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 : 김남준  | 출판사 : 생명의말씀사
판매가 : 11,000원9,900원 (10.0%, 1,100↓)
30만 독자가 선택한 김남준 목사의 『게으름』 후속작!거룩한 삶을 갈망해 왔지만 냉랭해진 마음에 고민하는 신자들을 위한 철저한 자기 점검서신앙의 무기력증에 빠진 그대에게모든 게으른 삶의 뿌리, 싫증은하나님에 대해 열렬하지도 그렇다고 미워하지도 않는 영적 권태감입니다.이 싫증은 반감으로, 반감은 죄악으로 커져 점점 침륜에 빠지게 할 것입니다.지루함에 감염된 영혼이 은밀하고 교활한 죄의 계략에 더 빠져들기 전에하나님을 향한 불붙는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출판사 서평]구원받은 신자의 마땅하고도 기꺼운 의무는 성화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나 이 땅에 머무는 동안 신자는 여전히 죄의 영향력 가운데 노…[더보기▶]

 



김남준 목사님의 <싫증>을 읽고 중요한 부분을 밑줄 그은 다음 일일히 타자하였습니다.

위의 책 표지를 클릭하면 책을 구입하실 수 있습니다. -최용우

 

1.영혼의 빨간 불-싫증

 

영혼의 싫증은 곧 영적 권태감입니다. 영혼의 싫증은 마음으로 나타납니다. 마음은 아름다운 것을 볼 때 사랑하게 되고, 추한 것을 볼 때 혐오하게 됩니다. 절대적으로 아름다운 것과 추한 것이 아니더라도, 자기가 아름답다고 느끼면 사랑하게 되고, 추하다고 판단하게 되면 마음이 멀어지게 됩니다. 신앙생활의 싫증은 하나님과 하나님과 관련된 것들의 아름다움을 알고 사랑하던 마음이 이제는 거기로부터 멀어져 별로 끌리지도 않고 그렇다고 적극적으로 혐오하지도 않는 권태의 상태입니다. 신앙생활에 있어서 열렬함이 사라진 상태로서 권태감이 가득한 마음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싫증의 끝은 싫증이 아니라 반감이라는 사실입니다. 다시 말해서 싫증은 반감으로 발전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영혼의 싫증은 하나님을 향한 사랑과 생명력을 잃어버린 무기력해진 신자가 하나님을 대적하고 반역하는 데로 나아가는 전초 단계입니다.

 

2.육체의 적, 게으름 & 영혼의 적, 싫증

 

성실함이 어떤 올바른 의무와 책임을 향하여 싫증에 쉽게 물들지 않는 마음의 경향성을 가리킨다면, 부지런함은 이러한 마음의 결심을 실제의 삶 속에서 행동으로 실천해 내는 일관성을 뜻합니다. 그래서 영혼의 싫증이 육체의 게으름과 짝을 이루는 것처럼, 마음의 성실함은 육체의 부지런함과 짝을 이룹니다. 성실함이 싫증에 의해 방해를 받듯, 부지런함은 육체의 게으름에 의해 방해를 받습니다. 그러므로 영혼의 질병은 싫증이고, 육체의 질병은 게으름인 것입니다.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은 결국 마음에서 만나게 됩니다. 게으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성화의 삶을 사는데 있어서 결코 함께 갈 수 없는 대적입니다. 

 

3.아, 하나님이 권태롭다.

 

죄의 정체는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적대입니다. 신자가 은혜로부터 멀어져 하나님께 대하여 권태를 느끼는 시기, 곧 싫증의 기간이 상당히 지나고 나면 신자는 그것으로 만족하지 않고 대적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나아갑니다. 신자 중 아무리 거룩한 사람이라도 이러한 가능성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운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말합니다.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빌3:12)
싫증은 하나님을 누리지 못하고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 느끼는 권태감입니다.

 

4.지겨워진 관계

 

다른 사람에게 사랑을 베풀 기력이 없는 사람들은 종종 이렇게 이야기 합니다. "내 한 몸 추스르기도 힘든데..." 어떤 관계에 대하여 헌신할 기력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의무이든 자원하는 베풂이든 간에 그것을 행할 마음이 없거나 모자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바로 관계에 대한 싫증을 반영합니다. 그런데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며 살기 위해서는 그렇게 생각해서는 안됩니다. 항상 마음에서 에너지가 넘쳐야 합니다. 그 에너지는 곧 힘입니다. 육체를 위한 힘은 음식을 통하여 공급되지만, 영혼을 위한 힘은 은혜를 통하여 주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모든 공급의 작용이 바로 생명입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하고 있을 때에는 그 관계가 너무나 행복합니다. 그러나 권태감이 밀려오면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도 별 감흥이 없는 상태가 바로 하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싫증의 상태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5. 싫증의 원인-인간의 불완전함

 

우리가 은혜를 받으면 사랑의 감정이 생깁니다. 이 사랑은 곧 거룩한 정서인데, 이것은 죄악 된 세상이나 고통을 볼 때는 아픔과 고통으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는 것을 볼 때는 한없는 기쁨으로 나타납니다. 그런데 하나님에 대해서 싫증을 느끼는 권태기가 오면 이러한 정서가 메마르기 시작합니다. 다른 지체들이 하나님 앞에서 뜨거워지고 눈물을 흘리는 것을 보면 그런 분위기 자체가 싫고 거부감이 느껴집니다. 그러고는 자신의 내면의 경향과 어울리는 분위기를 찾으려고 합니다. 이 모든 사실은 영혼의 싫증이 얼마나 위험한 것인지를 보여줍니다.

 

6.싫증의 원인-온전함을 추구하지 않음

 

영혼의 싫증에 빠지는 실제적 원인은 먼저 그가 온전함을 추구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요즘에는 산에 큰 불이 나면 헬리콥터가 물을 퍼부어 산불을 진화하지만 예전에는 종종 맞불을 놓았습니다. 산불이 나 반대쪽에 바람을 등지고 맞불을 놔버리는 것입니다. 그렇게 해서 그 불길이 더 이상 태울 것이 없도록 만들어서 불을 끄는 것입니다.
영혼의 싫증도 이와 같습니다. 우리가 영혼의 싫증의 영향력을 실제적으로 퇴치하기 위해서는 싫증을 느끼는 그 대상에 대한 열심을 불러일으켜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해서,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해서, 선한 일에 대해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해서 싫증이 불길처럼 번져올 때 반대로 불을 지르는 것입니다. 싫증의 불이 자신의 세력을 확장시키고자 태우려는 자원들을 미리 꺼버리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온전함에 대한 추구입니다. 단지 싫증을 경계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더욱 열애하도록 더 많은 교제의 시간을 가질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닳도록 힘써야 합니다. 

 

7. 싫증의 원인- 은혜로부터 멀어짐

 

인간의 육체는 자연으로부터 멀어질수록 병에 가깝다는 말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영혼은 은혜로부터 멀어질수록 싫증에 가깝습니다. 그러면 신자의 마음과 생활은 죄악에 더 가까운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단지 외면적으로 준수하고 있다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며, 내면까지 살펴야 합니다. 우리의 생각, 마음의 경향, 정서의 움직임까지 살펴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이 바로 모든 외면적 행동과 생활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8.싫증의 원인 -마음을 지키지 않음

 

마음에서 일어나는 싫증은 다른 모든 죄의 시작처럼 어느 한 순간에 갑자기 발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깊이 누리는 사람에게는 어제까지는 마음이 열렬하고 뜨거웠는데 오늘 아침에 갑자기 완전히 차가운 마음으로 돌아서는 일은 흔치 않습니다. 은혜의 마음이 서서히, 서서히 식어가면서 싫증이 밀려오는 것입니다.
다른 모든 죄와 마찬가지로 하나님과 하나님의 모든 것들에 대해 느끼는 싫증은 마음의 작은 씨앗에서부터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여러분은 이러한 마음의 작용에 얼마나 예민하십니까? 우리가 말씀의 빛과 은혜를 구하며 잘 살핀다면, 우리 마음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이 식어가는 증상들을 찾아낼 수 있습니다.

 

9. 나에게만 긴 설교

 

하나님께서 부어 주시는 은혜가 없지 않은데도 때때로 불평이 들려옵니다. "휴......설교 시간이 왜 이렇게 긴 거야?"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나름대로 방법을 찾습니다. 목사님의 축도 시간을 틈타 예배당 문을 열고 슬며시 나가기도 하고 양심에 찔리지 않을 정도로만 예배시간에 지각하는 것입니다. 물론 그에게 정말 중대한 일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가 두 시간이 넘는 영화를 볼 때는 십분 전에 와서 줄을 서 있고 마지막 자막이 모두 올라가기까지 자리를 뜨지 않는 사람이라면 어떨까요? 

 

10. 마음 밭에 떨어진 죄

 

놀랍게도 죄가 우리를 유혹하고 마음 밭에 떨어져, 뿌리를 내리고 장성하는 과정은 우리의 마음속에 말씀이 자라는 과정과 동일합니다.
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인간의 머릿속에는 하루에 약 십만 가지의 생각이 오간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것들 중 상당수는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는 죄악 된 것들입니다. 이런 죄의 씨앗들이 의식과 무의식 속에 계속 뿌려집니다.
그런데 만약 그것들이 마음 밭에 심기어 뿌리를 내리면 마음이 죄의 지배를 받게 되고, 한껏 자라서 밖으로 드러날 정도가 되면 실제로 죄를 저지르게 됩니다. 그리고 그것도 모자라서 다른 사람들까지 그릇된 길로 이끌기도 합니다. "욕심이 잉태한 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 즉 사망을 낳느니라"(약1:15) 

 

11. 상상부터 출산까지

 

인간이 죄를 상상할 때는 지성과 정서 그리고 의지가 모두 참여합니다. 하지만 이때 주도권을 행사하는 것은 '지성'입니다. 죄를 짓겠다고 결심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생각 속에 떠오르는 상태입니다.
어떤 생각들은 그렇게 생각 속에 떠오르는데서 그치는데 어떤 생각들은 지성에 자리를 잡게 됩니다. 마음에 품고 계속 생각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죄가 마음에 착상될 때는 '의지'가 주도권을 갖습니다. 그런 생각을 하는 게 죄인 줄은 알지만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 후 그 생각은 계속해서 발전하게 됩니다. 이제는 너무 커져서 숨길수도 없습니다. 이렇게 죄를 키우는 역할은 '정서'가 맡습니다. 죄악 된 것을 생각하고 마음에 품고 그것과 타협하면서 정서가 은밀히 즐거움을 느끼는 것입니다.
결국 죄는 실제로 밖으로 산출되려고 합니다. 상상 속으로만 했던 범죄를 이번에는 직접 행동으로 실행하려고 합니다. 그대 아무리 지성이 범죄의 가능성을 말하고, 정서가 그렇게 하기를 원한다고 주장해도 의지가 "절대 안 돼!"라고 반대하면 죄를 짓지 않습니다. 그러나 주도권을 쥐고 있는 '의지'는 죄를 밖으로 확 쏟아 내 버리고 맙니다. 

 

12. 둘도 없는 친구, 죄와 싫증

 

영혼의 싫증은 죄의 둘도 없는 친구입니다. 영혼의 어떠한 변화가 가장 빨리 전달되는 곳이 마음이기에 영혼의 싫증으로 인하여 마음에 있는 지성과 정서와 의지는 금방 영향을 받습니다. 그리고 그 영향은 마음에 그치지 않고 인격까지, 또 인격에 그치지 않고 삶으로까지 뻗어갑니다. 죄의 원대한 계획이 신자 안에서 무성히 자란 잡초와 같이 퍼지는 것입니다.

 

13. 제 집 안방 드나들 듯

 

신자에게 영혼의 싫증을 이기고 주님 안에서 온전한 신자가 되어 기쁨이 되고자 하는 열렬함이 살아있다면, 생각이 태만하지 않고 가만히 자신을 살피면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만한 생각은 금방 알아차리고 고개를 흔들며 떨쳐버릴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영혼이 싫증을 느끼면 이렇게 까지 하고 싶지 않습니다. 무엇이든지 대충 넘어가려고 합니다.
이렇게 영혼의 싫증으로 인해 생각의 부주의함에 빠진 상태는 죄에게 문이 활짝 열린 집과 같습니다. 죄가 호시탐탐 노리다가도 문이 단단히 잠겨 있거나 개 짖는 소리라도 들리면 잠시 멈추었다가 "다음 기회를!" 하고 돌아가 버릴텐데, 오히려 문이 "어서옵쇼!" 하는 듯이 활짝 열려 있습니다. 그 때 죄는 슬며시 문을 열고 상상 속으로 들어와 '제 집 안방 드나들 듯' 자유롭게 돌아다니는 것입니다.

 

14.왜 아파하지 않으십니까?

 

벤자민 플랭클린은 이런 고백을 남겼습니다. "처음 죄가 우리의 마음에서 일어날 때 그 최초의 것과 싸워서 투쟁하는 것이 힘든 게 사실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이 후에 뒤따라오는 모든 욕망을 만족시키는 것보다는 훨씬 쉽다." 죄에 무감각해진 것만큼 영혼의 싫증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십니까? 그러나 죄의 손을 잡고 들어오는 영혼의 싫증을 가슴아파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 않습니까? 

 

15. 누룩같이 번지는 싫증

 

옛날에는 찐빵이나 호떡을 가정에서 많이 만들어 먹었습니다. 가난하던 시절 간식으로 먹을 것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것들을 만들기 위해서는 밀가루에다 효모와 물을 풀어 넣어 반죽을 하고, 그것을 뜨듯한 아랫목에다 놓고 하루 저녁 이불을 잘 덮어놓습니다. 그러면 다음 날 빵을 만들기 좋도록 넉넉하게 부풀어오릅니다.
영혼의 싫증도 육체가 게으를 때, 유혹이 빈번할 때, 염려로 마음이 빼앗길 때, 죄책감을 상실할 때 부풀어오르는 누룩과 같이 걷잡을 수 없이 힘을 얻게 됩니다.

 

16. 육체가 내민 카드, 휴식

 

영혼이 이끄는 것이 남아있는 한 육체가 순종하면서 움직입니다. 그런데 이 일도 한 참 하다가 영혼은 싫증에 침범 당하고 육체가 피곤을 느끼면, 결국은 권태감이 더해지고 게을러집니다.
그 때 육체의 게으름이 피곤해 있는 영혼에게 '휴식'이라는 카드를 내밉니다. 그냥 '쉬자'는 것입니다. 신앙의 의무를 다한답시고 은혜도 받지 못하는 새벽기도에 더 이상 나가지 말자는 것입니다.
만약 그 때도 여전히 영혼의 열렬함이 남아 있으면 "이 녀석!" 하고 쳐서 복종시킬 텐데 영혼도 싫증을 느낀 지 오래입니다. 육체라는 친구가 파업을 한다는 소식을 듣고 자기도 함께 손을 잡고 의무를 저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점차 은혜로 회복할 기회마저 잃어버리게 됩니다. 

 

17. 타협의 명수

 

"하나님의 자녀인데 왜 이 정도 밖에 살지 못할까?"
"어떻게 나의 삶이 세상 사람들과 똑같을 수 있을까?"
"교회가 세상과 다른 것이 무엇인가?"
"내가 어쩔 수 없이 하는 일이 그리스도인으로서 떳떳한가?"
영혼의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살아갈 때 스스로에게 별로 질문을 하지 않습니다.
자신의 윤리성이나 영적 상태를 가지고 고민하거나 괴로워하지 않습니다. 그냥 타협의 명수가 되어 버립니다.
그리고는 항상 변명을 합니다. "요즘 그렇게 하는 사람들이 어디 있어? 내가 이 정도만 신앙생활을 해도 사람들이 나보고 교회에 미쳤다고 할걸..." 영혼의 싫증을 느끼는 사람들은 자신이 의무를 다하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핑계를 대거나 자신의 수준이 평균은 넘는다고 착각합니다.

 

18. 참새가 방앗간을 지나치지 못할 때

 

선한 사람은 그 쌓은 선에서 선한 것을 내고, 악한 사람은 그 쌓은 악에서 악한 것을 내느니라.(마12:35) 다시 말해서 빈번한 유혹을 통해서 정욕은 불 일 듯 일어나고, 영혼의 싫증은 가속화됩니다. 그때 정욕은 실제로 더욱 강렬한 힘을 얻고 마음 전체를 큰 힘으로 지배하면서 그를 자기가 원하는 대로 끌고 다닙니다.
신자에게 유달리 취약한 부분에 대한 유혹이 '빈번할 때' 영혼의 싫증은 촉진됩니다. 실상 유혹이 빈번해지게 되면 이 유혹은 우리 안에 없는 어떤 것을 생기게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안에 이미 잠재되어 있는 욕망을 강렬한 힘으로 일으키는 것입니다.

 

19. 무너진 마음의 틀

 

언젠가 1년 만에 에어컨을 청소할 때였습니다. 힘들게 뜯어서 안에 있는 필터를 꺼냈는데 철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먼지가 꽉 차 있었습니다. 곧바로 업체에 연락해서 가르쳐 주는 대로 깨끗이 씻고 햇볕에 말리고는 다시 끼웠습니다. 그랬더니 공기가 변했습니다. 제 방에 들어오는 다른 사람들도 공기가 달라진 것을 느끼는 것이었습니다.
마음의 틀은 사물을 인식하고 느끼는 성향입니다. 우리의 마음이 은혜를 받아 바람직한 틀을 유지하고 있을 때는 깨끗이 청소된 필터를 끼운 에어컨과 같습니다. 맑은 공기가 들어오면 맑은 공기를 차갑게 식혀서 내어보냅니다.
반대로 에어컨을 오래도록 청소하지 않은 채 내버려두면 먼지가 잔뜩 끼게 됩니다. 공기가 들어오면 차가워지기는 하지만 필터를 통해 정화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기 저기 붙어 있던 세균과 먼지를 머금고 이상한 냄새까지 동반해서 밖으로 나옵니다.  

 

20.염려로 마음이 갈라졌을 때

 

희랍어로 '염려하다' '근심하다'는 '마음이 나위다'라는 의미입니다. 갈라져 나뉜 마음으로는 무언가에 집중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을 열렬히 추구한다거나 하나님과의 깊은 관계로 나아갈 수 없습니다. 이렇게 '염려로 마음이 나뉠 때' 영혼의 싫증은 힘을 얻고 뻗어 나갑니다.
염려는 뜨겁고 열렬한 신앙생활을 하던 사람도 한 순간에 차가운 사람으로 변하게 만들 뿐 아니라, 때로는 신령한 육체와 본성적 육체가 갈등을 일으킬 때 본성적 육체를 지원하기도 합니다. 

 

21. 죄책감의 상실

 

마음 안에서 올바른 죄책감이 사라지면 영혼은 분투하지 않습니다. 분투하는 동안에 영혼은 싫증에 빠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죄책감이 사라지는 순간 영혼은 더 이상 죄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투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영혼의 싫증은 급속히 진전됩니다. 영혼이 싫증에 빠지게 되었을 때에 그 마음은 죄에 저항할 힘을 잃어버리고 죄와의 싸움에 밀려서 무엇이든지 양보하게 됩니다.
인간의 사악함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양심이 송사하며 "너 지금 죄를 저지르고 있잖아. 저렇게 열렬하게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봐."라고 말하면 누구라도 찔림을 느끼고 가책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때 신자는 어떤 대책을 세우는데 그것이 자기만의 '신학화 작업'입니다. "신앙생활이라고 하는 게 원래 그렇게 열렬하면 광신자가 되는거야. 지금 나는 문제없이 잘 믿고 있어." 라며 자신을 합리화하는 것입니다. 

 

22. 회심하게 되면

 

회심하게 되면 즉시 은혜의 지배를 받는 상태로 들어가게 됩니다. 그렇게 되면 주님과의 교제의 기쁨을 누리게 되며, 말씀을 듣고 은혜도 많이 받습니다. 그러다 조금 시간이 흐른 뒤에 자신의 신앙생활이 너무 힘들다고 생각합니다. "하나님, 이렇게 가지 철저히 믿는 것은 제게 너무나 어렵습니다. 이렇게 까지 철저히 믿는 사람이 세상에 몇 명이나 되겠습니까?" 라고 묻는 것입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아무리 많은 사람들이 그릇된 길을 간다 할지라도 신자는 그들이 다수라는 이유 때문에 그 길을 따라갈 수는 없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입니다. 언제나 이 세상에는 어두움 보다 빛이, 부패한 무리들  보다는 소금 같은 그리스도인들이, 넓은 길로 가는 이들보다는 좁은 길로 가는 이들이 소수입니다.

 

23. 주님의 사랑으로 불붙어

 

우리가 어찌 하나님을 향하여 싫증을 느낄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하나님을 행해 가져야 할 감정은 타오르는 사랑입니다. 하나님의 아름다우심은 곧 그분의 성품의 아름다움입니다. 그분의 성품은 그것이 무엇이든지 모두 아름답습니다. 그리고 그 성품은 이 땅에 있는 인간들과 맺으시는 관계에 의하여 드러납니다. 믿음의 눈은 그 아름다움을 봅니다. 그리고 아름다움을 볼수록 하나님을 더욱 사랑하게 됩니다. 사랑하는 마음은 언제나 열렬합니다. 

 

24. 열렬함을 잃어버리는 문제

 

진실한 그리스도인으로서 성화의 길을 걷기 위해서는 반드시 영혼의 뜨거움과 열렬함이 신자 안에 살아있어야 합니다. 따라서 우리가 열렬함을 잃어버리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의 영혼의 싫증과 육체의 게으름이 만나서 가져오는 것은 결코 사소한 것이 아닙니다. 그 끝이 곧 하나님을 향하여 반감을 품는 것이고, 삶을 통해서 대적하는 것이며, 신앙에 있어서 물러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25.아담과 하와도 싫증을 느꼈을까?

 

아담과 하와가 타락하기 전에도 그들에게 싫증이 있었을까요? 죄가 없는 상태에서도 싫증은 있습니다. 그렇지 않았다면 명백한 하나님의 명령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먹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심지어 찬사들의 타락의 경험을 보더라도 그들의 세계에서조차 싫증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싫증을 느끼는 것은 피조물 자체의 불완전성과 관련이 있습니다. 하나님 이외에 모든 지성적 피조물은 싫증의 가능성을 가진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간이 모두 부활한 후에는 다시 타락하지 않도록 지켜주실 것이며, 그러한 붙드심 안에서 싫증 없이 하나님과 그의 세계를 인하여 기뻐할 것입니다.  

 

26. 죄책과 오염

 

인간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습니다. 죄를 짓고 타락하였을 때 인간에게 그 죄의 결과가 나타나게 되었는데 그것이 죄책(罪責)과 오염(汚染)입니다. 죄책은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 죄를 지은 것에 대한 책임이고, 오염은 그 결과로 말미암아 우리의 영혼 속에 남게 된 부패한 본성을 가리킵니다.
신자는 영혼의 싫증을 제하고 날마다 거룩하고 진실한 삶을 살려고 애쓸 때 비로소 구원받은 자로서 합당한 행복과 만족을 누리며 살 수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의미의 구원입니다. 

 

27. 뜻을 세우는 사람

 

하나님 앞에 죄악된 삶을 살기 위해서는 특별히 노력할 필요가 없습니다. 불순종하기 30일 작전, 40일 새벽기도 안 가기 운동, 성경 읽지 않도록 애쓰기 백일 기간 등은 정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냥 마음이 원하고 육체가 바라는 대로 살아가면 그렇게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모든 일에 있어서 순종하고 열심히 기도하고 성경을 읽으며 선하고 올바르게 살기 위해서는 결심과 각오가 필요합니다. 결국 신자는 뜻을 세우지 않으면 안 됩니다. 마음에 항상 칼날을 세우고 살아야 합니다. 전쟁터에서 아직 총성은 들리지 않더라도 보초를 서는 마음으로 살아야 합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사는 것은 껍데기 신앙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  신자가 영혼의 싫증이라는 이불을 덮고 잠자리에 누워 있는데 새벽 공기를 흠뻑 마시며 주님을 찬양하기를 기대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28.싫증이 없으신 하나님

 

성경에는 '싫증'이라는 명사보다는 '싫어하다'라는 동사의 표현이 많이 등장합니다. 그리고 이런 표현들은 하나님이 주체로서 어떤 대상에 대하여 싫증을 내시고, 싫어하신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원리적으로 싫증이 없으신 분입니다. 하나님께서 싫어하시고 싫증을 내신다는 표현은 하나님께서 우리를 향해 가지고 계신 불쾌감, 즉 우리가 하나님의 뜻대로 살지 못할 때 우리 안에 있는 죄 때문에 마음 아파하시는 불쾌감에 대한 다른 표현입니다. 불변하시는 하나님 자신이 변하셨다기 보다는 우리가 그것을 느끼는 효과인 것입니다. 

 

29. 영혼과 마음의 연합

 

한번 구원받은 신자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끊어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원리적으로 그러하다는 것입니다. 원리적인 연합은 흔들릴 수 없지만 실제적인 연합은 어제가 다르고 오늘이 다르며 은혜 받았을 때 다르고 은혜에서 멀어졌을 때 다릅니다. 더욱이 하나님을 뜨겁게 사랑할 때는 물론이고 사랑이 식어서 하나님께 완전히 돌아섰을 때가 다릅니다.
그런데 영혼의 싫증이 찾아와 하나님께 권태감을 느끼는데도 그리스도와의 연합으로 구원을 잃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에 신앙의 의무를 게을리 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30. 하나님은 사랑이시라

 

우리 인생의 목적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신 목적에 부합하기 위해 진실한 신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진실한 신자가 되기 위한 가장 큰 고민은 영혼의 싫증으로부터 벗어나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좋으신 하나님을 싫증 없이 더 온전히 사랑할 수 있을까요? 또 그렇게 계속적으로 그분의 사랑 안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요?" 신자는 끊임없이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고 하나님 앞에서 온 삶으로 스스로 답하면서 예수 그리스도와의 실제적인 연합 안에서 살아가야 합니다. 실제적인 연합은 사랑의 결과입니다. 연합이 저절로 사랑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사랑이 실제적인 연합을 촉진합니다. 

 

31. 사랑이 있어야 질투도 합니다.

 

성경의 역사 전체를 보면 그 장대한 드라마가 '싫증과의 열렬한 싸움'이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싫증이 일어나면서 죄가 시작되고 타락하게 됩니다. 타락 이후에 인간은 보편적으로 인간성 안에 하나님을 향한 반감과 권태감을 가지고 태어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인간의 역사는 하나님께로 돌아온 역사라기보다는 하나님으로부터 끊임없이 탈출하고 도망치는 역사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을 필요로 하면서도 그분으로부터 끊임없이 멀어지려고 한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마음에도 싫증이 있었다면 어땠을까요? 인간이 타락하였을 때에, 당신 스스로 창조하신 세상을 깨끗이 정리하시고 끝내셨을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은 당신 자신이 사랑이시므로 우리를 향하여 싫증을 가지실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불행하고 고통스럽게 살아가는 인간의 모습을 보시면서 긍휼히 여기셨습니다.

 

32. 자녀를 심판하시는 하나님

 

정말로 싫증이 가득 차면 그 다음에는 무관심이 찾아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언약 백성들의 어떤 상황에도 무관심하지 않으십니다. 오히려 삶의 곳곳을 비추시는 세밀함과 열렬함을 가지고 그 백성들을 선택하시고, 인도하시고, 보호하시며, 때로는 징계하시고 어루만지십니다. 그렇게 해서라도 우리를 당신의 사람으로 만드시고, 이끄시고, 빚어 가십니다. 그렇게 당신의 사랑을 받는 것이 인간에게 가장 큰 행복임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이 하나님을 떠나 이 세상에서 아무리 행복한 인생을 산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단지 기쁨의 모양을 띤 죄일 뿐입니다. 잠깐 즐거움을 줄 수 있으나 궁극적으로 그리할 수 없습니다. 

 

33. 싫증이 이름을 다하는 곳 - 천국

 

하나님과 피조물 사이에는 좁힐 수 없는 격차가 있고 하나님은 영원히 피조물에 의해 파악되실 수 없습니다. 개미가 인간에 대해서 6개월 연구하고 나서 "인간에 대해서 모두 알게 되었다."고 한다면 우리가 개미에게 뭐라고 하겠습니까? "진짜 너 개미에 불과하구나."라고 밖에 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제껏 우리에게 보여주신 것도 많지만, 천국에서는 더 많은 것을 보여주실 것이고 영혼의 싫증은 그 이름을 다하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지고 계신 지식과 의지가 나타날 때 하나님의 찬란한 영광도 함께 비출 것입니다. 

 

34. 싫증을 느낄 틈이 없는 곳

 

조나단 에드워즈에 다르면 지옥은 천국과는 정반대로, 감추어졌던 당신의 공의로우시고 엄격하신 성품과 진노를 계속해서 새롭게 보여주는 곳입니다.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성품이 매일 새롭게 드러나는 곳입니다. 그때마다 온 몸을 불태우는 강렬한 고통과 두려움이 전해지는 곳입니다.
그것은 언제까지일까요? 영원 무궁히 계속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 저지른 인간의 반역과 죄는 그 크기가 무한하기 때문에, 그 심판과 형벌도 무한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죄는 전능하고 무한하고 거룩하신 하나님께 대한 전면적인 도전이기 때문에 그 크기 역시 고정된 것이 아니라 영원 무궁한 것이고, 그 영원 무궁하고 무한한 죄에 대한 형벌 역시 무한한 것이 '하나님의 공의'입니다. 이런 지옥에 싫증이 있을 수 있을까요? 지옥은 끝없는 고통으로 싫증을 느낄 틈이 없는 곳입니다. 

 

35.시간이 모자라는 하나님의 백성들

 

영혼의 싫증은 우리가 이 지상에서 잠시 경험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만일 한 사람이 아무렇게나 일생을 살다가 그냥 지옥에 가야겠다고 굳은 마음을 먹는다면, 이 싫증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알고 싸울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마지막 때를 바라보고 사는 하나님의 백성들에게는 시간이 없습니다. 뜨겁게 주님을 사랑하고, 뜨겁게 주님께 매달리고, 열렬함으로 주님을 섬기려고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그리스도인의 본향을 그리는 나그네의 삶을 살면서도 항상 주님의 열렬함을 간직하며 사는 불꽃같은 사람들이 되어야 합니다.

 

36.때는 이미 늦었습니다

 

무언가 눈에 보이는 커다란 죄를 지었을 때는 하나님 앞에 양심의 가책을 느낍니다. 가책을 느낄 때, 하나님이 은혜를 주시면 그 가책 때문에 하나님 앞에 회개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그런데 문제는 싫증이 즉각적으로 저지르는 커다란 범죄가 아니기 때문에 이 싫증 자체를 죄로 인식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라고 인식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진심으로 잘못했다며 회개하지도 않습니다.
이 싫증은 우리 속에 침투하여 세세히 세력을 넓혀 가는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입니다. 바이러스가 침투되면 세포 하나 하나가 감염되어 가고 세력이 확장됩니다. 이 싫증의 세력이 극대화되면 하나님에 대한 반감으로 발전하고 그렇게 되면 실제적인 죄로 산출됩니다. 그때 가서야 비로소 고통 가운데어디서 떨어졌는지 가만히 더듬어 보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느 한 순간에 마음이 식어지면서 싫증이 나기 시작했던 때가 떠오릅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습니다.

 

37.은혜의 마음

 

은혜 아래 있을 때에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닮으려 하고, 주님의 뜻대로 살려고 하며, 하나님과의 교제를 즐거워하는 경향성이 있습니다. 마음이 은혜 안에서 그 틀을 유지하고 있으면 어제 교회에 갔는데도 오늘 또 가고 싶고, 화장실 청소라도 하고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사단의 공격이 아무리 집요해도 그 틀이 계속 유지되고 있으면 잠시 유혹이 성공할지라도 그 사람을 완전히 악한 사람으로 바꾸어 놓을 수는 없습니다.

 

38.기도의 실천

 

기도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마음으로부터 우러나게 하는 것입니다. 싫증으로 인해 영혼이 병들어 있다면 처음부터 아예 기도할 수가 없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여러분이 인생을 살아오면서 확실히 하나님 앞에 열렬히 기도할 때는 반드시 여러분의 영혼이 뜨거움을 간직하고 있을 때였을 것입니다. 그 뜨거움을 가지고 열렬한 기도가 가능했지 냉담하고 싫증난 영혼을 가지고 가슴 저미는 열렬한 기도를 한 적은 없었을 것입니다. 

 

39.쓸모 없는 신자 만들기 다섯 단계

 

첫 단계는 기도의 열렬함을 빼앗는 것 -영혼에 열렬함을 간직하고 있을 때는 사실 기도하고자 하는 욕구가 환경을 뛰어넘어 바빠서 기도하지 못한다는 것이 그 사람의 핑계가 되지 못합니다.
두 번째 단계는 기도의 실천에 게으르게 하는 것 -영혼이 게으름에 빠진 육체를 통솔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것입니다.
세 번째 단계는 기도의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 -기도하러 억지로 교회에 나왔지만 실컷 졸거나 애쓰고 씨름하면서 기도는 했는데 공상과의 씨름이었습니다. 머릿속의 잡생각과의 씨름이지 영적 전투가 아니었습니다.
네 번째 단계는 기도의 의무를 무시하는 것 -내용이 없으면 형식은 저절로 무시되고 맙니다.
다섯 번째 단계는 기도의 의무를 경멸하는 것 -기도만 하면 제일인가?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면 안 돼 하면서 기도의 순서를 뒤로하고 맙니다. 

 

40. 말씀의 미각

 

여러분은 목사의 설교의 은혜가 떨어진 것 같다고 생각하실 때가 있을 것입니다. 물론 그럴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이 영적인 싫증으로 병들어서 말씀에 대한 입맛이 떨어져서 그럴 수도 있습니다.
우리에게 말씀에 대한 미각이 살아있을 때는 하나님이 야단치시면 '내가 정말 주님의 친 자식이구나. 그러니까 이렇게 야단을 치시지!', '내가 만약에 사생아였다면 하나님이 날 이렇게 야단치시겠는가? 정말 하나님은 우리의 아버지시구나.' 하면서 그 책망에 눈물을 흘리며 감격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칭찬해 주시면 '내가 한 게 뭐가 있다고 하나님이 이렇게 칭찬해 주시는가?'라고 감격하며 하나님의 크신 사랑에 감사합니다. 

 

41. 복음에 대한 싫증

 

교회 역사를 보면 18세기 합리주의가 일어나 20세기까지 유럽의 교회들이 급속하게 황폐화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사람들은 복음에 대해서 싫증을 냈습니다. "예수님께서 여러분을 위해 죽으셨습니다."라고 설교자가 외치면 사람들은 "누가 아니라 그랬나요? 우리 모두 그 말에 동의합니다. 다 아는 얘기하지 마시고 실제적인 것을 좀 얘기해 달란 말입니다."라며 대꾸했습니다.
합리주의와 과학주의가 일어나면서 사람들이 설교 강단에 자신들의 일상적인 삶의 실제적인 것들을 요구한 것입니다. 그들에게는 복음에 대한 경험이 없었습니다. 그저 지적인 동의만 있었을 뿐입니다. 그들의 반응에 요구한 설교단은 순식간에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42.복음 교리에 대한 싫증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뜨거움이 있을 때에는 복음에 입각한 교리들을 배움에 있어서 그렇게 흥미진진할 수가 없습니다. 우리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견고한 삶을 살도록 만들어 주는 강한 원동력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복음 교리에 대한 기쁨과 즐거움을 모두 앗아가 버리는 것이 싫증입니다. 그래서 은혜 가운데 있을 때는 "이것은 어떻게 되는 것입니까?"라며 그렇게 질문을 하고 하나하나 이해해 가면서 그렇게 기뻐하던 사람이 은혜에서 멀어지고 나면 자구만 간단하게 말하라고 요구하게 되는 것입니다.

 

43.은혜의 능력

 

신자가 강한 은혜의 능력에 사로잡혀 있지 않고, 싫증에 그 은혜의 능력이 파괴되고 나면 태만과 부주의함이 야기됩니다. 태만은 육체의 게으름과 야합해서 힘들지 않게 살아가려고 함으로써 분별력을 상실하게 합니다. 부주의함은 지성과 야합해서 주의를 기울이지 않게 합니다. 그래서 꼼꼼한 신앙생활, 무엇인가를 깊이 생각하고 집요하게 생각하면서 옳고 그른 것을 판단하는 경향들이 사라져 버립니다. 은혜의 체력이 바닥났기 때문에 죄가 들어와도 그것과 맞서는 주도면밀한 싸움이 불가능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대하여 지겨워지고 은혜의 힘을 소진한 사람에게 철저한 신앙생활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영혼으로 할 수 있는 것은 형식적인 신앙생활, 대충대충 하는 신앙생활뿐입니다. 그런 사람들에게 있어서 온전해지는 성화의 삶은 도전이 될 수 없습니다.

 

44.전심으로 하나님을 추구하라

 

성경에는 하나님을 찾는다는 말이 많이 나옵니다. "찾는다"라는 히브리어 '다라쉬'의 원어적인 뜻은 '추구하다, 따라가다'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이 어디로 가시든지 그분께 모든 것을 내어 맡기고 그분을 추구하고 그분을 따라간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의 자격이 어떠하든지 간에 전 시대, 전 인류를 통틀어 하나님께서는 전심으로 당신을 찾는 사람들을 기뻐하십니다. 

 

45. 해갈의 방법, 영적인 연합

 

우리는 거듭날 때 이미 원리적으로 그리스도와 연합되었습니다. 그러나 실제적인 연합의 상태는 우리가 얼마나 성결해지고 얼마나 예수 그리스도를 깊이, 온전하고 순전한 마음으로 사랑하느냐의 정도에 따라 촉진되기도 하고 물러가기도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표현을 빌자면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요15:7)의 상태입니다. 이것이 바로 원리적인 연합을 기초로 한 실제적인 연합니다.

 

46.견고하며 흔들리지 말며

 

견고함은 바로 하나님을 향한 전적인 추구, 매일 전심으로 하나님을 찾는 그 추구에서 나옵니다. 거기에는 영혼의 싫증이 깃들 수 없습니다. 물론 싫증은 호시탐탐 기회를 엿보고 있기 때문에 완전히 깃들지 않을 수는 없습니다. 싫증이 깃들 수 있지만 하나님을 향한 전심의 추구는 죄의 늪으로 우리의 영혼을 가두려던 싫증의 힘을 뿌리칠 힘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간절히 자기를 돌아보고, 매일 하나님을 전심으로 찾는 사람들은 이 세상에서 예수님 때문에 행복해지기만을 바라지 않습니다. 그들은 거룩해지고 온전해지기를 바랍니다. 오늘날 "예수 믿고 부자 되는 데 한번 도움이나 받아볼까?"라는 식의 생각으로 교회에 온 사람들은 결코 꿈 꿀 수도 또 맛볼 수도 없는 것들입니다.  

 

47. 우리는 어떤 삶을 살아가야 합니까?

이 땅에 있는 동안에 하나님을 한없이 기뻐하고 그 하나님을 향한 열렬한 사랑의 마음을 간직한 채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 많이 주님을 섬기고, 그 주님에 대한 열렬한 사랑 때문에 이 사랑을 알지 못하는 자들에게 피 묻은 예수의 복음을 전하며 조국 교회의 한 모퉁이를 섬기며 살아가야 하지 않을까요?

 

48. 싫증의 원인 -인간의 부패성

 

타락한 인간은 본성상 하나님과 화목하거나 그 아름다우심에 이끌리며 살아가지 못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한 신자라 하더라도 역시 부패한 본성 때문에, 영혼의 싫증은 아주 강한 힘으로 신자의 마음에 역사합니다. 모든 인간이 태어날 때부터 하나님을 향하여 싫증 정도가 아니라 강력한 반감을 가지고 태어납니다. 이것은 선한 것에 대해서 가르침을 받아도 그것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반감을 내포한 싫증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앞에서 회개하고 거듭난 사람들조차도 그런 것이 있습니다. 바로 인간의 부패성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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