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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22-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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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요한복음(31) 가장 복된 행위 (요 4:22-30)
<가장 복된 행위 >
성경에서 예배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했던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입니다(시 23:5). 즉 자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고백이 끓어오르듯이 넘쳐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면 내적인 생명수가 자신 안에서 솟아올라옵니다. 바로 그 생명수가 영혼의 갈증을 풀어줍니다. 그 생명수를 마시면 삶이 변하고, 진정한 만족이 주어지고, 추구하는 일도 가치 있게 됩니다. 반면에 예배가 없는 삶에는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해답도 찾지 못합니다. 예배가 없으면 무엇을 해도 공허하지만 예배가 있으면 실상을 찾기에 행복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예배하는 삶이 없으면 아름다운 장미를 보고 “아! 아름답다!”고 하지만 금방 공허가 찾아오고 오히려 더 초라한 자신의 모습만 부각됩니다. 그러나 예배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은 사고체계가 바뀌면서 아름다운 장미를 보면 그 아름다움을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프랑스 루블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 작품을 보면 감탄이 나옵니다.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세인트피터스버그의 겨울궁전 안에는 세계적인 작품들이 즐비합니다. 그 작품을 누가 훔쳐 가면 전쟁을 벌일 정도로 중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대한 명장들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구의 작품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열등감으로 인한 생각과 감정들이 자신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작품임을 깨달으면 기쁨과 감탄이 나옵니다. “내게 이런 달란트와 재능이 있구나! 하나님이 내게 이런 상황들을 허용하셨구나!!” 그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보면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그때 진정한 예배가 드려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행위는 예배하는 행위입니다.
< 복된 예배자가 되십시오 >
예배는 감정적인 토로가 되면 안 됩니다. 예배할 때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져야 합니다. 깊은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라고 해서 반드시 침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면서 부정적인 생각만 넘치면 안 됩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큰소리를 내며 하나님과 소통하는 예배를 드려도 되고 침묵하며 하나님과 교감하는 예배를 드려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22-24절).
하나님은 지금도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23절). 하나님이 인간들을 찾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왕이 반역자를 찾아 나서는 것과 같고 철학자가 무학자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외쳐서 저를 부르심으로 저의 듣지 못하는 귀를 깨뜨려 여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전도하는 반응으로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런 전도의 반응이 있는 예배자를 꿈꾸십시오. 교회는 경건한 냉장고가 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영혼을 깨우는 부화기가 되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복덕방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모든 삶이 항상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 되게 하십시오. 진정한 예배를 통하면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습니다.
다윗이 복된 존재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훌륭한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얼마나 급했든지 다윗은 머리도 빗지 못한 채 황급히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했습니다. 그때 도망가는 경황 중에도 맨발로 감람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삼하 15:30-32). 신도 못 신고 도망가는 사람이 한시라도 빨리 도망가지 않고 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문제해결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 복된 만남의 가장 위대한 수단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소중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축복 주시려고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반응하심으로 우리를 찾습니다. 항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를 이루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성경에서 예배의 의미를 가장 잘 나타내는 고백이 있습니다. 그것은 다윗이 했던 “내 잔이 넘치나이다.”는 고백입니다(시 23:5). 즉 자기 속에서 하나님에 대한 감사와 사랑의 고백이 끓어오르듯이 넘쳐나는 것이 바로 예배입니다. 왜 하나님을 예배해야 합니까? 다른 이유는 없습니다. 그저 하나님은 예배 받으시기에 합당하기 때문입니다.
예배하면 내적인 생명수가 자신 안에서 솟아올라옵니다. 바로 그 생명수가 영혼의 갈증을 풀어줍니다. 그 생명수를 마시면 삶이 변하고, 진정한 만족이 주어지고, 추구하는 일도 가치 있게 됩니다. 반면에 예배가 없는 삶에는 기쁨도 없고 행복도 없습니다. 그리고 인생의 해답도 찾지 못합니다. 예배가 없으면 무엇을 해도 공허하지만 예배가 있으면 실상을 찾기에 행복한 찬양이 흘러나옵니다.
예배하는 삶이 없으면 아름다운 장미를 보고 “아! 아름답다!”고 하지만 금방 공허가 찾아오고 오히려 더 초라한 자신의 모습만 부각됩니다. 그러나 예배의 기쁨을 발견한 사람은 사고체계가 바뀌면서 아름다운 장미를 보면 그 아름다움을 만드신 하나님을 생각하고 더 나아가 하나님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자신이 하나님의 걸작품임을 생각하며 기뻐합니다.
프랑스 루블 박물관에 있는 미켈란젤로 작품을 보면 감탄이 나옵니다. 러시아의 레닌그라드 세인트피터스버그의 겨울궁전 안에는 세계적인 작품들이 즐비합니다. 그 작품을 누가 훔쳐 가면 전쟁을 벌일 정도로 중시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위대한 명장들의 작품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누구의 작품인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성도는 하나님의 작품입니다. 그것을 모르면 열등감으로 인한 생각과 감정들이 자신을 지배합니다. 그러나 자신이 하나님의 작품임을 깨달으면 기쁨과 감탄이 나옵니다. “내게 이런 달란트와 재능이 있구나! 하나님이 내게 이런 상황들을 허용하셨구나!!” 그처럼 자신을 하나님의 작품으로 보면 자신을 보는 눈이 달라지고 세상을 보는 눈도 달라집니다. 그때 진정한 예배가 드려집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복된 행위는 예배하는 행위입니다.
< 복된 예배자가 되십시오 >
예배는 감정적인 토로가 되면 안 됩니다. 예배할 때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인 만남이 이뤄져야 합니다. 깊은 인격적인 만남을 이루라고 해서 반드시 침묵해야 하는 것은 아닙니다. 침묵하면서 부정적인 생각만 넘치면 안 됩니다. 사람의 성향에 따라 큰소리를 내며 하나님과 소통하는 예배를 드려도 되고 침묵하며 하나님과 교감하는 예배를 드려도 됩니다. 중요한 것은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22-24절).
하나님은 지금도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23절). 하나님이 인간들을 찾고 있다는 것은 놀라운 사실입니다. 그것은 마치 왕이 반역자를 찾아 나서는 것과 같고 철학자가 무학자를 찾는 것과 같습니다. 사실 하나님이 먼저 우리를 찾지 않았다면 우리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아버지라 부를 수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어거스틴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하나님! 당신이 외쳐서 저를 부르심으로 저의 듣지 못하는 귀를 깨뜨려 여셨습니다.”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는 전도하는 반응으로 그 결과가 나타납니다. 그런 전도의 반응이 있는 예배자를 꿈꾸십시오. 교회는 경건한 냉장고가 되면 안 됩니다. 교회는 영혼을 깨우는 부화기가 되고 예수님을 소개하는 복덕방이 되어야 합니다. 그처럼 모든 삶이 항상 진정한 예배자의 삶이 되게 하십시오. 진정한 예배를 통하면 그토록 갈망하던 하나님의 얼굴을 뵐 수 있습니다.
다윗이 복된 존재가 된 가장 중요한 이유는 그가 훌륭한 예배자였기 때문입니다. 아들 압살롬이 쿠데타를 일으켰을 때 얼마나 급했든지 다윗은 머리도 빗지 못한 채 황급히 예루살렘으로부터 피신했습니다. 그때 도망가는 경황 중에도 맨발로 감람산에 올라가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다(삼하 15:30-32). 신도 못 신고 도망가는 사람이 한시라도 빨리 도망가지 않고 왜 하나님께 경배했습니까? 하나님과의 만남이 문제해결의 길임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처럼 복된 일은 없습니다. 그 복된 만남의 가장 위대한 수단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래서 예배가 소중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축복 주시려고 참된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우리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찾지만 하나님도 신령과 진정으로 드리는 예배에 반응하심으로 우리를 찾습니다. 항상 신령과 진정으로 예배함으로 하나님과의 깊은 인격적 교제를 이루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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