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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니 가로되 "주여 주께서 내 발을 씻기시나이까"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 베드로가 가로되 "내 발을 절대로 씻기지 못하시리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를 씻기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요한복음 13:6-8)
대전시내를 다니다 보니 어떤 교회 앞에 "대전 시민을 예수님처럼 섬기는 교회" 라는 표어와 함께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을 커다랗게 그려서 붙여놓은 교회가 있더군요.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 같이 우리도 대전 시민들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요 대전 시민들의 발을 씻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뜻인지? 그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면 대전 시민들이 "아이고 고마워라!" 하면서 그 교회에 출석해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그런데 미안하지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봉사, 섬김, 종의 모습 같은 것과는 과는 전혀 다른 의도였습니다.
요한복음은 4복음서이기는 하지만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다른 서로 상반된 내용이 많은 독특한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가리켜 영생복음, 생명복음 이라고도 합니다.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간추려 적은 기록이라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기록하면서도 '영적 생명'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요한복음을 대강 요약하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1:1-18 서론 부분
1:19- 12:36 전반부 -무리들에게
12:37-21:25 후반부 -제자들에게
전반부의 사역은 이 땅에서 기적을 행하시면서 많은 무리들을 대상으로 진리를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일이라든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용서해 준 사건 등등 많은 민중들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후반부의 사역은 많은 민중들을 물리치시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상대하여 가르치신 부분입니다. '유월절 전날이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셨다'.(현대인의성경 요한복음 13;1)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일을 끝내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 다시 말해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요한복음12:23)'가 드디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제자들을 한군데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비밀'을 풀어놓으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전반부에 기적을 보며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 베푸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요한복음 12:37)고 했습니다. 많은 무리를 자랑할 것이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을 때 '비밀'을 말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만 은밀히 '비밀'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물리치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비밀'을 말하기 이전에 첫 번째로 발씻기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야 했는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발씻기는 사건은 오늘날과 같이 전혀 다른 뜻으로 오해되어 전혀 상관도 없는 '겸손과 섬김의 상징' 어쩌고 헛소리를 하면서 냄새나는 남의 발이나 닦는 의식에 사용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관계성'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식사를 하시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시다니요." 하면서 황송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제스츄어를 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내 발을 지금 씻으려고 하니 얼마나 민망스럽고 황송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무어라 합니까?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 몰라도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 듯 "안됩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합니다. 어떻게 스승님이 제자의 발을 씻는단 말입니까. 제가 스승님의 발을 씻어드린다면 몰라도..."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한 표정으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발씻겨 주심을 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려 하는데 염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선생님! 저녁 잡수시다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황송하게, 이런 일은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발을 내 놓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타당하고 당연한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상식적인'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보이는 이 세상 이후의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이 세상적인 상식에 의해 판단하고 이해하려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당연한 일이지요. 이 영적인 관념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세족식을 세상 상식 선에서 이해를 하면 '겸손과 섬김' 어쩌고가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몰라도 한참 몰루는구나" 하는 소릴 듣기 십상이지요.
베드로가 세족식을 세상의 상식선 에서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은 바로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만 바라보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3년반 동안 예수를 따라다닌 결과가 예수님의 속은 전혀 모른 채 예수님의 껍데기만 보았다는 말입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7절) '이제는(지금은) 알지 못하나'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발을 안 씻겠다고 하지말고 모르면 잠자코 내가 하는 대로 가만있어라. 이것이 예수님의 주문입니다.
"이제는 네가 알지 못하나"(13:7) - 여기 '이제는'이 원어로 아르티 입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뜻인데. 내가 서 있는 신앙의 위치, 수준 이라는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내 신앙의 수준이라는 게 '육체적인' 예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발씻음 사건을 섬김, 종노릇, 겸손등으로 떠벌리고 있고 또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자며 교회 안에서 소위 세족식이라는 행사를 자랑하듯이 거룩하게 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13:7) - 예수님이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나? 그 행위를 통해 무엇인가 굉장히 심각한 멧세지를 전하시려고 했던게 아닌가? 맞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 "주님! 안됩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합니다."(13;8)
'절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톤 아니오나'인데 '영원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무어라 하셨습니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13:9) '상관'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로스'는 나에게 돌아올 분깃, 몫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몫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몸이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몫을 주시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주시지 않으면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아무관계도 아닙니다. '메로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는다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정적인 관계성 문제를 하필이면 발씻는 사건으로 나타내셨을까요?
유대인의 관습 중에서 발씻긴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눅7;44-47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바로 이 말씀이 영접의 문제를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손님이 집에 들어올 때에 영접의 한 형식으로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창18:4, 19:2, 24:32). 좀 더 부유한 집에서는 집에 오는 손님들의 신발끈을 풀어주고 발을 씻어주는 종 하나가 입구에 대기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영접은 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택한자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관계성은 무엇으로 맺어진 관계냐 하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곧 영접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생활은 청함 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청함 받은 상태가 모두 택한자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아니라"(13;10)
구약이 신약의 그림자요 모형이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은 택함 받은 자녀들에게 보여주시는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나의 택한자가 되려면 반드시 나에게 발을 씻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그림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접입니다. 그런데 이 영접은 청함 받은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이후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자리에 앉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13:12절)
"내가 이 일을 미리 너희에게 일러 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13:19절) 내가 그인데,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언제 착각을 일으키느냐? '일이 이룰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그 사건을 통해서 내가 바로 '그'가 되는데 그때 너희가 착각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지금 미리 너희에게 알려준다. 즉, 육신으로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그 다음에 일이 이루어져 다시 올 때(이 사실은 재림 예수로 보면 됩니다.) 그분이 그때 택함 받는 백성에게 발씻기는 영접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이 이룰 때가 언제일까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에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14:3)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계시다가 어디론가 가십니다. 왜 가시는가 하면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서 가십니다. 그리고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과 우리가 같이 있게 됩니다. 이 사실이 요13:19절의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한다"는 비밀입니다. 7절의 "이후에는 알리라"입니다. "이제는" 보다는 "이후에는"에 초점을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택함은 일이 이룬 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때 영접(발씻음)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청함 받은 후에 십자가의 고난도 통과하지 않은 채, 예복도 이지 않은 채, 훈련의 삶도 없이, 청함 받은 사건을 '택함'받은 사건으로 오해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14:3절의 일이 예수그리스도의 끝까지 사랑입니다. 그분의 끝까지 사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겉으로는 영접의 의미로 발을 씻겼고, 실질적인 영적 의미는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입니다.
이같이 결정적인 세족식 사건을 '섬김'이니 '종의 모습'을 보여 준다느니, '겸손이니' 하면서 잘 못 생각하는 것이야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지만, 그걸 믿고 따라가며 남의 꼬랑내 나는 발을 씻기고 앉아 있는 불쌍한 영혼들은 우얄꼬.
최용우 2001.6.10
대전시내를 다니다 보니 어떤 교회 앞에 "대전 시민을 예수님처럼 섬기는 교회" 라는 표어와 함께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기시는 모습을 커다랗게 그려서 붙여놓은 교회가 있더군요.
예수님께서 겸손하게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것 같이 우리도 대전 시민들의 발을 씻어주는 섬김의 역할을 하겠다는 뜻 아니겠습니까?
그런데요 대전 시민들의 발을 씻어서 어떻게 하겠다는 뜻인지? 그 냄새나는 발을 씻어주면 대전 시민들이 "아이고 고마워라!" 하면서 그 교회에 출석해줄 것이라는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 그런데 미안하지만 예수님이 베드로의 발을 씻어주신 것은 봉사, 섬김, 종의 모습 같은 것과는 과는 전혀 다른 의도였습니다.
요한복음은 4복음서이기는 하지만 다른 세 복음서와는 다른 서로 상반된 내용이 많은 독특한 복음서입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을 가리켜 영생복음, 생명복음 이라고도 합니다.
공관복음이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간추려 적은 기록이라면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지상사역을 기록하면서도 '영적 생명'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래서 요한복음의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신성'입니다.
요한복음을 대강 요약하면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눌 수가 있는데
1:1-18 서론 부분
1:19- 12:36 전반부 -무리들에게
12:37-21:25 후반부 -제자들에게
전반부의 사역은 이 땅에서 기적을 행하시면서 많은 무리들을 대상으로 진리를 말씀하시는 부분입니다. 예를 들면 6장에서는 오병이어의 기적을 베푸신 일이라든가, 소경의 눈을 뜨게 한 사건, 간음하다가 잡힌 여자를 용서해 준 사건 등등 많은 민중들 속에서 일하시는 예수님의 모습입니다.
후반부의 사역은 많은 민중들을 물리치시고 오직 제자들에게만 상대하여 가르치신 부분입니다. '유월절 전날이었다. 예수님은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실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이 세상에서 사랑하시던 제자들을 끝까지 사랑해 주셨다'.(현대인의성경 요한복음 13;1) 그러니까 이제 예수님이 이 땅에서의 일을 끝내시고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 다시 말해서 '인자의 영광을 얻을 때(요한복음12:23)'가 드디어 되었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사랑하던 제자들을 한군데 모아놓고 마지막으로 제자들에게 '비밀'을 풀어놓으신 것이라 이 말입니다.
전반부에 기적을 보며 예수님을 따라 다녔던 많은 무리들은 '예수님이 그렇게 많은 기적을 사람들 앞에 베푸셨으나 그들은 예수님을 믿으려 하지 않았다.'(요한복음 12:37)고 했습니다. 많은 무리를 자랑할 것이 절대로 아니란 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도 많은 무리들이 모여 있을 때 '비밀'을 말한 것이 아니라 소수의 예수님을 따르던 제자들에게만 은밀히 '비밀'을 말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무리들을 물리치시고 제자들에게 마지막 '비밀'을 말하기 이전에 첫 번째로 발씻기는 의식을 행하셨습니다. 예수님이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야 했는가 그 이유를 알지 못하면 발씻기는 사건은 오늘날과 같이 전혀 다른 뜻으로 오해되어 전혀 상관도 없는 '겸손과 섬김의 상징' 어쩌고 헛소리를 하면서 냄새나는 남의 발이나 닦는 의식에 사용된다 이 말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관계성'의 문제였습니다. 예수님이 식사를 하시다 말고 자리에서 일어나 겉옷을 벗고 수건을 가져다가 허리에 두르시고 대야에 물을 떠서 제자들의 발을 씻기 시작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베드로는 "주님께서 제 발을 씻기시다니요." 하면서 황송해서 몸둘바를 모르겠다는 제스츄어를 했을 것입니다. 맞습니다. 나보다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내 발을 지금 씻으려고 하니 얼마나 민망스럽고 황송한 일입니까.
그런데 예수님이 무어라 합니까? "내가 하는 일을 네가 지금 몰라도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 베드로는 그 말은 귀에 들어오지도 않은 듯 "안됩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합니다. 어떻게 스승님이 제자의 발을 씻는단 말입니까. 제가 스승님의 발을 씻어드린다면 몰라도..." 그러자 예수님은 단호한 표정으로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 상관이 없는 사람이다"
베드로는 지금 예수님의 발씻겨 주심을 사양하고 있는 것입니다. 스승이 제자의 발을 씻기려 하는데 염치 있는 사람이라면 당연히 "선생님! 저녁 잡수시다가 갑자기 왜 이러십니까? 황송하게, 이런 일은 도의상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 저는 선생님에게 발을 내 놓을 수 없습니다" 하고 대답하는 것은 상식적으로 타당하고 당연한 태도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예수님은 '상식적인'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말하면 이 세상 사람들에게 이해가 되고 납득이 되는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게 아니라, 보이는 이 세상 이후의 일을 하시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니 보이는 이 세상적인 상식에 의해 판단하고 이해하려는 베드로가 예수님의 행위를 이해하지 못한 것도 어쩌면당연한 일이지요. 이 영적인 관념의 차이는 엄청난 것입니다. 오늘날도 예수님의 세족식을 세상 상식 선에서 이해를 하면 '겸손과 섬김' 어쩌고가 되겠지만 그러나 "내가 하는 일을 지금은 네가 몰라도 한참 몰루는구나" 하는 소릴 듣기 십상이지요.
베드로가 세족식을 세상의 상식선 에서 이해하려고 했다는 것은 바로 육신을 입고 계신 예수만 바라보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3년반 동안 예수를 따라다닌 결과가 예수님의 속은 전혀 모른 채 예수님의 껍데기만 보았다는 말입니다. "나의 하는 것을 네가 이제는 알지 못하나"(7절) '이제는(지금은) 알지 못하나' 여기에 의미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알지도 못하면서 발을 안 씻겠다고 하지말고 모르면 잠자코 내가 하는 대로 가만있어라. 이것이 예수님의 주문입니다.
"이제는 네가 알지 못하나"(13:7) - 여기 '이제는'이 원어로 아르티 입니다. '바로 지금'이라는 뜻인데. 내가 서 있는 신앙의 위치, 수준 이라는의미입니다. 그러니까 내 신앙의 수준이라는 게 '육체적인' 예수만 바라보면서 예수님의 발씻음 사건을 섬김, 종노릇, 겸손등으로 떠벌리고 있고 또한 우리도 예수님과 같이 하자며 교회 안에서 소위 세족식이라는 행사를 자랑하듯이 거룩하게 행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후에는 알게 될 것이다"(13:7) - 예수님이 왜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셨나? 그 행위를 통해 무엇인가 굉장히 심각한 멧세지를 전하시려고 했던게 아닌가? 맞습니다. 베드로가 한 말 "주님! 안됩니다. 제 발은 절대로 씻지 못합니다."(13;8)
'절대로'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에이스톤 아니오나'인데 '영원히'라는 의미입니다. 예수님이 무어라 하셨습니까? "내가 너를 씻어주지 않으면 너는 나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13:9) '상관'에 해당하는 헬라어 '메로스'는 나에게 돌아올 분깃, 몫을 말합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나의 몫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몸이고 우리는 그 몸의 지체입니다.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것은 제자들에게 자신들의 몫을 주시려고 그러는 겁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나의 발을 씻겨주시지 않으면 예수님과 나와의 관계는 아무관계도 아닙니다. '메로스'라는 단어는 우리가 하나님의 유업을 상속받는다 사용하는 단어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결정적인 관계성 문제를 하필이면 발씻는 사건으로 나타내셨을까요?
유대인의 관습 중에서 발씻긴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가리키는 것인지 눅7;44-47을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여자를 돌아보시며 시몬에게 이르시되 이 여자를 보느냐 내가 네 집에 들어오매 너는 내게 발 씻을 물도 주지 아니하였으되 이 여자는 눈물로 내 발을 적시고 그 머리털로 씻었으며 너는 내게 입맞추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내가 들어올 때로부터 내 발에 입맞추기를 그치지 아니하였으며 너는 내 머리에 감람유도 붓지 아니하였으되 저는 향유를 내 발에 부었느니라. 이러므로 내가 네게 말하노니 저의 많은 죄가 사하여졌도다 이는 저의 사랑함이 많음이라 사함을 받은 일이 적은 자는 적게 사랑하느니라"
바로 이 말씀이 영접의 문제를 나타내고 있는 말씀입니다. 고대 근동에서는 손님이 집에 들어올 때에 영접의 한 형식으로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창18:4, 19:2, 24:32). 좀 더 부유한 집에서는 집에 오는 손님들의 신발끈을 풀어주고 발을 씻어주는 종 하나가 입구에 대기하고 있기도 했습니다.
이 영접은 어떤 관계에서 일어나느냐 하면 그리스도와 택한자의 관계에서 일어납니다. 그런데 이 관계성은 무엇으로 맺어진 관계냐 하면 사랑으로 맺어진 관계입니다. 곧 영접의 문제는 사랑의 문제입니다.
지금 우리의 교회생활은 청함 받은 상태입니다. 그런데 이 청함 받은 상태가 모두 택한자로 연결되는 것은 아닙니다. "너희가 깨끗하나 다는아니라"(13;10)
구약이 신약의 그림자요 모형이듯이 예수님이 제자들의 발을 씻겨 주신 것은 택함 받은 자녀들에게 보여주시는 모형입니다. 그러니까 네가 나의 택한자가 되려면 반드시 나에게 발을 씻어야 된다는 것을 가르쳐 주시는 그림자입니다. 바로 이것이 영접입니다. 그런데 이 영접은 청함 받은 상태에서는 일어나지 않습니다."이후에" 일어납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신 후에 옷을 입으시고 다시 자리에 앉아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13:12절)
"내가 이 일을 미리 너희에게 일러 주는 것은 그 일이 일어날 때 내가 바로 그 사람이라는 것을 너희가 믿도록 하기 위해서이다."(13:19절) 내가 그인데, 그런데 그것도 모르고 착각을 일으킬 수 있다. 언제 착각을 일으키느냐? '일이 이룰 때' 어떤 일이 일어나는 그 사건을 통해서 내가 바로 '그'가 되는데 그때 너희가 착각을 일으킬지도 모르니까 지금 미리 너희에게 알려준다. 즉, 육신으로 오셔서 제자들에게 말씀하시던 예수님이 그 다음에 일이 이루어져 다시 올 때(이 사실은 재림 예수로 보면 됩니다.) 그분이 그때 택함 받는 백성에게 발씻기는 영접의 일을 하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일이 이룰 때가 언제일까요?
"가서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에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한복음14:3)
예수님은 이 땅에서 계시다가 어디론가 가십니다. 왜 가시는가 하면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시기 위해서 가십니다. 그리고 처소를 예비하면 다시 오셔서 우리를 영접하십니다. 그래서 그분과 우리가 같이 있게 됩니다. 이 사실이 요13:19절의 "일이 이루기 전에 너희에게 미리 말한다"는 비밀입니다. 7절의 "이후에는 알리라"입니다. "이제는" 보다는 "이후에는"에 초점을 맞출 줄 알아야 합니다.
택함은 일이 이룬 후에 일어납니다. 그리고 이때 영접(발씻음)사건이 일어납니다.
그런데 오늘날 기독교인들은 청함 받은 후에 십자가의 고난도 통과하지 않은 채, 예복도 이지 않은 채, 훈련의 삶도 없이, 청함 받은 사건을 '택함'받은 사건으로 오해한단 말입니다.
요한복음 14:3절의 일이 예수그리스도의 끝까지 사랑입니다. 그분의 끝까지 사랑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 겉으로는 영접의 의미로 발을 씻겼고, 실질적인 영적 의미는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입니다.
이같이 결정적인 세족식 사건을 '섬김'이니 '종의 모습'을 보여 준다느니, '겸손이니' 하면서 잘 못 생각하는 것이야 하나님이 판단하실 일이지만, 그걸 믿고 따라가며 남의 꼬랑내 나는 발을 씻기고 앉아 있는 불쌍한 영혼들은 우얄꼬.
최용우 2001.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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