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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선순환과 악순환

마가복음 김필곤 목사............... 조회 수 2869 추천 수 0 2010.09.11 17:59: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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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본문 : 막7:1-23 
설교자 : 김필곤 목사 
참고 : 성남열린교회 http://www.yeolin.or.kr 

2 주전에 탄천 자전거 도로로 자전거를 타고 점심밥을 먹으로 가는데 악취가 진동했습니다. 평소에는 흐르는 물을 보며 기분 좋게 가는 길인데 냄새가 고약하게 났습니다. 탄천의 일부를 막고 공사를 하는데 바닥이 드러나니까 그 바닥에서 악취가 진동하였습니다. 그것을 보고 문득 떠오르는 생각이 “그래 속이 드러나면 냄새가 나는 것이야”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자전거를 타고 가면서 계속 생각이 이어졌습니다. “꽃은 속이 드러나면 향기가 나지만 사람은 속이 드러나면 냄새가 난다”는 생각으로 발전하였습니다. 더러운 바닥도 물로 덮여 있으면 냄새가 나지 않습니다. 저를 생각해 보았습니다. 저 역시 속을 드러내면 더럽습니다. 그러나 우리 하나님의 은혜의 물로 덮어놓으니까 그래도 냄새가 드러나지 않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생각이 여물어서 이번 주 주보 표제시를 썼습니다. 잠깐의 악취와의 만남이 어떤 생각의 열매로 맺히게 되었는가 잠깐 주보 표지를 보시기 바랍니다.
[좋은 냄새만 맡고 살고 싶지만/ 늘 좋은 냄새만 맡고 살수 없습니다./ 꽃은 속을 드러내면 향기가 나지만/ 사람은 속을 드러내면/ 냄새가 나기 때문입니다. // 사람 냄새가 싫다고/ 홀로 살순 없습니다. / 홀로 있어도 냄새는 역하지만/ 스스로 맡지 못할 뿐이지/ 입만 벌려도 냄새는 진동합니다.// 풋보리 향기로 고향 냄새/ 고이 간직하고 싶지만/ 초여름 햇살은 바로 늙지 않아/ 풀잎 냄새 가득한 세상으로/ 놓아두지 않습니다. // 풀 익고 나무 때는 냄새 아니어도/ 길 떠난 사람에겐 간장 달이는 / 냄새 진동하는 고향 저녁도 그립고/ 분뇨 냄새 뿜어내는 눈에 선한/ 들녘도 그립지만 그래도 /숨쉬는 곳에서는 역겨운 냄새를 피하고 싶습니다. //좋은 냄새만 맡고 살고 싶지만/ 늘 좋은 냄새만 맡고 살수 없습니다./ 비 오는 날 젖은 풀 냄새도/ 오래 묵으면 익숙해지고/ 익숙해진 만큼 어떤 냄새도/ 상처가 되지 않습니다./ 새들은 꿈에서도/ 나무 냄새를 맡습니다.]
만약 제가 악취를 맡으면서 분노의 생각을 가졌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공사하는 사람들을 찾아가 그 분노를 표현하고 멱살잡이를 하였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아마 오늘 이곳에서 설교하지 못하고 유치장에 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는 살면서 다양한 사람들, 그 사람들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다양한 상황과 사건을 만나면서 삽니다. 그 때 마음을 선순환하느냐 악순환하느냐에 따라 인생은 커다란 차이가 납니다.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에 따라 선순환으로 행복한 인생이 될 수도 있고 악순환으로 불행한 인생이 될 수도 있습니다.
지난 주 충남 보령에서 일가족을 잔인하게 살해한 범인이 잡혔다는 기사를 보았습니다. 부모에게 악감을 가졌습니다. 계속해서 마음이 악순환합니다. 2003년 아버지를 농기구로 찔러 살해하려다 미수에 그치고 처벌을 받았답니다. 이후 마을 주민들이 자신을 냉대와 비난하는 것으로 받아들입니다. 마음이 계속 악순환하는 것입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는 것입니다. 김씨 가족이 자신을 비난하고 헛소문을 퍼뜨렸다고 생각합니다. 결국 마음의 악순환을 끊지 못하고 일가족 3명을 잔인하게 살해해 버렸습니다. 그는 살해한 이유는 자신을 무시한 것에 대한 응분의 복수라고 했다고 합니다. 김씨네 집사람들이 자신에 대해 헛소문을 퍼뜨리고 무시해서 죽였다고 했답니다. 마음의 악순환를 끊지 못한 사람이 얼마나 철저하게 인생이 파괴되는지를 보여주는 사건입니다.
오늘 성경에 나오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바로 그런 사람들입니다. 마음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예수님을 비난하고 시기하고 결국 십자가에 못박게 하고 철저하게 역사속에서 파괴된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이미 살펴보았듯이 예수님 이 땅에 오셔서 얼마나 좋은 일들을 많이 했습니까? 절망하는 백성들에게 희망을 제시합니다.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고통받는 백성들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중풍병자를 치유해 주었습니다. 12년 동안 혈루증을 앓은 여인을 고쳐 주었습니다. 죽은 야이로의 딸을 살려 주었습니다. 굶주린 백성 2만여 명을 먹여 주었습니다. 당시 정치인들이 하지 못할 일을 해 주신 것입니다. 경제인들이, 사회 지도층들이 해 주지 못할 일을 예수님께서 해 주었습니다. 이렇게 백성들에게 희망을 주고 좋은 일을 하면 박수치고 환영할 일이 아니겠습니까? 요즈음 우리 교회가 예배당 건축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습니다. 예배당 건축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고 헌금하고 봉사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하겠습니까? 격려하고 위로하고 희망을 주고 협조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그런데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마음과 동일시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믿고 있는 하나님의 일을 예수님이 한다고 보지 않았습니다. 동역자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협력자로 돕지 않았습니다. 그들과 함께 같은 목적을 가지고 일하는 분이 아니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도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이 자신들과 같이 하나님의 일을 한다고 보지 않은 것입니다. 동일시하면 우리도 예수님처럼 불쌍한 사람들을 도와주고 용기를 주고 격려하자고 생각하였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은 예수님을 적대시하였습니다. 적대시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의 마음은 어떤 상황을 만날 때 네 가지로 구분이 됩니다. 이용자냐, 동역자이냐, 경쟁자이냐, 적대자이냐에 따라 마음의 방향이 결정되어 버립니다. 악순환으로 나갈 것이가 선순환으로 나갈 것인가가 결정되어 버립니다. 오늘날 회사나, 교회, 사회, 가정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동역자로 생각하면 협력합니다. 호의적입니다. 격려합니다. 경쟁자로 생각하면 비교하며 이기기 위해 갖은 방법을 강구합니다. 그러나 적대자로 서면 매사 적대시하고 비판합니다. 사소한 것을 물고늘어집니다. 시기합니다. 제거하기 위해 갖가지 권모술수를 사용합니다. 바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예수님의 사역에 사사건건 반대하여 적대자로 선 사람들입니다.

이미 우리가 마가 복음에서 살펴보았듯이 그들은 틈만 나면 예수님을 올무를 걸어 넘어뜨리려고 했습니다. 누구와 밥먹는 것을 시비거리로 삼습니다. 예수님과 제자들이 죄인들과 세리들과 함께 식사를 합니다. 그것이 무엇이 잘못되었습니까? 그런데 이들은 시비합니다. “바리새인의 서기관들이 예수께서 죄인과 세리들과 함께 잡수시는 것을 보고 그 제자들에게 이르되 어찌하여 세리와 죄인들과 함께 먹는가 (막 2:16)”라고 시비합니다. 병자를 고쳐주는 일도 시비거리로 삼습니다. 안식일에 병자를 고칩니다. 얼마나 좋은 일을 한 것입니까? 그런데 시비를 하는 것입니다. 안식일에 노동을 했다는 것입니다.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저희가 어찌하여 안식일에 하지 못할 일을 하나이까 (막 2:24)”라고 시비를 걸며 비난합니다. 그리고는 그들은 “헤롯당과 함께 어떻게 하여 예수를 죽일꼬 의논(막 3:6)” 합니다.

마음 자체가 상대를 적대자로 생각하면 어떤 일이 있어도 넘어뜨리고 죽일 구실만을 찾는 것입니다. 그것이 한 순간으로 끝이 나지 않습니다.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전까지는 악순환이 계속됩니다. 자신의 잘못이 들어 나고 자신이 하는 행동이 신앙인으로 할 짓이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하여도 포기하지 않습니다. 집요합니다. 끝장으로 보려고 합니다. 상대를 어떻게든 넘어뜨리고 상대의 사역을 방해하여 자신의 정당성을 입증하려고 합니다.

오늘 성경을 보십시오. 이제 예수님께서 2차 갈릴리 사역을 끝마치고 3차 갈릴리 사역을 시작할 때입니다. 막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사역을 시작하려고 하는데 찾아온 사람들이 누구입니까?
늘 악감을 품고 있는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입니다. 이들이 찾아와서 무엇을 합니까? 오자 마자 시비를 거는 것입니다. 무슨 일로 시비를 겁니까? 2절을 보십시오. 제자들이 손을 씻지 않고 떡을 먹는다는 것입니다. 5절을 보십시오. 노골적으로 적대감을 표현합니다.
그들의 판단 기준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뜻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입니까? 옳고 그름의 문제입니까? 전통문제입니다. 장로들의 유전문제입니다. 하나님을 잘 섬긴다고 자신들이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을 종교적으로 속박하여 자신의 기득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활용되는 것입니다. 요즈음 말하면 새벽기도 열심히 하시는 목사님이 새벽기도 안 하는 장로님을 새벽기도도 못나온 장로가 무슨 말을 하느냐고 모든 것을 그것을 잣대로 평가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헌금 많이 하는 장로님이 헌금 못하는 장로님을 헌금으로 모든 것을 평가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봉사 많이 하는 집사님이 모든 것을 봉사로 평가해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왜 장로들의 전통을 지키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장로들의 유전인 미슈나 6부 제 11편 4장에는 식사 전에 손을 씻으라는 규율이 나옵니다. 한 사람이 손을 씻을 경우 현대 수량으로 계량하면 물 0.5리터를 부어서 잘 씻으라고 했습니다. 랍비 아키바는 “감옥에서 손 씻지 않고 먹기보다는 차라리 굶는 것이 났다”라고 할 정도였다고 합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바로 이 전통을 어겼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이런 잣대를 가지고 있으면 결국 마음은 악순환을 계속합니다. 남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도구로 사용합니다. 남을 올무에 넘어뜨리는 도구로 사용하는 것입니다.

이 마음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으로 바꾸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1. 첫째가 주님을 구주로 영접하고 겉모습이 아니라 본질을 보는 마음으로 바꾸어야 합니다. /예수님 영접
예수님은 왜 이 땅에 오셨습니까? 이미 막2:16절에서 그들의 죄인들과 음식 먹는 것으로 시비할 때 왜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고 가르쳐 주었습니까?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부르러 왔노라 하시니라(막 2:17)”
왜 그렇게 수많은 기적을 베풀어주었습니까? 예수님이 메시아, 하나님의 아들인 것을 알려 주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은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고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전하는 것을 직접 보기도 하고 듣기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여전히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말씀합니다.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요 1:12)”다고 말씀합니다. 사람이 마음에 악감정을 품고 악순환을 계속 일으키는 첫 번째 요인은 그 사람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교회도 회사도 마찬가지입니다. 계속적인 마음의 악순환을 일으키는 사람들을 보면 사장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목회자의 권위를 인정하지 않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은 그 당시 최고 종교 지도자들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를 외면하고 인정하고 싶지 않는 것입니다. 영적 교만입니다. 메시아로 받아들이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니 매사 시비를 걸고넘어지는 것입니다.
이 때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에 대하여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합니까? 그들의 외식을 지적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인용하고 있습니다(사 29:13). 예수는 그들을 향해 '외식(外食)하는 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헬라어 '휘포크리테스'가 의미하는 바는 자신의 얼굴에 가면을 쓰고 무대에서는 '연극 배우'라는 뜻입니다. 속과 겉이 다른, 이중 인격자 또는 위선자란 의미입니다. 그들의 위선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습니다.
입술로는 하나님을 공경하나 마음은 멀다는 것입니다(사 29:13) 말만 하나님을 섬기지 실제적으로 하나님과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겉모습에 집착하다 보니 마음이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졌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최고로 잘 믿는 사람처럼 말합니다. 그러나 실제 마음은 하나님과 상관이 없습니다. 늘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에 관심을 가집니다. 이것은 마음의 악순환을 계속 낳습니다. 삶이 전진하지 못합니다. 신앙 생활 10년하고 20년을 하도 성장과 성숙이 없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면을 쓰고 살기 때문입니다. 연극 생활을 하고 살기 때문입니다. 교회 와서는 교인 연극을 하고 세상에 가면 세상 사람 연극을 하기 때문입니다. 지나치게 이중적입니다. 간판주의에 사로잡힙니다. 룩히즘에 사로잡힙니다. 지금 바리새인들에게 진정 집착해야 할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약속의 주로 오신 예수님이 바로 자신들 앞에 서있습니다. 예수님께 집착해야 합니다. 죽은 자를 살리시고 각종 질병을 치유하시고 폭풍을 잔잔케 하신 예수님을 메시아로 모시는 것입니다. 그럴 때 그들의 마음의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고 새로운 마음으로 새 인생이 출발되는 것입니다. 우리의 마음에 악순환을 선순환으로 바꾸려면 무엇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진정 메시아, 나의 구주로 모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사람은 외모를 보거니와 나 여호와는 중심을 보느니라 (삼상 16:7)” 사울이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니까 마음의 악순환를 끊어 버리고 예수님을 증거하는 마음으로 선순환 되어 세상을 바꾸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내 마음에 예수님을 최고의 분으로 모시기 바랍니다. 내 주인을 예수님께 내어 주시기 바랍니다. 그러면 인생의 모든 악순환은 끊어지고 화평과 자비, 인내와 양성, 충성과 온유, 절제와 사랑의 마음의 선순환의 열매가 주렁주렁 맺히게 될 것입니다. 가정에 화평이 옵니다. 교회가 사랑으로 풍성해 집니다. 사람 만나는 것이 즐겁습니다. 일하는 것이 의미가 있어집니다. 세상은 살만하게 보입니다. 인생의 비전이 생깁니다. 소망이 꿈틀거리게 됩니다.

2. 둘째는 전통이 아니라 말씀을 마음의 표준으로 삼아야 합니다. /말씀 표준
왜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이 마음의 악순환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까? 그들의 잘못된 표준 때문입니다. 사람이 잘못된 표준을 가지면 악순환의 고리를 벗어나지 못합니다. 돈에 대한 잘못된 표준, 성에 대한 잘못된 표준, 음식에 대한 잘못된 표준을 가지면 얼마나 사람이 비참해 집니까? 바리새인들은 유전에 대한 잘못된 표준을 가지고 집착합니다. 유전이라는 것이 전통이라는 것입니다. 전통이 반드시 나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것은 환경과 시대적인 산물입니다. 그것이 절대적인 잣대가 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판이 바뀌면 변화될 수 밖에 없는 법칙입니다. 한국 사람이 미국에 가서 살면서 한국의 전통을 운운하며 외치면 사람들이 웃습니다. 이조시대 사람이 오늘날에 와서 이조시대의 전통을 운운하며 지킬 것을 외치면 바보입니다. 이제 새로운 시대가 되었습니다. 메시아가 이 땅에 왔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시대의 변화를 애써 외면하는 것입니다. 자신의 기득권을 계속 유지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의 영향력을 계속 행사하고 싶은 것입니다. 자신이 돌보든 아들이 사장이 되었는데도 옛날 회장을 핑게대며 사장의 시대를 외면하고 싶은 것입니다. 새로운 복음의 시대, 메시아의 시대가 왔는데도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바리새인들이 그런 사람들입니다. 모든 것은 다 변합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만은 변하지 않습니다. 그 전통으로 상대방을 정죄하기 시작하면 그것은 하나님을 헛되게 경배하는 것입니다. 7절을 보십시오. 형식이 반복되면 고정된 규범이 생깁니다. 그런데 그것을 바꿀 수 없는 진리처럼 생각하면 안됩니다. 예배 형식을 놓고 과거에 다녔던 교회에서 그렇게 했는데 왜 이러냐고 마음먹기 시작하면 하나님을 진정 예배드리는데 방해가 됩니다. 내 마음 속에 장벽으로 들어서 있는 전통을 넘어설 줄도 알아야 합니다. 밥을 먹을 때 손을 씻는 것 시장에 갔다 와서 물을 뿌리는 것, 잔과 주발을 씨는 것은 본래 성경의 가르침이 아닙니다. 본래 정결 규례의 원천은 제자장들이 성전에 들어갈 때 반드시 물두멍에서 손을 씻고 들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나아갈 때는 거룩한 마음으로 나아가기 위해 상징으로 손을 씻었습니다. 그러니까 손을 씻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손을 씻는 마음입니다. 깨끗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본질을 가르쳐주는 말씀입니다. 예배에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입니까? 사람의 계명, 즉 전통입니까? 유쾌함이 있어야 합니까? 정시에 끝이 나야 합니까? 예배 형식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를 드리는 것입니다. 십자가를 목에 걸고 다니는 것보다 십자가를 지고 사는 삶이 더 중요합니다. 어떤 직분을 받았냐보다 더 중요한 것이 어떻게 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직분이 벼슬이 아닙니다. 봉사를 위한 것입니다. 삶을 위한 것입니다. 목사다워야 하고 집사다워야 합니다. 전통이 말씀보다 앞에 갈 수 없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의 전통으로 무엇을 하는 것입니까? 사람을 죽이려고 하는 것입니다. 말씀의 본질은 무엇입니까? 사랑입니다.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그들의 잘못을 예수님이 한 가지 예로 들어 설명을 합니다. 고르반 제도라는 것입니다. 말씀은 부모를 공경하라는 것입니다. 부모를 모독하면 죽임을 당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들의 전통은 고르반이라는 것을 만들었습니다. 고르반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께 드립니다"라는 뜻이예요. 부모를 봉양해야 할 사람이 "부모님. 제가 부모님 참 돕고 싶지만 고르반했습니다.“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것을 회피하는 수단으로 사용합니다. 이제까지의 모든 전통을 놓아 버리고 말씀을 유일한 표준으로 삶을 때 마음의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지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일 점 일획도 변함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구원에 이르는 지혜를 주고 우리를 온전케 합니다. 우리나라만 해도 일년에 신간도서가 2만 5천 종 이상 나오고 있고 일본은 4만 5천 종 이상 나오고 있습니다. 이것들은 다 가변적입니다. 오직 구원에 이르는 영원한 진리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벤허를 지은 웰레스는 성경 공허와 황당무계한 것을 비난하기 위해, 기독교 불필요성과 모순, 허구성을 드러내기 위해 성경을 연구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는 성경을 읽는 중에 예수님을 구주로 고백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성경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말씀을 표준으로 삼았습니다. 그 인생은 선순환으로 바꾸어졌습니다. 그는 새 사람으로 변화되어 많은 사람의 심금을 울리는 벤허를 지었습니다.
러시아의 대 문호인 도스토예프스키의 아버지는 전직 육군 군의관이었으나 난폭한데다 알콜중독자였습니니다. 툴라라는 지방에 작은 농토를 구입했지만 농노들과 심히 다투다 도스토예프스키가 16살 때 그가 보는 앞에서 살해되었습니다. 이 무서운 충격으로 인해 간질병에 걸렸다고 합니다. 28살 때 반역죄로 사형수가 되었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시베리아 열차에서 장교 부인으로부터 성경을 받았습니다. 감옥 속에서 그 성경을 읽다가 예수님을 만났습니다. 성경을 삶의 표준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인생이 바뀌었습니다. 소망의 신앙이 생겼습니다. 그는 총살 2분전에 황제의 사면령이 내려져 기적적으로 살아나 위대한 기독교 작가가 되었습니다. 성경을 표준으로 삼으면 제 2의 인생이 탄생됩니다. 세상에서 맛볼 수 없는 기쁨을 맛봅니다. 세상이 줄수 없는 평안과 위로를 누리게 됩니다. 예레미야는 렘15:16에서 "내가 주의 말씀을 얻어먹었사오니 주의 말씀은 내게 기쁨과 내 마음의 즐거움이니이다."라고 고백합니다.
성경에 있는 3만 1,173개의 구절 가운데 한 말씀만 붙들어도 우리의 인생은 바뀌어집니다. "천로역정"의 저자 죤 번연은 요한복음 6:37에 의해, 위대한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라는 말씀에 의해, 세계 선교에 앞장섰던 윌리암 캐리는 "네 장막터를 넓히라"고 하신 이사야 54:2의 말씀에 감동을 받아 인생이 바뀌었다고 합니다. `사랑의 아버지'로 불리는 조지 뮬러 목사는 3천명 이상의 고아를 돌보았습니다.
미국의 링컨 대통령도 "하나님이 내게 주신 최고의 선물은 성경이다"라고 말했답니다. 말씀을 표준으로 삼은 페스탈로치는 전쟁 후 고아들의 교육에 헌신한 스위스의 위대한 교육자였습니다. 성경을 보십시오. 시편 19편 7-11절을 보십시오. 여호와의 율법은 우리의 영혼을 소성케 합니다. 우둔한 자로 지혜롭게 합니다. 마음을 기쁘게 합니다. 순결하게 합니다. 이것을 지키며 큰 상을 받습니다. 그러므로 정금보다 사모할 것입니다.

3. 철저하게 회개하고 자기 변혁을 하여야 합니다./ 회개
왜 이렇게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 마음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지 못하고 있습니까? 예수님이 그렇게 말씀해도 회개하고 돌이키지 않는 것입니다. 겉모습은 그럴듯한데 회칠한 무덤이 그들의 마음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성결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거룩한 삶의 본질에 대하여 말씀합니다. 14절을 보십시오. 예수님은 이제 청중을 불러 말씀합니다. 내적 성결이라는 대주제를 설파하기 위해 경청하라고 요청하는 것입니다. 진정 사람을 부정하게 만드는 것은 물로도 씻을 수 없는 사람의 마음에 있다는 것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참으로 부정한 것은 자기 안에 있다는 것입니다.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부정한 것이 밖에 있는 양 정결 예법에만 관심하면서 자기가 가지고 있는 부정한 마음을 은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들과의 만남을 통하여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 예수님의 제자들에게 마음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마음의 문제이고 그것은 그 더러운 마음을 바꾸는 것밖에 없다는 것을 알려 줍니다. 철저한 자기 회개, 자기 변혁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 주는 것입니다. 정결이라는 것은 가시적인 의식(儀式)으로 되는 것이 아니라 속 사람 곧 그 사람의 인격과 양심과 영혼의 철저한 개혁을 통해 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15절을 보십시오. 입으로 들어가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게 하지 못하고 오히려 입에서 나오는 것이 그 사람을 더럽게 한다는 것입니다. 마음이 변혁되지 않으면 아무리 겉포장을 한다해도 더러운 것들이 뛰어 나오게 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을 할 때 제자들이 이해를 하지 못합니다. 17절 이하를 보십시오. 집에 갔을 때 제자들이 물어 봅니다.
사람이 먹어서 들어간 것은 배를 통해 다시 배설됨으로써 마음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는 말입니다. 손을 씻고 먹었든 안 씻고 먹었든 그것이 사람의 마음에 영향을 주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마음'은 인간활동의 근본입니다. '지. 정. 의'의 좌소(坐所)입니다. 비물질적인 것입니다. 이것은 어떻게 음식이 더럽게 하겠습니까? '마음'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도덕적, 영적 측면에서 더럽혀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마음이 사람의 감정이나 사상 또는 생각, 행동의 근저입니다. 인격의 중심입니다. 그런데 이 마음이 어떻다는 것입니까? 근본적으로 악하다는 것입니다. 12가지를 들어 말씀합니다(롬 1:29-31;갈 5:19-21)
십계명의 제6. 7. 8. 9계명을 말씀합니다. 6계명인 살인과 관계된 살인, 악독, 흘기는 눈, 훼방, 교만, 광패(狂悖)을 말씀합니다. 사람을 향한 파괴적 언어와 행동을 말씀합니다. 악의적인 비웃음과 빈정거림, 시기, 신성 모독적인 욕설과 험담, 도덕적 판단력이 결여된 사람의 어리석음 등을 말씀합니다. 7계명인 간음과 관계된 음란, 간음, 음탕을 말씀합니다. 성적 범죄를 말씀합니다. 부정한 성관계, 부끄럼을 모르는 성범죄를 말합니다. 8계명에 속한 도적질, 제 9계명에 속한 속임 제 10계명에 속한 탐욕을 말씀합니다. 인간에 대한 계명 중 6계명은 앞에서 언급했고 지금 예수님은 모두 다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 모든 조항들이 사람의 마음으로부터 나오는 부정한 것의 '모두'라고는 할 수 없을 것입니다. 다만 사람을 더럽게 하는 모든 것이 인간이 품은 마음에 있음을, 그리고 모든 부정의 원천은 사람의 마음에 있음을 강조하기 위해서 대표적으로 예시된 것일 뿐입니다. 결론적인 것은 참으로 부정한 것은 사람의 마음속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형식적인 정결 예식을 통해서 부정이 깨끗하게 되는 것이 아니며 손을 씻지 않고 먹는 음식이 사람을 더럽게 하지도 못한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정결하게 하는 것은 손을 씻고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라 마음의 근본적 변혁인 회개뿐이라는 것입니다(욜 2:13). 하나님은 말씀합니다. “너희는 옷을 찢지 말고 마음을 찢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로 돌아올지어다 그는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기를 더디하시며 인애가 크시사 뜻을 돌이켜 재앙을 내리지 아니하시나니 (욜 2:13)”
마음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는 것은 바로 내 마음의 부패함을 인정하고 우리 주님께 나와 주님 저는 어쩔 수 없는 존재입니다. 내 마음 나도 어찌할 수 없습니다. 전적으로 부패해 있습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하여 철저하게 깨닫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돌이켜 주님께서 원하는 삶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거울과 같습니다. 주님을 보면 나의 띠끌과 연약함, 죄악을 볼 수밖에 없습니다. 그 때 우리가 마음의 악순환의 고리를 끊고 선순환으로 회복될 수 있는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회개하는 것입니다. 사울이 철저히 회개하고 선순환의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간음한 다윗이 철저히 회개하고 선순환의 인생을 살았습니다. 살인한 모세가 회개하고 40년 광야 훈련을 통해 선순환의 인생으로 살았습니다. 그러나 사울은 그렇지 못했습니다. 회개하지 않습니다. 끝까지 돌이키지 않습니다. 그결과 자신과 자신의 가족까지 비참하게 되었습니다. 마음 수리를 해야 합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십시오. 회개할 때 민족이 살아났습니다. 교회의 역사도 가정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1907년 우리나라 교회사에 대 부흥운동이 일어났습니다. 그 시발점은 1903년 원산의 남감리교 선교사 하디의 회개에서부터 시작되었다합니다. 선교사들은 한국에 처음 왔을 때 악취나는 토속적인 음식을 마다하지 않았고 오두막집에서 새우잠을 자며 겸손하게 전도하였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들은 한국인들 위에 군림하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선교사들의 사역은 힘을 잃고 선교는 열매를 맺지 못하였습니다. 하디 선교사는 이런 현실을 놓고 하나님 앞에 자기의 잘못을 회개하였던 것입니다. 이런 회개의 불길은 계속 이어지다가 1907년 평양 장대현 교회에서 열린 집회에서 절정을 이루었답니다. 당시 한국 교회의 가장 유명한 설교가였던 길선주 장로님이 회개하였답니다. 그는 친구의 유산 일부를 횡령했음을 고백했습니다. 당시 장대현 교회에는 조사 강씨와 장로 김씨 사이에 큰 갈등이 있었습니다. 먼저 조사 강씨가 자기가 김 장로를 미워했다고 고백하며 용서를 구했습니다. 김 장로가 일어나서 자기는 강 조사를 미워했을 뿐만 아니라 자기 교회의 목사인 선교사 방위량을 극도로 미워했다고 고백하였습니다.

2007년 6월 24일/열린교회/김필곤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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