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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브람의 거룩한 두려움

창세기 정용섭 목사............... 조회 수 2601 추천 수 0 2010.08.16 2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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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창15:1-21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357214 

emoticon

 

구약성서에 등장하는 인물 중에서 아브람(또는 아브라함)보다 더 유명한 사람을 찾기는 쉽지 않습니다. 아브람은 혈통적으로나 신앙적으로 이스라엘 민족의 뿌리입니다. 우리로 말하면 단군의 자리와 비슷합니다. 아브람에 관한 많은 이야기 중에서 이스라엘 민족의 신앙과 연관해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아브람과 맺은 언약입니다. 약속이나 계약이라고 말하기도 합니다. 이 언약의 내용은 핵심적으로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후손이고, 다른 하나는 땅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이 두 가지를 보장하겠다는 언약을 주셨습니다. 이 언약에 근거해서 아브람과 그 후손들은 대대로 가나안에서 살았고, 수천 년이 지난 지금도 그들의 후손인 이스라엘은 팔레스틴에서 살아갑니다. 오늘 우리에게 주신 구약본문은 바로 그 언약이 이루어지는 장면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자식이 없는 아브람

 

창세기 15장은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아브람에게 임했다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 말씀은 ‘두려워하지 말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곧 아브람이 두려워하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고 있었는지는 본문이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자식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것입니다. 고대인들에게 자식이 없다는 것은 자기 존재의 상실을 뜻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늘과는 다릅니다. 현대인들에게는 자식이 절대적인 게 아닙니다만 고대인들에게는 자식이, 그것도 많은 자식이 자기를 확인하는 절대적인 근거였습니다.

 

아브람이 처한 상황은 고대의 다른 사람들에 비해서도 더 유별났습니다. 그는 가나안의 본토박이가 아니었습니다. 그의 고향은 바벨론 문명의 발생지인 갈대아 우르였습니다. 그는 아버지 데라, 조카 롯, 그리고 아내 사래와 함께 고국을 떠나서 하란에 정착해서 살다가 75세 되는 해에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아버지 데라를 내버려둔 채 하란을 떠나 가나안으로 내려왔습니다. 당시에 자기가 살던 지역을 떠난다는 것은 오늘 이민을 떠나는 것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습니다. 아브람은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안정된 삶의 자리를 박차고 나온 것입니다. 가나안에서의 삶은 언제 무슨 일을 만날지 모를 정도로 불안했습니다. 목초지 문제로 아브람의 일꾼들과 조카 롯의 일꾼들이 다투게 되어 결국 본의 아니게 조카와 헤어졌습니다. 롯이 전쟁에 휩싸여 포로로 잡혀가자 아브람은 자기 군사를 끌고 가서 구해냈습니다. 나그네로 가나안에서 산다는 것은 매일 생존의 위기를 겪는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런 그에게 자식이 없었습니다. 나이는 먹어 더 이상 자식을 기대할 처지도 아니었습니다. 그는 자식을 포기하고 자기 종인 엘리에셀을 상속자로 삼을 생각이었습니다.

 

여호와는 아브람에게 밤하늘의 별을 보여주시면서 그에게 자손을 별처럼 많게 주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그런 장면은 보기에 따라서 낭만적이긴 하지만, 실제로는 두려움에 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어마어마하게 먼 곳에서 태양과 같은 별들이 빛을 내고 있습니다. 어느 정도 천문학적인 정보를 알고 있는 현대인에게도 밤하늘의 별이 주는 인상은 강렬한 법입니다. 이런 정보를 전혀 알지 못했던 고대인들에게야 오죽했겠습니까? 아브람이 별을 보던 그 자리는 가나안 광야입니다. 사막이나 광야의 별빛은 도시의 별빛이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힘을 발휘합니다.

 

저희 가족은 2000년 8월 하순 경에 독일 남쪽 마을 퓌센에서 이틀 밤을 농가의 들판에서 야영한 적이 있습니다. 오스트리아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 퓌센은 노이슈반슈타인 성(城)으로 유명합니다. 그때 본 밤하늘을 잊지 못합니다. 당장이라도 은하수가 쏟아져 내릴 듯한 광경이었습니다. 늘 도시에서 자란 집사람은 그 광경을 보고 무섭다고 했습니다. 당시 어렸던 두 딸들이 이렇게 말한 것으로 기억됩니다. “아버지, 며칠 전에 베를린에서 본 아이맥스 영화의 한 장면 같아요.” 아브람의 경험은 우리의 그 경험보다 몇 배나 더 강렬했을 겁니다.

 

후손을 하늘의 별처럼 많이 주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아브람이 그대로 받아들였을까요? 정상적인 사람이라고 한다면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성서는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으니”라고 말했습니다.(창 15:6) 아브람이 후손이 많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믿은 게 아니라 여호와를 믿었습니다. 여호와를 믿는다는 말과 후손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여기에 긴장이 있습니다. 아브람은 여호와 하나님을 믿었습니다. 그 믿음으로 고국을 떠났고 중간 기착지인 하란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후손이 하늘의 별처럼 많아지리라는 사실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성서기자는 이런 긴장을 표현하기 위해서 여호와의 언약이 선포되는 바로 그 중요한 순간에 아브람이 여호와를 믿었다고 말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이것을 아브람의 ‘의’로 여겼다고 합니다.

 

흑암과 두려움

 

하나님의 언약을 전하고 있는 창세기 5장은 원래 다르게 전승되던 두 가지 이야기가 편집된 것입니다. 하나의 이야기는 1-6절입니다. 그 내용을 바로 위에서 설명했습니다. 다른 하나는 7-21절입니다. 앞의 이야기가 후손에 대한 것이라고 한다면 뒤의 이야기는 땅에 대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 자신을 가리켜 땅을 아브람에게 주려고 그를 갈대아 우르에서 불러낸 여호와라고 알렸습니다. 가나안 땅을 아브람에게 주겠다는 것입니다. 아브람은 여호와께 묻습니다. 땅에 대한 당신의 언약을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하고 말입니다.(창 15:8) 그 사실을 무조건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이야기입니다.

 

아브람이 땅에 대한 언약을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했다는 것은 당연합니다. 아브람의 상황을 생각해 보십시오. 아브람은 나그네였습니다. 가나안에는 이미 강한 민족들이 터를 잡고 있었습니다. 아브람에게는 가나안에서 생존하는 것 자체가 힘든 일입니다. 예를 들어 한국에 들어온 가난한 외국인 노동자 중의 한 사람이 한국에서 큰 사업가가 될 거라는 언약을 꿈속에서 하나님에게서 들었다고 합시다. 그가 그 이야기를 곧이곧대로 받아들이기는 어렵습니다. 아브람의 경우는 이것보다 더하면 더했지 못할 게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여호와를 향해서 말로만이 아니라 증거를 달라고 요구한 것입니다.

 

여호와께서는 아브람에게 제물을 준비하게 했습니다. 삼년 된 암소와 암염소 숫양, 그리고 산비둘기와 집비둘기 새끼를 준비해서 제단에 올려놓았습니다. 성서기자는 해 질 때에 아브람이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고 합니다. 꿈속에서 여호와의 말씀을 들었다는 말이겠지요. 고대인들에게 꿈은 신의 계시를 경험하는 중요한 매개였습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환상 중에 임했다는 첫 번째 이야기와 비슷한 상황입니다. 그런데 성서기자는 여기에 큰 흑암과 두려움이라는 단어를 덧붙였습니다.(창 15:12) 창 15장이 말하는 환상, 꿈, 흑암, 두려움은 어떤 동일한 현상에 대한 조금씩 다른 표현입니다. 즉 종교적 경험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게 무엇일까요?  

 

아브람에게 후손과 땅이 얼마나 중요한 요소였는지를, 또한 그것이 확보되지 않은 아브람이 왜 두려워할 수밖에 없었는지를 이미 앞에서 설명했습니다. 이제 우리는 이 두려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질문해야 합니다. 아브람이 자식이 없다거나 땅이 없다는 사실은 지금 먹고 즐기며 살아가는 데는 별로 결정적인 요소가 아닙니다. 문제는 아브람의 미래입니다. 자식이 없으면 그에게 미래는 없습니다. 땅이 없어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이 사실에서 아브람은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흑암이었고, 두려움이었습니다. 자기 한 평생으로 모든 것이 끝이라고 한다면 그가 지금까지 걸어온 모든 인생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같이 느껴졌겠지요. 그에게 미래의 불확실성보다 더 큰 두려움은 없습니다.

 

우리는 아브람과 상황이 전혀 다르다고 생각할 분들도 있겠지요. 나에게는 자식도 있고, 땅도 있으니 말입니다. 거꾸로 그런 것이 없는 사람들은 그것을 확보하기 위해서 애를 쓸 겁니다. 그러나 곰곰이 생각해보십시오. 자식과 땅이 확보되면 우리의 미래가 보장될 수 있을까요? 전혀 그렇지 않습니다. 우리가 죽은 다음에 자식과 땅이 무슨 소용이 있을까요? 자식들이 부모를 기억해주는 것으로 여러분의 미래를 확보하고 싶으신가요? 여러분의 땅과 재산이 여러분의 미래를 담보해 줄 것이라고 믿으시나요? 그게 어느 때까지 지속될 수 있을까요? 지금 여러분이 500년 전 조상들을 기억하고 있으신가요? 그 모든 것들은 지나갈 뿐입니다. 자식과 땅도 지나갑니다. 그것이 우리의 미래를 확보해주지 못합니다.

 

제 설교가 결국 자식이나 땅을 의지하지 말고 예수 잘 믿으라는 말이구나, 하고 생각하면 곤란합니다. 예수 잘 믿는 것은 목사가 말한다고 해서 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것을 여러분에게 강요하고 싶은 생각도 없습니다. 믿음의 세계로 깊이 들어가지 전까지의 영적인 자리로 안내할 뿐입니다. 이 아브람 이야기에서 영적인 자리는 바로 미래에 대한 충격과 두려움입니다. 그것이 그에게 영적인 실존이었습니다. 일단 그것을 직면해야 합니다. 믿음은 그 다음의 문제입니다.

 

다음과 같은 질문을 생각해보십시오. 지금 우리는 어디에, 어느 시간에 존재하고 있는 걸까요? 저는 이런 질문 앞에 설 때마다 현묘(玄妙), 즉 아득하다는 말 밖에는 다른 말이 생각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는 2010년 2월28일 주일에 이곳에서 예배를 드리고 있습니다. 어떤 분은 동계올림픽에서 피겨스케이팅 금메달을 딴 김연아 선수를 상상할지 모르겠군요. 몇 년의 인생설계를 세우는 분들도 있겠지요. 이런 것들이 다 어디로 가는 걸까요? 우리의 의지, 우리의 재산과 우리의 학문적 업적, 우리의 열정과 사랑과 절망이 모두 어디로 가는 걸까요? 저는 간혹 500년 후를 생각합니다. 1억년 후를 생각할 때도 있습니다. 내가 없는 미래를 생각합니다. 내가 없어도 세상은 굴러갑니다. 그렇다면 나의 미래는 도대체 뭐란 말인가요? 조금 더 극단적인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앞으로 언젠가 지구에 인간이 살지 못할 순간이 올지 모릅니다. 핵전쟁이 일어나거나 다른 방식으로 생태계가 인간을 허락하지 않을 정도로 파손될 수도 있습니다. 식물이나 미생물로만 가득한 지구의 미래가 올지도 모릅니다. 위르겐 몰트만은 <과학과 지혜>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인류 전체는 사멸할 수 있으며, ‘먼 미래의 우주’(far-future Universe)는 인간 없는 -어쨌든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인간 없는- 우주일 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이런 미래에서 문명과 역사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이런 사실 앞에서 누가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이것이 바로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이 거룩한 두려움은 우리의 미래에 대한 깊은 통찰에서부터 옵니다. 이것이 바로 아브람의 경험이었습니다.

 

횃불과 불기둥

 

증거를 보여 달라는 아브람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요? 아브람은 어두움 가운데서 횃불이 제단의 쪼갠 고기 사이로 지나가는 것을 보았습니다.(창 15:17) 이 횃불은 이스라엘이 광야생활에서 경험한 불기둥과 똑같습니다. 하나님은 불기둥(구름기둥)으로 생존에 대한 불안과 미래에 대한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광야의 이스라엘 사람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만나와 메추라기를 허락하셨습니다. 제단의 횃불로 나타나신 하나님은 아브람에게 땅을 약속으로 주셨습니다. 그리고 그 뒤로 그에게 이스마엘과 이삭을 자식으로 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아브람의 횃불과 광야의 불기둥은 고대 이스라엘의 고유한 하나님 경험입니다. 이 하나님 경험에서만 아브람과 이스라엘은 미래의 두려움을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여기서 핵심은 하나님 경험입니다. 무엇이 하나님 경험일까요? 어떻게 하나님 경험이 가능한가요? 그걸 이 시간에 제가 설명할 수는 없습니다. 성령 경험이 각자마다 다르듯이 하나님 경험도 각자 다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각양의 하나님 경험에 일치하는 것이 있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 경험은 바로 거룩한 두려움에서 시작합니다. 거룩한 두려움에 대한 경험이 바로 하나님 경험이라도 할 수도 있습니다. 그 이유는 거룩한 두려움은 곧 생명의 어두운 심연에 대한 경험이기 때문입니다. 앞에서 말씀드린 대로 미래의 불안과 두려움은 곧 생명의 심연, 또는 생명의 신비를 가리킵니다. 우리가 그 어떤 방식으로도 손에 넣을 수 없고 생산해낼 수 없는 그 생명의 심층 앞에서 우리는 근본적인 떨림을 경험합니다.

 

일반 사람들은 물론이고 우리 기독교인들도 이런 거룩한 두려움을 경험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그걸 회피하는 일이 많습니다. 거룩한 두려움은 가장 낯선 경험입니다. 이를 피한다는 것은 낯익은 것에만 몰두한다는 뜻입니다. 돈이 가장 낯익은 것입니다. 돈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자기와 친한 사람들과만 어울립니다. 모두 자기 자식을 좋은 대학에 보내려고 힘을 쓰는 이유도 역시 낯익은 삶을 보장받으려는 생각에 놓여 있습니다. 거꾸로 낯선 것은 거부됩니다. 기독교인들에게 타종교와 성적 소수자들은 완전히 거부됩니다. 복음서에서 바리새인들이 세리와 죄인들을 거부하듯이 말입니다. 어떤 이들은 심지어 천국에 가서도 이 세상에서 좋다고 생각하던 것들을 얻을 수 있으려니 생각합니다. 이런 영성에서는 결코 거룩한 두려움이 나올 수가 없습니다. 질적으로 전혀 새로운 생명에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오늘은 사순절 둘째 주일입니다. 사순절은 예수님의 고난과 십자가와 부활을 미리 준비하는 절기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지금 여러분의 손안에서 진행되는 모든 것에 여러분의 미래를 맡기지 마십시오. 그것들은 우리의 벌린 손가락 사이로 모래알이 빠져나가듯이 곧 사라질 것입니다. 하나님은 전혀 새로운 생명의 길을 열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바로 그 생명의 길입니다. 십자가는 이 세상의 가장 어두운 심연에 대한 경험입니다. 부활은 개인과 인류가 얻게 될 궁극적 미래의 생명 사건입니다. 우리는 아브람의 횃불이 아니라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의 미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으로부터 벗어난 사람입니다. 그래서 사순절에도 우리는 주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사순절 둘째 주일, 2월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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