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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눅7: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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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1763 |
예수님이 활동하시던 시대의 이스라엘은 세 지역으로 나뉩니다. 북쪽은 갈릴리, 남쪽은 유대, 중간은 사마리아입니다. 예수님은 갈릴리에서 활동을 시작하시고 사마리아를 거쳐 유대로 내려오신 뒤에 유대의 수도인 예루살렘에 들어갔다가 체포당하고 십자가에 처형당하셨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오래 활동하신 지역은 갈릴리입니다. 그곳에 갈릴리 호수가 있고, 호수를 낀 마을이 여럿 있었습니다. 갈릴리 호수 북쪽 연안에 위치한 마을이 가버나움입니다. 가버나움은 다메섹에서 지중해로 빠지는 교통 요지여서 번성했던 마을입니다. 세관도 있었고, 회당도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이 가버나움에 오래 체류하셨는데, 거기서 다섯 명의 제자도 선택하셨고, 그 외에 많은 사람들을 만났습니다. 그중의 한 사람이 오늘 우리가 읽은 눅 7:1-10절에 나오는 백부장입니다.
백부장은 100명 정도의 부하를 거느린 사람을 가리키는 계급입니다. 오늘의 중대장 쯤 됩니다. 이스라엘은 자체 군대가 없었습니다. 이 사람은 로마 장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기원후 44년 이전에는 가버나움에 로마 군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백부장은 당시 그 지역의 왕이었던 헤롯 안티바스 휘하에서 지역의 치안을 책임 진 사람으로 봐야 합니다. 그의 종이 생사의 기로에 놓일 정도의 큰 병에 걸렸습니다. 백부장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겠지요. 종을 고치기 위해서 용하다는 의사는 다 불러왔을 겁니다. 아무런 차도가 없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가버나움에 들어오셨다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예수님에게 종의 치료를 부탁하기 위해서 유대인 장로 몇 사람을 예수님에게 보냈습니다. 유대인 장로들은 예수님에게 와서 백부장이 처한 사정을 이야기했습니다. 백부장의 부탁을 들어주어야 할 이유도 곁들였습니다. 이 백부장은 이스라엘 민족을 사랑하고 회당을 지었다는 것입니다.
유대인 장로들의 이야기를 전해들은 예수님은 백부장의 집으로 가셨습니다. 집에 가까이 이르렀을 때 백부장은 친구들을 다시 예수님에게 보내서 이런 말을 했습니다. “주여, 수고하지 마옵소서.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그러므로 내가 주께 나아가기도 감당하지 못할 줄을 알았나이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 7:6,7) 백부장의 태도가 조금 이상합니다. 예수님이 이왕 집 가까이 오셨다면 집에 들어오는 게 순리입니다. 자신이 존경하는 유랑 랍비를 집에 모실 수 있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고, 기쁜 일이며, 또 자랑거리이기도 합니다. 그런데 백부장은 그것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합니다. 이 말을 들으신 예수님은 백부장을 놀랍게 여기시고, 자기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스라엘 중에서도 이만한 믿음은 만나보지 못하였노라.”(눅 7:9) 이런 칭찬은 드문 일입니다. 요즘의 상황으로 바꾸면 이 칭찬은 다음과 같습니다. 교회에 나오지 않는 어떤 사람의 믿음이 교회에 나오는 사람의 그것보다 훨씬 크다는 것입니다. 백부장의 믿음이 무엇이기에 예수님은 이렇게까지 칭찬하셨을까요?
하나님 경험
우리가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믿음의 기준에서 본다면 백부장의 행동과 말은 그렇게 대단한 것이 아닙니다. 그가 유대인들을 도와주고, 회당을 건축했다는 사실이 믿음의 본이 되는 것도 아닙니다. 그는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다고 말하지도 않았습니다. 전도, 기도, 헌금 등에서 뛰어난 사람도 아닙니다. 그에게서 특별한 일은 예수님을 집으로 모실 수 없으며, 자기가 예수님 앞에 직접 나설 수 없다고 말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런 말은 일단 그가 아주 겸손한 사람이라는 의미처럼 들립니다. 그렇다면 겸손이 바로 믿음의 기준이라는 말일까요? 하나님을 믿는 사람에게서 겸손은 매우 중요한 삶의 태도입니다. 겸손하지 않으면서 하나님을 믿는다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사실 겸손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겸손한 것처럼 흉내를 낼 수는 있지만 실제로 겸손해지는 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자기보다 힘이 강한 사람 앞에서는 겸손하지만, 약한 사람 앞에서는 교만해집니다. 겉으로는 그렇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는 있어도 실제로 겸손할 수는 없습니다. 겸손하려고 노력했지만 결국은 실패하고 만 경험이 여러분에게도 있을 겁니다. 교양의 차원에서라도 겸손해지려고 노력하는 것은 경우에 따라서 필요하지만, 거기에 매달릴 필요는 없습니다. 그것이 아예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도 겸손이 믿음의 최고 경지라는 뜻이 아닙니다. 백부장이 겸손했다는 사실 자체를 말하려는 것도 아닙니다. 성서기자가 전하려는 핵심은 백부장이 예수님 앞에서 자기를 한없이 낮출 수밖에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이냐 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그 답은 아주 분명합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경험했습니다. 예수님을 절대능력으로 경험했습니다. 그에게서 예수님은 절대적인 분이었습니다. 따라서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 없으며, 자기가 예수님 앞에 감히 나설 수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자기를 절대적으로 낮출 수밖에 없었습니다. 신성을 경험한 사람들에게서 나타나는 태도가 바로 절대적인 자기 낮춤입니다. 신구약성서는 이 사실을 일관되게 전합니다.
호렙 산에서 하나님을 경험한 모세는 신발을 벗어야만 했습니다.(출 3:5) 거룩한 힘을 경험한 사람은 그동안 자기가 알고 있던 존재 기반을 포기해야만 합니다. 예루살렘 성전에서 거룩한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한 이사야는 자기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라고 고백했습니다.(사 6:5) 누가복음 5장은 예수님이 시몬 베드로를 부르신 사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앞에 엎드려 이렇게 말합니다.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 복음서에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병 고치는 것을 본 사람들이 크게 놀라고 두려워했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이런 모든 것들은 그들이 예수님에게서 신성을 경험했다는 뜻입니다. 본문의 백부장이 예수님을 감당할 수 없다고 고백한 이유도 바로 그것이었습니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중요하다고 생각했던 토대가 부정되고 언어도 무의미해지는 하나님의 임재 경험입니다.
지금 우리도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 메시아로 믿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신앙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 믿음으로 지금 예배드리기 위해서 귀한 시간을 쪼개서 나왔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은 그 무엇과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귀중한 겁니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의 믿음이 예수님께서 칭찬하신 백부장의 믿음과 같은 차원의 것인지 아닌지는 한번 질문해봐야 합니다.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험하지 못한 채 얼마든지 교회생활은 할 수 있습니다. 왜 그런지는 길게 설명할 필요도 없을 겁니다. 교회에 나오는 동기는 신자 수만큼이나 많습니다. 젊은 사람들은 이성을 만나기 위해서 나오기도 하고, 장사하는 사람들은 그 장사를 위해서, 또 어떤 사람은 단순히 사람과 어울리고 싶어서 나오기도 합니다. 그러다가 깊은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기도 하겠지요. 문제는 세월이 흘러도 믿음의 세계로 들어가지 못한다는 데에 있습니다. 하나님 경험이 없으면서 신앙생활을 하는 것보다, 믿음이 없으면서도 믿음 생활을 하는 것보다 더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이는 마치 사람에 대한 깊은 연민이 없으면서 의사 활동을 하거나 법조인이 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것은 영혼을 파는 일입니다. 하나님 임재 경험은 신앙생활에서 필수적입니다. 실제로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과 경험하지 않은 사람을 구별할 수 있을까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의 그것을 구별하기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다른 사람만이 아니라 자기 자신도 잘 구별이 안 됩니다. 여러분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세요. “나는 하나님을 실제로 경험하고, 그런 믿음을 갖고 있을까?”
그것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을 오늘 본문에서 한 가지만 말씀드린다면 ‘자기 부정’입니다. 백부장은 예수님이 자기 집에 들어오는 것과 자기가 예수님에게 가는 것을 감당하지 못하겠다고 했습니다. 백부장의 위치라고 한다면 다른 사람들 앞에서 떳떳하게 자기를 나타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시고 맛있는 밥이라도 한 끼 대접한다면 모두에게 즐거운 일이 됩니다. 그가 그렇게 한다고 해서 예수님이 기분 나빠하실 까닭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백부장은 그것 자체를 감당할 수 없었습니다. 절대적인 권위 앞에서 그는 자기를 완전히 부정했습니다. 앞에서 제가 말씀드린 겸손과 자기부정은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겉으로는 비슷해 보입니다만 실제로는 완전히 다릅니다. 겸손은 교양의 차원이라면 자기부정은 존재의 차원입니다. 베드로를 ‘사탄’이라고 책망하신 예수님은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라”고(마 16:24) 말씀하셨습니다. 자기를 부인하라고 했지만 겸손한 포즈를 취하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자기부정은 하나님을 경험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는 가장 분명한 증거입니다.
중세기 사막의 교부들이 사막에서 평생 살아갈 수 있었던 힘도 바로 자기부정에 있었습니다. 자신이 모래 한 알보다 더 나을 게 없을 정도로 자기를 부정한 사람에게는 온갖 문명이 매력적으로 자리한 도시나 사막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에 순교의 피가 많았습니다. 순교가 가능한 이유도 절대적인 자기부정의 영성에 놓여 있습니다. 사실 모든 고등종교의 중심에는 자기부정이 자리합니다. 문수라는 승려가 지난 5월 31일 오후 경북 군위군의 위천 둑에서 자기 몸에 기름을 붓고 불을 댕기는 분신을 했습니다. 4대강 사업 반대를 위해서 자기 몸을 던진 것인데, 불교용어로 그것을 소신공양(燒身供養)이라고 합니다. 그분의 행위에 대해서는 보는 관점에 따라서 서로 다른 평가를 내릴 겁니다. 다른 건 접어두고 그가 절대적인 자기부정의 세계에 들어갔다는 것만은 분명합니다. 자기부정이 아니면 결코 우리는 하나님을 경험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사실 자기부정이 살아있을 때는 거의 불가능합니다. 하나님이 억지로 그것을 가능하게 하는 사건이 바로 죽음이 아닐는지요. 죽음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이런 죽음에 이르기 전 살아있는 동안에 완전한 자기부정에 이르는 구도의 길이 바로 영성입니다.
어떤 사람은 자기부정이라는 말을 오해합니다. 그런 오해가 기독교 역사에서 자주 발생했으며, 지금 한국교회에도 팽배합니다. 자기부정을 생명부정으로 오해하는 것이 그것입니다. 그래서 금욕적인 삶을 살아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더 나가서 자학적이기도 합니다. 죄의식에 사로잡기도 합니다. 금욕, 자학, 죄의식은 심리적인 질병에 속하지 기독교 영성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습니다. 이런 삶의 왜곡은 자기부정이라는 하나님 경험을 오해하는 데서 나온 겁니다. 잊지 마십시오. ‘자기’를 부정하라는 말이지 ‘생명’을 부정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자기 집중에서 벗어나라는 말이지 하나님 나라의 정의와 평화를 외면해도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백부장의 자기부정, 자기축소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원초적 경험의 기준이라고 한다면 이제 사람이 해야 할 일은 구체적으로 무엇일까요?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부정하기만 하면 모든 게 해결될까요? 원칙적으로 말씀드린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우리가 생명을 유지하는데 우리의 할 일이 많지 않은 것과 비슷합니다. 숨을 쉬기 위해서 우리는 산소를 매번 만들 필요는 없고, 그럴 능력도 없습니다. 그냥 숨을 들이마시고 내쉬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의 생명은 거의 모두 우리 외부로부터 주어진 것들로 인해서 유지됩니다. 그것을 일일이 우리가 준비해야 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요? 태양도 만들고, 물도 만들어야겠지요. 그건 아예 불가능합니다.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고 한 백부장의 고백은 우리의 실제 삶에서도 그대로 적용됩니다. 하나님의 생명 사건을 우리의 인식과 우리의 능력 안에 담아낼 수가 없습니다.
문제는 우리의 현실에는 백부장 사람들이 많다는 사실입니다. 사랑하는 종이 중병에 걸려서 걱정하던 백부장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냥 가만히 있을 수는 없습니다. 그가 예수님에게 한 말을 다시 기억해보십시오. 예수님을 자기 집에 모실 수는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예수님과 아무런 관계를 맺지 않고 살아도 된다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훨씬 근원적인 관계를 요구했습니다. “말씀만 하사 내 하인을 낫게 하소서.”(눅 7:7b)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예수님과의 관계에서는 다른 것이 하나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말씀 한 마디로 충분합니다. 백부장이 예수님을 어느 정도의 차원에서 믿었는지를 여기서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 한 마디면 충분했습니다. 전적인 신뢰입니다. 생명의 근원을 향한 절대적인 순종입니다.
오늘 우리에게 이런 신뢰와 순종이 있을까요? 오히려 불신과 불순종의 지배를 받는 건 아닐까요? 우리의 일상 문제를 모두 종교적으로 해결하려고 애를 쓴다는 사실에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예수님에게 너무 많은 것을 요구합니다. 어떤 젊은이들은 배우자를 놓고 기도합니다. 배우자의 직업, 나이, 생김새까지 기도의 조건에 포함됩니다. 이런 기도가 살아있는 기도라고 배웠기 때문이겠지요. 한국을 대표하는 어떤 목사님은 해외 선교사들에게 설교를 하면서 선교용 승합차를 위해서 기도할 때 차종과 색깔까지 구체적인 내용으로 기도하라고 말씀하더군요. 사람들은 이런 것을 믿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보기에 그것은 오히려 불신앙입니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그런 기도는 이방인들의 중언부언입니다.(마 6:7) 임박한 하나님 나라를 인식하지 못하는데서 나오는 조급증입니다. 이런 방식으로 우리가 신앙생활을 계속할 수는 없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에게 정작 필요한 것은 여러 가지가 아니라 주님의 ‘한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사실에, 그분이 행동하시고 치료하시고 구원하신다는 놀라운 사실에 영적인 눈을 뜨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분의 말씀은 병과 죽음을 근본적으로 해결하는 능력입니다. 그분만이 부활의 주님이십니다. 우리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능력이십니다. 그러니 여러분, 종이 병들었다는 이 어두운 현실을 너무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말씀만’으로 병을 낫게 하시는 분이 우리와 함께 하십니다. 우리의 기도는 오직 이 한 마디입니다. “주님, 듣겠사오니, 한 말씀만 하소서.” (성령강림절 후 둘째 주일, 6월6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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