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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갈6:7-1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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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400605 |
갈라디아서에는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보기에는 민망할 정도로 과격한 표현들이 나옵니다. 예컨대 바울이 전한 복음이 아닌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바란다는 말도 나옵니다.(갈 1:9) 여기서 다른 복음을 전하는 사람들은 할례파입니다. 할례파들은 이방 그리스도인들도 모두 할례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그런 주장을 용납할 수가 없었습니다. 바울은 할례를 가리켜 육체의 모양을 내는 것이며, 육체를 자랑하는 것이라고 규정했습니다.(갈 6:12, 13) 바울의 이 말은 옳습니까?
할례는 유대인들의 종교적 의식입니다. 모든 유대인 남자들은 태어난 지 팔 일만에 할례를 받았습니다. 예수님도 할례를 받았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누가복음 기자는 이에 관해서 직접적으로 표현하지는 않지만 간접적으로 증언합니다. “할례 할 팔 일이 되매 그 이름을 예수라 하니 곧 잉태하기 전에 천사가 일컬은 바러라.”(눅 2:21) 유대인들은 할례를 하나님의 백성이라는 사실에 대한 결정적인 표식으로 보았습니다. 그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좀 어색하게 보입니다만 이해 못할 것도 없습니다. 할례를 세례로 대체해서 보면 됩니다. 유대인들에게 할례는 절대적인 예식이었기 때문에 그들은 할례를 받지 않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요구한 것입니다. 지금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바울도 물론 할례를 받았고, 특별한 경우에는 이방인 제자에게 할례를 받게 했습니다. 바울은 할례 자체를 부정한 사람은 아닙니다. 그런데 바울은 갈라디아서에서 할례파를 왜 그렇게 극단적으로, 또한 무슨 근거로 비난하는 걸까요?
유대 기독교의 고민
바울은 할례파의 문제가 복음의 본질인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연결되어 있다고 보았습니다. 본문 12절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육체의 모양을 내려 하는 자들이 억지로 너희에게 할례를 받게 함은 그들이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아 박해를 면하려 함뿐이라.” 할례파들은 바울의 과격한 비난과는 달리 실제로는 그렇게 이상한 사람들이 아닙니다. 그들의 처지가 지금 곤란해서 어쩔 수 없이 할례를 강조하는 중입니다.
그들의 처지는 다음과 같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핵심 구성원들은 모두 유대인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만 유대교를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유대교인이면서 예수님을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유대교 당국도 초기 기독교의 이런 입장을 이해해 주었습니다. 초기 기독교는 유대교의 여러 당파 중의 하나로 자리를 잡았습니다. 나사렛파입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될 수 없었습니다. 두 가지 문제가 연루되었습니다. 하나는 유대인이 아닌 이방인 그리스도교가 시작되었다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유대교에서 바리새파 운동이 몰아치기 시작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파 운동은 유대교의 정체성을 강화하자는 움직입니다. 우리나라에서 단군 신격화 운동이 벌어졌던 것과 비슷합니다. 바리새파 운동은 유대 그리스도인들에게 양자택일을 요구했습니다. 유대교를 따르든지 아니면 이방 기독교로 떨어져나가든지 말입니다. 유대교의 이런 요구도 이해가 됩니다. 어정쩡한 입장의 당파들을 모두 인정해버리면 결국 유대교와 이스라엘 민족 정체성이 훼손될 수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유대 기독교는 결단을 내려야만 했습니다. 유대교의 요구를 받아들이든지, 아니면 이방 기독교 쪽으로 완전히 떨어져 나가든지 말입니다.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은 많은 고민을 했을 겁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제자들과 예수님의 동생들, 그리고 초기에 예수님을 따르던 이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연민이 느껴집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그들은 예수님의 갈릴리 공동체에 속했습니다. 예수님의 공생애 동안 늘 함께 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 현장에 있었고, 부활 경험이 분명했습니다.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복음을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유대교를 쉽게 내던질 수도 없는 노릇입니다. 그들은 어떻게 보면 ‘경계인’입니다. 교회를 한번 옮기는 것도 어려운 일인데 종교 자체를 바꾼다는 것은 더 말할 나위도 없습니다. 당시 배교는 사회로부터의 완전한 따돌림을 의미합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목숨까지 걸어야 합니다. 유대교의 박해가 점점 강해집니다. 더 노골적으로 유대교의 정체성을 강요합니다. 더구나 이방 그리스도교는 점점 더 탈(脫)유대교 방향으로 나갑니다. 유대 기독교의 처지는 딱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빙하기를 맞아 점점 추워지는 상황에서 따뜻한 남쪽으로 내려갈 길까지 막혀버렸던 2백만 년 전 인류의 조상이 처한 상황과 비슷합니다. 그들은 결국 유대교의 요구를 따르기로 했습니다. 그렇지 않으면 유대 공동체 안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방 그리스도인들에게 할례를 받으라고 강요했습니다.
이방 기독교를 대표하는 바울은 그들의 요구를 거부했습니다. 바울은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을 잘 압니다. 믿음의 동지들이었습니다. 웬만하면 그들의 처지를 이해해줄만도 하지만 그는 단호하게 선을 그었습니다. 할례파는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들이라고 말입니다. 그들에게 저주가 내리기를 바란다고 했습니다. 할례파를 이단으로 정죄한 것입니다. 바울은 지금 감정적으로 대립하는 게 아닙니다. 인간적인 관계라는 차원에서 본다면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유대 기독교 지도자들의 주장을 받아들일 수도 있습니다. 비가 오면 일단 피하고 봐야 한다는 말이 있듯이 일단 그런 방식으로 유대교의 박해를 피한 뒤에 어느 정도 기독교가 안정이 되면 분명한 색깔을 찾아도 됩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게 타협할 수 없었습니다. 바울이 왜 이렇게 옹고집을 피우는 걸까요? 그는 왜 이렇게 독단적일까요? 그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대한 바울의 고유한 신앙이 놓여 있습니다.
하나님의 의, 십자가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전혀 새로운 삶의 세계를 발견했습니다. 그것을 갈 6:14절에서 이렇게 표현합니다.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바울은 앞에서 할례파를 가리켜 육체를 자랑하는 사람들이라고 말했습니다. 육체를 자랑한다는 말은 유대인이라는 사실을 자랑한다는 뜻입니다. 이에 반해서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 자랑한다고 했습니다. 자랑한다는 말은 문학적인 수사입니다. 십자가를 어떻게 자랑하겠습니까? 십자가가 바로 삶의 근본이라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한다는 말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당시에 십자가는 오히려 수치스러운 것이었습니다. 아무도 십자가에 달린 사람을 좋게 말하지 않았습니다. 그것을 자랑하는 사람은 정신이 좀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았습니다. 예를 들어보지요. 중세기에 마녀재판이 종종 있었습니다. 마녀로 재판받고 화형에 처해진 사람을 자랑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제 정신이 아니라는 말을 들었을 겁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당시에 마녀재판으로 죽은 사건과 비슷했습니다. 그런데도 바울은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바울의 이런 진술을 들을 때마다 우리는 왠지 불편합니다. 우리가 살아가는 삶에서는 별로 타당한 말씀이 아닌 것처럼 보입니다. 예수의 십자가보다도 자랑할 거리가 널려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예수를 믿는 사람들이 그 말을 외면할 수는 없습니다. 대개는 이런 말씀을 그냥 그러려니 하고 지나칩니다. 신앙적으로만 그렇게 생각하고 실제로는 다르게 살아도 좋다는 식으로 대충 넘어갑니다. 또 어떤 이들은 광신적으로 십자가에 매달립니다. 사람 키보다 더 큰 십자가 모형을 들고 “예수 천당, 불신 지옥”을 외치면서 행진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부적처럼 달고 다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십자가를 보기만 하면 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지성적인 그리스도인들은 대개 십자가를 자기 삶의 중심이 아니라 옆으로 밀어놓습니다. 십자가와 삶의 관계가 느슨합니다. 십자가는 내 삶에서 있으면 좋지만 없어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바울은 달랐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세상과의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 박히고, 내가 ‘세상을 대하여’ 못 박혔다고 합니다. 여기서 못 박혔다는 말은 끝장났다는 뜻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인해서 세상은 자기에게 더 이상 발언권이 없으며, 자기도 세상을 향하여 발언권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는 더 이상 세상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도 됐습니다. 그는 세상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무슨 뜻인가요? 여기 시인이 되려는 청년이 있다고 합시다. 그는 어느 날 언어의 힘을 경험했습니다. 그는 세상을 언어로만 소통하는 길을 찾은 것입니다. 그에게 스펙을 쌓으라거나 돈을 벌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그는 세상의 요구로부터 자유로운 영혼의 사람이 된 것입니다.
바울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서 세상을 완전히 새롭게 볼 수 있었습니다. 세상의 요구로부터 해방된 것입니다. 육체의 모양이며 자랑인 토라와 할례로부터 자유로워졌습니다. 이제 할례는 받아도 그만, 받지 않아도 그만입니다. 할례파들에게는 절대적이었던, 세상에서 박해를 받지 않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선택해야만 했던 것들이 바울에게는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지금 할례 자체를 말하려는 게 아닙니다. 할례를 거론하지만 실제로는 새로운 존재가 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15절 말씀을 보십시오.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고후 5:17절에서 바울은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고 말합니다. 영적으로 철이 났다는 뜻입니다. 철부지 때는 부모님들에게 무언가를 요구하거나 무조건 의존하다가 철이 들어서는 인격적인 관계를 맺듯이 바울은 새로운 영적 시각으로 세상을 대하게 되었습니다. 이런 변화의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자리합니다. 그래서 그는 그것밖에는 자랑할 것이 없다고 말한 것입니다. 결국 갈라디아서에서 치열하게 전개된 할례에 대한 신학논쟁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문제로 돌아갑니다. 이것은 단순히 신학논쟁이 아닙니다. 신자들의 구체적인 삶에 연관되어 있습니다.
십자가 신앙이 무엇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는 무슨 방식으로도, 그 어떤 노력으로도 의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의를 이루지 못하면 구원도 없습니다. 생명의 완성도 없습니다. 의를 어떻게 이루는가 하는 문제가 바로 갈라디아서와 로마서의 핵심 주제입니다. 그런 의는 우리의 삶과 거리가 멀다고 생각하는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성서의 가르침은 공허한 게 절대 아닙니다. 우리 삶의 중심을 이야기합니다. 쉽게 생각해보세요. 지금 사람들이 애를 쓰고 추구하는 것이 모두 의입니다. 사람들의 인정을 받는 것입니다. 좋은 대학교에 들어가면 공부 잘했다는 인정을 받습니다. 좋은 직장에 들어가면 가족과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습니다. 모두 의로워지려는 노력입니다. 바울은 그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사람이 율법을 행함으로 의로워지지 않는다는 바울의 진술이 바로 그것입니다. 바울은 그런 방식으로 의로움을 얻을 수 있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헛된 것이라고까지 말했습니다. 여기서 율법을 세상에서 우리가 이뤄야 할 목표로 바꿔서 생각해보십시오. 기업 사장이나 대학교 총장이 목표라고 해보십시오. 이를 통해서 우리가 의를 얻을 수 있을까요? 거기서 구원과 생명을 얻을 수 있을까요? 여기 모인 분들 중에서 그렇게 생각하는 분은 없을 겁니다.
여기에 두 가지 문제가 도사리고 있습니다. 1) 사람은 율법을 완벽하게 행할 수 없습니다. 신앙생활도 완벽하게 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근본적으로 불가능합니다. 그래서 바울은 갈 6:13절에서 할례파를 향해서 할례를 받았으면서도 율법을 지키지 않는다고 말했습니다. 정확한 지적입니다. 2) 율법과 상관없이 사람은 그 중심이 죄에 기울어져 있습니다. 여러분은 모두 그런 경험이 있을 겁니다. 밤새도록 기도를 했는데, 다른 날 아침에 분노가 치밉니다. 교회 봉사를 헌신적으로 하면서도 시기심에 사로잡힙니다. 세상에서 남이 부러워할 정도로 행복한 생활 조건을 갖춘 사람도 그것 자체로 만족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끝없이 자기연민과 과시욕에 사로잡힙니다. 사람이 의를 이룰 수 없다는 증거들입니다. 바울은 가장 철저하게 율법적이고, 도덕적이며, 모범적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자신이 죄인의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습니다. 노력하면 할수록 자신이 의롭지 못하다는 사실을, 생명의 중심에 들어가지 못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뿐이었습니다.
바울은 전혀 다른 차원의 의를 말합니다. 하나님의 의가 그것입니다. 의는 오직 하나님에게만 가능하다는 겁니다.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십니다. 인간은 피조물입니다. 의는 창조주의 본성입니다. 생명의 주인이 하나님이듯이 의의 주인은 하나님입니다. 하나님의 의가 드러난 사건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입니다. 바울은 롬 3:19-31절에서 하나님의 의에 대해서 설명했습니다.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신 예수님의 십자가는 하나님이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화목제물입니다. 의로우신 하나님은 화목제물인 예수님을 믿는 사람을 의롭다고 인정하신다는 겁니다. 거의 똑같은 사실을 바울은 갈 2:11-21절에서 설명했습니다.
그래서 어쨌다는 걸까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하루 벌어서 하루 먹기 힘든 세상에서, 또는 너무 즐길 게 많아 정신없이 바쁜 세상에서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걸까요? 너무 먼 이야기인가요?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런 질문은 뒤로 미뤄두셔도 괜찮습니다.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의라는 사실을 더 깊이 생각해보십시오. 그 의가 우리를 어떻게 새롭게 하는지를 경험해 보십시오. 그때 여러분은 세상을 전혀 새로운 시각으로 보게 될 것입니다. 할례와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될 것입니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도 우리를 하나님의 사랑에서, 그의 생명에서, 그의 의에서 끊을 것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될 것입니다.(성령강림절 후 다섯째 주일, 7월4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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