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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시104:1-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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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김용덕 형제 |
참고 : | 2010년 8월 8일 주일예배 말씀증거 |
평신도 열린공동체 새길교회 http://saegilchurch.or.kr
사단법인 새길기독사회문화원, 도서출판 새길 http://saegil.or.kr 日常 속의 修行 시편 104:1-30 새길 신앙공동체에 처음부터 참여한 사람의 하나이기 때문인지, 저에게도 가끔 기본적인 질문을 하는 분들이 있습니다. ‘새길의 正體性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신앙은 자라고 있다고 보십니까?’ 라고 하는 것입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하여는 깊은 신학적 답변을 제가 할 수는 없으니까, 저 나름대로 생각하고 있는 답을 드릴 수밖에 없습니다. 즉 ‘예수따르미로서의 길을 같이 가는 것입니다’라고. 여기에서 저는 道伴(함께 도를 닦는 벗)을 떠올리게 됩니다. 묵묵히 道를 찾아 같이 길을 가고 있는 벗들 말입니다. 두 번째 질문 - 신앙의 성장 - 에 대하여는, 전혀 자신이 없습니다만, ‘아마도 눈에 띄거나 확연히 느낄 수 있는 믿음의 변화는 없을지 몰라도, 언젠가 다다를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꾸준히 신앙을 지켜 간다면, 螺旋形的 登程(spiral journey) - 빙빙 돌아가지만 끝을 향해 꾸준히 올라가고 있는 - 에 올라있지는 않을까’ 하고 답을 해드립니다. 예수따르미에게는, 항상 기도하면서 적극적으로 예수의 길을 찾아가는 것이 제일 바람직스럽겠습니다만, 저는 좀 더 우리 생활 속에서 실현가능한 하나의 대안을 생각하고 있습니다. 항상 기도생활은 못해도, 일상생활 속에서 갈등과 고민에 부닥칠 때마다, ‘예수님이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다시 한 번 자신을 성찰해 볼 수는 있지 않을까 하는 것입니다. 나무로 말을 조각하는 조각가가 있었답니다. 너무나 작품이 말과 비슷해서, ‘어떻게 그렇게 잘 만드십니까?’ 하고 물었더니, ‘저는 말과 같지 않은 것만 털어낼 뿐’이라고 조각가는 답을 했답니다. 예수가 원하는 것을 못한다고 낙심, 좌절하기 보다는 ‘예수가 원하지 않는 것을 안 하는 것’이 예수따르미의 첫걸음이라고 한다면, 너무 소극적인 태도일까요? 예수가 원하지 않는 짓을 하면서도 열심히 예수를 외쳐대는 사람들이 눈에 띄는 현실을 보면서 제가 말씀드려 보는 것입니다. 예수가 원하지 않는 것 중에는 인간의 독선과 아집, 독점욕을 제일 먼저 꼽을 수 있을 것입니다. ‘참 아름다운 주님의 세계’를 우리는 우리 자신의 안일과 편의 때문에 얼마나 파괴하고 있나요? 남을 이기기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경쟁자들을 배제하려고 했나요? 고통당하는 이웃을 위하여 우리는 얼마나 희생하려고 했나요? 남보다 낫게 보이기 위해 우리는 얼마나 우리 자신을 내세우려 했을까요? 이에 대하여, 아마도, 남에 대한 배려와 자신에 대한 절제를 먼저 떠올릴 수밖에 없습니다. ‘창조질서의 보전과 완성’을 포함한 존재하는 모든 것에 대하여 그 자체의 가치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것이야말로 배려의 기본일 겁니다. 이것은 또한 자신에게 있어서는 행동과 말의 절제가 수반되어야만 할 것입니다. 저는 요즈음 에어컨사용이 우리의 안팎을 나누는 벽을 상징한다고 생각하게 됩니다. 우리의 전통 한옥은 모든 문을 열어놓고 시원한 바람을 맞으며 더운 여름을 나게 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에어컨을 켜게 되면 모든 문을 닫아야 합니다. 에어컨을 켠 실내는 시원해지지만, 그 때문에 밖의 온도는 더 올라갈 수밖에 없습니다. 에어컨을 켠 실내는, 밖이 더 더워져야만, 더 시원해지는 것이지요. 옛날 보다 더 덥게 느끼는 이유는 에어컨이 있어야만 더위를 날 수 있다는 우리 마음에도 있을 것입니다. 작년 서울의 열대야 통계를 보니까 강남구가 20일인데 반하여 강북구는 8일, 도봉구, 구로구, 관악구가 9일이었습니다. 집값에 비례하여 더 덥게 살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 이유는 아파트와 고층빌딩, 그리고 자동차의 배기 열과 에어컨 사용에 있을 것입니다. 자기만 편하기 위해서 큰 손해, 앞으로 닥칠 재앙을 예견하지 못하고 사는 예이겠지요. 영국 사람이 썼다고 여겨지는, <정말 가난한 것이란>(What it means to be poor) 글이 일깨워 주는 바가 있어 소개해드리겠습니다. 도시에 사는 어느 여유 있는 집에서, 지금 집에서 누리고 있는 편리한 시설이 없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어린 아들에게 깨닫도록 하기 위해 시골 농부의 집으로 보냈습니다. 시골에서 사흘 밤낮을 보내고 도시의 집으로 돌아온 아들에게 아버지는 ‘무엇을 알게 되었느냐?’고 물었습니다. 아들은 ‘물론이지요.’ 하며 아홉 가지를 들었습니다. 첫째, 우리는 개가 한 마리밖에 없는데, 거기에는 네 마리나 있고요. 둘째, 우리는 정원 안에 소독약 냄새가 나는 수영풀이 있는데, 거기에는 여러 가지 물고기와 짐승들이 놀고 있는 맑은 시내가 있어요. 셋째, 밤이면 우리는 전등을 켜 마당을 밝히는데, 거기는 달과 별이 뜰을 밝혀줘요. 넷째, 우리 뜰은 우리 집의 담까지이지만, 시골의 들은 보이는 끝 까지여요. 다섯째, 우리는 먹을 것을 마켓에서 사야하는데, 거기서는 길러서 거두어 먹어요. 여섯째, 우리는 CD를 통해 음악을 듣는데, 시골 사람들은 새, 귀뚜라미, 그리고 키우는 짐승들이 내는 심포니나 자연의 아름다운 소리로 밝게 살아요. 때로는 옆의 밭에서 일하는 이웃집 사람들의 말소리가 반주처럼 들리기도 해요. 일곱째, 시골에서는 천천히 불로 음식을 만들고, 우리는 전자요리기구 같은 것으로 음식을 만드는데 진짜 맛을 모르겠어요. 여덟째, 우리는 담과 도난방지 벨로 우리 집을 지키는데, 거기서는 문을 다 열어놓고 살아도 서로들 잘 알아서 지켜주는 것 같아요. 아홉째, 우리는 휴대전화나 컴퓨터, 텔레비전에 의존해 사는데, 거기서는 해와 하늘과 땅 그리고 키우는 가축과 가족들과의 삶으로 충분히 즐거운 것 같아요. 아버지가 아들의 시골체험에 놀라자, 마지막으로 그 아들이 하는 말, “우리가 얼마나 가난한지 알게 해줘서 고마워요.” 우리의 탐욕과 독선으로 인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훼손을 하나님께서는 얼마나 아파하시겠습니까? 우리의 節制는 當爲이겠지요. 작은 희생은 나선형적 진전의 또 하나의 시작일 것입니다. 우리가 받은 유형무형의 달란트는 언제고 어떤 형태로던 - 절제와 희생을 통해 - 하나님께로 돌려드려야 하겠지요. 달란트의 많고 적음은 문제가 아닐 것입니다. 어떤 실직자가 절실히 직장을 구하는 기도를 하며, ‘4백만 원만 넘는 직장을 주시면 반을 바치겠습니다.’라고 기도했답니다. 그런데 월급을 받고 보니 2백만 원이었답니다. 그러자 그 사람이 기도하길, ‘미리 반을 떼고 주시는군요.’ 했다는 우스개 얘기가 있습니다. 액수의 많고 적음 보다 우리가 갖고 있는 시간과 능력을 바칠 수 있나하는 마음의 문제이겠지요. 우리의 절제와 희생은 금전적 다과 보다는 예수 따르미로서의 깨어있는 행동에 있을 것입니다. 자신에 대한 절제의 또 하나는 가급적 자기를 덜 드러내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너무나 자기 확신과 과신이 넘쳐나는 오늘, 스스로를 숨기는 것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오래 전부터 말 줄이기 운동을 제안해왔습니다. 퀘이커 교도들은 철저한 절약과 자제와 희생을 생활의 기준으로 삼기 때문에 말하는 것 까지도 절약한다고 합니다. 침묵은 신비로운 영적 체험을 할 수 있는 수행이라고 하지요. 어느 수도사에게 밤낮 부부싸움만 하는 여인이 찾아와 남편과 헤어지지 않고 살 수 있는 길을 가르쳐 달라고 했답니다. 수도사는 수도원 뒤에 있는 우물물을 한 두레박 퍼주며, “이것은 聖水니까 남편이 싸우려고 할 때마다 한 입 가득 입에 담고, 삼키지 말고 있다가 남편이 말을 그치면 넘기세요. 아마 한 달 후에는 집안에 평화가 올 것입니다” 고 해서 보냈답니다. 그 부인이 수도사의 지시대로 따르고 한 달 후 그 집에 화평이 찾아왔습니다. 수도사를 찾아온 여인이, “참 신비로운 물이군요.” 하자, “물이 신비한 것이 아니라 침묵이 신비로운 것입니다.” 라고 했다는 얘기가 있습니다. 일본에서는 전통무용의 극한, 최고의 단계는 아무 움직임이 없는 것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실제 이러한 작품이 있는 줄은 모르겠습니다만, 인간의 자기표현의 절제를 극단적으로 표현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예배보고 헤어지는 것으로 우리의 신앙이 크게 변하지 않는 것에 불안해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고압전류(high-voltage)와 같은 자극적 신앙은, 물론 비판 받아서는 안 됩니다만, 그 신앙이 기독교도다운 실천으로 옮겨지지 않으면 위험 할 수도 있기 때문에, 저는 뜨겁기 보다는 조용한 예배, 우리가 나서기 보다는 우리를 낮추는 교회생활이 좋습니다. 우리 모두는 말이 없어도 같은 길을 묵묵히 가고 있는 道伴이기 때문입니다. 언젠가 우리의 구하는 것이 이루어질 것이라는 소망을 갖고, 느낄 수는 없어도 조금씩, 螺旋形의 登程에서 위를 향해 올라가는, 日常修行을 같이 하는 그러한 道伴을 그려봅니다. 기도문 우주만물의 창조주이시고, 그 존재 자체이신 하나님! 미미한 인간에게 넣어주신 지식이 하나님의 뜻과 의지를 어겨 가는데 쓰이기도 하는 현상을 보며 안타까워하는 저희들을 살펴주시고 옳은 길로 저희를 이끌어 주시옵소서. 저희들이 부족한 것을 깨닫고, 스스로를 먼저 살필 수 있는 지혜를 주시옵소서. 예수가 원하지 않는 것을 하지 않을 수 있는 최소한의 신앙인적 자세를 지켜 나아갈 수 있도록 인도하여 주시옵기 빕니다. 더위가 있어야 풍성한 추수를 기대할 수 있다는 평범한 진리를 깨닫고 무더운 여름을 감사한 마음으로 지낼 수 있도록, 저희를 경박한 세상 속에 묻히지 않도록 깨우쳐 주시옵소서. 우리가 따르고자 하는 예수이름 받들어 기도드리옵나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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