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신글모든게시글모음 인기글(7일간 조회수높은순서)
m-5.jpg
현재접속자

명설교 모음

택스트 설교

설교자'가 확실한 설교만 올릴 수 있습니다.

선택은 특권이 아닌 책임

출애굽기 이한규 목사............... 조회 수 2461 추천 수 0 2010.09.08 12:09:06
.........
성경본문 : 출19:1-6 
설교자 : 이한규 목사 
참고 : 이한규 http://www.john316.or.kr 

선택은 특권이 아닌 책임 (출 19:1-6)

 

 <선택은 책임입니다 >

 요새 인터넷을 보면 기독교를 무섭게 욕하는 사람들을 봅니다. 그 심리를 이해합니다. 저도 믿지 않았을 때는 믿는 친구들에게 상처 주는 말을 많이 했었습니다. 아직도 살만 하니까 기독교인을 욕하다가 생명의 근원이신 예수님까지 욕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혼이 캄캄한 절망을 만나고 죽을 것만 같고 희망은 없고 너무 외로우면 결국은 주님을 찾게 됩니다. 저도 그렇게 주님 앞에 항복했습니다.

 가끔 들어보면 기독교인 중에도 사기꾼이 많다고 합니다. 그러나 불신자만큼 많겠습니까? 아내가 믿는다고 하면 아내의 마음을 빼앗길까봐 싫어하는 남편도 있지만 믿는 아내가 바른 교회를 다니며 하나님 말씀의 통제를 받으면 결국은 남편에게로 마음이 더 향합니다. 사실 배우자가 어떤 모임 나가서 삼겹살 뜯고 술 마시는 것보다는 매주 예배 자리에 나가서 말씀을 듣는 것이 얼마나 안심이 됩니까? 말씀대로 살지 못한다고 말씀 듣는 것까지 막는 것은 더 큰 불행을 자초하는 행위입니다.

 자세히 보면 믿는 사람들도 믿지 않는 사람들과 거의 똑같은 죄를 짓습니다. “믿는다면서 왜 똑같으냐?”라고 말하면 할 말이 없지만 기독교인과 비 기독교인의 가장 큰 차이는 무엇입니까? 기독교인은 죄를 지으면 마음이 더 편치 않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죄와 싸우려고 투쟁합니다. 죄와 싸워 이기지 못하는 것은 안타깝지만 그래도 그런 투쟁이 있다는 것 자체가 말씀을 듣는 삶의 축복입니다.

 기독교인 중에서도 사기꾼이 있지만 그래도 사기꾼의 비율은 아무래도 낮습니다. 그래도 기독교인이 사기 치면 왜 기독교인임을 강조하면서 더 욕합니까? 비 기독교인의 괜히 미워하는 잘못도 있지만 기독교인이 되면 마치 특권적인 지위를 받은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는 일부 기독교인의 잘못도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도가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이 있습니다. 그것은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라는 사실입니다.

 며칠 전에 한 학원 원장이 찾아와 네트영어를 자기 학원에서도 도입하고 싶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다음 학기부터 시작하자고 대화를 끝낸 후에 전도했습니다. 그런데 그분도 고등학교 때까지는 교회를 다녔는데 고등학교 때 유대인이 팔레스타인 사람을 학살한 신문보도를 보고 “나는 앞으로 교회를 안 나가겠다.”고 다짐했다고 합니다.

 많은 사람들이 유대교와 기독교를 비슷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유대교와 기독교는 뿌리는 같아도 내용은 많이 다릅니다. 왜 역사적으로 유대인이 세계 각국의 미움을 많이 받았습니까? 그들의 선민의식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란 사실을 외면했습니다. 그처럼 선민이라면서 그에 따른 책임적인 삶은 살지 않았기에 다른 국가와 민족으로부터 미움을 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를 특권이 아닌 책임으로 승화시키십시오. 그래야 유대교의 전철을 따르지 않게 됩니다. 특별한 은혜를 받았으면 특별한 책임을 느끼는 ‘노블리스 오블리제(고귀한 자의 책임)’의 자세를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특별한 은혜도 계속됩니다.

 영국 왕실에서는 아들을 똑같이 군대에 보내고, 전쟁 때도 앞장서 싸우게 합니다. 때로는 전사도 합니다. 그러면 백성들이 “왕의 아들이나 대공의 아들이 전투 중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왕과 대공을 존경하며 더욱 애국심을 발휘합니다. 그처럼 선택을 특권이 아닌 책임으로 알 때 거기에서 리더십이 나오듯이 성도는 구원받고 축복 받은 것을 이웃을 섬기라는 책임과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 제사장과 제사장 나라 >

 본문 1절 말씀을 보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이 수르 광야, 신 광야, 르비딤을 지나 시내 광야에 이르렀습니다. 광야의 힘든 여정을 지내면서 애굽의 압제를 벗어나 자유롭게 하나님을 섬기며 살겠다는 그들의 비전은 점차 약해졌습니다. 결국 광야의 어려운 환경에서 누군가 불평했습니다. 사람은 감정에 휩쓸리기 쉬워서 한 사람이 불평하면 금방 감사를 잊고 그 불평에 물들기 쉽습니다. 그러나 인생 전체를 볼 때 불평은 언제나 실수입니다.  

 그들은 애굽에서는 사람취급을 못 받던 노예백성이었습니다. 노예가 자유를 얻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을 얻은 것이나 다름없기에 출애굽의 은혜는 사상 최대의 은혜였습니다. 그러나 힘든 환경에서 그 엄청난 은혜를 잊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은혜를 상기시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4절). “내가 애굽에서 어떻게 행했고 독수리 날개로 너희를 업어 내게 이끈 것을 너희가 보지 않았느냐?”

 그 은혜를 상기시키고 다시 언약을 새롭게 하며 하나님 말씀을 잘 지키면 하나님의 소유된 백성이 되고 제사장 나라와 거룩한 백성이 되게 하시겠다고 했습니다(5-6절). 고대에 제사장이 된다는 것은 엄청난 특권이었습니다. 그때는 왕도 제사장을 함부로 못했습니다. 그러나 그 특권을 책임으로 발전시켜야 그 특권이 진짜 축복이 되고 또한 그 특권이 없는 사람도 그 특권을 가진 사람을 존경하고 존중합니다.

 특권은 보통 사람을 부리면서 누리며 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고 보통 사람을 돌보면서 희생하고 헌신하라고 주어진 것입니다. 제사장은 자기감정도 봉헌해야 했습니다. 가족이 죽어도 슬픔을 지나치게 표출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야 고통에 빠진 영혼에게 든든한 믿음의 기반 역할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백성들을 위해 제사를 드리고,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복과 평안을 빌어주어야 했습니다. 그처럼 제사장은 특권을 누리는 사람이 아니라 책임을 지고 섬기는 사람입니다. 즉 제사장은 감투로 주어진 직분이 아니라 헌신하라고 주어진 직분입니다. 성도가 되고 제직이 된 것도 감투로 주어진 직분이 아니라 헌신하라고 주어진 직분입니다.

 고대 유대 제사장은 자기 귀에 피를 발랐습니다. 말씀대로 살겠다는 뜻입니다. 엄지손가락에도 피를 발랐습니다. 자기의 재능을 하나님을 위해 쓰겠다는 뜻입니다. 발가락에도 피를 발랐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곳으로 가겠다는 뜻입니다. 또한 제사장들은 백성을 깨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아침마다 은 나팔을 불었고, 그 나팔로 안식일과 희년을 선포하고 전쟁의 경보를 울리면서 백성들을 일깨우는 일을 했습니다.

 그처럼 백성들 중에 제사장이 선택되듯이 나라 중에도 제사장 나라로 쓰이는 나라가 있습니다. 구약 때는 이스라엘이 제사장 나라로 쓰임 받았습니다. 그런데 그 제사장 나라의 특권을 책임으로 인식하지 않으면 그 특권적인 축복은 사라집니다. 바로 그것이 역사가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역사를 통해 배우는 가장 큰 진리는 무엇입니까? 아무도 역사의 교훈을 즐겨 배우려고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19세기 이후에는 미국이 하나님의 일에 많이 쓰임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1963년, 미국의 케네디 대통령이 공립학교에서 성경교육을 금지하면서 그 후 미국의 근간을 이루던 청교도 정신은 점점 약해지고 있습니다. 경제도 힘들어지면서 복음을 세계로 수출하던 선교대국이 지금은 돈 부족으로 보낸 선교사들을 불러들이고 있습니다. 그런 상황에서 누가 새로운 제사장 국가가 되어 전 세계 복음화의 책임을 감당하겠습니까?

< 한국 교회의 사명 >

 1963년 케네디 대통령이 미국 공립학교에서 성경교육을 금지시키던 같은 해에 공교롭게도 미국 의회에서 한국인의 이민법이 통과되었습니다. 그 뒤 한국인의 미국행 이민물결이 계속되었고 이민자들이 미국에 가면 꼭 교회를 세웠습니다. 그것은 미국을 다시 깨우는 영적인 불쏘시개로 한국인을 사용하려는 하나님의 뜻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또한 지난 몇 십 년간 한국 교회는 엄청난 성장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그 축복을 책임으로 느끼는 성숙함만 있으면 한국 교회는 제사장 나라가 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25시의 작가 게오르규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현대 문명은 24시에서 한 시간을 넘어섰다. 그리고 인류의 새 문명은 동방에서부터 다시 일어날 텐데 그 중심은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일 것이다.” 인도의 시성 타골도 삼일운동 당시 한국을 예찬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일찍이 아시아의 황금 시절에 빛나던 너 한민족이여! 그 등불이 켜지는 날 너는 또 다시 세계의 빛이 되리라.”

 1910년 영국 에딘버러에서 열린 세계 선교 대회에는 세계 도처의 155개 선교 단체가 참석했습니다. 그때 큰 화젯거리는 ‘한국 교회의 성공’이었습니다. 당시 세계에서 수요일 성경 공부에 가장 많이 참석하는 열심 있는 교회가 한국 평양에 있는 장대현 교회였습니다. 세계에서 가장 큰 신학교도 평양에 있었습니다.

 기독교를 받아 들인지 26년 밖에 안 된 한국 교회의 성장을 보고 참석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근세사의 신비’라고 했습니다. 그때 성공 이유를 분석하는 광범위한 토론 끝에 한국 선교의 성공이유를 ‘한국인의 소박한 신앙 때문’이라고 결론지었습니다. 한국인은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유를 따지지 않고 그대로 믿었습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면 그대로 믿었고, 기도가 제일이라면 무릎에 피멍이 들 정도로 기도했습니다.

 한국 사람이 비과학적인 민족백성이기에 그랬을까요? 아닙니다. 태국에 선교하러 간 미국 선교사들이 선교 55년 만에 첫 세례자를 얻었습니다. 그렇다고 태국인이 한국인보다 더 과학적인 사람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한국인에게 기독교에 있어서만은 소박한 마음을 주셨기에 한국 선교의 성공은 가능했습니다.

 예전에 한국 감리교회의 웰치 감독은 “한국 선교의 성공은 신비하고 정서적인 한국인의 성품 때문이다.”라고 진단했습니다. 한국인은 정이 많습니다. 그래서 이천년 전에 예수님이 죄인을 위해 돌아가셨다는 사실을 들으면 눈물을 쏟을 줄 알았고,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셨으니 나도 십자가를 지자.”고 하는 은혜를 아는 성품을 가졌습니다.

 게일(J. S. Gale) 목사는 “한국인의 세상에 맞지 않는 성품이 한국 선교의 성공 이유다!”라고 진단했습니다. 세상에 맞지 않으니 세상적으로 살아야 손해만 보니까 하나님을 찾아 교회로 몰려든 것입니다. 하나님은 한국인에게 하나님을 사모해야 채워지는 영적 진공을 크게 만드셨습니다. 그 영적인 진공이 바로 하나님이 선택한 표시가 아닐까요?

 그 선택적인 은혜로 한국 교인수가 천만 명을 넘었습니다. 그러나 항상 잊지 말아야 할 사실은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이다.”라는 사실입니다. ‘한민족의 선택’이 ‘타민족의 외면’을 의미하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선택한 것은 소수로서 다수를 섬기기 위한 것처럼 하나님이 한국을 택한 것은 세계를 섬기게 하려는 하나님의 계획입니다. 그 계획을 외면하고 선택을 책임으로 연결시키지 않으면 선택이 오히려 화근이 됩니다.

 어떻게 보면 선교는 한민족에게 숙명과도 같은 사명입니다. 실제로 고난 받는 예수님처럼 고난을 거친 백성만이 세계선교를 잘할 수 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역사적으로 고난을 많이 받았고 동시에 현재 기독교가 융성한 한국은 지구상에서 제사장 나라가 되기에 가장 합당합니다. 그러나 ‘제사장 나라’로 선택된 것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입니다. 그래서 제사장 나라로서 남을 복되게 하기 위해 선교에 힘써야 합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축복과 특권을 나눔으로 통로로 삼는 책임적인 성도가 절실하게 필요한 때입니다.

< 자기 변화를 우선하십시오 >

 요새 책임전가 싸움이 치열합니다. 성경에는 온갖 피해자들이 많이 등장해도 피해주의 사상은 전혀 동정하지 않습니다. 미국의 플립 윌슨(Flip Wilson)이란 코미디언은 “시단이 시켜서 그랬어요.”란 말로 사람들을 엄청나게 웃겼습니다. 왜 사람들이 그 말에 그렇게 웃었을까요? “사단 때문이다.”라는 말이 너무나 웃기는 말이라는 뜻입니다. 어떤 유혹이 와도 결국 선택은 자신에게 달렸습니다. 그러므로 누구에게도 책임을 전가하지 마십시오.

 “나는 피해자다.”라고 항상 징징거리는 사람을 ‘어른 울보’라고 말합니다. 한 재판정에서 어른 울보가 말했습니다. “가정환경이 나빠서 그랬어요. 항상 왕따 당해서 피해의식에 젖어 그 일을 저질렀어요.” 그런 식의 변호가 재판에서 얼마나 많습니까?

 미국에 유명한 라일과 에릭 메넨데즈(Lyle and Eric Menendez) 사건이 있었습니다. 라일과 에릭 형제는 부모를 잔인하게 살해한 후 119에 전화해 마피아가 그랬다고 했습니다. 심지어 에릭은 장례식에서 눈물로 조사를 읽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1400만 달러를 물려받아 흥청망청 썼습니다. 그로부터 몇 달 후 그들은 심리학자와 대화하면서 잔인한 부모 살인행위를 털어놓았습니다. 그리고 많은 돈으로 유능한 변호사를 샀습니다.

 변호사들이 부모에게 16발의 총을 쏜 그를 어떻게 변호했겠습니까? 뻔합니다. 살해당한 부모를 희대의 악마로 몰고 살인자 아들들은 피해자로 둔갑시키는 일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부모로부터 치욕적인 성폭행을 당한 피해자로 변호되었습니다. 결국 그들이 법정에서 배심원 불일치 판결로 풀려날 때 그 기막힌 사법부의 코미디에 전 미국 국민은 치를 떨었습니다.

 그처럼 법정을 가면 피해자가 오히려 악한으로 신랄하게 공격받고 악한이 오히려 피해자로 둔갑되는 경우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악한이 “나는 피해자다. 책임이 없다.”고 책임을 회피하면 그 공동체는 무너집니다. 물론 나쁜 가정환경이나 나쁜 어떤 환경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는 있습니다. 그러나 피해 논리에 빠지면 안 됩니다. 성도는 상처를 믿음과 용서로 극복하고 피해자(victim)에서 승리자(victor)가 되어야 합니다.

 책임을 회피하지 마십시오. 이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장면은 책임지는 장면입니다. 이철환 씨의 <연탄길>을 보면 ‘아빠는 우리 가정의 지붕’이란 글이 있습니다. 어느 날, 저자의 아빠가 회사에서 퇴출당했습니다. 가정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아들이 학교에서 돌아와 말했습니다. “아빠! 친구들이 내 신발을 보면서 거지 신발이래.” 그 말에 아빠의 마음이 얼마나 찢어질 듯 아팠겠습니까?

 그 날 밤, 비가 억수로 쏟아졌습니다. 집이 새서 안방이 물바다가 되었는데 아빠가 잠깐 나간다고 했다가 밤 1시에도 돌아오지 않습니다. 식구들이 걱정되어 밖으로 찾아 나섰다가 찾지 못하고 돌아오는데 그때 지붕 위에 검은 그림자가 보였습니다. 한 남자가 우산을 받쳐 들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까 아빠였습니다. 놀라서 아빠를 부르려는데 엄마가 말렸습니다. “얘야! 부르지 말라. 아빠가 가장의 책임을 못하니까 저렇게라도 해서 책임을 지려고 하는데 아빠의 보람을 망가뜨리지 말자.”

 그처럼 책임지는 모습은 가슴을 뭉클하게 합니다. 이제 책임지는 성도가 되십시오. 문제가 생기면 그 책임을 남에게 돌리지 마십시오. 내 책임도 있다고 생각하십시오. 책임이 없어도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가끔 보면 “저 사람은 좀 이렇게 변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책임지는 사람은 언제나 자기변화를 먼저 생각합니다. 그때 진정한 변화의 역사가 나타납니다.

 어느 교회에 말썽꾼 교인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이 너무 힘들어서 하루는 단단히 결심했습니다. “그를 변화시켜 새롭게 만들리라. 아니면 쫓아내리라.” 그리고 열심히 기도했습니다. “주님! 그를 변화시켜 주소서. 아니면 교회를 떠나게 하소서.” 그때 주님이 이런 음성을 들려주셨습니다. “아무개야! 나도 그를 고칠 능력이 없어서 죽었다. 고칠 능력은 없지만 죽을 능력은 있지? 그를 고치는 것보다 네가 죽는 것이 쉽단다.” 그 음성을 듣고 목사님이 기도를 바꾸었습니다. “주님! 저를 변화시켜 주소서.” 그때부터 마음에 평안이 임했습니다.

 남을 바꿔달라고 하면 아무리 간절히 금식기도를 해도 하나님은 그런 기도에 응답하지 않습니다. 기독교의 진리는 죽는 길이 사는 길이라는 것입니다. 기도도 자기를 죽이려는 기도가 천하를 얻는 기도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자신을 먼저 죽이십시오. 바로 그것이 성도가 따라야 할 주님의 길입니다.

 ‘사’자 들어가는 직업의 대부분은 ‘선비 사(士)’자가 들어간 것입니다. 오직 ‘교사(敎師), 의사(醫師), 목사(牧師)’의 3대 직업만이 ‘스승 사(師)’자가 들어갑니다. 그런데 저는 가끔 네트영어 식으로 생각하면서 목사의 ‘사’자는 ‘죽을 사(死)’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목회는 죽어야 제일 잘할 수 있습니다. 목사가 조용히 죽으면 교인들도 따라서 조용히 죽으면서 교회가 조용해집니다. 결국 어느 공동체든지 자신이 죽지 않기에 공동체가 시끄러운 것입니다. 알고 보면 남 책임이 아니라 내 책임입니다.

 그 원리는 너무 잘 알지만 자기를 죽이는 것이 얼마나 힘듭니까? 교회에서 기도하고 자기를 죽인 줄 알았는데 집에 오는 길에 운전하면서 누가 끼어들면 죽은 자신이 순식간에 부활할 때가 얼마나 많습니까? 그처럼 자기를 죽이는 것은 힘들지만 그래도 계속 십자가를 지려는 책임적인 사람이 되면 결국 영혼도 달라지고, 가정도 달라지고, 공동체도 달라질 것입니다. 항상 선택은 특권이 아니라 책임임을 깨닫고 책임지는 헌신적인 사랑으로 내일의 축복을 예비하며 사는 복된 심령들이 되십시오.

ⓒ 글 : 이한규http://www.john316.or.kr

List of Articles
번호 제목 성경본문 설교자 날짜 조회 수
4111 신명기 되찾아야 지켜야 할 하나님의 계명! 신30:11-20  이정수 목사  2010-09-08 1985
4110 시편 내 영혼아 네가 어찌하여 내 속에서 불안한가? 시42:1-43:5  이정수 목사  2010-09-08 4139
4109 시편 찬양의 유익함이 무엇인가? 시108:1-5  이정수 목사  2010-09-08 3283
4108 마태복음 세례 받으셨습니까? 마28:18-20  이정수 목사  2010-09-08 1998
4107 요한복음 니고데모의 용기 요3:1-21  이정수 목사  2010-09-08 2892
4106 시편 거룩한 바람이신 성령이여 오시옵소서! 시51:10-11  이정수 목사  2010-09-08 2244
4105 빌립보서 항상 기뻐하십시오! 빌4:4  이정수 목사  2010-09-08 2221
4104 마가복음 의심 섞인 희미한 믿음도 믿음은 믿음입니다 막9:14-29  이정수 목사  2010-09-08 2225
4103 사무엘상 한나의 서원 기도 삼상1:1-2:21  이정수 목사  2010-09-08 4469
4102 요한복음 부활하신 예수께서 만난 사람들 요11:17-27  이정수 목사  2010-09-08 2190
4101 마가복음 예수께서 받으신 십자가 고난의 의미는 무엇인가? 막15:1-47  이정수 목사  2010-09-08 2587
» 출애굽기 선택은 특권이 아닌 책임 출19:1-6  이한규 목사  2010-09-08 2461
4099 요한복음 말씀에 맛 들이십시오 요5:40-47  이한규 목사  2010-09-08 2211
4098 요한복음 예수님에 대한 4대 증거 요5:30-39  이한규 목사  2010-09-08 2113
4097 요한복음 기도를 포기하지 마십시오 요5:19-29  이한규 목사  2010-09-08 2456
4096 요한복음 안식일에 대한 3대 정의 요5:16-18  이한규 목사  2010-09-08 2082
4095 민수기 적시에 북을 치십시오 민14:39-45  이한규 목사  2010-09-08 1875
4094 요한복음 추구해야 할 3가지 삶 요5:8-15  이한규 목사  2010-09-08 2254
4093 요한복음 피해야 할 3가지 삶 요5:1-7  이한규 목사  2010-09-08 2578
4092 요한복음 치유를 위해 필요한 2가지 요4:43-54  이한규 목사  2010-09-08 2305
4091 요한복음 구원과 축복의 통로 요4:31-42  이한규 목사  2010-09-08 2361
4090 요한복음 계속된 사랑은 결국 먹혀듭니다 요4:1-10  이한규 목사  2010-09-08 1815
4089 요한복음 가장 복된 행위 요4:22-30  이한규 목사  2010-09-08 1902
4088 요한복음 삶으로 드리는 예배 요4:19-21  이한규 목사  2010-09-08 2594
4087 요한복음 주님과의 깊은 만남 요4:10-18  이한규 목사  2010-09-08 2215
4086 요한복음 제한이 없는 광폭 사랑 요4:1-9  이한규 목사  2010-09-08 2036
4085 요한복음 하늘에서 내린 참 떡 ..... 요6:30-33  이정원 목사  2010-09-06 2238
4084 요한복음 하나님의 일 ..... 요6:22-29  이정원 목사  2010-09-06 1861
4083 요한복음 예수 믿는 목적..... 요6:22-29  이정원 목사  2010-09-06 2475
4082 요한복음 이적보다 귀한 것 ..... 요6:14-21  이정원 목사  2010-09-06 1897
4081 요한복음 감사와 기적 ..... 요6:1-15  이정원 목사  2010-09-06 2802
4080 예레미야 토기장이 하나님 렘18:1-11  정용섭 목사  2010-09-06 3958
4079 누가복음 안식일과 해방 눅13:10-17  정용섭 목사  2010-09-06 2426
4078 에배소서 주는 우리의 평화! 엡2:14-18  정용섭 목사  2010-09-06 2329
4077 히브리서 영원한 본향 하늘나라 히11:8-16  정용섭 목사  2010-09-06 2980

설교를 올릴 때는 반드시 출처를 밝혀 주세요. 이단 자료는 통보없이 즉시 삭제합니다.

    본 홈페이지는 조건없이 주고가신 예수님 처럼, 조건없이 퍼가기, 인용, 링크 모두 허용합니다.(단, 이단단체나, 상업적, 불법이용은 엄금)
    *운영자: 최용우 (010-7162-3514) * 9191az@hanmail.net * 30083 세종특별시 금남면 용포쑥티2길 5-7 (용포리 53-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