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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24:13-3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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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2006·04·15
부활절 아침의 슬픔
주님께서 부활하신 날 아침에 주님의 제자들은 여전히 슬픔과 절망에 잠겨 있었습니다. 어떤 두 제자(그 중의 한 사람은 글로바였다)는 이제 모든 것을 단념하고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부활하신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동행하셨습니다. 우리가 슬픔과 절망에 빠져 허우적거릴 때 주님께서 고요히 우리에게 다가오시는 것은 얼마나 귀한 은혜입니까?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셔서 동행하고 계시는데도 두 제자는 주님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16절은 ‘저희의 눈이 가리워져서’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는가 하고 물으셨을 때 두 사람은 슬픈 빛을 띠고 머물러 섰습니다. 그들은 깊은 슬픔에 잠겨 있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의아해 하면서 물었습니다. “요 며칠 사이에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을 모른단 말입니까?” 그리고 주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신 일을 자세히 설명했습니다. 그들의 말에는 슬픔과 실망이 가득 배어 있었습니다. 그들은 사랑하는 주님을 잃고 슬퍼하고 있었습니다.
예루살렘에서 있었던 일
그들이 말한 예루살렘에서 일어난 일은 다음과 같았습니다. 나사렛 예수는 모든 백성 앞에서 말과 일에 능한 선지자였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과 관원들이 사형판결에 넘겨주어 십자가에 못박아 죽게 했습니다. 우리는 그가 어떻게 하든지 이스라엘을 원수들로부터 구원할 자라고 기대했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기대는 이제 사라져 버렸습니다. 그 분이 십자가에서 그렇게 죽으신 지 오늘이 사흘째요, 그가 살아나셔서 영광 중에 자신을 내보이시기로 한 날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직 그런 징조를 보지 못했습니다. 어떤 여자들이 새벽에 무덤에 갔다가 시체는 보지 못하고 그가 사셨다고 말하는 천사의 나타남을 보았다고 하는데 누가 여자들의 그런 허황된 말을 믿겠습니까? 우리 중 어떤 사람도 무덤에 가서 그 여자들이 말한 것을 확인했으나 예수는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가 살아나지 않으셨다고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미련하고 더디 믿는 자들
주님께서는 이들의 말을 들으시고 탄식하시며 책망하셨습니다. “미련하고 선지자들의 말한 모든 것을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렇습니다! 그들이 그토록 슬픔과 절망에 빠져 있었던 것은 불신앙 때문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께서 고난당하시고 죽으신 후 다시 살아나실 것이라고 말씀하신 것을 믿지 못했습니다. 새벽에 무덤에 갔던 여자들이 전하는 말은 주님께서 부활하셨음을 알게 하기에 충분했으나 그들은 도무지 귀담아 들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심지어는 베드로와 요한이 확인하고 왔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부활을 믿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슬픔 가운데서 허덕이고 있었던 것입니다. 참으로 한심하고 답답한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오늘 우리의 모습은 아닙니까? 믿음이 없는 곳에는 언제나 불안과 실망과 두려움이 있게 마련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오늘 우리와 함께 계시며, 그 권능의 팔로 우리를 붙드시는 것을 믿지 못한다면 우리는 답답함과 두려움을 이길 수 없습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을 누리지 못한다면 슬픔과 탄식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이 모든 것들은 불신앙의 결과들입니다.
말씀을 설명해 주신 주님
예수님 당시의 유대인들은 구약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결정적인 오류를 범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메시아의 영광과 승리만을 보았지, 그것이 고난으로 시작된다는 것을 보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러한 잘못된 메시아관이 제자들에게도 치명적인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주님께서 고난을 당하시고 죽으셨을 때, 이제는 끝났다고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 미리 말씀해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선입관을 깨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주님의 부활을 알리는 소식들까지도 무시한 채 여전히 슬픔과 절망 가운데서 헤매고 있었던 것입니다.
주님께서는 바로 이러한 그들의 불신앙과 무지를 탄식하시며 꾸짖으시고 구약의 말씀을 가지고 설명하기 시작하셨습니다. 주님께서는 모든 성경에 쓰인바 자신에 관한 것을 설명하시면서 성경전체가 어떻게 여러 가지 방법으로 자신을 가리키고 있는가를 보여주셨습니다. 아마도 창3:15에서 시작해서 사53장과 같은 말씀들을 두루 설명하셨을 것입니다.
떡을 떼실 때
그렇게 이야기하는 동안에 어느덧 그들은 목적지에 도착했습니다. 이제 그들은 주님과 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헤어지기가 아쉬워서 함께 들어가 유하실 것을 강권하였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주님께서는 여느 때처럼 떡을 가지사 축사하시고 떼어 저희에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 때 이들은 눈이 밝아져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습니다(31절). 그리고 그들이 주님을 알아보았을 때, 주님께서는 그들에게서 떠나가셨습니다. 아, 주님께서 부활하사 우리에게 찾아오셨던 것이구나! 그들이 얼마나 놀라고 기뻐했겠습니까?
그리고 그들은 조금 전에 있었던 일을 회상해 보았습니다. 그리고 서로 말했습니다. “우리에게 길에서 말씀하시고 우리에게 성경을 풀어 주실 때에 우리 속에서 마음이 뜨겁지 아니하더냐”(32절) “그래 내 마음은 그랬어!” “그래 내 마음도 그랬어!” “내 평생 그렇게 깊은 감명을 받기는 처음일세.”
예루살렘으로 돌아가다.
그들은 감격에 벅찬 가슴을 안고 예루살렘으로 돌아갔습니다. 벌써 밤이 되었으나 그들은 지체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이 예루살렘에 돌아갔을 때 11사도와 다른 사람들이 다 함께 모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주께서 과연 살아 나셨고, 시몬에게 보이셨다고 말했습니다. 바울도 고전 15:5,6에서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열두 제자에게와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으니 … ” 베드로가 다른 제자들보다 먼저 부활하신 주님을 만나 뵈었던 것입니다. 이 말을 듣고 엠마오에서 돌아온 두 제자도 즉시 자기들이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것과, 말씀을 설명해 주시던 일, 그리고 떡을 떼어 주실 때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던 일을 말했습니다. 이제야 제자들은 주님께서 부활하신 것을 확실히 믿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는 큰 기쁨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36절에는 그들이 주님의 부활을 믿고 기뻐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그들에게 오신 것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복된 일입니까?
이제 주님을 따르던 자들에게는 모든 것이 바뀌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이제 새롭게 출발하게 되었습니다. 소망과 생명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절망의 십자가가 이제 영광의 십자가가 되었습니다. 나중에 베드로는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하나님이 그 많으신 긍휼대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심으로 말미암아 우리를 거듭나게 하사 산 소망이 있게 하시며”(벧전1:3)
오늘 우리의 눈을 밝히소서
주님께서 부활하셨고 오늘도 우리와 함께 계시건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주님을 보지 못하고 탄식하며 한숨을 내쉬고 있습니까? 우리는 얼마나 자주 실망하며 두려워합니까? 우리의 마음은 얼마나 차갑게 굳어져 있습니까? 오늘 떡을 뗄 때 주님께서 우리의 마음을 뜨겁게 해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하신 주님께서 친히 임재하사 우리 눈을 밝히시며, 우리 맘을 붙들어 주시고, 말로 다할 수 없는 은혜 베푸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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