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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께 인정받는 신앙인

학개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738 추천 수 0 2010.08.21 21:47:49
.........
성경본문 : 학2:20-23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성남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오늘은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주시는 네 번째 설교입니다.
네 번째 설교의 특징은 무엇이겠습니까? 설교가 아주 짧다는 것입니다. 4절 밖에 되지 않습니다. 교회를 오래 다니신 분 중에는 설교와 기도는 짧으면 짧을수록 좋다는 지론을 가지고 계신 분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교회에 매주 예배를 드리고 올 때마다 설교가 조금 짧았으면 하고 아쉬워하는 이비인후과 의사 장로님이 계셨답니다. 독실한 신자로 소문이 나 많은 목사님들이 환자로 찾아갔답니다. 그 날도 두 분의 목사님이 연이어 병원을 찾아서 진료를 받았답니다. 두 목사님 모두 성대를 과다하게 사용하셔서 성대에 무리가 와서 치료받으러 온 것이었답니다. 첫 번째 목사님에게 의사장로님이 "목사님 성대에 무리를 주지 않도록 설교를 하실 때 목소리를 낮추고 말씀하시고, 찬송가는 가급적 부르지 마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였답니다.
똑같은 증상을 가지고 있는 다음 목사님에게 의사 장로님이 말했답니다.“목사님 성대에 무리를 주지 않도록 설교 시간을 대폭 줄이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찬송가도 짧은 것으로 부르시고 기도도 짧게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진료가 끝난 후 옆에서 이를 지켜본 간호사가 의사 장로님에게 물었답니다. “아니 제가 볼 때 증세가 비슷한 것 같은데, 처방은 다르시네요.”의사 장로님이 웃으며 대답했답니다.“두 번째 목사님은 우리 교회 목사님이거든.”

오늘 학개 선지자의 네 번째 설교는 설교가 짧다는데 만 특징이 있는 것은 아닙니다. 쉽게 발견할 수 있는 또 다른 특징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이겠습니까? 설교의 대상자가 스룹바벨 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한 사람 놓고 설교한 것입니다.
학개서는 네 편의 설교로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이 말씀을 받는 대상으로 보면 조금 차이가 있습니다. 첫 번째 설교를 받는 대상은 유다 총독 스룹바벨과 여호사닥의 아들 대제사장 여호수아입니다.(1:12) 두 번째 설교는 2장 2절에 보면 총독 스룹바벨과 대제사장 여호수아 그리고 남은 백성입니다. 세 번째 설교는 2장 11절에 의하면 제사장입니다. 마지막 설교의 대상은 21절을 보십시오. 유다 총독 스룹바벨 한 사람입니다.
또 하나의 특징이 있다면 무엇이겠습니까? 짧은 설교지만 이해하기가 어렵다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께서는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마지막 주시는 말씀을 통하여 오늘 이 시대에 말씀을 통해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을 만나시길 바랍니다. 하나님의 임재를 체험하며 이 시간 하나님께서 우리 각자에게 주시는 음성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들으시길 바랍니다.

1. 우리는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받아야 합니다./ 내 종 스룹바벨
먼저 하나님께서 스룹바벨 한 사람을 대상으로 말씀을 주시면서 스룹바벨을 어떻게 부르고 있습니까? 23절을 보십시오. 내 종이라는 것입니다. 내 종이라는 말은 하나님의 일꾼으로 세움받은 사람에게 붙여지는 매우 명예스러운 호칭(창26:24; 출32:13 수1:7 왕상11:13)입니다. 단지 유다의 총독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고레스로부터 유다 총독으로 임명되었지만 단순한 정치 지도자가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야 할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특별히 불러 택한 자(사41:8, 42:1, 44:1)라는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이 시간 나에게 나타나 개별적으로 우리 이름을 부를 때 어떻게 부르겠습니까? “내 종 하람아”라고 부르시겠습니까? 아니면 슬픈 눈물을 흘리시면서 “권력의 종 김집사야” “돈의 종 이집사야” “쾌락의 종 박집사야.” “술의 종 오집사야” “중독의 종 권집사야”라고 부르겠습니까? 당시 스룹바벨은 총독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그를 총독으로 부르지 않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 “내 종”이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세상의 정치 지도자이지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의 일을 하는 하나님의 종이라는 말씀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와 성전을 재건하는 중심에서 쓰임받고 있는 스룹바벨을 향하여 하나님은 단순한 총독이 아니라 “내 종”이라고 인정해 주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내 종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이 얼마나 감격적이고 위로를 주며 용기를 주었겠습니까? 스룹바벨은 한 때 실패한 사람입니다. 16년 동안 성전 재건을 중단한 무능한 지도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힘있게 추진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외적들이 반대 앞에 무릎을 꿇었습니다. 백성들의 비협조를 극복할 만한 추진력과 설득력이 없었습니다. 자기 집 짖고 치장하기에 바쁜 백성들을 설득할 만한 권위가 없었습니다. 3차 귀환한 느헤미야는 모든 반대를 극복하고 성벽 재건을 잘 수행했는데 첫 번 귀환한 스룹바벨은 16년 동안 성전 재건을 하지 못하고 무기력한 상태에서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성벽 재건을 시작하여 3개월이 된 때 9월 24일에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책망하는 것이 아니라 “내 종”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책망하기보다는 오히려 “내 종”이라고 인정해 주시고 있습니다.
오늘 이 시간도 우리에게 다가 오시는 하나님은 이런 하나님이신 줄 믿습니다.
우리 하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네 하나님 여호와는 자비하신 하나님이심이라 그가 너를 버리지 아니하시며 너를 멸하지 아니하시며 네 열조에게 맹세하신 언약을 잊지 아니하시리라 (신 4:31)”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롬 8:35)...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롬 8:39)”
사탄이 우리를 잠깐 넘어뜨릴 수 있고, 우리가 잠시 곁길로 가고 욕심의 종이되고 물질의 종이 되고 쾌락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에서 멀어질 수 있지만 결국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님의 종으로 사용해 주실 줄 믿습니다. 사람은 배신하고 정죄하고 떠나지만 우리 하나님은 우리를 버리지 않으십니다. “하나님 한번도 나를 실망 시킨적 없으시고 언제나 공평과 은혜로 나를 지키셨네 오 신실 하신주 오 신실 하신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지나온 모든 세월들 돌아 보아도 그 어느것 하나 주의 손길 안미친것 전혀없네 오 신실 하신주 오 신실 하신주 내 너를 떠나지도 않으리라 내 너를 버리지도 않으리라 약속 하셨던 주님 그 약속을 지키사 이후로도 영원토록 나를 지키시리라 확신하네 ”

우리 하나님은 거짓말하고 실패한 아브라함 버리지 않았습니다. 애굽으로 내려가 자신의 아내를 누이라고 속입니다. 약속의 아들을 기다리지 못하고 첩을 얻어 아이를 낳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를 버리지 않았습니다. 내 종이라고 인정해 주고 약속의 아들을 줄 것을 거듭 말씀해 주면서 용기를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살인하고 실패한 모세 버리지 않았습니다. 살인하고 도망자가 되었지만 그를 “내 종”이라고 인정해 주고 권능을 주어 민족 지도자로 삼아 주었습니다. 하나님은 간음하고 실패한 다윗 버리지 않았습니다. 간음자였지만 회개한 그를 “내 종”이라 인정해 주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사용하였습니다.
오늘 이 시간에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받은 여러분과 저를 하나님은 오늘도 “내 종”이라 인정해 주십니다. 이 시간 “내 종 00아”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시기 바랍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어떤 일을 하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드리는 하나님의 종들입니다. 하나님과는 상관없는 사탄의 종, 돈의 종, 권력의 종, 쾌락의 종, 욕심의 종, 시기의 종, 질투의 종, 증오의 종이 아닙니다.

2. 우리는 그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세움받아야 합니다./내가 너를 취하고
한 때 실패했던 스룹바벨을 하나님의 종으로 인정하신 하나님께서 다시 스룹바벨에게 하신 말씀은 무엇입니까? 그 날에 내가 너를 취하겠다고 말씀합니다. 버리지 않고 선택하고 소유하고 세우겠다는 말씀입니다. 개혁 개정판에는 그 날이 무슨 날입니까? 현재의 날이 아니라 미래의 어느 날입니다. 21절을 보십시오. “하늘과 땅이 진동하는 날”입니다. 그 때 어떤 일이 벌어집니까? 22절을 보십시오. 여러 왕국들의 보좌를 엎는 날입니다. 하나님의 권세에 대항하는 세상 나라의 왕권들(단7:27)들을 남김없이 엎는 날입니다. 열국의 세력을 멸하는 날입니다. 병거들과 그 탄 자들이 엎드러 질 때입니다. 병거는 당시 가장 강력한 전쟁 무기이며 군사력의 상징입니다. 하나님께서 열방의 병거를 뒤엎으신다는 것은 그들의 권세를 완전히 깨뜨리신다는 뜻입니다. 소돔과 고모라처럼 멸하신다는 말씀입니다(창19:29). 동무들의 칼에 엎드러질 것이라는 말입니다. 기드온과 싸우던 미디안(삿7:22) 사람처럼 사울왕이 쳐부순 블레셋군대(삼상14:20)처럼, 여호사밧 왕 때에 유다를 공격하던 암몬과 모압 연합군(대하20:23) 처럼 자중지란을 일으켜 서로를 살육함으로써 멸망당할 것을 말씀합니다(슥14:13). 결국 그날은 열방의 모든 권세를 엎드러지는 날, 심판의 날입니다. 권력자도 권력의 추종자도 다 엎드러집니다. 엎드러지고 엎드러집니다. 그런데 다 엎드러지는데 스룹바벨만 세워주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개혁 개정판은 “내가 너를 세우고”라고 번역했습니다. 확연히 대비되는 번역입니다. 세상의 권력이 다 엎드러지는데 스룹바벨만은 세워주시겠다는 것입니다. 지금 힘겨운 가운데서도 학개 선지자의 설교를 들으며 백성들을 설득하고 힘을 모아 성전 재건을 감행하고 있는 스룹바벨은 붙들어 주고 세워주겠다는 것입니다.
보석은 땅 속에 갇혀있어도 언젠가 밖으로 드러나면 빛을 나타냅니다. 조그마한 불빛이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저녁이 되면 밝히 보이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들이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데는 세상의 힘이 너무나 거대합니다. 성전을 짖는 것은 참으로 초라하게 보일 수 있습니다. 어쩌면 백성들이 한 것처럼 내 집을 잘 짖고 치장하며 사는 것이 좋게 보일 수 있습니다. 성전을 재건하는 것이 시간 낭비이고 돈 낭비같이 보일 수 있습니다. 언제든지 권력자들이 처들어오면 금방 무너질 것입니다. 차라리 그 돈과 시간이면 한 번 사는 세상 세상에서 멋지게 살고 싶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바벨론 나라는 세상에서 살아졌습니다. 메데 파사가 영원할 것같았습니다. 그 나라도 세상에서 살아질 날이 온다는 것입니다. 세상의 화려한 문명 앞에 성전은 초라한 것같지만 그 화려한 문명이 살아질 때가 온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종으로 능력이 없고, 힘이 없고, 무능한 것같이 보이고 때로는 초라하게 보이지만 하나님의 일을 하는 스룹바벨 하나님은 결코 외면하시지 않고 세워주시겠다는 말씀입니다. 오늘 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을 위해 주님의 종으로 사는 사람들 언젠가는 세워주시는 날이 옵니다. 주를 위해 헌신하며 흘리는 우리의 눈물 다 씻어 주실 때가 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이는 보좌 가운데 계신 어린 양이 저희의 목자가 되사 생명수 샘으로 인도하시고 하나님께서 저희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 주실 것임이러라 (계 7:17)”라고 했습니다.
언젠가는 끝이 옵니다. 마지막 하나님 앞에 설 때가 옵니다. 성경은 말씀합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히 9:27)” 인생의 모든 것이 밝히 드러날 때가 옵니다. 하나님의 일을 초라하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주님의 이름으로 소자에게 물 한 그릇 대접한 것도 상을 잃지 않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다섯달란트 받은 사람, 두 달란트 받은 사람,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아무렇게 살아도 되는 것이 아니라 언젠가는 평가를 받을 때가 옵니다. 세상의 평가가 초라할 때가 옵니다. 그날에 "저희는 영벌에, 의인들은 영생에 들어가리라 하시니라 (마 25:46)"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닙니다. 새로운 시작입니다. 그 날에 하나님으로부터 “잘했다 충성된 종”이라는 인정받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아직도 그 날에 대한 확신이 없으신 분 계십니까? 믿음의 사람에게는 그 날이 두려운 날이 아닙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에게 그 날은 파멸의 날입니다. 1883년 3월 14일 칼 마르크스가 사망하던 날, 그의 하녀가 다가와서 "저에게 당신의 마지막 말을 남기시면, 제가 기록해 두겠습니다"라고 말하자 마르크스는 "시끄러워, 나가 !" 라고 소리치며 죽어갔다고 합니다. 나폴레옹은 "나는 불행했다. 프랑스, 군대, 조세핀 ...." 이라며 초라하게 숨졌다고 합니다. 그렇게도 자유를 부르짖던 싸르트르도 1980년 3월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서 죽음의 불안과 공포 때문에 병명도 묻지 않고 한달 동안 발악을 하며 찾아온 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다가 죽어 갔습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 땅의 삶으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하며 산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죽음에도 소망이 있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씻기시매 다시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계21:4)라는 말씀을 믿고 천국을 사모하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요한 웨슬레는 88세로 죽음에 임했을 때 "모든 것 중에 가장 좋은 것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사실이다"라고 말하며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초대교회 성도들은 죽은 이의 묘비에 다음과 같은 비문을 새겼습니다. "이 사람은 죽은 것이 아니라 이제야말로 새로운 생명에 들어간 것이다." 과학자 톰슨은 임종시에 제자들이 묻기를 "선생님께서 발견하신 것 중 최대의 발견은 무엇이었습니까?" 라고 하자 "나의 생애에서 가장 큰 발견은 예수 그리스도를 발견한 것이다."라고 말하였습니다. 우리는 믿음으로 결국 모든 것이 파멸될 마지막 날 세움을 받을 것입니다.
어느날 밤에 예수님께 찾아 온 니고데모에게 예수님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요 3:5)"라고 말씀해 주었습니다. 천국에 들어가는 길은 사람의 노력이나 선행으로 되어 지는 것이 아니라 그 천국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여야 합니다. 예수님은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요 1:12)"라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구세주로 영접하는 것은 물과 성령으로 된다는 말입니다. 물이라는 것은 말씀을 말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롬 10:17)" 말씀을 듣지 않고는 믿음이 생길 수가 없습니다. 성령님께서 사람을 거듭나게 만들어 주셔야 합니다. 이것은 신비입니다. 성경은 말씀하시길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 (고전 12:3)"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3. 우리는 하나님의 인장반지처럼 사랑과 신임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성취해야 합니다./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
하나님께서 스룹바벨을 종으로 삼으시고 마지막 날 세워 주신다고 약속하시면서 다시 무엇이라고 말씀하십니까? “너를 인장으로 삼으리니”라고 말씀합니다. 인장 반지란 옛날 군주들이 값진 보석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만든 일종의 사인 반지로서, 중요한 문서에 조인할 때마다 이 반지로써 인을 쳤다고 합니다.
때로 군주 자신의 권위를 대행할 대리인을 파송할 때에 자신의 인장 반지를 빼어 그의 손에 끼워 줌으로써 군주의 권위를 덧입고 매사에 맡겨진 사역을 감당하게 해주었다고 합니다. 따라서 하나님께서 친히 스룹바벨을 인장으로 삼는 것은 그만큼 깊은 애정과 관심을 가지시고 스룹바벨을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이 말씀은 참 해석하기가 어려운 말씀입니다. 일반적으로 그 때는 2장 7절에서 말씀하는 만국의 보배가 임할 때라고 해석합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초림을 예언한 때이고 더불어 예수님의 재림을 예언한 종말의 때라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은 예수님을 예표적으로 보여주시는 것이고 스룹바벨 성전이 결국 예수님을 예비하는 모형적 의미가 있다고 해석을 합니다. 그래서 스룹바벨을 하나님이 인장으로 삼는다는 의미는 결국 성전의 주인이신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어 백성들을 인쳐 구속할 것을 예표한다고 해석합니다. 스룹바벨 때에는 이와같은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된 바 없기 때문에 21-23절은 스룹바벨로 예표되는 예수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질 하나님의 심판과 통치를 예언한 내용이라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을 “내 종”이라고 인정해 주는 것도 하나님의 종인 그리스도를 예표한다는 것입니다. 스룹바벨은 영광스런 하늘 보좌를 버리시고 자신을 비하하시어 인간의 몸, 종의 형체를 입고 이 땅에 성육신 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인물이라고 보는 것입니다.(빌 2:7-8)
의미있는 해석이고 에스라, 스가랴서를 종합해 볼 때 합당한 해석입니다. 그러나 스룹바벨 당시의 의미로 해석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스룹바벨의 할아버지였던 유다 왕 여호야긴이 하나님의 오른 손의 인장반지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빼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의 손에 넘겨 주었습니다(렘22:24,25)
그래서 포로 생활 동안 하나님의 인장이 느부갓네살에게 빼앗겼습니다. 그러나 이제 다윗의 혈통에서 나은 자 스룹바벨을 통하여 인장반지로 삼아 다윗 왕가의 정통성을 회복시켜 주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변치 않는 사랑과 신임을 베풀어(아8:6) 하나님의 대리 통치자로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자로 삼겠다는 것입니다. 인이라는 것은 왕의 도장입니다. 이것이 찍히면 모든 것이 결제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스룹바벨을 그렇게 하나님의 일을 하는 대리통치자 결제자로 삼겠다는 말입니다. 어느 시대나 이렇게 스룹바벨처럼 쓰임받은 사람들이 있습니다.
오늘 날 세상 사람 중에는 세 종류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평생 동안 사탄의 종이 되어 하나님을 거역하며 사탄의 뜻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두 번째 종류의 사람은 평생동안 사람의 종이 되어 자신의 뜻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세 번째는 하나님의 종이 되어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믿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세상에서 궁극적인 성공이 무엇이겠습니까? 많이 쌓아 놓은 것이겠습니까? 세상의 권력과 명예를 누리며 호화롭게 사는 것이겠습니까? 사울은 초대 왕으로 40년 동안 입법 사법 행정의 모든 권한을 가지고 산 사람이지만 그는 성공한 사람이 아닙니다. 스데반은 짧은 인생을 살다가 순교를 당하였지만 예수님께서 일어서셔서 환영한 성공적인 삶을 산 사람입니다. 세례요한은 비록 메뚜기와 석청이를 먹으며 살고 권력 앞에 비참하게 죽었지만 예수님은 세례 요한 보다 큰 자가 없다고 인정해 주었습니다. 어떤 삶의 형태를 살든 하나님의 인장인 된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여야 합니다.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는 것이야 말로 성공한 인생이고 행복한 인생입니다. 성전을 짓는 것 초라해 보여도 하나님의 구속사의 뜻을 성취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연히 되어진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 속에서 이루어진 일입니다.
바벨론에 사로잡혀 간 이스라엘이 70년 후에 해방 받을 일은 이미 선지자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하여 예언된 일입니다.(렘 29:10; 렘25:11-13)
“나 여호와가 이같이 말하노라 바벨론에서 칠십 년이 차면 내가 너희를 권고하고 나의 선한 말을 너희에게 실행하여 너희를 이 곳으로 돌아오게 하리라 (렘 29:10)”
그 뿐 아닙니다. 에스겔 선지자에게도 예언해 주었습니다.(겔 36 : 37).
이사야 선지자를 통해서 200년 전에 고레스 왕을 통하여 이 일이 이루어질 것을 예언해 놓았습니다(사44:28). “바사 왕 고레스는 말하노니 하늘의 신 여호와께서 세상 만국으로 내게 주셨고 나를 명하여 유다 예루살렘에 전을 건축하라 하셨나니 너희 중에 무릇 그 백성 된 자는 다 올라갈지어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함께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대하 36:23)”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예언된 그 일을 성취하는데 총 책임자로 스룹바벨을 사용하고 있는 것입니다. 얼마나 감격적인 일입니까? “하나님이 택하여” 하나님의 인장으로 쓰임받고 있는 것입니다. 그 시대 그 장소, 그 일을 스룹바벨에게 맡긴 것이 영광이고 축복이었습니다.
우리는 이 시간 학개 선지자를 통하여 들려 주시는 네 번째 설교가 우리에게 들려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야 할 줄 압니다. 23절을 스룹바벨을 내 이름으로 바꾸어 한 번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2007.6.11/열린교회/김필곤 목사

출처/ 열린교회 http://yeolin.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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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54 학개 적자인생에서 흑자인생으로(오늘부터는 내가 너희에게 복을 주리라.) 학2:10-19  김필곤 목사  2010-08-21 2745
4053 학개 스스로 굳세게 하여 일할지어다 학2:1-9  김필곤 목사  2010-08-21 2617
4052 학개 나무를 가져다가 전을 건축하라 학1:1-15  김필곤 목사  2010-08-21 2585
4051 마가복음 인생의 역풍가운데 찾아 오시는 예수님 막6:45-56  김필곤 목사  2010-08-21 2859
4050 마가복음 한 어린 아이의 태도 경쟁력 막6:30-44  김필곤 목사  2010-08-21 2437
4049 마가복음 리더의 인간관계 막6:14-29  김필곤 목사  2010-08-21 2196
4048 마가복음 권세 있는 삶 막6:7-13  김필곤 목사  2010-08-21 2606
4047 마가복음 놀람, 배척, 불신의 함정 막6:1-5  김필곤 목사  2010-08-21 2203
4046 마가복음 죽음 정복하기 막5:35-43  김필곤 목사  2010-08-21 2276
4045 마가복음 고난의 늪 헤쳐 나오기 막5:25-34  김필곤 목사  2010-08-21 2362
4044 마가복음 마음의 광풍 다스리기 막5:1-20  김필곤 목사  2010-08-21 2820
4043 마가복음 큰 광풍 타고 비상하기 막4:35-41  김필곤 목사  2010-08-21 2824
4042 마가복음 겨자씨 한 알로 이루어지는 큰 나무 막4:30-34  김필곤 목사  2010-08-21 32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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