 해설이 많이 나옵니다. 예를 들면, 예수님께서 성전을 헐라고 하시면서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고 말씀하신 것에 대해서 이렇게 해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요2:21) 오병이어의 이적을 기록한 후에는 예수님의 살과 피에 대한 설명을 합니다. 이렇게 요한복음은 공관복음서와는 다른 독특한 점이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매우 신학적이며 깊이가 있습니다.
이 책의 기록목적
요한은 서두에서 그리스도가 누구신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이 문제가 무엇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이 문제가 왜 그렇게 중요합니까? 그리스도를 알기 전에는 나 자신에 대해서도 제대로 알 수 없고 구원 받을 수도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알면 알수록 우리는 자신을 알게 되며, 우리의 인생은 새로워지고 가치와 능력과 빛을 발하게 됩니다.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이 사실을 분명하게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사람의 운명을 바꾸어 놓습니다.
베드로를 보십시오. 그가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엄청난 물고기를 잡는 이적을 경험한 후에 한 말이 무엇이었습니까? “시몬 베드로가 이를 보고 예수의 무릎 아래 엎드려 가로되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 하니”(눅5:8) 그 후 주님께서는 베드로를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셨습니다. “예수께서 시몬에게 일러 가라사대 무서워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눅5:10하)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만나 자신이 죄인임을 절실히 알게 되었고, 주님께서 그를 불러 소명을 주신 후 진정으로 값진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갈릴리의 일개 어부가 위대한 사도가 되었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그의 운명은 완전히 바뀌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만나면 이렇게 됩니다.
요한은 바로 그 그리스도를 우리에게 가르쳐주기 위해서 그의 복음서를 기록한 것입니다. 요한은 이 복음서를 기록한 목적을 분명히 밝혔습니다. “예수께서 제자들 앞에서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도 많이 행하셨으나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요20:30-31) 요한은 그리스도가 어떤 분이신가를 증거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영생을 얻게 하려고 이 복음서를 기록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누구신가?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단도직입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고 있습니다. 1-2절은 그리스도의 본질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3절은 그리스도와 만물의 관계를 다루고 있으며, 4-5절에는 그리스도의 본질과 우리의 관계, 그리고 그리스도에 대한 인간들의 반응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태초부터 계신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1절) 그리스도는 말씀이시며 하나님이십니다. 요한이 왜 맨 먼저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소개하고 있을까요?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이 말씀, 즉 복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이 땅에 오셔서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사람이 연구해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아들이신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들려주신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듣는 이 말씀은 사람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것입니다. 이 말씀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이신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면서 성부 하나님과는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성부와 성자와 성령은 다 같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나 각각 구별되는 분이십니다. 이것을 한 마디로 나타내는 것이 바로 삼위일체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람이 고안해낸 교리가 아닙니다. 삼위일체는 너무나도 심오하고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면서도 가장 중요하고 은혜로운 교리입니다. 이 교리에서 하나님은 자신을 매우 풍부하게 계시하고 계십니다. 삼위 하나님 사이에는 완전한 일치와 연합과 사랑이 있습니다. 놀라운 것은 우리를 구원하시는 데 있어서 삼위 하나님께서 온전히 함께 하셨다는 것입니다. 천지를 창조하실 때도 삼위 하나님께서 함께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삼위로 계시면서 완전하시고 부족한 것이 전혀 없으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삼위일체 하나님께서는 그 풍성하신 영광에로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와 함께 하시기를 기뻐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사랑은 아무 조건도 없으며, 무한하신 사랑임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그리스도를 말씀이라고 소개하면서, 그 분은 성부 하나님과 함께 계신 하나님이심을 증거했습니다. 그 분은 하나님이시지만 성부가 아니십니다. 성부와 구별되신 성자 하나님이십니다. 성자 하나님은 성부 하나님과 구별되시면서, 동시에 신성과 영광과 존귀와 능력이 동등하십니다. 그 본질에 있어서 조금도 차이가 없으신 하나님이십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이시다.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만일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아니시라면 우리는 구원을 받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신 그분께서 우리를 죄와 멸망 가운데서 구원하사 우리로 그 분의 영광에 참여하게 하시는 것이 바로 구원입니다. 구원받은 우리는 장차 천국에 들어가서 하나님과 함께 그 영광과 무궁한 축복에 참여하면서 영원히 살게 될 것입니다. 이 구원은 사람이 줄 수 없고 오직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주실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반드시 하나님이셔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믿지 않는 것은 모두 이단입니다. 회교는 그리스도를 선지자 중의 하나로 보며, 여호와의 증인은 그리스도를 여호와의 군대장관, 즉 천사 중에서 가장 높은 존재라고 봅니다. 이렇게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인정하지 않는 것은 모두 이단이며, 거기에는 결코 구원이 있을 수 없습니다. 아무리 그들이 하나님을 부르고 믿는다 해도, 아무리 그들이 열심을 다해 봉사한다 해도, 거기에는 구원이 없습니다. 거기에는 성령의 감화하심과 역사하심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누구든지 성령으로 하지 않고는 그리스도를 주로 고백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하)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아들과 그 분이 우리에게 하신 말씀을 듣고 있으며, 그 말씀을 믿는 것입니다. 생명은 바로 여기 있습니다. 그 분의 말씀을 믿는 것이 생명입니다. 그 분의 말씀을 믿는 자는 영생을 얻습니다. 그 분의 말씀 안에 모든 축복이 있습니다.
만물과 그리스도와의 관계
요한은 만물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졌다고 말합니다.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3절) 성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성자 그리스도께서 함께 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분은 만물의 모든 것을 속속들이 알고 계시며, 특히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그 분이 성부 하나님과 함께 우리를 만드셨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우리가 존재할 수 없고, 존재의 의미도 가질 수 없습니다. 모든 것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지어졌으며, 그 분을 중심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께서 계셔야만 세상이 제대로 살아날 수 있으며, 그리스도께서 계셔야만 우리 인생도 의미를 지니게 됩니다. 그 분이 없다면 인생은 헛되고 무의미합니다. 그 분이 없다면 만물도 헛되며, 우리의 일과 학문과 수고가 허무하고 거짓된 것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에게 영생을 주시고, 우리의 삶에 풍성한 축복을 주시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요10:10하) 그 분은 우리를 잘 알고 계십니다. 우리를 지으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연약함과 상처와 죄와 질병을 낱낱이 다 아십니다. 아실뿐만 아니라 얼마든지 치료하시고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 분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그 분은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고 오늘도 내 마음을 두드리십니다. “볼지어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20) 말씀이 나에게 들려질 때 그리스도께서 나에게 오신 것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그 분의 손길로 치료받고 새롭게 되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
요한은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4절)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이 생명은 단순히 우리가 살아 있는 이 생명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생명은 우리의 삶을 의미있고 풍성하게 만들며, 하나님 나라에서 영원히 영광스럽게 살게 하는 생명입니다. 이 생명을 얻는 것이 곧 구원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생명에 대해서 어떤 반응을 보였습니까?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5절) 깨닫지 못했다는 것은 이기지 못했다는 뜻입니다.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 괴테의 말을 인용하는 것이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광선이 강한 곳에는 더 강한 그림자가 있기 마련이다.” 빛이 강하고 밝을수록 그 빛을 막는 물체에 대한 그림자는 더욱 진하게 드리워지는 법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빛으로 이 세상에 오셨을 때 사람들의 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났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죄를 버리고 회개해야겠지요. 그러나 사람들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했습니다. 죄에서 떠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습니다. 죄를 버리고 빛 가운데로 걸어 나오면 자신들이 누리던 기득권과 쾌락을 모두 잃어버릴 것 같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빛이신 그리스도를 거부했을 뿐만 아니라 마침내 십자가에 못 박아 죽이고 말았습니다. 죄를 버리고 구원 얻을 기회를 거절하고, 오히려 가장 악한 죄를 범했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오셨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세상의 빛으로 오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생명이 있습니다.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오신 것임을 기억하십시오. 말씀이 우리에게 임할 때 생명의 빛이 우리에게 비추인 것입니다. 말씀을 들을 때 우리의 죄가 드러나는 이유가 바로 그 때문입니다. 그런데 빛이신 그리스도께서 말씀을 통하여 당신에게 비취실 때 당신은 어떻게 하고 있습니까? 거부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여전히 죄를 버리지 않고 어둠 속에서 살아가기로 고집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오늘 말씀을 듣는 당신에게 죄에서 떠나기로 새롭게 다짐하는 결단이 있기를 바랍니다. 아직까지 결단하지 못하고 망설이고 있는 성도가 있습니까? 지금 결단하십시오. 아직도 버리지 못한 죄가 있습니까? 바로 지금 그것을 빛이신 주님 앞에 내어놓도록 하십시오. 그 순간 당신의 죄와 허물은 힘을 잃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날마다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말씀을 통해 그 분을 만나도록 하십시오. 그러기 위해서 예배에 충실히 참석하십시오. 예배에서 선포되는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께서 당신을 만나주십니다. 날마다 말씀묵상을 쉬지 마십시오. 그리스도께서 그 말씀을 통해 나를 찾아오신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말씀 안에서 어둠이 조금도 없는 삶을 살아가도록 하십시오. 말씀 안에서 그리스도와 동행하는 삶을 살아가십시오. 말씀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넘치고 풍성한 삶을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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