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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죄악을 담당하신 주님 .....

이사야 이정원 목사............... 조회 수 2338 추천 수 0 2010.08.06 00:47:25
.........
성경본문 : 사53:1-9 
설교자 : 이정원 목사 
참고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2006·04·08

유명한 음악가 George Friedrich Handel은 ‘메시아’라는 불멸의 오라토리오를 남겼습니다. 이 작품은 연주시간이 2시간 20분이나 되는데, 그는 이 작품을 3주 만에 완성했다고 합니다. 헨델의 ‘메시아’는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으로부터 고난과 죽음, 부활, 재림, 그리고 요한계시록에 나오는 영광스런 모습을 주제로 삼고 있습니다. 총 53개의 곡으로 되어 있는 이 작품 중 44번 할렐루야는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유명합니다. 오늘은 헨델의 ‘메시아’ 중 26번곡을 들으면서 설교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이 곡은 이사야 53장 6절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는 합창곡입니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빠르고 분주한 느낌을 주는 전반부는 양들이 각기 제 길로 나가는 모습, 즉 우리 죄인들이 하나님을 거역하며 제 멋대로 사는 모습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느리고 숙연한 느낌을 주는 후반부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그 모든 죄를 예수 그리스도께 담당시키셨다는 것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이 점을 기억하시면서 먼저 이 곡을 들어보시기 바랍니다.

십자가
  

역사상 인류에게 전해진 가장 복되고 귀한 소식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오셔서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십자가에서 죽으셨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누구든지 십자가에서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만 믿으면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구원이 그렇게 간단하게 이루어지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하나님의 아들께서 사람이 되어 이 세상에 오셨고, 수많은 고난을 당하셨으며,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못박혀 죽으신 십자가에 대해서 잠깐 생각해봅시다.
  오늘 십자가는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것이 되었습니다. 교회마다 십자가를 높이 세우고 있으며, 십자가는 사람들이 가장 즐겨 사용하는 악세사리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는 본래 사형집행기구였습니다. 그것은 소름이 끼치도록 끔찍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십자가는 단순한 사형집행기구가 아니었습니다. 거기에는 특별한 수치가 담겨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은 노예를 처형할 때 그것을 사용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반란을 일으킨 노예들을 십자가에 매달았는데, 십자가에 공개적으로 매달려 처형을 당한다는 것은 가장 큰 경멸과 수치를 당하는 것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님 당시 유대인들에게 있어서 십자가는 특별한 저주를 의미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저주를 받은바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속량하셨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린 자마다 저주 아래 있는 자라 하였음이라”(갈3;13) 그러므로 유대인들에게나 예수님의 사형을 집행한 로마 당국에게나 십자가에서 죽음과 고통을 당하며 공공연하게 매달려 있는 죄수의 모습은 인간으로서 가장 비참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보다 더 심한 것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성경은 예수님의 십자가에는 이 모든 것들을 훨씬 넘어서는 저주와 죽음의 공포가 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께서 피로 물든 십자가에 달려 계시는 동안 세상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한 몸에 받으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니라”(고후5:21)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통 가운데 “엘리 엘리 라마 사박다니”라고 부르짖으셨을 때 하나님께서 철저하게 외면하시고 대답하지 않으신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습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가 아니라 온 인류의 죄를 홀로 담당한 죄인으로서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당하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아들께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진노를 홀로 담당하심으로 이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진노를 당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십자가 - 사랑의 절정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했으므로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롬3:23) “죄의 삯은 사망이요”(롬6:23) 거룩하신 하나님께서는 죄를 용납하실 수 없으십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죄의 삯은 사망이라고 규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류는 예외 없이 자기의 죄를 인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받아 멸망을 당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사랑의 하나님은 죄인을 불쌍히 여기십니다. 사람이 비록 죄를 범했을지라도 하나님의 사랑은 자비를 베푸시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무조건 죄를 용서하는 것은 하나님의 공의가 용납할 수 없습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딜렘마가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을 선하게 창조하셨으나 인간은 하나님을 거역하여 타락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사랑하시는 사람이 범죄하고 멸망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문제를 십자가로 해결하셨습니다. 당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을 보내사 인류의 모든 죄를 대신하여 심판을 받아 죽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를 용서하셨던 것입니다. 십자가에서 하나님의 사랑과 공의가 최고조로 나타났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죄인으로 정죄하여 십자가에 달리게 했습니다. 그리고 온 인류의 죄 값을 한 몸에 담당하신 그리스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무서운 진노를 쏟아 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공의는 당신의 아들까지도 철저하게 심판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죄 짐을 벗겨 주셨습니다. 하나님의 말할 수 없는 큰 사랑이 여기에서 나타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독생자를 버려 우리를 살리셨습니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공의와 사랑의 최고봉입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이요 생명입니다. 십자가가 기독교의 핵심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안다는 것은 곧 기독교를 안다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모르는 것은 기독교를 모르는 것과 같습니다.

인류의 불신앙
  

이사야 선지자는 깊은 탄식을 하면서 질문을 던집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1절) 사람들은 십자가의 그 놀라운 사랑과 구원을 믿지 않았습니다. 이사야는 십자가의 진리가 너무나도 명백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십자가의 진리를 믿지 않을 것을 예언했습니다. 사람이 믿게 되는 것은 자신의 의지로는 불가능합니다.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만 믿을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여호와의 팔, 즉 하나님의 능력으로라야 믿게 되는 것입니다. 불신자들에게는 메시아의 고난과 죽음이 어리석기 짝이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믿는 자들에게는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됩니다.
  이사야 53장 1절에 대한 분명한 답은 신약의 고전1:18에 와서 분명하게 나타났습니다. “십자가의 도가 멸망하는 자들에게는 미련한 것이요 구원을 얻는 우리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이라”(고전1:18) 십자가의 도는 믿는 자만이 깨달을 수 있고, 감사할 수 있고, 감격하여 울며 찬양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불신앙이 깨어지고 말씀을 깨닫게 될 때, 우리는 감격하며 전하는 자가 될 수 있습니다.

메시아의 모습
  

이스라엘 백성들의 결정적인 실수는 메시아에 대해서 오해했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오랫동안 메시아를 대망해 왔으나 정작 메시아가 오셨을 때는 배척하고 십자가에 못박아 죽였습니다. 그것은 메시아에 대해서 잘못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가 절대적인 권력가의 모습으로 영광스럽게 오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2절에서 이사야는 오실 메시아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분은 연한 순 같고,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 같으며, 고운 모양과 풍채가 없으며,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고, 멸시를 받으며, 고난을 겪고, 질고를 알며, 귀히 여김을 받지 못할 것이라고 예언되었습니다(2절).
  ‘연한 순’은 세상에서 가장 약한 것입니다.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는 얼마나 볼품이 없습니까? 이것이 그리스도께서 탄생하실 당시 다윗 왕가의 모습이었습니다. 다윗 왕의 후손이었던 요셉은 가난한 목수였습니다. 그가 가이사 아구스도의 명령에 의하여 나사렛에서 베들레헴으로 호적하러 가라는 명령을 받았을 때 다윗의 집은 마치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와 같았고, 아무런 흠모할 만한 모양이 없었으며, 사람들이 그를 보고 기뻐할 만한 어떤 모습도 없었습니다.

사람들의 오해
  

유대인들은 메시아의 모습을 정치적, 또는 군사적인 영웅으로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구약에 정통한 사람들이었는데, 구약에 이렇게 예언된 메시아에 대해서 잘못 생각했다는 것은 참으로 이상한 일이었습니다. 이 역시 하나님께서 믿음을 주셔야만 메시아를 알아보고 믿을 수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영웅을 높이고 숭배합니다. 그러나 이 땅에 오신 메시아에게는 아무런 화려한 것이 없었습니다. 그리스도는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이셨으나 고난 받는 종으로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리스도의 고난은 탄생하실 때부터 시작되었습니다. 그 분은 하늘의 영광을 버리시고 이 땅에 사람이 되어 오셨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이 되셨다는 것 자체가 얼마나 큰 희생이며 고난이었겠습니까? 그리스도의 성육신 자체가 큰 고난이요 희생이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는 사람으로 오실 때 말구유에서 탄생하셨습니다. 그리고 갈릴리 목수의 아들로 초라하게 자라셨습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초라하고 볼품없는 모습의 예수님을 조롱하고 비방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를 시작하셨을 때 유대인들은 “나사렛에서 무슨 선한 것이 나올 수 있겠느냐?”고 말했습니다.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했습니다(요1:5).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요1:10-11) 아무도 예수님께서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메시아라는 사실을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주님께서 하나님의 권세 있는 교훈을 말씀하셔도 인정하지 않았으며, 병자들을 고치시고 귀신을 쫓아내시며 죽은 자를 살려내셔도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주님 오시기 약 600년 전에 마치 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처럼 탄식했던 것입니다. “우리의 전한 것을 누가 믿었느뇨? 여호와의 팔이 뉘게 나타났느뇨?”

우리의 연약함을 체휼하시는 메시아
  

그런데 하나님이신 주님께서 왜 이렇게 연약한 모습으로 오셨을까요? 그것은 연약한 우리를 체휼해 주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만일 메시아가 위대한 왕으로 오셨다면 많은 사람들이 쉽게 그 분을 알아볼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오셨다면 우리 연약한 자들은 메시아를 생각할 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먼 거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주님께서는 우리와의 간격을 없애시기 위해서 낮고 비천한 자리로 오셨습니다. 그렇게 오신 메시아는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몸소 체험하셨습니다. 그 분은 우리의 슬픔과 눈물을 아십니다. 우리의 고통과 아픔을 아십니다. 우리의 가난함과 배고픔을 아십니다. 우리의 피곤함과 질병을 아십니다. 우리의 유혹받는 것과 실패하는 것을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분의 도우심을 기대하고 은혜의 보좌 앞으로 담대해 나아갈 수 있습니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 연약함을 체휼하지 아니하는 자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가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우리를 대신해서 고난당하신 주님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이 땅에 오신 예수님께서는 이처럼 연약한 육신을 입고 오셔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을 다 체휼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께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아픔과 슬픔을 다 아시고 얼마든지 우리를 도와주실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죄를 대신하여 우리가 당해야 할 모든 고통과 슬픔을 다 당해주셨습니다.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은 우리를 대신해서 당하신 것이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이 사실을 다음과 같이 예언했습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서 하나님에게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을 인함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을 인함이라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4-6절)
  성자 예수님은 거룩하시고 순전하신 분이시며, 죄와는 아무 상관도 없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당하신 모든 고난과 슬픔과 징벌은 오직 우리를 위한 것이었습니다. 놀라운 것은 주님께서 이렇게 고난과 수치와 슬픔을 당하심으로 우리에게 실제적인 혜택이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죄 때문에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습니다. 우리는 마땅히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당하여 영원한 멸망에 던져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우리가 당해야 할 죄의 대가들, 즉 모든 고통과 슬픔과 수치와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홀로 다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 결과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와 저주를 당할 자에서 하나님의 큰 사랑을 받는 자가 되었습니다. 그가 징계를 대신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게 된 것입니다. 이 평화는 하나님과 화목된 것을 가리킵니다. 6절은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고난당하신 이유를 설명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류는 한결같이 범죄하고 각기 제 길로 나갔습니다. 한 사람도 예외 없이 철저히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으로서는 구원이 절대로 불가능합니다. 이렇게 범죄하고 타락하여 하나님의 진노와 멸망을 당하게 된 인류를 구원하는 일은 너무나도 크고 어려운 문제였으며, 인간으로서는 절대로 불가능한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칼빈은 이렇게 말했다. “창조는 말씀 한 마디로 이루어졌으나, 우리의 구속을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내어주는 아픔이 있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당신의 아들에게 담당시키셨던 것입니다. 죄로 만신창이가 되어 아무 소망이 없던 우리의 저주와 형벌을 그리스도께서 다 담당하셨습니다.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담당하신 주님
  

신약의 복음서에서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친히 담당하신 주님의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주간입니다. 이 한 주간에 우리는 주님께서 제자들과 함께 최후의 만찬을 드신 후 유대인들에게 잡히시고 대제사장들과 빌라도에게 심문을 당하신 모습, 그리고 채찍에 맞으시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로 가시는 모습,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는 모습을 묵상하게 됩니다. 주님께서는 우리가 당해 마땅한 모든 고난을 대신해서 다 당하셨던 것입니다.
  그런데 주님께서 우리의 죄와 연약함을 담당하신 것은 이것만이 아니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예수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보면서 이사야의 이 예언을 떠올렸습니다. “저물매 사람들이 귀신 들린 자를 많이 데리고 예수께 오거늘 예수께서 말씀으로 귀신들을 쫓아내시고 병든 자를 다 고치시니 이는 선지자 이사야로 하신 말씀에 우리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 함을 이루려 하심이더라”(마8:16-17) 주님께서 우리의 연약한 것과 병까지 다 짊어지셨다는 것입니다.
  복음서 기자들이 주님께서 병자들을 고쳐주시는 모습을 묘사할 때 함께 사용했던 독특한 단어가 있습니다. 그것은 ‘불쌍히 여기사’, 또는 '민망히 여기사'라는 단어입니다.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인을 고쳐 주시니라”(마14:14)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막6:34) “주께서 과부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울지 말라 하시고”(눅7:13)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저희 눈을 만지시니 곧 보게 되어 저희가 예수를 좇으니라”(마20:34) “예수께서 민망히 여기사 손을 내밀어 저에게 대시며 가라사대 내가 원하노니 께끗함을 받으라 하신대”(막1:41) “예수께서 그의 우는 것과 또 함께 온 유대인들의 우는 것을 보시고 심령에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사”(요11:33)
  이 단어는 본래 속에서 내장이 뒤틀릴 때 오는 고통을 표현하는 의학적 용어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주님께서는 병든 자들, 연약한 자들, 슬픔에 잠긴 자들을 보실 때 그러한 고통을 느끼셨습니다. 그들의 고통과 슬픔과 아픔을 함께 느끼셨던 것입니다. 그래서 마태는 주님께서 병든 자들 고쳐주시는 모습을 기록할 때 “우리의 연약함과 병을 짊어지셨다”는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했습니다. 이처럼 주님께서는 우리가 죄로 인하여 당하게 된 저주와 고통뿐만 아니라 연약함과 질병까지도 다 담당해주셨습니다.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우리를 하나님과 화목되게 하셨으며, 우리가 영원한 천국에 들어가게 해주셨습니다. 우리의 연약함과 질병과 고통과 슬픔을 주님께 가지고 나가서 도우시는 은혜를 힘입을 수 있게 해주셨습니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면서 우리는 이 사실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처럼 주님께서 우리를 위해 말로 다할 수 없는 엄청난 고통을 당하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무서운 죄와 영원한 멸망에서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제 하늘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깊은 고통 가운데서 드리는 기도를 듣고 계십니다. 그분은 우리가 겪고 있는 것들을 모두 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 어떤 연약함과 고통도 그분께 맡겨 해결 받을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분의 고통을 생각하고, 그 고통이 우리를 위한 것이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우리는 뜨거운 마음으로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가 당하는 고통에 비해 그분이 당하신 고통이 얼마나 큰 것인가를 기억할 때 우리의 고통은 작게 느껴질 것입니다. 당신이 당하고 있는 고통을 그분이 당신을 위해 당하신 고통과 비교해보십시오. 큰 위로를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말할 수 없는 감사와 감격을 맛보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하신 고통과 죽음을 통해 죄사함을 받고 구원을 받았습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우리는 주님께서 당하신 고난을 통해 평화와 나음을 입었습니다. 나를 위한 그분의 고난을 생각할 때, 지금 우리가 당하는 고통 중에 큰 위로를 받게 됩니다. 그리고 그분의 은혜의 보좌 앞에 나가서 우리의 모든 연약함과 고통과 문제들을 해결을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날마다 이 은혜를 잊지 맙시다. 식어지지 않는 가슴으로 뜨겁게 감사합니다. 그리고 주님께서 주신 구원의 은혜와 치료와 위로와 회복의 은혜를 늘 새롭게 힘입어 주님을 위해 충성하며 살아가는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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