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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5:37-4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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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정원 목사 |
참고 : | 참사랑교회 http://charmjoun.net |
2006·10·15 참사랑교회 주일 설교
헬렌 켈러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를 극복하고 하바드 대학을 졸업했으며, 미국의 위대한 사회사업사가 되었습니다. 헬렌 켈러가 어느 날 방금 숲을 산책하고 돌아온 친구에게 숲에서 무엇을 보았느냐고 물었습니다. 그 친구는 별로 본 것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헬렌 켈러는 친구의 말을 이해할 수가 없었습니다. 수많은 것들이 가득한 숲속을 한참 동안이나 산책했는데 어떻게 아무것도 보지 못할 수가 있단 말입니까? 그러면서 헬렌 켈러는 죽기 전에 사흘 동안만 눈을 뜨고 세상을 보기를 원한다고 말했습니다. 첫째 날은 그녀의 은인인 설리반 선생님을 찾아가 그녀의 눈을 볼 것이며, 그녀의 몸을 바라보며 그 모습을 마음 속 깊이 간직하겠다고 말했습니다. 둘째 날은 낮에는 박물관과 미술관을 둘러보고 밤에는 영화관이나 극장에 가고 싶으며, 영롱하게 빛나는 밤하늘의 별을 보고 싶다고 했습니다. 셋째 날에는 일찍 큰 길로 나가 출근하는 사람들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싶고, 눈을 감아야 할 순간에는 이 사흘만이라도 눈을 뜨게 해주신 하나님께 감사 기도를 드리고 영원히 어둠의 세계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습니다.
헬렌 켈러의 친구는 한참동안이나 숲속을 산책하고서도 왜 본 것이 없었을까요? 숲속에는 수많은 것들이 있었을 텐데 말입니다. 눈을 가지고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를 가지고 있어도 듣지를 못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 마음속에 무엇인가 다른 것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상태에서는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를 못하는 현상이 일어나게 됩니다.
이러한 현상은 우리의 신앙생활에서도 일어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만난다는 것, 그분의 음성을 듣는다는 것, 하나님의 영광을 본다는 것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것은 손에 잡히지도 않고 눈에 보이지도 않는 막연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이 시간 우리 곁에 와 계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말씀하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가운데서 쉴 새 없이 일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왜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할까요? 왜 하나님의 손길을 느낄 수 없을까요? 그것은 우리 마음속에 이미 다른 것들이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에게 그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듣지 못했으며, 그분을 보지도 못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의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거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셨습니다. 이 문제는 오늘 우리에게도 대단히 중요하고 심각한 문제입니다. 이 말씀을 통해서 주님을 인격적으로 만나며, 그분의 음성을 들으며, 그분의 영광을 보는 것에 대해서 큰 도전을 받게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보지 못하고,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는 이유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대해서 잘 알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늘 가까이 하며 살았습니다. 그들의 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율법을 배우고 암송하며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들은 그 말씀을 통하여 아무것도 보지 못했고, 아무것도 듣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마침내 그들이 가르치고 배우며 지키는 율법은 하나님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지도 못했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지도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요?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것들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러한 현상은 오늘 우리에게서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은 교회에 오래 다니고 신앙생활을 오래 해온 성도일수록 믿음이 좋고 하나님의 뜻도 더 잘 알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꼭 그렇지만은 않습니다. 교회에 오래 다니고, 설교를 많이 들었으며, 성경도 많이 읽은 사람이 이제 막 새로 믿기 시작한 사람보다 못한 경우가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일까요? 그들의 마음속에 하나님과 그분의 말씀이 아닌 다른 것들이 꽉 차 있기 때문입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예배를 드리면서 하나님을 만나고 있습니까? 말씀을 통해서 당신에게 들려주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있습니까? 예배와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의 뜻을 확실히 깨닫고 있습니까? 하나님께서 주시는 확신을 가슴 뜨겁게 받고 있습니까? 당신 마음속 깊은 곳에 있는 죄와 상처가 드러나고 고침을 받고 있습니까? 예배를 통해서 그런 일들을 경험하지 못하고 있다면 한참 동안이나 숲속을 산책하고도 아무것도 본 것이 없다고 한 사람과 다를 것이 없습니다. 숲속에는 많은 동식물들이 살고 있습니다. 새들의 노래 소리와 바람 소리가 들렸을 것이고, 숲속의 신선하고 향기로운 냄새가 있었을 것이며, 크고 작은 수많은 나무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아무것도 보지 못한 이유가 무엇일까요? 마음속에 뭔가 다른 것이 가득 차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예배시간에 우리 가운데 임재해 계십니다. 성령께서 우리의 마음을 감화하시며 역사하고 계십니다. 예수님께서 성경 말씀을 통하여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시며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우리는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합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우리 마음속에 세상일들과 육신적인 생각이 가득 차 있기 때문입니다. 이런 상태로는 아무리 오랫동안 신앙생활을 한다 해도, 아무리 설교를 많이 들어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할까요?
말씀이 마음속에 거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유대인들은 구약성경에 정통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의 가장 큰 관심사와 일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율법을 연구하여 가르치고 배우며 암송하고 지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하나님의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과 인격적으로 만나는 일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올바르게 깨닫는 일도 없었습니다. 그들은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알아보지도 못했고 믿지도 않았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 이유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를 위하여 증거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 음성을 듣지 못하였고 그 형용을 보지 못하였으며 그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니 이는 그의 보내신 자를 믿지 아니함이니라”(37-38절)
유대인들은 매일 성경을 읽었고, 설교도 자주 들었으나 그들의 마음속에는 하나님의 말씀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매일 읽고 듣는 말씀이 그들의 마음속에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이미 다른 것이 가득 들어 있었습니다. 그것은 말씀이 아니었고, 하나님께 대한 사랑도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돈과 명예였습니다. 그들은 돈을 사랑했으며, 사람들에게 존경 받는 것을 좋아했습니다. 그것이 그들의 마음을 채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매일 말씀을 읽고 설교를 들으면서도 하나님을 만날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오늘 당신은 어떻습니까? 설교를 들을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들려주시는 음성이 들립니까? 말씀을 읽고 묵상할 때 하나님께서 나에게 하시는 말씀이 들립니까? 만일 우리가 진정으로 하나님을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삶을 살기를 갈망한다면, 설교를 들을 때나 말씀을 묵상할 때 하나님의 음성이 들리기 시작할 것입니다. 당신의 가장 큰 관심사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라면, 말씀을 대할 때마다 하나님의 뜻이 분명하게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듣고 묵상한 말씀이 당신의 마음속에 늘 남아 있게 될 때, 당신은 매일 순간마다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하나님과 동행하는 생활입니다.
성경을 상고하라.
우리가 성경을 대하는 태도는 너무 피상적입니다. 성경을 깊이 묵상하는 일을 매우 싫어합니다. 그래서 큐티를 그렇게 어려워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유대인들이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알고 성경을 상고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에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39절) 유대인들은 성경을 열심히 배우고 읽고 지켰습니다. 그러한 유대인들에게 예수님께서는 그 성경이 바로 예수님에 대하여 증거하고 있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도 성경을 상고한다는 유대인들은 그 성경에서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구약의 예언대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했고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대했던 것입니다.
성경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서 예수님을 말씀으로 소개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요1:1) 그리스도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성경을 상고하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마음을 다하여 설교를 들으면 예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말씀으로 우리를 찾아오시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상고하되 그 말씀을 통해서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십시오. 유대인들은 성경을 상고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성경을 인격적인 하나님의 말씀으로 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을 지식적으로 잘 알았고, 율법의 조항을 지키는 데 열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피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이 열심히 배우며 지키는 율법은 예수님과 전혀 상관없는 것이 되고 말았습니다. 그 말씀의 주인공이신 예수님이 빠져버리고, 자신들의 만족과 자기 의에 도취되는 결과를 낳고 말았습니다. 그들은 성경이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지, 거기에 하나님의 뜻이 어떻게 나타나 있는지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되, 그 말씀을 통하여 주님의 음성을 들으며, 나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하십시오. 성령의 감화와 도우심을 간구하십시오. 말씀을 묵상할 때 차분하고 진지한 자세를 가지십시오. 5분이나 10분 동안 한 번 훑어보는 식으로 하지 마십시오. 많은 성도들이 성경을 차분하게 묵상하지 못합니다. 그것은 훈련이 되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바쁘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말씀을 묵상할 수 없고 기도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게 사는 것보다 더 어리석고 불행한 일은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일에 가장 우선순위를 두고 사십시오. 그것이 절대로 불가능하다면 생활을 바꾸어야 합니다.
바쁘다는 것이 현대 그리스도인들의 비극입니다. 현대인들, 특히 도시인들은 모두 바쁩니다. 목사들도 얼마나 바쁜지 모릅니다. 그러나 말씀을 묵상하며 기도하는 가운데 주님과 깊이 교제할 수 없을 정도로 바쁘다면 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저는 바쁜 목사가 되지 않으려고 애를 쓰고 있습니다. 오라고 하는 곳엘 다 쫓아다니다보면 바빠질 수밖에 없습니다. 바쁘면 그 사람의 마음속에 세상일들과 복잡한 생각들이 가득 차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게 되어버립니다. 목사가 그렇게 되어서야 되겠습니까? 그런데 이것은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너무 바쁘면 교회에 와서 예배를 드리고 있어도 도저히 하나님께 집중이 되지 않습니다. 설교를 들어도 나에게 주시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 수 없습니다. 하물며 혼자서 스스로 말씀을 깊이 묵상하는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저는 되도록 아침에 큐티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고 있습니다. 새벽기도를 마친 후 말씀을 묵상하면 집중이 잘 됩니다. 그런데 너무 피곤하거나 바빠서 아침에 큐티를 하지 못할 때가 있습니다. 그리고 오후나 밤에 와서 큐티를 하려고 하면 굉장히 힘이 듭니다. 집중이 잘 되지 않고 시간도 많이 걸립니다. 마음속에 다른 것이 많이 차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속에 다른 것이 가득 들어 있으면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마음을 비우십시오. 다른 것은 생각하지 마십시오. 오직 하나님만 바라보십시오. 하나님께서 주신 모든 은혜를 기억하며 뜨겁게 감사하십시오.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진심으로 고백하십시오. 하나님만 바라보며 예배를 드리면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예배 시간에 늦으면 하나님께 집중하는 데 지장을 받게 됩니다. 그러므로 예배를 위해 미리 잘 준비하고 좀 더 일찍 나와야 합니다. 말씀을 묵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께 집중할 수 있도록 마음이 준비되어야 합니다.
말씀을 깊이 묵상하면서 그 말씀 속으로 들어가도록 하십시오. 하나님께서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라고 물으시는 말씀을 묵상하고 있다면, 하나님께서 지금 나에게 그렇게 물으시는 것으로 생각하십시오. 엘리사가 그의 사환의 눈을 열어주시라고 기도하자, 그 사환은 불말과 불병거가 산에 가득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이 말씀을 묵상하고 있다면 나의 눈도 그렇게 열어주시기를 간절하게 사모하면서 묵상하십시오. 그리고 오늘 내가 눈을 떠서 보아야할 것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십시오. 이렇게 하는 것이 말씀 속으로 들어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붙들고 오늘 나에게 주어진 문제들을 감당하면서 살아가십시오. 그것을 가리켜서 적용이라고 부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 인도하심을 받게 됩니다. 주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나아가라.
유대인들은 성경을 피상적으로 대했기 때문에 거기서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아들을 세상에 보내시기 위해서, 구약에 그 아들에 대해서 미리 말씀하심으로 당신의 백성들을 준비시키셨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께서 그 아들을 보내셨을 때 전혀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아예 처음부터 거절하고 적대시했습니다. 자기들의 이익과 기득권을 위협하는 것은 그 어떤 것도 용납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성자 하나님께서 직접 오셔서 그들을 책망하셨는데도 전혀 듣지 않고 오히려 대적했던 것입니다. 그 모든 원인은 그들이 성경에서 주님을 만나지 못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결국 그들은 하나님께서 보내신 아들을 믿지 않았고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습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예수님께서 계실 자리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주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너희가 영생을 얻기 위하여 내게 오기를 원하지 아니하는도다”(40절) 성경을 열심히 가르치고 배우며 지킨다는 사람들이 그 성경의 주인공이신 예수님께 오기를 거절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것은 비단 유대인들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런 심각한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을 묵상하고 깨달았다고 해도 그 말씀에 순종하지 않으면 주님을 제대로 믿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릅니다. ‘주님’이라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그분이 나의 주인이시라는 뜻입니다. 나는 그분의 종이요 그분의 소유라는 뜻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을 주님이라고 부르는 우리는 주님의 말씀에 철저히 순종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우리가 성경을 묵상하고 깨달았다 해도 순종하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을 제대로 믿지 않는 것이며, 그 때문에 우리는 주님을 만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마치 성경을 상고한다고 하면서 예수님께로 오지 않은 유대인들과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어느 집사님이 성경을 읽다가 보이는 형제를 사랑하지 않는 자기 어찌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사랑할 수 있겠느냐는 말씀에 녹아져서 형제를 용서하고 다시 사랑하기로 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습니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예수님을 올바르게 믿는 것입니다. 이렇게 순종하는 성도는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말씀을 이렇게 깨닫고 순종해나가면 됩니다. 이런 일이 우리에게 자주 일어나야 합니다. 일 년에 한 번 정도 이런 일이 있어서는 안 되고, 매일 이런 경험이 있어야 합니다.
주님 앞에 나올 때는 세상에 붙들린 마음을 다 내려놓으십시오. 말씀을 묵상할 때는 복잡한 생각을 다 정리하고 내려놓으십시오. 오직 성령님을 의지하면서 말씀에 집중하십시오. 주님 만나기를 사모하면서 말씀 속으로 들어가십시오. 대충 넘어가지 마십시오. 고민과 씨름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그렇게 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만나고 하나님과 동행하는 삶을 살아갔습니다. 말씀 속에서 주님 만나며, 주님의 음성을 듣는 복된 성도가 되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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