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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호세아

호세아 정용섭 목사............... 조회 수 3670 추천 수 0 2010.08.16 23:0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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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호1:2-9 
설교자 : 정용섭 목사 
참고 : http://dabia.net/xe/407512 

emoticon

 

사람은 누구나 자식들에게 좋은 이름을 지어주고 싶어 합니다. 간혹 이상한 이름도 있기는 합니다만, 그건 실수입니다. 나중에 개명하기도 합니다. 호세아는 의도적으로 세 자식에게 이상한 이름을 붙였습니다. 첫째 아들의 이름은 이스르엘입니다.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일어난 곳입니다. 둘째는 딸입니다. 이름을 로루하마라고 했습니다. 그 뜻은 긍휼히 여김을 받지 못하는 자입니다. 셋째는 아들입니다. 이름을 로암미라고 했는데, 내 백성이 아니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은 크면서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에게 놀림을 받았을 것이고, 나중에 아버지를 크게 원망했을 겁니다. 도대체 호세아는 자녀들의 이름을 왜 이렇게 나쁘게 지었을까요?

    

자녀들의 이름만이 아니라 호세아의 결혼 자체가 해괴했습니다. 누구나 좋은 사람을 배우자로 선택하려고 합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전혀 그렇지 못했습니다. 하나님은 호세아에게 ‘음란한 여자’와 결혼하고 ‘음란한 자식들을’ 낳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에 따라서 호세아는 디블라임의 딸 고멜을 아내로 맞았습니다. 고멜은 이방 신전의 매춘부였다고 합니다. 고멜이 낳은 아이들이 모두 호세아를 아버지로 한다는 보장도 없습니다. 고멜이 여러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이들을 호세아가 받아들였다고 설명하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호세아의 결혼과 가정생활의 실체가 어땠는지를 지금 자세하게 알 수는 없습니다만, 정상적이지 않았던 것만은 분명합니다.

    

호세아의 결혼에 얽힌 이야기나 아이들 이름을 짓는 이야기도 이상하지만, 더 이상한 것은 그것을 하나님이 명령하셨으며, 호세아가 그 명령을 그대로 따랐다는 사실입니다. 하나님이 한 사람의 결혼에까지 간섭하신다는 말인가요? 더구나 불행한 결혼을 요구하시기도 하나요? 상식적으로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어떤 학자들은 이 이야기를 사실이 아니라 일종의 비유로 해석하기도 하지만 전체 맥락에서 볼 때 비유일 가능성은 없습니다. 호세아는 자신의 결혼 이야기를 반복해서 언급했습니다. 호 3:1-3절에는 좀더 자세하게 언급됩니다. 호세아는 은 열다섯 개와 보리 한 호멜 반을 주고 아내를 샀다고 합니다. 이 돈과 곡식은 단순히 지참금이 아니라 마치 인신매매를 위한 값과 비슷합니다. 매춘부를 아내로 받아들였다는 사실을 더 분명하게 설명한 것입니다. 호세아는 아내 될 사람에게 더 이상 바람을 피우지 말라고 다짐을 받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한다면 하나님이 호세아를 불행에 빠뜨리기로 작정하셨다는 걸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일부러 불행에 빠뜨리는 분이 아닙니다. 매춘부와 결혼하라고 직접 명령을 내릴 분이 아닙니다. 이것은 호세아의 신학적인 해석의 결과입니다. 호세아의 결혼 생활이 불행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그가 어떤 연유로 고멜과 결혼했는지는 잘 모릅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숨어 있을 겁니다. 호세아는 지식인이었습니다. 호세아서 문체가 그걸 증명합니다. 지식인이 매춘부와 결혼했습니다. 보기에 따라서 낭만적인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호세아는 아주 불행한 결혼생활이라는 자신의 운명을 하나님의 뜻에서 성찰하기 시작했습니다. 거기서 귀한 영적 통찰을 얻었습니다.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은 곧 하나님과 이스라엘의 관계와 비슷하다고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매춘부와의 결혼을 하나님의 명령으로 해석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난 뒤에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일은 흔하게 일어납니다. 호세아의 이런 영적 통찰이 그의 제자들과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전승되어서 오늘날 구약의 한 자리에 남게 된 것입니다.

 

 음란한 이스라엘

    

호세아가 자신의 불행한 결혼을 이스라엘의 역사와 연결해서 받아들이고, 심지어 고멜과는 달리 책임이 없는 자식들까지 끌어들인 이유와 근거가 무엇일까요? 이런 질문은 호세아가 어떤 상황에서 이런 설교를 했는지를 알아야만 이해가 됩니다. 그는 단순히 개인의 운명을 말하는 게 아닙니다. 이스라엘이라는 나라의 운명이 중요했습니다. 구약의 예언자들은 모두 민족의 운명을 바탕에 두고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신탁은 모두 공동체 전체와 연관되었습니다. 그들의 설교는 정치적이었다는 뜻입니다. 왕의 경제, 군사, 외교 정책에 대해서 시시비비를 따졌습니다. 그걸 전제하지 않으면 예언자들의 설교는 무의미합니다.

    

오늘 교회가 개인의 사적인 차원으로 떨어지고 있다는 것은 이런 예언자 정신을 놓치고 있다는 점에서 신앙의 위기입니다. 대개 교회의 설교는 거의 모두 사적인 영역에 머물러 있습니다. 기도해서 복 받고, 병 고침을 받고, 출세하고, 예수 잘 믿고 죽어서 천당 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세상의 정치 이야기는 그만하고 복음만 이야기 하라는 말들도 합니다. 큰 오해입니다. 예언자들만이 아니라 예수님의 하나님 나라도 정치적인 영역을 배제하고는 이해될 수 없습니다. 생각해보십시오. 한 시간 일한 사람이나 열 시간 일한 사람에게 똑같이 한 데나리온을 주었다는 포도원 주인의 비유는 경제정의에 대한 언급 없이 이해할 수 없습니다. 호세아가 처한 정치적 상황은 어땠을까요?

    

호세아는 기원전 750-725년에 북이스라엘에서 활동했습니다. 당시 북이스라엘은 국내외적으로 아주 어려운 처지에 빠져있었습니다. 아시리아 제국에게 조공을 바치면서 나라를 겨우 지탱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상황은 남유대도 마찬가지입니다. 남유대는 아시리아에게 고분고분했지만 북이스라엘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북이스라엘은 남유대에 비해서 자존심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들은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윗 왕조의 정통성은 남유대에 있었습니다. 북이스라엘은 이런 점에서 늘 열등감을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런 약점을 가리기 위해서라도 아시리아 같은 제국에 크게 반발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은 시리아와 동맹을 맺어 아시리아에 대항하기도 했습니다. 이집트의 도움으로 아시리아의 식민 지배를 벗어날 수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결국 남쪽으로는 형제 국가인 남유대의 압박을 받았고, 북동쪽으로는 아시리아의 직접적인 공격을 받다가 기원전 722년에 북이스라엘은 멸망당했습니다. 우리나라 고대 삼국시대의 고구려의 운명과 비슷합니다. 멸망의 수렁으로 빠져드는 조국 운명을 예감한 호세아는 조국 북이스라엘이 왜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는지를 사람들에게 외쳤습니다. 그 내용이 바로 호세아서입니다.

    

호세아가 본 이스라엘 멸망의 원인은 죄입니다. “음행과 묵은 포도주와 새 포도주가 마음을 빼앗느라.”(4:11) 육체적인 욕망에 전적으로 예속되어 있다는 겁니다. 그것을 위해서라면 못할 게 없다는 식입니다. 오늘 한국 사회의 한 단면을 보는 것 같습니다. 사람이 손으로 만든 송아지를 신으로 섬깁니다.(8:6) 우상숭배가 그들에게서 일상이 되었습니다. 마치 현대인들이 돈을 섬기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는 상인이라 손에 거짓 저울을 가지고 속이기를 좋아하는도다.”(12:7) 합법을 가장한 채 남을 속이는 행위는 그때나 오늘이나 똑같습니다. 호 4-14장은 거의 이런 내용으로 채워져 있습니다.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으니 회개하라고 말합니다. 호세아는 이스라엘의 죄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자신의 불행한 결혼생활과 연결해서 설명했습니다. 이스라엘은 자기 아내 고멜처럼 음란하다는 것입니다. 음란하다는 것은 단순히 성적인 문란만을 가리키는 게 아닙니다. 삶의 총체적인 부패를 가리킵니다. 그 사실을 더 극적으로 전달하기 위해서 자식들의 이름을 저주스러운 내용으로 지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역사 속에서

    

세 명 자식의 이름이 모두 하나님의 심판을 가리키는데, 특히 첫째 아들의 이름은 하나님의 심판을 더 구체적이고 노골적으로 표현합니다. 호 1:4절은 다음과 같습니다. “여호와께서 호세아에게 이르시되 그의 이름을 이스르엘이라 하라. 조금 후에 내가 이스르엘의 피를 예후의 집에 갚으며 이스라엘 족속의 나라를 폐할 것임이니라.” 이스르엘은 사마리아에 북쪽에 자리하고 있는 도시로, 이스르엘 북동쪽에 갈릴리 호수가 있습니다. 그 뜻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다.”입니다. 뜻은 좋습니다만 거기에 얽힌 역사는 잔인합니다. 이 역사에는 호세아가 직접 거론한 예후가 중심인물입니다. 예후는 무력으로 북이스라엘의 아합 왕조를 붕괴시키고 왕이 된 사람입니다. 아합 왕조는 이세벨 왕비의 우상숭배로 유명합니다. 엘리야와 엘리사는 아합 왕조와 대립했습니다. 엘리사는 예후에게 기름을 부어 혁명을 일으키게 했습니다. 예후는 아합 왕조의 본거지인 이스르엘에서 아합의 아들인 요람 왕을 죽이고, 그 이외에 아합의 아들 70명, 아하시아 왕의 형제들 42명까지 모두 죽였습니다. 물론 이세벨도 죽이고, 바알 선지자들도 모두 죽였습니다. 예후의 무력 혁명에는 엘리야와 엘리사의 역할이 있었습니다. 엘리야와 엘리사가 볼 때 아합 왕조는 바알에 완전히 빠져 있었기 때문에 심판이 임해야만 했습니다. 예후는 엘리야와 엘리사가 원하는 대로 이스라엘에서 바알 숭배자들을 모두 제거했습니다. 이런 점에서만 본다면 예후는 영웅입니다. 그런데 호세아는 예후 왕조를 비판했습니다. 목적만 좋다면 방법은 아무리 잔인해도 괜찮다는 예후의 혁명을 비판한 것입니다.

    

위에서 복잡하게 얽혀있는 이스라엘 역사의 한 토막을 설명했습니다. 이런 사건들은 동서양, 고금을 막론하고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것들입니다. 호세아는 산 속에 깊이 들어가거나, 성전의 기도처에 숨어 있던 사람이 아닙니다. 치열하고 잔인한 민족의 역사 한 중심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했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신앙에서 대선배인 엘리야나 엘리사와 다른 입장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이런 설교는 위험합니다. 사실 하나님의 말씀을 전한다는 것은 늘 위험합니다. 청중들을 새로운 영성의 세계로 안내한다는 것도 위험한 일이고, 무감각하게 만드는 것도 위험한 일입니다. 한편으로는 사람의 마음을 다치게 할 수도 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하나님의 뜻을 호도할 수도 있습니다. 이걸 한 개인이 감당하기에는 너무 무겁습니다. 당시 호세아의 심정이 어땠을지 상상이 갑니다. 호세아도 사람인데, 자신의 설교를 불안하게 생각하지 않았을 까닭이 없습니다. 복잡하게 엉켜 있는 이스라엘의 역사에서 무엇이 옳은 것인지, 무엇인 하나님의 뜻인지를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주변에서 왜 그렇게 나대냐고 비판하는 사람들도 많았을 겁니다. 좋은 게 좋다는 식으로 설교하면 마음을 편합니다. 어려운 시절에 기도합시다라거나, 하나님의 말씀으로 돌아가자고 하면 간단합니다. 누구에게 욕을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러나 예언자는 그렇게 설교할 수 없었습니다. 과감하게 옳고 그름을 선포해야만 했습니다. 호세아는 오체투지의 심정으로 설교했습니다. 시험받는 사람이 있었겠지만 그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음란한 여자라고 외쳤습니다.

    

호세아는 왜 그렇게 과격한가요? 어떻게 보면 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고멜이라는 악처를 만나서 마음이 삐뚤어진 걸까요? 아닙니다. 이스라엘을 향한 그의 비판은 비판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사랑입니다. 호세아는 우상을 섬기고 탐욕에 젖어 있는 이스라엘 백성을 하나님이 사랑한다는 사실을 전하려고 한 것입니다.(호 3:1) 호세아가 음란한 여자를 사랑했듯이 하나님도 이스라엘을 사랑하신다고 말입니다. 이 하나님의 사랑은 곧 이스라엘 민족을 향한 호세아의 사랑이기도 합니다. 그는 모든 영혼을 기울여 이스라엘 백성을 사랑했습니다. 그 마음을 담아 음란한 여자와 결혼한 것이라고 말했습니다. 음란한 이스라엘이 회개했을까요? 음란한 고멜이 회개했을까요? 사랑은 그것에 개의치 않습니다.

    

우리는 호세아처럼 살지 못합니다. 모두 그런 예언자가 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호세아의 영성은 우리가 외면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의 영혼은 이스라엘의 죄로 인해서 평안하지 못합니다. 가슴이 터질 지경입니다. 민족의 미래가 너무 암담했습니다. 더 이상 이런 상태가 계속되면 하나님의 심판이 임할 것 같습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을 호소합니다. “너의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인애와 정의를 지키며 항상 너희 하나님을 바랄지니라.”(호 12:6) 자신의 삶을 학대하면서까지 호세아는 이스라엘을 비판하고, 호소하고, 그런 방식으로 사랑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영혼은 무엇을 갈망하고 있습니까? 인애와 정의를 갈망하고 있나요? 하나님을 바라고 있나요? 거꾸로 ‘나’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한 것은 아닌가요? 여러분, ‘나’에 대한 염려와 걱정이 곧 음란이며, 우상숭배입니다. 그것은 본능적입니다. 그런 염려와 걱정에서 완전히 벗어나기 힘들겠지만 그런 시간을 가능한 줄여나가십시오. 거기서는 결코 하나님의 구원을 경험할 수 없습니다. 오히려 자기 연민이라는 수렁으로 더 깊이 빠질 뿐입니다. 방향을 바꾸어 예수 그리스도가 전하신 하나님 나라에 여러분의 영혼을 온전히 맡겨보십시오. 음란한 우리의 영혼을 사랑의 하나님이 지켜주실 겁니다. 아멘.(성령강림절 후 아홉째 주일, 7월2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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