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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 요4:1-1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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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자 : | 이한규 목사 |
참고 :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
계속된 사랑은 결국 먹혀듭니다 (요 4:1-10)
<마음이 행복해야 합니다 >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는 자가용 제트비행기를 가졌고, 제주도만한 섬을 열 개나 소유하며 그 섬을 온갖 고급품으로 꾸몄고, 개인 호화 유람선에는 수백 명의 요리사가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그 분위기에 케네디 전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여사가 넘어가 결혼합니다. 그 결혼은 미국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습니다. 자국 대통령 부인이었던 사람이 다른 나라 70 노인과 지내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재클린 여사는 네 번 결혼하고 이혼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또한 그녀의 외아들이 24살에 자가용 비행기가 추락해 죽습니다. 그 충격에 결국 그녀도 죽습니다. 지금 그녀가 행복했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섬, 제트기, 유람선, 그리고 빌딩을 다 가져도 마음이 천국이 되지 않으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건강에 관심이 많습니다. 건강을 위해 몸에 좋다고 하면 뭐든지 먹어치웁니다. 개구리가 몸에 좋다니까 겨울에 잠자는 개구리까지 깨워 잡아먹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병들어 있으니까 육신의 병은 끊이지 않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몸에 좋다거나 쾌락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비a그라는 매년 전 세계적으로 수조 원의 이익을 냅니다. 그만큼 지금 시대는 영적인 기근 시대입니다.
또한 사회가 불안하니까 점과 무속신앙이 성행합니다. 고목나무가 보이면 신비하게 보인다고 고목나무에게 열심히 소원을 빕니다. 고목나무가 왜 속이 비었을까요? 어떤 분 얘기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열심히 절하며 소원을 비는데 자기는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어서 고목나무가 너무 답답하고 속이 타서 그렇게 속이 비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목말라 합니다.
인생의 목마름을 어떻게 해갈할 수 있을까요? 영혼의 목마름은 그 영혼을 창조한 하나님 품안으로 가야 해갈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품안에 있어야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탐욕은 자꾸 하나님 품을 벗어나고 제 자리를 이탈하게 합니다. 제 자리를 벗어나면 일시적인 탈선의 짜릿함은 있지만 그 짜릿함 때문에 인생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 인생의 갈증 해소법 >
본문을 보면 목말라하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여인처럼 목말라합니다. 어떻게 그 인생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인생의 갈증 해소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웃과 소통하려고 하십시오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졌습니다. 남쪽은 유대지역, 북쪽은 갈릴리지역, 그 중간이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본문 3-4절 말씀에는 그 세 지역이 다 나오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해서 갈릴리로 갈 때 그곳을 피해 돌아갔습니다. 쉽게 말하면 서울에서 평양을 갈 때 황해도가 싫다고 강원도로 돌아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지역편견이 없었기에 그냥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갔습니다.
그때 제 육시쯤 예수님이 피곤해서 야곱의 우물곁에 앉으셨습니다. 그 순간에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제 육시는 당시 사람들이 물을 길러 다니지 않는 정오인데, 그때 물을 길러 온 것을 보면 그녀는 부끄러운 소문이 난 여인으로서 사람들의 비웃는 눈길과 수군거리는 말이 싫어서 남의 눈을 피해 정오에 물을 길러 왔을 것입니다.
그처럼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계속 “보시기에 좋다!”라고 하다가 처음으로 “보시기에 좋지 않다.”고 하셨던 것은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었습니다(창 2:18). 그래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창조해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혼자 처량하게 지내지 마십시오. 누구를 따돌리지도 말고 따돌림 당하지도 않게 하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섬기며 살면 절대 따돌림 당하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외로운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7절). 그 부탁이 묘하게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의 문을 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가끔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일을 도와 달라고 하십시오. 그래야 정도 깊어집니다. 저는 가끔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때로는 성도님에게 부탁합니다. 그래야 관계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도 기쁘게 참여해야 목자와의 정도 깊어지고 교인간의 정도 깊어지면서 신앙도 부쩍 자랍니다.
어떤 사람은 “달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혀 받지 않으려는 삶도 인색한 삶입니다. 살면서 너무 고지식하고 지내지 말고 가끔 “무엇을 해 달라!”는 요청도 하십시오. 매일 빈대처럼 신세만 지려고 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열심히 주는 사람이 “무엇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당신은 내게 정말 필요한 존재입니다.”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부탁 받는 것은 축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받으면서도 마음이 열리지만 무엇인가를 주면서도 마음이 열립니다. 봉사의 기회를 주면 신기하게 봉사하면서 마음도 열리고, 좋은 일에 헌금할 기회를 주면 신기하게 헌금하면서 기도할 마음도 생기고 애정도 깊어집니다. 또한 교회를 위해 땀을 흘리면 신기하게 신앙도 자랍니다.
겸손한 부탁의 말 한 마디는 따뜻한 말 한 마디만큼 영혼을 소통시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말이 없는 것을 미덕으로 보지만 사랑의 대화는 많은 것이 좋습니다. 어떤 무뚝뚝한 경상도 남편은 하루에 딱 세 마디를 합니다. 회사에 갔다 와서 말합니다. “아는?” 아내가 상을 차려오면 말합니다. “묵자!” 그러다가 잘 때가 되면 말합니다. “자자!” 조용히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그 사랑과 충성을 좋은 말로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2. 편견을 말씀으로 극복하십시오
주님의 요청에 사마리아 여인이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왜 사마리아 여자인 제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이 말을 보면 그녀가 편견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자신감을 많이 잃은 여인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원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같은 동족이었습니다(12절). 그런데 사마리아 지역이 앗수르에게 점령당하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유대인들이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편견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주님의 삶을 보면 주님은 오히려 사마리아인에게 큰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처럼 편견을 극복할 수 있어야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편견이 무엇입니까? 인격이 안 된 사람이 남의 인격을 싸잡아 먹칠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그런 잘못된 편견이 많습니다. 어떤 여자가 말합니다. “남자는 다 늑대다!” 그러나 몇몇 잘못된 남자를 보고 인류의 절반을 싸잡아 매도하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중국 놈은 틀려먹었어!” 그러나 어떤 사업가들은 말합니다. “중국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오히려 한국 노동자들보다 더 나아요!” 자신이 만난 몇 명을 통해 혹은 남의 얘기만 듣고 14억의 중국인을 틀려먹었다고 하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남을 특정한 편견으로 매도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분야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편견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살다 보면 편견을 버려야 할 상황이 정말 많습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딸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딸은 자는데 사위가 일어나 혼자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를 싸서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 딸을 그토록 위해주는 사위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곧 근처의 산호세에 있는 아들집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집에서도 아침에 며느리는 잠자는데 아들이 혼자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를 싸서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 아들을 그토록 박대하는 며느리가 너무 미웠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같은 상황에서 사람에 따라 달리 보는 그 어머니의 편견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처럼 사람은 누구나 그런 편견에 휩쓸려 정상적인 판단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편견을 주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3.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한 말은 영적으로 “내가 외로운 너의 처지를 안다.”는 위로의 말도 되고, 동시에 “너는 나를 도울 수 있다.”는 인정의 말도 됩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베풀어줄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받을 때 기쁩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얼굴조차 내 보이지 못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고 부탁의 말을 함으로 그녀의 영혼을 인정해주었기에 그 영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여인도 목말랐지만 주님도 목말랐음을 느낍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영혼을 얻고 싶은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 10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다.” 그 말은 결국 “네게 생수를 주고 싶다! 너는 가치 있는 존재다!”는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그런 무언의 인정이 그녀의 영혼을 얻는 원천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 때 큰 기쁨을 느끼고 그 사람에게 마음 문을 엽니다. 가끔 길을 모를 때 택시 기사에게 길을 묻습니다. 택시 기사들은 길 박사들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길을 물으면 택시 기사들은 속속들이 길을 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대부분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줍니다. 그처럼 인정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부탁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말은 “아무개 집사야! 너는 충분히 나를 도울 수 있다.”는 인정의 말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는 주님에게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사랑이 필요 없을 만큼 부자도 없고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남을 도울 수 있는 자기만의 특별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영혼을 향한 주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리십시오.
4. 드리고 나누고 베푸십시오
본문 9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왜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인 제게 물을 구합니까?”라고 도전적으로 말해도 본문을 보면 주님은 그녀를 끝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대합니다. 그처럼 사랑은 즉시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기까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에 인내가 없고 헌신이 없다면 그 사랑은 값싼 사랑이 됩니다. 요즘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헌신이 없는 값싼 사랑이 많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문제도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녀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접근했지만 모두 값싼 사랑이었습니다. 값싼 사랑은 영혼을 더 갈증 나게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여인도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갈아 치우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게 된 것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녀의 다섯 남편은 누구였을까요? 가상적으로 이런 추리를 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남편은 인물이 좋았을 것입니다. 선악과처럼 보암직했지만 속이 비었고 자주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바람피우지 말라고 따지니까 심지어 때리기까지 해서 도망쳤습니다.
둘째 남편은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배운 지식으로 속이 꽉 찬 것처럼 보였지만 너무 고지식하고 재미도 없었고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팔자를 고치자고 관계를 끝냈습니다.
셋째 남편은 돈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었지만 가정보다 사업을 더 중시해서 돈 때문에 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위자료를 많이 챙기고 끝냈습니다.
넷째 남편은 권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권력의 맛은 꿀맛이어서 권력 휘두르는 기분이 끝내주게 좋았지만 매일 중상모략하고 남을 칠 궁리만 하는 것을 보고 환멸이 나서 끝냈습니다.
다섯째 남편은 평범한 농부였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부귀영화가 다 귀찮고 평범한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같이 농사를 하며 살았지만 얼마 후에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 팍삭 늙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밑지는 인생 같아서 관계를 끝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만나고 헤어졌다가 현재는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여인의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을 잘 나타냅니다.
왜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게 방황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헌신이 커지면 공허가 작아지고 헌신이 작아지면 공허가 커집니다. 결국 ‘주는 삶’이 갈증과 공허를 극복하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최고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얻고 인간관계를 튼튼히 하고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위로는 하나님께 드리고, 옆으로는 이웃과 나누고, 아래로는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끊임없이 훈련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전도 문제로 기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은 아버지께 다 드리기로 했습니다. 구두표 생기면 아버지께 드렸고, 갈비가 들어오면 아버지께 드렸고, 좋은 것은 다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네 마음을 다 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교회를 나가 결국 구원받았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선물 공세는 반드시 그 영혼을 얻게 만듭니다.
항상 ‘드나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사랑이 값싼 사랑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대가를 치르는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써 헌신하고, 가난한 자를 열심히 돕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룩한 선교사들의 요청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며 살면 삶에 보람과 기쁨과 행복이 넘치고 천국의 상급도 크게 될 것입니다.
< 계속된 사랑은 결국 먹혀듭니다 >
이상과 같이 영혼의 갈증 해소법을 4가지 살펴보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방황도 결국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없으면 진로를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어도 영혼의 갈증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갈증은 오직 하나님 품안에서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정말 잘 키우고 싶습니까? 그러면 자녀를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십시오. 자녀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유학까지 시켜준다고 자녀가 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풍요는 오히려 영혼을 더 망칩니다. 조금 못 살고 뒤쳐져도 “너의 앞길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믿음을 끊임없이 가르치며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 안에 머물게 하면 반드시 그 영혼에게는 가장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요새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옛날보다 더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영혼은 더 감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인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습니다. 공주병과 왕자병에 걸린 자기도취의 감옥, 남의 단점만 보는 비판의 감옥,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절망의 감옥, 옛날을 그리며 현재를 낭비하는 과거지향의 감옥,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보는 선망의 감옥, 그리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자꾸 헐뜯으려는 질투의 감옥이 바로 현대인의 6대 감옥입니다.
어떻게 그 영혼의 감옥에서 벗어납니까? 예수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인격이 변화되고 인생이 변화됩니다. 세상의 힘 있는 사람을 만나도 처진 어깨가 펴지는 느낌이 들고 심지어는 동네 경찰과 친분이 있어도 힘이 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다면 그 영혼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와 축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도 예수님을 깊이 만나면 놀라운 변화의 주인공이 됩니다.
헬렌 켈러는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설리반(Sullivan)'이라는 고아 출신의 여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은 고아원에서 함께 의지하며 살던 남동생이 죽는 아픔을 당하면서 한때 정신병까지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일어섰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일어선 그녀는 헬렌 켈러를 자신이 맡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가르칠 방법이 있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그리고 6살까지 아무 교육도 못 받은 헬렌 켈러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심어주었습니다. 드디어 헬렌 켈러가 예수님을 만났고, 결국 그녀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의 인생으로서 24세에 하버드 대학(원래는 Radcliffe College로 나중에 하버드 대학으로 편입)을 졸업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람은 모두 약점과 열등감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약점과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등소평은 150센티였지만 14억의 중국을 구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들 중에 키 작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열등감은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며 생기는 감정으로 결국 자기 현실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만나면 열등한 조건과 상황을 극복하고 얼마든지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끊임없는 사랑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반응하면 어떤 장벽이나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이번에 84세 되신 저의 어머님이 고관절 골절로 입원하자 답답해하는 할머니를 위해 저의 둘째 딸 한나가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어머님! 한나가 쓴 편지를 보세요.” 하면서 편지를 드렸습니다. 어머님이 편지를 기쁘게 읽으셨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예쁜 막내 손녀딸 한나에요... (중략) 제가 응원해드릴 테니까 빨리 회복되어 교회에 오세요. 할머니! 화이팅!” 그 편지를 읽고 어머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했습니다. “한나가 글을 잘 쓰는구나!”
그 뒤에 하루에 두 번씩 병원에 갈 때마다 어머님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을 위해 한나가 편지를 썼어요.” 그러면 기억력이 없으신 어머님은 매일 새로운 편지를 받은 줄 아시고 똑같은 편지를 흐뭇한 표정을 하며 소리 내어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 읽은 후에는 여지없이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나가 글을 잘 쓰는구나!”
그 편지 하나로 10번 이상 어머님을 기분 좋게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제 오전에도 또 어머님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님! 한나가 어머님을 위해 편지를 썼어요.” 그런데 어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내가 봤었지?” 마침내 11번째 만에 어머님이 그 편지 받은 것을 기억해내셨습니다. 비록 11번째 만이지만 어머님이 그 사실을 기억해내신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때 “계속된 사랑은 결국 먹혀든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나빠졌습니다. 큰 은혜를 받고도 금방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계속된 사랑은 결국 먹혀듭니다. 인간이 연약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시 낙심하고 실망하고 비뚤게 행동하지만 그래도 계속된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먹혀들어서 그 사랑이 어떤 어려운 현실도 극복하게 하는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에 힘써 반응하고 거룩한 일에 더욱 동참함으로 인생 뒤집기에 성공해서 헬렌 켈러처럼 역전 인생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그리스의 선박 왕 오나시스는 자가용 제트비행기를 가졌고, 제주도만한 섬을 열 개나 소유하며 그 섬을 온갖 고급품으로 꾸몄고, 개인 호화 유람선에는 수백 명의 요리사가 식사를 마련했습니다. 그 분위기에 케네디 전 대통령의 미망인 재클린 여사가 넘어가 결혼합니다. 그 결혼은 미국의 자존심에 엄청난 상처를 남겼습니다. 자국 대통령 부인이었던 사람이 다른 나라 70 노인과 지내니 얼마나 자존심이 상했겠습니까?
그런 식으로 재클린 여사는 네 번 결혼하고 이혼하는 아픔을 겪습니다. 또한 그녀의 외아들이 24살에 자가용 비행기가 추락해 죽습니다. 그 충격에 결국 그녀도 죽습니다. 지금 그녀가 행복했다고 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섬, 제트기, 유람선, 그리고 빌딩을 다 가져도 마음이 천국이 되지 않으면 불행한 인생입니다.
요새 사람들은 건강에 관심이 많습니다. 건강을 위해 몸에 좋다고 하면 뭐든지 먹어치웁니다. 개구리가 몸에 좋다니까 겨울에 잠자는 개구리까지 깨워 잡아먹습니다. 그래도 마음이 병들어 있으니까 육신의 병은 끊이지 않습니다. 지금 많은 사람들이 몸에 좋다거나 쾌락을 위해서는 시간과 돈을 아끼지 않습니다. 비a그라는 매년 전 세계적으로 수조 원의 이익을 냅니다. 그만큼 지금 시대는 영적인 기근 시대입니다.
또한 사회가 불안하니까 점과 무속신앙이 성행합니다. 고목나무가 보이면 신비하게 보인다고 고목나무에게 열심히 소원을 빕니다. 고목나무가 왜 속이 비었을까요? 어떤 분 얘기에 의하면 많은 사람들이 자기에게 열심히 절하며 소원을 비는데 자기는 그 소원을 들어줄 수 없어서 고목나무가 너무 답답하고 속이 타서 그렇게 속이 비었다고 합니다. 그처럼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무엇인가 목말라 합니다.
인생의 목마름을 어떻게 해갈할 수 있을까요? 영혼의 목마름은 그 영혼을 창조한 하나님 품안으로 가야 해갈됩니다. 사람은 하나님 품안에 있어야 행복할 수 있도록 창조되었습니다. 그러나 죄와 탐욕은 자꾸 하나님 품을 벗어나고 제 자리를 이탈하게 합니다. 제 자리를 벗어나면 일시적인 탈선의 짜릿함은 있지만 그 짜릿함 때문에 인생은 더욱 비참해집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품 안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느끼며 살아야 비로소 행복할 수 있습니다.
< 인생의 갈증 해소법 >
본문을 보면 목말라하는 한 여인이 나옵니다.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본문의 여인처럼 목말라합니다. 어떻게 그 인생의 목마름을 해소할 수 있을까요? 본문을 통해 몇 가지 인생의 갈증 해소법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1. 이웃과 소통하려고 하십시오
당시 이스라엘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눠졌습니다. 남쪽은 유대지역, 북쪽은 갈릴리지역, 그 중간이 사마리아 지역입니다. 본문 3-4절 말씀에는 그 세 지역이 다 나오는데 당시 유대인들은 사마리아인들을 싫어해서 갈릴리로 갈 때 그곳을 피해 돌아갔습니다. 쉽게 말하면 서울에서 평양을 갈 때 황해도가 싫다고 강원도로 돌아간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지역편견이 없었기에 그냥 사마리아 지역을 통과해갔습니다.
그때 제 육시쯤 예수님이 피곤해서 야곱의 우물곁에 앉으셨습니다. 그 순간에 한 여인이 물을 길러 왔습니다. 제 육시는 당시 사람들이 물을 길러 다니지 않는 정오인데, 그때 물을 길러 온 것을 보면 그녀는 부끄러운 소문이 난 여인으로서 사람들의 비웃는 눈길과 수군거리는 말이 싫어서 남의 눈을 피해 정오에 물을 길러 왔을 것입니다.
그처럼 남과 어울리지 못하고 사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입니까?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실 때 계속 “보시기에 좋다!”라고 하다가 처음으로 “보시기에 좋지 않다.”고 하셨던 것은 아담이 혼자 지내는 것이었습니다(창 2:18). 그래서 돕는 배필로 하와를 창조해 서로 사랑하며 살게 하셨습니다. 혼자 처량하게 지내지 마십시오. 누구를 따돌리지도 말고 따돌림 당하지도 않게 하십시오. 마음을 비우고 섬기며 살면 절대 따돌림 당하지 않습니다.
그때 예수님은 외로운 사마리아 여인에게 먼저 “물을 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7절). 그 부탁이 묘하게 사마리아 여인의 마음의 문을 여는 기폭제가 되었습니다. 가끔 사랑하는 사람에게 큰 부담을 주지 않고 강요하지 않는 상태에서 어떤 일을 도와 달라고 하십시오. 그래야 정도 깊어집니다. 저는 가끔 혼자 할 수 있는 일도 때로는 성도님에게 부탁합니다. 그래야 관계가 깊어지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일에도 기쁘게 참여해야 목자와의 정도 깊어지고 교인간의 정도 깊어지면서 신앙도 부쩍 자랍니다.
어떤 사람은 “달라!”는 말을 전혀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전혀 받지 않으려는 삶도 인색한 삶입니다. 살면서 너무 고지식하고 지내지 말고 가끔 “무엇을 해 달라!”는 요청도 하십시오. 매일 빈대처럼 신세만 지려고 하지 않고 열심히 살고 열심히 주는 사람이 “무엇을 해 달라!”고 부탁하는 것은 “당신은 내게 정말 필요한 존재입니다.”라는 의미도 포함합니다. 특히 하나님의 거룩한 일을 부탁 받는 것은 축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받는 것과 같습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받으면서도 마음이 열리지만 무엇인가를 주면서도 마음이 열립니다. 봉사의 기회를 주면 신기하게 봉사하면서 마음도 열리고, 좋은 일에 헌금할 기회를 주면 신기하게 헌금하면서 기도할 마음도 생기고 애정도 깊어집니다. 또한 교회를 위해 땀을 흘리면 신기하게 신앙도 자랍니다.
겸손한 부탁의 말 한 마디는 따뜻한 말 한 마디만큼 영혼을 소통시킵니다. 우리 문화에서는 말이 없는 것을 미덕으로 보지만 사랑의 대화는 많은 것이 좋습니다. 어떤 무뚝뚝한 경상도 남편은 하루에 딱 세 마디를 합니다. 회사에 갔다 와서 말합니다. “아는?” 아내가 상을 차려오면 말합니다. “묵자!” 그러다가 잘 때가 되면 말합니다. “자자!” 조용히 사랑하고 충성하는 것도 좋지만 때로는 그 사랑과 충성을 좋은 말로 표현할 줄도 알아야 합니다.
2. 편견을 말씀으로 극복하십시오
주님의 요청에 사마리아 여인이 대답합니다. “당신은 유대인이면서 왜 사마리아 여자인 제게 물을 달라고 합니까?” 이 말을 보면 그녀가 편견으로 인한 마음의 상처 때문에 자신감을 많이 잃은 여인이었음을 느끼게 됩니다.
원래 유대인과 사마리아인은 같은 동족이었습니다(12절). 그런데 사마리아 지역이 앗수르에게 점령당하면서 그곳 사람들에게 이방인의 피가 섞였다고 유대인들이 그들을 멸시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런 편견이 없었습니다. 누가복음 10장에 나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나 주님의 삶을 보면 주님은 오히려 사마리아인에게 큰 호감을 가졌습니다. 그처럼 편견을 극복할 수 있어야 주님의 온전한 제자가 될 수 있습니다.
편견이 무엇입니까? 인격이 안 된 사람이 남의 인격을 싸잡아 먹칠하며 자신의 우월성을 선전하는 것입니다. 인간 사회에는 그런 잘못된 편견이 많습니다. 어떤 여자가 말합니다. “남자는 다 늑대다!” 그러나 몇몇 잘못된 남자를 보고 인류의 절반을 싸잡아 매도하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어떤 사람은 말합니다. “중국 놈은 틀려먹었어!” 그러나 어떤 사업가들은 말합니다. “중국에서 온 이주 노동자들이 오히려 한국 노동자들보다 더 나아요!” 자신이 만난 몇 명을 통해 혹은 남의 얘기만 듣고 14억의 중국인을 틀려먹었다고 하면 얼마나 큰 죄입니까?
사람들은 보통 자신의 부족함을 감추려고 남을 특정한 편견으로 매도하려는 경향이 있기에 분야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편견의 희생자가 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편견을 버려야 합니다. 살다 보면 편견을 버려야 할 상황이 정말 많습니다.
어느 날, 한 어머니가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딸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런데 아침에 보니까 딸은 자는데 사위가 일어나 혼자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를 싸서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 딸을 그토록 위해주는 사위가 자랑스러웠습니다. 그리고 곧 근처의 산호세에 있는 아들집에 들렸습니다. 그런데 아들집에서도 아침에 며느리는 잠자는데 아들이 혼자 아침을 먹고 샌드위치를 싸서 출근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보고 자기 아들을 그토록 박대하는 며느리가 너무 미웠습니다.
무엇이 문제입니까? 같은 상황에서 사람에 따라 달리 보는 그 어머니의 편견이 가장 큰 문제입니다. 그처럼 사람은 누구나 그런 편견에 휩쓸려 정상적인 판단을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 편견을 주님의 사랑과 말씀으로 극복해야 합니다.
3.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주님이 사마리아 여인에게 “물을 좀 달라!”고 한 말은 영적으로 “내가 외로운 너의 처지를 안다.”는 위로의 말도 되고, 동시에 “너는 나를 도울 수 있다.”는 인정의 말도 됩니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베풀어줄 수 있는 존재임을 인정받을 때 기쁩니다. 주님은 사람들의 인정도 받지 못하고 얼굴조차 내 보이지 못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접근하고 부탁의 말을 함으로 그녀의 영혼을 인정해주었기에 그 영혼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이 장면을 보면 여인도 목말랐지만 주님도 목말랐음을 느낍니다. 주님의 목마름은 영혼을 얻고 싶은 목마름이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본문 10절에서 말씀했습니다. “네게 물 좀 달라 하는 이가 누구인줄 알았더면 네가 그에게 구하였을 것이요 그가 생수를 네게 주었을 것이다.” 그 말은 결국 “네게 생수를 주고 싶다! 너는 가치 있는 존재다!”는 의미가 담긴 말입니다. 그런 무언의 인정이 그녀의 영혼을 얻는 원천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를 인정해 줄 때 큰 기쁨을 느끼고 그 사람에게 마음 문을 엽니다. 가끔 길을 모를 때 택시 기사에게 길을 묻습니다. 택시 기사들은 길 박사들입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길을 물으면 택시 기사들은 속속들이 길을 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대부분 친절하게 길을 가르쳐줍니다. 그처럼 인정이 중요합니다.
지금도 주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부탁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물을 좀 달라!”고 부탁합니다. 그 말은 “아무개 집사야! 너는 충분히 나를 도울 수 있다.”는 인정의 말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해도 우리는 주님에게 꼭 필요한 존재입니다. 자신의 가치를 인정하십시오. 사랑이 필요 없을 만큼 부자도 없고 사랑을 줄 수 없을 만큼 가난한 자도 없습니다. 하나님은 누구에게나 남을 도울 수 있는 자기만의 특별한 것을 주셨습니다. 그것을 가지고 영혼을 향한 주님의 목마름을 채워드리십시오.
4. 드리고 나누고 베푸십시오
본문 9절에서 사마리아 여인이 “왜 유대인이 사마리아 여자인 제게 물을 구합니까?”라고 도전적으로 말해도 본문을 보면 주님은 그녀를 끝까지 인내와 사랑으로 대합니다. 그처럼 사랑은 즉시 충고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깨닫기까지 오래 참는 것입니다. 만약 사랑에 인내가 없고 헌신이 없다면 그 사랑은 값싼 사랑이 됩니다. 요즘 가장 큰 문제는 사랑이 없는 것이 아니라 인내와 헌신이 없는 값싼 사랑이 많은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문제도 바로 그 문제입니다. 그녀에게 사랑의 이름으로 많은 사람이 접근했지만 모두 값싼 사랑이었습니다. 값싼 사랑은 영혼을 더 갈증 나게 합니다. 그래서 본문의 여인도 남편을 다섯 명이나 갈아 치우고 여섯 번째 남편과 살게 된 것입니다.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 그녀의 다섯 남편은 누구였을까요? 가상적으로 이런 추리를 해볼 수 있습니다.
첫째 남편은 인물이 좋았을 것입니다. 선악과처럼 보암직했지만 속이 비었고 자주 바람을 피웠습니다. 그래서 바람피우지 말라고 따지니까 심지어 때리기까지 해서 도망쳤습니다.
둘째 남편은 지식이 있었을 것입니다. 그 배운 지식으로 속이 꽉 찬 것처럼 보였지만 너무 고지식하고 재미도 없었고 가난했습니다. 그래서 빨리 팔자를 고치자고 관계를 끝냈습니다.
셋째 남편은 돈이 많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원하는 것은 다 가질 수 있었지만 가정보다 사업을 더 중시해서 돈 때문에 돌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위자료를 많이 챙기고 끝냈습니다.
넷째 남편은 권력이 있었을 것입니다. 권력의 맛은 꿀맛이어서 권력 휘두르는 기분이 끝내주게 좋았지만 매일 중상모략하고 남을 칠 궁리만 하는 것을 보고 환멸이 나서 끝냈습니다.
다섯째 남편은 평범한 농부였을 것입니다. 이제 모든 부귀영화가 다 귀찮고 평범한 것이 좋을 것 같아서 같이 농사를 하며 살았지만 얼마 후에 거울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 팍삭 늙어 보였습니다. 그래서 아무래도 밑지는 인생 같아서 관계를 끝냈습니다. 그런 식으로 만나고 헤어졌다가 현재는 아무 희망도 없이 그저 길거리에서 만난 남자와 살고 있었습니다. 그런 여인의 모습이 바로 현대인의 모습을 잘 나타냅니다.
왜 많은 현대인들이 그렇게 방황합니까? 가장 큰 이유는 헌신이 없기 때문입니다. 헌신이 커지면 공허가 작아지고 헌신이 작아지면 공허가 커집니다. 결국 ‘주는 삶’이 갈증과 공허를 극복하고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는 최고의 삶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의 마음을 얻고 인간관계를 튼튼히 하고 영혼의 갈증을 해소하려면 위로는 하나님께 드리고, 옆으로는 이웃과 나누고, 아래로는 어려운 사람에게 베푸는 ‘드나베의 삶’을 끊임없이 훈련하십시오.
어떤 사람이 아버지의 전도 문제로 기도하는데 어느 날 하나님이 지혜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좋은 것은 아버지께 다 드리기로 했습니다. 구두표 생기면 아버지께 드렸고, 갈비가 들어오면 아버지께 드렸고, 좋은 것은 다 아버지께 드렸습니다. 어느 날, 아버지가 말했습니다. “얘야! 내가 네 마음을 다 안다.” 그리고 그때부터 교회를 나가 결국 구원받았습니다. 대가를 바라지 않는 사랑의 선물 공세는 반드시 그 영혼을 얻게 만듭니다.
항상 ‘드나베의 삶’을 통해 자신의 사랑이 값싼 사랑이 되지 않게 하십시오. 대가를 치르는 사랑을 실천하고, 하나님의 일을 위해 힘써 헌신하고, 가난한 자를 열심히 돕고, 하나님의 일을 하는 거룩한 선교사들의 요청에 최선을 다해 응답하며 살면 삶에 보람과 기쁨과 행복이 넘치고 천국의 상급도 크게 될 것입니다.
< 계속된 사랑은 결국 먹혀듭니다 >
이상과 같이 영혼의 갈증 해소법을 4가지 살펴보았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역시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을 가지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여인의 방황도 결국 주님과의 만남을 통해서 끝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없으면 진로를 바꾸고 직업을 바꾸고 환경을 바꾸어도 영혼의 갈증은 피할 수 없습니다. 영혼의 갈증은 오직 하나님 품안에서만 해소될 수 있습니다.
자녀를 정말 잘 키우고 싶습니까? 그러면 자녀를 하나님 안에 있게 하십시오. 자녀를 잘 먹이고 잘 입히고 유학까지 시켜준다고 자녀가 잘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없는 풍요는 오히려 영혼을 더 망칩니다. 조금 못 살고 뒤쳐져도 “너의 앞길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는 믿음을 끊임없이 가르치며 하나님의 사랑과 약속 안에 머물게 하면 반드시 그 영혼에게는 가장 복된 길이 펼쳐질 것입니다.
요새 산다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겉으로는 옛날보다 더 자유롭게 사는 것 같지만 영혼은 더 감옥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특별히 현대인에게는 6가지 감옥이 있습니다. 공주병과 왕자병에 걸린 자기도취의 감옥, 남의 단점만 보는 비판의 감옥, 세상을 부정적으로 보는 절망의 감옥, 옛날을 그리며 현재를 낭비하는 과거지향의 감옥, 내 떡의 소중함은 모르고 남의 떡만 크게 보는 선망의 감옥, 그리고 남이 잘 되는 것을 보면 자꾸 헐뜯으려는 질투의 감옥이 바로 현대인의 6대 감옥입니다.
어떻게 그 영혼의 감옥에서 벗어납니까? 예수님을 깊이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인격이 변화되고 인생이 변화됩니다. 세상의 힘 있는 사람을 만나도 처진 어깨가 펴지는 느낌이 들고 심지어는 동네 경찰과 친분이 있어도 힘이 납니다. 하물며 하나님과의 깊은 만남이 있다면 그 영혼에 얼마나 놀라운 변화와 축복이 있겠습니까? 아무리 연약하고 부족한 사람도 예수님을 깊이 만나면 놀라운 변화의 주인공이 됩니다.
헬렌 켈러는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하고, 말하지도 못했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설리반(Sullivan)'이라는 고아 출신의 여자 선생님이 있었습니다. 설리반 선생님은 고아원에서 함께 의지하며 살던 남동생이 죽는 아픔을 당하면서 한때 정신병까지 걸렸습니다. 그러다가 주님을 만나고 일어섰습니다.
주님을 만나고 일어선 그녀는 헬렌 켈러를 자신이 맡겠다고 결심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가르칠 방법이 있겠느냐?”고 묻자 그녀는 말했습니다. “저는 예수님의 사랑을 확신해요.” 그리고 6살까지 아무 교육도 못 받은 헬렌 켈러에게 예수님의 사랑을 심어주었습니다. 드디어 헬렌 켈러가 예수님을 만났고, 결국 그녀는 보지 못하고, 듣지 못하고, 말하지 못하는 3중고의 인생으로서 24세에 하버드 대학(원래는 Radcliffe College로 나중에 하버드 대학으로 편입)을 졸업하는 기적의 주인공이 됩니다.
사람은 모두 약점과 열등감이 있지만 중요한 것은 그 약점과 열등감을 어떻게 극복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등소평은 150센티였지만 14억의 중국을 구했습니다. 위대한 지도자들 중에 키 작은 사람들도 많습니다. 열등감은 사람을 바라보고 비교하며 생기는 감정으로 결국 자기 현실만을 그대로 받아들이는 불신앙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깊이 만나면 열등한 조건과 상황을 극복하고 얼마든지 인물이 될 수 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끊임없는 사랑을 보내고 있습니다. 그 사랑에 반응하면 어떤 장벽이나 난관도 뚫고 나갈 수 있습니다.
이번에 84세 되신 저의 어머님이 고관절 골절로 입원하자 답답해하는 할머니를 위해 저의 둘째 딸 한나가 편지를 썼습니다. 그래서 “어머님! 한나가 쓴 편지를 보세요.” 하면서 편지를 드렸습니다. 어머님이 편지를 기쁘게 읽으셨습니다. “할머니! 안녕하세요? 예쁜 막내 손녀딸 한나에요... (중략) 제가 응원해드릴 테니까 빨리 회복되어 교회에 오세요. 할머니! 화이팅!” 그 편지를 읽고 어머님이 흐뭇한 미소를 지으시며 말했습니다. “한나가 글을 잘 쓰는구나!”
그 뒤에 하루에 두 번씩 병원에 갈 때마다 어머님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님! 어머님을 위해 한나가 편지를 썼어요.” 그러면 기억력이 없으신 어머님은 매일 새로운 편지를 받은 줄 아시고 똑같은 편지를 흐뭇한 표정을 하며 소리 내어 읽으셨습니다. 그리고 다 읽은 후에는 여지없이 똑같은 말씀을 하셨습니다. “한나가 글을 잘 쓰는구나!”
그 편지 하나로 10번 이상 어머님을 기분 좋게 해드렸습니다. 그리고 어제 오전에도 또 어머님에게 말했습니다. “어머님! 한나가 어머님을 위해 편지를 썼어요.” 그런데 어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 편지를 내가 봤었지?” 마침내 11번째 만에 어머님이 그 편지 받은 것을 기억해내셨습니다. 비록 11번째 만이지만 어머님이 그 사실을 기억해내신 것을 보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때 “계속된 사랑은 결국 먹혀든다.”는 진리를 새삼 깨달았습니다.
요새 사람들은 은혜에 대한 기억력이 너무 나빠졌습니다. 큰 은혜를 받고도 금방 은혜를 잊어버립니다. 그래도 하나님의 계속된 사랑은 결국 먹혀듭니다. 인간이 연약해서 하나님의 은혜를 금방 잊어버리고 또 다시 낙심하고 실망하고 비뚤게 행동하지만 그래도 계속된 하나님의 사랑은 결국 먹혀들어서 그 사랑이 어떤 어려운 현실도 극복하게 하는 엄청난 힘의 원천이 됩니다. 이제 하나님의 사랑에 힘써 반응하고 거룩한 일에 더욱 동참함으로 인생 뒤집기에 성공해서 헬렌 켈러처럼 역전 인생의 주인공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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