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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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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엡2:14-1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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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정용섭 목사 |
참고 : | http://dabia.net/xe/415007 |
초기 기독교가 당면한 문제 중의 하나는 유대인과 이방인의 차이와 갈등을 극복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문제가 지금 우리 눈에는 대수롭지 않아 보이지만 당시에는 그것으로 교회가 분리될 정도로 심각했습니다. 유대인은 성서에 나오는 아브라함의 후손들이고, 이방인은 그 이외의 사람들입니다. 유대인들은 이방인을 원수처럼 생각했고, 이방인도 유대인을 해괴한 짐승처럼 생각했습니다. 유대인들의 어떤 문서에 따르면 하나님이 이방인을 만드신 이유가 지옥의 불쏘시개로 사용하려는 것이었다고 합니다. 성서도 유대인들로 하여금 이방인과 접촉하지 못하게 했습니다. 유대인들은 세계 어느 곳에 자리를 잡든지 그 나라에 동화되지 않고 자기들만의 종교와 문화를 지켰습니다. 스스로 왕따를 자처한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런 태도는 유럽에 반유대주의(anti-semitism)를 일으켰습니다. 로마 제국 시대에도 반유대주의가 있었고, 지난 2천년 동안 반복되었습니다. 유대인들은 돈만 아는, 비인간적인 사람들로 각인되었습니다. 셰익스피어의 <베니스 상인>에서 비인간적인 고리대금업자인 샤일록이 유대인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에 히틀러는 이런 반유대주의에 힘입어 600만 명이나 되는 유대인들을 아우슈비츠 등, 여러 곳에서 살해했다고 합니다.
2천 년 전 초기 교회에서 유대인 그리스도인과 이방인 그리스도인의 갈등은 무엇보다도 토라 문제에서 불거졌습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들은 이방인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과 마찬가지로 토라와 할례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장을 거절했습니다. 바울은 유대인 그리스도인을 대표할만한 인물이었지만 신앙에서만은 이방인 그리스도인 입장에 섰습니다. 역사가 흐르면서 유대인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던 예루살렘 교회는 역사에서 사라지고, 이방인 그리스도교를 대표하는 그리스와 로마 교회가 역사에 살아남았습니다. 여기 이방인 그리스도교가 역사에 살아남을 수 있었던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원수처럼 지내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이방인 교회 안에서 일치할 수 있었다는 데에 있습니다. 그 일치는 기적적인 사건입니다. 그 일치가 어떻게 가능했을까요? 단순히 서로 화합하자고 말하는 것으로 이 문제가 극복되는 건 아닙니다. 출발은 신앙의 중심을 바로 잡는 것입니다. 그것은 곧 신학적인 인식의 문제입니다. 에베소 기자는 그것을 오늘 설교의 본문인 2:14-18절에서 정확하게 설명합니다.
원수 된 것
에베소서 기자는 14절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원수 된 것’을, 즉 유대인과 이방인을 가로막은 담을 자기 육체로 허물었다고 합니다. 이어서 16절에서도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했다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원수 된 것은 율법을 가리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의 종교법입니다. 하나님께 제사를 드리는 법에 대한 규정,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행해야 할 도덕적 규범을 가리킵니다. 신생아 남자 아이들은 7일 만에 할례를 받아야 하고, 음식을 먹을 때도 깨끗한 것과 부정한 것을 구별해야 합니다. 돼지고기는 부정한 음식이었습니다. 피도 마시면 안 됩니다. 유대인들은 태어나면서 죽을 때까지 이런 율법을 따라야만 했습니다. 물론 모든 유대인들이 율법대로 살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우리가 실정법을 완전하게 지키지 못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율법이 유대인들의 삶을 규정했습니다. 율법은 유대인들에게 절대규범이었다는 뜻입니다. 반면에 율법이 이방인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이런 두 집단이 한 교회 안에 머물면 어떻게 될까요? 그들이 함께 하는 것이 가능할까요? 유대인들이 율법을 완전히 포기하든지, 아니면 이방인들이 율법을 따라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이 두 집단은 함께 공동체를 이룰 수가 없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율법 문제가 오늘 우리와 무슨 상관이 있냐고, 그런 것들은 우리와 너무나 거리가 먼 이야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생각은 잘못입니다. 초기 기독교의 신학적인 고민과 투쟁은 오늘 우리에게 똑같이 중요합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에베소서 기자가 말하는 원수 된 것이 오늘 우리에게는 없습니까? 교회 구성원들을 분열시키는 절대규범과 이데올로기들이 없습니까? 로마가톨릭교회와 개신교회 사이의 원수 된 것은 교황제도일지 모릅니다. 로마가톨릭교회에서는 교황을 모든 교회의 수장으로 인정하라고 요구합니다. 정교회와 개신교회는 그것을 받아들일 수가 없습니다. 성서문자주의에 묶인 그리스도인들은 성서를 역사적으로 비평하는 그리스도인들에게 자신들의 신앙을 강요합니다.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으면 자유주의자들이라고 매도합니다. 성서문자주의는 한국교회의 일치를 가로막는 담이고, 원수 된 것입니다.
오늘은 평화통일 남북공동기도 주일입니다. 남한의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와 북한의 조선그리스도교연맹은 금년에도 8.15를 맞아 남북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담은 공동기도문을 발표했습니다. 우리는 그 기도문을 예배 중에 함께 읽었습니다. 남북통일은 한민족에게 지상명령과도 같습니다. 지금 기차를 타고 개성과 평양과 신의주를 거쳐 북경으로 갈 수 있는 길이 막혔습니다. 섬이 아니라 대륙에 속한 나라 중에서 이렇게 육로가 막힌 나라는 아마 대한민국이 유일할 겁니다. 앞으로 2백년 후에 우리 후손들이 지금의 우리를 어떻게 평가할지 부끄럽습니다. 남북통일은 별로 시급한 게 아니라고 생각하는 분들도 있긴 합니다. 당장 취업을 해야 하고, 집도 사야 하는데, 통일 문제는 오히려 귀찮습니다. 가난한 북한과 통일을 해봐야 우리가 손해나는 일이니까, 그냥 현재 이대로가 좋습니다. 나름으로 일리가 있다고 하더라도 성서의 가르침과 다르다면 자신의 생각을 교정해야 합니다. 에베소기자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평화라고 했습니다. 그리스도는 둘로 하나를 만드신다는 겁니다. 남북을 하나로 만드는 뜻으로 새겨도 됩니다. 기독교 신앙을 혼자 잘 먹고 잘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의 차원에서 받아들이는 신자라고 한다면 둘을 하나로 만드는 평화 문제를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무엇이 남북을 이렇게 오랜 세월을 갈라놓았고, 지금도 갈라놓고 있을까요? 그 원수 된 것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보는 관점에 따라서 천지차이가 날 겁니다. 남한의 대다수 사람들은 북한의 공산정권이 바로 원수라고 생각할 겁니다. 그들만 무너지면 금방 통일이 될 것이라는 기대도 합니다. 60년 동안 남한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의 책임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다른 견해를 갖고 있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문제가 나오면 많은 분들이 감정적으로 대처합니다. 저 놈은 좌파 빨갱이, 저 놈은 수구 골통 하고 서로 비판합니다. 앞으로 한 세대 이상의 세월이 흘러 분단 100년은 되어야 객관적으로 사태를 파악할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참으로 절망스러운 일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만이라도 세상 사람들보다 시대를 좀더 빨리 파악해야 합니다. 그것을 우리는 원수 같이 지내던 유대인과 이방인이 일치를 이룬 초기 기독교에서 배웁니다. 이건 단순히 하나가 되었다는 사실만이 아니라 기독교 신앙의 본질이라는 점에서 아무리 반복해서 강조해도 과하지 않습니다.
예수의 십자가
에베소서 기자는 유대인이 옳다느니 이방인이 옳다느니, 하는 방식으로 말하지 않습니다. 경우에 따라서는 옳고 그름을 따져야 하지만 대개는 그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습니다. 근본은 예수 그리스도 사건입니다. 거기에 집중하는 것만이 문제의 근본 해결책입니다. 에베소서가 분명하게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원수 된 것을 자기 육체로 허물었다고, 율법을 십자가로 소멸시켰다고 말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죽음이 율법을 무효한 것으로 만들었다는 뜻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고백입니다. 엡 2:14-18절은 에베소 교회만이 아니라 초기 기독교의 공통된 신앙고백입니다. 골 1:15-20과 마찬가지로 일종의 송영입니다. 초기 기독교는 무슨 근거로 이런 신앙을 고백할 수 있었을까요? 그것이 옳은 것일까요?
우선 예수님이 왜 십자가에 처형당하게 되셨는지는 생각해야 합니다. 복음서의 보도에 따르면 예수님은 공생애 초기부터 유대교 고위층과 충돌했습니다. 바리새인, 서기관, 제사장이 그들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에만 관심을 두었지만, 유대교 고위층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체제를 유지하는 데만 관심을 두었습니다. 종교적 체제의 중심에는 율법이 있습니다. 유대교 당국에서 볼 때 예수님은 체제를 부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를 그냥 두면 체제 자체가 허물어질 수 있습니다. 그들은 결국 예수님을 로마권력에게 넘깁니다. 예수님은 빌라도에게서 사형선고를 받습니다. 그는 가능하면 십자가 죽음을 피하고 싶었지만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기로 했습니다. 그렇게 외롭게, 처참하게 십자가에서 서른세 살의 삶을 접었습니다. 여기까지만 본다면 율법의 승리입니다. 하나님의 아들인 예수의 실패입니다. 율법은 소멸되지 않았습니다.
그 다음 단계가 중요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시고 무덤에 묻혔던 예수님이 삼일 만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단순히 다시 살아난 게 아니라 영원한 생명으로 변화된 것입니다. 그 부활생명이야말로 새롭고 참된 생명입니다. 율법에 의해서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이 부활생명을 얻으셨다는 것은 율법의 무효선언입니다. 율법으로는 부활생명을 얻을 수 없다는 뜻입니다. 그 이유는 율법의 속성에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결국 자기 의에 의존하게 만듭니다. 바리새인들은 자신들이 세리나 죄인들보다 괜찮은 사람이라는 사실에서 자부심을 느꼈습니다. 자신들이 더 경건하고 도덕적이라는 생각에 빠져 있었습니다. 유대교 당국이 예수님을 십자가에 내몬 것도 역시 자신들이 의롭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율법은 이렇게 자기 의에 빠져서 결국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는 일을 합니다. 지금 우리의 모든 삶의 행태가 이렇게 굴러갑니다. 좋은 집에 살면서, 좋은 학벌과 돈벌이에서 자신의 의를 확인하려고 합니다. 남한 체제가 북한 체제보다 우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서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북한 체제는 남한보다 더 유치한 방식으로 그런 일을 합니다. 서로 자기 의에 빠져서 생명을 파괴하고 있습니다. 그 생명 파괴가 얼마나 광범위하게, 얼마나 철저하게 일어나고 있는지 제가 일일이 설명하지 않겠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이 반복되고 있다고 생각하면 틀림없습니다. 그런 일을 행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도 모릅니다. 오히려 의를 세운다고 착각합니다.
에베소 공동체를 비롯하여 초기 그리스도교는 생명을 얻는데, 즉 구원을 얻는데 전혀 새로운 길을 발견했습니다. 부활의 주님을 믿는 길입니다. 그것이 전혀 새로운 길인 이유는 바로 위에서 설명한 율법의 속성과 다른 것이기 때문입니다. 자기 의는 거짓 의입니다. 인간에게는 의가 근본적으로 불가능할뿐더러 자기 의에 집착하면 다른 이들을 대상화, 타자화, 도구화 합니다. 초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의에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의 십자가와 부활입니다. 거기에 하나님의 의가 나타났습니다. 그것을 믿는 사람은 구원을 얻는다고 말입니다. 하나님의 의는 사람의 의를 무의미하게 만듭니다. 즉 율법을 무효 처리합니다. 하나님의 의 앞에서는 사람에게 나타나는 경건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성적의 차이, 인종의 차이, 성격의 차이가 사라집니다. 가난한 사람이 행복하다는 주님의 말씀을 기억하십시오. 건강한 사람과 건강하지 못한 사람의 차이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공산주의냐, 자본주의냐 하는 차이도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활생명, 그의 현존, 그의 영광 앞에서는 원수 같은 관계가 하나로 될 수밖에 없습니다. 이건 간단한 이야기입니다. 태양이 뜨면 촛불의 크기가 별로 중요하지 않는 것과 비슷한 이야기입니다.
이런 말씀이 실감이 나지 않으시나요? ‘당신 말’은 현실성이 없다고 생각하시나요? 그렇다면 여러분은 에베소서가 노래하고 있는 예수 그리스도가 누구인지, 그를 통해서 어떻게 세상이 평화로 바뀌었는지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아직 태양의 빛으로 들어오지 않고 어둠 속에서 자기 촛불만 밝다고 생각하는 사람일지 모릅니다. 태양 빛으로 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검은색 안경을 쓰고 있는지 모릅니다. 이 세상을 영적인 눈으로, 성서의 눈으로 보십시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의 차원에서 세상을 보십시오. 에베소서 기자가 이렇게 노래합니다. 주님은 우리의 평화라고 말입니다. 주님은 원수 된 것을 허물어서 둘을 하나로 만들었다고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남한만의 주님이 아니라 북한의 주님이기도 합니다. 주님의 평화는 남한만이 아니라 북한의 것이기도 합니다. 금년은 해방과 분단 65년이 되는 해입니다. 정치인들이 뭐라 하든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믿는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삼천리 반도에 평화통일의 기운을 살리는 일에 앞장서야합니다. 이것이 제가 성서로부터 배운 영적인 가르침입니다. (성령강림절 후 열둘째 주일, 8월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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