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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2:15-2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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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393535 |
유대 그리스도인과 이방 그리스도인
바울은 오늘 설교의 본문 앞 구절(갈 2:11-14)에서 지난날 안디옥에서 자신이 게바를 책망한 일을 간략하게 전했습니다. 안디옥 교회는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함께 신앙생활을 하던 곳입니다. 바울과 바나바가 함께 그곳에서 목회를 하고 있었습니다. 베드로라고도 불리는 게바가 안디옥을 방문했습니다. 어느날 그들이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함께 밥을 먹고 있을 때 예루살렘 교회가 파송한 이들이 들이닥쳤습니다. 당시 예루살렘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동생인 야고보가 대표자로 활동했습니다. 예루살렘 교회가 안디옥 교회에 사람들을 파송한 이유는 신앙생활을 지도하기 위한 것입니다. 게바는 예루살렘에서 온 이들이 두려워 자리를 피했습니다. 그러자 다른 유대인들도 자리를 피하고, 급기야 바나바도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울은 이들의 행동을 위선이라고 책망했습니다.
이런 상황이 오늘 우리에게는 잘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수제자로 알려진 베드로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과 밥 한 끼 먹는 것도 눈치를 봐야 한다는 게 이상합니다. 2천 년 전으로 돌아가서 그 상황을 이해해야 합니다. 당시에는 아직 기독교가 자리를 잡지 않았습니다. 신약성서가 기록될 때입니다. 유대교와 완전히 분리되지도 않았을 때입니다. 당시 기독교를 끌고 가던 이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이건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예수님도 유대인이었고, 제자들도 유대인이었고, 그 이외에 예수님을 추종하던 이들이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유대교인들이었습니다. 이 말은 율법을 신앙생활의 중심으로 삼고 있었다는 뜻입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으면서도 여전히 율법을 준수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신앙생활이 그들에게는 자연스러운 것이며, 당연한 것이었습니다. 그런 이들이 예루살렘 교회를 구성하고 있었습니다. 문제는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이 나타나면서 시작됩니다. 이방인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살았습니다. 예루살렘의 유대 그리스도인들 중에서 소위 할례파로 불리는 이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신앙생활을 하는 이방 그리스도인들을 그대로 용납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래서 계속해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지키라고, 할례를 받으라고 압박했습니다. 그런 압박이 갈라디아 지역의 교회에 까지 미쳤습니다. 갈라디아 지역의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을 지켜야 하는 거 아니냐 하면서 흔들리기 시작했습니다. 바울은 이 소식을 전해 듣고 안타까운 심정으로 이렇게 호소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은혜로 너희를 부르신 이를 이같이 속히 떠나 다른 복음을 따르는 것을 내가 이상하게 여기노라.”(갈 1:6) 이 다른 복음은 예루살렘 교회가 주장하는 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원한다고까지 말했습니다.(갈 1:9)
바울의 이런 표현만 보면 바울이 완전히 적과 싸우는 것 같습니다. 기독교를 박해하는 유대교와 싸우는 것이라고 말입니다. 아닙니다. 지금 바울이 격렬하게 비판하고 있는 이들은 바울과 똑같이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더구나 똑같이 유대인들입니다. 유대인으로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들은 대다수가 유대교를 믿는 유대인들 중에서 소수에 속합니다. 바울의 귀중한 친구들입니다. 그들과는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습니다.
바울은 오늘 설교의 본문에서 그 사실을 이렇게 지적합니다. “우리는 본래 유대인이요 이방 죄인이 아니로되”(갈 2:15) 이방인을 죄인이라고 표현한 것은 이방인들이 율법 밖에 있다는 뜻입니다. 유대인들은 율법과 상관없이 사는 이방인들을 죄인이라고 간주했습니다. 이방인들은 아예 하나님의 구원과는 거리가 멀다는 말입니다. 유대인이라고 하더라도 의로워지려면 율법을 지켜야만 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모든 유대인들에게 해당되는 생각입니다. 그러나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런 일반적인 유대인들과 다르게 생각했습니다. 의로워지는 것은 율법을 지키는 데서 가능하지 않다는 사실을 분명하게 인식했습니다. 그것을 바울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갈 2:16 후) 그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 율법을 완벽하게 실천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합니다. 특히 바리새인처럼 전문적으로 율법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평범하게 살아가는 사람에게는 아예 불가능합니다. 예를 들어 교통 법규를 원칙적으로 완벽하게 지키는 사람이 없는 것과 비슷합니다. 둘째, 율법은 예수님이 말씀하신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서 알 수 있듯이 상대적인 자기 만족감만 제공할 뿐입니다. 경쟁력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가 가장 율법적인 삶의 방식이 아닐는지요. 이런 방식의 삶으로는 영혼의 자유를 경험할 수 없습니다.
율법이 아니라면 무엇이 길일까요?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로워진다고 생각했습니다. 갈 2:16절에서 바울은 그 사실을 반복해서 강조했습니다. 여기까지는 바울을 비롯한 모든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즉 바울이 저주가 내리길 원한다고 했던 할례파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동의하는 내용입니다. 그 이후부터 유대 그리스도인들과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달라집니다. 예루살렘 교회 지도자들과 이방 그리스도인을 대표하는 바울이 서로 다른 길을 가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여기서 문제의 핵심은 이방 그리스도인과 율법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하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유대 그리스도인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율법, 즉 할례를 받고 토라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그들이 율법을 통해서 의로워진다고 주장한 것은 아닙니다. 칭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만 가능하다는 사실을 믿었습니다. 그러나 율법을 지키지 않는 것은 잘못이라는 겁니다. 이들의 입장을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앞에서 설명한 것처럼 그들은 모두 태어나면서부터 율법과 더불어서 살았습니다. 말하자면 모태 율법주의자들이었습니다. 다행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지만 여전히 율법을 수행하면서 살았습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모두 이런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들이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율법을 요구했다는 것은 크게 이상한 게 아닙니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율법이 근본적으로 선한 것이라는 사실입니다. 십계명만 해도 그렇습니다. 첫 계명을 다음과 같습니다. “너는 나 외에는 다른 신들을 네게 두지 말라.” 열 번째 계명은 다음과 같습니다. “네 이웃에 대하여 거짓 증거하지 말라.” 십계명에 나오는 각각의 명제를 충분하게 이해하기만 하면 개인과 공동체를 살릴만한 근거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습니다. 할례도 고대사회에서는 위생건강을 위해서 도움이 됩니다. 그 이외에 크고 작은 율법들은 모두 사람을 살리는 규범들입니다. 율법은 하나님의 선물입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그것을 거부하는 것은 곧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것과 똑같습니다. 바울 비판자들은 바울의 가르침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부정이라고 보았습니다.(갈 2:21)
유대 그리스도인들의 이런 입장을 우리의 일상으로 바꿔서 설명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부모와 자녀의 관계가 적절하겠군요. 자녀들이 각각 독립해서 살고 있습니다. 부모들은 그것을 인정하면서도 자녀들을 영원히 자신들의 아들과 딸로 두고 싶어 합니다. 자신들이 자녀들을 가장 잘 이해하고 힘이 되어줄 수 있다는 생각입니다. 자녀들이 어렸을 때 가족이라는 울타리에서 안전하게 자랐습니다. 그런 울타리가 여전히 필요하다는 주장입니다. 일리가 있습니다. 자녀들이 독립해서 산다고 해도 어려움이 생길 때 부모가 도와줄 수 있으니까요. 더 나가서 부모들은 자녀들에게 효도를 강요합니다. 이것이 바로 율법입니다. 그것 자체로는 나쁠 게 하나도 없습니다. 은혜이고 사랑입니다. 그것을 부정하면 은혜를 모르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당시 예루살렘 교회로부터 따돌림을 당한 이유가 바로 이런 데 있었습니다. 저 친구는 하나님의 은혜를 간단히 포기한 친구라고 말입니다.
바울은 적극적으로 자신을 변호하면서 날카롭게 상대를 비판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갈 2:21절) 바울은 율법이 하나님의 은혜라는 사실을 모르지 않습니다. 그는 율법 폐기론자가 아닙니다. 초기 기독교에는 분명히 율법 폐기론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교회질서도 무시하고 무조건 열광적 종교 체험에만 몰두했습니다. 극단적인 구원 실증주의에 빠져 있는 현대의 구원파 같은 집단도 율법 폐기론자들입니다. 바울은 그런 열광주의의 위험성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의 질서를 중요하게 생각했습니다.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에서 칭의론을 핵심 주제로 말하면서도 윤리와 도덕을 말하는데서 이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그는 유대 그리스도인들이 비판하듯이 하나님의 은혜인 율법을 폐기처분한 사람이 아닙니다. 그런 사람이 왜 하나님의 은혜를 폐기했다는 오해를 받은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그 대답입니다. 갈 2:21절에서 바울은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인한 것이라면 그리스도의 죽음이 헛된 것이라고 단적으로 말했습니다.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가 해체됩니다. 그 차이는 율법이었습니다. 십자가 앞에서는 율법이 무의미해진 것입니다. 태어나면서부터 유대인이라고 한다면 율법을 준수하면서 살면 됩니다. 그러나 이방 그리스도인에게 그것을 요구할 수 없습니다. 이방 그리스도인들은 율법대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이들에게 율법 의무를 계속 요구하면 그들은 여전히 죄인으로 남을 수밖에 없습니다. 죄인으로 남는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된 것이라는 말이 됩니다.
바울의 이런 논리에는 기본적으로 십자가 신학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당시에 가장 수치스러운 죽음이었습니다. 그것이 유대인들에게는 거리끼는 것이고,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었습니다.(고전 1:23) 이런 진술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까요? 가장 고상한 원리와 가치들은 율법입니다. 종교적인 법을 율법이라고 하고, 세속적인 법을 실정법이라고 하는데, 통칭해서 율법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수치스럽고 무의미한 사건입니다. 십자가의 죽음은 율법의 결과입니다. 복음서 기자들도 이런 사실을 이미 분명하게 기록했습니다. 예수님이 종교의 최고 법정인 산헤드린에서 신성모독죄라는 선고를 받았고, 정치의 최고 법정인 빌라도 앞에서 사회소요죄라는 선고를 받고 결국 십자가에 처형당했습니다. 율법이 하나님의 아들을 죽인 것입니다. 골고다의 십자가 처형 장소는 바로 율법의 해체를 가리킵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이렇게 말했습니다. “내가 율법으로 말미암아 율법에 대하여 죽었나니 이는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 함이라.”(갈 2:19) 율법에 대해서는 죽고 하나님에 대해서는 산다는 말이 바울 신학의 진수입니다. 십자가 신앙은 인간이 노력해서 완성해 나가야 할 모든 업적을 가리키는 율법을 땅바닥에 내려놓고, 우리가 오직 은총으로 받아들이기만 하면 되는 하나님의 구원 사건을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바울은 다시 이렇게 말합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갈 2:20 전)
오직 믿음으로
위에서 설명한 십자가 신학, 또는 십자가 신앙을 이해하기는 어렵지 않지만 실제의 삶에서 살아가기는 모호해 보입니다.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산다는 게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는 분들도 있을 겁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갑니다. 율법은 아주 구체적인 가르침이기 때문입니다. 이런 구체적인 율법 안에 들어가 있으면 뭔가 안정감이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래서 바울을 반대하는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이 계속해서 율법을 강조했습니다. 제 설교를 듣는 분들 중에서 내용은 좋지만 구체적으로 무엇을 해야 한다는 것인지 갈피를 잡기 힘들다고 하소연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그럴 겁니다. 십자가 신앙을 자칫 모호하게 받아들이면 구체적인 율법의 유혹을 받을 수 있습니다.
바울도 그 문제를 알고 있었습니다. 사람이 정신만이 아니라 육체로 살아야 한다면 구체적인 삶의 내용이 필요합니다. 바울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후) 여기서 육체는 ‘사르크스’라는 헬라어입니다. 우리의 생물학적인 차원의 실질적인 육체를 가리킵니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지만 여전히 육체로 살아야 합니다. 어느 누구도 구름 위에서 살지 못합니다. 육체의 한계와 유혹이 우리를 고달프게도 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산다고 했습니다. 이 믿음이 바울에게는 삶의 현실(reality)이었습니다. 참된 음악인들에게는 음악이 삶의 현실인 것처럼, 참된 시인에게는 시가 삶의 현실인 것처럼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믿음이 바로 그것입니다.
믿음 안에서 믿음으로 산다는 말을 무조건 교회에 자주 나와서 ‘주여, 삼창’이나 ‘믿습니다.’를 연발해야 한다는 뜻은 아닙니다. 그런 것은 단순히 인간의 심리적인 자기 확신이나 감정적인 카타르시스에 불과합니다. 다른 종교나 사이비 이단들에게도 얼마든지 가능한 사람의 자기 열정이자 자기연민입니다. 믿음의 내용이 충실해야 합니다. ‘자기를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 누군지를 알아야겠지요. 하나님이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행하신 구원 통치에 대한 관심이 우리 영혼을 가득 채워야겠지요. 그것이 바로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갈라디아 교회의 위기는 오늘 우리에게도 있습니다. 영적으로 자기 성찰이 부족할 경우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상대화되고, 그래서 축소되고 온갖 종류의 율법이 교회를 지배하게 됩니다. 그런 현상이 한국교회에 얼마나 만연해 있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할 필요가 없습니다. 헌금으로부터 시작해서 교회활동 전반이 마치 요즘 젊은이들의 ‘스펙 쌓기’처럼 종교적 업적을 쌓아가는 기회로 오용되고 있습니다. 율법주의로의 회귀입니다. 기억하십시오. 율법은 결국 자기 의(義)입니다. 아무리 선한 것이라 하더라도 자기 의는 십자가 신앙을 헛된 것으로 만듭니다. (성령강림절 후 셋째 주일, 6월13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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